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가을에 이사 와서 첫 여름을 나고 있다.


정원에 여우들이 자주 출몰한다. 정원에서 자고 쉬고 서로 엉겨서 놀고... 그리고 똥도 싼다. 화초 더미에 들어가 자거나 쉬므로 화초도 망가뜨린다. 해서 이제는 보이기만 하면 내쫒는다. 그리고 정원 펜스에 쥐가 서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귀여운 생쥐. 쥐들은 한 열 마리씩 몰려 산다는 얘기를 듣고 놀라 쥐덫을 놓았는데 먹이만 먹고 아직 잡히지는 않았다. 또 하나 문제는 달팽이. 아침녁 정원이 습기질 때 온 잔디 위에, 그리고 여린 나뭇잎 위에 민달팽이, 집달팽이가 붙어 있다. 일단은 손으로 하나 하나 주워 없애고 있는데, 곧 약을 뿌려야 할 것 같다. 아주 작은 것이긴 하지만 자연 속에 들어와 산다는 느낌 하나를 알겠더라. 





봄에 핀 꽃들이 지고 별 생각이 없었는데 여름에 접어들자 온갖 꽃들이 일제히 피기 시작했다. 특히, 장미는 마치 폭탄이 터진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이전 주인 할머니가 정원에 일년 내내 꽃들이 필 거라고 했던 것이 기억이 난다. 계절마다 피는 꽃을 잘 분산시켜 놓은 것이다. 나는 그 할머니(이름이 쉴라다. 그래서 나는 우리 집을 쉴라스 가든이라고 부른다) 천재다, 라는 말을 달고 살았었다. 그런데 장모님이 오셔서, 할망탱이가 너저분하게 아무 꽃이나 촘촘하게 마구 심었다고 투덜거리시더라. 아닌게 아니라 정원에 있는 꽃이 5, 60 종류는 되는 것 같다. 일년 겪어 보고 내년 부터 손 댈 곳은 손을 대야 한다. 뒤쪽 정글을 정리하는 것이 가장 큰 일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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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여로 2018-06-06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생님 안녕하세요. 한국에서 길고양이 데려다 키우듯 영국에선 여우가 그렇게 길러지기도 하나요? 문득 쓸데없는 게 궁금하네요...

weekly 2018-06-07 0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근데 저 선생님 아닌데요:) 여우를 데려다 키우는 경우는 없는 것 같아요. 길들여지지도 않을 거구요. 영국에서 여우는 밉상인 동물로 취급되는 것 같아요. 가든의 화초를 망치고, 가든 땅도 파고, 똥도 싸고... 어른 정도 크기의 인간이 가까이 가면 바로 도망갈 정도로 겁이 많지만 간혹 유아들 공격해서 손가락을 끊어 갔다는 뉴스가 신문에 나기도 합니다. 종종 도로를 보면 차에 치여 죽은 여우도 꽤 있습니다. 영국에서 여우는 슬픈 운명의 동물인 것 같아요. 볼 때마다 측은해지는...
 

영국에 온지 몇 년이 되었는데, 이제 처음으로 영화관에 가보았다. 바우처 같은 게 있어서 아무 영화나 볼 수 있었는데 엄청 때려 부수는 블럭 버스터를 보자고 고른 것이 어벤저스였다. 아주 어렸을 때 서울 대한 극장에서 스타워즈 제다이의 귀환 편을 봤었다. 내내 때려 부수는 장면들을 입 벌리며 봤는데, 영화관을 나오자 마자 영화 내용이 머리에서 싹 지워지는 것이었다. 이런 브레인 샤워가 내게는 놀라운 경험이었고 어벤저스에서 바란 것도 바로 이런 것이었다.


그런데, 일단은 실망스럽게도(?), 그리고 진정으로는 놀랍게도 어벤저스는 그렇게 브레인 샤워를 하고 끝낼 수 있는 영화가 아니었다. 어두웠고, 많은 문화적 코드들이 녹아 있었고, 주인공 악당이 입체적인 인격을 갖고 있었다. 스파이더맨 1, 2 수준의 동화같은 블럭 버스터를 선호하는 내게는 무거운 영화였다. 블럭 버스터에 대한 생각을 달리 하게 될 정도로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에는 톰 히들스턴, 베네딕트 컴퍼배치 등의 영국 배우들이 많이 나왔다. 이런 연기파 배우들 덕분에 영화가 두꺼워졌다는 생각을 했다. 그동안은 니콜라스 케이지같은 배우들이 블럭 버스터에 출연하는 것을 좋게 보지 않았었다. 그들이 소비되고 있다고 느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왜 블럭 버스터 제작자들이 이런 배우들을 출연시키려 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영화를 보고 집에 돌아와서 한 짓은 어벤저스1을 아마존에서 렌트로 보는 것이었다. 다음엔 어벤저스2를 볼 것이다. 그리고 어벤저스 다음 편을 기다리게 되겠지. 애초에 바란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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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저녁 시간마다 한국 뉴스를 챙겨 본다. 지난 토요일에는 새벽 한 시에 일어나 남북의 정상들이 손을 잡고 분단선을 넘는 장면을 지켜 보기도 했었다. 한국은 기적을 만들어 가고 있는 중이다.


어제인가 그제인가 홍준표가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다며, 김정은이 미소를 한번 지어주자 신뢰도가 77%가 되었다고 흥분하는 뉴스를 보았다. 한참을 웃었다.


남북 정상 회담 전 김정은에 대한 한국인들의 신뢰도는 0%에 가까왔을 것이다. 그러던 것이 몇 칠 사이에 77%가 되었다면 이는 홍준표의 말대로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는 것이거나, 아니면 곧 지나갈 유행에 불과할 것이다. 홍준표의 비판은 나름 합리적인 것 아닐까?


물론 그렇지 않다. 김정은에 대한 신뢰도의 거의 대부분은 문재인이 벌어다 준 것이다. 그리고 우리 국민들의 문재인에 대한 신뢰는 그를 오래 지켜보며 굳건해져 온 것이다. 일시적인 변덕의 문제는 분명 아니다.


그렇더라도 김정은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다시 말하면 문재인은 한국의 국민들에게, 그리고 트럼프에게 김정은이 믿을만 한 사람이라고 역설하고 있는데, 문재인의 이 확신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정상 회담 전후의 김정은에게서 불연속성을 보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후자의 사람들에게 김정은은 언제나 연속성의 존재, 즉 인격의 존재였던 것이다. 인간, 혹은 인격이라는 범주는 어떤 사람의 행위를 그의 동기, 목적 등을 통해서 파악하고자 할 때 그에게 적용된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의 대부분의 언론들은 김정은에게 이런 범주를 적용하는 것을 거부해 왔다고 말할 수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들에게 김정은은 악마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두 말할 것도 없이 악마 등등의 표딱지는 상대를 이해하기를 거부하는 단절의 몸짓일 뿐이다. 


사실 그동안의 북한의 행태에 이해못할 부분은 별로 없어 보인다. 한반도에서의 체제 경쟁은 남한의 완전한 승리로 끝났고, 현실 사회주의는 붕괴해 버렸다. 북한은 자신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개방을 추구하고자 했지만(고립은 선택지가 아니다), 미국 등은 북한의 체제 유지를 허용하지 않으려 했다. 결국 북한은 핵개발로 판을 크게 키운 후 미국과 일괄타결을 하려고 했고, 지금 성공적으로 그 과정에 들어서 있다. (의문인 것은 트럼프가 동북아에 통일 한국이라는 강력한 국가가 등장하는 것이 미국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하는 계산을 끝내 놓고 움직이고 있는 것일까 하는 것이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내일이라도 판이 엎어질지 어떨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므로 홍준표가 옳은지, 문재인이 옳은지 결정할 궁극적인 기준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현실의 정의 그 자체이므로 놀랄 일도 아니다. 우리는 단지 이론이 곧 실천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게 될 뿐이다. 그렇더라도 우리의 관점이, 이론이, 혹은 실천이 옳은 것이라는 사실을 선험적으로 확신할 수는 있다. 즉, 그것이 얼마나 구체적인 현실에 접근해 있는가를 돌아봄으로써. 예컨대 홍준표는 김정은에게 악마라는 범주를 부여하여 그를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든다. 그러므로 홍준표는 모든 합리적 비판들, 예컨대 북한이 정말 자신보다 국력이 50 배 이상 큰 나라를 적화 통일하려고 할까 라는 질문을 피해갈 수 있다. 북한이라는 나라가 원래 비합리적인 나라라면 합리성의 잣대를 들이미는 것도 무의미하므로. 그러나 홍준표가 관념론의 영역에 머물러 있다는 것도 분명하다. 그는 현실의 구체성을 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그는 선험적으로 틀렸다고 본다. (그래도 홍준표를 비웃지는 말자. 관념론을 벗어나는 것은 누구에게나 정말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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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가을에 이사를 왔고 이제 첫 봄이다. 지난 주까지는 추웠다. 이번 주 들어 갑자기 날씨가 좋아졌고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았다. 아래는 정원에서 찍은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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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김기덕 감독이 성폭행 의혹에 휘말렸다는 뉴스를 보고 그의 영화들을 떠올려 보게 되었다. 내가 본 김기덕의 영화는 파란 대문, 나쁜 남자 두 편 뿐이다.  

파란 대문. 하숙집 주인이자 포주인 아버지, 그의 아내, 대학생 딸, 고등학생 아들, 그리고 창녀가 한 집에 산다. 아버지와 아들은 그 창녀와의 관계에서 성병에 걸리고 대학생 딸은 그런 아버지와 남동생, 그리고 창녀를 경멸한다. 그러던 어느 겨울 눈이 오는 날, 대학생 딸은 돌연, 앓아 누운 창녀 대신 손심을 받는다. 그리고 다음 장면, 즉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 가족들과 창녀가 한 밥상에서 밥을 먹으며 즐겁게 떠드는 것이었다.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랬겠지만 나도 하숙집의 눈 쌓인 마당 장면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단지 마당에 하얀 눈이 쌓여 있고 거기에 누군가의 발자국이 남겨져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동화와 같은 장면이 가리키는 것은 아픈 창녀를 대신해 대학생 딸이 손님을 받는다는, 매우 기괴한 사태였던 것이다. 도대체 왜? 아무런 필연적인 이유도 없다. 거꾸로 말하면, 그 선택을 설명하기 위해 온갖 이론들이 동원될 수 있겠지만 그 이론들이 봉사하는 목적(나의 혼란의 정돈)에 비추어 그것들이 허구적이라는 것은 자명하기 때문에 오히려 도드라지는 것은 대학생 딸의 그 선택이 하나의 순수 사건이라는 점일 것이다. 그러므로 마지막 장면인 밥상 위에서의 화해도 원인-결과의 도식 속에서 읽을 수 없다(대학생 딸이 스스로 창녀가 됨으로써 그 창녀를 이해하고, 그러므로 화해를 이루었다는 식의 해석은 영화를 유치하게 만든다).

이러한 장면들의 연출적 효과와 깊이에서 김기덕의 독창성과 천재성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인데, 나도 같은 의견이다. 김기덕의 문법, 혹은 양식이란 하나의 사태를 순수 사건으로 절단해 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쁜 남자를 예로 들어보자. 영화에서 여자 주인공은 자신을 사창가에 팔아넘긴 남자를 매우 이상한 방식으로, 즉 창녀-포주의 관계로 사랑하는 것을 선택한다. 물론 여기서 선택은 의지적인 것이라든지, 계산적인 것이라든지 하는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고 그냥 순수 사건과 동의어일 뿐이다. 그러므로, 예컨대 이 영화를 스톡홀름 증후군에 대한 것으로 읽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김기덕은 하나의 사태를 통속적 범주화(스톡홀름 증후군, 성녀-창녀 이원론 등등)의 주변에 배치함으로써 극적 긴장감을 만들어 내고, 그 에너지를 통해 범주들을 무화시키면서 그 사태를 순수 사건으로 설립하고자 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럼 애초에 이런 범주들을 생산해 낸 것은 무엇이었일까? 적어도 그 일면이 모랄리티라는 점은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김기덕 영화가 주는 불편함, 충격은 바로 이 모랄리티가 무화의 위협을 느끼고 방어적 태도를 취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같은 현상일 것이다.

많은 이론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현대 사회에서 성은 어디에나 있다. 혹은 어디에도 없다. 이런 모순적 진술이 가능한 것은 현대 사회에서의 성의 존재 방식 때문이다. 즉, 성은 그것에 대해 말할 수는 있지만 만질 수는 없는 방식으로, 혹은 볼 수는 있지만 실현할 수는 없는 방식으로, 다시 말하면 포르노적인 방식으로 어디에나 존재한다. 이런 놀이의 목적은 뻔하다. 성적 긴장의 증폭. 그래서 우리의 사회는 성적 긴장의 폭발할 것 같은 에너지로 충전되어 있다고 말해도 하등의 과장이 아니리라. 성은 절대적이다. 성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성은 비환원적이며, 오히려 다른 모든 것을 자신에게로 환원시킨다. 현대의 성은 마치 서양의 이전 시대의 신과 같은 자격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하나의 절대적 기호로서의 성.

현대 사회에서의 성의 이러한 모습을 폭로할 방법이 있을까? 성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성의 절대성을 강화하는 데 기여할 뿐일 수도 있다. 딜레마다. 고전적인 반항의 예로서 시인 고은을 보자. 그는 사람들 앞에서 탁자 위에 올라가 자신의 성기를 잡고 흔들었다고 한다. 고은은 인간계 너머에 대해, 그러니까 자유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계 너머, 즉 모랄리티의 저편은 동시에 괴물의 영역인 것이다. 그러므로 최영미 시인은 그를 괴물로 고발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흔히 예술은 인간계의 경계 부분을 부단히 배회하는 존재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렇게 배회만 하여야 한다. 그렇게 긴장을 고양시키기만 해야 한다. 만일 고은과 같이 자신의 성기를 직접 꺼내어 사람들 앞에 전시했다가는, 그러므로 흥을 깨었다가는 괴물로 고발되고 마는 것이다. 고은의 죄목은 무엇일까? 자신의 성기를 전시하여 사람들을 불편하게 했다는 것일까? 내가 보기에 그것은 오즈의 마법사의 경우와 같다. 오즈의 마법사는 사실은 키작고 대머리인 노인네였다. 즉, 오즈의 마법사란 존재하지 않았다. 고은의 경우에도 그의 성기의 리얼리티는 현대 사회의 조직 원리를 근본에서부터 부정하는 것이었던 셈이다. 결코 섹슈얼리티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폭로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아마 고은은 이 점을 미처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옛날 사람이니까. 자신의 행위를 단지 성속의 경계를 허무는 퍼포먼스로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면 김기덕의 경우는 어떨까? 보도에 따르자면 그는 자신의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을 성적으로 집요하게 협박하고 회유하고 때로는 폭행을 했다고 한다.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그 보도가 맞다고 치자. 그렇다면 김기덕도 성의 리얼리티를 드러낸 죄를 지은 것일까? 이런 질문은 물론 굉장히 우습다. 그러나 이런 성질의 질문을 하는 사람도 있다. 예컨대, 푸코의 “성의 역사”를 보라. 현대적 권력의 작용 기제 중 대표적인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성에 대해 끊임 없이 말하도록 조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투 운동은 이런 권력에 정확히 봉사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미투 운동을 집어치우라고 요구하는 것이 이런 권력에 대한 저항이 되는 것일까? 물론 이런 것은 말도 안되는 것처럼 보인다. 현대의 이론가들이 리얼리티를 오히려 실재의 주변부로 밀어내고 있다고 고발할 수 있을까? 예컨대 푸코가 현대 사회의 모델로 삼은 것이 감옥이라면 칸트주의자로서의 푸코는 감옥의 본질성에 속하는 것만을 현대 사회에서 발견하게 될 것이다. 생산이든, 섹슈얼리티이든 상황은 똑같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우리의 현실에서는 성폭행이 일어나고 있고, 사기를 치는 사람이 있으며, 사람을 죽이는 사람이 있고, 모기지를 갚지 못하여 파산하는 사람이 있고, 자신의 성기를 꺼내어 흔드는 노인이 있다고 주장한다면, 또 다른 사람들은, 그것이 리얼리티라면 거기에는 부조리도 필연적으로 끼여 들어가 있기 마련이라는 점을 지적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김기덕, 혹은 고은에 대한 단언을 유지하기 힘들어 진다. 마치 까뮈의 작품에서,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았으며, 당일날 여자 친구와 희희덕거렸고, 아랍 남자를 총으로 쏴 죽인 괴물에 대한 단언을 유지할 수 없는 것처럼… 이론적으로 말한다면 현대에 와서 표상이란 개념이 포기되었다면, 동시에 표상 너머에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되는 실재라는 것도 포기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이런 것이 현대의 상황이라고 느낀다. 아무 것도 말할 수 없다. 그것이 김기덕이든 고은이든 미투 운동이든. 그러므로 흐르는 대로 그대로 놓아 둔다. 아무도 이 상황에 만족하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는 문제에 대해 언급할 아무런 도구도 갖고 있지 않다. 뭔가 엉켜 있다는 느낌만이 존재한다. 예컨대, 미투 운동이 현대적 권력에 봉사하는 것이라는 (가상적) 주장은 완전히 관념론적인 것으로 들린다. 그러나 우리는 이에 반박할 언어를 갖고 있지 않다. 혼동들..


(추가: 혹시나 하여 미리 변명을 해둔다. 위의 나의 글에 자가당착과 혼란이 잔뜩 끼여 들어가 있다고 지적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두 말 않고 수긍할 것이다. 사실이 그렇고 나는 그것을 의식하고 있다. 다만 글을 내려버리는 것 말고는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냥 두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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