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을 위한 마음
이주란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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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란 작가의 두번째 소설집. 2019년에 마지막으로 산 책을 2020년의 첫번째 책으로 골랐다. 아홉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소설마다 상황은 다르지만 등장인물들이 겹쳐지며 하나의 이야기가 거듭해서 변주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소설 속 인물들은 진공 상태를 떠다니는 것 같다. 각 소설마다 가난, 팍팍한 일상, 가까운 사람의 상실, 우울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의 상황은 얼핏 희망 쪽에 깃드나 싶다가도 절망 쪽에 자리한 무게추를 이기지 못한다. 그러나 이들을 진공 상태에 머무르게 하는 것은 소설들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은 ‘그 일’이다. 독자로 하여금 자꾸만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하는 ‘그 일’은 소설 속 인물들을 쓰러지게 만드는 결정적 한 방 같다. (이를테면 ‘사라진 것들 그리고 사라질 것들’에서 조지영이 죽은 이유) 소설을 읽어나갈수록 ‘그 일’이 무엇일까 궁금해지지만 그 정체를 알게되면 가까스로 둥둥 떠있는 이 소설 속 인물들이 전부 추락해버릴 것만 같다. 그래서 나는 짐작하면서도 일부러 알지 않는 쪽을 선택한다.



그럼에도 아직 살아있다는 것, ‘고양이가 아니라 나 자신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자각, ‘나 자신도 하나 뿐’이라는 뒤늦은 깨달음. 이것들도 희망이라 부를 수 있다면, 결국 저자는 희망을 그리고 있다, 아니 바라고 있다.



가난과 슬픔과 우울이 이 소설집 속 인물들을 무너뜨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들이 그들 자신을 지켜낼 수 있을 만큼 더 강해졌으면 좋겠다. 상실된 인연이 남긴 상처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겠지만, 그것들을 안고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서 하는 말이다. 나에게도 ‘사는 것은 무섭고 두렵(작가의 말)’지만, 부디 무사히 나를 지키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하여 내 옆의 사람들까지 붙잡을 수 있도록.



이 소설집, 좋았다. <모두 다른 아버지>도 다시 읽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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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가을 2019 소설 보다
강화길.천희란.허희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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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에 완독한 마지막 책. ​

가장 최근의 첨예한 작품들을 작가의 인터뷰와 함께 합리적인 가격으로 만나볼 수 있는 소설 보다 시리즈. <소설 보다 가을 2019>를 이제서야 읽었다. 강화길의 ‘음복‘, 천희란의 ‘우리에게 다시 사랑이‘, 허희정의 ‘실패한 여름휴가‘ 이렇게 세 작품이 수록되어있다. ​

천희란의 ‘우리에게 다시 사랑이‘가 계속 머릿속을 떠다닌다. 어쩌면 문단 성폭력 사건의 그녀의 이야기. 어쩌면 나의 이야기. 폭력적인 연애 이야기. 자기 파멸적인 관계 이야기. ‘미래의 나‘가 당시의 나를 바라보는 이야기. 자멸하는 행동을 멈춰야 한다는 것은 당사자 본인이 잘안다. 그럼에도 멈추지 못하는 이유는 아주 아주 아주 많다. 자신을 학대하기 때문에, 타인에게 학대당하는 자신의 모습을 갈구하기 때문에, 폭력도 사랑이라고 믿고 싶기 때문에, 모든 주도권을 그에게 양도해버리고 싶기 때문에, 기타등등. 그런 마음을 너무 잘 안다. 소설 속 그녀에게 미래가 있어서 다행이다. 결국 당시의 모든 행동을 조금도 바꿀 수 없을지라도 미래의 내가 존재하며 그 존재가 함께 ‘우리‘로서 과거를 이행하고 있다는 것이 고무적이다. 이 소설 나에게는 엄청났다. 뒤에 실린 인터뷰도. <0의 기원>을 다시 찾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

그러니까 내가 2019년의 마지막 날 <소설 보다 가을 2019>을, 그중에서도 ‘우리에게 다시 사랑이‘를 읽으면서 계속해서 되뇌인 것은 내가 나를 학대해서는 안된다는 말이었다. 소설 속 그녀도 그걸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도 그걸 몰랐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이제, 나는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사강의 말을 거부한다. 아무리 나 자신이라고 할지라도 나를 파괴해서는 안된다. 학대하고 혐오하고 증오하고 죽여서는 안된다. 가장 먼저 내가 나의 편이 되어 나를 믿어야 한다. ​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밖에 없다. ​

구원은 못할지라도 자멸하지 않는 2020년을 기대하며. 올해의 독서 리뷰 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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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로니카의 눈물
권지예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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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지예 작가가 10년만에 펴낸 소설집 <베로니카의 눈물>. 상투적이라면 상투적이겠지만 이 책의 뒷표지에 쓰인 ‘이 책을 읽고 나면 떠나고 싶을 것이다‘라는 하정우 배우의 추천사 때문에 이 책이 궁금해졌다.그러던 차에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출판사 이벤트에 당첨되어 읽게 되었다. (감사합니다!)



중편인 표제작 ‘베로니카의 눈물‘과 다섯 편의 단편 소설들로 구성된 이번 소설집은 쿠바, 파리, 플로리다, 서울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한국인 등장인물이 낯선 타국의 도시에 놓인 상황들인만큼 자연스럽게 ‘떠남‘이 강조된다. 그리고 정체성과 관계에 대한 고민들. 소설들을 쭉 읽으면서 이러저러한 설정들에도 불구하고 결국 공통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평범한 일상과 그 속에서의 관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역시 표제작 ‘베로니카의 눈물‘이다. 쿠바 사람들과 그 생활 방식에 대한 생생한 묘사와 베로니카와의 미묘한 감정 줄다리기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한국에서온 작가인 주인공과 평생 여행을 해본 적이 없는 쿠바의 칠십대 노인 베로니카. 문화 경제적 차이에서 오는 어긋남과 이방인이 필수적으로 마주해야하는 낯섦. 작품의 말미에서 베로니카가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그야말로 화룡점정이다. ‘인생은 흐르는 것‘이라는 베로니카. 초록색 오렌지를 먹으며 행복해하는 베로니카.



그 외 다른 작품들도 흥미로웠다. 대체로 무심하게 쓱 중요한 사건들을 거둬서 툭툭 풀어내는 느낌의 소설들이었다. 그중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가 직접적으로 등장하는 ‘플로리다 프로젝트‘나 유일하게 서울이 배경이며 실제 뉴스 중 일부가 인용된(소설의 마지막에 작은 글씨로 안내되어있다.) ‘내게 아무것도 묻지 마‘를 읽으면서는 소설 속에 갑자기 현실이 난입하는 느낌이라 당황스럽기도 했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의미에서)



(*이벤트 당첨-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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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를 드릴게요 - 정세랑 소설집
정세랑 지음 / 아작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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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표지로 이목을 사로잡는 <목소리를 드릴게요>. 저자가 2010년부터 2019년까지 쓴 SF단편 8편이 실려있다. 정세랑의 소설을 읽을 때면 무해한 인물들, 명랑한 디스토피아, 끝까지 남아있는 희망(연대)의 끈 같은 것들을 떠올리게 된다. SF로 묶인 이번 소설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분명히 지금은 도래하지 않은 미래의 어떤 상황을 그리고 있는데 익숙하게 느껴지고, 불행과 절망이 느껴져야 마땅할 장면인데도 그렇게 암울하지는 않다.



내게 가장 인상깊었던 작품은 ‘11분의 1‘과 ‘리틀 베이비 블루 필‘, ‘메달리스트의 좀비 시대‘다. ‘11분의 1‘에서는 과학관에서 함께 근무한 혜정씨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인 것이 가장 마음에 들었고, ‘리틀 베이비 블루 필‘에서는 그래서 바뀌었지만 바뀌지 않았다는 결말이, ‘메달리스트의 좀비 시대‘에서는 끝까지 양궁을 놓지 않는 주인공이 기억에 남는다. 비단 이 세 작품 뿐만 아니라 소설집에 실린 모든 작품들이 어딘가 귀여운 면이 있다. 또, 인간이 다른 종을 해치지 않는 미래에 대해 일관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2020년에도 정세랑 작가님의 활발한 활동을 기대하며. 올해의 마지막 책 소비를 이 책으로 할 수 있어서 기쁘다. (마지막 맞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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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아이들
P. D. 제임스 지음, 이주혜 옮김 / 아작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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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추리소설가 P.D.제임스의 유일한 SF소설이자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영화 <칠드런 오브 맨>의 원작소설인 <사람의 아이들>. 원래는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을 읽으려고 했는데 제자리에 꽂혀있지 않기에 이 책을 빌려왔다.



20년간 새로운 인간이 태어나지 않는 상태. 인류는 불임이 되었다. 모든 문제의 해결책은 지구멸망이 아닐까 간혹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이 설정이 크게 비극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소설 속 세계는 황폐하게 그려진다. (그러고보니 소설 속 미래라는게 고작 2021년……. ) 소설이 총통의 사촌이기도 한 테오라는 대학 교수의 일기로 시작된다는 점이 재미있는데, 50세의 그가 과거를 회고하고 현재의 상황을 인지하는 태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저자의 글솜씨가 장난이 아니다. 이야기 설정보다는 문장을 읽는게 재미있어서 끝까지 읽었다.



어쨌든 소설 속 세계는 미래도 목표도 없이 늙어가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럼에도 세계가 달라질거라고 믿는 다섯명의 혁명가들이 등장한다. 이들과 테오가 접촉하며 일어나는 일들이 소설의 전부다. 생각보다 어마어마한 일들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결말은 희망인지 또다른 불행인지 명확하지조차 않다. 사실 소설 속 인물들은 지지부진할 정도로 보통의 인간들이다. 혁명가라 자처하는 이들도, 테오도, 총통도 모두 범속한 인간에 불과하다. 생각해보면 그 점이야말로 이 소설에서 주목할만한 점인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소설과 사뭇 다르다고 한다.)



느리고 슬프고 장엄하게도 느껴지는 소설. 1992년 작품임에도 여전히 세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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