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 챙겨봤다. 아. 놓쳤으면 어쩔뻔했을까.
영화마케팅상, 포스터처럼 로맨틱한 부분을 강조했을 필요가 있었던 것을 이해는 할 수 있지만, 그 부분을 바라고 간 관객들은 조금 실망스러웠을지도 모른다. 이 영화가 힘주어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다른 것이었으니까.
이전에 엠네스티에서 인권 관련 강의를 들었을 때, 인권의 유린이 이루어지는 방법에 대해 들었던 것이 기억나는데, 그것의 핵심은 전문화, 분업화를 통해 최대한 그것을 행하는 사람이 그것에 대해 가책을 느끼지 않도록 하는 데 있다는 것이었다.
영화 속 한나는 그녀의 행동에 대해, 직업이 필요했고, 그래서 아우슈비츠의 '감시원'이 되었고, 돈을 받기 위해 그 직업적 의무에 충실했을 뿐이라 항변한다. 아니, 항변이라 보기도 어렵다. 적어도, 그녀의 지각 안에서는,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그녀의 임무는 수감자들을 감시하는 것이었고, 새로운 수감자가 들어오면 10명씩 가스실로 보내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사람이 죽어간다는 것은 none of her business. 그녀의 책임은 수용소를 적정하게 유지해나가는 것이었고,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면, 수용소가 좁기 때문에 사람들을 가스실로 보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 폭격을 맞은 교회의 문을 열면 사람들이 도망을 가기 때문에 감시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기 위해 문을 잠글 수 밖에 없었다. 그녀에게 돌아올 처벌이 두려운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것은, 그녀의 일이었을 뿐이다. 그녀의 그러한 이야기는 우리를 멍-하게 만든다. 죄에 대한 자각 없는 삶, 무딘 양심이라는 것이 이런 무서운 결과를 낳을 수 있구나, 라는 것, 그런데 이건 정말이지, 너무 크고 구조적인 문제라, 도무지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 건지. (그녀에게 책임이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녀를 바라보던 마이클의 그녀를 향한 심정은 매우 복합적이다.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는 있지만, 함부로 그녀의 편에 설 수가 없다. 만약 마이클이 유태인이었다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질 수 있었겠지만, 같은 독일인이기에, 오히려 더 이해나 용서를 이야기하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사실 이런 경우에 누군가를 인간적으로 이해한다는 것과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모순적으로 존재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반드시 옳은 것이 감정적으로도 앞서게 되는 것만은 아니기에, 그리고 또 그게 객관적 잣대로는 옳을지 모르겠지만, 삶의 총체적 영역에서 바라보게 된다면, 반드시 옳다고 말하기는 어렵기에, 나 역시 조금은 미묘한 감정으로 그녀를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이 영화가 가진 힘은 바로 그 무엇도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는, 그리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그 미묘한 마음을 여운으로 길게 가져가도록 하는 데 있다. 이 영화는 섣불리 용서도 화해도 말하지 않는다. 쉽게 반성을 이야기함으로써 그들의 반성을 값싼 것으로 만들지도 않고, 이해를 구하며 그 일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무마하려 하지도 않는다. 다만, 이런 실수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고, 소원하며, 책을 보내듯, 그렇게 아이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그녀의 이야기를 들려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