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린 아픔
소피 칼 지음, 배영란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5년 1월
평점 :
품절


아프리카 오지에서 있었던 일이다. 1980년 1월 초, 나는 벽에 머리를 박으며 소리쳤다. "뷔댕, 당신을 죽일 거야. 죽여버릴 거라고!" 뷔댕은 내 담당 치과 의사였다. 그는 내게 치료가 잘 끝날 거라 약속했었다. 격한 고통만큼이나 격한 반응이었지만, 적어도 그날 내게는 고통을 느낄 객관적인 명분이 있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저자의 글은 아닌데 이게 정말 진정한 시린 아픔이 아닐까 생각된다. 내 이까지 전해지는 거 같음(...) 이걸 인상깊은 글이라고 하면 좀 그럴 거 같지만 내가 워낙 치과에 대한 사연이 많아서.


사진이 계속 나온 뒤, 이별했던 날 이후로 그 사건을 반복하여 회상하며 글을 쓰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어차피 같은 일이라 계속 했던 얘기 또 할 수도 있을 텐데 그때그때 다른 정보를 덧붙여서 새롭게 느껴진다. 사실 내 인생이 요샌 그렇게 새로운 일도 없어서, 이런 방식으로 글을 써야 하는데 굉장히 모범적인 책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이 처음 나올 때 홍보에선 여행기라 했는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 책을 읽어보니 여행기라기보단 여행을 하다 보니 멀리 떨어져 있게 된 남자와 헤어져 졸지에 실연 여행기가 되어버린 이야기이다. 이유 모를 병을 앓던(그 시대 여성들에게 닥친 역사를 볼 때 홧병일지 모른단 생각이 들지만) 이사벨라 버드 비숍에게 바람을 쐬는 게 좋다고 했다던 의사가 문득 떠오른다. 그런 남자와 헤어진 게 잘 되었다는 생각도 들지만, 아무튼 저자는 여행할 때 찍었던 사진과 물건들을 깨끗하게 보관했다가 책에서 하나하나 꺼내든다. 조금 소름끼치긴 하지만(...) 신기하고 소중했던 순간들을 버리거나 무심코 훼손하는 일 없이 보관하는 사람이 요새 얼마나 될지 생각해본다. 나는 독립영화관에서 받았던 세월호 리본 정도는 꽤 오랫동안 보관하는 것 같다. 이 저자처럼 한 20년 넘은 건 아니지만;;

 

바람을 피우는 사람들을 가볍다거나 쉽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이런 부류 중 친구로 두기엔 나쁘지 않은 사람들이 몇 있다. 어차피 바람핀 사실을 상대방에게 말했다간 난리가 날테니 숨기겠지만(사실 강간 같은 경우로 진행된 경우도 말해봤자 난리나는 건 마찬가지다.) 나 자신에게 정직한 건 중요하다. 솔직히 자신의 나쁜 짓은 숨기고 애인의 나쁜 짓만 꼬집어 한탄할 수도 있지 않은가. 난 글을 솔직하게 쓴 그녀가 맘에 든다. 저술가로서의 직업 정신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되지만. 그리고 책을 계속 읽어보심 알겠지만 남자가 정말 비열한 방법으로 헤어져서(...) 아무튼 그건 이 책을 읽은 독자의 판단에 맡기겠다.

 

사랑하는 당신에게.

1984년 11월 4일 밤 11시 48분.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전등이 밝혀진 작은 역에 도착했어. 확성기에서는 혁명가가 울려퍼지고, 작업복 차림에 모자를 쓴 사람들이 보이네. 중국이야.



 


 

아시아를 신비화시키는 분위기만 아니라면 그럭저럭 읽을 만한데 쩝. 그쪽이 가장 아쉬움. 이혼의 사당인가 거긴 또 쓸데없이 왜 갔는지 지금도 이해가 안 가... 근데 인상적인 글귀 중 이게 유일한 저자 글이네 쩝;

 

나는 매일 밤 같은 꿈을 꾸었다. 꿈속의 상황은 어느 거리의 한 공공장소에서 펼쳐진다. 내가 사랑했던 내 아내는 아무 말이 없다. 하지만 아내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 이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커다란 와이드 스크린 화면에서 신이 내레이션을 해주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과 실연의 경험을 나눴다더니 그 경험도 썼는지 약간 다른 내용들이 군데군데 있다. 저자와 헷갈리지 말아야 한다.

 

1979년 11월 12일 오후 6시. 연녹색 비단 잠옷을 입은 채 죽어가는 내 어머니를 바라보고 있던 나는, 어머니가 마지막 숨을 거두시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어머니께서는 5개월 전부터 소생실에 계셨는데, 그날 병원에서 어머니를 한 병실로 옮겼다. 치기 어린 마음에서였는지, 내 어머니가 암에 걸릴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였는지, 나는 어머니가 다시 움직이고 세상을 바라보는 자유를 되찾을 수 있으리란 착각의 즐거움에 빠져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내게 오른쪽으로 가지 말고 왼쪽으로 방향을 틀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 아버지는 우리처럼 달려가지 않았다. 모든 게 연극일 뿐임을, 한낱 눈속임에 지나지 않음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실연이 테마인데도 죽음에 관련된 글이 꽤 많이 나온다. 사실 평생 잊을 수 없는 아픔이라고 한다면 나와 가까운 누군가의 죽음이 아닐까 싶다. 특히 좋은 사람을 두 번 다시 못 본다는 건 살아있는 사람에게 몹시 불행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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