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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수용소에서 (보급판, 반양장) - 빅터 프랭클의
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 청아출판사 / 2017년 12월
평점 :
품절
인간은 어떤 환경에도 적응 할 수 있다.
빅터는 아우슈비츠의 열악한 환경에서도 사람이 적응해서 살아간다는 것을 예를 든다.
이를 닦을 수 없었지만 잇몸은 오히려 그 어느때보다 건강했다고.
그런데 인간이 어떤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다지 희망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고통에 둔감해지고, 예의를 차리기 어려운 상태로 스스로 내가 인간인가 싶은 환경이라면
적응하지 못하여 차라리 살수 없어진다면 좋겠어.
비인간적인 환경을 살아내야 하고 그 증언을 그러나, 고통스러워도 들어야 하는것이 멀미난다.
어느날 아침에는 평소 꽤 용감하고 의연한 것으로 알려진 한 친구가 어린 아이처럼 엉엉 우는 것을 보았다. 신발이 그가 신기에는 너무 작아 할 수 없이 맨발로 눈 위를 걸어 작업장까지 가야하는 처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료가 슬퍼하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도 나는 다른 신나는 일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호주머니에서 작은 빵 조작을 꺼내서 그것을 게걸스럽게 먹느라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사람을 가두고 학살하는 것을 고발하는 아우슈비츠가 아니라
하루하루 죽지 않고 살기위해 버텨내는 사람의 마음속을 들여다 보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다.
그것을 모른 척 하고 사는 것은 오히려 잔인하기 때문에 빅터의 고백과 의견을 읽는다.
피해자가 증언하는 성찰의 아우슈비츠다.
생존의 위협을 겪으며 억울함과 분노로 넘치면, 고상하고 우아하게 살기 어려워진다.
만약 강제수용소에 있는 사람이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노력으로 이에 대항해서 싸우지 않으면, 그는 자기가 하나의 인간이라는 생각, 마음을 지니고 내적인 자유와 인격적 가치를 지닌 인간이라는 생각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자신을 거대한 군중의 한 부분에 불과한 존재로 생각한다. 존재가 짐승과 같은 수준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생각이나 의지가 없는 양떼처럼 무리지어 -때로는 여기에 있다가 그 다음에는 저기로, 때로는 함께 몰려다니다가 때로는 서로 떨어져 다니는- 다니게 된다.
따라서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우리는 글자 그대로 군중 속에 자기 자신을 파묻으려고 애를 썼다.
사람들은 양떼이고, 카포들은 좀비다.
영혼을 온전히 지키며 살 수 없으니 영혼을 묻어 둔다.
어쩌면 대한민국 사회는 그 자체로 거대한 수용소인가.
최근의 미투운동은 더이상 거대하 수용소에서 영혼을 묻어둔체 양떼속에 숨에 살기 어려워진 사람들이
나도 사람이라고 내적인 자유와 인격적 가치, 스스로의 존엄을 위해 소리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번은 부종 때문에 고생하던 동료에게 어떻게 나았냐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그가 이렇게 대답했다.
"실컷 울어서 내 조직 밖으로 몰아냈지."
한동안 이 문장을 바라 보았다.
인간의 정신상태 - 용기와 희망 혹은 그것의 상실- 와 육체의 면역력이 얼마나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희망과 용기의 갑작스러운 상실이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는지 이해할 것이다.
맞다. 인간은 정말 놀라워.
마음이 아프면 몸도 아프고, 몸이 아프면 마음도 약해진다.
그래서마음이 아플때는 몸을 움직이고 단정히 하면 마음의 고통이 덜해지기도 하더라.
몸이 아플때는 마음을 의연하게 먹어야 하기도 하지.
인간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은 긴장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가치 있는 목표, 자유의지로 선택한 그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투쟁하는 것이다.
빅터는 그래서 거기가 수용소든 아니든 자유의지로 선택한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투쟁하며 살고 있는지 묻고 있다.
수용소에서 사람의 정신력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그에게 먼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보여 주는데 성공해야 한다.
노력하고 투쟁하는 것을 선택할 만한 가치와 희망이 내 삶에 있는지 답해야 하는거다.
오늘을 사는 나의 희망은 뭘까.
나는 왜 자꾸 한국사회가 수용소처럼 느껴지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