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는 게 뭐라고 - 시크한 독거 작가의 죽음 철학
사노 요코 지음, 이지수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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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함께 기타카루이자와에 놀러 간 적도 있다. 숲 속의 별장지 '다이가쿠무라(1927년 호세대학의 학장 마쓰무로 이타스가 자신이 소유한 토지를 학자나 문화인 등에게 분양하여 개발한 별장지)'는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 "여기서 살아보면 어때?" 요코 씨가 우리에게 말했다. "파격적으로 싼 땅이 나와 있는데."

나루짱은 마음이 동요되는 듯했다. (...) 하지만 파격적으로 쌌던 까닭은 엄마와 아들이 동반 자살한 땅이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시라이시 가요코('광기의 여배우'로 불렸던 가부키 배우)에 아들은 누쿠미즈 요이치(예능 프로그램에서 머리숱이 적어 놀림당하는 캐릭터를 가진 배우) 같았다는 말을 듣고, K가 심사숙고 끝에 땅을 포기했던 건 유감이었다.

 

 

원래 땅값이 싼 곳은 대부분 이런 사연이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IMF 때 그런 집이 많았다고 한다. 최근 부동산을 하고 있는 친구에게 이런 말을 들었는데, 심지어 글에서도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니 묘한 기분이다.

 

그 유명한 사노 요코의 작품이다. 그러나 아쉬운 점 두 가지만 밝히겠다. 아무래도 이름난 사람의 작품이라 아무도 까지 못할 테니 또 아무리 (심지어 작가 본인에게까지) 비난당해도 멘탈이 탄탄한 내가 이 책을 까고 욕먹는 거 감수해야지 어쩌겠냐.

첫째, 전교조를 깐다. 예를 들면 전교조 놈들은 사흘이라는 낱말도 모른다 그런 식이다. 일단 그들이 한자를 보통 사람들보다 더 모른다는 근거도 없지만, 한자를 모른다 하여 사는 데 지장이 없는 건 아니다. 선생님이라도 그렇다. 당장 아이들이 쓰지 않는 낱말을 언제까지 끼고 살아봐야 실용성만 없다. 요새 언론을 보면 쓸데없는 한자보단 되려 선생들에게 필요한 건 성인지라는 생각이 든다.

둘째, 의사가 철저히 페미니즘적인 인식에 대해선 사노 요코의 지식을 무시한다. 아이는 낳지 못한다면서(난 안 낳는 것이라 생각한다. 돈만 쓴다면 요새는 남자가 애를 낳는 것도 가능하다.) 집요하게 여성이 애를 키우는 건 천성이라 주장한다. 사노 요코는 살 대로 다 살아서 아쉬울 것도 없고, 게다가 의사하고 친하다 보니 그의 강한 주장에 잠자코 눌리는 기색이다. 환자에 대한 의사의 무지막지한 권력을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이었다. 혹 애를 키우는 건 여성의 천성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은 어째서 본성을 이기고 애를 버리거나 죽이는 여성들이 많은지 쓸데없이 골머리를 썩일 이유가 없다. 애를 키우는 건 남자의 천성이 아니듯 여성의 천성도 아니기 때문이다. 여성들의 정신력이 단지 남성의 그것보다 더 강할 뿐이다.

셋째, 죽음과 죽어감이란 책을 들먹이면서 자신은 그 단계 중 아무 것에도 속하지 않는다 하는데, 그 책을 제대로 보셨는지 모르겠다. 그 책의 저자는 병원에 입원한 환자와 이야기하고 있을 뿐, 사노 요코가 말하듯이 집에서 편히 죽는 환자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이것도 편하게 죽을 집과 펑펑 쓸 돈이 있으니 부리는 허세가 아닌가 싶다. 심지어 의사가 말하는 무사도는 졸렬하고 유치하기 이를 데 없다.

 

나는 두 번이나 이혼했기 때문에, 내가 타인을 끝까지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런데 평생 사랑할 수 있었던 사람이 2주쯤 전에 나타났다. 그는 죽은 사람이었다. 죽은 지 10년 정도 지났다. 어떻게 나타났느냐 하면, 20센티미터 정도 되는 갈색 나무 상자에 담겨 조그만 사람의 형상으로 스르륵 나와서는 그 뒤로 언제든 어디서든 스르륵 스르륵 나타나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살아있는 동안 나는 알지 못했다.

처음 보았을 때 그는 나보다 두 살 적은, 아버지 친구 아들이었고 보들보들한 아랫도리를 내놓은 채 기어 다니고 있었다. 그때부터 우리는 줄곧 친구였다. 그가 쉰다섯 살에 샌프란시스코에서 골프를 치다가 쓰러질 때까지, 가장 오랜 친구였다.

 

 

 

ㄷㄷ 얀데레?!

머리가 좋고 재능이 있으며 풍채도 근사하다. 인격도 훌륭한 것 같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면 내가 몰래 짝사랑해도 괜찮지 않을까.

그랬더니 이스트우드의 DVD를 잔뜩 빌려준 사람이 나타났다.

하지만 외국인인걸.

남몰래 사모하려 해도 외국인인걸.  

 

 

그래도 2D를 좋아하는 것보단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나는 종일 소파에 드러누워 텔레비전이나 비디오를 볼 때 행복하다. 그러는 게 너무나도 좋아서, 아무도 없는 집에서 파트너 같은 드라마를 한창 보던 중 문득 그 행복을 느끼면 깔깔 웃음이 터질 정도다. 아아, 이러니 혼자 사는 걸 도무지 포기할 수 없다. 

 

 

ㅠㅠ 나도 이 맛에 혼자 사는 걸 좋아하는데 한 번도 혼자 살아본 적이 없네 불행하다!

꽤 오래 전에 들은 이야기다. 암에 걸려 격심한 통증에 시달리는 한 아저씨가 아플 때마다 여자의 무대라는 노래를 틀어달라고 했고, 그랬더니 3분 정도는 아픔을 잊었다고 한다.

모차르트를 들으며 아픔을 잊는 사람도 있겠지.

나니와부시를 듣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나는 마지막 순간에 줄리의 오늘 밤 결정할 거야를 듣고 싶다.  

 

 

줄리란 사와다 켄지를 얘기한다. 지금은 할아버지가 되셨지만 검색해보면 일본에서는 찾기 힘든 미남 중 미남이다; 비교해보면 세월의 풍파를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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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꿀 권리 - 모네 샤갈 세갈 바로키에 칠리다 코르티 마르쿠시스 플로콩을 통해 펼쳐나가는 몽상의 미술론, 개정판
가스통 바슐라르 지음, 이가림 옮김 / 열화당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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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바다 앞에서 술병을 들고 있는 나는 어제 했던 이야기를 지금 또 하지는 않는다. 진정한 명상은 변덕스런 것이며 변덕 그 자체이기도 하다. 더구나 궁극적으로 명상의 우발성을 최대한으로 북돋우는 것은 다름 아닌 가장 강력한 작품인 것이다. 가장 개성적인 작품은 개성적인 해석을 자아낸다.

 

 

페친하고 전에 얘기했는데, 나는 지젝이 사회학자라 생각하지 철학자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철학자의 글을 많이 읽어보진 않았지만, 유명한 분들의 글들은 몇 개 훑어보았다. 그들의 글은 에세이같으면서도 소설 같고 시 같고 결국 모든 장르를 합친 듯한 그런 웅장함이 있다.

 

명화와 그에 대한 설명이 쭉 이어지니 핸드폰을 앞에 두고 그림을 검색해가며 보시길 바란다. 책 자체가 전반적으로 표현력 맛집이라 할 만큼 맛깔난 설명이 펼쳐지는데, 첫 구절부터 굉장히 느낌이 좋다. 다양한 사람들의 책을 읽다보니, 이 사람이 필살기에 해당하는 문장을 첫 구절에 넣는 걸 좋아하는지, 혹은 마지막 구절에 넣는 걸 좋아하는지 보일 때가 있다. 아무래도 가스통 바슐라르는 첫 구절에 넣는 걸 좋아하는 듯하다.

처녀라던가 젖가슴 같은 얘기가 나와서 아.. 이 인간도 결국 철학자들 사이에서 흔하다는 그 꼰대 한남같은 타입인가... 싶었는데 의외로 이 글 이후에는 그런 표현이 적다. 그렇지만 여성적이다라던가 그런 비슷한 글귀가 있으니 읽으실 때 이런 데 민감하신 분은 빡침주의 바란다. (그러나 그런 구절은 매우 적다.) 그래도 아까 얘기했듯이 첫 글귀가 워낙 인상적이라 안 읽고 지나갈 수는 없다 쩝.

 

책에 굳이 단점이 있다면 내용이 아니라 책 자체를 꼽을 수 있겠다. 디자인은 좋은데, 표지의 푸른색이 번져서 손은 물론이고 온 사방에 물든다. 내가 이 책이 출간되자마자 사서 그런 건지 어떤 건지 모르겠으나 아무튼 책을 집어들 때 조심해야 한다. 또한 가급적이면 읽은 부위를 표시할 땐 따로 책갈피를 구매해서 끼우는 걸 추천한다. 책날개를 사용하면 안 된단 소리다.

 

이 책에 소개된 화가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분은 칠리다였다. 조각품으로서 다루기에 가장 단단한 대상을 찾다가 결국 철제까지 도달하셨다는데, 궁금해서 검색해보니 설치하면서 참 힘드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호불호가 좀 많이 갈릴 듯한데, 되려 그래서 나에겐 더 매력적으로 보였다.

 

생기 넘치는 눈을 지닌 모르드개가 머뭇거리는 여자에게 이렇게 간청한다. "가서 왕권을 받아라. 그러면 너는 너의 백성을 구하게 되리라." 에스더는 머뭇거리면서 아주 창백하게 질려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다. 마침내 그녀는 여성적 영웅주의로 지고한 행위를 실천해 나간다. 그녀는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길을 기어 올라가는 것같이, 왕좌로의 계단을 올라간다. 이러한 드라마를 바탕으로 하여 라신은 한 편의 비극을 썼다. 샤갈은 같은 비극을 석 장의 그림으로 응축시켰다.

 

 

가스통 바슐라르가 말년에 종교에 귀화했다더니 사실인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이런 글에서 살짝 티가 나긴 하는 것 같다. 이래서 서양 책을 접하기 전에 성경을 접하는 게 필요한 것이다. 성당이나 교회를 다니면 더 좋고.

기타의 노래 소리는 옛날의 혼의 메아리이며, 옛 사랑의 조금은 즐거운 애가이다. 이 울려퍼지는 몽상에 마음이 이끌린 남자는 연약한 팽이처럼 외다리로 서서 몸을 돌리면서, 낮은 목소리로 노래하기 시작한다.

큰 몸집의 줄무늬가 그어져 있는 그리자이유 아래쪽의 흑과 백의 충돌은 내게는 너무 격렬하게 보여, 순간적인 원무를 이끄는 동작보다도 더 큰 운동처럼 보일 정도다. 그들은 일곱 명의 무용수에 지나지 않지만, 그들이 있는 한구석에는 북적거리는 결혼식의 연회가 한창이어서 신세대의 기쁨이 열광의 때를 맞은 것처럼 보인다.

 

 

책 두께는 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만치 않다. 플로콩의 판화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중편소설 수준으로 길다. 읽으려면 어느 정도 체력을 갖추어야 한다. 사실 거의 모든 철학책들이 그렇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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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Rin-Ne Season 2 (윤회의 라그랑제)(지역코드1)(한글무자막)(DVD)
Section 23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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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모카와가 실제로 있다 하는데, 교토의 여행하기 아주 괜찮은 곳이라 한다. 내용은 로봇 전투물이지만 주인공이 가모카와를 아주 아끼기 때문에, 친절하게 가모카와의 주민들과 이곳저곳을 소개시켜준다. 주인공은 혼자서 저지부로 활약하고 있었는데, 멀리 우주에서 온 란이란 외계인이 저지부에 합류하는 대신 로봇을 타 달라고 한다. 외계인조차 다루기 어려운 로봇을 주인공은 쉽게 조종하는 모습을 보인다. 한편, 지구를 침공하려던 외계인들은 주인공이 자신들 동경의 대상이었던 유리카노와 닮은 걸 보고 지구 침략에 대해 새삼 갈등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결의를 굳히게 되고, 웍스란 로봇을 이용해 지구를 지키던 군은 주인공이 너무나 로봇을 잘 다루자 되려 주인공의 폭주를 우려하게 되는데..

뭔 서비스가 1화부터 이리 겁나 많음 이거 로봇물 아니었나요;; 아무튼 사람을 구해준 건 아니지만 학창 시절 교복 밑에 수영복 입고 학교 끝나면 바로 교복 벗고 수영하며 놀다가 끝나면 수건으로 닦고 교복 다시 입은 뒤 디스코 팡팡 탔던 생각난다. 당시는 어차피 몸매가 퉁퉁인데 누가 신경쓰냐 생각하고 있었는데 학교 선생님한테 들통나서 다음날 늘씬하게 후들겨 맞았음. 젖은 교복차림으로 어딜 싸돌아다니냐며. 생각해보면 저것이야말로 바닷가 근처 사는 학생들의 특권이지. 근데 아무리 동성이라고 해도 그렇지 몽둥이로 가슴 건드리는 거 성추행입니다 선생님 ㅡㅡ 여고 때 학생들 스타킹 신기고 쓰다듬던 재수없는 여선생 생각나네.

P.S 얘네는 근데 심포기어도 그렇고 자꾸 2만 년 전에 고도로 발달한 문명이 있었다고 주장하네. 일본에서 유행하는 도시전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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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전적으로 권력에 관한 메리 비어드 선집 2
메리 비어드 지음, 오수원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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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로마 초기 역사에 나오는 유명한 이야기를 보면, 덕성 높은 루크레티아는 당시 왕가의 잔혹한 왕자에게 강간을 당한 다음 발언 기회를 얻는다. 그러나 이 발언 기회는 강간을 저지른 자를 비난한 다음 자살하겠다는 선언을 위해 주어진 것이었다(최소한 로마 시대 저자들은 그렇게 기술했다.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쓰디쓴 발언 기회조차 박탈이 가능했다.

 

 

이 성폭력 사건이 고결한 여성의 상징이라는 이유로 그림 소재로 굉장히 많이 쓰였었다. 물론 실제로는 더 비참했다. 리비우스 로마사에 나오는 내용인데, 계속 반항하면 루크레티아와 남성 노예를 함께 살해한 뒤 간통했다는 누명을 씌우겠다고 가해자가 협박했을 정도니 말이다.

 

이 책에서 나오는 말에 굉장히 공감하는 바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큰 목소리로 잘 운다고 가족들에게 면박을 받았다. 내 우는 소리가 듣기 싫어 남자 친척이 했던 행위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는 다른 친척과 내 남동생이 있는 앞에서 나를 왕따시키고, 내가 피아노를 치고 있음 고질라가 피아노를 친다고 놀렸다. 내 울음소리를 고질라의 포효에 비유한 것이다. 나중에 크고 나서 여러 여성들의 말을 듣고, 나 같은 일을 겪은 여성들이 한둘이 아닌 점에 깜짝 놀랐다. 그러나 남자아이가 크게 울면? 허허 장군감이네~

 

특히 서브컬쳐는 여성의 발언에 대한 무시가 심한 동네다. 일단 그 집단에 있는 모두들 내가 여성이라는 걸 알면 내가 가진 정보는 맞든 틀리든 일단 의심을 받는다. 분명 썸녀 혹은 심하게 얘기하자면 섹스프렌드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혹은 부녀자란 이미지가 딱 여성한테 좋다고 할까? 아무튼 조금만 작품에 대한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려 하면, 여왕벌 취급을 받기 십상이다. 실제로 들어본 말이다. 서브컬쳐계의 여성들은 대부분 여성으로서 남성들의 관심을 받는 걸 원하는 게 아니라, 진정으로 작품에 대한 감흥을 나눌 수 있는 친구를 원할 것이다. 특히 자신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줄 줄 아는 사람을 말이다.

 

Black lives matter이란 단어를 여성이 만들었다는 사실도 신선했다. 저자도 책을 쓰면서도 지금 이 단어가 다시 사회 전면에 등장할 줄 알고 있었을까? 궁금한 사람들은 꼭 책을 구매해서 보시길 바란다. 얇아서 금방 읽는 게 가능하다. 물론 그 단어를 만든 용감한 세 여성의 모습도 컬러 사진으로 실려 있다.

 

발언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마다않고, 염색 안 한 긴 백발을 풀어헤친 채 자유분방한 히피 스타일의 옷차림으로 등장하는 이 인상 좋은 할머니(요즘처럼 '예순은 청춘이다'를 외치는 시대에 예순세 살의 여성을 할머니라고 불러도 된다면)는, "TV에 등장하는 여성에게 어울리지 않는 외모와 차림새를 하고 있다"는 어느 남성 언론인의 독설에는 "여성이 발언할 때 그 내용이나 외모나 보는 이에게는 별로 할 말이 없다"며 가볍게 대꾸하고, "맨날 똑같은 옷만 입고 나온다"는 조롱에는 "뭐, 난 아침에 일어나 '새로운 날이 밝았네! 오늘을 무슨 옷을 입을까!'라고 말하는 부류가 아니니 어쩔 수 없지"라며 가뿐히 응수한다.

 

 

저자가 페미니스트는 아니라고 하지만 이 발언은 좀 시원하다. 여자는 꾸며야 한다고 10분 전에 출근하라는 회사들에게 이런 말 좀 했으면 좋겠다고 전부터 생각했는데.

 

펀치에 실렸던 한 만화는 여성의 발언을 듣고도 못 듣는 척하는 무심함을 탁월하게 풍자해냈다. '그것 참 좋은 제안이군요, 트릭스 양. 분명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 누군가도 같은 주장을 하고 싶겠죠.'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군대에 관한 얘기를 볼 수 있다. 여성이 군대에 관한 인상 이상의 얘기만 꺼내도 '다녀오셨어요?'라는 말을 듣는다. 군대 가서 남자처럼 구르지 않았으면 입 닥치란 얘기다. 그러나 이젠 누구든지 알겠지만, 직업 군인을 선택한 여성들조차 업신여김을 받는 경우가 다수이다. 비혼을 선택하는 여성들도 군대를 가라며 강요하는 남성들의 대부분은 그저 성노리개를 원할 뿐인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고 있다. 그들에게 여자 화장실 등 지극히 기본적인 의식주를 요구하는 여성들의 발언은 그저 건방질 뿐 아닐까.

이러면서 여성들이 당하는 강간에 관한 불안감은 아는 척 하는 한남 ㅅㄲ들 진짜 자르고 싶음.(응?)

인터넷상에서 나를 생식기에 빗댄 불쾌한 언사들(비어드의 얼굴에 여성 성기 사진을 겹쳐놓은 합성 이미지들이 인터넷에 떠돈 사건)이 의견이랍시고 한바탕 펼쳐진 것을 본 후, 나는 '입을 쳐 맞은 느낌이라는 트위터 답변을 날렸다. 그러자 영국 주류 잡지의 한 평자는 이를 두고 다음과 같이 비아냥거렸다. '여성혐오는 실로 "입을 쳐 맞은 느낌"을 준다고 메리 비어드가 징징거렸다'라고 말이다.(지금까지 구글 검색을 통해 대강 훑어본 바로는 '징징거린다'는 조롱을 여성들만큼 듣는 영국 내 유일한 집단은 프리미어리그에서 연패에 시달리는 인기 없는 축구팀 감독들뿐이다.)

 

 

안타깝다 영국에도 소추라거나 고추절단기같은 단어가 있었으면 대항할 수 있었을 텐데 ㅠㅠ

2017년 초 타임스의 1면 기사 제목은 이런 통념을 기막히게 포착해냈다. 여성들이 머지않아 런던 경찰청장과 BBC 이사장과 런던 주교 자리를 얻을 가능성을 보도하는 기사 상단에는 '여성들, 교회와 경찰과 BBC의 권력을 낚아챌 채비'라고 쓰여 있었다.(이러한 예측이 현실이 된 유일한 사례는 크레시다 딕이 런던 경찰청장으로 취임한 것이다.) 

 

 

난 진짜 꼰대남들 개이상한게 아니 지네들이 학창시절(한국은 군대시절) 존내 공부 안 한 걸 가지고 왜 여성들이 취업자릴 뺏는다 생각하는지? 여성은 취업할 엄두도 못 내는 자리 아직도 많아 거기라도 가던가 ㅋㅋ 그나마도 열심히 일 안 하고 회사 내 여자들 욕하고 있음 그 여자들에게 자리 뺏긴?다? (아 그리고 이건 여담인데 만일 저기서 나오는 교회가 성공회라면 이미 여성 런던 주교 탄생.)

그저 15세기의 환경으로 연극을 옮겨놓기만 해도 리시스트라타는 전혀 다른 풍경을 드러낸다. 첫째, 아테네의 관습에 따르면 원래 이 극을 공연하는 배우나 관람하는 관객 모두 남성이었기 때문에, 극에 등장하는 여성은 분명 남자 배우가 무언극의 여주인공처럼 몸짓으로 연기했을 것이다. 둘째, 연극의 대단원에 이르면 여성이 권력을 행사한다는 판타지는 가차 없이 짓밟힌다. 이 또한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사실이다. 마지막 장에 나타나는 평화란 나체의 여자(혹은 나체의 여자로 변장한 남자)를 무대로 끌어내는 것이다. 

 

 

이것도 일본의 서브컬쳐들이 아직 진화하지 못했다는 반증이라 생각한다.

1. 여성 성우가 여성 캐릭터를 연기하긴 하지만, 아직 연약한 남성 아역 캐릭터도 같이 연기하곤 한다. 남자 성우를 쓰는 경우가 가끔 있지만 드물다고 본다. 전적으로 여성을 연약하게 본다는 증거가 아닌가 싶음.

2. 무사 쥬베이나 3X3 아이즈를 보면 알겠지만 여성은 요괴라는 비정상적 형태로 세계를 다스릴 권한을 잠깐이나마 잡는다. 그러나 그것도 금방 남성 주인공의 무력에 의해 무너진다.

3. 항상 애니메이션 마지막에 벌거벗은 채 등장하는 여자와 이를 받아주는 벌거숭이 남자(...) 둘 다 벗었다고 남녀평등이냐?

트위터상의 폭풍 같은 비하와 욕설은 다른 모든 혐오 발언과 대동소이한 경향을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새로운 관점이 가끔씩 등장하며, 최소한 비교해볼 만한 흥미로운 사례들이 없지는 않다. 나는 2017년 여름 영국의 총선 당시와 그 직후에 이루어진 두 건의 처참한 라디오 인터뷰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이 인터뷰의 주인공은 노동당 의원인 다이앤 애벗과 보수 정당인 토리당의 보리스 존슨이었다. (...) 정작 나를 경악하게 만든 것은 이 얼간이 같은 두 인터뷰를 대하는 온라인 및 다른 논의 공간의 반응이 극명하게 엇갈렸다는 사실이다. (...) 이러한 폭언들을 그나마 점잖은 언어로 정리해보자면, 애벗은 '자기 직무를 감당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존슨 또한 수많은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방식은 애벗에 대한 비판과 딴판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유독 비판을 많이 받는 심상찮은 여성 의원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여자라고 해서 만만하게 보는 의식이 무의식중에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대놓고 여성이라고 년이란 단어부터 꺼내는 인간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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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받으소서 - 프란치스코 교황 회칙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옮김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CBCK)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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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주님, 찬미받으소서.

누이인 달과 별들로 찬미받으소서.

주님께서는 하늘에 달과 별들을

맑고 사랑스럽고 아름답게 지으셨나이다.

 

저의 주님, 찬미받으소서.

형제인 바람과 공기로,

흐리거나 맑은 온갖 날씨로 찬미받으소서.

주님께서는 이들을 통하여 피조물들을 길러 주시나이다.

 

저의 주님, 찬미받으소서.

누이인 물로 찬미받으소서.

물은 유용하고 겸손하며 귀하고 순결하나이다.

 

저의 주님, 찬미받으소서.

형제인 불로 찬미받으소서.

주님께서는 불로 밤을 밝혀 주시나이다.

불은 아름답고 쾌활하며 활발하고 강하나이다.

 

 

 

자기가 걷고 있고, 그 앞 반경 50m 앞마다 커피숍이 있었음 좋겠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난 생전 그런 야만스러운 소리를 처음 들어보았다. 지금 생각하면 '열심히 그 다음 시집을 내주세요. 읽고 싶어요.'라는 격려의 말에 '아뇨 시집 이제 안 낼 건데요?'라고 대뜸 대답했던 그 거만한 선생처럼, 그냥 악의적으로 다른 사람의 호의에 반발하고 싶은 인간의 욕구가 아니었나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피숍을 그렇게 좋아하는 그녀는 자신의 욕구 때문에 땅에 붙박여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들을 망가뜨리려 하는 것이다. 나는 그 이후로는 사람들과 같이 모여있을 때 빼고는 두번 다시 커피숍을 갈 수가 없었다. 그 결정에 후회가 없다.

다른 사람의 호의에 반발심이 생겨서, 욕구에 눈이 멀어 사람들은 자신을 망가뜨린다. 나는 공부가, 종교(특히 천주교)가 사람의 마음을 비뚤어지지 않게 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인간의 올바른 마음은 생태계를 지킬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도구이다.

 

내가 교황님께 궁금한게 있는데, 성적 차이에 잘 대처해야 한다면 독실한 천주교도인데 간성(없으리란 법은 없잖?)은 어떻게 보실지? 간성에 대처하는 법을 따로 만드실 건지, 아님 억지로 남성 혹은 여성이라고 혼자서 정해서 그 범주에 넣으실 건지, 아님 악마라고 간주하고 또 엑소시스트 찍으실 건지 심히 궁금하다.

몇 문장 안 되는 데도 여성 차별, 동성애 차별, 트랜스젠더 차별이 확연히 드러나 있는 문구이다. 하나님은 모두를 사랑하실 텐데... 환경 보호에 대해서나 쓰시지 왜 저런 사족을 넣는지 모르겠다. 아이에 대해서도 귀찮게 굴고 쓸모없는? 뭐 그런 말을 쓰시던데 사람들이 더 출산 안 하겠다 하면 어쩌시려고 ㅋㅋ

 

책도 그리 두껍지 않고 문장도 간결한데 이상스럽게도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아서 읽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난 처음부터 끝까지 묵독으로 읽었지만, 소리내어 읽거나 필사하며 천천히 의미를 음미하는 걸 추천한다.

 

프란치스코 성인께서는 통합 생태론이 수학과 생물학의 언어를 초월하는 범주에 대한 개방성을 요청하고 인간다움의 핵심으로 우리를 이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우리가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 때와 마찬가지로, 프란치스코 성인께서는 해와 달 또는 가장 작은 동물들을 바라볼 때마다 모든 피조물을 찬미하며 노래를 부르셨습니다.

 

 

따, 딱히 수학의 언어를 초월하는 게 있다고 해서 이 문장을 적은 게 아닐 겁니다... 아마도.

 

세계적 변화의 사회적 요인들 가운데에는 고용에 영향을 미치는 기술 혁신, 사회적 소외, 에너지와 그 밖의 공공 서비스의 불평등한 분배와 소비, 사회적 붕괴, 폭력 증가, 새로운 형태의 사회 폭력의 증가, 마약 매매, 젊은이들의 마약 사용 증가, 정체성 상실이 있습니다. (...) 현실에서 여러 가지 문제를 동반하는 다른 사람들과 맺는 관계가 이제는 인터넷을 통한 의사소통으로 대체되는 경향이 나타납니다. 이러한 의사소통은 관계를 자기 마음대로 선택하거나 끊어 버릴 수 있게 합니다. 그래서 사람과 자연이 맺는 관계보다는 컴퓨터와 그 화면을 통해서 맺는 관계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형태의 꾸며 낸 감정들이 종종 생겨납니다.

그런데 나는 꾸며 낸 감정이 왜 나쁜지 잘 모르겠다. 내가 내 감정에 솔직하던 시절 얼마나 공격을 당했는데; 또한 그 사람들이 알기 싫은 걸 알려준 것에 대해서 나도 반성하고 있기도 하고. 그리고 한때 오프라인 모임 엄청 다녀본 적 있는데, 어차피 몇몇 특정 사람들이 가면 쓰고 다니는 건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똑같더만. 난 동네에서 성격 나쁜 사람으로 찍히지 않으려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제대로 지적해주지도 않고 오프라인 사교장에서 호호거리며 억지로 감정을 꾸며내는 사람이 훨씬 가식적이라 생각함.

아름다움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우리가 공리적인 실용주의에서 벗어나도록 해 줍니다. 아름다운 것을 경탄하며 음미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우리에게 모든 것이 멋대로 사용하고 착취할 대상으로 변질되어 버린다는 사실은 놀랍지 않습니다. (...) 우리가 인간, 생명, 사회,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관한 새로운 틀을 촉진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교육은 아무런 효과가 없고 교육적 노력도 열매를 거두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한 노력이 없다면 소비를 지향하는 틀이 대중 매체를 통해 전달되고 강력한 시장 구조에 힘입어 더욱 지속될 것입니다. 

 

 

이 말은 맞다고 본다. 사람들은 아직도 욕심을 그만두지 않고 내가 사는 이 산골 마을에다가 난데없이 카zn를 차리겠다고 벼르면서 경관에 어울리지 않는 호텔을 곳곳에 세우고 있다. 살길을 찾기 어려운 20~30대들은 그래도 '도박은' 하지 않는다는 핑계로 주식에 빠져들고 있으며, 적은 돈과 단타로 인해 피해를 입는 이 인간들에게 사회는 돈을 더 부으라며 ETF 같은 새로운 소비 창구를 계속 만들어내고 있다. 솔직히 거의 경제 상태는 마지막 발악 같은 느낌이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아름답게 자신을 유지할 수 있을지 계속 생각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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