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게이블즈 빨강머리 앤 5 (반양장) - 웨딩드레스 그린게이블즈 빨강머리 앤 5
루시 M. 몽고메리 지음, 김유경 옮김, 계창훈 그림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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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에게 꿈이 없다면 차라리 죽는 편이 나을 겁니다."

 

  

부호와 결혼한 앤의 다른 친구처럼 보석을 치렁치렁 두르지는 않았지만

앤도 결국엔 길버트와 결혼식을 올리고 언덕 위의 하얀... 이 아니라 해안 위의 하얀 집으로 이사를 해 신혼생활을 연다.

앤의 모습과 좀 닮지 않았을까 생각되는 이미지를 올려본다.

 

 5권 앞의 몽고메리에 대한 설명에서 작가는 마지 못해 소설을 썼다고는 하지만, 이번 5권에서는 작가의 사랑 그리고 인생에 대한 고찰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아무래도 소설을 많이 쓰다보니 작가의 문체가 좀 안정된 게 아닐까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소설을 다 읽고 뒷부분에 대한 설명을 보면 또 그런 것도 아니었다. 이 작품을 집필하게 된 시기는 몽고메리가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다가 잠시 그녀에게 친절한 집안에서 묵게 된 날이었고, 자신의 인생에서 유일한 친구라고 생각하는 두 명을 동시에 만나게 된 날이었다. 이런 생활도 언젠가 무너질지 모른다는 그녀의 불안감은 하얀 집을 둘러싼 바다의 파도에서 드러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녀티를 막 벗어난 앤은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에 유달리 귀를 기울이는 듯이 보인다.

 특히 레슬리의 이야기는 심금을 울린다. 아버지를 자살, 동생을 사고로 잃고 16살에 강제로 시집을 간 이후로 어머니도 사망. 그녀의 망나니 남편도 배타고 다른 나라로 떠나지만 지체장애의 모습을 한 채로 돌아와서 그녀는 12년 동안 그를 돌보면서 상당히 지쳐있었다. 앤 특유의 매력에 끌리면서도 레슬리는 그녀의 행복한 신혼생활을 질투하는데, 그 사연 많은 앤도 레슬리의 양가감정엔 두손두발 다 들 정도였다. 앤과 길버트는 각자의 방식으로 그녀를 구원해준다.

 첫째로, 레슬리의 절친한 친구에게서 그녀의 사정을 전해들은 앤은 무조건 그녀에게 호의를 숨기지 않으며 그녀의 과거를 강제로 캐내려 노력하지도 않는다. 그녀가 무언가를 꺼내거나 앤이 그녀에게 사랑을 요청하기 전에 앤이 먼저 자신의 모든 걸 숨김없이 드러내는 것이다.

 둘째로, 길버트의 정직성이다. 그는 레슬리의 남편인 딕의 병을 고칠 수 있을 것 같다고 레슬리에게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레슬리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었고, 레슬리가 마음 편하게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 첫번째와 두번째는 결국 '정직'이라는 데서 공통된 점이 있는 것 같다. 요즘 시대에는 대체로 사람을 공격하는 것이 유머가 되는 시대인 것 같다. 아무래도 상대적 박탈감에서 나오는 불안감과 압박감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난 한편으로 '상대적 박탈감'만큼 비열한 말도 없는 것 같다. 이미 경제는 세계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나와 너 개인이 아니라 국제적 사회적 문제이다. 그렇다고 이 소설에 나오는 노처녀들처럼 남자(그 시대의 권력)와 시대를 집요하게 비판하라는 건 아니다. 결국 자기 스스로를 컨트롤할 수 있는 인내심과 내 마음을 솔직하게 언어화 할 수 있는 정직성을 얼마나 지니고 있느냐가 중요한 듯하다.

 

김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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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야의 하늘, UFO의 여름 그 첫번째
아키야마 미즈히토 지음, 김희정 옮김, 코마츠 에지 그림 / 대원씨아이(단행본)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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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면 다 추억이라고, 괴로운 일의 기억은 희미해져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곰곰이 되새겨보면 '전혀 재미있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책을 읽으면서 '어 아사바랑 나랑 좀 닮은 거 같애'라고 생각했는데,

아사바랑 이리야를 미행하기 위해 따라붙은 요원 남자도 똑같은 소리를 하는 걸 보면

어쩐지 닳고 닳아서 동심을 잃어버린 어른들이 아사바를 좋아하는 것 같다(...) 아 창창한 나인데 이러면 안 되는데 ㅠㅠ

 

 위기에서 도망갈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진지한 고민은 누구나 하는 법이다. 왜 하필 내가 이런 시련을 겪는 것일까. 잘못한 것도 별로 없는데 어째서, 더 잘못한 사람들도 많은데. 아사바도 별 잘못한 것은 없다. 단지 마을의 기지를 돌아다니다가 학교 수영장에서 수영을 좀 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리고 거기서 한 평범하지 않은 소녀를 발견했을 뿐이다. 손목에 뭔가 둥근 구체가 있고 코피를 쉴새없이 흘리는 등 신체는 허약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행동력은 센 소녀. 그녀의 돌직구에 아사바는 5cm미터쯤 떨어져서, 15도쯤 옆으로 돌아서 그녀를 곁눈질로 관찰한다. UFO에 빠져들었듯이, 그는 무언가 사연이 있는 듯한 이리야에게 점점 빠져들다가 결국 그녀의 사연은 아무 상관도 없어지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공간에 대해서 글을 잘 쓰는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이리야에게서 편지를 받은 날 그는 일단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볼일이 있는 것처럼 꾸며서 화장실로 도피, 몇 페이지에 걸쳐서 고심을 거듭하다가 결국 자신만의 공간인 시계탑에 가서 편지를 뜯는다. 그 과정에 대한 묘사가 너무 아름답고 풋풋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동심 때문이었을까. 아사바랑 이리야를 염탐하는 사람들도 그들의 데이트를 지켜보면서 잠시동안 목적은 아무 상관도 없어졌다. 세카이계란 역시 이런 공간과 시간의 순간적인 정지성 때문에 보는 맛이 있는지도 모른다. 

 

김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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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마코 양과 카시와 군 - Extreme Novel
이루마 히토마 지음, 박경용 옮김, 히다리 그림 / 학산문화사(라이트노벨)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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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나로선, 타마코 양>문화제다. 일단 그걸 전제로 깔고 싶다. 그렇다기보다 대개의 경우, 타마코 양>우주의 모든 것들은 흔들리지 않는다. 타마코 양. 끝내준다. 내 안의 수많은 가치관을 벌채해도 전혀 신경쓰이지 않을 정도다.

 

구원받은 자에겐 구원하는 자야말로 신인 겁니다.

 

 

 

경박하다면 경박하고, 가볍다면 상당히 가벼운 소설이다. 어느 정도냐면 술마시고 읽어도 내용 다 이해가 가고 오히려 그런 상태로 봐야 더 재미있는 소설이다(...) 게임하다가 고양감이 들어서 핥는다거나 깨문다거나 주무른다거나 하는 내용이 주류인 소설이기 때문이다.

 

 카드게임이라고 해서 룰을 알아야 하나 긴장하고 뚫어져라 쳐다봤건만 그런 것도 아니다. 대체로 타마코 양이 밤을 새워 게임을 개발해서 카시와 군에게 가지고 오기 때문이다. 탈의 포커는 지는 사람이 옷을 하나씩 벗는다는 설정이 있었지만 플레이 방식은 평범한 포커식이어서 의외로 지루했다. 하지만 어떤 게임은 창의적이어서 오호, 하고 호기심을 갖게 되는 경우가 있었다. 특히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의 사진을 쭉 가져와서 나이 맞추기 게임을 하는 에피소드가 제일 재미있었다. 보통 커플들은 자신이 알기 이전의 상대방 모습을 궁금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게임을 빌미로 서로의 사진을 보기도 하고 이야기도 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상당히 구미가 당기지 않겠는가. 물론 어렸을 때 사진을 열심히 찍어서 모아놨을 때의 이야기지만. 그러니 아직 성인이 되기 이전에 사진을 꾸준히 찍어두면 좋습니다. 본인은 아주 약간 후회중. 

 

 타마코 양을 소중히 하려는 카시와 군의 노력이 예뻐보이는 소설이었다. 겨드랑이에 과다한 관심이 있다는 설정에서 좀 무섭다고 느껴지긴 했지만(...) 아무튼 타마코 양의 가슴은 물론 손을 잡는 것도 조심스러워 한다고 할까. 키스도둑잡기 게임에서 욕망과 이성 사이의 줄다리기가 특히 잘 드러난다. 카시와 군에 의하면 그런 점에서 자신들은 닭살커플이 아니라 변태커플이라고 주장하는데, 정말 흔치 않은 데다가 키스하는 걸 보면 일리가 있기도 하고 좋다고 꺄꺄대는 걸 보면 그럴리 있겠냐 싶기도 하고. 솔직히 배가 아픕니다(...) 썰을 추가한다면 안구키스 은근히 느낌 좋습니다.(응?)

    

 솔직히 난 미군마짱보다 이 쪽 커플에 관심을 가지고 보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이루마 히토마는 장편보다는 중단편이 정말 재밌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 많이 소개되지 않는 게 안타까울 정도. 그런 소설을 쓸 때는 소설가가 약간 힘을 빼는 것 같은데 계속 이런 느낌으로 써주시면 안될까. 뒤에 있는 초단편 소설(?)도 괜찮다. 제목이 소설틱한 것 4인 걸 보면 다른 단편에다가도 이런 걸 끄적거린 것 같은데 이런 거 보면 모으고 싶잖아 제길. 게다가 전파녀와 청춘남 스토리와도 약간 얽어놓은 듯한데 그런 억지 설정은 클램프로도 충분하니 이제 그만 둬줬으면...

 

김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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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직업
사쿠라바 가즈키 지음, 박수지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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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이 유리처럼 쨍그랑! 소리를 내면서 깨졌다.

 

 

  

 왜 사쿠라바 가즈키의 소문난 책 중에서 이 책만 품절인가 솔직히 몹시 궁금했다. 그리고 저 표지가 몹시 시선을 끌었다. 고식에서처럼 고스차림이라도 나오나? (사실 흑역사 시절 때 내가 입었던 옷차림하고 그리 다른 것 같진 않지만 일단 그건 넘어가자. 옷은 입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이상하다고 한참동안 생각했다가 드디어 SF*.LE*에게서 책을 빌렸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일단 이 표지를 봤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싱숭생숭. 일터에 가져가서 읽을 때도 휴게실에 있던 모든 아주머니들이 유달리 관심을 보이고 한 번이라도 만지고 싶어했던 그 표지다. 마치 여자의 내부엔 거의 다 소녀가 들어앉아 있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말이다. 

 

 읽어가면서 왜 이 책이 유독 일찍 품절되었는지 이해는 간다. 일단 일반소설류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내 남자' 같은 박력넘치는 글이 아니다. 그러나 오타쿠나 10대 계열로 가자니 이 소설에 나오는 캐릭터들의 인생이 너무 비참하다. 아오이는 상당히 평범한 여자애고, 시즈카는 독서위원과 고스차림 소녀를 오가는 캐릭터라 갭모에가 생길지 모르겠다. 그러나 가련하다면 몰라도, 비참한 여성이 남성에게 인기가 있을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사쿠라바 가즈키는 어디까지나 '현대문학가'이다. 그녀의 소설 중 하나인 아카쿠치바 전설은 3명의 여성을 등장시켜 현대 여성의 수난을 그리고 있다. 이 소설과 상당히 비슷한 내용으로 '사탕과자 탄환은 꿰뚫지 못해'가 있는데, 그쪽에서도 살인이 등장한다. (소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은 살인이었다.) 이 소설까지 합치면 딱 셋인데, 난 이것을 여성의 비참한 3부작으로 생각하고 있다. 지금까지 등장인물이 여성중심으로 편성된 소설은 이 셋밖에 없다. 그리고 만일 사쿠라바 가즈키가 마음이 급격히 바뀌지 않는다면 아마 이런 스토리는 더이상 나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녀의 문체가 고식으로 인해 급격히 바뀌었고, 라노벨의 인기를 한 번 맛봤으며 아마도 그걸 두고두고 잊지 못하리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성인문학이라기 보다는 청소년문학에 가깝다. 이 소설을 읽은 후 사탕과자 탄환은 꿰뚫지 못해를 읽어보고, 아카쿠치바 전설을 읽어보면 아마 사쿠라바 가즈키라는 작가의 진가를 알아볼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더불어 여성이 느끼는 분노와 비참함이 어떤 건지 좀 남성독자들이 이해해줬으면 싶다. 모에물인줄 알았는데 낚였잖아!라고 분노하는 사람들이 많을 걸 알면서도 난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듯 ㅠㅠ 솔직히 문장 하나도 버릴 게 없이 쓰는게, 가끔씩 이상한 문장 늘어놓고 현실 환타지 쓰고 있는 에쿠니 가오리보단 훨씬 좋다고 생각하는데 말이다. 

 

 

 

 '어울리지 않는'을 중심으로 다른 소설을 추천해본다.

 

 '교환살인에는 어울리지 않는 밤'은 매우 코믹하고 '당신은 우리와 어울리지 않아'는 매우 공포스러운 소설이다. 두 소설만 보면 분위기가 극과 극을 달리고 심지어 두 권 다 사람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기는 하다. 하지만 지금 소개하는 이 소설처럼 사회에서 고립되고 소외되어가는 사람들을 다루는 책이므로, 그런 주제의 소설을 찾는 사람들에게 추천하는 바이다. 

 

김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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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즈번드 시크릿
리안 모리아티 지음, 김소정 옮김 / 마시멜로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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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니는 충격을 받았다. 존 폴이 안쓰러워 자니의 얼굴도 빨개졌다. 자니는 그네를 쳐다보았고, 자신이 낄낄대는 소리를 들었다. 이상하고도 듣기 싫을 정도로 톤이 높은 웃음소리였다. 이건 자니의 버릇이었다. 잔뜩 긴장해 있을 때, 조금도 우습지 않을 때 튀어나오는 습관이었다.

 

  

평점을 어떻게 줘야할지 몰라서 한참동안 머릿속에 굴러다니는 책이 있다.

이 책이 바로 그런 경우다. 

 

 문제는 이 소설 하나에 너무 많은 걸 담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어떻게든 사회 현상과 스토리의 박진감을 균형있게 맞물리게 하도록 노력한 티는 난다. 하지만 무언가 훈계를 너무 많이 하려 노력해서 통일성이 없어진 것 같다는 기분은 든다. 가해자 가족과 피해자 가족, 여성차별, 나이 든 여성 특유의 소외감, 남자의 모멸감과 여자의 모욕감을 너무 한꺼번에 드러냈다. 다소 드라마 '위험한 주부들'과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 <퍼레이드>에 많이 영향받은 듯한 분위기가 풍긴다. 하지만 명백히 주인공은 한 명인데, 딸아이 셋을 두고 있는 존 폴의 아내 세실리아 피츠패트릭이다. 솔직히 레이첼의 이야기는 보다가 실소가 날 정도로 어이가 없었던 데가 있었다(...) 바람 핀 남편을 떠나 고향으로 갔다가 거기서 불륜을 저지른 테스는 또 지독히 현실적이어서 공감이 가지 않았다. 특히 삶을 살아야 한다느니 사랑은 환상 결혼은 현실 어쩌고 하는데서 아주 신물이 났다. 뚱뚱한 몸매 때문에 테스에게 열등감을 느꼈던 사촌 펠리시티에 조금 더 조명을 하면 충분히 퀴어적인 줄거리를 이어나갈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런 요소가 전혀 나오지 않은 것도 아쉬운 점 중 하나이다. 아마도 가족 내부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는 것 같으니 그렇게 했으면 안 그래도 헝클어진 주제가 더 복잡해질 수도 있었겠지만.

 아무튼 이 소설에서 가장 맘에 든 인물은 딸아이 셋을 둔 존 폴의 아내 세실리아 피츠패트릭이었다. 주인공이기도 하다.

 

 

 

  세실리아 피츠패트릭은 어느 날 남편이 옛날에 자신의 앞으로 쓴 편지를 발견한다. 존 폴은 거기서 자니라는 소녀를 죽인 자신의 죄를 고백한다.

 

 자니는 레이첼의 딸이며 레이첼은 세실리아가 세 아이를 보내는 학교에서 근무하고 있다. 혼란 속에서 세실리아는 존 폴에게 이런 말을 던진다. '내 입으로 내 남편이 자신의 딸을 죽였다고 말하라니,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남편이 살인자임을 따지지 않는 게 이상해보일 수도 있다만, 한편으로는 이것이 인간이 느끼는 감정의 본질임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햄릿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자신의 어머니가 숙부를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때 혼란 속에서 이런 식으로 이야기한다. '절조 없는 어머니를 둔 나에 대해 사람들이 뭐라고 수군거릴까!' 아마도 세실리아와 햄릿이 느끼는 감정은 모욕감일 것이다.

 존 폴은 왜 자니를 죽였는지에 대해 설명하는데, 자니가 다른 남자에게 가기 위해 자신을 버렸으며 비웃었고 그에 대해 분노해서 일어난 '사고'였다고 주장한다. 그녀를 죽인 죄에 대해선 인정하지만, 그는 끝끝내 자니의 그 웃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실상은 저 위의 글귀와 같았는데도 말이다. 게다가 지금 아내 세실리아는 결코 그 당시 자니가 지었던 표정을 보지 못하고, 만일 볼 수 있더라도 존 폴과 같은 느낌을 받지 못했을텐데도 말이다. 모멸감은 그 당시 분위기와 표정 등을 봄으로서 일어나는 감정으로, 직접적으로 욕을 먹는 모욕감과는 달리 그 느낌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특징이 있다. 어쨌거나 자니는 죽었으므로 모욕감도 느끼지 못하겠지만, 아마 존 폴은 그때의 모멸감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불쌍한 그 남자는 한때 자신이 사랑했던 자니를 빗치라 부르고 다니며(이것도 내 믿음인데, 카사노바는 있어도 빗치계 캐릭터는 실제하지 않는다. 그저 환상 속에서나, 죄책감 속에서 만들어질 뿐.), 세실리아에게 그 모멸감을 전해서 자기혐오를 덮기 위해 본능적으로 편지를 쓴다. 세실리아는 자신의 남편에게 자백을 권유할지 말지의 선택을 해야 한다. 존 폴에게 떠밀려서. 성차별인지도 모르겠지만, 자신감이 없는 남자들은 대게 그런 꼴불견적인 행동을 한다. 결정을 남에게 맡기는 것이다. 그는 그 이후로 평생동안 속죄하듯이 살아왔다고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이게 실질적으로는 자신의 인생에 즐거움도 느끼지 못하고 책임도 지지 않은 채 살아왔다는 소리가 된다. 불쌍한 세실리아는 말문이 막힌다. 그녀는 어떤 식으로 살인자 남편과 같이 살고 있는 자신을 '합리화'시킬까? 그리고 결말의 반전은 어떤가? 잘 생각해보라. 불우한 사람들은 정말 자신의 상황이 불우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 사람들은 상황 자체보단 자신이 느낀 모욕 모멸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을까? 일종의 자기합리화에 의해 자기 스스로 더 깊은 우울의 수렁에 빠진 게 아닐까?

 

  

  

 

  

  범죄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풍파에 시달리는 불쌍한 인간들(여성인 경우가 많다.) 이야기는 허즈번드 시크릿 말고도 많다. 개인적으로 다큐멘터리 식으로 쓰여진 가해자 가족, 히가시노 게이고의 편지, 소설이 원작인 영화 케빈에 대하여를 추천한다. 

 

 이 소설에서는 상당히 위험한 이야기가 등장하기도 한다. 사실 마지막 장을 보면서부터 내내 내 뇌리를 떠나지 않는 글귀가 있었다. 남자가 여자를 목졸라 죽이는 데엔 7초에서 14초밖에 걸리지 않는다는 소리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나오는 한 여자는 단단한 금속으로 만들어진 자동차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남자를 죽일 수 없었다. 난 요즘 여성우대에 관련된 남성들의 여러가지 헛소리가 상당히 웃긴데, '여성들은 남성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한다'라는 말이 그 중 하나이다. 만약 '잠재적 가해자'가  만약 이 여성을 죽이면 내 미래의 가족이 어떻게 살게 될지 아주 잠깐이라도 고민을 한다면, 그 여자는 살 수 있다. (사실 많은 운 좋은 여성들이 그 때문에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7초에서 14초 내에 분노를 가라앉히고 생각을 떠올려야 한다는 것인데, 요즘 욱하고 무언가가 치밀어오르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으니 참으로 딱한 일이다. 괴물이 되지 않고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방법은, 이런 순간적인 충동들을 아침에 일어날 때부터 밤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억제하고 또 인내해 나가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 생각인데 결과적으로 존 폴이 자기절제를 잘 했더라면, 그리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죄를 인정했더라면 생각보다 무거운 벌은 받지 않았을 것이다.

 

김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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