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김기덕 감독이 성폭행 의혹에 휘말렸다는 뉴스를 보고 그의 영화들을 떠올려 보게 되었다. 내가 본 김기덕의 영화는 파란 대문, 나쁜 남자 두 편 뿐이다.
파란 대문. 하숙집 주인이자 포주인 아버지, 그의 아내, 대학생 딸, 고등학생 아들, 그리고 창녀가 한 집에 산다. 아버지와 아들은 그 창녀와의 관계에서 성병에 걸리고 대학생 딸은 그런 아버지와 남동생, 그리고 창녀를 경멸한다. 그러던 어느 겨울 눈이 오는 날, 대학생 딸은 돌연, 앓아 누운 창녀 대신 손심을 받는다. 그리고 다음 장면, 즉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 가족들과 창녀가 한 밥상에서 밥을 먹으며 즐겁게 떠드는 것이었다.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랬겠지만 나도 하숙집의 눈 쌓인 마당 장면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단지 마당에 하얀 눈이 쌓여 있고 거기에 누군가의 발자국이 남겨져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동화와 같은 장면이 가리키는 것은 아픈 창녀를 대신해 대학생 딸이 손님을 받는다는, 매우 기괴한 사태였던 것이다. 도대체 왜? 아무런 필연적인 이유도 없다. 거꾸로 말하면, 그 선택을 설명하기 위해 온갖 이론들이 동원될 수 있겠지만 그 이론들이 봉사하는 목적(나의 혼란의 정돈)에 비추어 그것들이 허구적이라는 것은 자명하기 때문에 오히려 도드라지는 것은 대학생 딸의 그 선택이 하나의 순수 사건이라는 점일 것이다. 그러므로 마지막 장면인 밥상 위에서의 화해도 원인-결과의 도식 속에서 읽을 수 없다(대학생 딸이 스스로 창녀가 됨으로써 그 창녀를 이해하고, 그러므로 화해를 이루었다는 식의 해석은 영화를 유치하게 만든다).
이러한 장면들의 연출적 효과와 깊이에서 김기덕의 독창성과 천재성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인데, 나도 같은 의견이다. 김기덕의 문법, 혹은 양식이란 하나의 사태를 순수 사건으로 절단해 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쁜 남자를 예로 들어보자. 영화에서 여자 주인공은 자신을 사창가에 팔아넘긴 남자를 매우 이상한 방식으로, 즉 창녀-포주의 관계로 사랑하는 것을 선택한다. 물론 여기서 선택은 의지적인 것이라든지, 계산적인 것이라든지 하는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고 그냥 순수 사건과 동의어일 뿐이다. 그러므로, 예컨대 이 영화를 스톡홀름 증후군에 대한 것으로 읽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김기덕은 하나의 사태를 통속적 범주화(스톡홀름 증후군, 성녀-창녀 이원론 등등)의 주변에 배치함으로써 극적 긴장감을 만들어 내고, 그 에너지를 통해 범주들을 무화시키면서 그 사태를 순수 사건으로 설립하고자 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럼 애초에 이런 범주들을 생산해 낸 것은 무엇이었일까? 적어도 그 일면이 모랄리티라는 점은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김기덕 영화가 주는 불편함, 충격은 바로 이 모랄리티가 무화의 위협을 느끼고 방어적 태도를 취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같은 현상일 것이다.
많은 이론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현대 사회에서 성은 어디에나 있다. 혹은 어디에도 없다. 이런 모순적 진술이 가능한 것은 현대 사회에서의 성의 존재 방식 때문이다. 즉, 성은 그것에 대해 말할 수는 있지만 만질 수는 없는 방식으로, 혹은 볼 수는 있지만 실현할 수는 없는 방식으로, 다시 말하면 포르노적인 방식으로 어디에나 존재한다. 이런 놀이의 목적은 뻔하다. 성적 긴장의 증폭. 그래서 우리의 사회는 성적 긴장의 폭발할 것 같은 에너지로 충전되어 있다고 말해도 하등의 과장이 아니리라. 성은 절대적이다. 성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성은 비환원적이며, 오히려 다른 모든 것을 자신에게로 환원시킨다. 현대의 성은 마치 서양의 이전 시대의 신과 같은 자격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하나의 절대적 기호로서의 성.
현대 사회에서의 성의 이러한 모습을 폭로할 방법이 있을까? 성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성의 절대성을 강화하는 데 기여할 뿐일 수도 있다. 딜레마다. 고전적인 반항의 예로서 시인 고은을 보자. 그는 사람들 앞에서 탁자 위에 올라가 자신의 성기를 잡고 흔들었다고 한다. 고은은 인간계 너머에 대해, 그러니까 자유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계 너머, 즉 모랄리티의 저편은 동시에 괴물의 영역인 것이다. 그러므로 최영미 시인은 그를 괴물로 고발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흔히 예술은 인간계의 경계 부분을 부단히 배회하는 존재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렇게 배회만 하여야 한다. 그렇게 긴장을 고양시키기만 해야 한다. 만일 고은과 같이 자신의 성기를 직접 꺼내어 사람들 앞에 전시했다가는, 그러므로 흥을 깨었다가는 괴물로 고발되고 마는 것이다. 고은의 죄목은 무엇일까? 자신의 성기를 전시하여 사람들을 불편하게 했다는 것일까? 내가 보기에 그것은 오즈의 마법사의 경우와 같다. 오즈의 마법사는 사실은 키작고 대머리인 노인네였다. 즉, 오즈의 마법사란 존재하지 않았다. 고은의 경우에도 그의 성기의 리얼리티는 현대 사회의 조직 원리를 근본에서부터 부정하는 것이었던 셈이다. 결코 섹슈얼리티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폭로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아마 고은은 이 점을 미처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옛날 사람이니까. 자신의 행위를 단지 성속의 경계를 허무는 퍼포먼스로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면 김기덕의 경우는 어떨까? 보도에 따르자면 그는 자신의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을 성적으로 집요하게 협박하고 회유하고 때로는 폭행을 했다고 한다.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그 보도가 맞다고 치자. 그렇다면 김기덕도 성의 리얼리티를 드러낸 죄를 지은 것일까? 이런 질문은 물론 굉장히 우습다. 그러나 이런 성질의 질문을 하는 사람도 있다. 예컨대, 푸코의 “성의 역사”를 보라. 현대적 권력의 작용 기제 중 대표적인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성에 대해 끊임 없이 말하도록 조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투 운동은 이런 권력에 정확히 봉사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미투 운동을 집어치우라고 요구하는 것이 이런 권력에 대한 저항이 되는 것일까? 물론 이런 것은 말도 안되는 것처럼 보인다. 현대의 이론가들이 리얼리티를 오히려 실재의 주변부로 밀어내고 있다고 고발할 수 있을까? 예컨대 푸코가 현대 사회의 모델로 삼은 것이 감옥이라면 칸트주의자로서의 푸코는 감옥의 본질성에 속하는 것만을 현대 사회에서 발견하게 될 것이다. 생산이든, 섹슈얼리티이든 상황은 똑같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우리의 현실에서는 성폭행이 일어나고 있고, 사기를 치는 사람이 있으며, 사람을 죽이는 사람이 있고, 모기지를 갚지 못하여 파산하는 사람이 있고, 자신의 성기를 꺼내어 흔드는 노인이 있다고 주장한다면, 또 다른 사람들은, 그것이 리얼리티라면 거기에는 부조리도 필연적으로 끼여 들어가 있기 마련이라는 점을 지적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김기덕, 혹은 고은에 대한 단언을 유지하기 힘들어 진다. 마치 까뮈의 작품에서,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았으며, 당일날 여자 친구와 희희덕거렸고, 아랍 남자를 총으로 쏴 죽인 괴물에 대한 단언을 유지할 수 없는 것처럼… 이론적으로 말한다면 현대에 와서 표상이란 개념이 포기되었다면, 동시에 표상 너머에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되는 실재라는 것도 포기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이런 것이 현대의 상황이라고 느낀다. 아무 것도 말할 수 없다. 그것이 김기덕이든 고은이든 미투 운동이든. 그러므로 흐르는 대로 그대로 놓아 둔다. 아무도 이 상황에 만족하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는 문제에 대해 언급할 아무런 도구도 갖고 있지 않다. 뭔가 엉켜 있다는 느낌만이 존재한다. 예컨대, 미투 운동이 현대적 권력에 봉사하는 것이라는 (가상적) 주장은 완전히 관념론적인 것으로 들린다. 그러나 우리는 이에 반박할 언어를 갖고 있지 않다. 혼동들..
(추가: 혹시나 하여 미리 변명을 해둔다. 위의 나의 글에 자가당착과 혼란이 잔뜩 끼여 들어가 있다고 지적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두 말 않고 수긍할 것이다. 사실이 그렇고 나는 그것을 의식하고 있다. 다만 글을 내려버리는 것 말고는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냥 두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