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꿈들
박기범 지음, 김종숙 그림 / 낮은산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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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에 나오는 심각한 얼굴의 사람들은
다음 주면 공격을 시작할 거라고,
달이 차오르는 날 폭격을 할 거라고,
그 전에 항복을 하라고 이 나라의 독재자에게
더 심각한 얼굴로, 더 무서운 말들을
쏟아 냈습니다.

  

그냥 출간행사겠지 싶어서 설렁설렁 서점에 갔다가 깜짝 놀랐다.

 

 일단 서점에 걸려있는 유화가 압도적이었다. 일단 무거운 그림이었고, 굉장히 이국적이었다. 나중에 읽으면서 이라크가 배경임을 알게 되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이 책의 그림을 그리신 김종숙 씨는 잡일(덕장)을 하시며 담배, 소주, 맥심 커피만 있음 언제든지 작업을 하시는 분이셨다 한다. 그러다 현재는 문화재보수기술자로 일하고 계신 저자 박기범 씨를 만났고, 이라크에서 10년간 살면서 기록한 것들을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만다. 그래서 글을 쓰라고 권고하고, 마음의 상처에도 불구하고 힘들게 글을 쓰기로 결심한 저자가 이라크에서 찍은 어마어마한 양의 사진과 책자와 영화와 다큐를 보여주셨다 한다. 대부분 그 자료들을 참조해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놀라운 점은 시장에서 포탄이 떨어져 아기를 안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화가의 상상력에서 나온 그림이라는 사실이었다. (사실 나는 바위를 감싸고 흐르는 강인 줄만 알고 있었는데) 힘이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권정생 씨의 글에도 삽화를 그리셨던데, 아무래도 진지한 그림을 좀 더 잘 그리시는 듯하여 난 이 그림책으로 김종숙 씨의 그림을 보길 추천하고 싶다.

 

 

  

정의의 용사라는 가면은 얼마나 무서운가.

 그들은 자신의 아이들을 지키고 싶다 이야기하지만 그들이 적으로 지정하는 '지독한 악당이 사는 나라'의 아이들도 공차기를 좋아하고, 동물을 좋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령을 내리는 사람들은 독재자가 있는 나라의 돈과 자원이 탐나서 그들의 잘못된 역사를 고쳐주는 척 하면서 전쟁을 일으킨다. 갖가지 사연이 있는 사람들이 전쟁에 참가하고,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미국 남성은 총을 들고 아이들을 쏘면서 점차 죄책감에 망가져간다. 한편, 가난하지만 평화롭게 사는 이라크 사람들은 전에 벌어진 몇 번의 전쟁 경험으로 인해 내국에선 어디로도 도망칠 곳이 없다는 걸 잘 알고 그렇다고 해외로 갈 돈도 없기에 자신이 살던 곳에서 그저 벌벌 떨면서 어제 같은 날이 이어지기만을 바란다. 평범하게 살기란 너무 어렵다. 아이가 피투성이가 된 채로 가족들을 도와줄 것을 이웃 사람들에게 청하는 장면에선 마음이 짠했다. 그러나 그들을 도와줄 사람이 있다는 게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다. 편의점에서 알바를 하던 여성은 피투성이가 되어 편의점으로 전력질주하는 다른 여성을 보자 본능적으로 문을 잠그고 화장실 가는 척을 했었다. 그리고 그 피투성이 여자는 그녀를 쫓아오던 한 남자에게 잡혀 처참히 죽음을 맞는다. 사실 그 알바하던 여성이 무슨 죄겠는가. 근처의 경찰이 좀 더 제대로 일했다면. 편의점 본사가 알바생과 주변 사람들의 안전을 지킬 궁리를 좀 더 일찍 했더라면. 마치 전쟁과 같이 팍팍한 삶을 사는 자본주의 국가가 우리나라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착잡했다. 마치 좀비물을 보는 듯한 기분도 들었는데, 확실히 좀비 영화를 보고 이야기를 나눌 때 어떤 이는 '저럴 땐 군인이 되는 게 가장 편해'라고 나에게 말했다. 살아남는데엔 편하겠지만 죄책감을 느껴 다시 이라크로 돌아올 때 아이들이 돌을 던진다면, 그 군인의 마음은 편할까? 이라크로 돌아가지 않더라도 마음에 평생 무거운 짐을 지고 사는 건 변하지 않으리라. 군인이 아이들에게 자신은 포탄과 총알을 날렸지 돌을 날리지 않았다고 울부짖을 때는 마음이 짠하다.

 자살 테러에 대해서도 비교적 이해하기 쉽게 이야기해놨다. 부모자식을 잃어서 분노한 사람들이 미국에 반발하여 전쟁을 벌이려 하지만, 착한 사람들은 착한 전쟁이 없다는 걸 알고 있다고 책에서는 주장한다. 전쟁이 불러오는 것은 전쟁 뿐이라는 것이다. 열매가 익을 때까지는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기다릴까? 이는 자연보호와 평화와 좀 더 가난한 사람들이 살기 좋은 세상을 바라는 모든 활동가들의 숙제일 것이다.

 

 

  

책에 담겨진 삽화와 행사장에 걸린 그림을 비교해보니 같은 그림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차이가 났다. 화가는 가격을 조정해야 하는지라 그림의 질을 다 담아내지 못한 점이 아쉽다고 설명했다. 될 수 있으면 이 책도 사고, 전시회도 한 번 가보면 금상첨화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유화를 많이 진열하시는 것 같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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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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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씨발, 벗은 새끼가 잘못이지 우리가 잘못이야? 변태 새끼 잡을 생각은 안 하고 우리한테 반성을 하래. 뭘 반성하라는 거야, 도대체! 내가 벗었어?"

  

몰카에 대해서 소설에 나오는데, 실상 내가 최근 좀 더 눈에 띄는 건 자신이 나오는지 알고 싶으니 몰카 사이트 알려달라고 피해자에게 대놓고 댓글을 다는 일부 몰지각한 여성들 뿐이었다. 이제 이런 거에 대해선 내 이야기 더 이상 하지 않으련다. 82년생 김지영이 이야기하라고 편해진다고 부추기는지 어쩌는지는 몰라도 더이상 이야기해봤자 소문나서 괴로워질 뿐이고 날 알고 난 후의 인간들에 대해 배신감만 느껴질 뿐이고 그렇다. 가해자들은 지네들이 가해자고 내가 피해자라고 생각지도 않을텐데 뭐. 되려 자기네들이 피해자라고 생각하려나. 블로그를 자세히 본 사람들은 뭐 벌써 나에 대해 알 것이다. 내가 성추행 당한 일들이 궁금하다면 블로그 초반 글들을 보라.

 

 작은 홍보대행사에 다니다 출산과 동시에 퇴사했다는 건 나름 김지영으로선 최선을 다했다는 소리고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본다. 아무리 의학이 발달했다 해도 출산은 아시아계 여성들에게는 아직 죽음의 고비이다. 오히려 자연분만하고 직장을 다시 나가려다가 애들 망가지게 하고 애를 키워야 할 어머니 자신도 몸을 다치게 하는 일이 더 한심하다 할 수 있다.

 

 육아의 스타일은 결코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사실 애를 키우려면 남자와 여자가 둘 다 힘써야 하는데, EBS 육아 프로그램이 자꾸 '어머니가 ~해야 한다'라는 말투를 써서 최근 논란이 된 적도 있다. 그 해야 한다는 일도 사실 엄청나게 많아서, 이걸 해야할지 저걸 해야할지, 그것도 안 하면 우리 애가 뒤처질지 몰라 갈등하는 사람들이 많다. 성관계 안 할 것도 아니고 피임이 100% 되는 것도 아닌데 육아는 선택의 문제라고 함부로 말하진 말자. 사실 자본주의 시스템과 엉켜서 이렇게 된 건데, 그렇다고 공산주의로 가서 공동육아를 해도 사람이 욕심이라는 게 있어서 문제가 되는 건 사실이다. 부모들 선택의 과잉에 관한 책들은 많다. 조금만 관심을 두고 검색해도 금방 찾을 수 있다.

 김지영이 친정어머니로 빙의해서 한 말은 옳지만, 아까 전에 식당을 운영한다고 했던 거 같은데 주말엔 더 바쁘실 듯하다. 김지영이 자신의 어머니 흉내를 내면서 정대현에게 했던 말대로, 제사준비 다 하고 점심상 차렸으면 바로 발을 떼서 김지영의 처가로 가는 게 베스트이지 않았을까. 또 사과와 배를 애써 다 깎았는데 배부르다며 거의 손대지 않는 건 뭐다냐 ㅋㅋㅋ 가뜩이나 김지영에게는 남의 집인데 이러니 정을 붙일 수나 있을까? 차라리 명절날은 아무데도 안 가는 게 최고인듯.
 사족을 붙이자면 여성은 출가외인이기 때문에 친정에서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김지영이 그렇게 말했다는 사실을 알면 보통의 경우 꾸중하겠지.

 여자의 적은 여자라고 하기 싫지만 82년생 김지영에서는 왕왕 그런 요소들이 보이는데, 그래도 사람을 탓하지 말고 시스템을 탓하자는 게 주요 내용인가 보다. 예를 들어 아들과 손자밖에 생각 안 하는 김지영 할머니를 보자. 계집질이나 노름 안 해도 백수인데 과연 좋은 남편감일까? 아들이 넷 있어도 그녀를 돌보는 아들은 단 한 명뿐인데 나머지 셋을 그럼 뭐하러 힘들게 낳았단 말인가?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다보면 정신병자가 되기 십상이기 때문에 그녀는 손녀에게 화풀이를 하고 애써 자신의 상황을 긍정적으로 보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왜 자신이 당한 만큼 남에게 갚아주려하는 못된 심보를 지니고 있으며, 자신의 가정에서 평등사회를 만들려고 노력하지 않는가라는 책망은 할 수 있다.

 소설의 흐름은 매끄럽다. 크게 상중하로 구성된 이 소설은 김지영의 빙의 증상, 그렇게 마음이 약해진 계기, 그리고 의사 소견으로 이루어져 있다. 시간과 공간을 다르게 구성하는 건 소설의 특성이다. 소설을 처음보는 사람들이 어려워할 법한 이 구도는 사실 난이도가 있는 소설에서 쓰는 흔한 기법이다. 이 소설에 최대한 문학적인 기법을 부여하려는 조남주 작가의 노력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주석이 짧은 것도 또한 최대한 르포의 느낌을 줄이려 했던 것이라 생각하는데, 차라리 빼면 좋았을걸 싶다. 그러나 소설의 흐름이 매끄럽지 않다 하여 이 소설이 가치가 없는 건 아닌 듯 싶다. 일단 지적한 사람이 있어서 글을 써본다.

 김지영은 확실히 보통 중산층 여성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들어본 현실 여성의 삶이 김지영보다 빡셌으면 빡셌지 덜 빡세지는 않았음을 볼 때, 그리고 그들이 지금도 아무 것도 밝히지 않은 채 숨어살거나 혹은 밝히고 나서 치욕받는 걸 볼 때, 언제나 현실은 픽션을 능가하는 걸 본다. 아마 이것도 82년생 김지영의 의도일 것이다. 김지영이 여성들의 모든 고통을 혼자서 겪으니 불쌍하다는 충격적인 감상을 들었는데, 사실 일반적인 여성들은 이거 다 겪고 자란다. 네 어머니, 네 친구, 네 직장동료, 네 애인, 심지어 니가 길을 갈 때 스쳐지나가는 여성들 모두 김지영과 같거나 보다 더한 시련을 겪고 자랐다. 아직도 그걸 믿지 않거나 외면하는 남성들이 있다니 통탄스럽다. 과거에 비해서 여권은 조금도 신장되지 않았다. 만일 신장되었다면 72짱 혹은 치리짱, 아헤가오 더블피스, 배박이 말박이, 배빵같은 단어를 쓰는 사람들은 왜 처벌받지 않는가. 여혐과 관련된 욕설도 관심있게 찾아봐야 여성이 이 정도로 차별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 않겠는가.

 나는 두발자유화 이전에 교복부터 어떻게 해줬음 하는데 청소년운동권들은 전자를 더 주장하는가 보다. 누구씨 말로는 중학교 때 교복 안 입는 학교를 다녔다고 하니 예외도 있나봄. 근데 여고도 이거랑 만만치 않게 하드했고 심지어 리본을 머리에 매달고 다니다 뺏겨서 항의하다 뺨맞은 여학생도 봤었다. 이쁘게 하고 다녀도 지랄 편하게 하고 다녀도 지랄. 내 발이 지금 군살박히고 발가락이 다 휜 게 중고등학교 때 구두신고 다녀서이다. 일부가 아니라 우리나라 모든 학교에 교복을 근절시켜야 한다고 봄. 평상복으로 계급차이가 난다고 주장하기엔 지금 시대가 너무 많이 변해서 모두들 괜찮은 옷 입고 다니고, 게다가 교복의 폐해가 너무 많다.

 한남들은 다 결혼해서 살면 암덩어리로 변한다는 말이 극히 일부는 개소리이듯이 세상에 좋은 남자가 더 많다는 말도 개소리다. 사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특히 여자는) 배우자가 있거나 애인이 있을테고 그러니 자신에게 억지로 그 말을 세뇌시키듯 되뇌었을 공산이 크다. 그러나 꼭 입밖으로 그런 말을 내뱉어야 했니. 그 말을 듣는 사람 인생이 어찌될 줄 알고. 또 한남과 같이 사는 지 인생은 앞날에 어찌될 줄 알고. 세상에 좋은 남자는 없다. 단지 자신의 기준에 따라 좋은 남자와 나쁜 남자가 나뉠 뿐이지.

 확실히 김지영 씨의 증상은 정신분열증이나 귀신들렸다고 하기는 좀 뭐하고, 다른 여성들에게 감정이입이 너무 잘 되는 상태라고 보면 되겠다. 그 상태를 마치 동화책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듯이 희화화하다보니 시부모에게 친정부모를 소환하는 사태가 벌어졌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여성에게 벌어지는 일들을 희화화하기엔 그 상황이 사회적으로 너무 심각하고, 동시에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코드가 그 해프닝엔 없었다. 1984의 더블씽크나 이갈리아의 딸들의 미러링이 훨씬 더 강력한 건 사실이다. 또한 세계에 대한민국 여성의 현실에 대해 호소하려면 채식주의자처럼 세계에 이슈가 된 우리나라 문화를 공략하던가 하는 기발한 아이디어가 필요하다. 그렇다고 이 소설이 김지영이 무당이 되어 활약하는 이야기도 아니잖는가. 아니, 차라리 그랬으면 좋을 뻔했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정말로 82년생 김지영이 모든 일반 여성들의 마음을 다 안다고 하기엔 불가능하다. 난 사람들에게도 그릇의 크기가 각기 다르다고 믿고, 다들 춥기는 하지만 추위를 견딜 수 있는 한도는 모두 다르다고 믿는다. 정상의 범주를 넘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가상하지만, 사람은 완벽하게 다른 사람의 기분을 알 수 없다. 특히 여성은 편차가 크다고 생각한다. 마치 빈곤 국가에서 불평등이 더 심화되는 것처럼.

 이틀 전에 독서모임하면서 그랬었다.
"위안부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 사람들이 저지른 게 아닙니다. 현재 우리나라가 저지르는 위안부도 있습니다." 여성들은 일반적으로 그런 사회에서 살고 있다.

 단지 이야기하고 싶은 건 니가 힘들다고 해서 마치 다른 사람들은 그보다 덜 겪었어도 안 힘들게 산 마냥 이야기하지 말자는 거다. 근데 리뷰를 보면 자신의 경험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문제는 '나는 이보다 더 힘들었다'라는 태도다. 심지어 남자들도 자신이 김지영보다 더 힘들게 살았었다는 부류들이 있곤 하다. 일단 여성차별은 우리나라 사회에서 너무 일상적인지라 그 단어를 입에 담는 게 새삼스러울 정도이다. 그걸 개선한다면 김지영은 물론 당신과 다른 사람들의 힘듦도 해결된다. 여성이 남성을 성추행하는 문제를 용인하자는 게 아니라, 애초에 그렇게 마음이 비뚤어진 여성이 생겨나는 일을 방지하거나 자연스레 가해자치료를 받게 해주는 사회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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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2
최명희 지음 / 매안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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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어서 굶어 죽으께미 도적질을 했다먼 가련허기나 허제. 지집 밑구녁으다 처박을라고 관공서에 공금을 훔쳐낸 거잉게 가막소를 가도 싸제잉. (...) 아재는 인자 죽으먼 극락왕생허시겠소. 나는 딴 디 가 있을 거잉게, 죽은 담에 안 뵈이그덩 서운타 말으시오."

"상놈 신세 나 하나로도 여한 없응게, 아재 나보고 장개가라, 자식 낳아라, 그런 말씸 허지도 마씨요. 지집 없이도 한 펭상 잘 살랑게요. 보나마나 뻔허제. 나 같은 상놈에 부모없는 떠돌이를 사우로 맞는 집구석은 또 오죽헐 거이며, 그런 집의 딸년의 각시라고 맞어서 자식을 나먼, 그놈이 커서는 내 속 상허는 이런 시상을 또 살 거인디, 무신 웬수로 신세 쳇바꾸를 돈다요......?"

  

메를로 퐁티의 이론으로 여자를 보면 공존으로 여자를 상상할 땐 여자의 형상과 개념 자체가 분리되지 않는데 혼존으로 여자를 상상할 땐 여자의 형상과 개념이 분리되서 자기가 어떻게 막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래서 (일상생활 가능한) 친구 만나면서 소개팅도 해야 하고 최소 소셜에서 여자랑 대화를 하면서 여자를 만나야 하는데 혼자 짱박혀서 미연시하고 야동 보다보면 잘못된 가치관이 적립되고 여자랑 마주치는 것도 불안하고.

 

 물론, 여자를 인신매매하는 경우가 많고 남자를 인신매매하는 건 거의 없다는 전제 하에.

  여성도 사람이다. 여성도 사랑을 느낀다. 남성은 여성에게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꿈꾸다가 죽어도 결국 여자를 만나고 싶어 다른 여성과 영혼 결혼식을 올리는 걸 수락한다. 하지만 여성은 질투에 미쳐 실성해버리고 만다. 자기밖에 못 보는 이기적인 남자를 사랑하는 그 마음을 저주하다 결국 어둠에 마음을 내 줘버리는 것이다. 결국 실성한 여성이 끌어안는 건 자신을 사랑해주는 남자도 이미 죽은 옛사랑도 자신이 낳은 아이도 아니다. 밥통이다. 그것이 어찌 남혐이며, 자기만 먹고 살자는 행위이겠는가. 더이상 사람을 사랑하는 걸 못해먹겠으니 그러지. 다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게 무섭고 너무나 마음이 아픈 것이다. 오죽하면 사리분별있고 교육도 괜찮게 받은 여성이 돈 있는 남자랑 결혼하자고 절규하겠는가. 자신의 심장이 찢어지는 것 같은데, 남자는 버텨나갈 수 있는 게, 멀쩡하게 세상을 다시 살아갈 수 있는 게 너무 분하고 원통한 것이다. 마음만큼 제대로 자리잡기 힘든게 없다지만 작업 못할 여성 너무 쳐다보지 말고, 무엇보다 괴롭히지 마라.

  무튼 근친 NTR 너무 흥미롭게 읽었다. 옛날에도 너무 흥미로워서 영등포 타임스퀘어 커피를 몇 잔씩 동내고 빵을 전멸시켜가며 봤는데 역시 시간이 지나도 사람은 변하지 않는구나 싶다. 문제는 생각보다 무지하게 성적이고 주역 내용이 많으며 메차쿠차스토리라서 독서모임하시는 분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건데... 수위가 이러니 내가 박경리의 토지를 너무 가볍다 생각한 게 아닌가;;;;

 

 

  

달라진 게 하나 있기는 하다. 대략 줄거리는 아내 효원에 첫사랑 강실이에 기생 오유끼까지 해서 강모 하렘월드인데, 옛날엔 효원 편을 들었다면 이제는 오유끼 팬이다. 힘내라 오유끼. 종갓집따위 부숴버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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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1
최명희 지음 / 매안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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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나라가 망했다, 망했다 하지만, 내가 망하지 않는 한 결코 나라는 망하지 않는 것이다. 가령 비유하자면 나라와 백성의 관계는 콩꼬투리와 콩알 같은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비록 콩껍질이 말라서 비틀어져 시든다 해도, 그 속에 콩알이 죽지 않고 살아 있다면, 콩은 잠시 어둠 속에 떨어져 새 숨을 기르다가, 다시 싹터 무수한 열매를 조롱조롱 콩밭 가득 맺게 하나니. (...) 생산의 근원이 여기 있는데 무엇이 두려우랴."

  

작품에서 남편을 두 번 잃은 소복여인이 잠깐 나오는데 천원돌파 그렌라간의 요코 생각나더라...

 

 간단히 말하자면 종갓집에 시집온 여자들의 이야기이다. 시어머니도 옛날에는 며느리였고 시할머니도 옛날에는 며느리였더라... 생각해보면 종갓집에는 결혼하지 않은 '여자'는 없다. 종갓집 여자애는 존재할 뿐. 여자애는 여자가 아니기 때문에 맞는 남자가 있을 때까지는 여자가 아니다. 소설에서도 나오듯이 종갓집 남자는 몇 번씩이나 여자를 잃어도 보쌈이라도 해서 얻으면 된다. 마치 인형을 얻듯이. 아니, 얻어야 한다가 적합할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다음의 여자들은 살아있다. 그러나 여자는 남편을 잃으면 잃은 대로 산다. 그녀의 옆엔 죽은 남편, 잃어버린 남편이 있다. 시체를 끌어안고 그들은 죽음의 철학을 향해 나아간다. 나는 우리나라에 열녀가 많은 이유가, 그들이 유달리 착하고 선해서가 아니라 갈 곳을 잃어서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한다. 누가 그녀들의 갈 곳을 없앴을까. 누가 그녀들에게 종가라는 무거운 짐을 지웠을까.

 강모는 여전히 이해가 안 가도 화살로 바위를 뚫을 것이냐 피해갈 것이냐는 기표의 질문은 굉장히 의미심장하다. 나는 피해가고 싶다. 하지만 어쩐지 바위를 뚫고 못 쓰게 된 화살들에 유독 마음이 쏠린다.

 그 화살 중 하나가 청암 누님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그녀를 보면 나는 페론 부부가 생각난다. 그녀가 종가에 '취임'했을 때 업적을 세운 일은 '물을 트기 위한 공사'였는데, 이는 중국에서 치수를 함으로서 나라를 만든 우왕의 업적에 비할 만하였다. 그나마 우왕에게 물이 있었다면, 청암 누님은 없는 물을 만들다시피 하고 없는 자식과 손주를 만들다시피 했다. 종갓집치고는 다소 혁명적인 방식이었지만, 배경이 일제강점기이고 서민들의 계급타파에 대한 의식이 상승하다보니 아무리 그녀같이 크고 양기가 가득한 붉은 꽃이라도 결국 견디지 못하는 듯하다. 아무튼, 집안은 국가요 고부갈등은 정치란 걸 잘 보여주는 훌륭한 글이다. 그리고 이 소설에 의하면, 종가는 남성보다는 여성이 일구어 놓고 지켜온 우리나라의 문화였다.

 

 

 

  

종가 중에서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 강모는 근친의 감정이 아직 남아있어서 잠자리를 거부하고, 신부의 처녀막에 관한 환상은 그쪽이 먼저 부수어버렸다. 미러링이란 그런 것이다. 여자들이 분노했다고 해서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고, 그들이 한남한남한다고 해서 불쾌하다 따지고 들 일이 아니었다. 그들의 욕망이 먼저 여자들을 내팽개치고, 마음을 짓이겨버리고, 기운을 음기로 돌려버렸다. 그런 주제에 어딜 멋대로 여자를 음기라 하는가.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내가 그래도 죄와 벌에서 스미드리가일로프를 이해했으니 그래 혼불의 강모도 이해가 되겠지 했는데 손나 바나나 코레와 웃소다 아직도 이 새끼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어 어쨌던 결혼했음 딱 지 아내를 지 껄로 만들어야지 그것도 못 하고 첫사랑인 사촌누나 보고싶어 하는데 어릴 때 소꿉장난 한 이후 쭉 만나보러 갈 생각도 못하고 할머니가 무서워서 결혼했고 아무튼 슈발 죤나 처음부터 끝까지 지 생각만 하는 놈 하... 나 같으면 신방에서 발랑 드러누워 쳐 잘 때부터 벌써 뛰쳐나가거나 촛대 들고 때린다 어릴 때 이 책 잡고 나서 바로 집어 던질 뻔했는데도 신부가 불쌍해서 끝까지 봤지만 근본적인 감상은 지금도 변하는 게 없네 암덩어리 새끼... 여자가 부처다 여자가 부처야.

 아무리 토지가 불공평하게 나눠진 시스템에 대한 불평이 옳다 할지라도 모든 일엔 순서가 있는 법이었다. 일제강점기일 땐 제일 우리나라 민족을 많이 수탈하는 일제의 손에서 독립하고 평등을 이루는 게 옳았을 것이다. 청암 누님의 혜안은 본능에 가까웠다. 그녀와 율촌댁과 효원은 과연 일제강점기 후반에 속하는 이 시기를 슬기롭게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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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의 적들
이인휘 지음 / 실천문학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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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대답 대신 담배를 입에 문 채 어깨까지 내려온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쓸어넘겨 탁자 구석에 있던 고무줄로 동여맸습니다.
"난 이렇게 생각해요. 저들은 총을 들고 있고, 우리는 맨주먹이라고요. 애초부터 승부는 난 싸움이죠. 하지만 그들과 우리가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있는 광장에서 맞붙었다고 생각해봐요. 어린이도 있고 젊은이도 있고, 어른들도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 광장 말이에요. 지하에서 서로 신경전을 벌이며 맞붙어 있다가 불쑥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광장으로 공간 이동을 했다면, 상황은 조금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요?"

 

이 책을 읽게 된 데에는 작가 이인휘 님을 페친으로 직접 만난 사정이 있다.

 

 예전에 이 블로그에서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이라는 시집을 리뷰한 일을 기억하는가? 팟캐스트에서 어떤 시인이 추천해준 책이라서 아무 생각없이 집어 읽고 시가 너무 좋아서 글을 썼다. 그랬더니 이인휘 소설가님께서 상당한 동요를 보이셨다. 문자는 차갑지만 그 와중에서도 그가 느끼는 슬픔을 읽을 수 있었다. 일생 공장에서 일만 하다가 어머니가 병들어 돌아가시고 자신도 암이 생겨 시 한 권만 남긴 채 죽은 그 시인의 생애를 느꼈고, 나아가 작가의 생애도 얼추 짐작해볼 수 있었다. 원래는 옛날에 그가 처음 쓴 소설을 읽을 생각이었지만 왠지 도서관에서 책이 보이지 않아서 이 책을 집어 읽었다. 페이스북에서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특히 군대 이야기를 할 때 무지하게 타오른 것 같기도 하다 (...) 내 페친 중에 70%는 남자이긴 하지만 젊건 늙건 간에 모두들 군대에 대한 두려움과 군대에서 겪은 설움을 댓글로 한없이 늘어놓는 통에 내가 나중에 따로 '폭력은 군대에 있던 아니던 간에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라는 글을 올려 사태를 수습해야 했다. 하기사 우리나라가 군대 사회란 건 주지의 사실이지만. 반은 가상이지만 반은 실제 인물이라는 소설가의 댓글과 같이 이 책은 그가 살아온 삶과 많이 겹치는 데가 있다. 처음에 작가 소개란을 볼 땐 이렇게 적나라하게 드러내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였다.

 

이인휘.

1958년 서울 출생. 야학에서 공부하고 검정고시를 거쳐 명지대 무역학과에 입학했다. 3학년까지 다녔지만 광주민중항쟁을 겪으며 대학을 자퇴하고 군대로 피신한다. 제대 후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농촌을 떠돌며 농사를 짓다가 서울로 돌아와 공장에 들어간다. 그곳에서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 노동운동의 길로 들어섰고, 운동 과정에서 함께 활동했던 박영진이 파업 도중에 분신하자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추모사업회를 만든다. 이후 구로 독산 지역에서 추모사업회를 통해 노동운동을 하면서 소설을 썼다.

 사실 반드시 불가능한 게 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꿈을 이루려는 수단이 직업이라서 직업을 꿈꿀 수도 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선생님이 되어서 주도적으로 왕따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 뭐 이런 식의 꿈을 꾼다면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강원도라는 낯선 곳으로 가서 몸을 숨겨야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 일에 경험이 많은 사람들은 내가 보이지 않게 수배를 당할 것이고, 나로 인해 궁지에 몰린 자들이 또다시 나를 잡아챌 수도 있다고 말했지만 나는 도망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설사 나를 잡으러 온다 해도 나는 내 삶을 더 이상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더욱이 그들을 피해 언제까지 내가 숨어 있어야 할지도 아득했습니다. 어쩌면 그건 또다시 내 삶을 내 스스로 회피하는 모습일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한 달 정도 있으면 잠잠해질 거라고 말했지만, 나는 시골에서 내가 키웠던 꿈을 미뤄놓을 수 없었습니다. 돼지도 키우고, 소도 키워 선생님이 되고 싶고 시인이 되고 싶었던 그 꿈을 버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내가 꿈이 있고 이것을 이루기 위해선 돈이 필요하니 안정적인 직장을 구하겠다 이런 마음가짐까지도 상관없다고 본다. 문제는 오로지 먹고살기 위해서 아무 생각없이 돈 벌 수 있는데를 가고 싶다고 할 때이다. 직장을 얻기 위해서 뭔가 마구 외워대는 게 공부인지도 의문을 제기해야 될 판인데, 우리나라는 특히 남성들이 출세해서 권력으로 날 비웃는 인간들을 찍어버리자고 생각하는 심각한 케이스가 많아서 그 의견조차도 눌린다. 마치 돼지를 죽여버렸는데 '사람을 죽이지 않은 것만 해도 어디냐'하고 안도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나라는 정말 선생님 되려 하거나 공무원 되려는 인간들 마음가짐부터 철저히 심리학적으로 테스트하지 않으면 이 이분법적인 사회를 벗어나기 어려울 듯하다. 당장 사립 어린이집이 늘어나면 어찌 될까 부모들이 걱정하는 이유는 근본으로 따지고 들어갈 때 선생님이 저질이라서가 아니라 저질들을 사전에 걸러내지 못하는 시스템 때문이다. 또한 그 시스템을 분석해보면 사방 도처에 폭력이 깔려있다. 힘들겠지만 폭력을 저지르는 계기가 되는 위부터 뜯어내야 희망이 있다. 그 위에는 가부장제에 찌든 아버지, 국가보안법을 들먹이는 군인, 지독한 사장, 외면하는 선생님이 있다.

 그러나 만일 내가 그들에게 고문을 받는다면 난 더욱 한술 더 떠서 그들에게 협력하겠다고 싸바싸바거리다 한 대만 맞고 끝날 거 두 대 맞을지도 모르겠다. 난 살고 싶은 욕구가 강해서.

 

오랜만에 데로드 앤 데블랑이라는 판타지 소설 생각난다.

 1권인가 2권에서 난데없이 주인공 여친 죽었을 때 펑펑 울면서 아직도 살아있는 주인공을 욕했었다. 그쪽도 주인공인가 여친인가가 장애가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무튼 목숨같이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 하니 주인공도 거기서 삶을 끝낼 줄 알았는데 그 인간이 계속 살아있어서 미웠다고 해야 할까. 자살하라는 소리가 아니라, 난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그 옆에 있는 사람도 너무 괴로워서 같이 죽는 줄 알았다. 정말 진지하게 그랬다. 근데 나같이 찝찝하게 생각하는 독자들이 많았는지 마지막권에선 끝내 주인공을 죽였는데 지금 생각하니 주인공도 생명 있는 사람인지라 좀 머쓱했다. 머리가 크니 작가의 존재가 인식되면서 '작가가 주인공을 너무 굴려먹네' 이런 생각도 들고..

 

  

살다보면 내가 친하다고 생각했거나 정말로 좋아했던 사람보다는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 더 많은 인연을 가져다주는 경우가 많다.

 죄와 벌에서 왠 지 범죄를 저지르기 직전에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서 무작정 술집을 간 라스콜리니코프는, 삶의 밑바닥에서 어떤 사람이라도 붙잡고 이야기하고 싶었던 마르멜라도프를 만나고 그의 딸 소냐와 인연을 맺는다. 이인휘 소설가가 지은 소설 내 생의 적들에서는 상현이 야심한 밤에 학생회로 주인공을 무작정 끌고 가면서 시작된다. 그의 첫사랑 연희와의 만남부터 시작되는 게 아니다. 낭만적이라기보다는 되려 여러모로 심신이 불편하고 불쾌했던 그 만남들이 라스콜리니코프처럼 주인공 김광훈의 삶을 바꾼다. 소설가의 일생을 잘 아는 사람들은 소설이 아닌 것 같다는 말을 많이 하지만, 적어도 이 책은 소설이 맞다. 누군가를 만나지 않는다면 이야기는 시작되지 않는다. 전광석화같은 그 스침이 세상을 바꾼다. 소설가는 원고지 360매를 일 주일 만에 썼다고 하는데, 그만큼 놀라운 가독성을 보이면서 재미도 있다. 형사가 등장하는 한 장면 한 장면이 마치 무협을 읽는 듯 손에 땀을 쥐게 한다. 특히 강제 징집된 군대에서 제대하고 나오는 길에 검은 자동차가 서 있을 때... ㅋㅋㅋ 그러나 스토리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은 게 놀라울 따름이다.

 

1980년 6월25일, 화정동 보안대 지하실
-“고문실에 들어가 봐라, 부처도 개가 되지!”
이인희 친구의 소설 [내 생의 적들] p.142-
김준태

광주항쟁을 詩로 노래했다고
그들은 잠행하는 나를 추적했다
도망쳐 다니던 날이 23일째였던가
어린 두 아들녀석이 하도 보고 싶어서
주위를 살피며 전남대 앞 우리집으로
(그때 나는 전남고 교사, 셋방살이었다)
들어서자마자 5분도 안되어 그들은
나를 체포하여 검정차로 달렸다
그 지프차는 검은 커튼이 처져 있었다
▲김준태-“어디로 가는 것인가요?”
▼그들-“서부경찰서(월산동)로...간다”
그러나 내가 끌려간 것은 화정동 보안대
지하실로 끌려들어가자마자 비명소리
어디서 듣던 스님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짜식, 중놈새끼가 염불은 하지 않고
...신도들을 선동해! 이놈 죽어봐!”
▲“시민들을 그렇게 죽이면 돼냐고 했지요
그게 선동이라면...부처님께서 하신거지요”
그들 군수사관은 똥 묻은 군홧발로 스님의
맨머리(그들은 ‘대갈통’이라고 말했다)를
짓이기듯이 차고, 누르고, 밟아대는 것이었다
스님은 정말 개처럼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아 그때 그 스님! 스님! 어디에 계신가요?!
세상이 풀린 후로 백방으로 찾으려 했으나
스님은 내 눈으로는 볼 수 없었다 무등산과
하늘은 저리도 미치게 푸르러갈 뿐이었다.

※2017.4.21(聖금요일).
작가 이인휘의 글을 읽고 쓰다

 

  

어디 계십니까 스님.
 이 대한민국 하늘 아래에서 살아계십니까?
 아님 우리보다 먼저 극락세상으로 가셨습니까?
 시인 김준태 님이 소설가 이인휘 님이 연희를 찾듯이 애타게 찾고 계십니다.
 둘이 꼭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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