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과의 춤 1 얼음과 불의 노래 5
조지 R. R. 마틴 지음, 서계인 옮김 / 은행나무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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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당신 속의 어린애를 죽이십시오, 존 스노우. 이제 우리에게 겨울이 거의 닥쳤습니다. 당신 속의 어린애를 죽이고 어른이 태어나게 하십시오." - p. 218

 

 


존 스노우 역할을 맡은 배우와 대너리스 타르가르옌 역할을 맡은 배우가 사귄다는 소문이 쫙 깔렸다.

왕좌의 게임에서 승자가 누가 될지는 몰라도 인생에서 진정한 승자는 존 스노우...

저런 여자의 이마에 키스하면 어떤 느낌이 들까... 아흑 ㅠㅠㅠ


 하지만 어쩐지 홍보효과를 노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제 5부 1권에서부터 존 스노우와 대너리스 타르가르옌을 중점으로 세우기 때문이다. 물론 티리온도 많이 나오긴 하지만 이 인물은 원래부터 작가가 개인적으로 편애하는 캐릭터이니... 그냥 캐릭터간의 밸런스는 포기하기로 하자. ㅋ 4부에서 라니스터 가문을 풍지박산 내버리고 잠적을 했기 때문에 그동안 나오지 않았었는데, 밑천이 어디까지인지 모를 환관 바리스의 도움으로 간신히 살아난 것으로 나온다. 그나마도 창녀촌에 가서 지 아내를 찾다가 왕비의 부하한테 잡혀 다시 라니스터 가로 돌아가는 느낌이지만, 아무튼 아직까진 멀쩡히 강을 누비고 다닌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작가는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를 부시고 멘탈붕괴시키고 괴롭히는 사디스트적인 취미가 있는가 보다...

 존 스노우는 자칭 왕이라 주장하는 영주 스타니스와 같이 있지만 꽤나 고전하는 듯하다. 그나마 양파 기사인 다보스가 그의 이성을 찾아주면서 좀 나아지는가 했더니, 그런 중요한 놈을 대뜸 사신으로 보내버리면서 문제가 심각해진다. (어쩌면 병사들이 열폭하고 스타니스는 뒤에서 그 상황을 존 스노우가 처리하도록 방관하는 건지도 모르지만. 전에 다보스에게 그랬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이 무슨 욕을 하든 잘 참아내는 게 기특하긴 한데, 워낙 스타크 가문에서 천대받아와서 성격이 소심해진 게 눈에 확연히 보인다. 여태까지 이그리트와 샘이 잘 받쳐줘서 로드커맨더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보는데, 이그리트는 죽고 샘까지 먼 곳으로 보내버렸으니 앞으로도 그 지위를 유지할 수 있을지 걱정된다. 

 

 

좋은 소문이던 안 좋은 소문이던간에

이 소설에서 타르가르옌 가문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가 없다.


 좋은 소문은 어쨌던간에 타르가르옌 가문 중 한 인물이 정복왕이었다는 사실이다. 살짝 알렉산더의 이미지를 따온 느낌이 나기도 하다. 지금은 타르가르옌 가문이 쫄딱 망한 상태이지만 그 후손을 어떻게든 '가지기만 하면' 왕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듯하다. 게다가 대너리스 타르가르옌이 여자인 까닭에, 그녀와 혼인하여 왕좌를 얻으려는 사람이 줄을 잇는다. 사실 그런 상황이라면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처럼 결혼을 거부하는 것도 왕좌를 얻는 하나의 방법인데, 대너리스는 노예제도 철폐에 너무 빠져버려서 철왕좌에 앉는 것마저 사실상 포기해버렸다;;; 자신은 끝내 인정하지 않으려 하지만, 드래곤 세 마리를 통제하지 못하는 것도 또 하나의 이유이다. 아무튼 반란을 며칠동안 막는 것을 조건으로 해서 덜컥 맘에 들지 않는 남자와 결혼약속까지 해버리는 걸 보면, 여러모로 궁지에 몰린 듯한 이미지이다. 사실 이 소설 자체가 여러모로 여성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이 정도로 대너리스의 성격을 악화시켜버릴 줄은 몰랐다. 이 책 마지막에 가서야 드래곤을 통제해야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간신히 깨달은 듯한데, 어떻게 행동할지 기대되는 바이다.

 

김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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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 단편소설 전집
버지니아 울프 지음, 유진 옮김 / 하늘연못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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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는 거침없이 이야기했다. 똑바로 쳐다보며 웃었다. 파리의 날개를 잡아 뜯어버렸다. 능숙하고 힘센 손으로 파리의 등에서 날개를 잡아뜯는 것을 그녀는 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보았다는 것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러나 교회들과 아파트들과 의회를 떠올리면서 그녀는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몸을 움츠리며 그녀의 날개를 등에 납작하게 접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하지만 왜 그래야 한단 말인가. - p. 258

 



음... 이미 나 빼곤 버지니아 울프 팬들은 다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동인출판사에서 버지니아 울프 학회의 사람들을 다 모아서 전격적으로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을 해부했던 적이 있다.

근데 거기서도 모잘라서 2탄이 나왔다고 한다.

불행하게도 속초의 도서관에서는 이 책이 없다고 한다... 사야겠다 쿠소 ㅠㅠㅠㅠㅠㅠ


 영미문학을 전공했거나 혹은 아마추어 덕후들이 반드시 팬이 되어 스토커처럼 그들의 문학 뒤를 졸졸 쫓을 수밖에 없는 작가들이 몇 사람 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버지니아 울프이다. 사실 버지니아 울프 이전에 많은 사람들이 '더블린 사람들'을 쓴 제임스 조이스를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사실 나도 그랬다. 사실 그처럼 강렬하고 인상적인 소설을 쓰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나서도 계속 읽게 되는 소설은 사실상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패턴은 이렇다. 필수전공으로 그녀의 장편소설 중 대표작인 '등대'나 '세월'을 꾸벅꾸벅 졸아가면서 공부한다. 졸업하고 나서도 가끔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을 생각하게 된다. (여성이라면 누구나 그럴 것이라 생각된다. 사실상 그녀가 살았던 시대와 우리가 살았던 시대 사이에서 여성의 차별은 그닥 나아진 게 없으니까. 이런 상황을 버지니아 울프는 어떤 식으로 묘사했을까?) 그리고 버지니아 울프의 단편소설을 한 번 살펴보다가 그녀의 파격적인 문체와 설명에 매료된다. 



이것도 아마 영문학도 외엔 아는 사람이 없겠지만,

요즘 유행하는(?) 영국 음식 드립의 원조는 사실 버지니아 울프이다,

그녀는 '등대로'라는 장편소설과 '자기만의 방'이라는 에세이에서 영국 음식이 맛없음을 인정하면서,

그 원인을 우유 등의 신선도가 매우 떨어지기 때문이라 지적한다. 과연...? 


 어쩌다가 이야기가 이렇게 진행됐지(...) 아무튼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은 단편에서 그 진정한 가치가 있다고 나는 말해주고 싶다. 그녀의 여느 장편소설과 달리 단편소설은 그녀의 사는 이야기를 액면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게다가 어떤 단편소설에서 등장했던 사람이 이후 다른 단편소설에서 출연하는 경우도 있어서 옴니버스 이야기같은 인상도 준다. 장편 <댈러웨이 부인>의 초고로 보이는 단편들도 있으니 비교하면서 읽어도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유산>이라거나 <래핀과 래피노바> 같은 단편소설들은 몇 번을 읽어봐도 신선한 충격을 준다.

 

김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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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잔해를 줍다
제스민 워드 지음, 황근하 옮김 / 은행나무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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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부아 소바주의 거친 생명들은 그러나 그들을 아랑곳하지 않는다.
식물들은 씨를 뿌리며 그렇게 또 한 해를 살아간다.- p. 179

 



마치 소설을 그대로 재현해낸 듯한 사진이다.

가운데의 소녀가 흑인이었다면 말이다.


 소설 속 소녀는 피임이나 저항하는 법을 제대로 깨우치지도 못한 채 오빠의 친구들 중 일부에게 강간을 당한다. 그리고 마침내는 임신하게 된다. 주인공은 아이의 아버지가 어느 사람인지 제대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녀를 여성의 입장에서 보호해 줄 어머니는 오래 전 돌아가셨고, 그녀의 집은 찢어지게 가난하다. 그녀는 자신이 언제부터 임신했는지 확인도 하지 못한 채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을 관망하고 있는 중. 오빠들은 그 남자와 결혼하도록 강제시킬 수도, 무력을 행사할 수도 없다. 장남은 농구대회에 나가고 싶은 자신의 열망 때문에 에쉬의 상태에 대해 어렴풋이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듯하다. 결국 종잡을 수 없는 거친 성격의 차남 스기타 때문에 그녀의 진실이 폭로되지만, 아버지는 순간적으로 분노에 휩싸여 그녀를 카트리나 한복판으로 밀어버린다. 사실 그녀가 임신을 맨 처음 깨닫기 전부터, 카트리나의 대비에 매우 신경을 곤두세우는 아버지와 그에게 휘둘려서 명령에 복종하는 오빠들과 아직 철부지라서 이런저런 말썽을 부리는 남동생 주니어 때문에 정신이 혼비백산하다. 



사실상 힘도 재력도 깡도 없는 주인공은 아기 아버지가 딴 여자와 자기 눈앞에서 쎄쎄쎄를 해도 메데이아처럼 깽판을 쳐놓을 여유조차도 없단 이야기다.

사실 요즘엔 요한묵시록같은 재앙이 닥쳐도 성경에서 나오는 것처럼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이 비슷한 강도의 재난을 겪을 순 없을 것이다.

둘 다 슬픈 현실이다...


 스토리는 상당히 잘 짜여져있다. 하지만 이게 허구가 아니라 저자의 실제 이야기에 기반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인지 재난이 일어난 이후부터는 결말이 어수선하다. 카트리나를 여성화하고 주인공을 여성으로 만들어 메데이아라는 신화 속 주인공을 중심으로 통일시키려 했던 건 이해하겠다. 하지만 주인공은 결국 메데이아가 되지 않고 다른 길을 선택했다. 아무래도 강아지들을 구하기 위해 카트리나 속으로 몸을 던진 차이나에 그녀를 비유하려 한 것 같은데, 그에 대한 또렷한 메시지가 하나도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지막에 카트리나가 일으킨 재난에 꽃혀서 그 비유를 깜빡한 듯하다. 이것저것 사회적인 메시지를 넣을 궁리를 하는 것도 좋지만, 적어도 마지막엔 이 책의 중심을 이루는 한 가지 메시지만을 또렷하게 넣었어야 했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그 메시지는 '무슨 일을 겪더라도 마지막 일격만은 내리지 말고 살아가야 한다. 반드시 때는 온다.'인 것 같고.

 최근 재난영화가 상당히 많이 상영되는데, 특히 토네이도라거나 바람에 의한 재난영화가 참 많다. 그런데 대부분 줄거리를 대충 훑어보면 알멩이는 참 없어보이더라. 시각으로 보는 것보다 덜하겠지만 이 책은 스릴감도 있고 내용도 꽤 알차니 굳이 재난문학을 보고 싶다면 이 책을 보는 걸 추천한다.

 

김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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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기 5 - 대산세계문학총서 025 대산세계문학총서 25
오승은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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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청님들, 삼청님들! 내 말 좀 들어보소. 머나먼 이곳까지 와서 요괴 정령을 때려잡는 게 버릇이 되었소. 제사 음식을 좀 얻어먹으려 해도 평안히 자리잡고 앉을 데가 없구려. 그래서 세 분 어르신들의 자리를 빌려 조금만 쉬었다 가려 하오.
삼청님들은 그 자리에 오래 앉아 계셨으니, 잠시 동안 이 지저분한 뒷간에 들어가 계시구려.
당신들은 여느 때도 집에서 궁색한 것 하나 없이 잘 잡숫고 청정 도사 노릇을 해오셨으니, 오늘은 다소 더러운 제물을 자셔야 하는 운수를 면치 못하시고, 냄새 지독한 원시천존, 영보도군, 태상노군 노릇도 한번쯤 해보시구려!- p. 156

 


 


이전에 4권 리뷰를 쓸 때 중국에서도 서유기를 서브컬쳐화하려 한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실상은 등장인물들이 훈남으로 편집되어 나온 최유기가 더 인기를 끌었지만 중국에서도 서유기를 대중문화 속으로 끌어오기 위해 제법 노력을 하긴 했었다.

그 중에 하나 그럴싸한게 서유기지대요천궁이라는 이 영화인데, 제법 특촬물같이 생겼고(...)

중국의 내노라하는 영화배우는 총출동시킨 3D 영화이다. 2014년에 속편도 나온다고 함.


 아무튼 영화 포스터를 보면 마치 주인공이 한 명만 등장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온통 손오공의 얼굴로 도배가 되어있다. 사실 돌에서 영기를 받고 태어난 출생과정도 있고 천궁에 가서 받아먹은 것도 수련받은 것도 많은지라... 그는 요컨대 불경을 가지러 가는 삼장 팀 중 그 어느 누구보다도 큰 비중을 차지하는 먼치킨이다. 게다가 천궁에서 악명을 떨쳐 유명인사가 된 지라 말 한마디만 척척 하면 인맥동원을 할 수 있으니 소설을 보다보면 그를 매우 부러워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설정상으로 손오공 혼자 여행할 수 없는 게 사실이다. 이전에도 오공이 근두운 하나면 쏜살같이 갔다올 수 있을 것이라 불평을 해본 적 있지만 천궁의 높으신 분들이 만류하면서 이야기했던 게 있다. 첫번째로 삼장과 그 일행 3명이 모두 갔다와야 하며, 두번째로 도보여행을 하면서 온갖 시련을 겪고 성숙해져야 불경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손오공은 5권에서는 인신공양을 해야 하는 마을 주민들을 침착하게 구조하고 사이비교에 빠져 정신을 못 차리는 왕에게 따끔하게 한 소리 하는 등, 촐랑거리는 이미지에서 벗어나 제법 성숙한 모습을 보인다. (밥을 훔칠 때랑 마지막에 기술 선택을 잘못해서 적에게 무기를 바치다시피 빼앗긴 건 제외하고;;;)

 특히 불교를 탄압하는 사이비교를 농락할 때의 행자들이 행동하는 장면은 꽤 재미있었다. 비록 불교가 참된 종교이고 도교는 아니라는 태도가 문제가 되긴 하지만 현대에서 이렇게 간단하게 사이비교의 정체를 까발리고 농락할 수 있다면 얼마나 재밌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딱히 구X파라던가 X원파를 이야기하는 건 아닐지도?



다음엔 최유기에 대해서 좀 이야기해보려 한다.

강 속에 살고 있는 괴물을 잡기 위해서 관세음보살이 머리칼도 풀어헤치고 옷도 반 정도 헐벗은 채로 과수원에 들어가 그물을 짰다는데 언뜻 이런 모습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건 몰라도 최유기는 관세음보살의 모습이 정말 맘에 든다.


김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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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그린게이블즈 빨강머리 앤-03 ANNE 그린게이블즈 빨강머리 앤 3
루시 M. 몽고메리 지음, 김유경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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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누구나 내가 길버트와 결혼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걸까요?"
앤은 토라졌다.
"그건 두 사람이 서로를 위해 그렇게 되도록 태어났기 때문이에요. 그 때문이죠. 앤, 그렇게 기를 쓰며 부정할 것 없어요. 그게 사실이니까요."- p. 230

 


 


빨강머리 앤 만화에서만 보는 말라깽이 주근깨 소녀 앤만 생각하지 마시라.

이렇게 놀랍게 아름다운 얼굴에 나이스 바디(?)로 성장한 모습의 앤도 있다.

저기 멀리서 얼쩡거리는 남자는 당연히 길버트 블라이스겠지 ㅋㅋㅋ


 아마도 학문을 좀 더 배우고 싶지만 남들의 이목도 신경쓰는 대부분의 평범한 지식인 여성들의 고민이 이 앤에게 담겨있었으리라 생각해본다. 풍부한 상상력과 이해심 그리고 언어력을 갖춘 남자를 원하는데 좀처럼 그에 맞는 사람은 접근하지 않고 왠 어중이떠중이들이 거래를 제시하는 것처럼 '난 돈이 많아 그러니 나랑 결혼하지 않겠는가' 이딴 식으로 프로포즈 하지 않나. 게다가 모처럼 자신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나타났는데 본능은 그 사람에게 속박되길 거부하는 경우도 있다. 요컨대 연애하고 있고 좋아하긴 하는데 결혼은 왠지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드는 사람, 겪어본 적 있는가? 앤은 그런 남자도 겪어본다. 그녀는 슬슬 지쳐간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지만 '검은 눈동자를 지닌 지나치지 않게 나쁜 남자'는 나타나지 않고, 사람들은 그녀에게 눈을 조금만 낮춰보라 권한다. 물론 자신의 옆을 오랫동안 얼쩡거리는 착한 성품의 길버트 블라이스가 있지만, 그는 정확하게 현실 세계 속에서 존재하는 인물이며 단지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앤의 상상력을 귀담아 들어줄 뿐이다. 결국 길버트가 타지에서의 대학생활로 건강을 해치고 앓아눕게 되자, 그녀는 길버트를 좋아하는 마음을 인정하고 그와 결혼한다. 길버트의 상상력 부족을 눈감아주기로 한 것이다.

 물론 사람의 인연은 사람으로 인해 연결되고 끊어지기도 하지만, 난 결혼에 있어서 결정적인 운명이 있다는 주장을 믿는 편이다. 그런 남녀는(물론 남남이나 여여일 수도 있다.)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많이 받기도 하고, 두 사람이 연결될 수 있는 특유의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아무리 인터넷이 발전되더라도 여전히 특정한 사람과 옷깃 한 번 스치기도 미묘하게 힘든 세상이다. 결국 철벽같던 앤의 이상형 때문에 힘들게 돌아서 갔지만 결국 앤과 길버트는 연애를 시작하게 된다. 앤이 결혼해서 자식을 다섯이나 낳은 후를 그린 외전도 두편 있던데, 모두 그런식의 운명적인 만남에 대한 이야기이다. 작년, 선택의 갈림길에 서기 전부터 '결국 만나게 될 사람은 만나게 된다'라고 우리 엄마는 누누히 나에게 강조해왔었다. 이 소설의 작가도 우리 엄마와 생각이 같은 듯하다.

 빨강머리 앤의 이야기는 대부분 조그마한 시골마을 애번리에서 일어나는 일을 담고 있지만, 이 3권에선 프린스 에드워드 섬을 배경으로 다루고 있다. 루시 모드 몽고메리 작가는 여기에서 대학을 다녔는데, 이상하게도 캐번디쉬 공동묘지와 공원을 빼고는 그 경치좋은 섬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녀가 그렇게나 좋아했던 캐번디쉬 공동묘지마저 완전히 '몽고메리의 무덤'으로 이름이 바뀌어 관광명소가 되었으니, 몽고메리 씨는 무덤 속에서도 불편함이 이만저만이 아니지 않을까 싶다;;;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나 뿐일까.


김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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