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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리 북
하워드 엥겔 지음, 박현주 옮김 / 밀리언하우스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뚱딴지같은 소리일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본인은 이 책을 추천해 준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가 진짜 소설일 줄 몰랐다. 솔직히 말하자면 쇼크먹을 뻔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정신과에서는 정말로 존재할 것 같은 환자들이 나왔었고, 그 환자들에 대한 의사로서의 애정이 책 속에서 묻어났기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환자들의 증상에서 상당히 과장된 면이 있기도 했다. 어쨌던 그런 실소설을 썼던 올리버 색스가 추천한 책이다. 역시 이 책도 정신과 관련된 실소설이다. 그러나 이 책이 환자로서 병원에서의 온갖 생활이야기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올리버 색스의 소설과는 다르다. 이미 '책 못 읽는 남자'라는 에세이를 써서 유명세를 얻었지만 이 책에서는 추리라는 아주 적절한 양념을 끼얹었다. 내용 자체도 흥미있지만 무엇보다 흥미가 있는 점은 바로 작가가 소설을 썼다는 사실 그 자체다. 왜냐하면 그가 걸린 병의 이름은 바로 '실서증 없는 실독증'이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쓰는 데엔 문제가 없지만 글을 읽는 것 자체에 문제가 있는 병이라 한다.

 만약 내가 실독증에 걸린다면? 일단 본인은 국어를 남들보다 좀 할 줄 알고, 외국인들 앞에서 더듬거리지만 영어나 일본어 등도 좀 할 줄 안다는 자신감에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책 읽기를 정말 좋아한다. 책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처럼 하루에 10권씩 책을 읽지는 않지만, 나름 집에서 밥먹을 때나 밖에 나갈 때는 손에서 놓지 않는다. 그런데 내가 배우는 중이었던, 혹은 당연스럽게 생각했던 언어들을 하루 아침에 읽지 못하게 된다면 얼마나 기가막힌 일일까! '더 리더'처럼 남이 글을 읽어주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사실 남의 글을 읽는 게 문제가 아니다. 작가라면 자신의 글을 읽고 편집 혹은 수정해야 하는데, 직접 쓴 글도 한참동안 알아보지 못한다면 얼마나 불편한 일일까? 책을 읽지 못한다는 그 공포는 본인도 지금까지 겪은 모든 불행과는 비교도 안 되리라 생각한다. 바로 본인이 삶에서 겪은 불행을 독서로서 풀었기 때문에. 

 그의 글에서는 확실히 나레이션보다는 인물의 대화가 많았고, 그 때문에 소설이 질질 끌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자신의 상황에서 완전히 도피하진 않았으나, 무리해서라도 밝은 기분을 가지려 노력하는 모습이 강하게 느껴졌다. 자신의 현재 상황에 대한 적절한 유머와 냉소가 섞여 있었다. 덕분에 소설의 몰입력은 한층 좋아졌지만 말이다. 게다가 심리소설로만 생각한 책이었으나 의외로 트릭이 잘 짜여진 소설이었다. 병원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제한된 상황이 오히려 그를 안락의자 탐정같이 보이게 했다. 다른 탐정소설과 확실히 다른 점이 있다면 무의식으로 인해 범인을 잡는 결정적인 힌트를 얻었다는 설정이다. 아무래도 자신이 그같은 병에 걸리다보니 정신학과 심리학에 대한 깊은 인상을 받았으리라. 주인공의 의식이 너무나 생생하게 그려져 있는지 아니면 나 자신도 기억이 흐릿한 편이라서 그런지, 베니의 모호한 기억을 따라잡으려면 책 앞 면을 몇 번이나 들춰보아야 했다.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괜찮은 세상에서 살고 있는지 보기 위해 실소설을 볼 때가 있다. 전화위복은 여러가지 다른 속담들로서 하나의 법칙이 되었고, 본인도 굳이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신체는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무언가 부족해지거나 없어지면 보충하려 노력한다. 우리의 정신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주인공이 실독증에 걸렸지만 추리력이 극도로 발전했듯이, 무언가를 잃어버리면 또다른 새로운 것이 발견되기 마련이다. '메모리북'은 추리소설로도 그럭저럭 괜찮은 소설이라 생각하지만 무엇보다도 여러 장애우들이 이 소설을 읽고 희망을 되찾았으면 좋겠다. 장애는 또 다른 진화의 길이고, 불행은 또 다른 행복이니까. 이 소설이 바로 그 산 증거다.

 P.S 박현주 님은 아무래도 심리에 관련된 소설을 자주 번역하시는 것 같다. 비록 문체는 매우 딱딱한 번역투이지만, 언제나 심리학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 부분은 매끄럽게 신경써서 다듬어주신다. 전문서적엔 전문지식을 지니고 있는 번역가를 써야한다는 본인의 견해와 걸맞는 책이라서 마음에 들었다. 팔지 않고 집에 보관해 둘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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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의 저택
펄 벅 지음, 이선혜 옮김 / 길산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본인의 서평으로는 참으로 보기 힘든 별 다섯개짜리이다. 플러스 1점까지 아낌없이 추가해버리고 싶었으나 본인이 선호하는 소설의 분위기에 비하면 좀 답답한 기분이 들어서 조용히 빼버렸다. 대지 3부작을 읽을 때부터 짐작했지만 펄 벅의 소설에서 단연 주목받는 건 캐릭터이다. 인물묘사에 아낌없이 종이를 투자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훈성은 잊지 않고 넣는다. 평범한 사람의 삶 속에서 휴머니즘을 찾는 그녀의 정신은 이 소설에서 나오는 안드레 신부를 닮았다. 아니면 안드레 신부가 그녀를 닮은 건지? 

 줄거리는 우 부인을 주축으로 흘러간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녀는 여자의 방식으로 시골 안 부유한 저택 안에서 실권(?)을 쥐고 살고 있는 여인이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저택도 좁게 느껴지고, 결국 40살 생일을 맞아 남편의 방에서 떨어져 나가기로 결심한다. 가끔씩 그녀의 이름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우 부인'이 이름으로 혼동될 정도로 뜨문뜨문 나타난다. 사실, 생각해보면 이런 스토리는 가부장제 세계에서는 어느 땅덩어리에서나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워낙 뛰어난 펄벅의 글솜씨로 인해 얼굴이 좀 다듬어진 중국 사모님의 이야기조차 첨예하고 아름답게 표현된다. 참으로 마법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까지 줄거리를 듣고 나면 페미니즘에 관한 책을 읽은 독자분들은 보통 '인형의 집'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책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소설의 한 가지 중요한 포인트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남자들마저 가부장제 속에서 그닥 행복한 삶을 살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펄벅은 여성주의자보다는 오히려 인류박애주의자에 가깝다. 또한 남녀노소가 다 좋아하는 사랑이야기가 더 있다. 안드레 신부와의 사랑이야기에서 육체적인 사랑, 집착 등등을 기대하고 읽으신다면 분명 실망하리라. 그러나 소름끼치는 이야기를 기대하고 읽은 분들이라면 분명 이 아름다운 사랑이야기에서 숨어있는 광기를 깨달을 수 있으리라. 비교적 평화롭게 끝난 소설이지만, 난 아래의 글귀 속에서 문득 '죽은 왕녀의 파반느'를 떠올렸다. 

 '그녀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 아무런 의무가 없으며 단지 사랑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 아니면 사랑마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물론 강 부인과 달리 좋은 몸매를 유지하고 유모와 달리 침착하게 집안의 일을 정리해가는 우 부인의 모습도 놀랍긴 하다만, 약간 삐딱하게 꼬여있는 본인의 시선으로는 아니꼬운 여자였다. 시대의 속박을 벗어나 자유를 찾기를 바라면서도 내심으로는 가정이 자기에게 끌려오기를 바라고, 강 부인과 추밍을 위하는 척 하지만 결국은 그들을 자신의 이중적 인생 속에 끌여들여 희생시켰다. 그녀의 미모와 세견된 모습은 하인의 각별한 희생이 있기에 가능했다. 딱히 그녀의 부를 언급하고 싶진 않다. 어차피 한 사람이 제대로 살려면 몇몇 사람들의 희생이 필요하니까. 문제는 우 부인이 그녀가 그녀에게 희생된 사람들을 위해 무언가를 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은 데에 있다. 아무튼, 아름답지만 숨막히는 삶 속에서 우 부인은 드디어 사랑을 만난다. 

 안드레 신부와 우 부인의 사랑은 우 부인의 결벽만큼이나 지독히 영적이었다. 처음엔 우정으로 넘어갈 뻔했지만 지나치게 서로를 멀리하는 그들이 안쓰러움을 넘어 소름끼쳤다. 시선조차 서로 섞이지 않는 그들의 만남에 오한이 절로 느껴졌다. 아직 20대도 벗어나지 못한 나로서는 육신을 초월한 사랑을 이해할 레벨이 아닌 듯하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 더 놀라운 점은 우 부인의 성장이다. 인생에서 겪을 일은 다 겪은 중년대 여인도 사랑을 하게 되면 성숙해지는 것일까. 아니, '아이낳는 기계'에서 '인간'으로 변해가는 과정은 분명 성숙과는 다르다. 어떤 말로 그 숭고함을 표현해야 할까. 펄 벅만큼의 실력도 되지 않는 나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하겠다. 

 책 줄거리만 보고 단순히 슬픈 소설이 될 것이라 결론지었던 나의 성급함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또한 내가 경험하고 있는 사랑이 영적인 사랑일지 생각해보는 순간이었다. 문득 노라가 집을 나간 후에 육체적인 사랑이 아닌 영적인 사랑을 만났을지 궁금해진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기초 조건은 결국 사랑이기 때문에. 나도 노라도, 우 부인만큼 멋진 여인으로 성장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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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포 2
라파엘 아발로스 지음, 신윤경 옮김 / 문학수첩 리틀북 / 2010년 7월
평점 :
품절


 일단 '반지의 제왕' 등 장황한 구성이나 보통 판타지에서 자주 묘사되는 격렬한 전투를 기대한다면 틀림없이 실망할 것이라고 못을 박겠다. 화려한 액션과 반전을 생각하고 책을 들춰봤던 본인도 뒤통수 맞은 격이 되어버렸다. 쓸모없는 기대는 실망을 불러오게 된다는 세상의 법칙을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되었달까. 말 그대로 이 책의 반전은 반전이 있을 법한데 반전이 없다는 점이다. 살리에티의 정체와 템플기사단 전투의 떡밥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본인으로서는 그 떡밥이 반전으로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흥미진진한 전개였다. 템플기사단과 현자들, 수많은 에너그램과 기호들에 절묘하게 숨겨져 있는 의미들은 중세 연금술 시대에 미쳐있는 독자들을 열광하게 할 것이다. 특히 그림들을 직접 책에 붙여놓은 점은 나름 흥미가 있었다. 소년 그림포와 같이 에너그램을 추리하는 과정이 의외로 재미있었다. 몇 개는 맞추기도 했지만 결국 다음 장을 들춰볼 때까지 맞추지 못한 에너그램들도 있었다. 말하면 스포일러가 되므로 이 쯤에서 이야기는 이쯤 생략하기로 하고. 

 1권에서 그림포가 묵게 되는 수도원에 대한 설명이 너무나 생생해서 인상에 깊이 남았다. 기사단에 대한 환멸로 인해 40년을 수도원 서기로 종사하는 늙은 수사에 대한 이야기, 작지만 여러가지 비밀들이 숨겨져 있는 수도원 건물,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서 명상만 하는 수사에 대한 이야기들은 본인이 상당히 좋아하는 분위기였다. 게다가 꽤나 세심한 묘사설명 덕분에 머릿속에서 이미지를 그려가면서 읽는 게 가능했다. 좀 더 어둡고 묵직한 이야기였다면 더 재미있게 읽었을 것이다. 살리에티와 마상시합에 대한 이야기보다 더 좋은 걸 보면 내가 그닥 전투적인 소설엔 땡기지 않는지도? 

 2권에서는 너무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지 않을까 잔뜩 긴장했지만, 일단 책이 얇은 만큼 핵심인물이 많지 않아서 안심이었다. 덕분에 인물들을 탐구할 시간은 대폭 줄어들었고, 작가가 설정한 여러가지 그림과 기호들이 돋보인다. 이쯤에서부터 에너그램과 수수께끼가 엄청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너무나 재미있어서 그림포 일행의 모험담이 뭉텅뭉텅 생략되어 나가는 게 안타까울 정도이다. 하긴 여기서 에너그램을 더 만들어 달라고 조르면 불쌍한 작가의 뇌가 터져나오겠지... 아이도르 빌비쿰의 책에서 발견한 글을 그림포가 회상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감동의 한 장면이었다. 아마 이 글을 쓰는 작가에게도 그렇지 않았을까 싶다. 책을 다 끝냈다는 안도감이랄까(?) 개인이 머리를 짜내면서 개발해냈다고 가정하면 나름 기발한 에너그램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성배도 안 나온 기사도 이야기이지만, 전투도 간략하게 등장하는 짧은 판타지책이지만, 해피엔딩을 짐작할 수 있는 전형적인 선남선녀 이야기가 살짝 거슬리지만, 본인은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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