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의 효용 - 노동자계급의 삶과 문화에 관한 연구 질문의 책 5
리처드 호가트 지음, 이규탁 옮김 / 오월의봄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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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계급과는 관계없이 진지한 태도를 가진 '평범한 일반 독자' 혹은 '지적인 비전문가'라고 부를 수 있는 모든 독자에게 이 이야기를 전한다고 생각하며 이 책을 집필했다. 


현재의 문화적인 상황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불길한 모습 중 하나가 바로 전문가들의 전문적인 언어와 엄청나게 수준 낮은 대중매체 사이의 괴리이기 때문이다. 


1952년 영국의 인문사회학자 호가트가 쓴다. 

전문적인 언어와 엄청나게 수준낮은 대중매체 사이의 괴리는 가속화되어 지금은 2017년 대한민국은 엄청나다. 

영국의 BBC는 가끔 보면 그래도 우리 수준보다는 높아 보이던데, 영국사람이 보기에는 답답할 수도. 


이러한 특성들의 근거는 주로 영국 북부 도시지역에서 내가 겪은 경험, 1920-1930년대에 내가 보낸 어린시절 그리고 그 이후로도 꾸준히 이어진 해당 계습과의 접촉에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한다. 


여러가지 생각을 하며 읽었다. 

1) 호가트는 1950년대에 영국노동자계급의 문화에 대해, 자신의 어린시절의 경험과 현재를 비교하며 망라했다. 

그 결과를 떠나서 그 과정이 부럽다. 

2017년이면 이제 대한민국도 이런 수준의 한국노동자계급의 문화에 대한 서술이 있어야 하는것 아닐까. 


2) 호가트는 계급이라는 말을 편안하게 쓴다. 

대한민국에서 계급이라는 말은 전문적인 언어거나, 빨갱이라는 편견을 불러일으키는 단어다. 

평범한 일반독자를 상대로 쓰기에 불편한 단어라는 말이다. 이것도 영국이 부럽다. 

계급을 계급이라고 쓰지 못하는 것은 권력을 가진 계급에게 유리하거든. 


3) 호가트는 노동자계급 출신이다. 

그는 책을 좋아하지 않는 노동자계급의 가정에서 유독 책을 좋아하는 이상한 꼬마 였다가, 마침내 인텔리 지식인이 되었다. 

자기 출신 계급을 애정하면서도 자기 존재에 대한 인텔리 특유의 불안함을 느낀다. 

그런 예민함이 행간에 느껴질 때마다, 뭔지 알 것 같았어. 

이것은 노동자계급 출신 호가트의 자기 고백, 혹은 자기 분석이기도 하구나. 


4) 그래서 그는 노동자계급의 문화가 점점 긍정적인 활력과 비범함을 잃고 

대중문화를 생산하는 값싼 자본의 의도대로 수준이 낮아지는 것이 걱정스럽다. 

문화비평으로의 걱정이라기 보다 자기 존재가 이용당하고 길바닥에 내팽겨쳐지는 듯이 안타까운 것 같아. 



1970-1980년대 한국의 광산촌, 내 어린시절이 자꾸 생각나더라. 

그때 1세대 노동자였던 내 아버지 세대 광부들에게는 어떤, 문화가, 있었던가. 

2017년 대한민국의 노동자들에게는 어떤, 문화가, 있나. 

대한민국의 노동자들이 계급, 이었던 적이 있나. 


스베틀라나를 읽고 전쟁을 경험한 러시아의 성찰이 부럽더니 

호가트를 읽고 노동자계급의 문화를 분석하고 정리하는 영국의 지성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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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승리자 박열 인문의 숲 나무 5
후세 다쓰지.나카니시 이노스케 지음, 박현석 옮김 / 현인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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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화 박열을 보고 와서 박열과 후미코에 대해 읽어보기로 했다. 

매력적인 사람들이다. 


"저는 저주하기 시작한 천황을 끝까지 저주하고 싶다, 있는 힘껏 옥사하는 그 순간까지 끝까지 저주하고 싶다, 가능하다면 저주해서 죽이고 싶다, 천황을 저주해서 죽일 힘을 끝까지 잃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랬기에 1926년 4월 6일, 지바 형무소에 투옥된 첫날부터 살아 나오기 전 아키타 형무소에서 보냈던 마지막 날까지 냉수마찰을 하루도 게을리 하지 않고 계속했습니다. 그 건강법이 저를 살아 돌아오게 한 것입니다."

너무 너무 억울한대, 나를 억압하고 내 삶을 망가뜨린 거대한 권력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을때, 분노가 넘칠때

내 비록 힘이 없으나 너의 저주로 죽이고 싶다는, 그럴수 있을 거라는,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 

대한민국 전직 대통령중에 저주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몇이나 있겠어. 


박열과 후미코의 재판 기록 르뽀

후세 다쓰지는 인권 변호사였다. 

전쟁으로 미친듯이 질주하는 일본 제국주의의 폭력이 횡횡할때 인권변호사를 했으니, 이 양반도 참 보통사람은 아니다.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무기징역을 살다 일본의 패망후 22년만에 출옥한 박열에 대해 변호사스럽게 썼다. 

사실관계의 정확성을 지키며, 꼼꼼하게, 하나하나, 모두, 후미코까지 


엄격하게 사실에 기반해 의미를 밝히면서도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그 누가 경찰 관헌의 음험함과 비겁함을 증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런 문장. 

팩트를 기반으로 하지만, 팩트의 나열로 멈추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쓰기도 하니 문장에 활력이 있다. 

박열과 후미코에 대한 애정과 존경이 느껴지고, 후세 다쓰지 이 사람도 매력적이다. 

변호사였기 때문에 갖고 있는 재판관련 자료를 공개하고 해석하며 

박열과 후미코의 편에서 분노하고 시원해하며 온전하게 기록하여 그들을 되살린 것은 후세의 공이다. 


후세 스스로 밝히듯이 박열에 대한 평전도 전기도 아니고 대역사건을 중심으로 한 박열의 단편을 쓴다고 했는대 

그 단면이 박열의 정체성이다. 

젊은 아나키스트, 속시원히 천황 암살을 주도했다고 주장하며 나를 죽이라고 법정에서 덤비는 깡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그랬다가 22년후 마침내 출옥하니, 정말 운명의 승리자 박열이다. 

해방후 답답한 한반도 정세에서 어지러운 일들을 겪기 전이니 그야말로 빛나는 박열과 더불어 후미코동지와의 사랑까지.



2. 

재판결과 사형이 선고된 박열에게 천황의 은사로 무기징역으로 감한다는 은사장을 들고온 형무소 소장이 찾아 왔다. 

"...... 일본의 천황으로 부터 은사네 뭐네 하는 은혜를 입을 입장도 아니고, 그럴 이유도 없다네. 단지 나는 내가 저주하고 싶은 대로 살아 있으면 살아 있는 영이되어, 죽으면 죽은 영이 되어 천황을 저주 할 뿐, 그런 은사령 따위는 관심없다네."

관심없다며 받지않는 천황의 은사장을 들고 어쩔줄 몰라하는 소장이 가엾어진 박열 

"천황이 보낸 은사장은 받을 생각이 없지만, 자네가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면 자네를 위해서 그 은사장을 맡아두기로 하겠네."

소장은 기뻐하며 감사인사를 했다 하고, 이에 대한 후세의 평 

여기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혁명가 박열 군의 기백과인간 박열 군의 순정이 나타나 있어 흐뭇한 마음이 든다. 


이런 대목이 딱 묘하다. 

죽음을 각오한 박열의 기백은 황제 따위의 은사장으로 죽지 않게 되었다한들 관심없다고 한다. 

보통 이정도 견결함이면 황제의 명령에 복무하는 소장이 난처하건 말건 알게 뭐냐 싶은데

은사장들고 어쩔줄 모르는 소장을 보면 또, 그래 까잇거 너를 위해 내 큰맘먹고 맡아 둘께, 이러는 거다. 

유연하고 배짱이 있어. 자유로와 발랄한 영혼, 박열의 특징이다. 


박열처럼 강렬한 삶을 살았던 사람 조차 우리 역사에서 잊혀진것은 그의 사상때문이고, 해방후 북으로 간 거취때문이겠지. 

산자가 기록하는 역사는 늘 이렇게 비열하다. 

배신자들이 쓰는 역사에 정의로운 싸움을 했던 사람들은 지워버리는 거지. 


의열단의 조선혁명선언 전문이 한 장으로 처리되어 실려 있다. 인상적이다. 

1920년대부터 이미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했던 지식인들은 일본의 식민지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대체로 전향했다. 

남아서 무장독립운동을 주장하고 실천했던 사람들은 좌익, 사회주의 계열이고 

의열단도 무정부주의라고는 하지만 사회주의에 가깝다. 

폭력혁명론이다. 

이렇게 당당하게 폭력을 내세우니, 신선하네. 

뭘해도 비폭력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 주류인 요즘 보면 파격적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한 무기다. 우리들은 민중 속에서 민중과 제휴하여 끊임없이 폭력, 암살 등의 파괴를 행해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겠다. 그들 생활의 불합리한 모든제도를 타도하여 모든 인류를 해방하겠다.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하지 못하고, 사회로써 사회를 고정하지 못하는 이상적인 조선의 건설을 촉진하자. 


박열 뿐 아니라 후미코의 성장과 천황관도 흥미롭다. 

1923년, 지금보다 100년전을 산 박열과 후미코가 2017년의 사람들보다 더 급진적으고 패기 있다. 

매력적이라고 할 밖에. 

도덕이라는 것은 언제나 강자에게 유리한 대로 다듭어지는 법입니다. 다시 말해서 강자는 자기 행동의 자유를 옹호하면서 약자에게 복종을 가르칩니다. 이것은 약자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강자에 대한 굴종의 약속이 이른바 도덕인 것입니다. 

맞아요. 후미코. 정말 그래. 


박열은 모르겠고, 후미코는 더 읽어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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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역사 - 최초의 아내 이브부터 <인형의 집> 노라까지, 역사 속 아내들의 은밀한 내면 읽기
매릴린 옐롬 지음, 이호영 옮김 / 책과함께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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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 사회를 사원에 새겨진 부조나 정부 문서에 기록된 공식적인 얼굴로 판단하는 것과, 여성들이 자신이 느끼고 경험한 바를 주관적으로 기록한 시, 편지, 일기, 회고록 등에 나타난 그 사회의 맨 얼굴을 보고 평가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그래서 매릴린은 방대한 기록을 확인하고 인용한다. 이 책의 가치는 여기에 있다. 


미망인이 남편의 집을 떠나게 됐을 경우 결혼 했을때 받은 옷가지와 보석, 혹은 지참금과 혼수를 챙기지 못한 채 몸만 나가는 것이 이례적인 일이 아니었다. 자식들은 이 물건들을 어머니에게 돌려줄 때 종종 늑장을 부렸다. 피렌체의 고문서 보관소에는 지참금을 돌려주지 않는 자녀들을 상대로 미망인이 벌인 재판 기록이 잔뜩 쌓여 있다. 

여성의 위치는 가정안에만 있었다. 공적인 영역에 그녀의 지위는 없었다. 

오로지 집안에서 딸이고 아내고 어머니라는 역할이 있었다. 

그녀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마음대로 이혼 할 수 없을 뿐더러 이혼당하면 쫓겨나고, 미망인이 되어도 자식들이 재산을 다 가져갔다. 

남편은 그녀를 소유했고 처벌 할 수 있어서, 그녀는 매 맞으며 살았다. 

참, 집요하게 가혹하다. 

그러니 여성의 역사가 아니라 아내의 역사다. 


종교적인 관점으로 역사를 해석하는 것에서 탈피한 계몽 사상의 시대인 18세기에도 사람들은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된 운명을 타고 났다는 것을 조금도의심하지 않았다. 


"남자는 강하고 적극적이어야 하며, 여성은 약하고 수동적이어야 한다. 여성이 지녀야 할 가장 바람직한 덕성은 친절함이다. 여성은 남편이 아내에게 가하는 부당한 일과 잘못을 불평없이 받아들이는 것을 일찌감치 배워야 한다."

루소의 <에밀> 내용중 일부를 옐롬이 인용한다. 

참 잘나셨다. 루소. 저 책이 아직도 필독서 중 하나다. 


18세기 미국 여성 세라 캔트웰의 신문광고

존 캔트웰은 나를 신용했던 모든 사람들을 향해 경고하는 내용의 광고를 신문에 내는 후안무치한 짓을 저질렀다. 그는 나와 결혼하기 전에 돈 한푼 없던 사람이다. 그가 언급한 침대와 식탁은 내가 결혼 할 때 가져간 것이다. 그는 결혼할 당시 침대도 식탁도 없었다. 나는 가출한 게 아니라 그가 때리자 그를 피해 도망쳤을 뿐이다. 


이 광고들 뒤에 숨어있는 이야기로 한편의 소설을 써도 될 정도다. 

21세기 한국에 사는 여성도 저 광고뒤에 숨어 있는 한편의 소설이 어떤 내용인지 알 것 같다. 

신문광고를 내며 부부 싸움을 했구나. 캔트웰에게 저것은 생존을 위한 싸움이었을 거다. 

저런 신문광고를 내기까지, 아니 저 집을 뛰쳐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번민이 밤이 있었을까. 


지금부터 70년 전인 1851년에 남부에는 흑인 노예제가 있었고, 미국 전역에는 마누라 노예제가 있었다. 열네살짜리 계집애가 대부분의 시간을 술 마시는데 보내는 마흔네 살의 남편에게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나는 지금도 그런 남편과 살아야 했던 소녀 시절을 떠올릴 때면 몸서리가 쳐진다. 그는 술에 취하면 자주 나를 죽이려고 했고 내가 차라리 죽는게 낫겠다고 느낄 때까지 매질을 하곤 했다. 


1800년대 부터는 특히 여성들의 일기, 편지의 직접 인용이 많다. 

이런 개인적인 기록들까지 체계적으로 관리되고 있다는 것이 부럽네. 


전쟁전 1919년에 조선 산업 전체 피고용자의 겨우 2퍼센트만이 여성이었다. 과감하게 작업장에 나온 여성들은 휘파람과 야유 세례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조선소에 많은 여성이 고용되면서 통계뿐만 아니라 분위기도 급변했다. 1944년에는 조선소 노동자의 10~20퍼센트가 여성이었으며, 대부분의 남성들은 어쩔 수없이 여성을 존중하는 법을 배웠다. 

모든 기득권 있는 자들이 힘없는 사람을 존중하는 것을 배울때는 '어쩔 수 없을' 때 이다. 

스스로 알아서 존중해주는 것을 본 적이 없고, 심지어 어쩔 수 없을때 조차 여성을 존중하지 않는 남자들을 아직도 많이 본다. 



2.

여성이 성공하는데 가장 커다란 장애물은 그녀가 절대로 아내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이다. 

앤 레아 메리트의 말에 공감한다. 

그래, 나에게도 마누라가 있다면 나는 지금보다 훨씬 편한 삶을 살겠지. 

물론 나는 노예를 갖고 싶지는 않기 때문에 마누라도 갖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갖고 싶지 않은 것과 가질 수 없다는 것은 다른것이다. 


생생한 인용의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많다. 

매릴린이 방대한 원자료를 검토하며 큰 일을 했구나. 


영국과 미국 아내의 역사를 보았다. 

아시아 아내의 역사를 보고 싶다. 


매릴린이 들어가는 글에서 한말을 옮기며 마무리 한다. 

불행히도 아내는 남편에게 봉사하고 복종해야 하며, 남편은 아내를 때리고 들볶아도 괜찮다는 낡은 믿음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2017년 대한민국 뉴스를 보면 아직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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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철 평전 역사 인물 찾기 24
김호웅.김해양 엮음 / 실천문학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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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는 일본 감옥에서 한쪽 다리를 잃고 실의와 절망에 잠기는 대신 총칼을 붓으로 바꾸어 들고 이승만, 김일성, 모택동 이라는 거대한 우상에 차례로 도전하였으며, 어두운 철창 속에서도 내일 솟을 태양을 의심하지 않았다. 22년 동안의 비인간적인 생활을 끝맺고 자유의 몸이 되었을 때는 어느덧 65세의 나이가 되었다. 

저자의 말 중


조선의용군 분대장으로 항일전쟁을 했던 한 젊은이가 태항산 전투에서 다쳐 일본 감옥에서 다리를 절단하고 

해방된 조국에서는 이승만, 김일성과 차례로 싸우고 중국으로 가 다시 모택동과 싸우다니. 

무슨 인생이 이러냐. 


어린 김학철에게 인상깊었다는 원산부두노동자 파업의 한장면 

처음에는 그저 경찰대가 파업 깨기꾼들을 끌어다 붙인 까닭에 부두 노동자들은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이 깨기꾼들이 어용 단체인 함평노동회에 매수된 깡패들이라는 걸 알게 된 것은 뒷날의 일이다. 경찰대가 담벼락처럼 둘러서서 뒷받침해주는 데 기운을 얻은 깨기꾼들이 사기가 버쩍 올라 최후의 일격을 가해왔을 때였다. 

노동자들이 뒤에 있던 화물선의 일본 선원들이 고함치고 기적을 울리며 "파업 만세!" 응원해 주더라는 거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인대 

하! 용역깡패와 경찰의 합동작전은 역사도 깊구나. 파업의 역사와 동시 잖아!


해방후 진보정당, 사회단체의 집회에서 박헌영이 연설하며 

"위대한 소련군과 미군에 의해 우리나라가 해방됐다."는 것을 강조하자 김학철이 벌떡 일어나 박헌영의 연설을 중단시킨다. 

"우리 조선 의용군은 일본이 투항하는 날까지 끊임없이 무장투쟁을 견지했습니다. 이 나라의 해방을 위해 숱한 사람이 피를 흘리고 또 목숨을 바쳤습니다. 우리는 누구처럼 팔짱을 끼고 앉아서 남이 해방을 시켜줄 때만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지 않았단 말입니다." 일갈하고 목발을 짚은 김학철이 뚜벅뚜벅 회장을 나가버린다. 


팔짱을 끼고 기다리던 사람들, 

무장투쟁을 한 사람들을 일본에 팔아먹어 목숨을 부지한 사람들이 해방후 권력을 쥐어버리니, 

무장투쟁을 한 사람들은 잊혀지고, 친일파와 그 후예들이 지금까지 역사의 심판없이 부귀영화를 누린다.

역사가 비어버린다. 


해방공간의 김학철의 소설에서 보여지는 것은 가열찬 전투장면이나 선 굵고 기복이 심한 비극적 사건이라기 보다는, 조선의용군 생활의 에피소드와 낙천성, 즉 성스러운 전쟁의 비장함보다도 생활미가 넘치는 일화 등과 사랑스러운 의용군 전사들의 성격등이다.  

김학철의 특징은 이 낙천성이다. 

어쩌면 그의 평전은 65세가 되도록 굽힘없이 싸울수 있는 힘이된 

이 기이한 낙천성의 근원이 뭔지 밝히는 작업이 되었어야 하지 않을까. 


호가장 전투에서 다리를 다친채 포로가 되었다가 일본으로 이송되어 치안유지법으로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그동안 치료되지 않은 다리를 절단한채로 3년을 고름을 흘리며 징역살이하다 해방되어 한국으로 돌아온다. 

옥수수만 먹아야 했던 조선의용대 시절부터 징역살이 하는 시기까지 

도무지 이 사람은 그늘이 없다. 

소개되는 에피소드들도 재미있거나, 황당하거나 아니면 적국일망정 우정을 나눈 사람들과의 이야기들 

슬프고 억장이 무너지고, 분노하고 이런 감정들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쿨하고 담담하고, 대체로 명쾌하고 무엇보다 낙관적이다. 

김학철의 힘은 저 낙관이다. 


해방후 서울에 온 후에 

어머니가 오셔서 외다리 돼버린 아들을 보고 눈물을 뿌렸으나, 김학철이 워낙 새끼손가락 하나 다친 것만큼도 대수로워 하지 않는지라 더 울 거리가 없었는지 차차 눈물을 거두셨다. 

이런 식이다. 이건 엄청 슬프고 기가 막힌 장면인데, 다리하나를 잃고 대수로워하지 않는다느니, 더 울거리가 없다느니 

김학철의 여러 수기와 작품들, 회고록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평전이라 이야기가 생생하다. 

참으로 독특한 낙관과 명랑함. 저 격동의 시절에 말이다. 


선견대는 정치위원 김학무가 영솔하는데, 대원들로는 윤공흠, 조명숙, 김승곤, 임평, 김학철등 모두 15명이었다. 

윤공흠은 일본 비행학교 출신으로 해방후 북한에서 상업상장관등을 역임하다가 1956년 당중앙전원회이에서 '당내에 존재하는 개인숭배와 그 엄중한 후과'에 대한 비판을 한 탓에 쫒기는 몸이 되어 동료 중앙위원 서휘 등과 함께 중국으로 탈출했으나, 페니실린 쇼크로 산서성에서 객사했다. 

이런식이다. 

일제 시절에 독립투쟁한다고 중국군대들어가 싸웠던 사람들이 조국에 돌아 오지만

남쪽에서는 친일파들이 득세하며 독립투사들을 조롱하며 빨갱이라고 죽이고 

북으로 갔더니 김일성의 우상숭배에 반대하다 죽임을 당한다. 

이런 독립투사들은 남과 북에서 모두 죽임을 당하고, 잊혀졌다. 

이승만 독재자인거야 알고 있었지만, 김일성 이 인간도 말종이다. 

지 권력을 위해 전쟁을 일으킨 것이 가장 나쁘고, 그 권력을 지키기 사람들을 함부로 죽인다.

남쪽의 이승만, 북쪽의 김일성 두 원흉때문에 여전이 분단국가인 남쪽에선 아직도 빨갱이 타령을 하고 

북쪽에서는 3대째 권력을 세습하며 독재를 한다. 지금까지도. 

제때 역사적 평가가 정당하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이렇게 오랬동안 사람을 괴롭힌다. 

역사정리는 과거를 위한 것이 아니라 현제를 위한 교통정리다. 



2. 

참, 중국도 황당한 나라다. 

1967년 12월에 연행한 사람을 7년 4개월동안 유치장에 가둬뒀다가 1975년 4월에야 재판을 한다. 

정말 어처구니 없다. 

재판을 받지 않았다는 것은 김학철의 죄가 무엇인지 정해지지 않았다는 거다. 

죄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는 거지. 

어떻게 사람을 구속해서 7년을 재판없이 유치장에 가둬둔단 말이가. 

철창으로 바로 보이는 높은 벽돌담 너머의 비슬나무가 봄 잎 피고 가을에 잎 지기를 일곱 번 되풀이하는 동안 김학철은 예순살, 뼈만 앙상한 산송장이 됐다. 

공권력이 잔인하다. 

중국 감옥에서 나온 다음에는 시간에 쫓기듯이 글을 쓰고 가족들과 그나마 편안한 말년을 보낸 것 같아 다행이다. 


전체적으로 책의 서술이 매끄럽지는 않다. 

김학철이 스스로 쓴 많은 수필과 기록물 덕에 에피소드가 생상한건 장점이고 뒤로 갈수록 동어반복이 많은건 단점이다. 

특히 그의 문학적 성취를 기록한 장은 평전의 내용으로 불필요하다. 

작자들이 김학철을 존경하여 넣어 놓은 것은 알겠는데. 굳이. 

김학철의 삶은 그 자체로 어떤 문학보다 감동적인걸. 


우리가 잘 모르는 잊혀진 역사 

지난여름 윤동주를 읽고 영화 박열을 본 김에 우리가 잘 모르는 항일무장투쟁의 역사에 대한 책들을 둘러 보고 있다. 

적어도 알고는 있는 것이, 조국을 위해 목숨걸로 싸운 투사들에 대한 예의라는 생각이 들어.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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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연 소년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박은정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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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거기서 우리는 단 한번도 자기 냄비와 숟가락을 가져본 적이 없어요. 여덟명이 한꺼번에 냄비 하나에 달려들었죠. 아프가니스탄은 결코 미스터리 가득한 모험의 땅이 아니예요. 아프간 하면 죽어 누워있던 한 농부가 떠올라요. 깡마른 몸에 커다란 손을 가진 농부가요......총격이 시작되잖아요. 그럼 간절이 빌게 돼요. (누구한테 비는지는 나도 몰라요. 아마도 신이겠죠) 땅아, 갈라져서 나를 숨겨다오. 돌아, 갈라져 다오......"


똑같이 전쟁을 하고 죽이고 영혼이 파괴되는데, 기억하는 품위가 러시아는 다르다. 

이 다른 품위가, 다시는 전쟁을 하지 않는 것으로 이어 질 수 있을까. 

이 품위가 상처받은 영혼들의 치유에 도움이 되는 걸까. 아마도. 


아프가니스탄에 참전했던 소비에트의 젊은이들은 대조국전쟁에 참전했던 병사들과 다르다. 

소비에트가 침략군이기 때문이다. 

독일이 러시아에 침략을 해 인민들을 죽이니 이 적들을 물리치러 참전하는 것은,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죽인다는 명분을 준다.

설사 이 전쟁에서 내가 죽더라도,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죽은 영웅이 되는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은 다르다. 

세계혁명의 임무를 수행하는 줄 알고 가서, 죽이고 살아왔더니, 

애들도 죽이고 여자도 죽인 살인자 취급을 받는 전쟁에 참전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목숨을 담보로 조국으로부터 사기 당한 셈이지. 

제 정신일 수가 없는 상황이다. 


명분없는 전쟁이라 환멸과 야만이 더 심하다. 

명분없는 전쟁이란 이유없는 학살이고, 내 생명을 왜 위험속에 두고 누군가를 죽이는 것을 하는지 모르는 전쟁이다. 


"또 어린 아프간 소녀가 있었어요......아이가 소련 병사들한테 사탕을 받아 먹었어요. 그러자 다음날 아침, 거기 사람들이 아이의 두 손을 잘라 버렸죠."

미국이 침략한 베트남전쟁만 있는 줄 알았더니, 소련이 참략한 아프간 전쟁도 있었구나. 왜 나는 여태 몰랐을까. 

아프간 전쟁을 처음 본다. 



2.

"---- 카라반을 기다려요. 한번 매복을 나가면 보통이 이삼일이에요. 뜨거운 모래속에 누워서, 필요하면 그래도 용변도 봐야 하죠. 그렇게 삼일이 지날 때쯤이면 거의 정신이 나가요. 증오심이 머리 꼭대기까지 차올라서 제일 먼저 나타닌 대열에 미친듯이 총질을 하게 되죠. 총격을 마치고, 모든게 끝난 후에야 깨달아됴. 카라반은 그저 바나나와 잼을 운송중이었다는 걸요. 그래서 다 먹어치웠어요. 평생 먹고도 남을 그많은 양의 단 것을요......"

전쟁은 미친짓이다. 

누가해도 미친짓이다. 

정의로운 전쟁 따위는 없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오래전 2차대전의 얘기를 회상해서, 30년쯤 지난후에 기억을 꺼내어 들려준다. 

이연소년들은 바로 몇년전, 길어야 10년쯤 전의 이야기다. 아직 과거가 된 시간이 아니다. 

모든것이 어제처럼 생생하다. 냄새도, 소리도, 짜증도, 두려움도, 억울함도. 


어머니들이, 그것도 바로 얼마전에 아들의 시신이 담긴 차가운 아연관을 붙잡고 몸부림치던 그 어머니들이 학교들과 군사박물관들을 찾아다니며 '조국 앞에 자신의 의무를 다하라'고 소년들에게 호소한다. 

저 바보같은 엄마를 어쩌면 좋으니. 잔인한 세월이다. 

아들을 전쟁터에서 잃은 어머니들이 죽은 자식을 앞에서 다른 아들들에게 전쟁에 나갈 것을 호소하다니.

스베틀라나의 두번째 전쟁이야기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의 여운이 가시기 전에 그녀의 작품들을 더 찾아 읽고있다. 

아연관, 왜 관을 아연으로 만들었을까? 관은 원래 목재, 나무로 만드는 것 아닌가?


1979년부터 1989년까지 9년 1달 19일동안 계속된 전쟁. 소련군의 아프가니스탄 파병으로 인한 전쟁이야기. 

여자청소부들과 도서관 사서들, 호텔 직원들이 새로 아프간에 오는 걸 보면서 우린 처음에 도무지 이해를 못했어요. '겨우 두세개 조립식 건물 때문에 청소를 새로 부르고, 20여 권밖에 되지 않는 낡은 책들 때문에 사서를 새로 들여? 왜 이런 전쟁터에 여자들이 수천 명이나 필요하지? 무엇때문에?' 글쎄 뭐 때문이라고 생각하세요? 나는 점잖게는 설명을 못하겠어요......교양있는 말로는......쉽게 말해 딱 한가지 이유예요......남자들이 미쳐버리는걸 막기 위해서죠......우리는 우리가 알아서 그 여자들을 멀리했어요. 그 여자들이 우리한테 잘못한 게 없는데도 그랬어요.

미쳐버릴 만한 상황에 소년들을 밀어넣고, 미치지말라고 섹스할 수 있는 여성을 공급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 


전쟁이 여성을 어떻게 공급하는지. 

미군 옆에는 창녀촌이 있고, 일본군 옆에는 위안부가 있었고, 소비에트 군사들 옆에는 청소부와 사서들이 있었군. 



3. 

책 마무리에 아연소년들 책에 대한 재판 과정과 내용이 붙어 있다. 

스베틀라나를 고소한 사람들의 말과 글, 재판부의 입장, 

아들의 명예를 훼손하지 말라는 어머니, 자신의 진술을 뒤집어 부인하는 참전 군인, 그리고 매국노라는 손가락질

판결문과 그녀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입장글 

이 재판은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두번째 전쟁이다. 기억과 정의에 대한 전쟁. 

온 나라가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의미에 대해 숙고하고 논쟁하고 고민한다. 

그렇게 느껴져. 

스베틀라나의 작품에 대한 소비에트 소속이었던 국가 국민들의 응답으로 훌륭하다고 생각해. 

그녀 혼자 쓴 글이 아니라, 이 다큐 문학은 많은 사람들의 집단적 기억을 복원해 진실을 밝히는 작업이다. 

한사람의 작품이 아니라 동시대를 산 많은 사람들의 고뇌와 고통과 합동의 마음이 이루어진 작품 

러시아.



4.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주장했던 사람들과 정치권 지도자들은 약탈자로서의 본심을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살인 명령을 거스를 용가기 없는 사람들을 모두 범죄의 공범자로 만들었습니다. 살인이 그 어떤 '국제의무'로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무슨 그따위 의무가 있답니까!"


1970년대 우리도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었다. 

반공의 기치를 내걸고, 베트만 인민들을 학살하고, 돌아온 병사들이 온전한 영혼이었을까. 

우리는 왜 참회하지 못할까. 

우리는 왜 파병되었다 시체로 돌아온 군인의 어머니의 말을, 돌아온 병사들의 고통스런 증언을 듣지 않았을까. 

베트남 참전 용사들은 아직도 보수의 선봉대가 되어 여전히 국가에 이용당한다. 

부끄러워. 

우리는 증오 없는 삶을 살지 못합니다. 증오 없이 사는 법을 아직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베트남전에 대해 성찰했다면, 우리는 좀 다른 사회에 살고 있을까. 

나의 모국 대한민국은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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