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 오늘의 젊은 작가 24
김기창 지음 / 민음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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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된 공간적 배경은 방콕이지만 등장인물은 제각각 살아온 문화적 사회적 환경과 조건이 다른 이들이다. 소설답게 인물들은 그들이 모르는 지점에서 연결고리가 있다. 이야기는 한국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 홍의 손가락이 부러진데서 시작된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미처 헤아리기도 전에 산사태가 일어나듯 비극적 사건들이 쏟아져내린다. 특히 후반부의 맹공격을 읽어나가다보면 이 소설 속 세계는 망한게 분명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자조적으로 하게 된다.



표지의 강렬한 색감처럼 내게 방콕이라는 도시가 주는 인상은 화려한 휴양지 그뿐이었다. 실제 도시 이름의 뜻도 ‘천사들의 도시‘라고. 그러나 이 소설 속 방콕은 온갖 다양한 인물들의 욕망과 갈등과 폭력이 넘쳐나는 도시다. 결국 그 모습은 화려함 이면에 반드시 품어야할 진실인 것이다. 인간은 모두 다 평등한가? 어디에서나 평등한가? 출신 국가와 사용 언어에 상관없이 평등한가? 어디서나 존엄을 지킬 수 있는가? 부모의 죄를 자식이 이고 살아야 하는가? 비극에는 끝이 없는가? 언제 어느 순간에서나 희생자는 존재하는가?



소설을 읽어나갈수록 인간은 자신이 보고 경험한 것만큼만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거듭 들었다. 특히 동물구호단체에서 일하는 미국인 썸머를 보면서 든 생각이다. 동물의 아픔과 권리에 그토록 민감한 썸머이지만 정작 한국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이 감수하는 고통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방콕에서는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여성들의 고통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녀가 나고 자란 세상에서 외국인 노동자와 여성의 문제는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평등 지향적이기 때문일까.



<방콕>은 인물들의 다양한 이해관계가 뒤섞이는 가운데 끝까지 밀고나가는 힘이 있는 소설이었다. 저자의 첫 소설 <모나코>에 이은 도시 3부작의 두번째 작품이 이 소설이라고.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첫 작품도 어서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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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성 작가의 에세이 <내가 아는 모든 사랑은 당신이 알려주었다>는 사랑과 이별, 그리고 다시 사랑에 대한 에세이다. 구체적인 대상이 그려져있지는 않으나 저자가 직접 지나온 사랑과 이별의 이야기가 차곡차곡 담겨있다. 곱게 접은 종이배처럼.



글이 참 다정하고 섬세하다. 아무래도 저자가 그런 사람이어서겠지. 그동안 나는 사랑이라는 주제야말로 독자를 고려하지 못하고 글쓴이 홀로 낭만의 세계로 빠져들기 쉬운 주제가 아닐까 생각해왔다. 그러나 저자의 글은 조금 달랐다. 구체적인 대상과 일화를 구구절절 풀어놓지 않아도, 진실된 순간과 깨달음에 대해 담백하게 적어내려가는 것만으로도 풍부한 글이 될 수 있음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만나고 헤어지는 관계들 속에서 성숙해진 사람이 쓸 수 있는 에세이. 물론 항상 어려운 것이 사람이고 또 연애라지만- 이 책을 읽는 며칠, 공감도 위로도 많이 되었다. 항상 실연당한 기분으로 사는 사람으로서 ‘자주 슬프고 매일 두렵지만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고’(100p) 생각하는 때가 언젠가 내게도 오지 않을까 괜한 기대도 해본다.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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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쏜살 문고
아니 에르노 지음, 윤석헌 옮김 / 민음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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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에 있었던 일을 1999년이 되어서야 꺼내놓을 수 있었던 아니에르노. 그리고 2019년에야 한국어로 번역 출간된 그녀의 이야기 <사건>. 민음사 쏜살문고로 출간된 80페이지 남짓한 이 짧은 책은, 아니 에르노의 임신 중절에 대한 자기 고백록이다. 과거의 기록과 기억을 따라 남김없이 드러내는 1964년 1월 20일을 전후한 바로 그 사건. 이 짧은 글을 읽는 것이 참 고통스러웠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에.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끝도 없는 분노와 두려움이 엄습한다. 홀로 거리를 헤매며 그녀가 겪었을 혼란이, 의사들의 매몰찬 냉대와 멸시를 받고 느꼈을 그 감정들이, 제대로 털어놓지 못하고 전전긍긍했을 그 날들이 계속 머릿속을 맴돈다. 그럼에도 ‘어떤 일이든 간에 무엇이든 경험했다는 사실은 그 일을 쓸 수 있다는 절대적인 권리를 부여한다. 저급한 진실이란 없다.‘고 말하며 끝까지 이야기를 밀어붙이는 저자. 이 책 속에 쓰인 글들은 소설이 아니다. 다만 진실이다. 그 진실의 기록 앞에서 2019년의 내가 1964년의 아니 에르노와 뒤섞인다.



임신 중절은 여성의 선택이다. 법적으로 이를 막거나 범죄로 낙인찍을 수 없다.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은 여성이 결정할 일이다. (*지난 4월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결이 났지만 이후 개정안과 후속적인 조치가 어떻게 이루어질지는 여전히 두고볼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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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미움들 - 김사월 산문집
김사월 지음 / 놀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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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월의 첫 에세이 <사랑하는 미움들>. 맞다 그 싱어송라이터 김사월! 그녀의 음악을 즐겨 듣는 리스너로서 에세이가 나왔다는데 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책을 읽고 실망하게 될 수도 있었지만 어떤 글들이 실렸을지 너무 궁금했다. 그리고 ‘나를 미워하며 살아가는 것은 너무 달아’(노래 ‘달아’중에서)라는 가사를 쓴 사람의 글이라면 후회는 없을거라는 기대가 있었다.



첫 장을 읽자마자 나는 눈이 휘둥그레해젔고 그만 앉은자리에서 책을 전부 읽어버리고 말았다. 솔직함. 솔직할 수 있는 용기. 자신의 모순됨을 드러내는 그 용기!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결국 나는 이 책을 읽은 것을 후회하지 않았음은 물론, 그녀의 음악만큼이나 그녀의 글이 좋아졌다.



모순된 나도 나. 그런 나를 미워하는 것도 받아들이는 것도 전부 나. 저자가 ‘나는 사랑한다.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을’이라는 마음에 도달해서, 그 사실을 글로 나눠줘서 고맙다. 언젠가는 나도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사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어렴풋하게 느껴진다. 다른 사람의 내밀한 고백에서 힘을 얻는 것 - 이것 또한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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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우리는 비밀을 - 여성.십대.몸에 관한 다섯 개의 시선 우리학교 소설 읽는 시간
김해원 외 지음 / 우리학교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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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십대, 몸‘에 대한 다섯 편의 소설이 실린 소설집 <그날 밤 우리는 비밀을>. 몸의 변화에 한참 예민할 10대. 나의 경우만 해도 여성으로서 지나온 10대를 돌이켜보면 내 몸에 대한 부정을 먼저 배우게 된 것 같다. 조금만 살이 쪄도 흉하게 보일까 걱정하고, 얼굴에 여드름이 하나라도 나면 가라앉을 때까지 전전긍긍하고, 예기치 않게 생리가 터지면 누구한테 들킬세라 보건실로 달려가 생리대를 빌리고. 중고등학교를 지나면서 제대로된 성교육을 받아본 기억이 없음은 물론이다. 이 시기 내면화된 몸에 대한 자기혐오 및 코르셋은 지금도 쉽게 떨쳐지지 않는다.



다섯 편의 작품들 모두 제각기 다른 지점에서 그동안 충분히 이야기되지 못했던 여성 청소년의 성과 사랑, 호기심에 대해 다루고 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윤이형의 ‘눈그림자‘다. 모두가 화장을 하니까 따라서 화장을 하는 여학생들과 그 사이에서 독보적으로 눈에 띄는 맨 얼굴의 설영이라는 아이. 그리고 데이트 폭력과 소문들. 학교라는 폐쇄적인 곳에서 소문은 사실보다 과장되어 퍼진다. 그것도 여성에게 불리한 쪽으로. 여성의 외모를 둘러싼 사회적 편견은 10대에게도 분명히 존재한다. 아니, 오히려 더 강압적으로 기능하는 것 같다. ‘눈그림자‘에서 이 부분을 포착해낸 점과 거의 금기시되다시피 하는 10대의 성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어 인상깊었다. 연대로 이어지는 결말이 마음에 들었음은 물론이다.



나는 영영 지나온 10대이지만 그 때 내 몸에 대한 권리는 나에게 있다는 것을 먼저 배웠더라면, 그리하여 다른 여성들과 연대할 수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주변에 나보다 늦게 이 시기를 지나는 이들이 있다. 기회가 될 대마다 거듭해서 ‘남들의 시선, 사회적 시선에 너를 맞추지 말라‘고, ‘네 외모와 몸 전부 너의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지만 그녀들에게 더 힘이 되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여성이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긍정했으면 좋겠다. 몸무게가 어떻든, 화장을 하든 안하든, 연애를 하든 안하든 어쨌든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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