오펄드림
포비와 딩언이라는 보이지 않는, 자신의 마음 속에만 존재하고 있는 동생이 있다면 어떨까. 세간의 평가에 따른다면, 정신과 치료를 필요로 하겠지만, 영화속 오빠, 애쉬몰은 동생의 보이지 않는 그 세계를 인정하고, 함께 그 아픔에 동참함으로 동생을 치유해낸다. 캘리엔(동생)의 상상 속에 살고 있던 포비와 딩언의 장례식을 치르던 날, 결국 마을엔 다시 평화가 찾아오니 그들이 평화주의자였는 켈리엔의 말은 틀리지 않았을런지도 모른다.
사실 스토리라인만 따지자면 뻔하디 뻔한 스토리. 그렇지만 이 영화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이야기는 그리 가볍지는 않다. 보이지 않는 것, 설령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확실한 것이라 해도,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일의 놀라운 힘.
실존하지 않는 존재이긴 하나, 켈리엔은 그들을 마음 속에서 떠나보내야했으니, 장례식이라는 절차는 매우 온당한 것이다. 그리고, 그 곳에서 함께 해준 수많은 사람들. 상상 속 존재의 장례식이라는 매우 비이성적인 행위에 동참한 그들이 보여준 것은 사랑이고, 화해였다. 여기서 우리는 화요일마다 함께해 주시던 모리 아저씨의 말을 떠올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사랑이야말로 유일하게 이성적인 행동이다
평화주의자 포비와, 아주 예쁜 딩언!
금발의 초원
(이건 쫌 스포일러)
어느 날 눈을 떴는데, 내 친구들이 모두 죽었다면? 친구라고 나를 찾아온 녀석은 호호할아버지가 됐고, 그 할아버지 옆에 있는 이쁘장한 할머니가, 지금 내가 사랑하는 그녀, 마돈나라고? 그러니까 나는 여기 그대로 있는데, 나는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그 어떤 곳에서 나의 미래를 만나고 있다. 그것도 내가 원하지 않는 미래를. 어떤 기분이 들까?
이누도잇신 감독은 치매 이야기마저 노인의 시선으로, 혹은 노인들의 문제로 풀어나가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 여기, 내가,어느 날 갑자기 저런 당혹스러움을 맞이한다면 어떤 느낌일까,를 더욱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런 현실감을 위해서인지, 감독은 남자 배우, 그러니까 팔십이 넘은 호호할아버지 역에 과감히 젊은 배우를 기용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는 스무살의 할아버지를 만나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저 스무살의 할아버지는 서른살의 내가 될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그것을 나의 미래가 아닌, 나의 현재로 가정하게 하는 놀라운 힘을 지녔다.
영화속 주인공은 자신의 현실을 결국 받아들이지 못한다. 스무살의 나는 꿈이고, 여든살의 내가 현실인데, 꿈속의 스무살 내가 여든살 현실의 나를 받아들이지 못해 죽음을 택한다. 지붕에서 떨어지면서 이게 꿈이면 살겠고, 현실이면 죽겠지,라고 이야기한다는 건, 자신은 여든살의 자신을 받아들일 의지가 없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적어도 그에게는 그의 몸이 아닌 마음의 자아인 스무살 자신이 현실인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무엇이 꿈이고, 또 무엇이 현실이었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