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프가 읽은 작가들 버지니아 울프 전집 14
버지니아 울프 지음, 한국 버지니아 울프 학회 옮김 / 솔출판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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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내내 황홀했다. 독자로서 버지니아 울프가 가진 예리한 시선과 통찰력, 문학에 대한 사랑을 듬뿍 느낄 수 있었던 책 <울프가 읽은 작가들>. 20세기를 대표하는 작가 버지니아 울프의 문학 에세이가 실려있는 솔 출판사의 버지니아 울프 전집 마지막 권이다.



책 속에는 그리스 고전부터 18,19세기의 희곡, 에세이, 소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품들이 등장한다. 현대의 독자들에게도 잘 알려진 제인 오스틴, 에밀리 브론테, 헨리 제임스를 비롯한 작가들도 몇몇 눈에 띄고, 이름만 겨우 들어본 작가들도 제법 있다. 그러나 책 속에 나오는 작품이나 작가를 잘 모른다고 해서 울프의 문장을 탐험하는데에는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울프가 마치 그 작품이 눈 앞에 펼쳐지는 것처럼 세밀하고 풍부한 묘사로 설명해주기 때문에 그의 문장을 따라 읽는것 만으로도 벅차오르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누군가의 글을 읽으면 그걸 쓴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했던가. 울프가 작품 한 편 한 편을 얼마나 예민하게 읽어내는 독자인지! 그는 작품 면면에 흐르는 아주 미묘한 느낌까지도 놓치지 않고 잡아낸다. 작가가 있는 그대로를 망설임 없이 드러내는지 아니면 가장 중요한 것은 두루뭉술하게 감추고 있는지까지. 이러한 비평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울프가 가진 문학에 대한 애정이다. 울프가 독서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작품의 표면과 본질을 동시에 읽어내는 것은 불가능했으리라. 만약 내가 울프와 같은 시대에 태어난 작가였다면 다른 모든 사람을 제치고 그녀의 평을 받고 싶었을 것이다. 내 삶과 내 작품을 이토록 정확하게 읽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단 한 명이 있다면 아마 그것만으로도 글을 쓰는 이유가 되었으리라.



내가 가진 모든 정체성들 중에서 내가 가장 편안하게 느끼는 건 독자로서의 나다. 현학적인 문장으로 가득한 인문서든, 누군가는 삼류소설이라 말하는 칙릿이든, 어마어마한 문학상을 수상한 소설이든 책을 펼쳐들고 종이 속에 나를 완전히 내맡기는 순간 나는 삶을 무한히 다시 살아낼 수 있으니까. 그리스 고전을 읽으며 굳건한 인간의 원형을 발견해내고, 제인 오스틴의 끝내주는 균형감각에 감탄하고, 러시아 소설의 이질성에 혼란스러워하다가도 매혹되어버리고 마는 버지니아 울프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책 사이에 얼굴을 파묻은 한 독자의 초상을.



결국 이 책을 읽고 난 뒤 내게 남은 것은 끝내주는 소설을 한 권 읽고 싶다는 열망이다. 현실 세계 속 모든 걱정을 뒤로하고 완전히 이야기속으로 빠져들고 싶다. 그저 순수함으로 가득한 독서를 해야한다고, ˝책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하는 질문에 있어서 자신의 본능을 따르고 이성을 사용하여 자신만의 결론에 도달해야한다고, 울프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그러니까 <울프가 읽은 작가들>은 같은 독서가라면 매혹되지 않을 수 없는, 독서에 너무나 진심이었던 어느 한 독서가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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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커스 랩 - 그 멋진 작품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론 M. 버크먼 지음, 신동숙 옮김 / 윌북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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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백지 앞에서 머리가 하얗게 될 때가 있다. 무엇을 써야하지? 어떻게하면 잘 쓸 수 있지? 그럴 땐 괜히 옆에 놓인 책들을 뒤적이거나, 영감의 신이 나를 찾아와주기를 바라며 빈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창작의 비밀이 있다면 제발 좀 알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어쩌면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이들에게 이 책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연극, 그림, 건축.. 멋진 작품은 대체 어떻게 만들어지는건지, 50여명의 크리에이터들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창조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메이커스 랩>.



자, 그래서 창작의 비밀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소설가, 디자이너, 건축가, 연주자 등 여러 방면에서 창작 활동을 하는 이들에게 따르면 그 비밀은 놀랍게도 ‘만들면서 알게된다‘는 것이다! 작품을 시작하기에 앞서 불안이나 두려움, 막막함을 겪는 것은 유명한 창작자들도 마찬가지라고. 자신이 무엇을 창조해내고 있는지는 일단 만들면서 알게 된다. 인터뷰이들은 글을 쓰면서, 디자인을 스케치하면서, 연주를 하면서 자신이 창조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점점 드러나기 시작한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그러니까 어쩌면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서 창작활동을 하는지도 모르겠다고. 전부 알고 있는 상태에서 만드는 게 아니라, 알기 위해서 만드는 것이다. 순서가 틀렸다.



책 속에는 창작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들 또한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존의 앎과 패턴을 지우고 모호하고 불확실한 모름의 상태를 견디는 것이다. 단순한 스케치를 계속하면서 손을 움직이다보면 아이디어가 흘러들어온다고 말하는 작가도 있고, 가면을 통해 습관화된 표현 방식을 억제하면서 몸에서 자유로운 표현이 나오는 방식으로 연습을 한다는 배우도 있다. 결국 모든 가능성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유연한 태도가 필요하다. 알기 위해서는 일단 경험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각자 인생의 창조자다. 삶에서 무언가를 창작해내는 경험은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해준다. 결국 자기 자신이 아닌 것은 만들어낼 수 없으므로. 그러니까 우리는 진정한 우리 자신을 창작해내는 셈이다. 궁극적으로 창작의 비밀은 우리 자신 그 자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알기 위해서 만든다. 이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백지가 전만큼 두렵게 느껴지지는 않는 듯하다. 지난한 과정을 지나 나는 결국 나 자신을 발견해낼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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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위로 - 글 쓰는 사람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곽아람 지음 / 민음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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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공부하는게 정말 좋다. 단언컨대 세상 모든 기쁨들 중에서 최고는 몰랐던 것을 새롭게 알아가는 기쁨이다. 학교, 성적, 등수 같은 것들에 가려져 공부라는 단어가 오명을 쓰게 되었을 뿐, 살면서 누구나 공부를 사랑하게 되는 순간이 한 번쯤 온다고 믿는다. 배움의 기쁨을 한 번 맛본 사람은 그 달콤함을 쉽게 잊기 힘들것이라고도 생각하고. <공부의 위로>는 저자가 대학 4년간 들었던 교양수업을 바탕으로 공부의 진정한 쓸모에 대해, 진짜 교양이 무엇인지에 대해 담아낸 책이다. 저자가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한만큼 예술 수업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한 생각은 ‘다시 학부에 들어가거나 대학원에 가야겠어! 고고미술사학과라는게 있는 줄 알았더라면..‘ 하는 것들이다(미쳤나보다). 졸업한 대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가 수업계획서와 책 목록을 홅어보기도 했고, 오랜만에 대학 수업 필기노트를 꺼내보기도 했다. 그리고 나서 깨달은 것은 ‘아, 나도 모범생이었지.‘ 형편없는 수업이었다고 기억되는 수업도 참 열심히 듣고 필기해둔 나를 발견했다. 듣고 싶은 교양 수업만 골라서 듣는 바람에 막판에는 추가학기를 다녀야만 했었는데, 그 모든 순간들이 내게 자양분이 되었음을 이제야 인정하게 되었다. 프로이트와 푸코의 텍스트를 깊이 읽을 수 있었던 것도,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예술사를 바라보는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것도, 희랍어를 배울 수 있었던 것도 전부 대학 교양 수업 덕분이었으니. 모든 공부는 독학이기에 지금도 마음만 먹는다면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겠지만, 대학 이후의 공부는 시작과 지속의 측면에서 훨씬 더 많은 에너지를 요구한다.



책 속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저자가 불어 수업에서 까뮈의 텍스트를 원어로 읽고 불어를 감각의 언어라 생각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번역된 문장으로 읽는 것과 원어로 읽는 것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고, 집중해서 시간을 들여 내 힘으로 온전히 읽어낸 텍스트는 기억에 선명하게 새겨진다. 한때 세상 모든 책을 원어로 읽고싶다는 포부를 가졌던 사람으로서 너무나 공감하며 읽었다. (언젠가 <닥터 지바고>를 원서로 읽어보리라.)



그런가하면 소개된 수업들 중 가장 듣고 싶었던 건 ‘독일 명작의 이해‘였다. 저자가 글쓰는 사람으로서의 시작을 발견했다는 바로 그 수업. ‘인간은 지향하는 바가 있는 한 방황한다‘는 것을 배웠다는 바로 그 수업. 명강의로 소문난 수업에는 꼭 이유가 있기 마련인데, 대부분 그 이유가 되는 것은 교수님이다. 수업을 통해 자신의 삶의 태도를 전하는 교수님의 진심을 학생들이 알아보지 못할리가 없으니. 책 속에 소개된 전설의 독명이를 담당하셨던 교수님의 저작 또한 읽어보려고 적어두었다. (바로 그 수업을 들을 수 없다면 책을 읽으면 된다! 독서 최고.)



교양이란 무엇인가. ‘교양이란 학식과는 다르다. 교양은 비정한 현실 속에서, 더 비정하거나 덜 비정한 세계를 상상하고 그에 틈입할 여지를 준다. 그러한 자유라도 있기에, 우리는 지지 않고 생의 수레바퀴를 유연하게 굴릴 수 있는 것이다.‘(308) 이 책 덕분에 잊고 있었던 교양 수업의 기쁨을 다시 누릴 수 있었다. 무엇을 배운건지 아무것도 기억에 남지 않는다 하더라도, 폭넓게 접하고 깊이있게 외웠던 것들은 나의 일부가 된다. 공부의 기쁨을 많은 사람들이 누리기를 바라며. 교양의 쓸모에 대해 궁금해하는 이들, 공부 예찬론자들, 대학생들에게 특히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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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두파이 2022-03-27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부 하기싫어 겨우겨우 했던 저까지도 학부시절이 그리워지네요ㅋㅋ 이렇게 또 영업당하고야 맙니다😆
 
세상에 없는 나의 기억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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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고 읽는 리베카 솔닛. 이 책, 회고록 <세상에 없는 나의 기억들>에서 솔닛은 그가 어떻게 자기 자신만의 목소리를 찾을 수 있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동안 솔닛의 작품들을 충실하게 따라읽은 독자라면 이 책을 통해 그의 전작들을 관통하는 흐름을 발견할 수 있을 듯하다. 글쓰기에 대한 솔닛의 신념, 걷고 경험하고 쓰면서 연대하고자 고군분투했던 젊은 날들, 유명세를 얻게 해준 에세이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한다‘의 탄생 비화까지 다양한 이야기들 또한 책 속에 실려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문장은 ‘작가가 되는 일에는 어엿한 인간이 되는 일의 핵심이 담겨 있다.‘(178)는 것. 솔닛은 작가가 되겠다고 결심한 이래 깊게 사유하고 멀리 내다보고 실제로 쓰는 일을 계속해왔다. 어쩌면 그동안 출간된 수십권의 책들은 그가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매 순간 애써온 기록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이 책은 솔닛 자신의 성장 기록이자 어떻게 그녀의 목소리가 사람들에게 닿을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그것도 전부 아주 작은 책상에서 쓰여진 글들이!)



책을 읽는 내내 오래전 들었던 ‘문장은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 머릿속을 떠다녔다. 아무래도 문장문장마다 배인 깊이 있는 사유, 진실성, 에너지야말로 내가 계속해서 솔닛의 책을 찾게 되는 이유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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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은 나에게 무엇이었더라. 쟁취해야 할 무언가, 내 삶을 지탱해 준 무엇, 유일하게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것, 그러니까, 하려고 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던 것, 내 삶의 의미.‘



오우 진짜 재미있다. 흡입력있고 흥미진진하고. 몰입해서 한 번에 읽기 딱인 소설.



<백 오피스>는 일에 진심인 사람들의 이야기다. 완벽하게 보여야만 하는 행사 뒷편의 아슬아슬함이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그려진다. 에너지 그룹 태형의 대형 행사를 위해 모인 태형의 홍지영, 호텔 퀸스턴의 강혜원, 기획사의 임강이, 이들 세 여성의 이야기가 주축이다. 각자의 사정 탓에 긴장하며 서로를 탐색하다가도 공동의 목표를 위해 모이는 이들의 모습이 얼마나 흥미진진하던지.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대치상태인 것 같다가도 각자의 자리에서 맡은 일을 해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중에서도 육아휴직을 마치고 일터로 복귀한 호텔리어 강혜원의 이야기가 특히 마음에 와닿았다. 백오피스와 객실, 홀을 넘나들며 기민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일처리를 하면서도 마음 한 켠에서는 미처 챙기지 못하는 가족을 떠올리는 사람. 일의 의미에 대해, 일과 가족 사이에 낀 자기 자신에 대해 종종 생각하는 사람. 그럼에도 호텔리어라는 직업을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 이러한 고민들이 무척 현실적이고 생생해서 남 이야기 같지가 않았다. 대기업의 관행 앞에서 정의를 고민하는 홍지영이나 회사의 존폐위기 앞에서 최선을 다하는 임강이 등 책 속 다른 인물의 고민들도 마찬가지였다. 생생하고 탁월한 묘사의 힘이다.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는 무언가 아우라가 있는 것 같다. 맡은 일에 끝까지 책임을 지는, 그래서 일에 너무나 진심인 사람의 아우라가. 그리고 그 아우라는 자기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기에 어디서도 구할 수 없다. 그게 진짜 멋. 어쩐지 <백오피스> 속 세 여성에게는 그런 아우라가, 그런 멋이 느껴지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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