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귀 1
오노 후유미 지음, 추지나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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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네가 마사오가 자랑하는 데 흥미를 안 보여줘서 그래."
"이사 온 사람을 봤다는 얘기를 왜 황송하게 들어야 하는데?"
"사람을 사귄다는 게 다 그렇지. 흥미가 없더라도 있는 척을 해 줘야 도리지. 너, 그러다가 사회 나가서 고생한다."
"고생도 내가 하니까 내버려 둬. 그래서? 자랑하는 데 같이 동조해 주지 않는다고 상대를 노려보고 나가는 놈은 고생 안 하냐?"

 

  

죽으려고 하지 않았다는 게 특이했다. 손목을 긋는 정도로는 죽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세이신 스님은 충동적으로 손목을 그었다. 후계자로 굳이 삼지 않으려고 했던 시골의 절에서는 급히 그를 소환했다. 그는 그렇게 젊은 나이에 소토바라는 마을의 작은주지가 되었다. 자신의 충동을 이겨내기 위해서인지 그는 자꾸만 암울한 내용의 소설을 쓴다. 동네 사람들의 눈에 뜨이고 싶지 않은데, 그들의 시선은 조심스럽게 그를 쫓아다닌다. 작은주지스님은 외동인데 결혼은 언제할까? 저런 섬세하고 까다로운 성격에 결혼해도 잘 살 수 있을까? 저렇게 심약해서야 우리 마을을 다스릴 수 있을까?

 반면 도시의 현대의학의 지식을 갖추고 있는 세련되고 불량스런 그 마을의 의사 선생은 마을 안에서 승승장구하는 중이다. 토시오의 어머니는 그 때문에 명예를 더욱더 갈구하는 타입이 되었지만 그런 부모가 지긋지긋한 토시오는 오히려 아버지가 썼던 응접실을 밀어버린다. 아내하고도 멀리 떨어져서 사는데 정말로 괜찮은 걸까? 하지만 그런 질문을 마을 사람들이 생각해 버리기도 전에 밀어낼 만큼 토시오는 단호한 성격을 지녔다. 그러나 아무리 그들이 강하다고 해도 등 뒤에서 속닥거리는 노인들의 입담만큼은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다. 늙은 세대를 밀어내고 젊은 세대가 나아가야 그 마을이 살아남는데 말이다. 그런 소문에 일일히 상대해주기도 피곤한데 무시하기엔 너무 분하고 짜증이 난다. 그 상태에서 만만치 않은 부호가 이사를 온다.

 

  

시골 토박이들은 생활 패턴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곧잘 외지인의 존재에 두려움을 느낀다.

 그러나 성폭행이 항상 사탕 달라고 꼬시는 외지인 남자에 의해 이뤄지는 건 아니듯이, 내부의 문제를 외지 탓으로 돌리는 것들이 많다. 하지만 이번 외지인은 시귀다. 시골 사람들이 무섭고 소문으로 이지메를 시키며 몇몇 사람을 못살게 군다고는 하지만 힘이 어느 정도 빠진 노인들일 뿐이다. 사실 난 자꾸 시귀를 응원하게 된다. 힘내라 시귀. 시골을 뒤흔들어라 시귀. 그들의 소행이라 추측할 수 있는 돌림병같은 죽음은 좀 잔혹하지만. 필시 프롤로그에서 불타는 마을을 빠져나온 관도 그 시귀 중 가장 어린 여자아이일 가능성이 높다. 관이 소토바 식이 아닌 외부에서 온 데다 (소토바의 관은 창문이 달려있지 않은데 프롤로그의 관은 창문에 솔까지 달려 있었다.) 어쨌던 차 트렁크에 들어갈 수 있으니 말이다.

 

  

5권이 완결같고 1권당 500장이 넘어가는 양인데다가 요새 유행답게 핑크핑크하고 귀엽지 않은 소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유려한 문체라서 별 문제없이 스르륵 읽어나갈 수 있었다.

 게다가 공포소설에 시골 사회의 생태계와 그 문제점을 전부 담아내려 하는 게 상당히 독특했다. 마성의 아이에서는 이지메를 다뤘다고 들었는데 시대에 따라 유행하는 이슈를 담아내는 게 이 작가의 특성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뱀파이어물은 그닥 좋아하지 않는데 전개가 워낙 현실적이다보니 거부감이 없다. 가급적 빨리 다음 2권을 보고 싶다.

 

  

여담으로 메구미가 죽을 때 어른들이 슬퍼하는 장면에서 자꾸 세월호 유가족들이 떠올랐다.

 '우리 아이들이...' 같은 발언이 나올 때마다 많은 청소년 운동권 사람들이 불만을 표출했었다. 누구나 죽는데 왜 우리의 죽음은 더 슬퍼하느냐고, 그렇게 따지는 듯한 느낌이 처음엔 들었었다. 하지만 시골의 인간들은 오지랖이 지나쳐 귀찮아 죽겠다는 나츠노의 의견과 죽음은 누구에게나 순서없이 찾아오니 무서운 거라는 시귀의 말을 듣고나서 어렴풋이 그 청소년 운동가들이 하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은 죽음에서조차 차별받는다는 느낌이 있는 것이다. 메구미는 아마 죽어서까지도 청소년도 소토바 마을도 아무것도 벗어나지 못한 채 시귀가 되리라. 세월호 관련 시를 항상 읽고 있는데 어른들은 아이들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한국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말고 훨훨 날아가라' 라고 반말을 한다. 어쩌면 내가 나이가 지긋해질 즈음엔 우리 후손들 다수가 이 사실을 지적하고 비웃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 당시엔 아이들의 인권 침해가 사후에서조차 이렇게 심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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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4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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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보세요?" 하고 물었다. 그는 그녀를 깨우지 말고 다시 재워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그녀의 생각 속에서 새로운 꿈의 씨앗을 낳게 할 만한 단어로 대답하려고 애썼다.
"별을 보고 있어." 하고 말했다.
"거짓말 하지 마세요, 당신은 별을 보고 있지 않아요. 당신은 땅바닥을 보고 있어요."
"비행기에 타고 있으니 별이 우리 아래에 있지."
"아, 그런가요?" 하고 테레사가 말했다.

 

 

 일단 이 책은 전부 무겁다. 가벼움이 대체 어디 있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아무래도 가벼움을 자유연애에서 찾는 것 같은데 나는 왜 목숨걸고 여자를 찾는 토마스가 목줄 묶인 개처럼 보이냐. 차라리 아내 따로 여학생 애인 따로 둔 프란츠가 훨씬 자유로워 보이는 건 기분 탓인가.

 사비나라는 여성 빼면 대체로 마음대로 집어치우고 집을 나설 수가 없는 상류층 이야기라서 분위기가 무거운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정작 그 사비나도 우울증에 걸려서 벗어날 수가 없다. 내 생각으로는 아내 테레사가 겁나 마음대로 휘두르는 토마스를 정말로 사랑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님 마음 속 깊은 곳으론 그들의 심각한 사랑이 부러워서 그런 애정을 애인 프란츠에게서 찾으려 했는지도. 아무튼 운동권의 그 복잡한 사랑 이야기 생각나고 재밌다. 토마스는 여자랑 섹스를 하면서 그녀에게서 백만분의 일을 차지하고 있는 자아를 발견한다고 한데, 아무래도 그 이론이 운동권 마초들을 대변하는 듯하다. 생물심리학을 보자. 씨를 광활하게 뿌리려는 게 수컷이라 함으로서 토마스의 이론이 완벽한 개소리라는 게 입증된다. 생각해보면 과학의 발전도 어느 정도 세상에 도움이 된다. 지가 절제를 못해서 테레사가 저렇게 고통을 받는 걸 보고, 그로 인해 죄책감을 느낀다면 아예 무성애자로 사는 게 나을텐데. 결국 테레사의 호기심으로 인해 사건이 커지면서 소설의 재미도 더욱 커진다.

 자유연애 자체로 보면 진짜 여자가 손해보기 딱 좋은 듯. 이 소설에서도 관계의 결실(혹은 현실과 연관된 귀찮은 존재)이라 볼 수 있는 애는 등장도 안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연애를 하면 다 여자가 책임을 져야 하고, 안 하면 여자가 혼자 정절을 지켜야 하고 아무튼 다 여자가 불리하지 않은가. 남자들은 좋은 여자 잡았으면 한눈 팔지 마라... 반대도 마찬가지고.

 그렇다고 급진 페미니즘으로 가면 어떻게 되느냐? 테레사가 된다. 일단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좋아하는 남자를 닮기 위해 바람을 폈다지만, 결과는 미러링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남성에 대한 질투와 분노로 인해 마초들이 주장하는 '성적 이분법'은 남게 되는 것이다. 거울에 비춰서 좌우를 반대로 바꿔도 일단 대상은 같기 때문에. 그런데 여자는 선천적이던 후천적이던간에 남자와는 다르기 때문에 남자가 바람필 때 느끼는 그 감정을 겪을 수 없다. 이 책은 피해자중심주의에 빠진 급진 페미니즘의 치명적인 단점에 대해 다루고 있다. 토마스가 바람을 피는 이유에 대해 온갖 변명을 하듯이 그녀도 온갖 변명을 하지만, 그녀가 바라는 것은 결국 결혼의 붕괴와 죽음이었다. 급진 페미니즘 또한 그렇다고 난 생각한다. 그들이 펼치는 시위도 '검은 시위'이지 않은가. 물론 지금 젠더라는 개념이 나왔지만 이 책에선 시대가 시대니만큼 아직 미숙하고.

 

  

많이 힘들지만, 절대 용서하지 못할 사람은 없다.

 

 개와 인간의 사랑이 인간과 인간의 사랑보다 더 위대하다 생각된다면, 심지어 살인자라고 할지라도 용서못할 건 없다고 생각된다. 법의 심판을 얌전히 받는다는 가정 하에. 하얀 거짓말은 여전히 말도 안 되는 단어라고 생각한다. 그건 마치 투표를 아예 안 하고 침묵하는 게 자신의 소신에 대한 표현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세상에는 그냥 가만히 넘어가도 될만한 것들이 산적해있다. 우리는 정치에 대해선 침묵하면서, 왜 남이 나에게 저지른 부당한 일에 대해선 침묵하지 못하는가. 역겨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해는 하지만 나는 특히 남성이 여성을 성추행한 후 여성이 그것을 SNS같은 데다가 퍼뜨리는 경우를 그닥 좋아하진 않는다. 나도 한때 누군가의 추문을 그런 식으로 퍼뜨린 적이 있지만, 그래봤자 상대방은 나를 더 싫어하게 될 뿐이며 나는 미묘한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다. 해결법은 사실 간단하다. 그냥 상대방의 키치가 나와 맞지 않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나와 키치가 맞다고 생각되는, 혹은 착각되어지는 사람을 찾아나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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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산 그 사람 그 개 - 아련하고 기묘하며 때때로 쓸쓸함을 곱씹어야 하는 청록빛 이야기
펑젠밍 지음, 박지민 옮김 / 펄북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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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아버지는 신을 믿지 않으니까. 그러니 신령스런 뱀을 볼 수 없지. 믿거나 인연이 있는 사람이라야 신령한 그분을 볼 수 있단다."

 

 

  

나를 해치는 사람은 나의 입장으로서는 밉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나를 해치는 그 사람이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일 수도 있다. 내 입장으로서는 그들이 다 밉겠지만, 존재를 부정한다거나 악마같은 초월적인 것으로 규정함으로서 터무니없는 자기 합리화를 시킨다면 결국 자기 자신에게 피해가 오는 법이다. 반대로 나를 도와줬거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우상시하는 것도 똑같은 이유로 똑같은 결과가 초래된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님이 쉴 곳 없지만 또한 내 속엔 다른 사람이 너무 많아 나를 찾을 수가 없는 법. 적어도 아군을 해치는 일은 없도록 하자. 

 그래서 "왜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환경을 해치지?" 혹은 "통일하면 남한이 대박인데 왜 안 하지?" 같은 질문은 겉보기엔 존나 논리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이보다 더 웃긴 이야기도 없다.

 예를 들어 위의 인상깊은 글귀는 가오미의 일요일이라는 단편소설에 나온 문장이다. 어머니는 이렇게 아버지가 신을 믿지 않는다고 딱 잘라 주장하지만 딱히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이웃 사냥꾼의 검둥이가 죽을 때 자신의 개 누렁이가 검둥이를 낳은 걸 보고, 아버지는 슬퍼하는 사냥꾼에게 검둥이를 준다. 가오미는 '사냥꾼의 검둥이가 환생했다.'고 아버지가 기막히게 잘 둘러댔다 찬탄하지만 그건 가오미의 입장일 뿐이다. 아버지가 그걸 정말 믿는지 안 믿는지에 대한 확인은 끝까지 나오지 않는다. 재주라는 소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마오치의 외손녀가 말하는 타이밍이 굉장히 좋지 않아서 비난을 많이 받았지만, 진실은 언젠가 밝혀지게 되어 있다. 높은 사람 한 명 진료했다는 이유로 의사들 위에 군림하고 많은 돈을 버는 마오치가 달갑지 않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뱀과 이웃으로 살기라는 단편에서 그런 관점이 훌륭하게 드러난다. 무차별 사냥도 아니고, 뱀으로 악기를 만들어서 훌륭한 연주를 할 수 있기만 한다면 (자신의 운명과 집안을 말아먹는 일이긴 하지만) 악사도 어느 정도 예술과 사회에 공헌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소설의 중간 부분까지만 해도 뱀을 소중히 여기는 화자의 큰아버지가 변화하는 모습에 주목해야 한다. 올바로 살기란 정말 힘들기 때문에, 바른 사나이의 주변에 존경하는 사람은 많아도 그 힘듦을 같이 지탱해줄 수 있는 친구는 그닥 없다. 그게 바로 큰삼촌이 그가 하는 일에 대해 입을 다물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라 생각한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자기 기준에 맞춰서 미워하고 싫어한다면, 언젠가 그 기준이 무너질 때 견딜 수 없게 될 것이다. 애초에 그 둘이 가끔씩이라도 이야기를 했더라면 수호뱀만큼은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큰삼촌의 눈물을 무시하고 뱀을 데려다가 다시 키우면 무작정 수호신이 다시 돌아올 줄 알았던 큰아버지의 꿈은 마지막엔 '뱀양식장'이란 개념으로서 철저히 무너진다.

 내가 처음으로 3일만에 책을 다 읽게 되었다. 짧지만 많은 걸 생각하게 되는 소설들이었다. 아이들이나 식물들이나 '키운다고' 생각하면 야성을 잃어서 망친다는 말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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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리색에 흐려진 일상 4 - AK Novel
다테 야스시 지음, 하구미 옮김, 에렛토 그림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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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잠들려는 혼을 산 자가 멋대로 이 세상에 얽매이게 해서 좋을 턱이 없다. 때문에 아무리 납득이 가지 않더라도, 견디기 힘들더라도, 다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생과 사를 가른다. 죽은 자가 떠나는 것을 배웅한다.
유령 따위로 만들어 이 세상에 남기는 것은, 자신을 저주하거나 복수하는 데 이용하는 것은, 결코 고인을 위한 일이 될 수 없다. 죽은 자는 그대로 잠들게 해줘야 마땅하다. 명복을 빈다는 것은, 아마 그러한 의미일 것이다.

 

 

새삼 체페리 가문 집안을 애도합니다...

 

 왠만큼 일본 만화를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일본에서는 처음 본 인물이나 이름을 막 부르기 힘든 사람들을 성으로 부른다. 개그로서도 영능으로서도 콤비가 된 우도 루리와 콘노 타카미. 그러나 그 둘도 서로를 이름으로 부르기가 어지간히 쑥쓰러웠나보다. 그러나 성격이 망가지는 영학이라는 병을 이용하여 자연스럽게 콘노가 타카미로 진화되었다. 역시 루리는 강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스이라던가 자쿠로가 워낙 캐릭터성이 강해서 루리의 개그가 되려 덮이는 느낌이었다. 일본에서는 츤데레 귀족 아가씨 스이가 어지간히 인기가 높았던 느낌이고 본인은 사실 자쿠로같은 섹드립이 엄청 취향이었는데(눈물점도 있고!) 3권과 4권에 캐릭터가 등장한 게 다여서 너무나 아쉽다. 이리야의 하늘도 4권이었다지만 이 설정은 좀 더 진행해도 되었을텐데... 비슷한 장르인 이능배틀은 일상계 속에서도 4권 이상은 되었을 텐데 ㅠㅠ 기발한 캐릭터가 묻히는 게 아쉽다. 4권이 2014년에 나왔는데 슬슬 신작을 내놓을 때가 되지 않았나? 슬슬 분발해줬으면 싶다. 우리나라에서도 신작 작가치고는 은근 인기가 있었다고 보는데 항상 그럭저럭 괜찮게 순위를 유지하는 라노베들을 출판해주시는 AK가 번역을 해줬으면 싶고. 1~3권까지 일본에 대한 깊은 지식을 바탕으로 책에 이리저리 각주를 달아준 김지연라는 번역가가 하도 인상깊어서 또 어떤 책을 번역하고 있나 찾아봤더니 무려 왕국 게임을 번역 중이었다. 그러고보니 그 작품도 슬슬 번역되는 중이었구나... 왜 갑자기 4권에서 하구미로 번역가가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전반적으로는 무난했다. 그렇지만 흐름이 깨진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김지연이 의역을 했다면 하구미는 아예 직역을 한 셈인데, 아무리 완결인 책이라고 해도 스타일을 바꿔버리니 압박감이 상당했다. 보통 번역가에 대해 별로 신경을 안 쓰는 나도 책을 다 본 후에 검색해볼 지경이었으니까. 여러모로 아쉬웠지만 가볍게 보기엔 좋으니 영능물 좋아하는 분들은 반드시 킵해놔야 할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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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야의 하늘, UFO의 여름 그 네번째 (박스 포함 한정판)
아키야마 미즈히토 지음, 서범주 옮김, 코마츠 에지 그림 / 대원씨아이(단행본)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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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는 말이다, 마지막에 네 손에 죽는다면 그걸로 좋았다고!"

 

 

사실 난 스이센지보다는 에노모토가 더 좋았다. 아저씨같은 캐릭터로는 스이센지가 이 작품에서 더 인기가 많았으리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작가의 의도를 추측해보건대 그는 그냥 엑스트라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유행에 따르는 건 인간의 본능이라고 흔히 생각들 하지만 유행은 '아무도 밟지 않은 신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일단 진실을 제대로 깨우친 순간에는 일단 '자신의 발자국'이 남아있기 때문에 그것조차 버려지기 마련.

 

 스이센지는 일단 환상적인 기분을 쫓는다는 느낌이 더 컸다. 달에 처음 발을 딛은 지구인을 생각해보자. 인류가 달에 발을 딛은 건 처음이라는 식의 온갖 뉴스가 서두를 장식할 것이다. 하지만 그가 한 번 더 달에 발을 딛고 싶다는 생각을 할까? 그가 만일 그럴 생각을 한다면, 나는 그가 말년에 돈독이 올랐다는 생각을 할 것 같다. 달 위에서 콘서트를 한다는 뮤지션의 새로운 '시도'가 겹쳐진다면 또 모를까. 하지만 스이센지는 취향을 바꿨다. 자신은 호기심은 있어도 주류의 더러운 짓에는 끼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정복된 무언가, 나중에는 다들 알게 될 미스테리엔 끼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읽었다. 혹은 군에게 본능적으로 세뇌되서 외계생물에 대해선 피해간다는 설정인지도 모르겠으나, 아무래도 작가는 평범한 사람들을 무시하지 말라고 설파하는 게 이 작품의 최종 목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므로 그쪽에 대해선 가능성을 적게 하고 싶다.

 에노모토는 이 작품의 오브라이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 작품에서 매우 노골적으로 드러나지만 그는 주류이자 악인에 속한다. 하지만 그는 악인이 되기를 택했고, 결국 여기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도 이리야의 선택을 전적으로 지지함으로서 악인의 축에 속해버리고 만다. 의도인지 의도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1984의 주인공을 아사바와 겹치고 있다. 마치 강아지처럼 연약하지만 죽기 전에 그는 혹시 자신을 배반(?)한 여자 주인공을 지지하려는 생각 끝에 빅브라더가 지배하는 세상을 찬미한 게 아닐까라고. 만약 그렇다면 그 악을 우리가 비판할 자격이 있을까라고. 끝에 있는 번역가의 말처럼 이리야가 끝까지 저항하길 바라지만, 그녀를 사랑하니 그녀의 의견이 무엇이던 간에 지지한다고. 글쎄, 나는 그의 마음을 알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처음부터 이 작품의 그늘인 에노모토를 주목했지 아사바를 주목하지는 않았다. 위의 글은 아사바의 아버지같기도 하고 이리야의 아버지같기도 하고 이리야의 전 애인같기도 한 에노모토라는 군인이 이리야를 떠나보내고 아사바에게 한 대사이다. 그는 끝까지 좋아하는 이리야를 지켜봐주었다. 좋아하는 사람을 지지한다는 건 그 세계를 모르는 사람이 할 수 있을만한 일이다. 하지만 내부 사람일 경우는 어떨까? 누구한테나 그런 용기가 있는 건 아니다.

 결국 악보다는 어리석음 때문에 대부분의 문제가 발생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선 이리야와 아사바가 도망치고 나서 만난 최악의 부랑자조차도 어리석지는 않았다. 그저 환경만 탓하며 절망만을 품어선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나는 아사바를 성장시킨 결정적인 계기가 된 사람은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결정적인 태도를 딱 한번 취하고 있는 이후의 아사바를 묵묵히 지켜본 에노모토가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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