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주의, 남자를 살리다
권혁범 지음 / 또하나의문화 / 2006년 1월
평점 :
절판


내가 만약 여자 교수라면? 수업 시간에 남학생들이 시시덕거리며 날 느끼한 눈길로 바라볼 때 곤혹스럽고 치욕스럽겠지. 증거가 없으니 뭐라고 야단칠 수도 없고. 지들끼리 술집에서 사석에서 나를 안주 삼아 '음담패설'을 얼마나 주고받을까? (...) 내가 만일 회사에 다니는 여자라면? 회식 자리에 갈 수도 안 갈 수도 없고. 거기서 슬쩍 슬쩍 내 손을 잡고 어깨에 손을 올리거나 심지어 내 허리에 손을 대려는 '치한'들이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기라도 굽는 자리에 가면 어떻게 하지? 내가 고기를 뒤집지 않으면 '이기적'이라고 욕할 거고 그런 일을 하게 되면 내 스스로 성차별을 인정하는 거고.




 


 

200장 남짓으로 얇지만 2000년대 중반 당시 업계(?)에서 폭발적인 논란을 끌었던 문제의 책이다. 이슈가 된 건 한국 남자와 비슷하기도 한데, 그쪽 책이 한국 남성을 분석했다면 이 책은 아예 남성의 시각에서 페미니즘에 대해 본격적으로 다룬다는 데서 현저한 차이가 있다. 사실 이 당시 남성들이 페미니즘에 대한 내용을 다루는 책이 엄청나게 많았는데, 대부분 엄청나게 욕먹고 사장되었다. 반면 이 책은 현재도 값싸고 가벼운데다 이해하기 쉽기 때문에 페미니즘이라는 사회현상에 발만 담그고 싶을 때 가볍게 읽기에 좋다. 무엇보다 화자의 입담이 아주 좋다. 깊은 생각을 재밌게 다루면서 '제가 이렇게 깊이 생각하고 있어요'라고 어필하기엔 흔치 않다. 아무래도 서문이 가장 효과적인 역할을 했으리라.



현재는 내가 지금 나의 성과 다른 성이라면 어떨지 자연스럽게 상상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최근에 어떤 방송에서 남성 진행자가 비욘세의 어느 노래를 소개하면서, 자신은 이 노래에 불편을 느꼈다고 한다. 비욘세는 자신이 남자였으면 불합리한 일이 닥쳤을 때 친구들이 자신을 도와줬을 것이라 말한다. 그는 '남자들이 다' 이렇게 의리있고 '그렇지는 않다'고 주장했다. (어디서 많이 본 구절이지 않습니까 여러분?) 그런데 막상 비욘세의 코러스에서는 남성에게 배신당한 여성의 상실감이 절절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남성은 게임 중독자였을지도 모른다. 게임 속 친구들과 어울리느라 데이트도 까먹었을 것이다. 여자는 신뢰를 깨버린 남성에게 화가 나서 그를 찾아가 친구인지 나인지 둘 중 하나를 택하라 했을지도 모른다. 남성은 친구를 선택하고 친구들과 함께 그녀를 안주삼아 비웃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 음악은 남성들이 의리있다는 일반화가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그 남성 진행자는 그 가사의 맥락을 다 잘라버리고 자기가 듣고 싶은 구절만 들은 것이다. 이는 자신이 배운 게 많고, '자기만이 느끼는' 불편함을 나열하면 그 방송을 청취하는 다른 사람들이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아마 그럴 것이다. 남성 진행자는 똑똑하고 유명하고, 무엇보다 '자신도 모르게' 가부장적 이론을 펼쳤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선 가부장제가 주류이다. 2003년부터 16년간 변한 게 없는 것이다. 난 남성들의 사고전환이 무엇보다 페미니즘 계열에 필요하다는 걸 느낀다. 분하지만 남성들이 더 힘이 세고, 더 권력이 있는 현실이 사회의 일반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이들이 '자신이 여성이라면 이런 발언과 행동을 어떻게 여길까' 생각한다면 사회의 진보는 어쩌면 금방 올지도 모른다.



P.S 뉴튼(과학)과 버핏클럽(수학)을 읽을 때는 대체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지 세보지도 않았는데 새 여성학강의를 오늘내로 해치워버리는 내 모습을 보고 참 나란 인간은 굉장히 편식을 좋아한단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요새 뇌 속에 애니메이션이랑 페미밖에 없구만요 재미있고 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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