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랑 이야기 한림신서 일본현대문학대표작선 4
기쿠치 간 지음, 이경재 옮김 / 소화 / 199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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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게다가 소하치로는 비장하고 있는 패도의 칼이 빠지지 않게 쇠못에 금으로 된 당사자상을 장식으로 붙이고 다녔다. 그것을 그는 늘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누가 그 내력을 물어 보면,

"이것 말인가? 아마쿠사봉기 때 노획한 십자가를 다시 주조해서 만든 것이요" 하며 그는 자랑스럽다는 듯이 미소지었다.

 

 

은혜 갚는 이야기에 나오는 구절이다. 천주교도에 분노하고 그들을 탄압하면서도 그들에게 초자연적인 공포를 느끼고 십자가는 되려 숭배하는 일본인들의 모순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부적으로 쓴답시고 만들었겠지만 도리어 예수님의 노여움을 사는 게 아닐까 ㅋ

참고로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마바라의 난은 정말 엄청났다고 한다. 천주교세는 그 이후 처참하게 몰락했지만.. 그 반대급부로 성공회와 정교회 교세는 성장했으니;; 대단한 종교민족이라고 할까 백귀야행에서부터 알아봤긴 했지만() 또한 그리스도교인은 극소수이긴 하나 그 고문 속에서;;; 신앙을 지켜나갔고 또한 카쿠레키리시탄과 같이 천주교를 암암리에 유지해 나간 면은 실로 주목할 만하다.

 

분명 설화를 리메이크했다 들었는데, 센스있게도 중간중간에 배경 묘사를 넣었다. 일본 문화에 대한 간단한 설명도 있어서 당시의 분위기가 선명하게 눈에 그려지는 듯하다. 그래서인가 뒤에서도 극본이 나오지만, 소설보다는 어딘가 시나리오같은 느낌이 많이 난다.

원한을 넘어서를 읽기 위해 봤는데(사이코패스 감독의 말처럼 반드시 읽어야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은 아니다. 게다가 주인공인 중이 좀 빻아서 극장판의 여주인공처럼 읽다 실망할지도 모른다 ㅋㅋ 게다가 남주는 하필 왜 그런 사무라이한테 감정이입하는지..), 정작 가장 재미있었던 내용은 도주로의 사랑이었다. 그는 교토의 난봉꾼 역할 전문 배우지만, 정작 가부키를 하는 사람들 중에서 그나마 가장 여자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아 팬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사람이었다. 바로 유부녀와 정사를 벌이지 않기 때문인데, 아는 사람이 이제까지 없던 대담한 가부키 각본을 짜서 그것으로 연기를 하게 된다. 바로 유부녀와 진지한 사랑에 빠진 남자 이야기이다. 현재 에도에서 온 배우가 뜨는 중이었기 때문에 그는 어떻게든 이 역할을 잘 소화해내야 다시 배우로서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궁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옛날부터 알고 지냈던 한 유부녀에게 거짓 사랑 고백을 한다. 이전엔 가짜로 난봉꾼 연기를 했으나 이젠 정말로 여성을 농락하는 난봉꾼이 된 셈이다. 그러나 도주로를 옛날부터 잘 알고 있었던 유부녀는 그의 고백이 정말인지 의심한다. 도주로의 연기는 유부녀와 다른 관객들에게 먹힐 수 있을까.

사회에 진출한 여성에게 남편이 가정폭력을 가한다는 내용인 분재에서도 그렇지만 이 책은 특이하게도 여성이 받는 불평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도주로의 거짓 고백은 탁월하고 그걸 받은 대상인 유부녀는 '복이 많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시선에서도 그게 전해진다. 그녀가 그것을 모욕으로 간주하던 말던 신경도 쓰지 않는다고 할까.. 이건 실제 전해지는 설화에 기초한다기보단 설화를 각색한 기쿠치 간의 관점인 것 같다.

마침 가부키에 관련된 애니메이션들을 보고 있는지라 관련 지식도 쌓을 수 있어서 좋았다. 일본에서는 가부키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았던지, 생각보다 눈에 익은 단어들이 많았다. 가부키에 의해 유래된 단어들이 현재에도 쓰이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나는 그 남자를ㅡ지금 젊은이들의 말대로 하면ㅡ사랑을 하게 된 거죠. 웃지 말아요. 할머니는 참회하는 생각으로 얘기하고 있는 거니까. 그 남자는 배우였어요. 과부가 배우에게 반한다는 것은 세상에 흔한 일로, 자네에게도 우스운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지만, 내 얘기는 조금 달라요. 내가 사랑을 느낀 그 배우는 아사쿠사의 사루와카초의 모리타좌ㅡ이 극단은 유신 후에 쓰키지로 옮겨서 지금은 신토미좌가 되었는데, 여기 출연하고 있던 소메노스케라는 배우였어요. 와카슈가타였는데 인기도 없고, 집안 내력도 없는 배우였지만 왠지 이 배우가 무대에 나오면 나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혼이 나간 듯, 꿈을 꾸고 있는 듯한 마음이 되고 마는 거예요.

 

 

Boy meets girl 같은 상황을 굉장히 잘 묘사하시는 듯 ㅎㅎ

소베의 장녀인 금년 11세가 되는 오슌의ㅡ오칸은 그녀에게 첫손녀였던 오슌을 얼마나 마음 깊이 사랑했는지 모른다ㅡ끊임없이 흐느껴 우는 소리가, 처음에는 죽어가는 오칸의 가슴을 슬픔에 휘저어 놓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오칸의 의식이 점점 희미해지면서, 가장 사랑하는 손녀딸의 울음소리가 조금도 실감을 불러일으키지 않고, 영혼을 영원한 잠으로 유인하는 음률의 자장가나 그 무엇처럼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저자는 그래도 죽음을 경험해보진 않았겠지만 ㅎㅎ 그래도 죽음은 저렇지 않을까 하고 나도 어렴풋이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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