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영화 좀 보는 사람을 자칭 타칭 '시네필'이라고 할 때가 있었다. '영화광'이나 '영화매니아'란 표현도 있었지만, '시네필'이라고 하면 왠지 남들이 잘 안보는 소위 예술영화의 애호자 같은 뉘앙스가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 당시 '시네필'이란 과연 어떤 사람들이었던가 새삼 궁금해졌다. 영화가 지천에 널려서 죽을 때까지 봐도 끝내 소화내지 못할 비극에 처한 요즘과는 달리, 그당시는 어딘가를 찾아가야 하거나 어렵게 수소문해야 유명한 영화를 볼 수 있었다. 희소성의 차원에서 접근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은근한 자부심이 자칭 타칭 '시네필'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었던가 싶다.
어원적으로 타지면 '시네필'은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어떻게 하는 게 영화를 사랑하는 것일까? 영화를 하루에도 몇 편씩 본다면? 아니면 뭔가 동호회나 클럽 활동을 한다면? 아니면 취미의 수준을 넘어서 전문적인 공부를 하거나 아니면 그 어렵다는 비평을 쓴다거나 한다면? 이런 일들 중 어느 하나 이상을 한다면, 누가 보더래도 영화를 사랑한다고는 할 수 있을 듯하다. 그러나 '영화광'이나 '영화매니아'가 아니라 굳이 '시네필'은 뭘까. 그런 생각들을 종종 하며 지내왔다. 그러다가 '시네필리아'란 용어를 알게 됐고, 알라딘 검색을 해보다가 찾아낸 게 이 책이었다. <시네필리아와 역사>란 제목도 그렇거니와 '나무를 스치는 바람'이라는 부제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책은 두꺼운 편이 아니었다. 프랑스 영화사 속에서 '시네필리아'의 원형이라고 알려진 1920년대 인상주의자들, 1950년대의 카이에뒤시네마 그룹을 주 대상으로 하면서 영화가 독자적인 예술이 될 수 있게 하는 요소가 무엇인가를 역사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저자는 '시네필리아'가 단순히 유명하다고 알려진 영화들을 많이 보고 거기에 박수만 치는 수동적인 태도가 아니라, 영화들 속에서 적극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탐색을 통해서 뭔가 자신만의 독자적인 즐김을 발견하는 능동적인 태도라고 말하고 있다.
비평가들이나 학자들이 말하고 제시하는 것만을 보는 게 아니라 파노라마적인 지각을 동원해서 화면속에서 적극적으로 뭔가를 찾아내는 자들만이 진정으로 영화를 사랑하는 자, 즉 '시네필'인 것이다. 저자는 그런 관점에 따라서 이 책 말미에는 자신의 유년기, 청소년기의 추억들을 거리낌없이 적어놓고 있었다. 다소의 근엄성, 객관성이 요구되는 이런 류의 책에서 저자의 사적인 경험들, 즉 자신만의 시네필리아적 순간들을 보여준다는 건 상당히 도전적이면서도 신선했다.
'시네필리아'에 관한 저자의 이야기는 비단 영화에만 적용되는 것같지는 않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남들이 정해놓은 위계와 시선에 따라 그걸 무조건적으로 따라가기에 바쁜 경우가 많다.
소위 '섭렵의 강박'을 가지고 뭔가를 열심히 보고 듣고는 하지만, 정작 자신만의 뭔가를 남기고 있는지는 잘 따져보지 않는다. 뭔가 머스 아이템을 소화했다는 헛배 부름만 느끼면서. 그게 진정한 즐김이나 즐거움의 차원인가 하는 물음은 패스하면서.
영화나 음악뿐만 아니라 책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권위자의 발언에 지나치게 주눅들어, 정작 소중하게 여겨야 할 자신을 빼놓는다면 북필리아든 북풀이든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 책은 두 번 읽었다. 처음 읽을 때는 별 생각이 없다가 다시 한번 읽게 됐을 때, 이런 생각들을 하게 됐다. 이 책의 저자에 대해 새삼 고마움을 느꼈다. 뭔가 감사의 마음을 표하고 싶어서 구글 검색을 해봤더니 저자 사진도 볼 수 있었고, 메일 주소도 의외로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어설픈 영어 실력이기는 하지만, 감사의 마음을 메일로 썼다.
그랬더니 첨부한 사진처럼 답장이 왔다. 책을 읽고, 저자에게 편지를 써 본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것도 영어 책을 읽고. 여하튼 의외로 빠르게 답장을 줬다. 편지 문면에서 저자의 친절함을 느낄 수 있었다. 영어로 뭔가를 쓴다고 하면 완벽함에 대한 강박에 시달리기 마련이다. 그런데 한국인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면 뭔가 틀리게 쓰더라도 전혀 문제가 안 될 것같다.
'북필리아', 그런 표현은 아직까지 없었던 걸로 안다. 진정 책을 사랑한다는 건 무엇일까. 좀 생각해봐야 할 문제일 것같다. 하지만, 이렇게 저자에게 자신의 소감을 편지로 쓰는 것 역시 북필리아적 실천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결과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영어 책 읽고 저자에게 편지 쓰기는 그렇게 어렵지 않다, 오히려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