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날은 - 세사르 바예호 시선집
세사르 바예호 지음, 고혜선 옮김 / 다산책방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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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XXV 중에서

하늘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드리운 저 얇은 막 뒤로 헛되이 떠다니는 너희들. 이 황혼에서 저 황혼으로 표류하면서, 아픔도 못 느끼는 상처 앞에서 요란 떠는 너희들, 내 너희들에게 말하노니, 삶은 거울 안에 있고, 그대들은 죽음, 바로 그 자체이니라.

(...)

너희들은 죽었다. 그전에도 결코 살아본 적이 없었지. 지금은 아니지만 한때는 살아 있었노라고 누구나 다 그렇게 말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결코 살아본 적이 없었던 삶의 시신에 불과했던 것이다. 서글픈 운명, 항상 죽어 있었던 존재의 운명. 푸르렀던 적이 없었는데, 이미 마른 잎이 되어버린 운명. 고아 중의 고아.

 

 

 

미치다 못해 크리피한 시인 듯;;; 

 

시집 치곤 꽤 두껍긴 한데, 읽다 보면 절대 두껍다고 느끼지 못할 거다. 생식기가 턴A자 형태로 덜렁거리고 분뇨와 피가 튀는 적나라하고 고어한 책인지라, 혹 에드가 앨런 포같은 장르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영원한 주사위 중에서

ㅡ나에게 열정적인 박수를 아끼지 않으셨던 위대한 마누엘 곤살레스 프라다 선생께

 

주님, 당신의 촛불을 모두 켜시고

닳고 닳은 주사위를 가지고 함께 게임을 해봅시다.

어쩌면 전 우주를 걸고

게임을 하다 보면

죽음의 신의 두 눈이 모습을 드러낼지 모릅니다.

진흙으로 만든 어두운 두 장의 에이스처럼.

 

오, 주님! 이 캄캄한 밤, 무언의 밤,

더 이상 게임을 못 하실 겁니다.

험한 일에 몸을 굴려 닳아지고

둥글어진 진흙은

구멍, 그것도 무덤 같은 거대한 구멍이 아니면

구르는 것을 멈출 수도 없게 되었답니다.

 

 

 

탁월하고 멋진 부분, 의미심장한 내용이 한장한장 읽을 때마다 오금을 저릿하게 한다. 

 

표현력도 넘 저 세상. 세상에 이 책이 내 책장에서 눈에 띄지도 않은 채 오래 박혀 있었다니... 내가 만난 시집 중 몇 안 되는 최고의 시집이었고 앞으로 다른 시인의 시집에 만점을 주기는 당분간 힘들지 않을까 싶다. 눈이 높아졌어..

 

오월 중에서

 

새벽녘에 야라비를

구성지게 불렀던 양치기 소녀.

오, 가엾은 비너스

기품 있는 구릿빛

헐벗은 팔에

향긋하고 신선한 장작을 담는다.

개에 쫓긴 송아지 한 마리

가파른 언덕길로 달려간다.

송아지 목의 방울은

꽃피는 날에 베르길리우스에게 바치는

노래를 부른다.

 

 

 

민족심이 강하셨던 모양인지 전통 풍습(잉카)에 관련된 이야기가 초반에 가톨릭과 섞여 들어간다. 

 

지금은 다 옛날 얘기가 되긴 했지만, 이런 묘사도 새로워서 좋다 ㅎ 운동권 같은 글들은 후반부에 나온다. 뭐 읽을 때마다 전신에 소름이 돋고 그런 미사여구는 이제 진부하더라도, 체 게바라가 필사할 만한 글들이라 생각된다. 문맹인 민중을 위해서 썼다더니 과연 반복되는 구절이 많아 외우기 쉽고, 운동권에서 몸 잠깐 담갔던 분들이라면 암시를 금방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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