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philia and History, or the Wind in the Trees (Paperback)
Christian Keathley / Indiana Univ Pr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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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영화 좀 보는 사람을 자칭 타칭 '시네필'이라고 할 때가 있었다. '영화광'이나 '영화매니아'란 표현도 있었지만, '시네필'이라고 하면 왠지 남들이 잘 안보는 소위 예술영화의 애호자 같은 뉘앙스가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 당시 '시네필'이란 과연 어떤 사람들이었던가 새삼 궁금해졌다. 영화가 지천에 널려서 죽을 때까지 봐도 끝내 소화내지 못할 비극에 처한 요즘과는 달리, 그당시는 어딘가를 찾아가야 하거나 어렵게 수소문해야 유명한 영화를 볼 수 있었다. 희소성의 차원에서 접근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은근한 자부심이 자칭 타칭 '시네필'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었던가 싶다.

 

 

어원적으로 타지면 '시네필'은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어떻게 하는 게 영화를 사랑하는 것일까? 영화를 하루에도 몇 편씩 본다면? 아니면 뭔가 동호회나 클럽 활동을 한다면? 아니면 취미의 수준을 넘어서 전문적인 공부를 하거나 아니면 그 어렵다는 비평을 쓴다거나 한다면? 이런 일들 중 어느 하나 이상을 한다면, 누가 보더래도 영화를 사랑한다고는 할 수 있을 듯하다. 그러나 '영화광'이나 '영화매니아'가 아니라 굳이 '시네필'은 뭘까. 그런 생각들을 종종 하며 지내왔다. 그러다가 '시네필리아'란 용어를 알게 됐고, 알라딘 검색을 해보다가 찾아낸 게 이 책이었다. <시네필리아와 역사>란 제목도 그렇거니와 '나무를 스치는 바람'이라는 부제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책은 두꺼운 편이 아니었다. 프랑스 영화사 속에서 '시네필리아'의 원형이라고 알려진 1920년대 인상주의자들, 1950년대의 카이에뒤시네마 그룹을 주 대상으로 하면서 영화가 독자적인 예술이 될 수 있게 하는 요소가 무엇인가를 역사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저자는 '시네필리아'가 단순히 유명하다고 알려진 영화들을 많이 보고 거기에 박수만 치는 수동적인 태도가 아니라, 영화들 속에서 적극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탐색을 통해서 뭔가 자신만의 독자적인 즐김을 발견하는 능동적인 태도라고 말하고 있다. 

 

 

비평가들이나 학자들이 말하고 제시하는 것만을 보는 게 아니라 파노라마적인 지각을 동원해서 화면속에서 적극적으로 뭔가를 찾아내는 자들만이 진정으로 영화를 사랑하는 자, 즉 '시네필'인 것이다. 저자는 그런 관점에 따라서 이 책 말미에는 자신의 유년기, 청소년기의 추억들을 거리낌없이 적어놓고 있었다. 다소의 근엄성, 객관성이 요구되는 이런 류의 책에서 저자의 사적인 경험들, 즉 자신만의 시네필리아적 순간들을 보여준다는 건 상당히 도전적이면서도 신선했다.

 

 

'시네필리아'에 관한 저자의 이야기는 비단 영화에만 적용되는 것같지는 않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남들이 정해놓은 위계와 시선에 따라 그걸 무조건적으로 따라가기에 바쁜 경우가 많다.

 

 

소위 '섭렵의 강박'을 가지고 뭔가를 열심히 보고 듣고는 하지만, 정작 자신만의 뭔가를 남기고 있는지는 잘 따져보지 않는다. 뭔가 머스 아이템을 소화했다는 헛배 부름만 느끼면서. 그게 진정한 즐김이나 즐거움의 차원인가 하는 물음은 패스하면서.

 

 

영화나 음악뿐만 아니라 책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권위자의 발언에 지나치게 주눅들어, 정작 소중하게 여겨야 할 자신을 빼놓는다면 북필리아든 북풀이든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 책은 두 번 읽었다. 처음 읽을 때는 별 생각이 없다가 다시 한번 읽게 됐을 때, 이런 생각들을 하게 됐다. 이 책의 저자에 대해 새삼 고마움을 느꼈다. 뭔가 감사의 마음을 표하고 싶어서 구글 검색을 해봤더니 저자 사진도 볼 수 있었고, 메일 주소도 의외로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어설픈 영어 실력이기는 하지만, 감사의 마음을 메일로 썼다.

 

 

그랬더니 첨부한 사진처럼 답장이 왔다. 책을 읽고, 저자에게 편지를 써 본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것도 영어 책을 읽고. 여하튼 의외로 빠르게 답장을 줬다. 편지 문면에서 저자의 친절함을 느낄 수 있었다. 영어로 뭔가를 쓴다고 하면 완벽함에 대한 강박에 시달리기 마련이다. 그런데 한국인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면 뭔가 틀리게 쓰더라도 전혀 문제가 안 될 것같다.

 

 

'북필리아', 그런 표현은 아직까지 없었던 걸로 안다. 진정 책을 사랑한다는 건 무엇일까. 좀 생각해봐야 할 문제일 것같다. 하지만, 이렇게 저자에게 자신의 소감을 편지로 쓰는 것 역시 북필리아적 실천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결과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영어 책 읽고 저자에게 편지 쓰기는 그렇게 어렵지 않다, 오히려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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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영화사 (Film History) - An Introduction, 3rd Edition
Kristin Thompson.데이비드 보드웰 지음 / 지필미디어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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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원본이 되는 책을 원서로 읽기 시작한 건 불과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던 것같다. 뭐든지 역사를 좋아하는 취향에다가 특히 영화에 대한 관심도 더해져서 가끔씩 특정 국가의 영화사라든지 아니면 거창하긴 하지만 세계영화사 읽기를 좋아 한다. 그래서 영어 공부도 겸해서 조금씩 읽고 있었는데 생각해보니 이 책을 이번에 처음 보는 것같지 않아서 알라딘 구매리스트를 확인해봤더니 벌써 6년 전에 구매한 것으로 돼 있었다.

 

그래서 오늘 서재에서 찾아내 보니 아마도 끝까지 읽었던 것같은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원서로 읽었던 부분부터 번역본으로 이어서 보기 시작했다. 번역 수준을 가늠해보기 위해 그 접점 어간의 언어를 대조해보았는데 충실한 직역 중심의 시도가 이뤄지고 있음을 알 수 있고, 그냥 번역본 자체만 봐도 그런 느낌은 강하다. 역자가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지 않고 팀명만 나온 걸로 봐서는 특정인이 감당할 수 없다는 판단이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이 책 번역상 가장 큰 문제는 역자들(?)이 한국어 문장 구조를 잘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220쪽 <사진, 10.30>의 캡션은 아래의 같이 번역돼 있다.

 

"<어느 날 밤에 생긴 일>에서 여상속자가 기자가 히치하이크하는 솜씨를 보여주자 안심한다."

 

"여상속자가"라는 주어는 "안심한다"와 가급적 근접한 위치에 있어야 한다. 즉, 아래와 같이.

 

""<어느 날 밤에 생긴 일>에서 기자가 히치하이크하는 솜씨를 보여주자 여상속자는 안심한다.""

 

이런 감각이 없는 것이다. 그런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독자로서는 자연스레 머리가 아프게 된다.

 

띄어쓰기나 인명의 불일치 등도 가끔 있지만, 한국어 문장 구조에 맞지 않는 어순이 이 책 번역의 인상을 가장 흐리게 하는 요소라고 생각한다.

 

원서를 읽어본 느낌으로는 원본의 언어가 쉽고 명료한 문체로 쓰여져 있어 오히려 이해는 빠른 편이다. 다만 영어이기 때문에 시안성이 떨어져 속도가 안난다는 단점이 있을 뿐. 번역의 문제점을 감수하면서라도 독서 속도를 내고 싶다면 번역본에 의존해도 큰 오류는 없을 듯하다.

 

지금까지 세계영화사라고 하면 제프리 노웰 스미스의 책이 많이 읽힌 것같다. 나 역시 이 책을 봤지만, 비슷한 분량으로 비슷한 시점을 커버하는 두 책이 내용상 큰 차이를 보이는 것같지는 않다. 다만, 베테랑과 신진 학자의 차이 정도가 느껴진다. 물론 세계영화사에 관심이 있다면 이 둘 중 어느 한 권을 배제할 필요는 없고 둘 다 읽어야 하리라 생각되지만, 그래도 굳이 애착의 정도를 나누자면 보드웰의 이 영화사가 더 마음에 드는 게 사실이다.

 

과도한 비유나 겉멋 부린 듯한 현학적 문체를 쓰지 않는다는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갓 어딘가 입문한 신참들의 현학적이기만 하고 무게감 없는 문체는 스스로 미성숙을 드러내는 데 지나지 않는다. 그런 것들이 많이 가셔질 때, 담백하고 무게감 있고 누구에게나 어렵지 않게 다가가는 문체가 형성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 책 한 권만 있으면 세계영화사의 기본 얼개는 얼추 파악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적어도 이 책이 커버하고 있는 시간대를 다르게 써낼 만한 세계영화사는 반세기 이내에는 나오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별 4개인 건, 이런 평가가 원저에 대한 것이 아니라 역서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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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발간된 책들 중에 읽을 만하다고 생각해서 주문한 책 가운데 하나가 󰡔제국대학󰡕이라는 책이다. 일본의 제국대학 제도가 어떻게 일본의 엘리트를 양성해왔는가를 다루고 있을 것이라 짐작되는(!) 책이다. 나도 그랬지만, 일본 관련 책들 중 학술서에 해당하는 서적들 상당수를 국문학 전공자가 번역하고 있다. 그래서 번역 수준이랄까 품질에 대해서는 대체로 수긍하고 넘어가게 된다. 그런데 󰡔제국 대학󰡕의 저자 서문인 왜 제국대학인가의 첫 쪽부터 뭔가 인상을 찡그리게 만드는 부분을 발견했다. 거기에는 이런 문장이 등장한다.

 

미국 대학에서 감탄하게 되는 것 중에 하나는 잘 정비된 도서관의 존재다.”

 

이 문장을 그냥 아무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나는 중에라는 표현을 그냥 넘기지 못한다. 정확하게 표현하려면 중의라고 수정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중에서라고 바꿔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할 수 있는데, “중에서진흙 중에서 나온 연꽃처럼 어떤 사물의 출처를 표현할 때 사용할만한 것이다. 여러 개 가운데 하나를 지칭할 때는, “중의라고 써야 한다. 어문 규범을 모른 채 발음만으로 넘겨짚다 보니 보통 사람들은 글을 쓸 때도 중의가 아니라 중에라고 쓰기 쉽다.

 

글쓰기에 친숙하지 않은 보통 사람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글쓰기와 글 읽기를 주로 하는, 그것도 국문학 연구자의 글이나 번역에서 이런 식의 표현을 보게 되는 건 매우 씁쓸한 일이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인터넷에 올라오는 다수의 글이 이런 오류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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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책을 안 읽은 건 아니지만, 책을 읽고 뭔가를 쓰지는 못했다. 핸드폰을 바꾸고는 북플을 잊어버리고 지내기도 했다.

최근에 북플을 떠올리고 다시 깔고 시간이 날 때마다, 친구분들의 독서 근황을 확인하고 있다. 세상의 흐름을 따라가는 데는 항상 늦었던 만큼, 항상 감탄과 부러움으로 독서 구경을 하고 있다. 화면에 뜨는 책들 중에는 예전에 읽었던 책들도 있고 읽어보고 싶은 책들도 있다. 읽었던 책에는 읽었다는 표시를 하고 읽고싶은 책을 담기도 한다.

그런데 살다보면 하고싶음은 쉽게 하고 싶었음, 할 수 없었음의 상태로 바뀐다. 이번 생이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이렇게 속수무책의 상태로 흘러가는 시간은 아쉽기만 하다. 내년에는 독서 노트 수준이라 할지라도 조금씩 써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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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12-11 11: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내년에 wasulemono님의 글을 자주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wasulemono 2017-12-11 14: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격려 감사합니다.
 
 전출처 : stonewriter > 고양이 작가들의 작업실 풍경

비슷한 시점에 이 책을 읽으신 분이 계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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