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들이 모조리 사라진다면
리처드 파워스 지음, 이수현 옮김, 해도연 감수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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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소설. 책을 읽는 동안 우주를 탐험하는 것 같기도 했고, 한 편의 연극 속에 들어가있는 것 같기도 했다. 리처드 파워스의 <새들이 모조리 사라진다면>. 이 책은 표면적으로는 아내의 죽음 이후 조금 특별한 아들 로빈과 살아나가는 우주생물학자 시오의 이야기이지만, 기후위기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우주에 대한 이야기, 삶의 가치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다양한 층위로 해석할 수 있기에 더욱 매력적인 작품.

아홉 살 로빈은 살아있는 것들에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생명과의 감응도가 높은 아이다. 멸종 위기의 동물들이 겪는 고통을 마치 자신의 것처럼 인식하고 괴로워하는 아이. 아버지 시오는 세상과 자꾸 부딪히는 로빈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위해 노력하며, 더 나아가 로빈의 시각에서 함께 세상을 보고자 한다. 시오와 로빈이 함께 조금씩 나아가는 이 과정이 무척 사려깊게 그려져있어 좋았다. 얼리사의 부재가 남긴 슬픔을 메워나간다는 면에서도, 생명에 대한 두 사람의 이해가 깊어진다는 면에서도. 특히 시오가 밤마다 들려주는 우주 행성에 대한 이야기들이 무척 흥미로웠다. 광활한 우주 어딘가에 생명이 있으리라는 기묘한 감각과 그로 인한 무한한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드는 장면들이었는데, 마치 소설 속 소설을 읽는 듯했다.

그렇지만 가장 흥미로웠던 건 바로 ‘디코디드 뉴로피드백‘ 이야기였다. AI를 통해 타인의 감정 지문을 그대로 경험하는 기술로, 로빈은 이 기술을 통해 얼리사가 남긴 감정 지문을 학습한다. 지구상의 모든 존재를 사랑했던 얼리사. 로빈은 그녀가 남긴 감정을 통해 생명이 가진 유기적인 연결성과 사랑을, 부드럽게 감정을 통합하는 방법을 배워나간다. ‘모두가 다른 존재로 살면 어떤지 배워야 하는 거야.‘(241p) 하는 로빈의 말은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사려깊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모든 생명을 사랑하는 이의 존재 방식을 배울 수 있다면 어떨까. 생명의 경이로움을 매 순간 느껴볼 수 있을까.

‘완벽한 사람은 없어요. 하지만 우리 모두가 너무나 아름다운 방식으로 부족하죠.‘(18p)

이 문장을 오래오래 기억해두고 싶다. 사랑하는 이의 부재를 받아들이는 일도, 특별한 아이의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일도, 스러져가는 생명의 편에 서는 일도 너무나 아름다운 방식으로 해낸 시오의 편에서. 본문이 여러 층위로 해석될 수 있었던 것처럼, 소설의 결말 또한 의미심장하다. 그렇지만 확실한 건 이 아름다운 행성에는 생명의 노랫소리가 울려퍼지고 있다는 것. 생명이 주는 경이로움과 황홀함에 대해 가만히 생각해보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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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워를 아주아주 오래 하자 - 거친 세상에서 나를 부드럽게 만드는 삶의 기술
그랜트 스나이더 지음, 홍한결 옮김 / 윌북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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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삶이라는 퍼즐을 풀기 위해 늘 바둥거려.‘

위의 문장에 공감하는 분들이라면, 이 책 어디를 펼쳐보아도 자신의 속마음을 마주한 것만 같은 기분이 되실 것이다. 내가 그랬으니까! 삶이라는 예술, 그것을 살아가는 기술을 사랑스러운 그림으로 보여주는 <샤워를 아주 아주 오래하자>. 간단 명료한 메시지와 따뜻한 그림이 포인트다. 마음 속 깊숙히 숨은 어린 마음을 일깨워주는 책.



책 앞 부분에는 ‘깨어있는 삶을 위한 선언‘ 아홉 가지가 소개되어있다. 한 번에 한 가지만 하기, 경이로움에 눈을 뜨기 등등. ‘흥 나도 다 아는 것들이야!‘ 하고 대수롭지 않게 페이지를 넘겼으나, 그런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삶의 본질을 일깨우는 그림들이었다. 내 마음과, 주변의 작고 사랑스러운 것들과, 자연을 담아낸 그림들.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평화로워지던지. 한강 변에서 이 책을 펼쳐들고 아무 생각 없이 순수한 기쁨을 느꼈던 순간이야말로 이번 주 최고의 순간이었다. 맞다, 다 안다고 덮어두지 말고 호기심어린 자세로 삶을 맞이할 것! 그게 언제나 첫번째였지.



때로는 지치고, 고단하고, 외롭고, 답답하게 느껴지는 일상이지만 사실 그 모든 것을 경험하는 내 마음 속에는 순수하게 즐거워하는 어린 영혼이 있다는 것. 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책은 살아가는 기쁨이 무엇인지 일깨워준다. 이토록 간단한 방식으로 통찰력있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니. 어느 페이지를 펼쳐봐도 놀랍다. <책 좀 빌려줄래?>에 이어, 이제는 믿고 읽는 그랜트 스나이더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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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 숲속의 현자가 전하는 마지막 인생 수업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 지음, 토마스 산체스 그림, 박미경 옮김 / 다산초당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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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책 한 권이 사람의 인생을 바꾼다는 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과한 면이 없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영 헛소리는 아닌 것 같다고 대답한 것 같다. 그러다 이 책,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를 읽다가 불현듯 생각이 났다. 책 한 권으로 누군가가 17년 고행을 통해 얻어낸 지혜를 날로 먹을 수는 있겠다고.

이 책은 스웨덴에서 태어나 숲속 승려가 된 저자가 수행하며 깨달은 지혜들을 담고 있다. 무릎을 탁 칠만한 얘기들이 많지만 이것 하나만 얻어가도 17년을 벌 수 있다. 바로 ‘떠오르는 생각을 다 믿지는 말라‘는 것. 문제는 직접 체득한 것이 아니기에 독자로서는 무슨 뜻인지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잊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지만, 잘 기억해두면 꼭 필요한 때에 머릿속에 나타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까 생각을 굴리며 스스로를 모질게 괴롭힐만한 그런 때에.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돈도 명예도 성공도 아니고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다. 남들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내 욕망을 정확히 아는 것, 더 나아가 그 욕망이 내가 아님을 알아차리는 지혜가 필요하다. 물론 한 번 알아차렸다고 끝이 아니라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수행해나가야 한다. 저자처럼 숲속 승려가 되지 않더라도, 몇 가지 지혜를 되새기는 것만으로도 우리 모두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를테면 내 감정에 귀기울이기, 내려놓기, 한 발짝 떨어져서 내면의 작용을 지켜보기 같은 책 속에 나와있는 지혜들이 도움이 될 것이다.

책 속에서 가장 즐겁게 읽었던 부분은 저자가 내면의 고요를 찾아 떠난 숲속 사원에서 도반들과 24시간 붙어지내며 뜻밖의 인간관계 정화 기회를 만난 이야기였다. 사원의 엄격한 규율과 프로그램들이 수행의 핵심이기에, 오히려 사원 생활이 바깥 세상보다 더 힘들면 힘들었지 덜하지 않다는 것. 명상 공부를 하면서도 종종 들었던 이야기인데 누군가의 경험담으로 만나니 더욱 흥미로웠다.

표지와 내지에 들어간 토마스 산체스의 그림들도 정말 아름답고, 글이랑도 너무너무 잘어울린다. 내용은 뭐, 여러번 들춰보고 필사하며 새길만큼 좋다. 웬만한 자기계발 서적보다 더 필요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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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의 여름
츠지무라 미즈키 지음, 구수영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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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세한 내면 묘사가 돋보이는 소설 <호박의 여름>. 긴 분량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읽히는 이 작품은 미스테리 추리 소설이자 성장소설이다. <차가운 학교의 시간은 흐른다>로 유명한 츠지무라 미즈키의 최근작이기도 하다.



이야기의 시작은 30년 전 여름학교 터에 묻힌 백골 사체가 발견되면서 부터다. 관련 의뢰를 받은 변호사 노리코는 자신이 어렸을 때 그 여름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다는 걸 기억해낸다. 설마 백골 사체는 그녀가 아는 사람일까? 노리코는 기억을 되짚으며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 여름학교에서의 일들을 마주한다. 특히 그녀의 마음 한 켠에 소중하게 남아있는 여름학교에서의 친구 미카와 얽힌 기억들을 찾아나간다.



<호박의 여름>을 읽으면서 ‘아이의 시간과 어른의 시간은 연결되어있다‘는 저자의 말을 자주 떠올렸다. 어린시절의 나와 지금의 나는 같은 사람일까? 분명한 건 어렸을 때의 특정 기억들이 지금의 나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어린 시절의 나는 무력했지만,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를 구해줄 수 있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어른이 된 노리코는 어렸을 때의 자신을, 친구 미카를 구하는 사람이다. 그녀는 아이였던 과거의 자신과 미카의 손을 잡아준다. 이 부분은 소설 후반부에 이르러 드러나는데, 차곡차곡 쌓인 서사가 고요히 폭발하는 듯해 무척 좋아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 소설의 가장 큰 테마는 부모의 역할이 아닐까 싶다. 여름학교의 주최측이었던 ‘미래학교‘는 아이들을 따로 모아 생활하게 하며, ‘생각하는 힘을 가진 아이‘로 키워내는 단체다. 그곳에서 자란 아이는 어떤 어른이 될까? 미래학교는 성공한 것일까? 저자는 아이가 어른이 되고, 또 다른 아이의 부모가 되는 순환을 그려내며 독자에게 되묻는다. 진정한 부모의 역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소설 초반부에는 아이의 시선에서, 후반부에는 부모의 시선에서 이야기가 그려지기에 독자로서는 다양한 관점에서 상황을 바라볼 수 있는 셈이다.



가볍지 않은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다 읽고 나면 따뜻함을 느끼게 된다. 누구에게나 있는 어린시절을 생각나게 하기 때문일까. <호박의 여름>. 유년시절의 미스테리와 우정, 성장 이야기를 만나고 싶은 분들께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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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 싶다 쓰고 싶지 않다
전고운 외 지음 / 유선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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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있고 믿을만한 필진과 뾰족한 기획이 만나면 정말 매력적인 책이 탄생하는구나. 책 한 권을 온전히 다 읽기 어려운 요즘, 간만에 딴생각 하지 않고 재미있게 읽었다. 출판사 유선사의 첫 책이자, 쓰는 사람들의 ‘쓰고 싶지만 쓰기 싫은 마음‘을 담은 <쓰고 싶다 쓰고 싶지 않다>. 전고운, 이석원, 이다혜, 이랑, 박정민, 김종관, 백세희, 한은형, 임대형 아홉 작가의 글들이 실려있다. 필진 라인업만 보고도 꼭 읽어봐야겠다 싶었던 책.

이 책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던 이유는 저자들의 쓰고 싶지만 쓰기 싫은 모호한 마음이 솔직하게 담겨있기 때문이다. 글들을 읽다보면 ‘아 나만 그런게 아니었어!‘하는 안도감이 생긴달까. 영화감독, 소설가, 에세이스트에게도 반짝 하고 글을 써내는 초능력 따위는 없는 것이다. 그들도 미루고, 좌절하고, 다시는 쓰지 말자고 다짐하고, 정말 쓰고 싶은 글은 대체 언제 쓸 수 있을까 고민한다. ‘결과가 어떻든 쓰기 만만했던 글은 단 한 편도 없었다‘고 말하며, 급기야 워드를 사용하면 걸작을 써야할 것 같아 부담스러워 메모장에 글을 쓴다고 고백한다. 이처럼 개성이 각기 다른 아홉 분의 솔직한 마음이 글 속에 오롯이 담겨있어 좋았다. 역시 나만 글쓰기 앞에서 망설이는게 아니었다니까.

그런데 결국 쓰고 싶지 않다는 말은 쓰고 싶다는 말과 같다. 너무 잘 쓰고 싶어서, 스스로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되려 쓰고 싶지 않다고 생각해버리는 것이다. 저자들이 글쓰기를 정말 온 마음을 다해 싫어한다면 당연히 이 책을 위해 원고를 보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쓰기 싫은 마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쓰고 싶은 마음이 그보다 훨씬 크기에 우리는 글을 쓴다. 또한, 글 쓰는 일을 생업으로 삼지 않더라도 지금 이 순간 글을 쓰고 있다면 그 사람은 글 쓰는 사람이다. 그러니 이 책 속의 쓰는 마음에 대한 이야기는 글 쓰는 사람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한 셈이다.

가장 깊이 다가왔던 문장은 한은형 소설가의 ‘‘쓰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쓰지 않았던 시간들만큼 고통스러운 것은 없다‘(195p) 였다. 완벽하게 준비된 바로 그 순간은 없으니 지금 당장 쓸 것. 바로 나에게 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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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9일부터 서촌 어피스어피스 @apiece_apeace 에서 Writers‘ Room 전시도 열린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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