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마틴 에덴 1~2 - 전2권 - 추앙으로 시작된 사랑의 붕괴
잭 런던 지음, 오수연 옮김 / 녹색광선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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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본 영화 <마틴 에덴>(2019)에서 가장 강렬하게 기억에 남는 장면이 하나 있다. 허름한 하숙집에서 한 거구의 남자가 원고 더미를 쌓아두고 집필에 매진하고 있는 장면. 열정인지 광기인지 모를 번뜩이는 그의 눈빛은 그야말로 내면에서 부글거리는 것들을 다 쏟아내려는 맹렬한 투지 그 자체였다. 나는 그 장면에서 마틴 에덴이 내뿜는 아우라에 거의 경도되었었다. 마치 극 중 마틴 에덴이 사랑과 글쓰기에 경도되었듯이.

영화의 원작 소설이기도 한 잭 런던의 <마틴 에덴>. 이 소설은 노동자 청년 마틴 에덴이 상류층 여대생 루스와의 만남을 계기로 그녀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 지식을 쌓기 시작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골자로 한다. 이 책은 만듦새도 아름답지만, 문장 묘사 또한 일품이다. 주인공 마틴 에덴이 앎을 체득해가는 과정의 묘사가 특히 그러한데, 저자는 마틴 에덴의 머릿속에서 소위 폭죽이 터지는 순간을 놀랍도록 정교한 표현으로 그려낸다. 정확한 언어로 내적인 환희를 세밀하게 풀어내는 것 - 이것은 오로지 문장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독자로서는 속수무책으로 단어 하나하나를 음미하듯 읽어낼 수밖에 없고, 덕분에 마틴 에덴이 무서운 속도로 달성해내는 지적인 경이는 곧바로 독자의 것이 된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밤새 미친듯이 책을 탐독하며 좌절과 희열을 넘나드는 마틴 에덴의 모습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혹은 그런 순수한 몰입의 순간을 그리워하게 되거나.

이 소설의 주목할만한 점은 마틴 에덴을 추동하는 힘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에 있다. 그가 세련된 상류층의 언어를 배우려고 결심한 것도,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저당 잡혀가며 작가가 되기 위해 글쓰기에 매달렸던 것도 전부 다 루스를 향한 사랑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사랑을 위해 자기 자신을 전부 소진할만큼 순진한 인물이다. 사랑 앞에서 그는 마치 태어나 처음 눈을 뜬 아기처럼 천진하고도 맹목적이다. 그런데 그 모습이 마냥 어리석게만 느껴지지는 않았다. 사랑은 세상에서 가장 연약하지만 동시에 가장 강인한 것이기도 하니까. 사랑 때문이라면 천국에서 지옥까지, 추앙에서 붕괴까지 순식간에 넘나든다고 해도 납득할 수 있다.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사랑 때문이라면.

마틴 에덴이 압도적으로 강렬한 인물이어서인지 루스를 비롯한 다른 인물들은 별로 기억에 남지 않는다(오히려 나 자신은 마틴 에덴보다 루스에 가깝다고 생각하는데도 그녀에게 별로 정이 가지 않았다). 그럼에도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가 바로 마틴 에덴이 브리슨덴과 만나는 장면. 아무리 자기 확신으로 가득찬 이라도 굶주림과 고독 속에 있다 보면 말라가기 마련이다. 브리슨덴은 누구보다 먼저 마틴 에덴의 영혼과 문학성을 알아보고 격려해준 인물이다. 작품을 잡지에 기고하지 말고 그 아름다움을 그저 간직하라는 브리슨덴의 외침, 그리고 그의 말로는 마틴 에덴의 붕괴를 예고한다. 브리슨덴 외의 다른 사람들은 마틴 에덴의 영혼을, 아름다움에 경도된 그 순수한 영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이들이니까.

결말 부분은 아주 빠르게 회오리치는데, 읽어 내려갈수록 그 급살에 함께 휩쓸리는 듯했다. ‘이미 진작에 완성해둔 작품들인데 왜 사람들은 이제와서 열광하는가.‘ 마틴 에덴의 절규가 쌓일수록 어쩐지 서글퍼졌다. 내게 마틴 에덴은 너무나 순진하고 순수한 사람이다. 자신이 작가로 성공하리라 확고하게 믿었던 만큼 세상이 제게 자신이 원한 사랑을 안겨주리라 믿었던 사람. 그리하여 완전히 소진된 사람. 스무 살에 절필한 랭보 생각이 났다.

+ 녹색광선의 책들은 전부 아름답지만 이번 패브릭과 박 컬러 조합은 정말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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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사 2022-09-07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극찬한 책에 호기심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네요 ㅎ
 
어린 시절 - 코펜하겐 삼부작 제1권 암실문고
토베 디틀레우센 지음, 서제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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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협찬)
덴마크의 여성작가 토베 디틀레우센의 회고록 ‘코펜하겐 삼부작‘ 중 첫번째 <어린 시절>. 덴마크 바깥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작가이고, 코펜하겐 3부작 또한 출간 이후 50여년이 지난 시점에 해외 평단의 찬사를 받았다. 을유문화사 암실문고의 첫 책이기도한 이 책, 책 소개 중 유년 시절의 묘사가 엘레나 페란테를 연상시킨다는 구절에 이끌려 읽게 되었다.

<어린 시절>은 1917년 공장 노동자 아버지와 가정주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저자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전반적인 분위기는 어둡고 건조한 편이다. 거리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어린 시절을 다시 되새기고 싶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자꾸만 그때로 되돌아가니 나의 시원을 되짚지 않을 수가 없다‘는 정도의 느낌이랄까. 그럼에도 행간에서는 도서관에서 책을 탐독하고 홀로 시를 적었던 시간에 대한 기쁨이 드문드문 반짝인다. 어둡고 깜깜한 밤하늘에 빛나는 몇 안되는 별처럼, 저자의 고된 어린시절을 밝혀준 순간들이었으리라 짐작한다.

‘아무도 내 시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해도 나는 시를 써야만 한다. 시가 내 마음 속의 슬픔과 갈망을 무디게 만들어 주니까.‘(157p)

저자는 스스로를 이방인이라고 여기고, 막연한 미래를 불안해하면서도 시 쓰기를 멈추지 않는다. 여기서 시 쓰기란, 내면 속으로 침잠하여 몽상의 나래를 펼치는 순간까지도 전부 포함한다. 저자의 이야기는 분명 어둡고 무겁지만 괴롭거나 고통스럽기 느껴지지는 않는다. 건조함, 냉정함, 거리두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상당부분은 시적인 순간에 대한 묘사 때문인듯하다. 어쩌면 이 책에는 ‘지독하다‘는 표현이 가장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끝끝내 견뎌낸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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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
비비언 고닉 지음, 서제인 옮김 / 바다출판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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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앞으로 비비언 고닉 작품은 무조건 찾아 읽어야겠는데. 이 책,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를 다 읽자마자 든 생각이다. 비비언 고닉의 작품이 국내에 소개되는 건 이번이 두번째다. 가장 먼저 소개된 작품은 그의 가장 유명한 회고록이자 애증의 모녀 관계를 다룬 <사나운 애착>. 괜히 트라우마를 건드릴까봐 읽기를 주저했었던 책인데 조만간 읽어야겠다 싶다.



고닉의 글이 가진 특별함은 주변과 자기 자신을 향한 호기심과 세심한 관찰력에 있다. 뉴욕의 거리를 오가며 마주치는 사람들에 대해서, 몇 년간 호텔에서 일하며 만났던 이들에 대해서, 대학에서 만난 동료들에 대해서, 가장 결정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저자는 애정과 관심이 아니었다면 잡아내기 어려웠을 것들을, 이를테면 사람들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감정의 흐름 같은 것들을 예리하게 포착해낸다. 이건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외로움, 수치심, 후회 등등 저자의 감정들 또한 숨김없이 드러나있다. ‘내가 하고 있던 이야기는 언제나 나 자신에 관한 것이었다‘(165p)는 말처럼, 저자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그 이야기는 결국 독자의 이야기와도 닿아있다. 우리 안에도 같은 감정들이 자리하고 있으니까. 타인 안에서 우리는 언제나 우리 자신만을 본다.



가장 좋았던 글은 맨 마지막에 실린 편지 쓰기에 대한 글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언제든 전화를 걸 수 있게 되면서 사람들은 더 이상 편지를 쓰지 않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고독하게 쓰기에 몰입하는 시간‘이 줄어들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이야기하는 내면의 삶‘이 사라져간다는 이야기. 이 책의 출간년도(1996)로부터 26년이 지난 지금의 상황을 보면 몰입의 시간이 더 줄어들면 줄어들었지 더 늘어나지는 않은 것 같다. 실시간 채팅과 SNS의 시대-영상, 이미지와 더불어 다시금 문자의 시대라고도 볼 수 있는-의 특징은 즉각적이고 즉흥적이라는데 있으니, 심사숙고해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글쓰기와는 거리가 있는 셈이다. 저자는 모두가 편지를 쓰지 않는 시대에 내면의 고요함에 다가가려면 분투해야한다고 일갈한다. 일기든 뭐든 써야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매번 넷플릭스를 선택해버리곤 하지만, 항상 마음 한구석이 찝찝했다. 마치 소란스러움에 대한 반작용처럼 조용히 내면으로 침잠해 그 안애서 맴도는 것들을 표현하고 싶다는 갈망이 점점 커지는 것이다. ‘자신을 온전하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으로 남아 있는 것이야말로 고귀한 일‘(237P)이라는 저자의 마지막 문장을 되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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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된다는 것
니콜 크라우스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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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좋아하는 작가 니콜 크라우스의 단편집. 그의 작품들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문장에 있다. 크라우스가 자아내는 문장들은 무척이나 아름답다. 그는 내면의 미세한 균열을 정교하게 그려내고, 기어이 문장 하나하나가 정체성과 삶과 사랑이라는 주제에 닿도록 직조해낸다. 작중 인물들과 그들을 지켜보는 독자들 모두 불가해하고 난해한 삶의 그물 속에서 기어이 사랑을 찾아내도록.



열 편의 단편들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은 <에르샤디를 보다>. 영화 <체리향기>에서 미스터 바디를 연기한 바로 그 에르샤디 맞다. 무용수인 주인공은 도쿄의 어느 정원에서 에르샤디를 보게 된다. 어쩌면 에르샤디의 모습으로 눈 앞에 현현한 자기 자신을.



이 작품은 영화 <체리향기>와 배우 에르샤디, 주인공과 친구 로미의 이야기가 다층적으로 펼쳐진다는 점에서 무척 매력적이다. 또, 영화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에르샤디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결국 주인공 자신의 내면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각별하다. 작품의 말미에 주인공은 ‘에르샤디로부터 무언가를 포착하고 싶은 욕망. 현실이 나를 위해 팽창했고 다른 세상이 다가와 나를 건드렸다고 느끼고 싶은 욕망 때문에 내 상태를 더 빨리 자각할 수 있었다‘고 회고한다. 결국 외부 현실의 징후들은 내면을 드러내는 장치인 셈이다. 이 과정이 영화 <체리향기>의 줄거리를 빌어 꽤 아름답게 드러난다.



다음으로 좋았던 단편은 <스위스>.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이 작품은 ‘폭력적 관계에 자신을 내맡기고 벼랑 끝까지 다녀오는‘ 한 소녀에 대한 이야기다. 소녀는 ‘자신을 벼랑 끝까지 밀어붙이며 어둠 혹은 두려움과 맞붙어 이긴 사람의 품위‘를 가졌다. 순응하기를 거부하고 기어이 벼랑 끝으로 스스로를 내모는 소녀. 이런 류의 이야기는 거부하는 것이 더 힘들다.



니콜 크라우스의 전작들로는 <사랑의 역사>, <위대한 집>, <어두운 숲>이 있다. 가장 좋아하는 건 단연 <어두운 숲>. 그렇지만 아직 그의 작품들을 만나보지 않은 운 좋은 독자라면 최신작이자 첫 단편집인 이 책 <남자가 된다는 것>으로 가볍게 시작해보는 것도 좋을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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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 너머 어렴풋이
신유진 지음 / 시간의흐름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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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층 빌딩 사무실에서 통유리창 너머로 도시의 정경은 실컷 보지만 정작 내 마음의 창은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하는 요즘. 틈이 날 때마다 이 책을 들고 카페 구석으로 숨어들었다. <창문 너머 어렴풋이>.

보통 책을 읽으면 전반적인 분위기나 흐름으로 감상이 정리되곤 하는데, 유독 특정한 문장이나 챕터가 마음을 사로잡을 때가 있다. 이 책에서는 ‘그 여름의 끝‘이라는 글을 여러 번 읽었다. 어느 여름의 끝에 십 대 후반을 함께 보낸 친구와 재회하는 이야기. 이 글은 고여 있는 시간과 새롭게 흐르는 시간에 대한 이야기이고,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좋아하는 것들과, 우정과, 다정함이 가득 흘러서 마치 이 글의 일부가 되고 싶은 마음으로 푹 빠져들어 읽었다. 작가님의 글은 다정하다. 유연하기도 하고 강인하기도 하고 조금은 쓸쓸하기도 한 다정함. 그래서 더 좋은.

책의 후반부로 갈수록 사랑이 느껴진다. 창을 여는 일도, 글을 쓰는 일도, 살아가는 일도 결국 사랑의 힘으로. 사랑이 있다면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견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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