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보던 중국 서적을 오늘 대강 다 읽었는데, 읽으면서 몇 군데 잘못된 곳들이 보였다. 단순 오타가 대부분이고 하나는 역자가 잘 몰라서 벌어진 실수같다. 프랑스 사람 이름은 마지막 자음이 묵음인데 중국어로 자음을 표기한 것이다.

이런 것들을 알려주고 싶은 생각이 있었는데, 마지막 출판사의 당부 글에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알려달라는 말에 기를 받아서 난생 처음으로 짝퉁 중국어로 잘못된 곳 사진으로 찍어서 메일 보냈다.

답장이 올지 안 올지 지켜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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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sulemono 2018-11-24 0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락 안 옴. 안 올 것같음.

다락방 2018-12-21 15:03   좋아요 0 | URL
한 달이 지났는데, 답장은 아직인가요?

wasulemono 2018-12-21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처음부터 예감한 것이지만요^^
 
藝術光晕中的電影 (第1版, 平裝)
世界圖书出版公司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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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지난주에 배송됐다. 주문한 지 한 달 정도는 된 것같다. 전에는 한 번 이야기한 것같은데, 외국 서적 중에서도 유독 중국 서적은 배송이 느리다. 미국 서적이나 일본 서적은 보통 일주일 정도면 배송된다. 가끔은 더 빨리 배송될 때도 있다. 그런데 중국 서적은 언제나 한 달이라는 시간을 잘 지키는 편이다. 지리적으로 보면 일본과 멀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책만 유독 느리다. 요즘 흔히 하는 직구의 경우에 중국 상품이 일찍 도착하는 것에 비하면 정말 심한 편이다. 그래서 가끔은 중국 서적을 주문해놓고 택배를 받고서야 내가 그 책을 주문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도 있다.

 

여하튼 이런 사정임에도 가끔 중국 서적을 주문한다. 직업적인 것과는 무관하게 순수한 독서용이다. 중국어 실력이 완벽한 건 아니지만 대충의 독해는 되는 편이다. 그런데 언어라는 건 습관성이어서 그런지 멀리하면 멀어진다. 그래서 그런 이유에서라도 자주는 아니더라도 책을 통해서 일정 정도의 독해력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다만, 독해력이나 어학력을 염두에 두고 있을 때도, 그런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그 내용이 내가 즐길 수 있어야 해서, 평소 내 취미를 다룬 책들을 선택하는 편이다. 취미가 음악이나 영화여서 그런 내용을 다룬 책들을 종종 선택한다.

 

이 책은 그런 취지에서 고른 것이다. 단순히 영화 소개가 목적인 책은 아니고, 영화를 특정한 시각에서 분석적으로 읽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의 원전이 나온 건 1983년인데 중국에서는 2011년에 번역됐다. 그런데 이 땅에서는 번역되지 않았다. 적어도 이런 점에서는 우리가 중국보다 뒤진 편이다.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아니면 역자의 문체 탓인지 중국 서적에 약간 적응이 안 됐다. 아니면 원저자의 문체나 내용상의 영향인지도 모르겠다. <국가의 탄생>이나 <불관용>으로 유명한 데이비드 그리피스의 <훑어진 꽃잎>를 다룬 1장을 읽을 때 좀 헤맸다. 어떤 책이든 앞부분에선 약간의 애로는 있을 터. 이 영화를 보긴 했지만,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애로가 더 했던 것같다. 프리드리히 무르나우의 <선라이즈>를 다룬 2장에서는 이런 혼란이 덜했다. 이 영화는 두 번쯤 봤는데 비교적 최근에 봤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원자자인 데이비드 보드웰은 영화의 내용보다는 화면구성이나 카메라 워크 쪽에 관심이 있는 것같다. 주로 그런 이야기들 중심으로 페이지들이 흘러간다. 그래서 영화를 줄거리나 내용적 측면에서 보고 즐기는 독자에게는 좀 따분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그런 따분함을 상쇄시킬 만한 장점이 이 책에는 분명히 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그 영화들을 한 번 다시 보고 싶어진다는 것. 다들 명작이니까.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재적응의 과정을 거치다 보니 읽는 속도는 빨라졌지만, 일주일 동안 이제 반 정도 읽었을 뿐이다. 그래서 이 책에 대해서 독후감이라도 쓸라치면 아마 한 달을 걸릴 것이다. 그러다 보면 글쓰기는 월례행사가 되거나 말거나 그렇게 예전처럼 유야무야되지 않을까. 그래서 비록 정제되지 않은 잡설 수준이나마,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 그 주에 읽은 책이라든가 책에 관한 생각들을 쓰자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이 글은 사실 서평도 독후감도 아니고 그냥 책에 관한 잡설이다. 그 잡설의 깔개로 저명한 학자님의 책을 사용해서 죄송하긴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라도 노출시켜 드린 건 잘한 일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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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도 제작된 소설 <달콤한 내세>의 작가 러셀 뱅크스는 ˝우리 대부분은 매우 일찍 배움을 접고 그 지점에서 자기 삶을 방어하며 나머지 인생을 살아간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뱅크스의 말에 기대 생각해 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배움의 과정을 지겹게 느끼고 한시라도 바삐 사회에 나가서 직장을 잡고 돈을 버는 생활을 동경한다. 무슨 일이 닥치면 뭔가를 배우던 그 시점의 가치관으로 삶을 재단할 뿐, 제대로 배우지 못한 채 ‘꼰대‘나 ‘아재‘나 ‘한남‘(성별을 떠난 단무지의 상징)으로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렇게 나이를 먹다보면, 청소년보다 못한 성인이 될 수도 있고, 노인이면서도 정작 어른 대접은 못받는 곤경에 처할 수도 있다.

배움을 멈추지 않겠다고 결심할 때, 진정 젊음을 유지할 수 있지 않을까.

˝당신 젊음의 비결은 무언가요?˝라고 누가 물어준다면, ˝독서요.˝, ˝공부요.˝라고 대답해보고 싶다.

누군가 ˝당신은 당신 생각만큼 안 젊어요.˝라고 하면, 어쩔 수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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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슈베르트의 피아노5중주 중에 <숭어>란 곡이 있다. 지금은 사라진 빵집 체인 크라운베이커리 광고에도 사용돼 어느 연령대 이상에게는 익숙한 선율의 곡이다. 물론 ‘숭어‘가 아니라 ‘송어‘라는 이야기가 있긴 하지만... 여하튼 슈베르트의 이 곡때문에 숭어는 서구적 이미지를 갖게 된 것이겠으나 한국문학의 맥락에서 보면 숭어는 엄흥섭이란 작가때문에 비극적인 기호이기도 하다.

엄흥섭은 남한 출신이지만 한국전쟁때 월북했다. 카프 작가였으나 그렇게 지명도 있는 작가는 아닌데, 그가 1930년대에 쓴 작품 중에 <숭어>란 단편이 있다.

숭어가 명물로 소문난 마을의 소작농 주인공 춘보가 어느 여름날 하루를 투자해 잡은 숭어때문에 둘쨋딸 옥순이를 잃게 되는 비극적인 이야기다.

숭어가 왜 딸을 죽였던가.

가난한 춘보는 잡은 숭어를 밑보인 지주 김참봉에게 소작 유지책으로 선물하려 하나, 김참봉은 그런 허접한 물고기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그 숭어를 팔기 위해 장터로 걸음을 옮겼으나 다 죽어가는 물고기를 사줄 사람은 없었고, 그걸 버리도 오기엔 너무 가난했던 그는 썩은 내를 풍기는 숭어를 집까지 가져다가 아내더러 조림을 만들라 했고, 그 조림의 썩은 내보다 주린 배가 더 공포스러웠던 둘쨋딸은 썩은 숭어 조림을 먹고 배탈이 났다. 그 배탈기는 다스리고 한끼를 굶겼으나 부모가 없는 사이에 깬 옥순은 여전히 남아있던 숭어 조림을 잘못 먹고 가시가 목에 걸렸다. 어떻게 해도 딸 목에 걸린 가시를 뺄 수 없었던 춘보가 김참봉을 비롯한 동네 유지로부터도 냉대를 당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 둘쨋딸은 죽어 있었다.

생선 가시에 걸린 딸 옥순이의 고통은 어린 시절 생선 가시가 목에 걸려 패닉을 경험한 사람들은 충분히 짐작할 것이다. 죽지 않을 걸 알기는 하지만 그래도 죽을 것만 같던... 그런 고통에 지쳐 잠들고 결국 그 고통과 씨름하다가 똥을 한 무더기 싸놓고 옥순이는 숨이 멎은 것이다. 이미 첫쨋딸을 잃은 경험이 있는 주인공 춘보에게 그 둘쨋딸마저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상상을 절하는 것이다.

주인공은 자신을 탓한다. 지주에게 알량한 선심을 바쳐 소작을 유지하려고 하지만 않았더라면, 처음부터 장터로 작행해서 빨리 팔았더라면, 한여름 똬약볕에서 빨리 썪어버린 생선을 과감히 버렸더라면... 그러나 결국 분노는 소작제적 모순의 타깃인 김참봉에게로 향한다. 달리 무슨 대안이 있을까. 내가 춘보라도 낫을 들 것같다.

이 작품은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하 소작농의 비참이란 무엇인가를 절절하게 되새기게 하는 구석이 있는 명편이다. 특히 자신이 잡은 생선 가시로 딸 자식을 잡은 가난한 아버지의 이야기란 점에서 오랫동안 가난했던 이 땅에서의 삶을 상기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 비하면 김동인의 <감자>는 얼마나 장난같은 수준인가.

북한에서도 어른에 대한 존경과 타인에 대한 예절을 중시한다. 그럼에도 한때 계급적 적대세력에게는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가차없는 증오를 가르치고 장려했다고 한다.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그가 지주라면 꼬마에게도 그를 ‘지주놈‘이라고 부르도록 가르쳤다고 한다. 그런 어법에 과한 면이 분명히 있지만, 식민지 지주제하 소작농이 겪었을 고통들을 생각할 때, 그런 분노의 언어를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이것도 일종의 미러링이라면.

여하튼 살면서 ‘숭어‘가 언급될 때마다 ‘슈베르트‘나 ‘회‘가 아니라 ‘엄흥섭‘이나 그의 주인공 ‘춘보‘나 그가 죽인 불쌍한 딸 ‘옥순‘을 떠올려볼 수 있다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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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11-04 18: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TV 시사교양 프로그램에서 봤는데, 어떤 나이 든 무연고자는 음식쓰레기통을 뒤져서 생계를 연명했어요. 지금도 복지의 사각지대 속에 비참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아요.

wasulemono 2018-11-04 18: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런 일이 지금 대한민국에서 있어선 안 되겠습니다.
 
마루가 꺼진 은신처
이치은 지음 / 알렙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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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독서 패턴은 대개 일정할 것이다. 책의 종류나 장르, 독서 시간대나 시간 등등. 한번 형성된 그런 패턴들은 대체로 일정하게 유지될 것이고, 그런 항상성이 깨지는 걸 막기 위해 노력도 할 것이다. 그중 어떤 하나에 변화가 생기기도 하지만, 그런 변화의 순간들이 왜, 어떻게 찾아왔는지를 의식적으로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예를 들면 나는 소설을 좋아하지만, 결코 많이 읽는 편은 아니다. 1년에 몇 권 읽지 않는다. 몇 권 되지 않는 독서량을 기준으로 이렇다 저렇다 하는 건 무의미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대체로 소설 독서에 있어서 적어도 나는 보수적인 편이다. 정평이 난 작품들 위주로 선별해서 읽는다. 소위 말하는 고전의 범주에 드는 작품들이라면 굳이 창작 연대나 작가의 국적이나 성별은 따지지 않는다. 다만, 그때그때의 기분이나 자극에 따라서 가끔 골라 읽는 정도다. 현대에도 소설들은 계속 등장하고 있지만, 그것들을 선별할 만한 정보가 부실한 경우가 많으므로 섣불리 찾아 읽게 되지는 않는 것같다. 그러나 누군가의 추천이라는 계기가 있다면 가끔 새로운 작품들에 관해 관심을 가져보게도 되는 것같다. 그 수많은 소설들을 누가 무슨 수로 다 관심을 둘 수 있단 말인가. 그렇기에 추천은 정말 중요한 계기가 된다. 물론 그 추천자에 대한 신뢰가 바탕이 된다는 전제하에서.

 

그런 바탕 하에서 관심을 두게 된 작가가 이치은이다. 짐작대로 물론 한국 작가다. 90년대에 등단했으니 고전의 반열에 오르고 말고를 따기에는 아직 이른 시점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이 작가에 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난 흘려듣는 척했지만, 그 이름을 인상 깊게 들었고 그가 어떤 작품들을 써왔으며 어떤 부류의 작가인지 관심이 있었다. 그러다 가장 최근에 발간된 이 작품을 읽게 됐다. 나는 특이한 습관이 있는데, 작품을 읽을 때 하루에 딱 20쪽만 읽는 것이다. 더도 덜도 안 된다. 20쪽만 읽기. 이건 마치 한 끼 밥을 먹는데 쌀 2,000알만 먹기와 비견될 수 있는 행위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런 습관이랄까 규칙을 깨뜨리고 읽어버리고 말았다.

 

누가 무슨 이유에서 기획한 건지는 모르지만 암살의 정황에 연루된, 각자의 사연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가는 이야기 방법을 취하면서 전개된다. 이처럼 단일한 화자가 등장하지 않는 전개 방식은 이제 더 새롭다고는 할 수 없다. 그래서 특별히 당혹스러움은 없었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엉성하던 그물코가 촘촘히 짜여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잘 짜인 각본 아래에서 자기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연기자들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느낌이었다.

 

이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퀜틴 타란티노의 영화들이나 <레옹>같은 킬러 영화, <세일러복과 기관총>같은 일본영화, 그리고 암울한 디스토피아 영화들, 기억과 현실의 착종과 분리 불가능성을 주제로 한 2000년대 영화들이 생각났다. , 불가사의한 명령에 시달리며 끊임없이 미로를 헤매는 카프카 소설들, 그리고 꿈과 현실이 뒤죽박죽으로 얽혀있는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그림들이. 작가는 이 소설의 동기가 인디밴드 어어부프로젝트의 노래라고 했지만.

 

등장인물들은 사연이 있지만, 작가는 감정을 배제한 채, 그들의 행위와 거기서 느끼는 불안과 긴장감, 미혹 등에 관해서만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 불행한 사람들 다수는 결코 행복한 결말을 갖지 못한다. 그리고 끝내 암살 프로젝트의 발주자와 그의 동기에 대해서 독자는 알 수 없다. 이 소설에는 안정적인 기승전결도 없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놀람보다는 그것마저 허락하지 않는 당혹스러움만을 주저음으로 하는 이상한 소설이다.

 

소설만큼 다양한 취향과 관심하에서 분리해서 취할 수 있는 독서 영역이 있을까. 누군가는 장르 서사의 독자일 것이고, 누군가는 공인된 리얼리티 서사의 독자일 것이고, 누군가는 공인이 필요하지 않거나 그걸 부정하는 서사의 독자일 것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이 소설은 마지막 독자를 위한 서사인 것같다. 독서의 결과로 환상이나 현실을 요구하는 독자가 아니라 불확실과 혼돈과 비몽사몽을 요구하는 독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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