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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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나는 안 믿어요. 하지만 우리 관주는 믿었어요."

 

  

흥미로운 점이 세 가지가 있었다.

비극적인 전개는 제목부터 안녕 절망선생이 생각나면서 충분히 예견되었다. 

 

 하나는 이 단편에 출현하는 여성들이 대부분 술을 마시면서 담배도 피웠다는 점이다. 안 피우는 사람은 딱 실내화 한켤레에서 미모로 강남을 주름잡는 사모님 두 사람이었는데 둘 다 상당히 비극적인 전개로 끝났다. 한 명은 대부분 두 집 살림을 한다고 소문난 비행기 조종사와 결혼해서 아이 없이 살고 있고, 또 하나는 성병에 걸렸다는 암시로. 주변에 오로지 술에 빠져 사는 분과 성병으로 자궁을 다 들어냈다는 소문이 심심찮게 들려오는 이상 이 이야기도 남 일 같지 않다;;; 책을 유심히 보다보면 술도 적당히, 담배도 적당히, 연애도 적당히 해 본 독신 여주인공이 그나마 행복하게 오래 사는 듯하다는 느낌이 든다. (혹은 소설 중 하나인 이모에서처럼 그런 여자에게 도움을 받아서 살아가기도 한다.) 다들 하나에만 중독되지 말고 골고루 해보며 삽시다.

 두 번째는 집요하게 작품들을 이어가지만 자세한 언급을 피한다는 점이다. 비자나무 숲이란 소설집의 소설 중 하나인 길모퉁이라는 책에서 빚 때문에 위기에 몰리는 미용사 여자가 등장하는데, 실내화 한켤레에서 다시 그 미용사가 등장한다. 귀퉁이를 연상시키는 단어(원시)와 거울에 거꾸로 비치는 상도 다시 나와서 묘한 느낌을 자아낸다. 하지만 미용실은 길모퉁이 미용실보다 더 커진 느낌이고, 비자나무 숲을 보지 않았다면 전혀 그 친숙한 느낌을 알아보지 못할만큼 말을 아낀다. 제주도가 약간 우리나라 내의 일본 분위기를 풍긴다던 누군가의 말이 생각났다. 안녕 주정뱅이에서도 그런데서 미약하지만 일본 작풍의 냄새가 난다. 예를 들어서 일본의 이루마 히토마라는 작가가 있는데, 그가 쓰는 소설은 순문학 라노벨 느낌으로 계속 작품들을 연관지으려 한다. 예를 들어 이 블로그에서도 소개한 거짓말쟁이 미군과 고장난 마짱이라는 책에서 소녀와 탐정 소년이 아주 잠깐 나와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를 나누는데, 나중에 그들을 주인공으로 한 단편소설이 나온다. 그리고 그 소설을 토대로 또 다른 장편소설을 쓰기도 하고...

 비자나무 숲에서 가지 않은 길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을 그렸다면 안녕 주정뱅이에서는 가기 싫은 자리에 억지로 끌려가는 사람들을 그렸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선 비자나무 숲을 그려냈던 시절의 작가보다 어딘가 조금 더 성숙해 보인다고 할까. 그러나 확실히 그 날뛰는 비자나무 숲을 읽지 않는다면 이야기가 좀 루즈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삼인행에서만 노골적인 분위기가 드러날 뿐이고, 나머지는 마치 제임스 조이스마냥 결정적인 장면에서 말을 숨기고 감춘다. 그러면서 그 모든 걸 '비밀스러운 여성'이란 단어로 얼버무릴 참인 듯한데, 사실 남성들 중에서도 그런 여우같은 인간들 꽤 있다. 비자나무 숲 중에서 꽃잎 속 응달에 나온 것과 같은 민첩한 인간들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는데, 왜인진 모르겠지만 이 소설에선 등장하질 않는다. 술을 마시고 나서 둔해진 주인공들이 그런 부류들을 제대로 캐치해내지 못한 건지. 토미노 감독처럼 나이가 드시니 약해지신 건지. 작가가 혹시 가까운 사람에게서 '넌 너무 예민하단 말야' 같은 지적을 듣고 수그러든 건지. 다음 작품은 이보다 조금 더 기민해졌음 하는 바이다. 나는 그녀의 자기비하가 아니라 그 안에 숨겨진 그녀의 날뜀과 노골적인 예민함이 좋았다. 어쩌면 내 성격이 날뛰다보니 그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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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나무 숲
권여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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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생리란 여자 노릇이라기보다 여자 노릇의 실패한 흔적이지만 어쨌든 여자만이 실패할 수 있는 노릇이다.

 

 

 

뭐든지 그냥 스치듯이 지나가면서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그곳에 깊이 들어가지 않는 걸 나는 제일 좋아한다. 그러길 잘했다고 불현듯 소름돋게 느끼는 때가 많다. 인간관계라던가 종교라던가 학교라던가 전애인이라던가.

 

 여행을 자주 하는 사람들은, 사실 목줄이 매여있어서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일종의 발버둥을 치고 있는게 아닐까.

 난 해외여행을 하지 않는다.

 

 

 내 안에는 내가 너무도 많아서...

 

 이응준 씨가 소설로 호러 시를 썼다면 권여선 씨는 소설로 에세이를 쓰는 듯한 느낌을 준다.
 뭔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명문장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가슴에 큥 박히는? 그런 짧은 문장을 하나 내주고 스토리를 전개한다.

 가볍게 보면 좋긴 좋은데 이런 사람이 소설집이 아닌 장편소설도 썼다니 도대체 어떻게 썼을지 감이 안 잡힌다. 처음 팔도기획에선 가볍고 약간 몽환적인 스토리로 접근하더니 은반지에서 갑자기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하면서 소녀의 기도로 갑자기 충격적인 고어를 쾅 때려버리더니 진짜 진짜 좋아해에서 잔잔한 추억같은 회상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막 나가는 인물들과 그로 인해 희생당하는 인물들이 많이 그려져 있지만 소설가는 어디까지나 귀퉁이에서 이 둘을 관망하는 제3자 같은 느낌이다. 단편 소설집인데도 그런 화자를 최소 3명 이상은 본 듯하다. 그러면서도 자기 주장이 강해서 비린 맛은 죽어도 싫어하고, 조금만 주의가 흐트러지면 입술을 고집스럽게 꽉 깨물어버리며 조금도 상냥스러운 표정을 지을 줄 모르는 20대 후반의 소녀. 65년생이라는데 어쩜 이렇게 지금 시대의 청춘들 모습을 잘 담아냈는지 경탄스럽다. 책을 읽는 내내 그런 모습이 머리에서 지워질 줄 몰랐다. 아마 이 책이 쓰여지고 소설가가 고등학생 시절과 대학시절을 하나하나 거론하기 시작했을 때, 동창들이 다소 놀라워했으리라 생각된다. 한편으로는 그렇게나 시간이 지났으니 이런 극단적인 이야기를 담담히 꺼낼 수 있는 건가 싶기도 하다.

 한편으로 남자들은 다 잡은 물고기가 있으면 도망갈 궁리밖에 하지 못하나 싶어 씁쓸하기도 했다. 자신이 버림받는 건 몹시 싫어하고 남이 자신과는 다른 사람을 만나는 데엔 예민한 주제에, 자신이 남을 나몰라라 내팽개치고 바람핀 데 대해서 무신경한 건 남녀 모두에게 포함되지만. 어딘가 떠나고 싶다고 지겹도록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하면서도 정작 판을 차려주면 끝내 가지 못한다. 기억은 얼마든지 조작될 수 있다. 사람은 소나무가 될 수 없고 바다가 될 수 없고 꽃이 될 수 없다. 간신히 쥐새끼 신세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다행일까.

 오랜만에 이번엔 소설 끝에 있는 평론을 읽지 않았다. 그만큼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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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
정용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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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살았던 걸까. 저 글들을 통해 증명하고 싶었던 것은 뭐였을까. 아무것도 모르겠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 부질없구나.

 

 

  

사실 주인공 요나랑 마리가 사랑하는 장면은 무지 짤막하지만 이 소설을 설명하는 데 이 이상 적절한 짤방이 없구나.

아스카: 이 바보 신지! 내가 얼마나 널 열심히 구했는데! 

 

 지금 이 시대에 모두가 망각하고 있는 것 같지만 구원과 힐링이란 단어는 사실 종교에 근원한다. 구분하기가 매우 힘들지만 구원은 그리스도교가 꿈꾸던 '메시아' 즉 인류보완계획으로 압축되며, 힐링은 마음 들여다보기와 거울 닦기를 강조하는 불교에서 유래한다. 이 문장만 써도 왠지 또 종교를 믿는 인간들이 우르르 달려들어서 돌멩이를 던져댈 것 같으니 일단 이 정도로 하겠다(...) 이 책은 둘 다 다루려고 무진 애를 썼는데, 구원 쪽에 관련해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고 있다. 특히 '창세기'에 집중하고 있는 점이 굉장히 재밌다. 나도 일단 가톨릭교라 후자에 집중해서 보았다.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서 자제하겠지만 이 책에 대한 평가들에 대해서 반박할 게 몇 가지 있다. 일단 이 책에 등장하는 평론가 씨가 소설 후반 부분에 '종말'이란 단어 한 번 나온 거 가지고 필이 꽂혀서 계속 종말론 이야기를 하고 계시지만 이 책에서 중요한 메시지는 요한계시록이 아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흔하게 비교하는 1984 소설하고도 굉장히 다르다. 1984에서의 권력자 오브라이언은 굉장히 매혹적이었지만 이 소설에서 나오는 권력자들은 학자 외엔 아무것도 아니다. 어찌 생각해보면 굉장히 한국적인 비극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오브라이언보다는 대우를 말아먹은 우리나라 정치인 이한구와 비교할 수 있을 것 같으니 말이다.

 우리나라 자체가 소설을 그다지 읽지 않아서 그렇기도 하고 지금 사회 현상이 갈수록 말도 못하게 정치랑 얽혀들어가서 그렇기도 하지만, 이 책은 사실 이쪽 계열에서는 굉장히 많은 논란이 일고 있는 문제작이다.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의 서평들을 보면 알 수 있는데, 대부분은 혼란스러운 심정을 나타내며 짧게 끝나고, 소수는 길게 우리나라의 디스토피아화를 피력한다. 정말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오는데, 사실 이는 나같이 포괄적인 덕후가 아니면 소설 속에서 나온 노인처럼 백내장 걸리지 않은 한쪽 눈으로밖에 볼 수 없는 장르이긴 하겠다. 종교나 애니메이션이나 장르소설이나 둘 다 깊이 파고들어가지 않아서 문제지만;

 어제도 이에 대해서 글을 썼지만 오늘도 똑같은 말을 하겠다. 정치에서 '인간'으로 구원자를 찾지 마라. 정치계는 인간보다는 그 인간의 뿌리, 즉 출신에 강하게 좌우되는 분야이다. 차라리 그 인간이 소속되어 있는 무리의 이데올로기와 공약, 철학, 역사에 주목하라. 그리고 사실상 현실의 선견자는 일을 저질러놓는 트러블 메이커에 가깝다. 그렇기에 자신이 내뱉은 말과 벌여놓은 약속들의 파장을 수습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인간은 절대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 그럼 신은 인간을 구원할 수 있냐고? 신은 이미 위기가 없는 절대자인데 뭐 하러 인간을 구원하겠나? 인간이 십이지장충을 구원할 수 있는가? 나에게 신이란 이런 존재다. TV를 키면 방대한 인간들이 나오는데, 그 인간 하나하나가 채널을 이루는 거다. 신은 울다가 웃다가 재미가 없어지면 재미있었던 몇몇 채널을 킵해두고 다른 쓸모없는 채널들을 하나하나 '소멸'시키는 거다.
 
 그러나 지워버린 것들 중 몇몇 채널들은 가끔 아쉬움을 남기며 머릿속에 떠오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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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의 명언 악당의 명언
손호성 지음 / 아르고나인미디어그룹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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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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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스트 Axt 2015.7.8 - 창간호 악스트 Axt
악스트 편집부 엮음 / 은행나무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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