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것들의 낮 민음의 시 216
유계영 지음 / 민음사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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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토르소 중에서

 

 

 

방은 더 이상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

 

흐트러진 상태에 아무 보호도 없는

 

이것은 순진한 상태?

 

ㅡ앙리 미쇼, 나타남ㅡ사라짐에서

 

 

 

세상에서 가장 못생긴 남자를 사랑하게 된 것 같아

 

눈알이 도마 위에서 굴러떨어져

 

열린 창문 틈으로 지켜본다

 

나는 길어지는 허리

 

칼날의 곡선

 

(...)

 

나는 밤거리의 어린 남자에게

 

오빠ㅡ하고 불렀다

 

 

 

내가 사랑하게 된 남자는

 

빨간 글로스를 바르고 아무 말 없는 계단처럼

 

침착하게 눈멀고

 

 

 

지금 읽는 소설에서 아주머니들이 주인공을 오빠 혹은 오라버니로 부른다는데 그래서 그런가 어쩐지 기억에 자꾸 남는 시이다 ㅎㅎ 보다시피 시들이 범상치 않다. 낮에 읽고 있는 중인데 '빛이 있으면 행복한 줄 알지? 그럼 적도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왜 불행해?'라고 말하는 듯하여 묘한 기분이 든다. 

 

옛날에 왕따를 당하고 믿는 사람에게 배신을 당해 힘들 때 방이 점점 수축하는 것처럼 느껴지던 때가 있었다. 게다가 이 시인의 시에선 벼랑까지 팽창한다. 화자가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렸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적이지 않다. 시인은 항상 시에서 자연에 대한 애정과 사랑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환경운동적이지 않아 더욱 특이하다. 하기사 사랑이 마음의 병이라 하는 사람도 있지.

 

나는 생각한 것을 말이나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시인은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행으로 옮기지 않는 자신이 좋다고 했다. 나는 내가 나이들어 쉽게 지치고 주름살이 생기는 게 싫어 일찍 죽기를 바란다. 그러나 시인은 천천히 노인이 되는 모습을 즐기기 위해 오래 살고 싶다 이야기한다. 나는 아침형 인간인데 시인은 밤에 깨어있는 걸 좋아한다는 인상을 준다. 내가 개를 키우고 시인이 고양이를 키우듯이, 나와 다른 사람의 글을 보는 일은 때로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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