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페이퍼를 쓰려고 브리짓을 꺼냈다. 그리고 벌써 다섯번도 넘게 읽은 책을 두 권임에도 짧은 시간에 읽어 버린다. 엉뚱한 브리짓의 모습에 웃고, 개성 강한 친구과 그녀의 멋진 남자친구를 부러워했다. 난 어느덧 그녀와 같은 나이와 같은 입장이 되어있다. 30대의 직장 여성이며 남자 친구를 가지고 싶은, 하지만 일단 시급한 과제는 다이어트. 물론 그녀처럼 귀엽게 엉뚱하지도, 개성 강한 세명의 친구들도, 멋진 남자친구도 없었지만.그럼에도 그녀에게 난 강한 동질감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브리짓 존스가 마크와 오해로 2틀간 서로 연락을 안했다. 브리짓은 초조하다. 그녀는 그를 너무 사랑하고, 마음에 없는 말을 뱉긴 해지만 절대로 헤어지고 싶지 않다. 그래서 그가 먼저 연락을 하길 바란다. 하지만 마크는 연락이 없다. 브리짓은 모른 척하고 싶어도 도저히 그래지지가 않는다. 지극히 그녀스러운 방법으로 자신의 사랑을 확인 할 뿐.   

마크의 집 앞을 지나치며 불이 켜져 있나 확인한 횟수 2번(왕복한 걸 감안하면 4번). 단지 자동응답기에 남겨진 그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141로 전화. 그가 1471(상대방 전화번호 추적하는 서비스번호)로 확인할 때 내 전화번호를 추적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한 횟수 5번(나쁨. 하지만 메시지를 남기지 않은건 매우 좋음). 나 스스로에게 그가 아직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납득시키기 위해 마크의 전화번호를 전화번호부에서 찾아 본 횟수 2번(잘 억제하고 있음). 그가 전화 할 경우를 대비해서 휴대폰으로만 전화한 확률 100퍼센트. 걸려 온 전화가 마크에게서 온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원망스러운 기분이 되고(마크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온 전화 제외), 마크에게서 걸려오는 전화를 막을까 봐 될 수 있는 한 빨리 전화를 끊은 확률 100퍼센트.        <브리짓 존스의 애인 p. 142>

그리고 그녀는 드디어 중대한 결심을 한다. 오랜(2틀간의) 냉전을 깨기 위해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겨우 결심을 한다. 먼저 전화하기로. 그러지 않고는 그녀가 먼저 죽을 것 같으니까

밤 9시 - 좋아. 마크에게 전화 걸어야겠다.
밤 9시 1분 - 자, 한다.
밤 9시 10분 - 마크 다아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초조하고 거의 울부짖다시피 하는 목소리로 "여보세요?"하고 말했다. 축구 중계를 보고 있던 중이었는지 전화기를  통해 관중의 함성이 들렸다. 나는 풀이 죽은 목소리로 "나야, 브리짓"하고 속삭였다. "브리짓! 당신 미쳤어? 지금 무슨 일이 있는지 알기나 하는거야? 이틀 동안 전화를 하지 않더니 지금 가장 중요하고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안 돼에! 안 돼에! 이 바보 같은, 빌어먹을...... 젠장. 이 얼간이....... 심판 바로 옆에서. 그건 반칙이야! 넌 이제...... 심판이 경고하고 있잖아. 퇴장이다. 에잇, 빌어먹을. 이봐, 끝나고 전화할게."  <브리짓 존스의 애인 p144>

오오 브리짓 브리짓.
도대체 먼저 전화한 네가 잘 못 한거니. 아니면 하필이면 축구 중계를 하는 그 시간에 전화를 한 게 잘 못 된거니?
둘 중에 하나만이라도 아니었으면 좀 더 상황이 나았을텐데.


2부. 

선을 봤다. 그 사람도 나도 시간 내기가 힘들어 겨우 날짜는 맞춘게 연락온 지 근 한달이 지나는 저번 일요일이었다.

내키지 않았다.
난 아직 결혼에 흥미가 없다.
하지만 결혼은 해야 한다. 

둘째 딸은 조만간에 결혼을 할텐데 그 전에 큰 딸을 먼저 보냈으면 하는 부모 마음을 모른 척 할 수 없다가 첫번째.
두번째는 해야하는 거라고 주변에서 말을 하니까. 혼자이고, 내 생활 하면서 즐겁게 지내는 것을 바라보는 시선이 나와 같은 마음이라고 결코 생각할 수 없으니까. 그런 주변의 시선에 자유로울 수가 없었으니까. 그럴 자신이 없으니까. "괜찮아요. 전 혼자 살아도 되고, 지금도 좋은데요"라고 말하는 진심이 진심으로 들리지 않을테니까. 어느새 나 또한 그 말이 진심으로 느껴지지 않을 순간이 오는 걸 아니까. 그리고.

나이는 먹어가고, 마음에 담아 둔 사람과는 시작조차 되지 않는 (시작할 수도 없는) 상황.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게 웬지 배신(?)과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해도 이왕이면 좋은 사람이 나와 이 지긋 지긋한 머릿속을 정리해줬으면 했다. 정말 그랬다.
실현 가능성 없는 일에 계속 마음을 담아두고 "사랑의 기적"을 믿는 순진한 여자가 아니기에 내키지 않는 마음을 안고 다른 사람을 만나고, 실망하고 그 사람에게 "혹시나"를 생각하고, 기대와 배신을 적절하게 섞어 또 다시 다른 사람을 만나러 간다.

약속한 일요일. 일찍 일어났다. 기대해서 가슴이 떨리던가 하는 그런건 아니다. 거의 삼주째 돋고있는 두드러기가 났다면 가라 앉는 데 시간이 걸리므로 일부러 알람을 맞춰놓았다. 상대방 남자가 내 마음에 들건 들지 않건 그 사람에겐 예쁘게 보이고 싶은 게 심리. 또 말하지만 난 마음 속 다른 남자가 있었지만 그 사람을 위해 일부러 좋지 않은 얼굴로 나가는 순정 만화 속 주인공이 아니다. "혹시나"란 기대가 있으니까. 그러나 이럴 어쩌나. 좋지 않은 예상은 늘 맞는다. 알 수 없는 원인 중에 그나마 제일 근접한 것이 기력저하와 스트레스인데 "선"이라는 나름의 스트레스가 더 해졌으니 들어가던 두드러기도 돋는 게 맞겠지. 시간이 안 맞아 이미 3주 정도를 미뤄 놓은 상태이니 약속을 더 미룰 수는 없는 일. 나에게도 상대방에게도 좋지 않은 일이다. 

두 뺨과 이마에 모기가 물린 듯한 크기의 두드러기가 넓게 퍼져있다. 안 그래도 부은 얼굴이 이젠 터질 듯한 호빵이 되어버렸다. 중단했던 피부과 약을 찾아 먹고, 한약 까지 마셨다. 찬물로 샤워를 하고 얼굴이 진정 되길 기다린다. 이게 마음이 급해지지 두드러기가 들어갈 생각을 않는다. 화장으로 가려볼까 하고 안 하던 파운데이션 까지 발랐는데 붉은기만 가렸을 뿐 부은 얼굴은 그대로. 대략 낭패다. 이것도 운명이거니 생각하고 집을 나서려는데 여동생이 잡는다. 얼굴이 너무 심란하니 아이라인이라도 그려보라는 것. 백만년 전에 그려보고 안 해봤는데. 내가 그려줄께. 여동생이 새로 샀다며 아이라이너를 잡았다. 번지면 어떻게 하고? 이거 안 번진데. 그래? 쌍꺼풀 없는 눈이라 조금 두껍게 그려준다. 거울을 보니 그나마 시선이 눈으로 가 부은 얼굴과 언뜻 보이는 붉은기가 조금 가려진 느낌이다.

"혹시나"는 "역시나" 였고, 한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을 이야기 후 둘 다 미련 없이 일어섰다. 카페 앞에선 한 눈을 팔다 넘어지고 만다. 조심하세요. 남자가 부축하며 두터운 팔뚝을 잡는다. 넘어진 것 보다 잡힌 팔뚝의 두께가 낭패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쇼윈도 창으로 잠깐씩 보이는 얼굴이 조금 이상해 보인다. 조짐이 이상하다. 아파트에 도착해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리고 엘리베이터안의 거울로 눈이 향하는 순간. 난 경악했다. 백만년 만에 그려진 아이라이너는 눈 밑에 2센티 정도의 진한 그것도 아주 진한 다크서클을 만들어 놨던 것. 그제야 이해가 된다. 대화 중 상대방 남자가 왜 그렇게 얼굴을 뚫어져라 봤는지. 집에 오는 길에 사람들이 왜 그렇게 힐끔 거렸는지. 맙소사.

눈이 그게 뭐야? 여동생이 묻는다. 몰라서 물어? 나 이대로 그 남자랑 마주보고 내내 이야기 했어. 중간에 얼굴을 좀 살피지 그랬어? 도착해서 인사하고 화장실도 안가고 한시간 이야기 했어. 중간에 확인할 틈이 어디 있니. 괜히 그렸다. 그치? 아냐. 그리는 건 상관 없어. 아이라이너가 번지든 두드러기든 둘 중에 하나만이라도 없었으면 좀 더 나았을꺼야. 두드러기가 죄지. 어땠어? 남자는? 잠깐의 침묵 후 말했다.

도대체 어느 남자가 팬더와 호빵의 조합을 좋아하겠냐?














 

덧붙임 사진.

 

진흙길을 뚫고 온 아만다를 보고 "생기있다고" 생각 했을 다아시. 책 읽는 척 하면서 몰래 아만다를 훔쳐보는 모습에 왜 가슴이 두근거리지? 다아시역의 배우가 잘생겼으니 좋느니 그런 감정보다 정말 전형적인 나쁜 남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그의 모습 하나 하나에 눈이 쏠리고, 마음이 간다. 이러다 나도 아만다 처럼 그 시대의 낭만을 찾다보면 영영 결혼이란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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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1-03-31 0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물의 추천입니다, 버벌님. 저도 아이라인 했다가 집에와서 거울보고 이얼굴로 마주앉아 있었다니! 경악을 금치 못하고 내 다시는 아이라인을 하지는 않으리라, 아니 하지 않던걸 대체 오늘은 왜 했단 말인가, 하면서 완전 좌절했었어요. 저는 무려! 좋아하는 사람 만나러 간거였는데. 예쁘게 보이고 싶었거든요. 눈 좀 더 커 보이면 더 선명해 보이면 예뻐 보이지 않을까..
아, 그날이 선명하게 기억나요. 눈화장 한걸 알아봐주고 말을 걸어주던 그의 앞에서 부끄럽고 쑥스러웠던 일, 그러나 집에 오니 팬더가 되어있었던 일.

왜 이런글을 쓰셨어요, 왜요, 왜왜왜왜왜왜왜왜!!!!

버벌 2011-03-31 10:47   좋아요 0 | URL
쓰지 않으면 폭발할 것 같았거든요~~~~ ㅠㅠ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팬더라니. 팬더와 호빵의 조합보다 더 할듯. ㅠㅠ 선본 그날 저녁에 마음에 둔 그사람과 채팅을 했어요. 선에대한 말은 하지 않았는데 순간적으로 너니? 네가 일부러 그렇게 만든거니? 잘되지 마라고 그렇게 바란거니? 라고 계속 모니터에 대고 묻고 있었어요. 사이코패스가 된 것 처럼. ㅠㅠ
 

중학교 1학년때 친구에게 빌린 만화 잡지를 보고 있었다.
그때는 잡지 안에 조그마한 책자 모양으로 소설을 실어놓곤 했다. 모든 잡지가 그랬는지 유독 그 잡지만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분명한건 그 잡지에는 소 책자가 있었고, 그 제목이 "오만과 편견"이었다는 거다. 동서남북 과감히 잘라내고, 연애물에 목마른 소녀들이 좋아할 만한 부분만 편집 된 어쨌든 "오만과 편견"이었다.

소개도 없이 베넷가의 다섯딸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빙리가 온다면서 야단법석을 떨고 바로 무도회장 장면으로 옮겨간다. 다아시와 리즈의 까칠한 만남에 어린 소녀는 심장이 뛰었고, 그걸 알았는지 다음 장면은 리즈가 정신없이 네더필드로 가고 있다. 심장이 뛰도록! 그리고 그녀의 단정치 못한 행동에 빙리의 누이가 험담을 하자 다아시가 말한다. "그녀의 눈이 생기에 빛나 예뻤다" . 어린 소녀는 더욱 심장이 뛴다. 기대에 찬 달아오른 얼굴로 책장을 넘겼다.

"다음편에 계속...."

다아시와 리즈의 심상치 않은 첫 만남이 있었고, 말괄량이을 연상케하는 그녀의 모습에 "예뻤다"라고 했다. 그리고 끝났다.
떡밥은 배 부르도록 던져놓고, "다음편에 계속"이란다. 짜증에 혈압은 급 상승한다. 그 뒤로 근 6개월간 내 입엔 계속 떡밥이 물려져 있었고, 궁금증에 혈압은 롤러코스터를 탄다. 학년 말 친구가 언니에게 빌려왔다며 성모마리아 미소를 지으며 두툼한 책을 쥐어 주기전까지. 드디어 입질이 끝난 순간이었다. 뽀뽀 백 번과 그 만큼의 격한 포옹을 해주고, 자율 학습시간에 복도 순찰중인 선생님의 눈을 피해 "다음편에 계속" 그 다음을 향해 책장을 넘겨간다.

그런데 이상하다. 그렇게 기대를 하고, 심장이 두근거렸으면 재미있게 그리고 감동적으로 읽어야함이 정상이거늘. 할리퀸과 명랑소설에 지나치게 길들어진 탓인지 설명이 많은 제인오스틴 소설은 당연히 좋아지지 않는다. 동서남북의 과감한 소녀취향의 편집은 잡지 안의 소책자만이 아니라 나에게도 해당되었다. 자 편집 시작!

무도회장에서 만났다. 휘릭휘릭. 눈이 생기있게 빛난데. 휘릭휘릭. 제인과 빙리가 헤어졌다. 다아시탓이야. 휘릭휘릭. 위컴은 누구야? 중요인물 아니다. 휘릭휘릭. 결국엔 둘이 이어지네. 뭐 당연한거지. 완독. 그때 당시엔 제인 오스틴이 누구인지 당연히 몰랐다. 많고 많은 할리퀸 작가중에 한사람인 줄 알았고, "오만과 편견"은 조금 지루하고 뽀뽀도 잘 안나오는 두꺼운 할리퀸으로 생각했으니까. 얼씨구?

시간이 흘러 그때 내가 본 "오만과 편견"은 제인 오스틴이라는 빅토리아시대의 제한된 여성들의 생활을 그려낸 순수 문학 작가이며, 팬층도 꽤나 탄탄한 여류작가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 또한 팬이 되었다. 단순히 그녀가 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와 드라마만을 보고.  이거 뭐 어떻게 설명을 해야하지? 어릴때 날림으로 읽은 "오만과 편견"이후로 그녀의 소설을 전혀 읽지 않은 하지만 그녀의 팬인 이상황을...

 

 

 

 

  

이런 나에게 "그래선 안돼"라고 일러 준 이가 있었다. 제인 오스틴의 팬이라면 나처럼 읽어야 하는거야. 라고 일러 준 아만다.

아만다? 아만다 프라이스! 

 

2008년 영국작 "오만과 편견 다시쓰기"의 주인공.  <개인적으로 버스에서 책을 들고 있는 저 장면이 정말 마음에 든다>

나에게 영국드라마는 시대극만이었다. (닥터후과 스킨스도 알았지만 내 스타일 아니므로 패스) 
"설득"을 보고 가슴저리게 아프고, 그만큼 행복해했고, "오만과 편견"의 콜린 퍼스 매력에 푹 빠져있었다. 제인 오스틴만이 아니었다. "아내와 딸들"이나 "북과남"과 같은 엘리자베스 개스켈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까지 시대극의 매력에 퐁당 빠져있었다.

재작년으로 기억한다. 명절이었고, 난 새삼스러울 것도 없이 근무 중이었다. 야근이 끝난 후 한참을 꿈나라에 가 있었는데 같은 방을 쓰는 여동생이 작은집에 가면서 TV를 켜 놓고 간 모양이다. 시끌시끌. 작게 거슬리는 소리에 눈을 떴더니 마주 보이는 TV 화면에 빅토리아시대가 펼쳐져 있다. 당일에 또 다시 야근에 들어가야 했지만. 난 다시 잠들지 못했다. 연속으로 방송해주던 4부작을 모두 봐야했기에. 

그리고 내가 "오만과 편견"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오래 볼 것도 없이 드라마의 첫 부분에서 아만다가 알려준다

난 늘 내가 가장 사랑하는 책을 통해서 도피한다. "오만과 편견" 너무 많이 읽어서 문장 모두를 외우다시피 해서 그냥 창문을 열듯 머릿 속에 펼쳐진다. 내가 꼭 그곳에 있는 것과 같다. 마치 오래 전 부터 알고 있던 장소처럼 느껴진다. 그 세계를 볼수 있고, 거의... 만질 수도 있다. 다아시를 볼 수 있을 것만 같다. (책에 빠져 있던 그녀가 정신이 든다) 이런, 아만다!!

도대체 어떻게 읽어야 만질 수 있을 정도로 떠올려질까? 얼마나 읽었길래 문장을 모두 외우다시피 하는 걸까?
저렇게 해야해! 진정한 팬이라면 저 정도 열정은 보여야 하는 거다!! 
 
아만다는 현대의 여성이다. 직업도 있고, 남자친구도 있는 남들이 보기에 "완벽"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완벽"에 가까운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완벽"이 아닌 이유는 바로 "오만과 편견"때문에. 아름다운 빅토리아 시대의 완벽한 남성 다아시에 대한 연정을 품고, 그 시대의 낭만을 찾는 아만다에겐 술에 취해 트림을 하며 맥주 뚜껑으로 청혼을 하는 남자친구가 마뜩잖다. 그녀는 말한다.

 "전 다아시에게 매달리는 게 아니에요. 집에 틀어 박혀 콜린 퍼스 장면만 돌려 보는 사람이 아니라구요. 그건 사랑이야이게요. 전 엘리자베스를 사랑해요. 제가 사랑하는 건 그들의 언어와 매너에요. 그리고 예의범절도요. 제 자신의 일부이기도 하고 좋아하는 것 이기도 해요. 제 말은... 제가 주관을 가지고 있다는 거죠."

"집에 틀어 박혀 콜린 퍼스 장면만 돌려 보는 사람이 아니라구요"  이 부분에서 웃고 말았는데 이유는 BBC에서 콜린퍼스 주연의 "오만과 편견"이 방송됐을때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 특히 극중 다아시(콜린퍼스)가 호수로 떠오르는 장면은 과히 폭발적이었는데 그 부분은 노처녀 브리짓도 일기에 써 놓을 정도였다.   

레베카가 다른 사람에게 총총거리며 가 버렸기 때문에, 결국 우리 셋은 주드의 아파트로 비틀거리며 돌아갔다.  "'관계를 기피하는 사람은 자신의 영역에 결코 상대방을 들여놓길 원하지 않는다.;" 주드가 소리내어 책을 읽는 동안 샤론은 <오만과 편견> 비디오 테이프를 이리저리 돌리며 콜린 퍼스가 호수로 뛰어드는 장면을  찾고 있었다. "'그는 마치 책임질 게 아무것도 없는 유랑기사처럼 상대방의 탑에 찾아오곤 한다. 그러고 나서 그는 자신의 성으로 돌아간다. 그는 상대방이 모르게 전화를 걸거나 받을 수 있따. 그는 자신의 장소를-그리고 자신을-자신에게  한정한다.'" "정말 맞는 말이야." 샤론이 내뱉었다."자, 자, 콜린이 다이빙을  할 거야."
우리는 모두 입을 다물었고 콜린 퍼스가 물에 젖어 훤히 비치는 하얀 셔츠 차림으로 호수 위로 떠오르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 음. 음.       P. 63

"그리고는 너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찾으러 나가기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하겠지!" 샤론이 실크 컷에 불을 붙이며 쾌활하게 말했다. "닥쳐! 샤론." 주드가 말했다. "입 다물어." 너무 늦었다. 레베카의 유령이 나타나 거대한 괴물처럼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오, 오, 오," 난 눈을 비비며 말했다. "빨리 브리짓에게 술을 갖다 줘, 어서." 주드가 소리쳤다.
"미안해. 미안해. <오만과 편견>을 틀어 줄게." 샤론이 떠들면서, 능숙한 솜씨로 내 입 속에 브랜디를 부어 주었다.
"콜린 퍼스가 젖은 셔츠를 걸치고 있는 장면을 찾자. 그리고 우리 피자 먹을까?"       P.140

"여보세요, 브리짓. 전 콜린 퍼스입니다." 우리는 모두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미스터 다아시였다. BBC 미니시리즈에서 엘리자베스 베넷에게 프로포즈 할 때와 똑같은 고상하고 착 가라앉은, 내가 알 게 뭐야, 하는 듯한 목소리. 브리짓. 그건 나다. 미스터 다아시가 브리짓, 하고 말했다. 내 자동응답 전화에다.
"월요일에, 절 인터뷰하러 로마에 오시게 됐다고 들었습니다." 그가 계속해서 말했다. "만날 장소를 정하기 위해 전화드렸습니다. 피아차 나보나라고 하는, 택시로 찾아가기 쉬운 광장이 있습니다. 분수대 옆에서 4시 30분에 만나도록하지요. 그럼, 안전한 여행이 되기를 빕니다."
"1417, 1417." 주드가 정신없이 떠들어댔다. "빨리 1417로 전화해. 빨리. 빨리. 아냐, 우선 테이프를 꺼내, 테이프를 꺼내!"
"콜린한테 다시 전화해." 샤론이 나치의 고문관처럼 고함을 질렀다. "콜린한테 다시 전화해서 분수대 옆이 아니라 분수대 안에서 나자고 말해. 오 마이 갓."    P. 195 

 

 

  

책을 사랑하고, 정확히는 "오만과 편견"을 사랑하고 그 시대의 사랑을 꿈꾸던 아만다. 남자친구와 데이트 보다 집에서 와인과 함께 "오만과 편견"을 읽는 것을 더 좋아하는 아만다. 프로포즈하는 남자친구에게 다아시의 청혼만을 생각했기에 "이 얼마나 로맨틱하지 않은지.." 라며 실망하는 아만다.
  
드라마는 현대 여성 아만다가 우연히 현대로 날아온 책 속의 주인공 엘리자베스 베넷과 바꿔치기 되어, 다아시를 만나고 자신의 잘못(?)으로 뒤엉킨 줄거리를 풀기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을 그린 내용이다. 제인과 사랑에 빠져야 할 빙리가 어처구니 없이 아만다를 사랑하게 되고 (술 취한 아만다의 키스때문에) 잘 못 날아온 큐피트의 화살을 되 돌리려 애쓰다 엉뚱하게 콜린스와 결혼하게 되버리는 제인. 그리고 겨우 제인에게 돌려진 사랑이 무산됨에 폐인이 되는 빙리(엥?) 콜린스와 결혼해야 하는 샬롯은 아프리카로 떠나버린다.(헉!) 그 와중에 사랑의 상처를 입은 빙리는 리디아와 도피를 (위컴은 뭐하고 있는거냐~) 바람둥이 위컴은 신분상승을 꿈꾸는 성격은 그대로 가져왔지만 다아시의 여동생과의 추문에 일부러 자신이 잘못을 뒤집어 쓴 남자로 나와 곤란에 빠진 아만다를 도와주기까지 한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아만다와 다아시의 사랑. 현대의 아만다가 다아시와 이어지는 건 무덤 속의 제인 오스틴이 펄쩍 뛸일. 무슨 일이 있어도 엘리자베스와 연결해야하는 아만다와 그 반면 아만다를 사랑하게 되어 자신을 얼굴도 모르는 엘리자베스 이야기를 꺼내는 그녀가 답답한 다아시.

"아만다. 그녀는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있습니다."
"절대로 하면 안돼요. 당신은 안돼요." 
"무슨 이유로 나는 안 됩니까? 누가 우리를 비판합니까? 난 예법에 한해서 너무 오랫동안 노력해 왔습니다."
"엘리자베스. 난 엘리자베스가 아니에요. 전 세계가 날 미워할 거에요."
"그게 사실이라면, 아만다. 난 전 세계와 싸울 것 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입니다."
"당신이 날 위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겠어요?"
 

맙소사. 다아시 아만다 말고 날 사랑해줘. 제발 나를 안고 그런 이야기를 하란 말이야!!
나는 당신에게 무엇도 원하지 않아.
아만다처럼. "날 위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겠어요?" 란 말은 하지 않아.

더욱이 그 무엇인가가

  

 

 

 

 

이런 일임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고!

분명히 집에서 콜린 퍼스의 젖은 셔츠 장면 돌려보는 여자가 아니라고 말했던 아만다가 자신을 사랑한다며 고백하는 남자에게 바라는 일이 흰 셔츠를 입고 호수에 빠지는 것이다. 브라보! 콜린 퍼스

아만다는 고민하고 절망한다. 다아시를 사랑하지만 결코 자신과는 이어질 수 없는 이어져서는 안되는 사람.
그는 엘리자베스의 사람이다. 자신과 위치를 꾼 엘리자베스가 핸드폰을 사용하고, 베이비 시터로의 현대 삶을 즐기며 다아시에 대한 존재를 전혀 모르는. 제인오스틴에게 뛰쳐나와 독립적인 삶을 사는. 저 밖에 엘리자베스가 있기 때문이다.  

다시 현실로 돌아온 아만다를 따라와버린 다아시가 아만다의 원래의 삶을 받아들이지 못 해 꿈이라 칭하고 그녀를 단념할 무렵 아만다가 용기를 낸다. 아만다의 집과 베넷가와 연결된 비밀 통로의 문에 꽂아 둔 아만다의 세계인 영수증 뒷면에 적힌 그의  글로 인해.  "단 한 순간의 심장 박동도 잊지 못 합니다." 아만다가 뛰어 간다. 그에게로. 사랑을 위해 현대의 그녀의 삶을 버리고 책 속의 삶으로. 그토록 바라던 그들의 낭만과 예절 속으로. 그렇게 제인 오스틴 속으로 그녀가 뛰어 간다. 바래본다. 마음 속으로 간절히 바래본다. 나에게도. 정말 나에게도.
 
덧붙임 1.  

난 제인 오스틴 책을 가지고 있다. 한 권이고 또 휴대를 위한 미니북이긴 하지만 전 처럼 드라만을 보고 제인 오스틴 팬이라 말하는 그런 상태는 아니다. 책 속에 보면 수다스럽고 교양 없으며 신경쇠약인 베넷 부인말고도 재치있는 베넷씨에 대해서 말하는 부분이 있다. 

베넷씨는 날카로운 재간과 사람을 비고는 듯한 기질, 그리고 신중하면서도 변덕스러운 기질이 뒤엉킨 묘한 성격의 인물이었기에 23년 동안 같이 살아온 그의 아내조차도 남편의 성격을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 였다.  p.14


"오만과 편견 다시쓰기"에 보면 처음 빙리가 베넷가에 와서 베넷 씨에게 딸들을 소개 받는 부분.

이 집에서 무슨 말을 할땐 크고 분명하게 해야 된다네. 자 이제 품종 대로 나누어 볼까. 이쪽은 제인, 메리, 키티, 리디아. 제일 품종 나쁜 엘리자베스는 여기없고, 대신 여기 아만다 프라이스양이 있지.

웃음을 터트렸다.
품종 나쁜 엘리자베스라니 자신의 애정을 묘하게 틀어. 재치 있는 책 속의 베넷 씨를 그대로 옮겨놨다.

덧붙임 2.

위의 콜린 퍼스 부분을 찾다가 "브리짓 존스의 일기"와 "브리짓 존스의 애인" 두권을 모두 꺼내 훝어보게 되었는데 웬걸 오랫만에 보니 너무 재미있다. 유쾌한 브리짓 존스의 일기는 봐도 봐도 재미있는 듯. 오늘은 쉬는 날이니 한 숨 자고 나서 오랫만에 브리짓 일기나 읽어 봐야 겠다.

덧붙임 3.

아이팟에 들어있는 소장하고픈 그래서 소장하고 있는 드라마.
영국 드라마인 "설득"과 "셜록" "오만과 편견 다시쓰기" 그리고 캐나다 드라마 "빨강머리 앤"
시간 되면 "빨강머리 앤"에 대해서도 페이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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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1-03-30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캐나다 드라마 빨강머리 앤 몇년전에 생일선물 받아서 DVD 로 가지고 있거든요. 그런데 아직 보지도 않았어요. 포장도 안뜯었...비닐 그대로....orz
이 긴 글을 읽으니 제가 빨강머리 앤을 가지고 있다는 게 행운처럼 여겨저요. 저는요, 버벌님, 제인 오스틴도 오만과 편견도 딱히 좋아하진 않지만,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에 대해서는 대사를 외울 수 있을 것 같아요. 히히. 집에도 한권, 사무실에도 한권을 가지고 있죠. 제게 외우고 싶은 책은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에요. 아우.
오늘도 업무차 은행에 갔다가 젊은 남자직원한테 이 책 읽으라고 메모해주고 왔어요. 하하하핫;;

버벌 2011-03-30 13:22   좋아요 0 | URL
어맛. DVD가지고 계세요? 아아아 왕 왕 부러워요~~ 정말 가지고픈 DVD인데 선뜻 사기가.. ㅠㅠ "새벽 세시"는 동생에게 보라고 권해줬는데 푸념만 들었어요. 내가 너무 재미있다고 그랬나봐요. 그 말때문에 더 재미있을 책인데 느낌이 덜했다고 그래도 재미있었다고 하네요. 말해줬어요. 알라딘에 다락방님이라고 계신데 그분이 재미있다고 해서 읽어본거라고. ㅋㅋㅋㅋ 제인오스틴은 책만을 본다면 쉽게 좋아지지 않았을거에요. 아마도. ^^ 하지만 드라마와 영화로 먼저 작업이 되어서리... 이제는 하나둘 책 늘려가며 읽어보려구요. ^^

다락방 2011-03-30 13:53   좋아요 0 | URL
버벌님 동생은 그래도 훈늉합니다. 제 여동생과 남동생은 저를 질타했어요. 새벽 세시 읽고나서, 제게 대체 그런 책을 왜 읽냐며 불륜조장소설이라고...채팅하다 번개하는 걸 써놓은 소설을 가지고 왜 광분하느냐며....orz
전 졸지에 동생들 사이에서 불륜미화하는 큰누나, 언니가 되어버렸어요. 후아.. 전 이런 동생들과 함께 살아요.

버벌 2011-03-30 19:12   좋아요 0 | URL
그 훈늉한 동생을 근 삼일간 보질 못하고 있네요. 근무가 틀려서 ㅎㅎㅎㅎㅎㅎ 직장 선배님에게 권해드렸는데요. "선생님 훈훈한 마음으로 읽을 수 있어요. 단지 여자가 유부녀라는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안돼" 라고 하네요. ㅡㅡ;;;; 나 백퍼센트 바람난다. 안돼. 라고요. ㅋㅋㅋㅋ
 

두드러기가 났다.
작년에도 두드러기때문에 십여일 고생을 했었다.
그때는 상한 우유 두 모금이라는 쉽게 찾을 수 있는 원인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도통 원인을 모르겠다.
딱히 생각나는 원인이 없다기 보다 너무 많은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우유도 많이 마셨고, 계란도 끼니때마다 먹었으며, 어패류와 기름이 뚝뚝 떨어지는 음식도 먹었다. 추운 곳에 오래 노출도 되어있었고, 최근엔 나름 직장과 집에서 스트레스도 받았다. 그러니까 도대체 원인이 뭐냔 말이다!!!

계속 두드러기가 돋아 있는 것은 아니다. 아침 저녁으로 두 번 반복적으로 났다가 다시 가라앉는다. 아침 저녁으로 일정하게 나타나는 두드러기지만 돋았다가 다시 들어가는 시간은 일정 하지가  않았는데 샤워도 하고, 물도 마시고, 약속 없이 집에서 푹 쉬고, 음식을 가려먹는 나름 노력한 비 약물 요법 중에 도대체 원인이 뭐냔 말이다!!

심하게 가렵지 않아 내내 참다가 5일 전에 피부과에서 약을 받았는데 울긋 불긋한 얼굴을 보고 팀장님 한 말씀.

"네가 지금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런다. 동생이 먼저 시집간다고 상견례까지 했으니 그 속이 오죽하겠니. 그리고 우리가 한 삼개월이 워낙 바빴잖니. 노구를 이끌고 일하려니 힘들고, 거기에 스트레스까지 받아서 그래. 보약이나 지어 먹어라."


???
그렇다면 두드러기 치료법은 동생이 결혼을 안 하거나, 미뤄지거나, 내가 먼저 하던가,
아니면 나이를 거꾸로 돌린다던가, 일을 그만 둔다던가 해야 하는데

동생은 결혼을 꼭 할 것이고, 절대 미뤄질 일도 없다. 내가 먼저 결혼을 하는 것이 제일 쉬운 방법이긴 하나 그것도 작년부터 노력해서 올해도 3월을 넘겨버리니 여기에 정신을 집중하면 그나마 하루에 두번이던 두드러기가 온종일 솟아 있을 것이다. 나이를 거꾸로 돌리기 전에 지구가 먼저 멸망할 것이고, 후덜덜한 카드 명세서는 채찍을 들고 나를 일터로 내몬다.

결론 나왔다.

결혼 안 한 30대의 여자는 두드러기가 나선 안된다.
 
오늘은 오후 근무였다. 5일 전 받은 피부과 약이 떨어진 오후 근무였다. 그 전에 렌즈도 떨어졌는데 일주일 째 안경만 쓰고 다녔다. (일회용 렌즈를 낀다) 집에서 일찍 나가 카페에 들러 커피를 사고, 안경점과 피부과를 차례로 들르기로 했다. 1년에 한번 있는 유니폼 사이즈 재는 날이었기에 근무 전에 팀장님실도 들러야 한다. 연필도 떨어져가니 문구점도 들러야했는데 예상시간으로 잡은 1시간이 카페에 들르자 30분이 훌쩍 가 버린다. 커피를 들고 뛰기 시작한다. 오늘 따라 신호등은 계속 빨간 불이다. 늘 있던 안경사가 쉬는 날인가 보다. 이름을 일러주고 초초함에 손가락을 책상에 두들겼다. 40분이 지났다. 여기서 고민을 한다. 내일도 오후근무니 먼저 나와 피부과와 문구점을 들러 오늘은 이대로 출근을 하느냐 오늘 마저 일을 보고 내일은 좀 더 게으름을 피우느냐. 고민하는 순간에 피부과에 도착 한다.

그대로던가요? 의사가 물었다. 그대로에요. 좀 더 나아진 건 없구요? 없는데요. 계속 약을 먹어야 할까요? 대답이 없다. 대신에 묻는다. 저번에 주사는 안 맞는다고 했죠? 오늘도 안 맞을건데요. 다시 5일분 드릴게요. 이번에는 내가 대답이 없다. 먼저 계산을 하고 처방전을 들고가는 아저씨를 그리피너 조이스가 되어 나는 걸음으로 따라 잡았다. 약국에선 대기 시간 없이 바로 약을 받았다. 50분이 지났다. 마지막으로 문구점이 남았는데 병원 앞은 빈 택시들이 대기중이다. 자. 이제 어떻게 하지?


 파버 카스텔 보난자 2B 연필 5자루, 파버카스텔 9000 3B 3자루, 파버카스텔 색연필 파랑과 핑크, 파버카스텔 휴대용 연필 깍이, 연필 마개 10개 세트, 포스트 잇, 지우개 한개, 화이트 3개(팀장님 뇌물용 한개 포함) 제스트림 볼펜심 1.0짜리 2개. 노트와 필통은 찬조 출연

마무리.

업체에서 늦게 오는 바람에 유니폼 사이즈는 출근 전이 아니라 근무 중에 재야 했다. 다행이다. 작년보다 사이즈가 늘었다. 쉣이다. 팀장님 압박으로 친한 레지던트를 찾아 약을 지었다. 술도 안 마셨는데 속 병이 났다고 한다. 한방은 늘 두리뭉실하니 고개가 갸웃갸웃 했지만 회복은 두리뭉실 되어가니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피부과 약은 당분간 중단하라고 한다. 20분 더 늦게 나와도 됐는데 안타깝다. 대신에 내일은 게으름을 피워도 된다. 그래서 행복해졌다. 피부과 약을 먹지 않았더니 얼굴에 붉은 꽃이 가득 피었다. 일요일은 모처럼 쉬는 날이고, 모처럼 약속도 잡았다. 이 얼굴이 일요일도 그대로 라면 큰일이다. 일요일은 피부과 약을 먹어 꽃들을 달래 볼까 한다. 혹시나 한약을 먹는데도 두리뭉실 낫지 않을 경우엔 말을 듣지 않고 피부과 약을 먹은 것을 숨겨야 한다.
안타까운 20분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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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1-03-26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필과 색연필과 포스트잇을 대체 어떻게 어디에 사용하시는 걸까요? 아 궁금해요..

버벌 2011-03-31 14:01   좋아요 0 | URL
락방님이 생각하는 바로 거기에 사용해요~~ ㅋㅋㅋㅋㅋㅋ 연필은 일할때 많이 쓰는거라. 주로 볼펜을 쓰는데 볼펜과 비슷한 비율로 연필도 사용하거든요. 공동으로 쓰는 연필과 볼펜이 있는데 마음에 안들어서 저는 주머니에 제것은 담아다녀요. 주머니 속에 순전히 나만의 것이 담겨있어요. 연필 지우개 화이트 볼펜 작은가위 초콜렛몇개... ㅡㅡ;;; 안 그래도 큰 몸이 부푼 주머니때문에 더 크게 보인다는 ㅋㅋ
 

최근엔 식구들 얼굴 보다 직장 동료 얼굴들을 더 본다.
아버지와 난 교대근무라 생활이 둘쑥날쑥인데 보통 남들 일하는 시간에 자고, 남들 잘때 일하는 경우가 많다.
어머니와 여동생은 9시 출근에 6시 퇴근이라는 다소 공통적인 직장인 생활 중.
하지만 여동생은 퇴근 후 바로 집에 온다는 것은,  
놀아도 놀아도 끝이없는 직장인 2년차의 룰에 위배되는 일이라 생각하는 것 같다.
바빠서가 아닌 순전히 노느라 쥐어버린 입술을 자랑으로 여기며 쉬 집에 들어오질 않는다.
제일 부지런한 생활을 하는 어머니는 일이 끝나면 곧장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의 텃밭으로 간다. 
잠깐의 밭 일 후 근처 저수지를 돌며 산책 겸 운동 그리고 바로 수면이라는 꽤 규칙적인 생활 중. 
하지만 집에 있는 시간이 적은 탓에 규칙적인 어머니는 불 규칙적인 가족들과 만나는 일이 나보다 더 쉽지 않다.
핸드폰이 있지만 큰딸인 나완 근무중엔 통화도 힘들어서 혹여 심부름 시킬 일이 있으면 쪽지로 남기는 편이다.
"가스불 켜놨다. 물 끓으면 꺼라"
"세탁기 돌려놨다 빨래 널어라"
"청소기 돌려라"  기타등등
남동생은 취업에서 대학원으로 루트를 바꿔 작년부터 학생 신분으로 돌아갔는데 전공이 바뀐 탓에 모르는 공부 따라가느라 열공모드. 현관을 나서면서 "다녀올께~"로 시작. 하교 후 새벽에 들어오면서 "다녀왔어"로 끝난다.
문을 사이에 둔 채로 대화만이다.

며칠 전 오랫만에 세 남매가 모였다.
난 야근을 들어가기 전이었고, 여동생은 체력 고갈과 가난해진 지갑때문에 약속 장소에서 급 귀가를 한 상태.
실험 중인 남동생에게 당장 중단하고 큰 누나 출근 전까지 어서 먹을 것을 사오라
"어서 어서" "빨리 빨리" "급 급" --> 라고 몇 십분간 광란의 카톡질을 했다.
사와야했으니 (우린 많이 먹는다. 정말 많이 먹는다. 해도 해도 너무 먹는다)
큰 지출 뒤 떨떠름한 표정의 남동생을 앞에 두고 여동생과 난 희희낙락 볼 터지게 상추튀김을 입에 넣었다.

"셜록홈즈가 왓슨 시각에서 쓴거였어?"

 

 

  

뜬금 없는 물음에 (너무 당연한 물음이었기에) 젓가락질을 중단하니 남동생이 손에 들린 "주홍색 연구"를 흔든다. 남동생은 나와 함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주연의 "셜록홈즈" 영화도 봤고, 내가 받아둔 영드 "셜록"도 본 상태였다. 셜록역의 베네딕트에게 감탄사를 연발하는 내게
"연기 잘하던데. 검시관보고 뒤 돌아있으라는 장면에서 배꼽 잡았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남동생이 묻는다. "왓슨시각에서 쓴 거였어?" 라고!


"책 안 봤나? 셜록홈즈. 엄청 유명한 책 이잖아"
"안 봤는데. 나 왓슨이랑 같이 한다는 것도 영화 셜록홈즈 보고 알았는데"
"셜록 홈즈는 알아?" 
"알지"
"코난 도일은?"
"당연히 알지"

그런데 책은 안 봤단다. 왓슨의 존재를 몰랐고, 모리어티 교수도 모른다. 여동생을 돌아보니 그쪽도 사정은 마찬가지.
그런데 중요한건 동생들이 너무나 당연하게 알고 있지만 읽지 않은 책이 셜록홈즈 만이 아니라는 것.
<작은아씨들><빨강머리앤><소공자> <소공녀> <셜록홈즈시리즈> 심지어 <들장미 소녀 캔디> 도 안 봤다.
특히 여동생이! (나와 2살 터울이다)
너무 좋아해서 과장 안 보태고 열번도 넘게 읽었던 그 책들. 소장한 게 아니라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쪽 머리에선 학급 문고가 없었나? 도서관에 없었나? 친구들이 안 읽었나? 어떻게든 읽게 되던데.
50권짜리 문고판 홈즈시리즈는 모른다 치더라도 <작은아씨들>도 안 본것에 조금 충격을 받았다.

위에 말한 책들 중 유일하게 소장중인 빨강머리 앤을 꺼냈다. 읽어. 일단 읽어라. 합이 열권이다. 끝나고 나면 저기 오즈의 마법사도 읽어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읽었어? 아니야? 그럼 그것도 읽어. 거울나라까지 다 읽어. 거울나라는 뭐냐고? 거울나라의 앨리스. 이상한나라 다음편이라 생각해. 그리고 모모 읽어. 그건 읽었어? 어떻게 그건 읽었데. 맞다 삼순이. 그럼 모모말고 끝없는 이야기. 같은 작가꺼야. 꼭 읽어봐라. 재미있으니까. 동물농장은? 물어본 내가 바보지. 그것도 읽어. 그게 끝나면 나랑 같이 쥘 베른이랑 제인 오스틴 시작하자. 다시 읽어보고 싶어.

그러다 찾았다.
구석에 박혀 주인에게 존재를 잊혀가다가 이렇게 책을 들어내다 보면 우연을 가장하여 보물처럼 튀어나오는 책을.   

 <나를 있게 한 모든 것들> 베티 스미스 

어릴 땐 난 늘 조우가 되고싶었다. 그리고 앤이 되고 싶었다. 도로시와 캔디도 좋아했지만 그녀들은 단지 좋아할 뿐이었다.
상상력이 풍부한 글쟁이 거기에 로오리와 길버트라는 멋진 남자친구도 있었던
(비록 한쪽은 제부, 한쪽은 남편으로 각각 결과가 달랐지만)
활달하고 거침 없으며 자신만만한, 무엇보다 자신의 꿈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던 그녀들처럼 되고 싶었다.
식구들과 친구들이 나를 코딜리어라고 불러줬으면 했고, 에이미가 불태운 원고가 내 것인양 안타까웠다.
만년필 촉에 잉크를 뭍혀 촛불에 의지해 글을 쓰던 조우처럼,
널따란 창문턱에 앉아 바람을 맞으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앤처럼 되고싶었다. 정말 그렇게 되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초를 켜면 불장난 한다고 야단을 맞았고, 오래된 한옥집엔 창문이 없었다.(게다가 1층집이다)
글쓰기에도 재주가 없었는데 끈기도 없어서 해마다 챙기는 일기장은 안네처럼 이름만 지어주기를 반복했다. 
키티옆엔 새로운 키티, 다음해엔 새로운 키티가 생겼다. (몇명의 키티는 살아남아 책장에 숨어 나와 술래잡기중이다)

몇년 전 구입한 <내 인생을 바꾼 한 권의 책>
첫번째로 나오는 작가 재클린 미처드는 지인에게 선물받은 책을 보고 눈물이 샘솟았다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바로 <나를 있게 한 모든 것들>의 초판본. 자신도 조우처럼 되고 싶었다던 재클린은 <나를 있게 한 모든 것들>의 프랜시가 자신과 더 닮았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작가도 제목도 처음 듣는다. 내 인생을 바꾼 한권의 책인데 거기야 이유야 어찌됐든 제일 처음에 등장하는 책이다. 바로 구입을 결정했고, <내 인생을 바꾼 한 권의 책>이 도착하고 이틀이 지나 도착했다. 그리고 <내 인생을 바꾼 한권의 책>을 다 읽기도 전에 순식간에, 아주 쉽게 두 번을 읽어 버렸다. 킬킬거리다가, 울다가, 벤의 고백에 가슴이 두근거리다가...맙소사. 난 재클린에게 감사했다. 아니 그 전에 <내 인생을 바꾼 한 권의 책>에 감사했다. 득템의 탄성을 질렀고,  <나를 있게 한 모든 것들>을 있게한 모든 것들에 감사했다. 프랜시 놀란. 바로 그 프랜시 놀란이었던 작가 베티 스미스에게도....

읽는 내내 이제라도 발견하여 읽은게 다행이라는 생각과 좀 더 어릴때 읽었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랬다면 난 조우나 앤보다 프랜시 놀란처럼 되길 바랬을 것이다. 틀림 없다. 프랜시 놀란처럼 얼음조각을 담아 사탕 접시를 가지고 창문을 기어 나가 비상구에 앉아 하늘나무를 가림막 삼아 그늘에서 책을 읽기를 바랬을 것이다.
나는 프랜시 놀란이었고, 프랜시 놀란은 나였다. 그리고 그건 프랜시의 일기장에 이르러서 더 확실해 졌다. 
웃음이 나왔다. 뭐야 프랜시는 재클린보다 나를 더 닮은거 아냐? 

프랜시는 열세번 째로 맞는 생일날에 일기 첫머리를 다음같이 장식했다. 

"12월 15일. 오늘 나는 열세 살이 되었다. 열세 살이 되면 어떤 일이 생길지 궁금하다."
....... 중략. (해가 넘어 다음 10월)
"10월 25일. 일기를 쓰는 게 점차 지겹게 느껴진다. 그래서 일기장을 거의 다 썼다는 게 굉장히 기쁘다. 중요한 일은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제 딱 한 페이지가  남았다. 프랜시는 마지막 장을 펼쳤다. 그래. 이제 이 장만 채우면 더이상 일기를 쓰는 일로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아도 되겠지. 프랜시는 연필 끝에 침을 적셨다.
 p. 190

다행이다. 우리의 프랜시는 성장 소설의 주인공이 갖춰야 할 똑똑한 재능많은 아이지만 꾸준한 일기쓰기는 하지 않는다. 귀찮아 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나와는 다르게 한 권을 다 써내는 끈기는 보여준다. 그럴수 밖에 없다. 프랜시는 주인공이니까. 

 
프랜시는 출퇴근하는 뉴옥 사람들의 초를 다투는 리듬에 적응하게 되었다. 출근하는 일이 신경을 혹사하는 전쟁처럼 되었다. 9시 1분전에 도착하면 자유로운 사람이 될 수 있었고, 1분 후에 도착하면 사장이 혹시 그날 심기가 불편할 경우 속죄양이 되어야 했다. .......(중략)

한번은 집에서 10분 일찍 나와보았다. 서두를 필요가 없는데도 기차 문 앞에 미리 가서서 있었고, 계단을 뛰어 내려 갔고, 거리를 가로질러 갔고, 가득 찬 엘리베이터에 쑤시고 탔다. 그래서 15분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커다란 사무실은 텅 비어 있었고, 프랜시는 외롭고 쓸쓸했다. 다른 사람들이 9시 몇 초 전에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자기 혼자만 배신자처럼 느껴졌다. 다음날 아침 프랜시는 10분을 더 자고 원래 시간으로 돌아갔다.  
 p. 261

 난 아침 잠이 너무 많다. 일한지는 오래지만 후배가 많지 않아 아직도 막내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데, 위 아래 구분이 확실한 곳이어서 후배는 좀 더 일찍오고, 늦게 가는 것이 암암리에 지켜지는 규칙. 아침 잠을 버리고 새벽에 남들 보다 먼저 도착하지만 느끼는 자유로움은 별 다른 것도 없었고, 좀 더 빨리와서 일이 더 쉬워지는 것도 아니었다. 근무 시작 전 커피 마시는 시간이 좀 더 늘었을 뿐이었다. 눈에 띄지 않게 출근 시간을 늦췄고, 지금은 다른 선배님들과 같은 시간에 출근하지만 아무도 나에게 뭐라 하지 않는다. 진작 그럴것을 이렇게 되기까지 근무지가 바뀌고 딱 일년이 걸렸다. 난 지금 일년 전 보다 30분을 더 잔다.  

재클린 미처드는 조우 마치가 되고 싶었는데 결국 프랜스 놀란이 자기와 더 어울리다는 사실을 알았다. 난 조우 마치와 앤 셜리가 되고 싶었는데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은 없다. 프랜시 놀란이 좀 더 매력적이지만 10대에 읽었던 조우와 앤은 30대에 읽는 프랜시와 비교가 될 수 없다. 재클린 미처드는 <나를 있게 한 모든 것들>을 열한번 읽었다고 한다. 난 이제 2번을 읽었고, 곧 있으면 3번째가 될 것이다. 성장소설이며 가족소설이다. 딱딱하지 않고, 주저리 주저리 설교를 늘어놓지도 않는데 가슴은 온갖 감정으로 풍부하다.

내 어릴 적 나와 함께 했던 책 <작은아씨들> <빨강머리 앤> 그리고 현재의 <나를 있게 한 모든 것들>

나도 누군가의 어떤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나도 누군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안녕. 프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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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1-03-25 0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검색 들어갑니다. 내 인생을 바꾼 한권의 책. 그리고 나를 있게한 모든것들은 장바구니에 넣고요. 슝~

버벌 2011-03-26 00:47   좋아요 0 | URL
ㅎㅎㅎ 나늘 있게 한 모든 것들은 꼭 보시라고 하고 싶어요. <작은아씨들>과 <빨강머리앤>을 좋아하신다면 더더욱. <내 인생을 바군 한권의 책>은 재미로 읽기는 쉽지 않습니다. 다행히 재클린의 글은 제일 첫장에 나와있어서 쉽게 권유 받은 책을 구입했지만 그 뒤로는.... ㅡㅡ;;; 좋은 정보가 담긴 책이라 생각하세요. ㅎㅎㅎ

도서출판 더숲 2011-11-03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D 도서출판 더숲입니다. 저희가 이번에 <종이책 읽기를 권함> 이라는 책을 출간했어요. 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ejkGb=KOR&mallGb=KOR&barcode=9788994418315&orderClick=LAG 관심 있게 한 번 살펴봐주세요. ^*^ 혹시 불편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쉬는 날이었다. 
어제가 쉬는 날이었다.
빡빡해진 근무에 쉬는 날은 거의 야근이 끼어있어 근 2~3주를 제대로 쉬질 못 했다.
다시 말해 하루종일 풀로 약속 없이 오롯이 집에 있는 날이 어제였다는 말이다.

일어나니 8시.
모처럼 오롯이 쉬는 날이라면서 오롯이 쉬지 않은 날보다 더 빨리 일어나는 참사가 일어나버렸다.
일단 깼는데 다시 자기엔 하루가 아깝고, 지인들에게 전화를 걸어 약속을 잡는다 해도 씻고 화장하며 약속을 기다리는 동안 아깝게 시간이 가버릴 것 같다. 그래서 집에 콕 박혀 차곡차곡 쌓인 초콜릿 단지를 껴 안고 하루를 지내기로 했다. 이것도 나름 계획이라면 계획인데 오롯이 쉬지 않는 날도 이와 별다른 차이가 없는 참으로 이상한 계획이다.

  
 <미지와의 조우> 1977년 스티븐 스필버그 작품.

내가 태어나기 전에 나온 영화이다. <미지와의 조우>는 굳이 영화의 제목이란걸 모른다 치더라도 귀에 익은 단어다.
그냥 귀에만 익은 단어다.
그랬으니 영화들 사이에서 제목만 보고 리뷰는 읽지 않은 채 (심지어 어떤 영화인지 검색도 안했다) 다운 받았겠지. 영화를 보고 난 뒤 검색을 하니 꽤나 유명한 영화인데 난 당연하게도(?) 영화에 대해 무지.

이 영화 이후의 <ET>만 기억을 한다. 부모님이랑 보러 갔고, 자리가 없어 가족이 따로따로 떨어져서 봐야했는데 한 줄에 한명씩 빈자리에 삼 남매가 떨어져 않았었다. 부모님은 뒤에 서서 당신 어린자식들이 자리에 잘 앉아 있나 살피느라 영화는 뒷전이었던 것도 기억한다. 영화를 보고 난 뒤 어린이들에게만 나눠준 <ET>지우개를 몇 년간 소중히 간직하다 단 한번 지우개질로 머리가 끊어져버린 허무한 기억도.

영화는 생각보다 촌스럽지 않아 좋았고,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어서 좋았고, <미지와의 조우>란 제목에 더 좋았다.

제일 좋았던 것은 외계인에 대한 스필버그식 접근.
영화에서 제일 큰 공포는 외계 생물체에 대한 것이 아니다.
가족간의 그리고 사회간의 소통 부재. 그리고 붕괴. 그것이 제일 큰 공포이다.
지금까지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를 많이 봐왔지만 왜 이제야 <미지와의 조우>를 보게 된건지.
그가 만든 어떤 영화보다도 완성도가 높은데 난 이 영화에 대한 정보 자체도 없었다.
단지 <미지와의 조우>란 너무나 호감스러운 단어들의 조합에 궁금증만 있었을 뿐.

내용이나 배경을 떠나서 보고 난 뒤 <미지와의 조우>와 비슷한 여운을 주는 SF영화 들이 있는데

 <맨프럼어스> 와 <케이 펙스> 

<맨프럼어스>는 제한 된 공간에서 이루어진 대화식 영화인데 남동생의 추천이 아니었다면 영화 존재 자체도 모를뻔했다.
처음 영화의 내용을 남동생에겐 들었을 땐 미먀베 미유키의 <괴이>에서 본 단편 <바지락 무덤>이 떠올랐다.
영화는 <바지락 무덤>이 주는 섬뜩함은 없었지만 나름은 잔잔한 충격은 준다.

<케이펙스>는 순전히 케빈 스페이시 때문에 본 영화.
케빈 스페이시 영화 치고 좋지 않은 영화가 없다.
내가 그의 팬이라는 고정된 시각이 있기는 하지만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어느정도 동조를 할지도. 아닌가?
케이팩스에서 프롯 (케빈스페이시)이 말한다.

이 번에 당신이 어떤 실수를 한다면, 당신은 계속해서 그 실수 속에서 살아갈 거에요.
당신이 저지른 모든 잘못의 연속선상에서 당신은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잘못을 계속해서 영원히 반복하게 됩니다.
그래서 충고를 한다면, 이번에 그 실수를 바로 잡으라고 당신에게 말하고 싶어요.
왜냐하면 바로 지금 이 순간이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이니까요. 

영화 내용도 훌륭하지만 케빈 스페이스란 걸쭉한 배우가 출연을 해서 더 마음이 뜨거워졌던 영화.

책장을 뒤져 "새벽 3시" 를 찾았다. 마저 볼 생각을 했으니 찾아야 하는데 어디다 둔 지를 모르겠다. 
들쑥 날쑥한 책들을 꺼내고, 제자리에 다시 끼워넣고, 그리고 찾았다.
율리시스와 모던 타임즈 옆에서

너 뭐하고 있니?
너는 도대체 거기서 뭐하고 있니?
놀려면 저기 미들 마치나 냉정과 열정사이에 있을 것이지 빅마마들 옆에서 티도 안나게. 너 일부러 그런거니?

<미지와의 조우>로 시작된 훈훈한 마음에 "새벽 3시"와 초콜릿으로 달달해짐이 더 해진다. 
이런 마음이라면 나중에 나이 먹어 초콜릿 단지를 옆에 낀 뚱뚱하고 다소 신경질적인 할머니가 되어도 괜찮지..... 않겠지. 
기회가 되면 케빈 스페이시 출연 영화에 대해 페이퍼를 써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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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20 10: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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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21 00: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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