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불 3
최명희 지음 / 매안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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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울 아부지 한 번만 봤으면."
그 말에 비오리어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이윽고 무슨 생각을 저만치 밀어내듯이, 번지는 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어디 가서 바. 없는디."
"큰 아부지라도, 작은 아부지라도, 누구 아부지 피 섺이고 탁인 사람 한 번만 봤으먼. 그런 사람 만나먼, 이러어케 손 한번 대 보먼 아부지 살 같을 것맹이여."
"살."
"잉."


 

솔직히 문맥 신경쓰지 않고
"살."
"잉."
에 줄 팍팍 치고 싶다.


비오리는 주막집 여자와 두부장사 사이에서 나왔다 하지만 생각이 깊고 예쁘다 하니 잘 살았으면 싶었다. 이미 강실이는 성격에서 나랑 안 맞아서 잘 살길 바라는 거 포기(...) 그러나.

 

"하문에다 박달방맹이를 쑤셔 박었드래."
(...) "첩도 일부종사 해양가?"
"아 첩은 머 벨 것이여? 여자로 났으면 헐 수 없능 거이제."

최근 아저씨와 딸내미뻘 여성의 로맨스 드라마가 나온다는데, 이 내용을 읽다보니 그게 스쳐지나간다. 남자들에게는 본처가 그랬단 소문이 파다하고, 여자들에게는 비오리가 바람나서 성난 아저씨가 그랬단 소문이 파다했다. 뭐 이런 것 때문에 왠만하면 나이차이가 너무 나면 결혼하지 말라는 게 내 지론인데, (한남인데 꼰대이기까지 한 남자와 결혼을 하니. 하물며 세컨드인데.) 안타깝네. 여자로 났으면 할 수 없다는 말이 너무 와 닿는다. 그래도 남의 말이라고 막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닌데. 난 뭐 처음부터 아저씨가 변태새끼라서 sm플레이를 가하고 본처도 영화 올가미 찍어서 비오리가 망가졌다는 데 한 표.

여기서부터 춘복이와 강모 강태의 이미지 역습이 시작된다. 춘복이는 근친 논란으로 시집도 가지 못하게 될 강실이를 신분 역전의 도구로 노리게 된다. 압도적인 자본의 차이에 눈이 멀어서, 자신조차 만만한 계급인 '여성'을 착취하려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끝간 데 없이 이미지고 뭐고 다 추락한 강모가 '자신도 계급에 착취당하는 사람이다'라고 제법 설득력있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강태도 이에 감화받아 평소 비뚤어진 어투를 버리고 진지하게 혁명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여전히 강모보다 더 현실을 보지 못하고 꿈 속의 이야길 늘어놓지만, 일단 그 순간만큼은 혁명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음을 알아보게 되는 순간이다. 혼불은 누구나 가슴에 불꽃을 지니고 있다고 믿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한 인물이 선하게 행동하다 악하게 행동하며 독자를 혼란에 빠뜨리는 게 이 소설의 재미이다.

결국 과부가 아닌데도 과부 중 생과부 신세가 될 효원이 집안을 물려받기로 결심한다. 자본으로 자신의 허전한 마음을 때우려 했던 청암부인은 죽을 날이 되어서야 인월댁에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말을 한다. (아무래도 '그런' 사건도 있었으니.) 이제 지귀가 될 염려도 없을테고 남편에 대한 원한은 처음부터 없었으니, 그녀는 편히 하늘나라로 갈 수 있다. 그러나 효원은 남편을 사별한 것도 아닌지라, 평생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어 훨씬 독한 자본가로서 살아야 땅을 지킬까 말까 한다. 남편은 이미 자본가들에게서 토지를 뺏어 인민들에게 고루 나누어주려는 사상으로 빠져들었으니 적편이 된 것이나 다름없고, 거멍굴 사람들은 입을 무기로 삼아 그녀가 일으킬 실수를 기다리며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고, 혼불 인물상 중 제일 나약한 강실이도 지켜야 하고. 무엇보다 창씨개명으로 이미 집안을 뒤흔들었고 언제 또 다시 집을 무너뜨릴지 모르는 일본 사람들이 불안하다. 청암부인의 혼으로 효원은 쓰러져가는 집안을 보존할 수 있을 것인가.

 


 

인월댁과 청암부인 사이에서 백합의 기운을 느낀 건 나 뿐인가요. 청암부인이 죽기 전 인월댁과 나눈 대화에서도 가족 이상의 친구 이상의 각별함이 있었고 말이다. 세상을 떠난 청암부인을 그리워하며 하얀 속적삼을 나부끼는 인월 부인은 지붕에 핀 꽃 같았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청암부인 불쌍하다 생각은 든다. 하지만 이 분은 죽기 전 애호박죽을 드신다. (...) 어쨌던 집안에 누워서 숨지셨고 비록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손주는 만주가서 없지만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시신 정리하고 살뜰히 챙겨준다. 그런데 폐허를 보다에서 시인 강이산은 판자로 만든 집에서 쫄쫄 굶어 입에서 오물을 토해가며 죽는다. 그나마 저자가 생사를 확인하러 직접 가지 않았음 발견되었을까...? 확실히 지금은 과거보다도 사람의 목숨이 더 가벼워지고 초라해진 듯한 기분이 든다. 그나마 일제강점기 땐 모더니즘이라 양복 입고 다녔지 포스트모더니즘 나오니 사람들이 누더기를 입고 다닌다는 누군가의 말이 생각남.

이 소설이 왜 명작이냐면 이 세상의 소수(?) 한남과 독재자와 자본가와 꼰대들의 허울을 은연중 다 까발리기 때문이다. 꼰대가 굳이 양반이나 귀족 가문에만 있지 않다는 걸 가리키고 있는 건 둘째치자. 이 몰락양반은 노예도 없고 자신이 직접 밭뙈기를 가는 처지에다가 젊은 시절 공부를 많이 했다면 당연 불합리한 세상에 저항할 거라 흔히 생각될 터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솔직히 '나 같은 자식 낳을까봐 애 안 낳는다' 라던가 하는 건 다 핑계라 생각된다. 애초 이 분은 거멍굴 인간들처럼 힘든 농사를 하는 사람은 아닐 것이다. 굳이 굶어죽을 것 같으면 자존심 다 죽이더라도 손 벌릴 연줄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손 잘 먹여살리는 게 목표가 아니라는 것은 결국 내 자신만 잘 먹고 잘 살겠단 이기주의와 같지 않은가? 심지어 거멍굴도 자기 자식 먹여 살리려고 귀족집에서 무료로 급식 아주머니 뛰어주는 판인데.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옛날이나 지금이나 힘든 건 변하지 않았다. 여성들이 차별로 인해 애 낳기 싫다는 건 어느 정도 이해한다. 심지어 이 시대가 결혼이 몸 파는 걸로 생각된다면 아예 결혼하지 말아야지. 하지만 나머지는 자신을 돌이켜 생각해볼 일이다.

하도 본을 찾아보라기에 김녕 찾아봤는데 경상도에 있댄다. 그것도 남쪽이랜다. 하기사 할머니가 전라도에서 시집왔는데 일가에서 센세이션이 났다고 하니 무리도 아니다. (할아버진 그때까지도 거기서 사셨다고 한다.) 근데 난 남쪽만 가면 여수 제외하고 전부 차멀미가 나고 경치보러 갔는데 좋지 않은 사건이 나고 풍경 별로 좋지 않은데로 가게 되고 영 트러블이 나니... 그래도 한 번은 가볼 계획이지만.

마지막에 동양척식주식회사(간단히 식민지시대 왜놈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을 착취했던 기업 형태의 방식이라 보면 된다.)가 나온다. 농사를 계약식 비정규직으로 짓는 이야긴 줄 알았더니 소작료를 못 물면 그동안 그 토지에서 추수한 역대 작물들 다 빼앗아가거나 소작료를 내더라도 깡그리 훑어가는 형식이었다. 게다가 특정한 작물 외에 다른 먹을거리를 심으면 절대 안 된다 했다니 참 치사한 방식이다 싶다. 논문으로 보면 시큰둥할 이야기인데 소설로 보니 참말 일본놈들이 도둑놈들인게 실감이 난다. 하긴 그 무서운 호랑이도 씨를 말렸다 하니.

 


P.S 뜬금없이 올려보는 이번달의 근황.
한겨레 강의 가보고 싶긴 한데 혼불보고 줌파 라히리 보고 헤르만 헤세 봐야 해서 당분간 히키코모리 생활 좀 할 예정.
물론 여기에 리뷰 올리는 속도도 더 빨라지겠다. (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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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를 보다
이인휘 지음 / 실천문학사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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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봐, 아주머니. 밀가루를 너무 묻혀! 50그람짜릴 75그람으로 만들면 우린 뭘 먹고 장사하나? 하, 이거 참! 다시 좀 잘 해봐요!"
50그램짜리 핫도그는 60에서 70그램으로 만들어야 한다. 냉동실에 들어가 수축되는 것을 고려한 그램 수다.


 


근무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동료와 충돌이 잦았다. 그러다 내 입에서 불쑥 '아주머니'라는 말이 튀어나왔는데, 그 동료 분이 갑자기 폭발할 듯 화를 내시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 좋은 동료분들은 반쯤 농담삼아 '아주머니니까 아주머니라고 하지.'라고 했지만 나는 얼른 사과했다. 인격에 모독을 줄 의도는 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속으론 굉장히 부끄러웠다. 노동운동과 친하진 않았지만 그들을 아주머니라 하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면서도 내가 그들을 하대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대학을 나왔는데도 나는 상대방을 존중하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었다. 인권 책을 그렇게 많이 읽었는데도 나는 사람을 여전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이후로 변할 결심을 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요새 과하게 성공적인지 나를 내려다보는 사람들이 제법 많아졌지만 후회하진 않는다. 높은 자리에서 뽐내고 서 있다가 언젠가 그런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보단, 죄책감을 느끼는 것보단 백배 낫다. 아주머니란 단어는 아직도 나한테 그런 의미이다.

결론적으로는 잘 봤다. 공장노동자에 대한 이야기가 굉장히 솔직히 실렸다. 여자는 공장노동자에서 더 밑바닥으로 가면 몸을 팔게 된다거나, 남자들이 공장에서 일하고 나서 쉬는 시간에 밖에서 빨리 노상방뇨하고 온다거나. 아주 가감이 없다. 하지만 일반 독자들이 읽기에 명심할 게 몇 가지 있다.
1. 일단 등장인물들이 많이 죽는다.
2. 솔직담백한 이야기라 죽을 때 똥오줌이라거나 이물질 묘사가 나온다. 물론 선정적인 장면도 나온다.
3. 죄다 결말이 불행한 편이다.
혹시나 이런 류의 소설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겐 신중을 요한다. 하지만 노동운동하는 사람들이 겪는 위험한 일이나 소위 밑바닥 인생을 사는 사람들의 절절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이긴 하다. 난 이런 장르를 좋아해서 열심히 읽긴 했다(?)

폐허를 보다 처음 집어든 날은 진짜 무슨 날이냐;; 싶을 정도로 혼돈 파괴 망가의 나날이었다. 지진난 건 둘째치고 온갖 트러블에 재고조사에 심지어 조용히 있던 직장동료가 임금 오르면 너 해고되는 거 아니냐고 트집을 잡았다. 평소 같으면 이어폰 끼고 음악 이빠이 틀고 못 들은 척 하는데 옆자리에선 동성이 섹드립하고 아;;;  

 


 내가 20일날 이어폰 사가는 거 까먹으면 인간 말고 개 하겠다고 마음 속으로 다짐했었다.


동료 직원의 질문은 그냥 얼버무렸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시간단축 되는 거야 덕질할 시간이 많아지니 그냥 그렇다고 친다. 그러나 해고라. 임금 오르는 그딴 걸로 직원들 목을 치는 직장이면 그냥 서점 직원이고 뭐고 안 할 거다. 솔직히 음식점 서빙 알바해도 이거보단 더 많이 번다.

이 일 뿐만이 아니다. 회사 내 전화받는 곳에 잠깐 일 있어서 들렀는데 전화기에 조그맣게 폭언폭설, 성희롱이란 글자가 쓰여 있고 옆에 뭔가 번호가 적혀 있다. 아니 사람들아 왜 여기다 전화해서 그런 짓거리를 하세요...? 이인휘 씨 소설 보다보면 이렇게 회사의 온 군데가 신경쓰이는 현상이 생겨난다. 키니나리마스! 그러나 감정이입이 많은 나로서는 이 책을 읽은 날이 생각 많고 머리속 복잡한 날이었다. 내 앞날에 대한 생각도 많이 났지만, 그보다는 진지하게 세상의 비열한 모든 사람들에게 화가 나지 않았었나 싶고. 그래어  폐허를 보다는 좀 빨리 읽었다 ㅠㅠ  내용은 너무 이거 너무 내 현실과 겹쳐서 너무 벗어나고 싶은 부담감이 있음;; 뭐 이 책 뿐만 아니라 이인휘 씨의 소설 자체가 페이지 터너이긴 하다.

좋은 보스는 없다.
직장 동료는 친구가 될 수 없다.
회식은 최대한 피해라.
한 직장에서 6년차 짬밥 먹으면서 배운 직장생활 잘하기 3원칙인데 이 책에선 왜 그걸 지켜야 하는지에 대한 묘사가 잘 되어 있다고 본다. 물론 소설의 '나'는 히키코모리인 나와 달리 사교성이 있어서 직장 동료 '중에' 친구가 있다(...) 은근 부럽기도 하다 ㅠㅠ

시흥 칼바위가 나오는데 진짜 내가 정확히 여기 살았었다. 나중에 가보니 재개발하느라 싹 다 헐었더라. 그래서 완전 저주받은 흉가의 느낌 나는데 예전부터 분위기 열라 이상하긴 했었다. 거기 살았던 사람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그런 흉물스런 동네는 좀 헐어도 되지 않나 싶을 정도. 20년 전부터 중딩들 피어싱하고 다니고. 근데 나도 거기 초등학교 전학갈 때까지 놀림받았는데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뻐드렁니라거나 남자같은 이름이라거나 나중엔 그것도 질리니까 심지어 김씨라고 놀림 ㅋㅋㅋ 김에 싸서 먹느냐며 ㅋㅋㅋ 집이 좀 허름한데 옷은 맨날 고급 원피스 입고 다니고 맨날 글 쓰고 그림그리는데 어디 내기만 하면 상을 받고 다니니 그러지 않았나 싶다. 그래 뭐, 나도 살면서 지금까지 초딩때 상을 그렇게 많이 받았다는 사람은 못 봤으니. 그래도 그렇지 왕따시킬거면 괴롭히지 말고 조용히 무시만 하세요. 님들의 언어나 행동이 사람 죽일 수 있다. 20년 지나고 우연히 뻐드렁니 집어넣는데 성공했는데 아직도 아랫입술로 윗니 집어넣는 습관이 생겼다. 입 속 다 헐고 이빨도 좋지 않은데 아직도 이런다. 최근에서야 정상적으로 웃을 수 있고. 그리고 아직도 사회관계 안 좋은 건 어떻게 보상할거니?

 

왜 이렇게 이인휘 씨의 소설이 끌리는가, 난데없이 전권 돌파를 하기 시작했는가에 대해선 알 수 없다. 다른 작가와는 달리 직접 만나서 그러는가?라는 질문을 나에게 던져보지만 따져보면 천명관과의 만남이 나에겐 좀 더 인상깊고 친숙했다. 외모 탓인가?에서도 역시 마찬가지고(...) 책을 별로 보지 않는다는 사실도 만나고나서 처음 알게 되었다. 그저 그 분의 책 한 권을 처음 보고 끌렸다고 할 수 있다. 그의 글은 겉으로 보기엔 단순하지만 퍽 깊고 순수한 면이 있다. 사인회를 하거나 강의를 하는 기존 소설가들에게선 이미 느낄 수 없는 친근감이다. 복잡하진 않지만 알 수 없는 몰입도가 있다는 그 자체에서 깊은 맛이 우러난다고 할 수 있다.

왠지 독서모임할 때 누가 이인휘씨 까면 무라카미 류나 아스카 때처럼 아니 제 최애한테 왜 이러세요 날 모욕하시는 건가요 이런 말이 내 목구녕에서 튀어나갈 거 같다. 그냥 존나 가만있어야 겠다. ㄷㄷㄷ

요번에 이분 책 전권 다 보면 삶창 도서관에 있는 책 다 재패하려 준비중. 기대하시라! 요샌 주로 시집을 편찬하고 있는 출판사로 노동계와 관련된 글들을 주로 출판하고 있다. 위안부 문제와 식민지 지배 책임을 번역했다. 국내소설파에 삶창이라니 너 무지 마이너 아니냐!라고 말씀하셔도 난 어차피 마이너이고 인기 끌려고 블로그에 리뷰 쓰는 게 아닌지라.

 

"스님 간밤에 제가 꿈을 꿨는데 법당은 무사다, 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그게 무슨 의미일까요?"
스님이 걸음을 멈추고 설악산을 올려다봤습니다.
"그것 참 좋은 꿈을 꿨습니다. 법당은 본래 부처의 몸이라고 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사를 한자로 풀어보면 삿됨이 없다는 뜻인데, 몸에 삿됨이 없다 카면 그것만큼 좋은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주 좋은 꿈입니다."
(...)
"형은 감상주의자야.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지."
그가 막걸리를 마시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새라는 노래.

 

일본에서 까마귀는 카라스라 한다. 烏(カラス) 새는 토리라고 한다. 鳥(とり)


 왜 한 획이 부족하냐면 중국인들이 새라는 상형문자에서 눈을 뺐기 때문이다. 고대어를 일본 사람들이 그대로 가져왔기 때문에 히라가나가 아니라 일부러 가타카나로 부른다. 온 몸이 검은 까마귀는 눈까지 검기 때문에 옛날 사람들은 눈이 없는 새로 친다고 했다. 이는 맹인을 연상시키는데, 그들은 일본에선 악사로 활약하기도 했다. 농경 신화에서는 날개가 여덞개 달리지 않았나 추정되는 야타카라스가 난폭한 신들을 피하면서 천황을 천혜의 땅으로 인도해 주었다고 한다. 고구려에서도 삼족오는 까마귀가 아닌가 해석된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까마귀라 하여 그닥 불길한 새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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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쩍하는 황홀한 순간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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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이며 오락인 동시에 승부의 전장인 당구라는 분야에는 밀고 끌고 빨고 돌리고 벗기고 먹이고 회전시키는 등등,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얼마간 색정적으로 들릴 수도 있는 무수한 언어적 표현과 함께 한탄과 억울함과 바람과 행운과 불운, 애원, 기쁨, 비탄에 어울리는 각양각색의 몸짓과 비명과 감탄과 호소의 표출이 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런 게 없었다. 그는 늘, 신기할 정도로 과묵하고 무표정했다. 인간의 희로애락 오욕칠정을 나타내는 표정에도 등급이 있다면 가장 높은 등급은 바로 그런 무표정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생각해보면 나는 꽤 책 이름을 오인했던 적이 종종 있다. 예를 들어 바흐친과 문학 이론은 바흐친의 문학 이론과 꽤 비슷해보인다. 그처럼 이 책의 이름도 '번쩍하는'이란 대목에서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번쩍하는과 '번쩍였던'은 상당한 차이가 있어보인다. 각각 현재와 과거의 시간이니 말이다. 아무래도 나는 슬슬 꼰대가 되어 과거가 좋았더라는 생각이 드는 게 아닐까, 약간 겁이 났다. 그래서 명문장을 달 때 제목을 헷갈리지 않도록 상당히 조심했다. 그런데 이번에 명문장을 달 때 테마로 삼으려 했던 게 정치와 술인데, 최소 10장당 한번씩은 꼭 등장하는 주제였다. 자동으로(?) 현재를 사랑하게 되는 순간들이었다.

 

 이번 소설은 뺑덕 어멈이 등장하는 판소리를 방불케 하는 긴 넋두리들이 많이 등장하는 편이라 산문시를 연상시키는 면이 있다. 주제도 뭔가 모나고 못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나쁜 사람들임을 알면서도 가끔 그 사람들처럼 살아보고 싶다거나, 심지어 귀엽다고 생각되는 건 어째서일까.

내가 사는 동네에서 진행했던 성석제 작가의 토크쇼에 대해서 에피소드를 하나 더 이야기 하겠다. 진행자가 복숭아를 맛있게 먹는 모습을 알차게 묘사한 어느 작가가 있다고 하며 그녀를 극찬한 대목이 있었다. 성석제 작가는 대뜸 자신도 복숭아에 대해서 소설을 썼으며 그 외에 딸기와 자두 등 다양한 과일을 취급했다고 말씀하셨다. 지금 읽어보니 복숭아를 먹는 장면을 감각적으로 썼다기보단, 언어유희를 맛깔나게 구사하는 데 신경을 많이 쓰신 듯하다. 그러나 젊은 사람들에게 뒤늦게 발견되어 '아재 유머'라는 이름이 붙여졌기에 망정이지, 예전에 언어유희를 즐겨 하는 사람들은 더 심한 천대를 받았었다. 그래서 더욱 귀한 소설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교관은 궁리 끝에 후보생들의 옷을 모두 벗게 한 다음, 비 오는 연병장으로 내몰았다. 그리고 각각 자기 앞사람의 성기를 잡고 줄을 지어 달리게 했다. ('군대는 줄이다'라는 관용어도 있다.) 그것은 하늘이 사람을 지상에 살게 한 이후 처음 나타난 기묘한 광경이었다.
그때부터 'X 잡고 반성한다'는 말이 생겼다.

 

 

그래서 원래 그 ㅈ은 남의 ㅈ이라는군. 역시 군대는 BL소설 쓰기 좋은 무대야.

 

 진짜 동성애자가 지은 반실화라는 소설에도 나오고 이미 영화도 나왔지만... "그게. . .어떻게? 뒷사람이면 좀 나은데. . .앞사람걸 잡고 가려면 간격이 . . .??"라는 의문을 제기한 사람이 있었다. 근데 성석제 씨는 소설에서 그랬듯이 하면 된다, 라고 대답하실 듯하다.

 

12월 24일. 나는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제주도에 있었다. (하긴 지금도 무엇 때문에 여기 있는지 모르겠다). 혼자였고 전날 마신 술로 머리가 띵한 상태였다. (...) 하긴 나는 그때까지 한 번도 돈을 주고 표를 사서 산에 들어가본 적이 없었다. 무슨 수를 쓰든 악착같이 개구멍으로 산으로 들어가곤 했다. 지리산 국립공원, 설악산 국립공원이 나한테 수없이 당했다.

  

술은 역시 혼술.
등산길은 역시 동물길.

 두 사람은 취해 있다. 아니 취하고는 배기지 못하리. 관동팔경 죽서루 난간 위.

 

 

나는 누각에서 술을 마시는 노인분들을 보진 못했지만 이 소설에서 나오는 것처럼 버스에서 술을 얼큰히 마신 듯한 노인들은 본 적이 있다. 청춘남녀들이 데이트를 즐기는 장소가 카페나 술집인 게 별다른 이유가 있겠나. 관동팔경은 인생 멋대로 사시는 노인분들이 즐기시고 계신다. 가끔 떨어지고 싶은 듯이 벼랑을 쳐다보며.

 

P.S 왠지 이 명문장이 나온 소설의 주제와 비슷할 거 같아서 올려본 강릉 바다부채길 리뷰.
1. 길 좁으니까 사진찍지 마라.
2. 길 좁으니까 양산펴지 마라. 양산으로 때릴 것이다.
3. 여기서까지 술쳐먹고 들어오지 마라.
4. 총 맞기 전에 울타리 넘어서 바다 들어가서 낚시하지 마라.
5. 고소공포증 있으면 오지 마라. 바닥 비치는 곳 많음.
6. 우산 펴지 말라고 시뻘들아!!!!!!
7. 왜 바다에서 술판이야! 김정은 오빠!! 오디계세여!! 쟤네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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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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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그가 다른 일로 잠시 술에 취하기를 잊었다. 혹은 다른 것에 취해 세월 가는 줄을 잊었는지도 모르지만. 몇 달인가 몇 년 뒤엔가 문득 그는 첫사랑처럼 그 술집을 떠올렸다. 그러나 당연히 취하기 전에는 그 집을 찾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성석제 작가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님 같은 사람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는 영문학 교과서의 서지에 속하는 시의 예술성에 관한 대목을 찢으라 명한다. 성석제 또한 시와 소설 사이를 자유롭게 드나드는 글을 썼고 그런 속성은 아마 여기에서 더 잘 드러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러나 '선생님' 같은 면모도 잘 드러나 있다. 노벨상을 통 받지 못하거나 받지 않는, 혹은 자신이 좋아하는 소설가들을 묶어서 '비밀결사'로 표현해내는 자신감. 그리고 분명하게 드러나는 권선징악의 코드. 꼭 악인을 응징하는 건 아니지만 과장과 익살로 그들을 풍자하는 데 그는 탁월한 재주를 보인다. 대표적인 예로 파리를 들 수 있겠다.

 

 

처음 소설엔 뱀이 등장한다. 

 

뱀 세 마리가 서로의 꼬리를 물어뜯는 장면이 나왔다가 나중에는 그 세 마리가 각각 분리된다는데, 이건 세 가지 다른 색깔로 교통을 통제하는 신호등을 나타낸 게 아닐까 싶다. 자주 섞이기 쉬운 색깔을 명확하게 나누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가 자신의 몸통을 먹기 시작했다는 게 신호등에 불이 켜진 상태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입이 입에 먹히는 순간이란 신호등이 고장나서 영원히 켜지지 못하는 상태가 된 게 아닐까? 그저 내 생각이지만, 그렇지 않음 신호등에 대해 갑자기 숫자까지 보여가며 저렇게 상세히 설명할 의미가 있는가 싶고.

후반 소설에 또 뱀이 나온다.섬에서 모아놓은 뱀들이 서로를 잡아먹고, 마지막 남은 한 마리가 어쩐다는 이야기인데 일본설화에서 등장한 거 같기는 하다. 작가는 그 이야기에 살을 붙인 듯하다. 그 강한 뱀을 돼지를 이용해서 죽여 거기서 나오는 구더기를 닭에게 먹인 다음, 그로 인해 털이 뽑혀 죽은 닭을 아무에게나 팔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섬에 토끼를 풀어놓아 번식하면 팔라나. 굉장히 장황한 이야기인데 일단 귀차니즘으로 인해 부자가 되기 싫은 독자(나)에게 이런 걸 말해봤자 결국 헛일이다. 작가에게도 헛일이었던 듯하다.

 

 

비행접시에 탄 휴머노이드를 만난 스님에 대한 이야기도 있는데, 이게 좀 미친 소리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꿈에서 읽은 듯한 줄거리가 어떤 책에서 구문도 안 틀린 채 통째로 나와 상당히 당황한 적이 있다. 

 

(사실 만취해서 어디 서점에 들러 그 구절을 읽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근데 여기선 꿈에서 읽은 듯한 구절이 나온다. 이런 때는 대체 무슨 상황일까. 만취해서 아무 책(이 책)이나 집고 아무 데나 펼쳐서 구절을 읽은 적이 있나??

 

고녜이가 자꾸 냐옹냐옹 울고 가는 기 기분이 안 좋아서, 우물 가서 치성을 드릴라 카는데, 앵두가 우째 그리 빨갠 기 조랑조랑.

  

산전수전 다 겪은 할머니의 이야기도 나오는데, 그녀는 화자에게 벌어진 앞니를 고치라고 충고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시작부터 끝까지 뜬금없고 내용은 상당히 잔혹하다. 그런데 그 말투가 어딘가 이북 사투리 같아서 인상깊은 구절로서 한 번 더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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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너무도 사랑하는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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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말을 하고 있는 사이에 젊은 여자가 들어와서 포도가 세 송이 담긴 하얀 접시를 내려놓고 나갔다. 그런데 접시를 내려놓은 곳이 집주인의 손에는 쉽게 닿는 곳이지만 우리가 손을 뻗치기에는 조금 부담스러운 거리에 있었다. (...) 갑자기 배가 아파왔다. 만호와 함께 오다가 점심으로 먹은 육개장에 벌건 기름이 너무 많은 것 같았는데 그 때문인지도 몰랐다. 다행스럽게도 싸르르 아프던 배가 조금 나아지며 방귀가 새어나왔다.

 기대치 이상이었다.

 

 소설집이고 초단편은 아니지만 보통 두세장 정도밖에 안 되는 소설들로 이루어졌다는 성석제의 특이한 소설이 확실히 내 눈길을 끌기는 했다. 그러나 무라카미 류가 야성적인 젊음으로 사람을 압도하고 세심하게 리드하는 성격이라면, 성석제는 다정하고 약간 헐렁한 성격의 글이라고 해야 할까? 이걸 에세이로 봐야 할지 소설이라고 봐야 할지 헷갈릴 정도로 소설들은 저자의 경험담같은 이야기들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확실히 그런 점에서는 시 같다. 성석제 씨는 자신의 시같은 글에 살을 붙여서 늘린 소설이 자신의 소설집이라고 결론을 내린 듯하다. 그렇다면 장편소설은 어떻냐고? 놀랍게도 무라카미 류가 단편소설을 늘려서 장편소설을 만든 편이라면, 성석제의 중장편 소설들은 이런 단편소설집과는 또 완전히 다르다. 그의 장편소설은 구도가 완벽하게 짜여져 있는 편이었다. 말미가 열린결말로 두루뭉술하게 끝나는데, 그 점에선 좀 이 소설집과 비슷해 보이긴 하다. 아무튼 순수문학 작가 중에서는 다양한 장르를 시도해보는 사람들도 있고, 일부러 라노벨에 도전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지만 장편과 단편의 느낌을 다르게 쓰는 작가는 또 처음 들었다. 그는 자신의 단편집을 설명하며, '쓸 수밖에 없어요.'라고 끝을 맺는다. 나는 그의 굉장히 소설가같은 부분이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이야기를 예전부터 많이 좋아하긴 했지만, 그를 어느 강연에서 만난 뒤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된 듯하다. 그래서 이 책을 강연에서 무료로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문학동네에서 그가 옛날에 쓴 단편집들을 재출간한 것들을 다 구입하게 되었다. 한동안은 시를 읽는 대신 이 책들을 읽게 될 것이다. 그렇다. 나는 이 책을 소리높여 읽었다. 그것도 10편씩. 시를 읽는 것보단 확실히 시간이 걸렸다. 단편 하나를 읽을 때마다 어른의 말씀이나 돈의 값처럼 깊이 생각할 거리들이 생기기도 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어째 그래요! 같은 짧은 문장이 핵심적으로 마음을 콕콕 찌르는 듯했다. 휴머니즘을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아도 사람 사이의 따뜻함을 충분히 담아내는 듯했다.

 

 두번째로 내가 이 책에 감탄한 점은 정치에 대한 비판이었다. 

 이게 잘못 쓰면 완전히 아재개그가 되어버리는 면이 있거나 시대에 통하지 않는 게 있는데, 그는 무슨 선견지명이라도 있는 젊은이마냥 처음 글 쓰는 사람처럼 유독 설렘과 열정에 넘치는 글을 써냈다. 일찍 일어나는 새와 마을 발전 사업에 대한 글이 가장 인상에 남았었다. 두철수에서 계속 일찍 일어나라는 메시지를 던지는데, 보통 한국 사람들이 일찍 일어나면 보라는 책 안 보고 가라는 산책 안 간다. 일을 한다. 책도 보지 않는다. 외국에서 수입되어 온 듯한, 아침형 인간이란 개념은 그렇게 한국에서 망가졌다. 마치 우주선을 쏘아올리지 못하고 한국의 여성우주인은 결국 외국 가서 잘 먹고 잘 살게 되었다는 메데타시적 결말이다. 작가는 이를 풍력발전에 연결해서 글을 써내려갔다. 7년도 더 전에 쓰여진 글인데 이건 마치 미래를 예언한 것처럼 생생하다. 이 정도면 그도 김진명처럼, 기간은 짧았지만 훗날을 예언한 셈이 아닌가?

 

세번째로는 이 책에서 나오는 음식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강연의 진행을 맡았던 정용준이 지적했듯이 게에 대한 이야기가 상당히 재미있었다. (그리고 맛있어 보였다.) 작가가 개인적으로 가장 공을 들인 건 따개비죽 같았지만 저자의 의도와 독자의 느낌은 원래 따로 노는 법이지 않은가. 특히 난 생맥주와 소프트셸크랩 볶음 정말 궁금했다. 뉴욕에 있는 식당이라는데, 이거 먹으러 뉴욕가야하나 진지하게 고민했을 정도이다.

 내가 딱 한번 갑각류가 맛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는데 그건 새우이고 코스요리였던 지라... 아, 제주도 여행 갔다가 우도 어느 카페에서 대게라면 먹었을 때 메챠쿠챠 맛있었던 건 기억나는데 너무 오래 걸어서 그랬을 수도 있고. 무튼 먹방여행 더 하고 싶다. 살 언제 빼나.
 그리고 최근 나이가 들어서 그러나 내 인생 절대 좋아하지 못할 거 같았던 멸치가 요새 끌리더라. 근데 이 책에서 또 요새 본인이 관심있어 하는 그 음식이 나온다. 제목도 멸치 교향곡. 무라카미 류가 추천하는 음식은 대부분 약간 먹기가 부담가는 면이 있는데, 이 책에 나오는 요리는 나같은 서민도 조금만 노력하면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게 또 한 번 매력이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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