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편지 창비시선 433
노향림 지음 / 창비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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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 식당 중에서

 

선창가 허름한 남도 식당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이 나직나직 깔린다.

세 마리 학이 살았다는 삼학도가

빗줄기 센 창으로 걷어 달린 닻처럼 떠 있고

없어진 학의 몸체를 만드느라 굴착기가

거기서 장난감처럼 움직인다.

(...) 몸뻬 입은 여주인의 굵직한 쉰 목소리가 느닷없다.

'푹 삭힌 홍어 맛은 목포가 제일이어라우,

흑산도 홍어는 우리도 구경조차 할 수 없당께.'

그래도 묵은지 돼지고기와 함께 나온 홍어 날개살은

오지항아리에 짚 깔아 덮고 오래오래 삭혔단다.

매화꽃 빛 속살까지 다 썩혀 싸한 그 냄새

어린 날 코를 감싸 쥐고 도망치던 토종은 없단다.

왠지 오늘 먹은 이국산 홍어 삼합이

삼학으로 잘못 발음된다.

토종 홍어 맛 나는 남도는 내 고향

그리하여 푹 삭힌 시 한편 쓰고 싶다.

입안이 온통 환해지는.

 

 

성경과 불교 등 갖가지 종교를 모티브로 시를 쓰고 있는데, 시는 비교적 쉬운 편이다. 시인의 과거 중요했던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면서 이 시를 읽는 다른 독자에게 공감이 가도록 쓰여져 있다. 무엇보다 시각적인 감각이 상당히 뛰어나서, 읽다보면 참기 힘들 정도로 상상에 빠져들게 된다. 특히 해안 정경에 대한 묘사가 빼어나다.

 

이 시집은 사실 흐름이 있어서 한 시만 떼어서 보긴 좀 힘들다. 예를 들어 낙원상가에 대한 시와 아버지에 관한 시가 각각 두 편씩 있다. 아버지를 두고 있는 화자는 왠지 각각 다를지도 모르겠다.

여성시인이라 그런지 남자 덕분에 험난해진 인생 여정이 여기서도 실려있다. 다만 화자들이 아버지를 미워하면서도 그리워하는 듯. 객관적인 상황을 죽 나열하는데 되려 나에겐 화자(들)의 양가감정이 보인다.

 

여기서도 어딘가 여행을 가는 이야기는 꾸준히 나오더라. 특히 외국여행가서 쓴 시들 볼때마다 생각나는 게 아니 이분들 이 코로나 시국에 여행가고 싶어 어떡하나 ㅋㅋ 역시 여행 좋아하는 민족들이다 보니 어머니 친구들도 자주 코로나 끝나면 여행갈 거라 얘기하며 벼르고 계신다던데 이 분도 그 중 한 명에 속하지 않으실까 싶다. 그러나 존리같은 분들 말에 의하면 여행갈 돈으로 항공 주식 사는 내가 승리자 막 이래?

 

누란행 지하철을 타고

 

전동차 출입문이 닫히고 눈매 깊숙한 이국 여자가 내 앞좌석에 앉는다 작은 체구에 크고 둥근 청옥 귀걸이를 달았다 귀걸이는 열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달랑거린다

 

서역의 위구르자치구에서 왔을까 한때 찬란했던 누란왕국이 무너진 그 자리엔 수세기의 시간들이 쌓여 있다 거기 유물관 관 안에는 미라들 다 삭은 비단옷에 덮인 채 누워 있다 부장품 청옥 귀걸이만 변색 없이 늘 푸르게 놓여 있는데 그녀가 언제 일어나 여기 온 걸까

 

지하철은 어느새 강 건너 더 먼 초소형 행성으로 달린다 은하철도 999처럼 추억을 헤치고 캐러밴들이 다녔던 공중 사막 길 마악 접어드는데 누군가 깜박 졸고 있던 나를 흔들어 깨운다 벌써 불빛들 뺑뺑 뚫린 어둠 속 종점이 창밖으로 펼쳐지는 여기는 그 옛날 무너진 왕국 누란?

 

 

화자는 고향에서 상경하여 유달리 힘든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래서 그런지 돈을 벌러 고국을 떠난 이주노동자들에게 더욱 공감이 가는 모양이다. 하기사 우리나라에서 서울 외엔 다 지방 취급이고 무슨 미국과 하와이급으로 계급을 지어버리니 충분히 그들과 교감하는 것도 가능할 듯하다.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중에서

 

처음엔 너무 크게 틀어놓고 막무가내로 들려주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오늘밤 또 내 잠을 빼앗기게 되네요

아니 오늘도 잠들기 위해 나는 듣지요

길 건너 아파트 주민들 항의도 아랑곳 않고

늦은 밤마다 트는

저 합창곡

(...)

한때 나는 내 고향을 부정한 적 있지요

남쪽 바닷가 고향을 숨기고

땅끝마을 갯벌과 소금기를 털고 서울 말씨만 흉내 냈지요

그런데 이제 히브리 노예들처럼

고향으로 달려만 가고 싶어요

(...)

모니터 화면처럼 깨끗하고 환한 남쪽 하늘 떠올리며

베란다 창문을 열면

별조차 뜨지 않은 흐린 밤하늘이 미끌텅! 들어와요

그러곤 하얀 백지 앞에 무릎 꿇은 나에게

무엇을 그토록 간구했느냐 묻습니다

음악이 스르르 꺼지는 시간입니다

 

 

여태 내가 사는 이곳과 서울을 왔다갔다 했는데 결국 사람 없는 쪽으로 내려갔고 흑역사 가득 담긴 서울은 별로 가고 싶지 않다 ㅋㅋ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전남친과 같이 영화 본 데라던가(거기서 전남친이 갑자기 어머니와 페미니즘에 대해 고래고래 욕하는 바람에 추호도 좋은 기억은 없다;) 가보고 싶은데 시인은 얼마나 고향이 가고 싶을지 나로선 짐작도 하기 어렵다 ㅠ 일단 위의 시들도 그렇고 반복적으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주제로 나오니 시인의 이야기라 생각된다. 그러나 노마드 시대가 된 지금은 이게 오히려 모두의 공통주제가 된 듯도 하고.

어떤 우리들 중에서

 

연극 염쟁이 유씨 보고 나온 일행

대학로 거리를 잠시 배회했다.

지하 이층 어두컴컴한 소극장에서의 죽음 체험한

심각한 표정은 간곳없고 모두 해맑아져 있었다.

살아 있다는 사실이 고맙다고

산다는 게 연극이니 어떻게 사는지가 문제라고,

아니야, 어떻게 죽느냐가 문제다.

(...) 죽음이란 무엇인가, 저자가 누구더라?

셸리 케이건 예일대 철학 교수인데

서울 어느 대학에 왔을 때 보았다며

누군가 아는 체를 한다.

우리 몸이 존재의 전부입니다, 이 화두를 던져놓고

우선 앉아야겠다며 책상 위에 올라앉아

해진 청바지에 헌 운동화 신은 채 다리를 꼬고

아주 어눌한 말씨로 강연하는 그를 보고 놀랐단다.

일부러 초라한 모습을 보인 거야,

평범하고 느리게 사는 법 배워가라고.

(...) 우선 생맥주나 한잔!

몸이 존재하는 한 밥이 먼저야.

 

 

시의 유일한 단점을 말하자면 이 시를 포함해 일부 작품이 너무 일기식으로 편하게 쓴 것 같다는 아쉬움이 든다. 심지어 이 시는 주제도 이 시대에서만 통한다. 하지만 생맥주나 한잔 하자는 구절은 마음에 든다(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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