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게 뭐라고 - 시크한 독거 작가의 일상 철학
사노 요코 지음, 이지수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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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시 반에 눈을 떴다. (...) 베겟머리를 더듬거려 손에 잡힌 책 베트남에서 온 또 한 명의 마지막 황제를 꾸벅꾸벅 졸면서 읽었다. 나는 베트남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 베트남전쟁을 다룬 미국 영화 속 정보랑 보도된 뉴스밖에 모른다. 그렇다 치더라도 백인들은 지독하다. 역사가 시작된 이래 내내 그랬다.

 

 

요새 새벽 4시에 일어나고 있다.

 

오늘처럼 컨디션이 좋으면 새벽 3시 반에 일어난다. 어쨌던 일찍 잘 수 있어서 이런 시간에도 일어나는 게 가능하다. 아직까지 내가 잘 살 수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생각한다. 사노 요코는 일어나기 귀찮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침마다 뭔가 해야 할 일이 많다. 죽는 게 뭐라고에서는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죽은 사람들이라고 시작하더니.. 아무래도 이 작가는 첫 줄에 신경을 쓰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시작이 매우 적절하다고 할까. 역시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는 게 하루를 시작하는 전형적인 방법이 아닌가. 일기 형식으로 에세이를 진행하는 점도 상당히 마음에 든다. 아무래도 난 아직 죽음보단 사는 것에 더 관심이 많은 것 같다.

 

밤에 프로젝트 X(힘든 과정을 극복하고 성공하는 프로젝트를 소개하는 NHK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울었다. (...) 그나저나 저 아무개 도모로요(다구치 도모로요. 프로젝트 X의 내레이션을 담당한 배우)라는 사람의 목소리로 "그때 XX는 말했다. 좋아, 해보자고! OO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라는 내레이션이 흐르면, 설령 프로젝트가 군고구마 장사라 해도 눈물이 날 지경이다. 모처럼 시청자를 감동시키려고 만든 방송이니만큼 우는 게 이득이겠지.

 

 

일종의 극한직업 프로그램인가. 근데 한국에 계신 우리 부모님은 이 프로가 나오면 채널을 돌리신다. 우리도 힘들어 죽겠는데 뭐하러 남이 힘든 걸 보냐고. 분명 저런 프로그램이 나오면 박장대소를 하다 혀를 끌끌 차며 채널을 돌려서 야구를 보시겠지() 사실 나도 저런 걸 보고 운다니 일본은 참 이해가 안 되는 나라구나 싶다.

토토코 씨는 엄청나게 활달하고 몹시 키가 큰 여자다. 요전에 치매 걸린 엄마한테 함께 갔더니 엄마가 "이분은 남편이야?"라고 물었다.

(...) 나는 토토코 씨가 다카라즈카(여성으로만 구성된 가극단)에 남자 역할로 들어갔다면 대스타가 되었으리라고 항상 생각한다.

 

 

 

남자가 한 명 껴 있긴 하지만 대충 사쿠라 대전의 마리아같다고 생각하면 되려나.

비디오 대여점 앞 신호등에서 비디오나 잔뜩 빌려 태평한 섣달그믐을 보내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떴다. 홍백 가요 대전에는 내가 모르는 젊은 애들만 나온다. 모르는 노래뿐이다. 신호등이 녹색으로 바뀌기를 기다리며 가게 출입구를 살펴보니 젊은이들이 들락거린다.

저 애들은 섣달그믐인데도 비디오나 볼 수밖에 없는 외로운 젊은이들인가. (...) 생판 모르는 남들이 비디오 빌리는 풍경에 대고 오지랖 넓게 걱정하는 내 모습을 타인의 눈으로 본다면 어떨까. 멀쩡한 할머니가 섣달그믐에 비디오를 대여섯 개씩 빌린다면 불쌍한 할머니, 황량한 풍경으로 비칠지도 모른다. (...) 나는 체면 때문에 비디오 대여점 방문을 포기했다.

 

 

비디오 대여점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이다 ㅎㅎ 지금은 모두들 넷플릭스를 사용하니 저런 민망해질 일은 없겠지. 그리고 잔소리 듣고 살기 싫을텐데 뭐하러 명절날 굳이 부모님들 뵈러 가냐.. 명절날 가족들끼리 모여서 굳이 스트레스 받을 거면 그냥 다들 집에서 쉬자는 게 내 생각이다. 어차피 사회적 거리두기도 해야할 테고.

"저어,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ㅇㅇ예요." 기억 못한다. "요즘 전원생활 관련 잡지를 만들고 있는데요, 이번 호에서는 가루이자와를 다루려고요. 원고 좀 써 주실 수 있을까요?" "이봐요, 가루이자와랑 내가 사는 기타카루이자와는 다른 데예요." (...) "아, 그렇군요. 그래도 그림이랑 글을 둘 다 부탁드리고 싶은데요." "괜찮은 사람 소개해드릴게요. 나카카루이자와에 사는데 그림이랑 글솜씨가 훌륭해요. 부인은 유리공예가고 본인은 클래식 카를 두 대나 가지고 있죠. 멋지게 사는 사람이에요." "누구신데요?" "이름은 사토 마사히로인데, 카 클래식이라는 잡지에 그림이랑 글을 기고해요. 그림이 정말 좋아요." "저, 좀 더 저명한 분이....... 요전에 이즈 편에서는 아사이 신페이(사진작가이자 배우) 씨께 부탁드렸거든요."

 

 

 

이건 충분히 화낼 만하다 보는데. 가루이자와가 시골인지도 의문스럽지만, 아무튼 사노 요코가 어디 사는지 제대로 확인도 안 하고 전화를 했고.. 기껏 대신할 사람을 소개시켜준다 하니 거절까지; 책에서까지 나와버렸으니 잡지 인생 접게 되어버렸겠지만 좀 매너가 없네; 일본 사람들은 친절하다더니.

 

"난 욘사마 데리고 집에 가고 싶어." 희귀한 남자 K는 말했다. "네가 게이인지 슬슬 걱정된다." 희귀한 남자 K가 비길 데 없는 호색가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

 

 

ㄷ 욘사마의 정절(?)은 무사할 수 있을 것인가.

3일째는 속초에 들렀다가 판문점으로 갔다. (...) 판문점은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에 나온 모습 그대로였다. 그 영화는 예산을 아낄 수 있었을 것이다.

(...) 한국인 친구는 말했다. 삼팔선은 공산주의로부터 일본을 지켜주고 있다고. 게다가 일본은 한국전쟁으로 크게 한몫 보기까지 했다.

"한국은 한 번도 다른 나라를 침략한 적이 없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인의 정은 내부를 향해 있고 애증도 그 안에서 소비되니까 외부로 나갈 여력이 없는 것이다. 북한도 남한도, 한 민족의 애증이 내부에서 부딪히는 거겠지.

 

 

 

아 제발 한남 좀 닥쳐줘 ㅋ 글을 읽으면서 내가 다 부끄럽다. 왜 부끄러움은 항상 나같은 인간의 몫인가 한남들은 저 말이 왜 부끄러운지도 모를텐데(...) 아침에도 밤에도 새벽에도 존내 가르치려 드는 한남들이 리얼하게 등장한다.

사실 이 인간 말고 전에 더 전형적인 한남이 등장하는데 ㅋ 아니 왜 이런 분들과 친구하고 살지? 하기사 이런 분들과 결혼한 여성들이 고생하겠지.. ㅠ 다들 어서 안전이혼하셔야 할텐데 ㄷ

 

쓰지도 않는 휴대전화가 고장 났다. 팸플릿을 보며 배우 고바야시 게이주가 선전하는 노인용 휴대전화를 찾던 중에 아들이 참견했다. (...) "내가 사 줄게." 아들이 말했다. (...) 정사각형의 새빨간 신제품을 손에 넣었다. 뛸 듯 기뻤다. 나는 예순넷의 남동생에게 도전하고 싶었다. (...) 나는 문자만 필사적으로 외웠다. 손이 땀으로 흥건했다. (...) "벨소리도 좋아하는 노래로 설정할 수 있는데. 겨울연가로 할까?" "그런 건 필요 없어." "라디오도 들을 수 있다고." "그런 건 필요 없어. 미안한데 익숙해질 때까지 너한테 연습 삼아 보낼게." 히라가나로만 쓴, 마침표도 없는 문장 네 줄을 만드는 데 30분이나 걸렸고 손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아들에게 전송하고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문자 갔어?" "응, 좀 덜떨어진 사람이 쓴 것 같은 문자가 왔어."

 

 

이게 남의 일이 아니다 ㅠ

나는 핸드폰 얼리어답터도 아니니 팟캐스트같은 걸로 IT 계열에 대해 열심히 알아보는 수밖에.

 "내가 회사에 들어갔을 땐 컴퓨터가 없었어. 처음 쓴 컴퓨터는 크기가 다다미 석 장 정도나 됐으니까. 사용법을 외워서 젊은 애들한테 가르쳤지. 이제 다 가르쳤나 싶으면 또 새 컴퓨터가 들어와. 다시 외워서 알려주면, 또 새로운 게 들어오고. 그런 일의 반복이야." 아, 일본은 어느 회사나 모모 언니 같은 사람이 있었기에 경제를 지탱해왔구나.

 

 

근데 지금은 일본이 왜 이 지경이 되었을까;

그나저나 초반에 컴퓨터 크기 신경쓰인다 무슨 에니악 쓰셨나요;;

 

납작하게 늘어난, 몽골 스모 선수(스모의 천하장사에 해당하는 요코즈나는 2003년부터 몽골 출신 선수들이 장악했다)만큼이나 커다란 바퀴벌레가 자고 있었던 내 아래쪽에서 버르적거린다. 1제곱센티미터 정도의 삿자리무늬가 아로새겨진 날개는 몹시 아름답게 번들번들 빛난다. 깜짝 놀라서 잠에서 깼다. (...) 일주일 전에 노인 병원에 세 차례나 가서 치매 검사를 받았다. 병원에서는 노망이나 치매 같은 단어를 쓰지 않고 건망증 외래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화가 난다. 그게 뭐든 간에 단어를 바꿔 부르면 화가 난다. 정신분열증을 조현병이라고 하거나 장님을 눈이 불편한 사람이라고들 한다. 호칭을 바꾼들 상태가 달라질 리 없다.

 

 

여담이지만 스모 애니도 있는데 치명적인 작붕이 있어 추천을 못하겠음. 만화로 보시길.

그나저나 꿈에 벌레를 봤다는 건 엄청 스트레스 받았다는 메시지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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