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4년 현대문학 핀 시리즈 시인선 7
김행숙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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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혼

 

위와 아래를 모르고

메아리처럼 비밀을 모르고

새처럼 현기증을 모르는 너를 사랑해

 

나는 너를 강물에 던졌다

나는 너를 공중에 뿌렸다

 

앞에는 비, 곧 눈으로 바뀔 거야

뒤에는 눈, 곧 비로 바뀔 거야

 

앞과 뒤를 모르고

햇빛과 달빛을 모르고

내게로 오는 길을 모르는

아무 데서나 오고 있는 너를 사랑해



 


 

시와 연관 없을지도 모르지만 순간 이거 읽다가 어느 연극인의 말이 생각나더라. 모든 것을 줄 수 있는 사랑을 연기하는 게 가장 어렵다고.


동생에게 '난 이미 망했으니 너나 잘해라'라고 했는데 이건 괜히 한 소린 아니었다.

어머니는 일단 내가 데려와 소개시킨 소수의 전남친들의 꼴을 보고는 "너 결혼하지 말고 나랑 같이 재밌게 살자"라고 간절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하루는 외할머니가 82세의 나이로 침대에서 자다 떨어져 병원에 입원하셨기에 급히 의정부 병원으로 갔다. 약간의 치매끼도 있으셔서 횡설수설하는 대화가 되었는데, 어머니가 내 결혼을 걱정하시는 순간 외할머니가 눈을 크게 뜨시더니 이렇게 두 마디를 말씀하셨다.

"결혼 그냥 나중에 하면 안 되겠니?"

"..."

"남자가 능력 없으면 니가 먹여 살릴 자신 있니?"

그러고 다시 횡설수설로 돌아가셨다. 내가 이럴 줄 어찌 알았겠나. 난 전전전전남친과 결혼해서 천년만년 살 줄 철썩같이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를 내가 차 버렸다. 사랑은 무섭고 나는 나를 잘 모르겠다. 결국 이렇게 늙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1984년이라는 미래 중에서

 

흐르는 강물에 번호를 매긴다면, 옷감을 끊어서 팔듯이 흐르는 강물을 끊어 가격을 협상한다면, 강남과 강북을 나눈다면, 사람처럼 나눈다면, 저물녘에 보랏빛 강물을 바라보다가 눈앞이 캄캄해지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저마다 절벽이다.

(...)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사람들은 낡은 라디오처럼 지지직거리는데, 흐르는 강물도, 흐르는 시간도 가져가지 않은 것들이 그대로 굳어서 어느 고집 센 노인이 짚고 선 지팡이처럼 미래의 안개 속에 꼿꼿이 서 있네.



 


 

철학에서도 그런 말을 들어왔지만, 역사도 흐르는 강물과 같아서 진짜 진실을 가리고 논쟁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최근 들린다.


나도 그에 좀 공감하는 바이다. 환단고기는 소설처럼 들리는 바가 없잖아 있지만, 다른 사람들에겐 설민석이 재밌을 수도 있지 뭐(...) 내 얘기는, 사람 사는 게 다 복잡해서 사건을 추적할 때 어떤 것을 절대적 원인으로 꼽을 수는 없단 것이다. 더불어 1초 전의 나와 현재의 내가 다르다 하여 잘라낼 수는 없는 것이다. 확실히 분업은 사람들의 무언가를 잘라서 위태롭게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지만, 그 전에도 가난한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모든 사람이 사람을 온전히 존중하고 사랑할 때가 언제쯤 올지 생각하면 머리가 복잡해진다. 그러나 김행숙 시인은 투쟁하여 미래를 쟁취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 인류의 오랜 조상들도 이런 투쟁을 거듭해왔을 것이다. 사회는 그렇게 쉽게 변화하지 않기 때문에, 투쟁을 지속하며 버텨내려면 계속 자신이 투쟁에 참가함으로서 사회가 좋아지고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활동가들은 많은 책을 읽고, 많은 사유를 한다. 이 시집에서도 그와 같은 깊은 연륜이 느껴진다.

 

소녀의 꿈

 

거실에 새장을 걸어놓고 새를 기다렸다

날마다

 

이상한 음계로 코를 고는 노인과

그리고 한밤중에 홀로 빛을 내는 비누

뒤축이 닳은 구두와

장롱 문짝에 사로잡힌 사슴과 구름과

돈을 훔치는 소녀

 

그리고 오늘 새벽엔

소녀가 흐린 창문 속에서 영원히 사라진다

단 한 번 날아간 그 새처럼



 


 

짧은 시집이지만 정치에 관한 걱정과 환경오염에 대한 분노, 그리고 신비에 찬 서정시를 잘 버무렸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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