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내가 집중적으로 파고들고 있던 철학 문제는 고색 창연한 지향성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널부러져 있는 것들이었다. 애초의 순진한 생각으로는 후설의 이른바 선험적 전회까지 가지 않더라도 지향성에 대한 선명한 개념을 얻을 수 있겠다 싶었다. 물론 완전한 착각이었고 선험성 문제와 관련하여 나는 한전숙 교수님이 말한 후설의 질곡에 묶이고 말았다. 후설의 질곡은 후설 철학에 대해 체계적 이해, 혹은 전체적 조망을 도모하는 이에게 내려지는 형벌과 같다. 브렌타노의 저작들, 후설의 주요 저서들, (내게는 언제나 명쾌한) 하이데거의 강의록 등을 통해서도, 이러 저러한 해설서류를 통해서도 손에 잡히는 것이 없었다. 둘 중 하나다. 첫째, 이러 저러한 해설서들이 제공해주는 개념을 따라 후설을 이해한다. 이 경우 후설은 매우 피상적인 사상가가 된다. 그렇다면 후설의 책을 읽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이다. --- 그러나 자기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그 사상가를 피상적인 사상가라고 판단하고 마는 것처럼 비겁한 태도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둘째, 후설의 심오함을 그대로 가정한다. 이럴 경우 후설의 질곡에서 헤어날 수 없다.
그러다 어느 논문에서, 후설 당대에 그와 함께 연구하던 캐언스Cairns라는 사람이 후설의 행적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 있다는 정보를 알게 되었다. 정말 그런 것이 남아 있을까? 실제로 있었다! Conversations with Husserl and Fink라는 책이다. 나는 아마존을 통해 괜찮은 가격으로 그 책의 중고판을 주문했다. 그런데 한 달 이상을 꼬박 기다렸지만 책은 오지 않았다. 알고보니 판매자가 나의 주문을 취소해버리고 책 가격을 5배 이상으로 올려버린 것이었다. 나는 미리보기를 통해 그 책의 앞 부분에 있는 hyle에 대한 기술을 읽었고 비로서 hyle과 그에 상관적인 개념들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즉, 나는 그 책이 내게 엄청나게 중요하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던 차였다. 나는 패닉에 빠졌고 여기 저기에 신경질을 내고 다녔다. 불어 번역판으로 캐언스의 책을 구했지만, 영어판없이 불어판만으로 읽기에는 나의 불어 실력이 너무 저열했고, 책 내용 또한 난해했다.
결론을 말하자면 이리 저리 해서 결국 캐언스의 책을 구했다. 그리고 후설이 스스로를 늘 새로 시작하는 철학자라고 말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후설은 끊임없이 사색하고 연구한다. 그런데 그 결과로 후설의 철학이 더 단단해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어떤 의미에서는 정처없이 떠돌게만 되는 것이다. 나는 후설이 자신의 어떤 중요한 철학적 테제에 대해 단 몇 칠 만에 입장을 바꾸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굳건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모든 것이 유동적이고 잠정적이다. 이것이 이른바 후설의 질곡의 배경인 것이다.
아무튼 나는 이 책이 후설을 이해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책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내가 알아야만 한다고 생각한 많은 주제들에 대해 매우 많은 시사를 받았다. 나는 후설의 철학이 체계적인 철학의 형태를 갖추지 못하게 된 상황의 근저에 어떤 문제가 놓여 있는지 파악하고 있다고 느낀다. 그것은 두 말할 필요없이 선험성 문제 그 자체이다(더 구체적으로는 자아의 이중성 문제). 돌이켜보면 영국돈으로 100 파운드가 넘는 가격이 책정되어 있었더라도, 색인까지 포함해서 110 페이지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작은 이 책을 꼭 샀었어야 했다고 본다. 이 책 덕분에 최근 몇 칠 동안 내가 이룬 진보를 이 책 없이도, 몇 년이 걸리더라도, 이뤄낼 자신이 없다. 그것은 신념이나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우연성의 문제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연성의 제거를 진보의 척도로 삼는 것은 얼마든지 타당한, 혹은 고마운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