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에 명반을 쏟아내었던 영국의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 Yes의 가수였던 존 앤더슨의 공연을 보았다.

공연 당일에 백밴드가 미국의 음악 학원 학생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당황했다. 어쩐지 티켓값이 싸더라... 연주는, 그러므로 크게 기대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다행히도 존 앤더슨의 목소리는 78세라는 나이를 잊게 했다. 경이로웠고 고음에서는 쇳소리가 났다. Yes의 음악을 Yes 멤버(단 한 명이었지만)의 연주로 듣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존 앤더슨의 목소리가 너무 짱짱했던 지라 그가 은퇴할 때까지 계속 쫒아다닐지도 모르겠다. 공연이 끝나고 나서 나도 아내도 Yes의 음악만 듣는다.  



이번 공연의 하일라이트이자 Yes의 명곡 중 하나인 Close to the edge 라이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버전이다. 연주자들의 거침, 열정, 자기 탐닉이 곡의 통일성과 주제(스피리추얼 저니)를 전혀 방해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매번 놀란다.   


(영국에 처음 와서 어학원을 다닐 때였다. 20대 초반인 어학원 선생님에게 예스를 아느냐고 물었었다. 내게 영국은 예스의 나라라고. 그 분은 자기 핸드폰 음악 앱에서 케이 팝과 제이 팝 걸그룹 목록을 죽 보여주었다. 알아? 글쎄... 한 두 그룹은 알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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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Paperback)
Yasmina Reza / Faber & Faber / 199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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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작가가 쓴 코메디. 입소문을 따라서 나도 읽어보았다. 세계 각국어로 번역되어 상연되었고, 유튭에서 한국어판 연극으로도 감상할 수 있다. 


크게 보면 세 친구 사이의 우정에 대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친구들 중 하나가 거금을 치르고 그림 하나를 사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 그림이 거의 단색의 한 화면만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 문제의 단초가 된다. 허영에 빠져 저런 쓰레기에 거금을 쓴 것인가? 


읽으면서 계속, 너무 프랑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지 명확히 규정하기도 어려운 애매한 뉘앙스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말싸움을 벽 뒤에서 듣고 있어야 하는 상황. 그 지리멸렬을. 그런 애매한 뉘앙스들의 뒤에 무엇이 놓여 있을까? 나는, 살인이 벌어지는 것으로, 아니면 그림을 파괴하는 것으로 결말이 나겠지 하며 작품을 읽었고, 작가는 많은 관객들이 이런 결말을 예상할 것을 짐작하고 결말을 살짝 비튼다. 물론 이런 비틈 자체에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이 연극은 현대 회화에 대한 것도 아니고, 친구들 사이의 힘의 관계---푸코를 불러오든 헤겔을 불러오든---에 대한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둘은 이 연극의 기술적 장치들에 불과하다. 현대 회화니 철학이니 하는 이런 요소들이 이 연극을 심오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그런데 관심을 가진 나같은 사람을 낚기도 하겠지만...)


내가 보기에 이 연극은 뉘앙스들에 대한 것이다. 그러므로 뉘앙스가 실체적 힘을 갖고 나타나는 모든 현상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가볍게, 음... 프랑스적 삶에 대한 자기 성찰 아닌가, 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현대인들의 편집증적인 삶의 양태들에 대한 기술일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 나는 후자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그의 그 눈빛이 나를 절망으로 이끌었다. 그의 그 눈빛은 무엇이었을까? 경멸이었을까? 그가 그때 지었던 그 눈빛이 경멸의 눈빛이었는지 누가 확인해 줄 수 있을까? 혹 나의 피해망상의 결과는 아닐까? 그렇더라도 그런 눈빛에 정신적 고통을 겪고, 삶의 일부를 부정당할 사람도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그런 눈빛으로부터 나를 보호할 제도나 법이 필요하지 않는가? --- 아마 현대의 필연적 발명품 중 하나는 법적, 제도적으로 규율되기 힘든, 이런 무수한 뉘앙스의 공간들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다시금, 모던의 조건, 혹은 포스트모던의 조건에 대해 생각해봐야 할 때일런지도 모르겠다. 


(한국에서, 어느 초등학교 교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뉴스를 보았다. 사회적으로 이슈화되는 사건들은 곧잘 이념화된다. 아동인권조례의 폐기나 교사에 대한 일정한 면책 조항의 도입을 촉구하는 것 등은 그런 이념화의 시발로 보인다. 그러나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문제들이 법이나 제도로 쉽게 규율될 수 없는 영역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즉, 뉘앙스의 공간에서. 그것은 폭력이었을까? 그것은 낙인이었을까? 그것은 학대였을까? 그걸 가지고 규율을 어겼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 사람들은 과연 진상 학부모였을까? 등등. 문제삼지 않으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지만, 일단 문제가 되면 그것은 결코 쉽게 떨쳐낼 수 없는 견고하고 완고한 실체가 되어 버린다. 물론 답은 없다. 이런 것들이 우리를 조건짓는, 현대성의 한 양상일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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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워털루에서 공연장이 있는 그리니치까지 배를 타고 갔다. 그리니치 사시는 분이 공연 시간까지 그리니치 여기 저기를 안내해주셨다.

피터 가브리엘의 나이가 나이인만큼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는데, 연주도 좋았고, 피터 가브리엘의 보컬도 좋았다.

곡의 절반은 신곡이었다. 대중적인 곡들로 셋리스트를 가득 채울 수도 있었을 것이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다. 

아마 피터 가브레엘은 세상에 뭔가 할 이야기가 있어 신보를 내고 공연을 재개한 것이리라. (그의 신보를 사지는 않았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져갈 뿐이다라고 누가 얘기했다 하던가? 이 말이 정확히 어떤 뜻인지는 모르겠다는데, 문득 이 말이 떠올랐다. 근년에 제프 벡이나 예스의 베이스 주자 크리스 스콰이어같은 사람들이 타계하였다. 이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드는 생각은, 어, 작년까지만 해도 연주를 했었는데? 하는 것이었다. 오전까지 활동하다가 오후에 죽는 것, 이런 삶은 참으로 이상적인 삶일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다시 말하면, 누구도, 심지어는 죽음도 누구에게, 이제 거기서 멈추세요, 라고 말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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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튭으로 한국 뉴스를 검색하다가 지역 축제나 전통 시장 등에서 상인들이 바가지를 씌우는 것이 문제라는 기사들이 연이어 올라온 것을 보았다. 아직도 이렇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얼마 전에 다녀 온 스페인 말라가를 떠올리게 되었다.


철학이 주관심사 중 하나인 나에게 스페인은 그렇게 매력적인 나라가 아니었다. 이번에 처음 스페인에 가면서도 단순히 관광을 간 셈 치고 아무 준비없이 몸만 비행기에 실어보냈었다. 그러나 다녀오고 나서는 계속 스페인 관련 정보를 찾아본다. 아내는 스페인어를 배운다고 하고, 나는 지금 중세 스페인 안달루시아의 철학자 마이모니데스의 전기를 읽고 있다. 다시 가보고 싶고, 심지어는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나라이다. 유튭을 찾아보면 스페인을 방문했다가 스페인에 반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다.


짧게 다녀온 나도 스페인의 매력에 대해 말을 하라면 할 말이 너무 많다. 그러나 다 치우고 딱 한 사례만 이야기하기로 하자.


첫 날, 말라가의 유명하다는 한 식당에 저녁을 먹으러 갔다. 그러나 줄이 너무 길게 늘어서 있어서 그날은 그냥 포기했다. 말라가를 떠나기 전날 밤에 다시 갔는데, 여전히 줄이 늘어서 있었다. 좀 기다렸고, 차례가 되어, 한국 식당처럼 활기차게 시끄러운 식당에서 해산물 등과 맥주 등을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식기를 치워가게 하고 나서 계산서를 기다리며 우리는 텅 빈 식탁 앞에서 한참을 수다를 떨었다. 밖에는 여전히 사람들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테이블을 빨리 돌리면 그것이 다 돈일 터인데, 식당 안을 분주하게 오고가는 종원원들, 매니저 누구도 텅빈 식탁을 사이에 두고 수다를 떠는 우리에게 눈치를 주지 않았다. 식기를 치우게 하면 당연히 계산서를 가지고 오겠지 했는데, 스페인에서 둘은 별개의 사건인가보다. 계산하시겠냐고 묻지도 않는다. 식기들을 치우고 말끔한 식탁 상태에서 대화를 하고자 하는 사람도 있을 테니 그걸 고려하는 것인가 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계산을 하고 나서도 뒷맛이 깔끔했다. 가격이 무척 저렴했기 때문이다. 스페인 남부 말라가 한정 체감 물가는, 말라가 관광 중심부에서조차 한국보다 낮았다. 


스페인은 세계 최대의 관광국이기 때문에, 역으로 보면 그에 걸맞는 시스템이나 소양이 갖추어져 있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어떠한 과정을 거쳐 그러한 시스템이 구축되었을까? 물론 나는 모른다. 그러나 어떤 원리에 의해 그러한 시스템이 돌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한 마디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개인의 선택에 대한 철저한 존중이다. 내가 손님으로서 식당에 들어갔으면, 줄이 길게 늘어서 있고는 그 줄을 서고 있는 사람이나 식당 사장의 사정이지 손님인 나의 사정이 아니다. 나는 손님으로서 그 식당의 서비스를 최대한으로 즐기면 그만이다. 내가 관광객이든 지역 사람이든 그런 것 또한 식당 직원이나 사장, 식당의 다른 손님들의 관심사일 필요가 전혀 없다. 손님으로서 나는 그 식당의 서비스를 최대한으로 즐길 권리가 있고, 내가 손님으로서 철저하게 존중받는 것과 똑같은 원리에서 식당의 직원들을 철저하게 존중해주면 된다. 아마 이러한 원칙이, 적어도 말라가의 식당 주인과 직원들에게 철저하게 공유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마 한국의 지역 축제 등의 상인들에게 이러한 원리는 말도 안되는 것일 수 있다. 그것은 개인의 선택이나 기호에 대한 철저한 존중은, 한국에서는 드문, 서구 문화의 주요한 특질로 보이기 때문이다. 어떤 문화적 특질은 다양한 맥락에서 다양하게 나타나고, 그러므로 평면적으로 그것을 좋다, 나쁘다, 라고 판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의 경우 식당을 방문한 손님에게 그 식당이나, 그 식당이 속한 지역, 문화에 대해 좋은 인상을 주는 데에는 이 원리가 아주 효과적인, 그러니까 실용적인 가치를 갖는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만일 문제를 이처럼 개인적 선택에 대한 존중과 같은 원리로까지 끌고 들어가는 것이 지나친 억지가 아니라면, 지역 축제 등에서 외지인이나 어수룩해보이는 사람을 상대로 바가지를 씌우려 드는 행위를 꼭이 이러 저러한 상인들의 일탈로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예전에 숙명여대 학생들이, 성전환하여 법적으로 여성인 학생의 입학을 반대하여 그 학생이 결국 입학을 포기하고 만 일이 있었다. 숙명여대 학생들은 그 학생의 선택을 전혀 존중하지 않은 셈이다. 아마 그 반대한 학생들의 상당수는 한국 사회가 개인적 선택이나 취향에 대해 억압적이라는 점에 공감할 것이다. 아마 기성세대일수록 그런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밖에서 보면, 기성세대나 젊은 세대나 별로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저마다에게는 저마다의 사정이 있다. 예를 들면? 나는 손님이고 커피 한 잔을 주문했으므로 10시간이든 그 이상이든 이 카페를 이용할 권리가 있다... 이러한 것들이 한국의 현재를 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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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 한 귀퉁이에 작은 텃밭을 만들었는데 열무고 깻잎이고 등등 잘 자란다. 내가 심고 키우는 것은 아니지만... (처음이라 뭘 모르고 너무 빽빽하게 심었다. 덕분에 열무는 매일 뽑아다 먹고 있다.) 한 두 뺨 크기의 무화과 나무도 심었다. 언제부터 무화과가 달려서 따 먹을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엊그제 손님이 왔었는데, 그 분 왈, 자신은 미니멀리스트 삶을 추구한다고...:) 정원에 이것 저것 일을 벌려놓고 있는 모양을 보고 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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