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정치의 악몽 - 국가폭력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21
조현연 지음 / 책세상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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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추석 쇠러 가는 기차 간에서 서서 읽었다. 추석 분위기에 맞지 않는 내용이긴 하지만 상당히 의미 있는 독서체험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 책을 읽게 된 건 올해 들어 유난히 내 관심을 사로잡은 몇 가지 이유 때문이다. 올 초 모 시사주간지에 실린 최종길 교수 의문사, 주한미군 탱크에 깔려 죽은 여중생들, 허원근 일병 의문사. 이것들은 하나같은 국가권력을 매개로 한 국가폭력으로 얼룩진 한국현대사의 오점들이다.

최교수의 선홍색 피를 흘리며 엎드려 있는 사진, 복숭아 뼈가 선명히 드러난 부검 사진, 탱크에 압사한 채 널브러진 주검, 구식 카키색 군복을 입은 총상 선명한 주검들을 주기적으로 마주 하며 너무도 잔혹한 세월을 넘어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옆에서 지나가는 장갑차의 캐터필러 소리만으로도 가슴을 떨었던 기억에 그 여중생들에게 닥친 압사의 고통이 몸서리치도록 생생하게 다가온다.

폭력과 살인을 통하지 않고는 권력 유지가 불가능했던 부도덕하고 불의한 권력의 한 쪽에 등 기대고 버틴 이 땅에서의 삶을 마주하며 칠레 같은 중남미 국가를 어줍잖게 동정하는 일이 얼마나 우스운 일일까 생각했다.

그러나 국가가 직접 개입하여 휘두르는 것만 폭력이고 살인일까. 노점상 단속 때문에 분신 자살한 박봉규 씨를 보며 그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국가권력이 힘없는 서민의 생존권을 차압하고 국민을 내동댕이친 것도 엄연한 간접 살인이다.

사람들은 이 책을 보며 그냥 과거지사라고 가볍게 넘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사건들 중에 기억의 저편으로 넘겨버릴 만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 사실이 오히려 두렵다.

요즘 <야인시대>라는 드라마가 인기를 얻고 있는 모양이다. '긴또깡'으로 알려진 정치깡패 김두한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는데, 그 사람의 인생에 극적인 모멘트가 많다고는 하지만 그다지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김두한으로 대표되는 한국현대사의 얼룩을 밀가루로 덮어버리는 영웅적 미화일 뿐이다.

이 책을 대하는 지금 난 마치 대학 신입생 시절로 다시 돌아간 것같은 느낌이다. 무수한 죽음들과 마주치며 두려워했고, 하루도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그 시절. 그렇지만 다행인 것은 지금이 2002년이라는 사실이고, 두려운 것은 삶이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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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천에는 똥이 많다
이창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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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 선배들이 추천하는 소설 중 하나가 이창동의 소설이었다. 그의 첫 소설집 <소지>보다는 그 당시 나온 <녹천에는 똥이 많다>라는 소설 제목 치고는 밋밋하고 거친 제목의 소설집이 추천 상위에 올랐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기억만 있고 스토리조차 가물가물한 채 시간이 흐르고 흘렀다. 그의 다음 작품이 나오기를 기대하고 있던 중 어느 날 영화판으로 뛰어들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90년대 초반 신세대 논쟁이 사회 각 분야에서 일어나면서, 그리고 기술 혁신과 경제적 풍요가 결합되면서 영화 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지적인 젊은이들이 영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80년대 독보적인 권위를 부여받은 소설계에서도 이전처럼 역사, 진실, 가치와 같은 카테고리를 안고 뒹구는 소설보다는 감각, 쾌락, 욕망을 코드로 내세운 영화 같은 소설이 가장 좋은 소설 비슷하게 대우받던 시절이었다.

군부 개발 독재에 삶을 차압당하며 고통받는 사람들, 이에 저항하면서도 나약한 일면을 감추지 못하는 사람들, 소시민적 안락과 평화를 구하지만 삶의 균열에 혼란스러워 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가 <녹천에는 똥이 많다>에는 가득하다.

가장 80년대적인 소설을 써온 이창동의 변신을 나는 호기심 반 근심 반 섞으며 지켜보았다. 마흔을 넘긴 나이에 새로운 판에 뛰어들기가 어디 쉬운가. 그것도 노가다에 가까운 영화판이니 더 말할 것도 없을 테고. <오아시스> 이전에 그가 내놓은 <초록물고기>, <박하사탕> 2편은 <녹천에는 똥이 많다>의 세계에서 그다지 멀지 않다. 이 두 편의 주인공은 모두 삶의 변두리로 밀려난 인생의 패배자인데, 그 인생의 패배에 직면한 주인공들은 잃어버린 가족과 사랑이라는 기억의 원점으로의 회귀를 열망한다. 삶에서 더 이상 뿌리내릴 수 없을 정도로 파헤쳐질 때 시간은 거꾸로 방향을 틀게 된다.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은 <녹천에는 똥이 많다>의 주인공들의 경우처럼 폭력적인 국가 권력이거나 냉혹한 자본주의와 같은 거대한 기구이다.

이창동의 영화와 소설이 다른 듯 하면서도 비슷한 테마의 변주처럼 느껴지는 것은 운명처럼 거대한 세계에 맞서 때로는 저항하며 결국에는 산산이 부서지는 캐릭터를 부각시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교차점에 놓이는 것이 <녹천에는 똥이 많다>라는 소설집이다. 이창동은 작가 후기를 통해 그동안 써온 것과는 다른 글을 쓰고,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살고 싶다는 욕망을 피력하고 있다. 그 당시에는 그 자신도 미쳐 감을 잡지 못했겠지만 그는 지금 누구보다도 멋진 변신에 성공한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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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방 버지니아 울프 전집 3
버지니아 울프 지음, 오진숙 옮김 / 솔출판사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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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의 고전 중 하나로 알려진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은 이번 학기 수업 과제로 내가 제시한 책들 중 하나다. 각 분야로 나눠 3권의 책을 지정하고 그 중 한 권을 읽고 글을 쓰는 과제인데, 공대생들이라 이 책을 많이 선택할 것같지는 않다. 공대생들 중에도 의외로 문학적 감수성이 뛰어난 사람들을 종종 보아온 터라 그런 의외성을 기대하는 구석도 있긴 하다. 나 역시 읽어보지 못한 책이라 나 자신이 만들어놓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 애들과 함께 책들을 읽어나가기로 했다.

영국의 여대 강연 원고를 기초로 다듬어진 이 글에서 가장 명확하게 들어오는 메시지는 여자가 글을 쓰기 위해서는 돈과 방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이 책의 해설자는 이런 메시지만 읽으면 안 된다고 하지만 굳이 잘 들어오지도 않는 메시지 때문에 노심초사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메시지는 당대의 여성에게만 적용되는 문제는 아니다. 요즘을 살아가는 남자에게도, 그냥 먹고 살아가기 위해서도 돈은 필요하고, 굳이 글을 쓰지 않더라도 자기만의 방은 소중하다. 최근의 내 생활에 비추어봐도 이런 메시지는 현실 정합성이 충분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의 상황으로까지 확대 해석하여 이 책의 중요성, 그리고 당대적 맥락에서의 이 메시지의 중요성을 놓친다면 굳이 울프의 책까지 읽는 수고를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울프의 이 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 고려되어야 할 것은 이런 메시지의 발화 주체와 청자가 글쓰기를 희망하거나 거기에 관심을 가진 젊고 지적인 여성이라는 사실이다. 여성의 재산권, 교육권, 투표권 등 인간의 기본권의 역사가 미약하고 독자적인 사유를 펼쳐나갈 안정된 공간이 부재한 상황에서 창의적인 활동이 글쓰기로 제한되어 있는 여성에게 글쓰기는 유일한 탈출구이자 희망이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제인 오스틴마저도 안정된 공간을 갖지 못한 채 글을 썼다는 울프의 얘기는 당대의 글쓰기가 여성에게 그렇게 녹녹한 작업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돈과 방에 대한 강조와 더불어 여성의 글쓰기의 비전은 울프의 이 책에서 경청해야 할 대목이 아닌가 싶다. 여성문학의 전통이 부재한 현실에서 여성은 남성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독자적인 관계망을 갖는 존재로 그려져야 하며, 여성의 이야기를 풀어낼 독자적인 문체와 방법을 가져야 하며, 여성성이라는 자의식에 갇히지 않고 양성성에 자신을 열어놓을 때 훌륭한 글쓰기가 가능하리라는 울프의 주장에는 지금도 그 유효성이 다하지 않는, 아니 최근 우리 맥락에서 문제시되기 시작한 논점이 포함되어 있는 듯하다.

지금 주변에는 많은 여성들이 글쓰기에 나서고 있다. 비단 문단에 이름을 걸고 하는 글쓰기뿐만 아니라 자신을 내던지는 무수한 글쓰기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런 글쓰기 중에는 나를 불편하게 하는 글쓰기도 있다. 여성이라는 자의식에 갇혀 그 주변만을 맴도는 자폐적인 글쓰기, 그것은 가장 소극적인 글쓰기에 속한다. 글쓰기는 자폐를 넘어선 드넓은 세상과의 소통을 욕망하는 안타까움과 절실함의 기호이다. 그러나 채 그런 가능성마저 닫아버린 채 자신의 언저리만 맴도는 글쓰기는 글쓰기의 주체뿐만 아니라 독자에게 하강의 고통을 줄뿐이다. 글쓰기는 자신의 최후의 용기로 나아가는 싸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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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여인 해문 세계추리걸작선 1
윌리엄 아이리시 지음, 최운권 옮김 / 해문출판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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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아이리시의 <환상의 여인>을 읽기 시작한 게 한 달 가까이 전의 일이다. 이런 류의 소설은 흥미 때문이든 잡스럽다는 편견 때문이든 그 어느 쪽이든 간에 며칠 내에 끝장을 보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보통과는 달리 이 소설을 읽는 데 꽤 시간이 걸린 이유를 읽을 시간이 없었다는 이유로 돌리기는 꺼림칙하다. 이 소설을 읽기 시작한 이후로 일을 하면서도 이런 저런 책들을 읽었기 때문이다.

추리소설 부문에서 1, 2위를 다툰다는 찬사와는 달리 중간 부분을 읽는 게 꽤 지루했다. 아내와 말다툼한 남자가 어느 날 밤 이름도 모르고 얼굴조차 희미한 여인과 쏘다니다가 때마침 발생한 아내 살인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고 결국에는 사형 선고를 받는다는 초반의 희한하고 급박한 상황과는 달리 형사 버지스, 남자의 친구 롬버드가 난국을 헤쳐 가는 맥락이 쉬이 잡히지 않는 중간 부분은 지루했다. 그러나 결국 작품의 말미에 가서야 이 성가신 중간 부분의 맥락을 이해할 수 있었다. 추리소설이 매 페이지마다 서스펜스와 추리의 묘미를 주는 것은 아닌 셈이다. 추리소설의 영화 버전인 필름 느와르에서도 형사나 탐정은 의미가 모호한 수 없이 많은 장면들에 등장하고 그 장면들은 작품의 말미에 가서야 한 줄로 꿰어지기 마련 아니던가.

이 사건의 실마리를 풀고 사건의 맥락을 종합하는 쪽은 역시 추리소설답게 형사 버지스인데, 이 사람은 내러티브가 진행되는 현장에서 종적을 감춘 채 내러티브를 전개해 나가고, 헨더슨의 친구 롬버드가 친구의 알리바이를 증명하기 위해 환상의 여인을 찾아 나선다. 작품의 결말부에서 버지스는 이 사건의 전반적인 얼개와 부수적인 사건들의 의미를 충실히 설명함으로써 모든 의혹은 해결된다. 중간 부분을 읽어나가면서 답답하고 암울해져 조급증까지 느낀 독자로서는 다행으로 느껴지지만, 이 게임에서 승리하지 못했다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게임에서 질 수밖에 없었던 건 내 신경이 온통 그 환상의 여인에 기울어져 사건의 전반적인 얼개를 채 분석하지도 못한 채 작가의 발걸음만 좇아 다녔기 때문이다. 남자인 탓일까?

필름느와르에서 여자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보통 여자는 미스터리의 근원이자 환상의 근원으로 위치한다. 이 미스터리를 풀어서 논리적으로 설명 가능한 그 무엇으로 돌려놓는 쪽은 항상 남자이다. 비논리가 엄정한 논리로 전화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쾌락, 그것이 추리소설의 매력이다. 세상에는 이성의 엄정한 개입으로 해명되지 못할 것은 없다는 그 자명성에 대한 확신을 동반한 미스터리에 대한 도전은 가장 지적인 게임의 일종이다. 이는 추리소설의 작가들과 그 독자들의 지적 수준과 일치하는 현상이다. 대체로 유명한 작가들은 명문대 출신이 많고, 추리소설의 독자들 중에도 꽤 지적인 사람들이 많다. 독일의 문예이론가이자 역사철학자 발터 벤야민,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자이자 추리소설의 사회사인 <즐거운 살인>의 저자 에르네스트 만델, 본격소설의 필명과는 다른 필명으로 추리소설을 쓰는 소설가들 등은 그런 부류의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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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영화사 동문선 현대신서 17
막스 테시에 지음, 최은미 옮김 / 동문선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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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일본영화에 대해 통시적으로 접근한 거의 유일한 책이다. 이론이나 비평과 더불어 역사는 영화에 다가가는 삼각 고리의 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론이나 비평 쪽 서적이 압도하는 현상은 우리가 여전히 총론과 실제 비평의 영역을 헤매고 있다는 현실의 반증처럼 보인다. 역사의 흐름을 읽지 못할 때 개별 사건들은 문맥과 접목되지 못하는 기이한 언어행위처럼 느껴지기 마련이다.

막시 테시에라는 프랑스인의 일본영화사를 번역했다는 사실은 특이하다. 일본의 영화 문화와 역사를 가장 잘 이해하고 충실히 서술할 수 있는 능력과 권위는 그 당사자에게 있음이 분명한데, 왜 굳이 일본 저자가 아닌 이국의 저자가 쓴 책을 번역한 것일까? 프랑스라는 국적이 권위를 부여해주는 것일까?

이 책의 특징이라면 일본영화의 미학적 가치를 가장 먼저 발견한 칸, 베니스 영화제, 그리고 일본의 작가영화에 대해 열광적이었던 프랑스 영화비평지 <카이에 뒤 시네마>, <뽀지띠프>를 둘러싼 유럽 쪽의 관심이 적절히 반영된 시각에서 일본영화사를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의 정치사회와 영화제도 상 변동의 축을 따라 구로사와, 오즈, 미조구치, 스즈키, 오시마, 키타노(비트), 미야자키로 이어지는 일본영화의 큰 맥을 훑으면서 나아가는 이 책에는 기존의 상식을 크게 뒤집을 만한 내용은 없는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단편적 지식의 수준에서 질서를 잡지 못하던 일본영화에 대한 지식을 일련의 흐름으로 꿸 수 있는 계기로서는 충분하다.

이 책을 읽는데 긴장이나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다. 금방 읽힐 분량에다 번역도 수준급이기 때문이다. 부록으로 일본영화의 프랑스 출시 현황이 소개되어 있다. 처음에는 한국 출시 현황인줄 착각했다. 아쉬운 점이다. 프랑스에는 흔히 거장으로 불리는 일본 영화 감독의 작품들이 꽤 출시되어 있다. 우리와는 사정이 많이 다르다는 점을 직감할 수 있다.

일본영화는 꾸준히 소개되고 있지만 여전히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그 미지의 영역에 대한 몽상이 실제 이상의 기대와 환상을 부풀리는 일은 하루바삐 사라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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