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 쿤데라, 소설의 기술

소설이란 무엇인가? 소설은 “작가가 실험적 자아(인물)을 통해 실존의 중요한 주제를 끝까지 탐사하는 위대한 산문 형식”(194)이며 “덧없이 달아나는 몇몇 정의들을 붙잡으려는 길고 긴 추적 외에 다른 아무 것도 아니다”(207). 쿤데라는 ‘세르반테스의 절하된 유산’이라는 제목의 1부에서 후설의 유럽의 인문 정신의 위기에 관한 유명한 강연(<유럽 학문의 위기와 초월론적 현상학>에 수록)을 언급하면서 글을 시작한다. 후설의 요점은 그리스 철학에서 연원한 ‘유럽의’ 인문정신의 위기는 갈릴레이와 데카르트가 세계를 기술적이고 수학적인 대상으로 축소하고 생활세계(Lebenswelt, 삶의 세계로 번역됨)를 제거해버린 유럽 과학에서 비롯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근대의 창시자는 데카르트만이 아니라 세르반테스(13)이기도 하며, 철학과 과학이 망각한 구체적인 삶과 인간의 존재를 찾아내려는 유럽의 위대한 예술은 세르반테스와 더불어 탄생했다. 세르반테스는 세계를 애매성으로 이해하고, 유일한 절대 진리가 아니라 모순되는 상대적 진실의 더미와 맞서야 한다는 것, 불확실함의 지혜를 지니라고 요구한다. “인간은 선악이 분명히 구분되는 세계를 원한다. 이는 이해하기에 앞서 심판하고자 하는 타고난, 억누를 수 없는 욕망이 인간에게 있기 때문이다.”(17) 쿤데라가 주장하는 소설의 지혜는 애매성과 불확실성의 지혜이다. 아이러니는 화나게 만드는데, 이는 아이러니가 빈정거리거나 대들어서가 아니라 세계를 애매하게 보여줌으로써 우리에게 확실성을 앗아가기 때문이다(199). 동시에 그는 헤르만 브로흐의 말, “오직 소설이 발견할 수 있는 것만을 발견하라. 그것만이 소설의 유일한 존재 이유다”를 긍정하면서, “앎이야말로 소설의 유일한 모럴”(15)이라고 본다. 탈은폐로서 진리가 소설의 모럴이기도 하다면, 쿤데라가 인용하는 다음의 얀 스카첼의 말은 비단 시 뿐만 아니라 소설의 정의에도 해당되는 말이다. 즉 “시인은 시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시는 저 뒤쪽 어디에 있는 것 오래 오래전부터 그것은 거기 있었고 시인은 다만 그걸 찾아내는 것일 뿐”(143) 후설과 하이데거를 자주 언급하면서 쿤데라가 밝히듯, 소설의 존재 이유는 생활세계를 영원한 빛 아래 간직하고 세계-내-존재인 우리를 ‘존재의 망각’으로부터 지키는 것이며, 그렇기에 오늘날 소설의 존재는 더욱 더 요구되는 것이 된다. 아름다움은 “더 이상 아무런 희망도 없는 인간에게 가능한 마지막 승리다. 예술에서 아름다움이란 아직 말해지지 않은 것이 갑자기 뿜어내는 빛이다. 시간은 위대한 소설들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이 빛을 결코 흐리게 만들지 못한다. 인간의 실존이란 인간에 의해 끊임없이 망각되는 것이어서 소설가들이 발견해 낸 것은 그것이 아무리 오래된 것이라 하더라도 끊임없이 우리를 놀라게”(198) 하는 것이다. 쿤데라가 소설에 대해 서술하는 부분들은 다분히 현상학의 영향이 많이 느껴지는 대목들이 많지만, 2부의 대담에서 그는 현상학적이라는 수식어를 직접 사용하는 것은 거부한다. 그는 예술을 철학이나 이론적 경향의 한 갈래로 보는 사람들을 무서워한다고 밝히면서, 소설은 이미 프로이트 이전에 무의식을, 마르크스 이전에 계급투쟁을, 현상학자들 이전에 현상학을 실천(예컨대 프루스트)했다는 것이다.(52) 쿤데라는 시나 철학은 소설을 포용할 수 없지만 소설은 시나 철학을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으며, 다른 장르들을 수용하는 경향이 소설의 특징이라고 본다(98).

그런데 소설에서 자아를 포착하는 것은 그 실존의 본질적 문제를 포착한다는 것이다. 또는 그가 작업의 가설로 삼은 정의에 따르면, “시인이란 그가 들어갈 수 없는 세상에 어머니에 의해 이끌려 들어와 이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게 된 젊은이다.”(51) 물론 쿤데라가 보는 소설은 물론 근대 유럽과 마찬가지로 사라질 수도 있는 것이지만, 그것은 만일 소설이 사라진다고 해도 그것은 소설의 힘이 다해서가 아니라 소설이 더 이상 자기 것이 아닌 세계에 처하게 되기 때문이다. 또는 그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말했던 것처럼 소설은 “작가의 고백이 아니라, 덫이 되어버린 세계 속에서 인간의 삶이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 현상의 상대성과 애매성에 기초한 세계의 모델인 소설은 전체주의적 세계와는 양립할 수 없다. 이는 정치, 도덕적 구분임과 동시에 존재론적인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전체주의적 진리는 상대성과 의혹과 질문을 제거하고, 따라서 소설의 정신과 부합하지 않는다(27).

잠시 유럽 소설의 역사를 보면 최초의 소설들은 무한해 보이는 세계를 편력하는 여행담들이었다(<운명론자 자크>, <돈키호테>). 그런데 디드로 이후 반세기가 지난 후 발자크에게는 시작도 끝도 없는 지평선이 경찰, 법률, 재정, 범죄, 군대, 국가와 같은 사회 제도의 배후로 사라지고, 역사라는 기차에 실려간다. 훨씬 오래 후 엠마 보바리에게 지평선은 울타리처럼 좁아졌고, 일상의 권태 속에서 꿈과 몽상만이 중요하게 된다. “잃어버린 외부 세계의 무한함은 영혼의 무한함으로 대치된다. 유럽의 가장 멋진 환상 중 하나인, 대체할 수 없는 개인의 독자성이라는 환상이 피어나게 되는 것이다.”(19) 그러나 이 무한한 영혼에 대한 꿈은 전능한 사회의 초인간적 힘이 인간을 장악하면서 그 신통력을 잃는다. 이제 개인은 겨우 성 앞에 선 K, 측량 기사에 지위에 지나지 않게 된다. 에마 보바리처럼 꿈 조차 꿀 수 없다. 인간이 자신의 영혼이라는 괴물하고만 싸워야 했던 평화로운 시대는 조이스와 프루스트의 시대를 마지막으로 끝났으며, 카프카, 하세크, 무질, 브로흐의 소설에서 괴물은 바깥에서, 역사에서 온다. 이 역사는 비인격적이고, 다스릴 수도, 예측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그러나 쿤데라가 역사를 다루는 네 가지 방식(57~9)은 그의 소설적 입장과 관련해서 새겨볼 만하다. 그는 첫째로 모든 역사적 정황을 최대한 경제적으로, 소품처럼 취급하며, 둘째로 역사에서 단지 인물들의 실존적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에만 관심을 갖는다. 셋째 원칙은 역사적 연대기는 사회의 역사를 기록하지 인간의 역사를 기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네 번째 원칙은 역사적 정황은 소설 속 인물에게 새로운 실존적 상황을 만들어 줄 뿐 아니라, 역사 그 자체가 실존적 상황으로 이해되고 분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두브체크가 소련군에 투옥되었다가 돌아온 에피소드는 실존의 매우 일반적인 범주로서 ‘나약함’을 보여준다(이 책의 처음 제목은 ‘비체험의 위성’이었다고 한다. 190쪽. 비체험이란 인간 조건의 한 특질로서, 사람은 단 한번 태어날 뿐이기 때문이다). 가령 <웃음과 망각의 책>에서도 프라하의 봄은 단순히 정치적, 역사적, 사회적 차원에서 묘사되는 것이 아니라 행위를 통제하지 못하는 나약함이라는 실존적 상황으로 묘사된다. 인간이 세계의 주인이고 소유자라는 데카르트의 명제는, 문득 그가 지닌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자연의 주인도 아니며, 역사의 주인도 아니고, 자신의 주인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됨으로써 파괴된다. “신도 사라져버렸고 인가도 더 이상 주인이 아니라면 도대체 주인은 누굽니까? 지구는 주인 없이 공허 속을 전진하고 있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죠.”(64) 소설 바깥에서 사람들은 언제나 확인의 영역에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하는 말에 대해 확신한다. 그러나 소설의 영역에서는 확인하지 않는다. 그것은 “놀이와 가설의 영역”(116)이며 소설적 성찰은 본질적으로 의문적이고 가설적이기 때문이다. 소설가들은 단지 “실존의 탐구자”(68)일 뿐이며, 카프카의 표현을 빌자면, 소설가는 “자신의 생애라는 집을 헐어 그 벽돌로 소설이라는 다른 집을 짓는 사람”(196)이다. 따라서 소설가의 일대기를 쓰는 전기 작가는 소설가가 세운 것을 허물고 허문 것을 다시 세우는 셈으로, 소설의 가치도 의미도 밝혀주지 못하는 것이 되고 만다.

관련하여 2부 소설의 기술에 대한 대담과 4부 예술의 구성에 대한 대담에서 쿤데라가 자신의 소설적 기법을 언급하는 부분 역시 흥미로운데, 그는 한정된 지면에 현대세계에서 인간 실존의 복잡성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그 특유의 다성적 대위법 뿐만 아니라 생략의 기법이 매우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생략은 “사물의 본질로 곧장 갈 것을 요구”하는데 이는 작곡자 레오 야나체크의 요구이기도 했다. 즉 “기법의 자동성과 장황함을 제거해 소설을 압축”(109)하는 것이다. 또한 소설에서 시간적 길이의 템포의 변화는 정서적 분위기의 변화까지도 내포하는 것으로서, 쿤데라는 그 자신이 스물다섯살까지만 해도 문학보다 음악에 더 끌렸음을 고백한다(133). 특히 가벼운 형식과 무거운 주제의 결합(<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키치’)은 잘 알려진 것처럼 그가 선호하는 방식이다. 요컨대 쿤데라 소설의 두 가지 원형적 방식은 “첫째, 7이라는 숫자에 바탕을 둔 건축술을 통해 이질적인 요소들을 결합하는 다성적 구성, 둘째, 희극적, 동질적, 극적이면서 그럴 듯하지 않음과 맞닿아 있는 구성”(140)의 방식. 이 밖에 쿤데라가 제시하는 소설에 관한 여러 개념어들도 6부에서 제시된다. 가령 유명한 서정적 바람둥이(모든 여자들에게서 자신의 이상을 찾는)와 서사적 바람둥이(여자들에게서 여성적 세계의 무한한 다양성을 추구하는)의 구분과 헤겔의 <미학>에서 다루어진 고전적인 분류(서정적인 것은 자신을 고백하는 주체의 표현이고 서사적인 것은 세계의 객관성을 파악하려는 정열로부터 오는 것)와의 상응 등등.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나의 “거대한 미학적 혁명”이자 “예술적 기적”인 카프카에 대해서는 주로 5부에서 다루어진다. 그의 경이로움은 인간의 행위를 결정하는 내적 동기가 무엇인지를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 동기가 더 이상 아무 무게도 지니지 않을만큼 외부적 결정이 압도적인 것이 되어버린 세계에서 인간에게 남은 가능성이란 어떤 것인지에 대해 묻는 것에 있다(43). 카프카의 세계는 관료화된 세계인데, 이때 관료성은 여러 사회 현상들 중 하나가 아니라 “세계의 본질로서 관료성”(73)이다. 그렇다면 대체 ‘카프카적인 것’은 무엇인가?(147~151) 우선 첫째로 카프카에게 제도는 그 자체의 법칙만을 따르는 메커니즘, 그 법칙이 언제, 누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지도 알 수 없고, 인간적 이해 관계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으며 이해되지도 않는 것이다. 둘째로, 카프카적 세계 속에서 서류는 마치 플라톤의 이데아와도 흡사한데, 진정한 실체인 그것에 비해 인간이라는 육신을 지닌 존재는 단지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측량 기사 K나 프라하의 엔지니어는 서류 속 신상카드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거나, 또는 이보다 더 하찮은 존재이다. 권력은 자동적으로 자신의 종교를 만들어내며, 권력이 신처럼 행동하는 모든 곳에서 그 자신을 향한 종교적 감정을 촉발한다는 것 등, 카프카 본인이 종교적 알레고리를 쓰지 않았더라도 카프카적인 것이 종교적인 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셋째로, 죄의식을 감당하지 못하고 평온을 찾기 위해 스스로 처벌받고자 하는 라스콜리니코프의 경우(죄가 벌을 만든다)와는 달리, 카프카에서는 벌 받는 자가 자신이 벌을 받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 부조리함은 감당할 수 없는 것이기에 벌을 받는 사람은 평온을 찾기 위해 자기가 당하는 고통을 합리화하려 한다. 즉 벌이 죄를 만든다. 넷째로 카프카적인 것에서 코믹한 것은 불가분한데, 카프카적인 것은 우리를 농담의 내장 안으로, 코믹한 것의 무서움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비극은 인간의 위대함이라는 멋진 환상을 줌으로써 우위안을 제공한다면, 희극은 이보다 가혹하게,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노골적으로 폭로한다(216).”(이중 셋째, 넷째 특징은 지젝이 자신의 이데올로기론에서 활용하는 카프카적인 것에 상응한다)

쿤데라가 보는 카프카적인 것은 사회적인 것이나 정치적인 것이 아니며, 카프카적 세계에는 자본주의도 사유재산도 계급투쟁도 없다. 그것은 전체주의도 아니며(그러나 비일관적이게도 쿤데라는 또한 전체주의 국가와 관료제를 동일시한다), 당도, 이데올로기도 없다. 다만 카프카적인 것은 “인간과 세계의 원초적 가능성, 역사적으로 결정된 것은 아니지만 인간을 영원히 따라다닐 수 있는 가능성의 표현”(153)인 것이다. 관료제는 자발성, 창의성, 자유가 없고 단지 명령과 규율만이 있는 복종의 세계이다. 이는 그 거대한 활동의 목적이 보이지 않는 추상의 세계이다. 그러나 카프카적인 것은 단순히 커다란 사회 규모에서 생산되는 관료제와 소외, 비인격화로서만 요약될 수는 없다. 카프카 소설은 공동체와 인간적 교류에 대한 열렬한 욕구가 아니다. 오히려 쿤데라가 보기에, 측량 기사 K는 공동체가 아니라 제도에 의해 받아들여지기를 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외로움을 부정해야 하는데, 바로 이것이 지옥이다. 그는 단 한순간도 혼자가 아니다. “외로움이 아니라 ‘박탈당한 외로움’이라는 저주, 바로 이것이 카프카의 강박관념인 것이다!”(159) 측량기사 K가 절망적으로 찾는 것은 인간적 유대감이 아니라 획일성인데, 이것 없이 그는 현실과의 관련을 갖지 못한다. 이전에 사람들이 다양함, 획일성으로부터 벗어남에서 이상과 승리를 찾았다면, 미래에는 획일성으로부터 상실이라는 것이 절대적 불행, 인간적인 것 바깥으로의 추방을 의미하기 때문이다(215).

그런데 어떻게 카프카는 이 우울한 非時적 소재를 매혹적 소설로 바꾸어 놓았는가? 이에 대한 답은 카프카가 밀레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잘 드러난다. “관청은 멍청한 기구가 아니에요. 그것은 멍청함이 아니라 오히려 환상적인 것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랍니다.”(163) 이것이 바로 카프카의 가장 큰 비밀 중 하나인데, 그는 관료주의적 현상을 통해 인간과 인간 조건뿐만 아니라 관청의 유령적 성격에 내포된 시적 잠재성까지 보았던 것이다. 카프카는 그 생전에 보지 못했던 관료제의 진실을 파헤쳐냈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예견이 아니라 언젠가 역사가 나름대로 발견하게 될, 이미 있는 인간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일 뿐이다. “시인은 시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시는 저 뒤쪽 어디에 있는 것 오래 오래전부터 그것은 거기 있었고 시인은 다만 그걸 찾아내는 것일 뿐.” 그러나 이때 시인이 저 뒤쪽 어디에 숨겨진 시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려진 어떤 진실(저절로 주어지고 앞에 있는 아마 쿤데라는 여기서도 하이데거를 본받아 Vorhandensein을 염두하는 듯)에 봉사하기 위해 ‘참여’한다면 그것은 시의 고유한 임무를 저버리는 것이다. 바로 그가 소설, 또는 소설이라는 시가 정치 등 여타의 분야에 대해 지니는 근본적인 ‘자율성’ 때문이다. 전체주의와 공산주의 등 일체의 정치 이데올로기와 강박적으로 선을 그으려는 그는 또한 <웃음과 망각의 책>에서 나타난 “권력에 대항하여 벌이는 인간의 투쟁은 망각에 대항하는 기억의 투쟁과 같다”라는 말이 소설의 메시지로 간주되는 것에 반대하면서, “망각은 절대적 불의이면서 동시에 절대적 위안”(185)이라고 한다. 미소뮈즈misomuse(187)는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것이 있다는 사실에 치욕을 느끼고 그것을 증오하는 사람을 의미하는데, 종종 사변적이고 지적인 미소뮈즈들은 예술을 미학의 바깥에 종속시킴으로써 즉 참여 예술로 활용함으로써 예술에 복수한다. 쿤데라는 바로이 미소뮈즈에 반대한다. 열렬한 반공주의자인 그에게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은 “네 개의 단어, 네 개의 허위”(카스토리아디스)에 지나지 않는다.

7부 예루살렘 강연은 그의 입장을 짧은 분량에서 잘 마무리하고 있는 글로서, 리처드 로티가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에서 제사로 삼고 있는 글이기도 하다. 쿤데라는 자신이 소설가임을 강조하며, 작가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가 인용하는 플로베르에 따르면 소설가란 자신의 작품 뒤로 사라지기를 바라는 사람인데, 이는 오늘날 공인으로서 역할을 거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설가는 누군가의 대변인이 아니며,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의 생각을 대변하는 사람조차 아니다(222). 쿤데라는 유대의 속담, “인간은 생각하고 신은 웃는다”라는 경탄할 만한 속담을 듣고 라블레가 어느날 신의 웃음소리를 듣고 유럽 최초의 소설을 착상한 것이라고 상상하기를 즐긴다고 고백한다. 신은 왜 생각하는 인간을 보며 웃는가? 인간이 생각해봐야 진리는 그들로부터 멀어져 버리기 때문이다(223). 결국 인간은 결코 자기가 생각하는 것과 같지 않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라블레가 고안한 신조어 중 애석하게 잊혀진 것은 바로 아젤라스트agélaste라는 단어인데, 희랍어에서 유래한 이 단어는 웃지 않는 사람, 유머 없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런데 소설가와 아젤라스트 사이에 평화는 불가능하다. 신의 웃음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아젤라스트들은 진리는 명확한 것이며 모든 이가 같은 것을 생각해야 하고, 자신이 스스로 생각하는 것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지만, 사람이 한 개인이 되는 것은 진리의 명증성과 타인들과의 일치된 동의를 상실함으로써이다. “소설이란 개인들의 상상적인 낙원이다.”(224) 라블레의 박학은 데카르트의 박학과 의미가 다르며, 소설의 지혜는 철학의 지혜와 다르다. “소설은 이론적 정신이 아니라 유머의 정신에서 탄생”(225)한다. 최근 러시아의 전체주의가 계몽주의 시대 무신론적 합리주의와 이성의 전능함에 대한 믿음의 소산이라는 견해가 있지만, 쿤데라는 “18세기가 비단 루소와 볼테르와 돌바흐의 시대만은 아니었다는 것, 동시에(라기보다는 특히) 필딩, 스턴, 괴테, 라클로의 시대이기도 하다는 것”을 역설한다. 특히 로렌스 스턴의 <트리스트럼 샌디>는 오직 형식 하나만으로 “시 정신은 행동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 멈추는 곳에 있다는 것, 원인과 결과 사이의 다리가 무너지는 곳, 생각이 감미롭고 한가로운 자유를 배회하는 곳에 있다는 것을 증명”(227)한다. 한 세기의 정신은 소설에 대한 고려를 빠뜨리고 사상과 이론 개념에 의해서만 판단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19세기는 기차를 발명해 냈고 헤겔은 보편적 정신 자체를 포착해냈다고 확신했는데, 플로베르는 멍청함을 발견했다. 이것이야말로 쿤데라가 보기에 과학적 이성에 그토록 자부심을 가졌던 한 세기의 위대한 발견이다. 멍청함이란 무지가 아니라 통상적인 생각의 공허함을 의미하는데, 그는 이것이 마르크스나 프로이트의 생각보다 중요하다고 본다. 그 까닭은 계급투쟁이 없는 미래, 정신분석이 없는 미래는 상상할 수 있어도, 모든 독창적이고 개인적인 생각을 뭉게버리고, 근대 유럽 문화를 질식시키게 될 통상적 생각, 컴퓨터와 매스 미디어에 의해 전파되는 통상적인 생각 없는 미래는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229). “아젤라스트들, 통상적인 생각의 공허함, 키치, 이 셋은 신의 웃음의 메아리에서 탄생했고 어느 누구도 진리의 소유자가 아니면서도 모두가 이해될 수 있는 매력적인 상상의 공간을 만들 줄 알았던 예술에 대한, 몸 하나에 머리가 셋 달린 하나의 적”(230)이다. 쿤데라가 유토피아로 간주하는 개인이 존중받는 세계(소설이라는 상상적 세계와 유럽이라는 현실 세계)는 허약하고 소멸할 수 있다. 다만 유럽 문화가 위협받는 것으로 보이더라도 유럽 정신의 진수는 소설의 역사, 소설의 지혜 속에 보관되어 있으며, 이 가장 소중한 지혜는 개인에 대한 존중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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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이] 2010-03-08 0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재미있게 읽었는데... 정리 참 잘 하셨어요~~ 퍼감!ㅋ
 


고등학생 내지 대학 초년생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 철학 입문서. 

철학에 흥미를 갖는 독자들이 한번 쯤 가볍게 읽어보기 좋은 책인 것 같다.  

교육부 장관을 역임한 철학교수인 뤽 페리 스스로 소개하듯 그의 '우파 공화주의자'로서의  

입장이 책 곳곳에 스며들어있기 때문에 주의해서 읽어야 할 부분들도 꽤 많이 있다.  

하나만 예를 들자면 자칭 '휴머니즘'의 전도사로서 68 혁명 전후의 현대 프랑스 철학을 

도매금으로 묶어 반인본주의로 치부하면서 비판 아닌 비판을 하는 부분 등등. 

참조 : 68년 5월을 상기할 것인가, 땅에 묻을 것인가(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6142)

아래는 얼마간 떠밀려서 하게 된;; 대략적인 책의 요약(스압).

 

뤽 페리, 사는 법을 배우다 



왜 사는 법을 배워야 하는가? 왜 철학이 사는 법을 배우는 일과 동일시되는가? 뤽 페리는 이 탁월한 철학입문서에서 철학의 가장 중심적인 문제를 무엇보다 인간의 유한성, 반드시 사멸한다는 사실에서 찾는다. 유한성 + 자신이 유한한 존재라는 의식은 모든 철학적 질문의 핵심이다. 종교가 구원의 문제를 담당한다고 할 때, 철학이 무엇인지 알려고 할 때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그가 제안하는 것은 종교와 철학을 비교하는 것이다. 종교가 약속하는 구원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그것을 의심하는 자들에게는 그러나 종교는 아무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서 철학의 역할이 생겨난다. 종교가 신뢰confiance(믿음fides)와 겸허의 미덕을 중요시하고, 자유로운 사고를 비난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반면, 철학은 타자나 신의 도움없이도 오로지 자기 힘으로, 자신의 이성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수 있음을 주장한다. 믿음과 정반대의 길을 가는 철학자들을 종교는 악마diable(dia-bolos떼어놓는 자)의 포로가 되었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철학의 입장에서 신앙은 위안을 주지만, 그 대신 우리가 얻는 평안보다 잃는 명철함이 더 많다.

가령 에피쿠로스는 철학을 ‘영혼의 의학’이라고 정의하면서 그 최종목표가 죽음이 두려워 할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리는 데 있다고 보았다. 또한 에픽테토스 같은 사람도 철학의 궁극적 문제가 결국 단 하나의 주제, 죽음의 공포로 귀결된다고 보았다. 몽테뉴 역시, 철학하는 것은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대체로, 그리스 철학자들은 과거와 미래가 인간의 삶을 억압하는 가장 대표적인 두 가지 악이라고 생각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생각에 따르면, 지금 여기 있는 존재만이 유일하고 실재적인 존재이며, 과거는 이미 흘러갔으니 존재하지 않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존재하지 않는다. 돌이킬 수 없는 불가역성에서 비롯한 공포와 불안이 있는 한, 인간은 결코 자유롭게 사고하거나 행동할 수 없고, 따라서 인간은 무엇보다 스스로 자신을 구원해야만 하는 것이다.

뤽 페리는 철학의 세 가지 근본적 차원을 세계에 대한 이해(이론), 정의에 대한 욕구(윤리), 구원에 대한 추구(지혜)에서 찾는다. 그리고 이 테오리아, 윤리, 구원이라는 범주를 통해서 스토아철학, 기독교, 근대철학, 탈근대(니체), 해체주의 철학 등을 개관한다.

먼저 스토아학파를 살펴보자. 기원전 4세기 무렵 제논이 창시한 이 학파는 클레안테스, 크리시포스 등으로 계승되고, 이는 후대에 키케로 등에 의해 간접 전승되며, 로마시대에 다시 유행하게 된다(세네카, 에픽테토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1) 스토아 학파의 테오리아는 무엇보다 우주의 질서를 관조하는 것이다. theoria는 to theion 혹은 ta theia orao, 즉 신성theion을 본다orao, 신적인 사물들theia을 본다는 의미이다. 철학의 가장 중요한 과제가 세계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것이라고 할 때, 스토아 전통에서의 세계의 핵심은 조화와 질서, kosmos였다. 우주의 구조는 각각의 요소나 기관이 전체와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며, 신적일 뿐만 아니라 이성적인 것logos이다. 여기서 신적이라는 것은, 인격신이 모든 경이로움을 ‘창조’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간은 그 경이로움을 창조하거나 발견하는 존재가 아닌 단순히 그것을 발견하고 관조하는 존재일 뿐이라는 뜻이다. 경이로움으로 현현하는 신성은 인간의 손이 미치지 않는 비인간적인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스토아 학파와 달리 세계가 카오스와 혼돈이라고 보았으나, 키케로는 다음과 같이 쓴다. “에피쿠로스가 마음껏 비웃게 내버려두자. (...) 그러나 이 세계보다 더 완벽한 것은 없다. 세계는 의식과 지성과 이성이 있는 살아있는 존재다”(<신의 본성에 관하여>, 1권) 이처럼 스토아 학파는 자연이 조화로운 것이기 때문에 인간 역시 자연을 전범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각자의 것을 각자에게 - 이러한 공정성의 이론은 로마 법체계에서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었고, 삶의 궁극적인 목적 중 하나는 우주의 질서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는 것이다. 스토아 학파의 신성은 내재성 속의 초월성이다. 2) 스토아 학파의 윤리학은 코스모스를 모범으로 삼는 정의로 요약된다. 이에 따르면 공정성은 무엇보다 정확성의 문제가 된다. 자연은 가장 아름다운 통치자이며, 자연은 무엇보다 인간의 의지와 관련된 선과 악, 공정과 불공정과는 무관한 것으로 여겨졌다. 이는 오늘날 생태학의 생각과도 유사한 셈이다(한스 요나스). 도덕적 과제는 존재 혹은 자연과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고대인들이 탁월성이라고 이해한 어떤 분야의 미덕은 자연에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성향의 실현, 잠재태에서 행동으로 옮겨가는 것을 뜻한다. 3) 스토아 학파의 구원론은 지혜에 대한 사랑에서 지혜의 실천으로 가는 것, 죽음은 과정이고 인간은 영원한 우주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서 성립한다. 아렌트(<문화의 위기>)에 따르면 철학이 등장하기 이전의 고대인들에게 죽음이라는 불가피한 운명에 도전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는데, 하나는 번식이라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덧없는 시간과 망각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서사의 주인공이 될 만한 영웅적이고 영광스런 업적을 글로 남기는 것이었다(투키디데스, 헤로도토스). 그러나 양자 모두 한계를 갖으며 인간의 유한성을 극복하려는 세 번째 방법이 등장한다. 바로 사고와 행동을 정확하게 실천하여, 비록 불멸은 아닐지언정 어떤 인간적 형태의 영원에 도달하는 현자가 되는 것이다. 현자에게는 죽음은 단지 종말이 아니라 신성이 깃든 우주 안에서 어떤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넘어가는 변화나 과정에 불과하다. 에픽테토스의 말처럼 철학은 “신처럼 살고 신처럼 죽는 것을 배우는 것”(Les stoiciens, 900)이며 “죽은 뒤에 너는 지금의 네가 아니겠지만, 세계가 필요로 하는 또 다른 어떤 것이 되어 있을 것이”(Les stoiciens, 1030)다. 이는 각자의 우리 자신의 신적인 부분, 즉 지성을 통해 신적인 우주에 연결될 수 있고 각자의 daimon을 잘 돌봄으로써 불사에 관여하게 된다는 플라톤의 생각(티마이오스 90b-c)과 역시 좋은 삶을 관조하는 삶으로 본 아리스토텔레스의 불멸에 관한 생각을 일정 부분 해체하면서 동시에 스피노자적 전통으로 연결될 수 있는 생각이다. 구원의 추구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는 지혜의 몇 가지 훈련이 필요하다. 인간을 억압하는 두 가지 악, 과거에 대한 집착과 미래에 대한 불안을 억제하고 현재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통스러웠던 과거 모든 일을 생각하지 마라. 다만, 현재의 순간마다 너 자신에게 물어라. 내가 정녕 견딜 수 없고 참을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그럴 때, 진정으로 네가 직면할 것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임을 잊지 마라”(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8권) 지나간 과거나 오지 않은 미래가 아닌 현재에 충실하라고 권고하면서 희망이야말로 가장 큰 불행이라고 비판한다는 점에서 스토아 학파의 생각은 티벳 불교의 교리와 유사한 점이 있다. 미래의 행복을 위해 계획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가? 오히려 세네카가 말하듯이 “살기를 기다리는 동안에 삶은 흘러가 버린다.”(또한 과거와 미래에 집착하는 태도는 니체의 말에 따르면 짐 나르는 짐승의 그것이며, Amor Fati와 반대되는 것이다) 좋은 삶은 희망도 공포도 없는 삶, 있는 그대로의 현실과 화해하는 것이다. 이때 삶의 목표는 단지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고 우리에게 허락된 아름다움과 기쁨을 만끽하는 것이다. 세상 모든 것에 대한 소유욕을 버리고 초탈한 자세를 갖는 것 역시 불교 정신과 맞닿아 있는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전미래적 구원의 사고, 즉 운명적 재앙이 닥쳐온다 해도 이미 준비된 상태에 있을 것이라는 고도의 정신 상태가 요구된다. 현재를 살면서 과거와 미래에서 비롯하는 원망과 후회, 고뇌를 초탈하기 위해서는, 유한자인 우리는 항상 최후의 순간이 닥칠 수 있다는 전체적이고 충만한 의식을 가지고 매 순간을 만끽해야 한다. 전 생애가 하나의 순간처럼 되게 하려는 것이 지혜로운 삶이 지향하는 이상이다. 두려움과 고뇌를 극복함으로써 얻게 된 평정에 도달하면, 현자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순간의 영원과 완벽한 행복 속에서 신처럼 살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오늘날 한갓 정적주의나 운명론으로 들리는 이러한 태도는 바로 조화로운 세계라는 스토아 학파 특유의 세계관과 우주론에서 발원한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후 그리스 철학에 대한 기독교의 승리가 다루어진다. 기독교의 1) 테오리아가 갖는 첫 번째 특징은 스토아 철학이 신적인 것으로 여겼던 우주의 조화로운 구조, 즉 로고스가 예수라는 개인과 동일시된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 또는 개인에 대한 특별한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이후 인권에 대한 철학을 예비한다. 스토아철학자들이 사용한 logos는 성경에서는 말씀으로 번역되며, 신성theoin이 한 명의 인간으로 축소되며, 신성을 관조하는 통찰orao 역시 변하게 된다. 두 번째 특징은 신앙이 이성의 자리를 빼앗았다는 것이다. 구원의 관건은 주도적인 사고가 아니라, 타자에 대한 신뢰의 문제가 된다. 즉 믿는 자만이 그 단순한 마음을 통해서 신을 볼 수 있다. 가령 아우구스티누스가 철학자들을 빗대어 지식인들, 고매한 자들은 추론에 몰두한 나머지 오만하게 굴다가 신성을 보지 못한다(“자신의 지식을 대단하게 여겨 한껏 오만으로 부푼 그들은 ‘나는 온유하고, 마음이 가난하니, 너희 영혼이 내게 와 쉬라’고 하신 예수의 말씀을 믿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세 번째 특징은 철학자의 이해가 아니라 단순한 사람들의 겸허함을 중시하는 것이다. 이 겸허함은 이중적인데, 한편으로는 예수와 더불어 하찮은 인간의 지위로 축소된 신적인 로고스의 객관적 겸허함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앙을 위해 이성을 포기한 인간 사고의 주관적 겸허함이다. 바울이 그리는 신은 전지전능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는 허약하고 불쌍한 신이다. 겸허하게 자신을 낮추고, 또 자신을 믿는 모든 이들에게 자신을 낮추라고 가르침으로써 기독교의 신은 허약하고 왜소한 모든 이들을 대변하는 신이 되었던 것이다. 네 번째 특징은 이성보다 겸허와 신앙을, 스스로 하는 사고보다는 타자에 의한 사고를 우선하면서 철학은 소멸하지는 않았을지언정 결국 종교의 시녀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나오는 다섯 번째 특징은 철학이 이제 더 이상 구원의 교리가 아니라 단지 종교의 시녀에 불과하기 때문에, 스콜라, 즉 하나의 학문일 뿐 지혜나 삶의 수련이 아닌 것으로 되고 만다는 것이다. 이제 철학은 개념적, 비판적, 논리적 담론, 논증적인 훈련에 가까운 것이 되고 말았으며, 이는 신앙과 계시에 바탕을 둔 구원의 교리를 이성의 영역으로부터 분리한 기독교의 영향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2) 기독교 윤리학의 첫 번째 특징은 자유의지가 도덕의 기초가 되고 모든 인간의 존엄성이 평등하다는 개념이 처음으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그리스 우주론에서 자연에는 근본적인 위계질서가 있으며, 각 존재가 속한 범주는 우수한 것부터 저열한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수준이 있다. 그리스의 도덕적 어휘 중 미덕의 개념은 타고난 재능, 천성과 관련된 것이었으며 그리스 세계는 귀족주의적 세계였다. 반면 기독교인에게 중요한 것은 타고난 재능이나 능력이 아니라, 그 자질을 어떻게 사용하냐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도덕의 문제에서 자유의지가 도입된다. 이 기독교의 주장은 매우 강력해서 비종교적인 근대 도덕, 근대 민주주의에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1789년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역시 어떤 의미에서는 기독교의 유산이다. 두 번째 특징은 도덕적인 면에서 정신이 규범보다 중요하고, 법을 문자 그대로 준수하는 것보다 내면의 심판이 더 결정적이라는 생각이다. 도덕이 근본적으로 인간 내면의 문제가 되면서 외적 규범과 갈등을 빚을 동기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세 번째 특징은 인간에 대한 근대적 개념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신도들은 신으로부터 자유의지를 부여받은 피조물로서 같은 처지에 있는 형제라고 불리웠다. 모든 인간의 동등한 존엄성에 대한 사고, 모든 인간은 하나라는 신념이 사람들의 마음에 자리잡고, 야만barbar, 즉 고대 그리스에서는 이방인과도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던 그리스적 개념은 사라지게 된다. 더 나아가 기독교는 각 개인에게 불멸을 약속한다. 3) 기독교적 지혜의 첫 번째 특징은 예수가 신성의 화신이 되면서 신의 섭리도 그 의미가 변했다는 것이다. 기독교와 더불어 인간은 신의 섭리가 스토아철학에서처럼 비인간적이고 비개별적인 운명이 아니라, 부모가 자식을 대하는 듯한 인격신의 너그러운 관심에 들어있다고 믿게 된다. 이제 우주적 질서에 우리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모습을 한 신성의 명령에 따름으로써 우리가 얻는 구원 역시 개인적 현실이 된다. 기독교가 약속한 구원은 인간을 둘러싼 초월적 우주의 한 부분으로 얻게 되는 무의식적이고 우주적 영원이 아니라 개별적이고 의식적인 불멸을 의미하게 된다. 두 번째 특징은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 즉 신 안에서 사랑하기만 한다면 인간은 영혼과 육신의 부활을 할 수 있다는 복음이다. 세 번째 특징은 사랑이 기독교의 기적이자 힘의 원천이라는 것, 사랑에서 고통을 찾아낸 불교나 그리스 철학에서 사랑이 문제였다면, 기독교에서는 사랑이 해답이라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집착으로서의 사랑을 비판하면서도 집착의 대상이 신적인 것 또는 신 자체라면 그 사랑을 부정하지 않았고, 신 안에서 피조물이 그 자신의 유한성을 벗어나 영원으로 갈 수 있다고 보았다. “네 마음에 드는 영혼이 있다면, 주님 안에서 그들을 사랑하라. 영혼은 원래 흘러가고 움직이는 것이나, 주님 안에서는 흔들리지 않고 확고하게 서리라. (...) 주님께 힘껏 매달려라, 그러면 공고함을 얻으리니.”(고백록, 4권 10장) 영혼과 육체로 구성된 전체, 현재 모습 그대로 존재하는 인간의 부활은 기독교 구원론의 요체이다. 부활은 이성의 힘을 벗어나 인간의 머리로 헤아릴 수 없는 계시가 내포한 신비의 부분이다. 기독교는 추상적이고 무의식적인 구원이 아닌 구체적이고 의식적인 구원을 약속하고 인간이 유한성을 극복하고 불멸에 도달하는 승리의 복음을 전해준 셈이다.

이제 기독교 이후 휴머니즘과 근대철학이 등장한다. 고대 우주론의 붕괴와 종교적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는 두 가지 위기와 함께 태어난 근대세계는 뉴턴, 갈릴레오 등의 과학 혁명을 배경으로 한다. 과학적 발견을 통해 이전까지의 세계상이 붕괴된 후 근대인들은 우주나 신의 도움없이 홀로 남아 새로운 지표를 찾아 나서야만 했다. 1) 세계는 코스모스가 아니라 혼란스럽게 끊임없이 충돌하는 카오스이기에, 지식은 테오리아의 형태를 더 이상 취할 수 없었고, 질서나 조화, 선, 미 등의 가치는 저절로 주어진 것이 아니게 되었다. 근대과학의 과제는 이제 세계의 아름다움을 관조하는 것이 아니라 혼란스런 우주에 의미를 부여할 새로운 규칙을 능동적으로 세워야만 했다. 사고는 이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여러 자연 현상을 인과적으로 연결하고 설명하려는 작업, 종합의 방법(칸트), 실험적 방법(클로드 베르나르, <실험의학입문>)을 의미한다. 근대적 사고는 인간을 코스모스와 신성의 자리에 올려놓는다. 이론과 도덕률, 구원의 교리 모두 인간 개념을 바탕으로 새롭게 정립되어야 했다. 17~8세기 철학자들이 동물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인간과 동물의 구별에 힘을 쏟은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이 지점에서 루소가 중요하다. 루소 시대에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는 기준은 두 가지 고전적 기준이 있었는데, 하나는 지성(아리스토텔레스의 ‘이성적 동물’), 다른 하나는 감수성, 애착심(데카르트), 사회성 등이었다. 루소는 데카르트처럼 동물을 정교한 기계를 닮은 것으로 보았지만, 기계에 없는 지능과 감수성, 의사소통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보았다. 루소가 독자적으로 파악한 동물과 인간의 차이는 자유 또는 완성가능성이라는 개념이다. 동물은 자유나 스스로 완성하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항상 같은 원인에 똑같이 반응하며 살아간다. 반면 인간은 자유를 가지고 있으며, 자연적 본능의 프로그램에서 벗어날 수 있는 능력, 무한히 변하는 역사를 능동적으로 만들어가는 능력이 있기에 스스로 자신을 규정할 수 있는 존재이다. 동물은 자연의 명령에 꼼짝없이 복종하지만, 인간은 자연의 명령이 통하지 않는 미확정의 여지가 있다. 인간의 반자연적 성격, 비동물적인 인간의 의지는 다른 한편으로 인간만이 실로 악마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사실을 의미한다(고문). 이처럼 자유를 인간과 동물의 차이로 정의함으로써 세 가지 결과가 따라나온다. 첫째로 동물과 달리 인간에게는 이중의 역사성이 있다는 것, 한편으로 우리가 교육이라고 부르는 개인의 역사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 문화와 정치로 대변되는 인간 사회의 역사가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라면 그 존재에 선행하고 그 존재를 결정하는 인간 본성이나 본질, 인간성의 정의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의 모토, “존재는 본질에 선행한다”는 말은 루소의 핵심이 그대로 들어 있다. 세 번째 결과는 인간은 자유롭기에 어떤 자연적이고 역사적인 결정론적 규정에도 얽매임없이 도덕적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칸트가 언젠가 루소를 도덕 세계의 뉴턴이라고 부를 때, 이는 루소가 자유에 대한 사고를 통해 뉴턴이 물리학에서 했던 역할을 근대 윤리학에서 했다는 의미이다(또한 뉴턴의 세계에서 원심력과 구심력이 서로 대항하듯이 루소의 세계에서는 이기주의와 이타주의가 끊임없이 길항한다). 루소의 영향을 받은 칸트와 프랑스 공화주의자들은 윤리적 미덕이 사심없고 공공의 선과 이익, 보편성을 지향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사고를 제기한다. 자연을 모방하거나 전범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싸우고, 본성적인 이기심과 씨름해야 하기 때문에, 도덕에는 명령적 형태가 요구되며, 칸트는 이를 정언명령으로 나타냈다. 가령 1755년 리스본 대지진 당시,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자연이 주는 재앙의 의미에 대해 사유하게 되었다. 더 이상 고대인들이 생각한 것처럼 자연은 선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고, 제2의 자연, 공동의 가치를 구현하는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로 구성된 자연인 목적의 왕국(칸트)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정치적 차원에서 자유에 대한 새로운 생각은 고대의 귀족주의적 세계에 대립한 세 가지 특징, 형식적 평등과 개인주의, 노동에 대한 가치 부여를 가져왔다. 미덕을 자연이 아니라 자유에 바탕을 둔 것으로 본다면, 민주주의가 성립될 수 있으며, 개인주의는 이러한 추론의 결과이다. 또한 일하지 않는 인간은 단지 가난한pauvre 인간일 뿐만 아니라 자신을 실현할 수 없는 불쌍한pauvre 인간이기도 하다. 귀족주의적 우주에서 노동이 노예나 하는 비천한 활동이었다면, 근대세계에서 노동은 인간이 자신을 실현하는 본질적 동력이자 스스로 교육하는 수단이었다(헤겔, 마르크스).

데카르트의 코기토 역시 인식론에서 또한 근대철학의 기원에 있음은 간과될 수 없는 사실이다. 고, 중세 세계와 단절하면서 인식론, 윤리학, 구원의 교리 모두를 새롭게 정립하기 위해서 요청되었던 것은 ‘주체’였는데 이것이 대한 새로운 원칙을 제기한 것이 바로 데카르트였다. 고대 세계가 붕괴하면서 나타난 상실감과 의혹의 정조는 데카르트의 저작에서 새로운 철학을 구상함에 일조했다. 데카르트가 모든 사물을 의심하는 허구의 상황을 연출한 것은 진실에 대한 새로운 정의에 도달하려는 노력이었다. 이제 주관성은, 이전처럼 사실과의 일치가 아니라 진실의 가장 확실한 기준이 되었다. 또한 데카르트의 사고, 과거 전통의 선입견과 믿음을 거부하고 모든 것을 백지 상태에서 새로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은 혁명에 대한 근대적 개념을 창출했다. 토크빌이 말했듯이, 1789년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 자코뱅은 “데카르트 학교를 졸업하고 거리로 뛰쳐나온 셈”인 것이다. 혁명가들은 구체제의 모든 유산과 결별하면서, 데카르트가 철학에서 이룬 것을 역사적, 정치적 현실에서 구체화한 사람들이었다. 인간이 궁극적 진실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기독교에서처럼 믿음이나 신앙이 아니라 자의식이 된다. 근본적 회의, 비판정신과 사고의 자유는 근대철학의 시초를 이룬다.

요컨대 근대적 사고의 핵심은 비종교적 도덕은 평화로운 공동의 삶을 위해 남을 존중할 것을 요구하며 부과하는 가치의 총체이다. 그러나 가장 고결한 도덕적 이상이 구현된다고 해도, 죽음을 비롯한 실존적 문제에는 해답을 주지 못한다. 이 세계에 조화로운 질서도 없고 신도 죽었다면, 어디서 구원을 얻어야 할까? 근대인이 구원을 추구한 것은 대략 두 가지 방향이었는데, 하나는 지상의 구원을 찾는 종교, 과학주의, 애국주의, 공산주의 등이었다(뤽 페리의 반공주의). 다른 하나는 추후 현대 철학에서 설명된다.

이제 탈근대주의, 니체의 경우를 살펴보자. 앞서 본 데카르트와 계몽철학자들은 비판정신이라는 최강의 힘을 손에 넣었는데, 이제 그것은 이성이나 인간중심적 이상의 원칙에도 적용되는 것이 된다. 마르크스와 프로이트, 그리고 니체는 의혹의 철학자로서, 고전적 휴머니즘의 환상을 파괴했다. 특히 니체의 눈에는 무신론자이며 물질주의자임을 자처하는 계몽철학자나 공화주의자 모두 어떤 신자로 보였다. 삶보다 우월한 어떤 가치가 있고, 사실을 판단할 때 그 이상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믿음이 종교적 신앙심과 다름없다고 본 것이다. 신이 아니라 인권, 과학, 이성, 민주주의가 신의 위치를 대신하게 되었기에, 계몽주의 휴머니즘은 여전히 종교의 본질적 구조에 갇혀 있다는 것이 니체의 주장이다. 근본적으로 이상은 신학적 구조를 포함하는데, 언제나 현실세계보다 월등한 피안의 세계가 있고, 사람 자체보다 우월한 외적인 가치, 즉 초월적 가치를 설정하는 것이 그 핵심이기 때문이다. 이상의 이름으로 현실을 부정하는 자세를 니체는 허무주의라고 불렀다. 이상의 허구를 이용하여 인간을 삶 밖으로, 현실 밖으로 내쫓는 것이 허무주의이며, 니체 철학의 중심 주장은 초월이란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것은 현실 안에 있으며, 모든 판단은 삶의 일부분을 이루는 생명력의 발현이라는 것이다. 니체의 관심사는 칸트나 공화주의자들처럼 모든 인간이 평등한 세계나 목적의 왕국을 건설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민주주의를 인간을 하찮은 존재로 축소시키고 가치를 폄하하는 쇠락한 형태라고 비판한다. 1) 니체의 테오리아는 아테오리아a-theoria였다. 그는 현실의 기초나 존재의 본질이 우주적이거나 신적인 것이라고 보지 않았고, 인식이라는 것이 관조나 종합의 문제가 아니었다. 니체에게 봄은 해체, 계보학을 의미한다. 니체가 보기에 진정한 철학은 사람들이 성스럽고 범접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기는 가치와 사고의 겉모습 아래 감춰진 세속적 기원을 드러내야 하는 것이다. 니체는 존재에 대한 어떤 판단도 단지 그 판단을 내리는 자의 생명력을 드러내는 징후라고 파악했다(“사실이란 없다. 오로지 해석이 있을 뿐”). 계보학이 독려하는 해체 활동은 모든 가치의 이면에 심연이 있을 뿐이며, 세계의 실체를 포착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니체는 스토아 학파들이 상상한 세계와는 정반대의 세계를 생각했다. 세계는 무한한 에너지의 장, 무한하고 혼란스럽고 복합적인 힘과 충동의 구조로 간주했다. 그는 그리스인의 코스모스를 단지 인간을 위로하고 안심하게 만들기 위해 인위적으로 고안된 거짓 세계라고 보았다. 근대의 과학적 합리주의 역시 혼돈 속에 있는 힘을 재통합하고 종합하려는 시도로서 고대 우주론의 환상을 따라가는 또 하나의 환상에 불과하다. 물론 세계가 완전히 혼돈 그 자체인 것만은 아니며, 니체는 힘들의 유형을 구분한다. 반동적인 힘과 능동적인 힘. 전자는 고전 철학과 과학의 동기였던 진리에의 의지와 민주주의이며 후자는 예술과 귀족주의적인 자연적 우주이다. 반동적인 힘은 다른 힘을 억압하고 그와의 대립을 통해 구현되고 긍정보다는 부정, 찬성보다는 반대에 속하는 힘이다(소크라테스의 문답법). 육체와 감성을 무시해 온 진리 추구에의 의지,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유효한 것이 되기를 희망하는 내재적으로 민주주의적인 과학 역시 반동적인 것이다(반동-진리의지-민주주의-지각세계). 반면에 능동적인 힘은 특히 예술에서 표출된다(예술-귀족주의-감각적이고 육체적 세계 숭배-능동적 힘). 여기서 또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최근의 니체 해석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니체가 단지 삶을 더 자유롭고 쾌활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반동적 힘을 버리고 능동적 힘만 수용하고, 이성을 버리고 감성과 육체를 해방하라고 주장한 것처럼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일부 좌파 니체주의자(뤽 페리는 특히 들뢰즈를 염두해두는 듯)들은 단순하게 모든 생명력 중 능동적 힘을 살리고 반동적 힘을 제거하는 것이 니체의 궁극적 메시지라고 해석했다. 모든 규범이 금지하는 것이라면, 금지를 금지(68혁명의 구호 중 하나)하고, 부르주아 도덕을 해체하고, 육체와 감성을 해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니체는 68혁명 등의 아버지로 지목되기 힘들다. 니체는 패거리 본능을 비판했고, 공산주의와 무정부주의 등 모든 형태의 혁명적 이데올로기에 반대했으며, 성적인 절제를 필수적이라고 여겼으며, 과도한 낭만주의와 열정의 방만을 비판했다. 오히려 니체는 무정부주의나 육체의 해방, 성 혁명이 아니라 삶을 구성하는 다양한 힘들을 강화하고 거기에 통제된 위계질서를 부여하는 것, 그가 ‘위대한 양식’이라고 부른 것을 주장했다. 반동적 힘까지도 포함한 종합적 힘에 조화와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삶이 왜소해지거나 허약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니체는 생각했던 것이다. 2) 그렇다면 비도덕주의자로서 니체에게 어떤 도덕이 가능한가? 사실 니체의 반박애주의적 열정은 광기에 가깝기도 하다. 니체의 도덕은 곧 좋은 삶이란 가장 조화롭고 강렬하고 우아한 삶, 이성을 존중하고 무의미한 소모를 하지 않는 수학 공식처럼 엄격한 삶이었다. 힘의 의지 역시 주의깊게 해석되어야 한다. 이는 권력이나 높은 지위를 탐내는 욕망이 아니라, 허약하지 않은 생생하고 강렬한 삶을 원하고 내면적 분열을 피하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러한 의지는 춤추는 사람처럼 가볍게 천진하게 살 수 없게 하는 두려움, 후회, 원한 등이 해소된 전범적인 삶, 위대한 양식 안에서 실현된다. 과도한 열정의 낭만주의(바그너, 쇼펜하우어, 슈만, 브람스)를 비판하는 니체가 말하는 위대한 양식은 한편으로 고전주의적 사고의 특징을 갖고 있다. 3) 니체에게 구원의 교리는 우선 영원회귀 개념에서 드러난다. 그는 가치있는 삶과 그렇지 못한 삶을 판단하는 현세적 기준을 제공하며, 우상도 신도 없는 구원의 교리를 추구하고자 한다. 영원회귀는 가치있는 순간과 그렇지 못한 순간을 선별하는 원칙이다. 내가 이것을 수없이, 영원히 반복되더라도 하고 싶었던 것이 확실한가를 자신에게 물어보라는 것이다. 치졸한 순간, 갈등과 죄의식, 나약함, 거짓, 자기기만의 순간이 영원히 반복되기를 누가 바라겠는가? 즉 니체는 진정으로 기쁘고 사랑과 명철함, 평정을 경험했던 순간들을 선별하여 후회도 원망도 없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스토아 학파와 유사하게, 영원회귀의 교리는 좋은 삶이란 과거나 미래에 얽매이지 않는 온전히 홀가분한 상황에서 현재와 영원 사이에 어떤 차이도 없다는 완성된 느낌으로 매 순간을 충만하게 살아가는 삶이라고 가르친다. 니체에게 구원의 교리로 중요한 것은 또 아모르파티amor fati, 운명애이다. 오직 있는 그대로의 것만을 원하는 것. 니체에게 구원의 교리는 조금 덜 희망하고, 조금 덜 후회하고, 조금 더 사랑하라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현재를 긍정하고 가장 삶을 사랑한 신, 포도주와 축제와 환희의 신, 디오니소스처럼. 그런데 이 운명애와 영원회귀의 윤리가 상충되는 것은 아닌가? 우선 이에 대해 운명애는 영원회귀의 매우 선별적인 요구가 적용된 후에야 가치있는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러나 니체 철학에 대한 비판이 제기된다. 뤽 페리는 니체의 아모르파티에 대해 비판한다. 현실이 사랑스러울 때 사랑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과연 현실이 몹시 고통스러울 때도 운명애가 가능한가? 아도르노가 말한 것처럼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서정시를 쓰는 것이 가능한가? 인류가 저지른 죄악을 포함한 있는 그대로의 세계에 대한 사랑은 또 하나의 새로운 이상이 되어 허무주의의 또 다른 모습을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

니체의 해체 이후의 현대철학은 더 이상 니체 이전과 같은 것이 아니었다. 우선 니체, 마르크스, 프로이트가 열어놓은 해체의 길을 따라가는 첫 번째 가능성이 있다(알튀세르, 라캉, 푸코, 들뢰즈, 데리다). 그런데 이는 니체가 그러했듯이, 현실에 대한 냉소주의로 이어질 수 있다. 뤽 페리는 니체 이후의 해체주의라는 이름으로 포괄한 철학이 니체와 동일한 모순에 빠졌다고 본다. 이 지점에서 하이데거를 참조할 필요가 있다. 그가 보기에 세계화와 자본주의의 근본 문제는 부익부빈익빈의 심화가 아니라, 인간을 역사로부터 소외시키고 의미와 목적성을 박탈한다는 점에 있다. 현대를 특징짓는 것은 기술의 지배이며, 17세기 과학의 비약적 발전 이후 민주주의 삶의 곳곳에 퍼져나갔다. 과학적으로 세계를 파악하고 더 나아가 지배하겠다는 인간의 열망으로 나타난다. 계몽주의 시대 과학적 시도만 해도 진보에 대한 낙관주의와 해방적 관심이 우세했으나, 현대에 와서 이 과학은 기술로 이행하는데, 다시 말해 목적없는 과정으로서 기술이 득세하고 수단이 우위를 차지하게 되며, 도구적 합리성이 지배하게 된다. 하이데거는 계보학적 자세와 기술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생각했는데, 니체는 그가 보기에 기술의 철학자로서 서양 형이상학의 정점에 위치하는데, 니체가 바로 세계 의미의 상실, 힘에의 의지를 우선하고 이상의 소멸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현재의 위기 속에서 기술 세계의 도전에 맞설 수 있는 것은 오직 권위주의 체제뿐이라고 확신하고 나치에 복무하기도 한다. 니체 이후의 현재 철학은 공허한 박식과 전문화된 관심으로 축소된 철학이 되거나 휴머니즘을 사유하기 위한 철학이 되거나 하는 갈림길에 서 있다. 물질주의(유물론)의 사고(스토아, 니체, 스피노자 등)에서 보기에 희망은 좌절, 무지, 무력을 의미하고, 조금 덜 희망하고, 조금 더 사랑하라는 가르침, Carpe Diem에서 구원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뤽 페리는 인간이 자연과 역사에 의해 전적으로 결정된 존재라는 물질주의적 사고를 비판하며 루소와 칸트의 노선, 자유와 완성 가능성의 힘을 긍정하고 지지하려 한다. 그가 보기에 물질주의는 심오한 철학적 주제들을 다루지만 자신을 대상으로 삼지 않고, 초월과 자유, 이상 등을 논한다. 1) 뤽 페리는 현대 휴머니즘의 근본 과제는 계보학과 물질주의적 해체에 빠지지 않고 다시금 초월성을 새로이 사고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는 인간에 대해 초월적인 고대적 초월성 개념과 중세의 초월적 개념이 아니라, 칸트와 후설을 거쳐서 내려오는 내재성 속의 초월을 논의한다. 이는 니체 이후의 비형이상학적인 초월성인데, 후설의 지평 개념은 이를 잘 설명해준다. 이는 최종적 총체, 지고의 존재를 보증하는 기본적 근거에 우리가 도달할 수 없음을 뜻하며, 후설이 예를 든 것처럼 어떻게 바라보아도 세 면 이상 볼 수 없는 육면체와 같은 것이다. 우리는 단지 지평에서 지평으로 이동하며, 이는 인간은 유한하며 의식은 언제나 무엇에 대한 의식일 뿐이기 때문이다. 가치는 형이상학적이거나 신학적 권위에 위해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그 수용은 나의 의식 내면에서 일어나는 과정이다. 현대 휴머니즘은 나의 주관성에 자리잡은 있는 그대로의 초월성을 조명하는 현상학을 시도한다. 니체 이후 현대 휴머니즘의 테오리아는 자기성찰과 자기비판에 집중된 인식이론이다. 2) 현대 휴머니즘의 윤리는 신성의 인간화 경향과 인간의 신격화 경향의 교차로 특징지어진다. 사람들은 더 이상 조국이나 혁명 같은 이상에 목숨을 걸지 않으며 단지 다른 인간을 위한다. 3) 구원의 문제. 우선 현대의 휴머니즘에서는 자기중심의 편협한 정신을 벗어나 타인의 관점에서 세상을 판단함으로써 보편성에 도달하는 확장된 사고가 요구된다(네이폴 예시). 또한 이 확장된 사고는 세계문학이 도달한 보편성의 경지처럼 인간성 자체와 결합하는 특수성과 보편성 사이를 매개하는 고유성 또는 개성을 통해서 사랑의 지혜를 불러온다. 사랑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타인의 고유성을 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장사지내는 방법은 어떤 것이 있을까? 스토아 철학이 제안하는 집착을 버리는 방법, 기독교의 종교적 답변, 그리고 다른 어떤 것이 있을 것이다. 사랑의 지혜는 각자가 스스로 찾아야 하고, 불교나 기독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각자 나름대로 사는 법을 배워야 하며, 매일 죽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는 언젠가 헤어질 날이 찾아올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지금 여기서 함께 해야 할 일들을 기쁜 마음으로 찾기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다. 그런 지혜는 형이상학과 종교의 환상에서 벗어난 현대의 휴머니즘에서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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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10-03-01 0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첨 보는 책인데 재밌겠어요. 역시 출판사는 성향에 맞게 기파랑. -_-

바라 2010-03-02 23:12   좋아요 0 | URL
네~ 글자도 크고 난해한 개념어도 별로 없어서 잘 읽히는 편인 거 같아요~ 기파랑이 그런(?) 성향이 있나요? 한번 재미있게 읽어볼 만 합니다
 

간만에 읽어본 소설. 밑줄긋기 

 

 

 

 

 

 

 

 

(...)그러므로 사랑을 하기 위해서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사랑가'를 부르며 바지 지퍼를 내리거나 브래지어 호크를 푸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내는 일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 있게 드러낼 수 있어야만 상대방이 수많은 양반 자제 중에서 자신을 알아볼 게 아닌가? 그러므로 다시한번, "사랑해"라고 말한다는 건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냈다는 뜻이다. 사랑의 대상보다 자신을 먼저 사랑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기형도는 '그집 앞'이라는 시를 이렇게 끝냈다.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네/ 그토록 좁은 곳에서 나 내 사랑 잃었네" '비가 2'에서는 이렇게 끝을 냈다. "세상은 온통 크레졸 냄새로 자리잡는다. 누가 떠나든 죽든/ 우리는 모두가 위대한 혼자였다. 살아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 왜 기형도는 이 세상 누구와도 닮지 않은 위대한 혼자에 대한 얘기로 시를 끝맺었을까? 사랑이 끝나면 자신에 대한 사랑만이 남게 되기 때문이다. 애당초 "사랑해"라고 말하기 위해 거울을 보며 연습할 때 봤던 그 얼굴을 향한 사랑만이. 1982년 8월 28일, 기형도는 일기장에 "언제나 나는 진실로 연애다운 사랑을 할 것인가" 라고 썼지만, 그런점에서 그는 늘 연애중이었다.

꽃에는 입술이 없지만 자신을 바라보라고 말한다. 사랑에는 혀가 없지만 네가 누구인지 먼저 알아내라고 종용한다. 사랑을 통해 우리는 저마다 위대한 개인으로 자란다. 거울에 비친 그 위대한 개인을 사랑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을 향해 단호한 어조로 "사랑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지구에서 얼마나 멀리까지 갈 수 있느냐는 미 우주항공국의 업무지만, 우리가 얼마나 깊이 사랑할 수 있느냐는 스스로 대답할 문제다. 그건 우리가 얼마나 자신에 대해 깊이 알고 있느냐, 혹은 우리가 얼마나 자신을 깊이 사랑하느냐에 달린 문제다. 사랑은 우리의 평생교육기관이다. 주민등록번호를 통해 성인 인증을 거쳐야만 입학할 수 있는 성인들의 학교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낼 때까지 우리는 계속 낙제할 수 밖에 없다. 죽는 순간까지도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내지 못할테니, 결국 우리가 그 학교에서 졸업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러므로 다시 한번, "사랑해"라고 말한다는 건 자신을 먼저 사랑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자신을 먼저 사랑해야만 '진실로 연애다운 사랑'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뜻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의 운명을 추구하는 것....자신의 자아를 저 밑바닥까지 찾아 헤매는 것이다."라고 말한 사람은 울리히 벡과 엘리자베트 벡-게른샤임 부부다. (...) 90~2쪽

...어떤 사람을 향해 "사랑해"라고 말한다면 그건 이미 자신이 누구인지 생각해봤다는 것이다. 사랑을 고백하는 일은 아무도 없는 나이트 클럽 무대에서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단 한 사람만을 위한 춤을 추는 일과 흡사하다. 이때 자신이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 한눈에 드러날 수 밖에 없는데, 애정이 없다면 도저히 눈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다. "사랑해", 그 대담한 말을 통해 우리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간단하다. 나는 네가 누구인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먼저 누구인지 보여주겠다. 이번에는 네가 너를 보여줄 차례다. 그래서 "사랑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둘 중하나다. 기꺼이 자신을 드러내거나 못 들은 걸로 치거나. 못 들은 걸로 치겠다, 그건 '나한테 네가 누구인지 설명하지 마라, 우리 사이는 사회적인 관계다'라는 뜻이다... 87~8.

 

기억이 아름다울까, 사랑이 아름다울까? 물론 기억이다. 기억이 더 오래가기 때문에 더 아름답다. 사랑은 두 사람이 필요하지만, 기억은 혼자라도 상관없다. 사랑이 지나가고 나면 우리가 덧정을 쏟을 곳은 기억뿐이다. 사람도 없는 막차버스 맨 뒷자리에 나란히 앉아 집에까지 가는 동안 뭐가 그리 즐거웠는지 한없이 웃었던 기억, 아파트 근처 으슥한 벤치에 어깨를 붙이고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문득 말을 멈추고 어색한 마음에 둘이서 처음 입맞췄던 기억, 자존심 때문에 공연히 투정을 부리다가 되려 그런 자신의 모습이 싫어 그만 혼자서 울어버린 기억, 사랑이 끝난 뒤 지도에 나오는 길과 지도에 나오지 않는 길과, 차가 다니는 길과 차가 다니지 않는 길과, 가로수가 드리워진 길과 어두운 하늘만 보이던 길을 하염없이 걸어다니던 기억, 모든 게 끝나면 유통기한이 지난 식료품처럼 사랑했던 마음은 반품시켜야만 하지만, 사랑했던 기억만은 영수증처럼 우리에게 남는다. 한때 우리는 뭔가를 소유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증거물. 질투가 없는 사람은 사랑하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억이 없는 사람은 사랑했다는 증거를 제시할 수가 없다.

지난 초가을 두 번째 만나던 날, 진우는 선영에게 자신을 좋아했던 기억이 여전히 남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함께 저녁으로 홍합솥밥을 먹고 국무총리 공관을 지나 삼청동 골짜기 쪽으로 걸어 올라가노라니 진우는 13년 전의 어느 가을 저녁으로 돌아간 듯했다. 삶의 순간 순간이 어떤 무늬와 결로 이뤄졌는지 똑똑하게 보여주는 저녁바람이 선영의 귀밑머리로 나부꼈고 그 순간 진우는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자신이 진정으로 살아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당장 죽어도 좋다는 느낌이 들 때다. 그때 삶은 죽음을 뛰어넘는다. 삶이 죽음이라는 엄청난 장애물을 뛰어넘는 데 지렛대로 사용하는 게 바로 사랑이다. 139~141쪽

 

"아까 자다가 니 전화 받고 밖으로 나오려는데, 비가 오더라. 비가 오네. 혼잣말하면서 차를 몰고 나오다 보니까 문득 이제 봄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나무의 뿌리들도 이제 빗물을 모아야 하겠지. 다시 자라려면, 그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까 갑자기 지난 겨울이 떠오르는 거야. 선영아, 지난 겨울에 눈 많이 내렸잖아. 그지? 골목길에 쌓이기도 하고, 그냥 녹아서 질퍽거리기도 하고. 그러다가 지금은 다 녹아버렸지. 그런 생각이 들더라. 눈이 녹으면 그 하얀빛은 과연 어디로 가는 걸까? 선영아, 너는 아니? 눈이 녹으면 그 하얀빛은 과연 어디로 가는지?"

선영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광수가 돌아보니 선영은 잠들어 있었다. 광수는 잠시 선영을 흔들어보다가 손을 뻗어 라디오를 켰다. 여윈 몸을 떠올리게 하는 피아노 반주에 맞춰 그만큼이나 마른 목소리로 한 여자가 이별 노래를 불렀다. 빗줄기 사이로 줄지어 멈춰선 검은 윤곽의 자동차들 위로 신호등의 붉은 불빛이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우산을 쓴 사람들이 횡단보도를 건너갔다. 그 어두운 풍경을 내다보며 광수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눈이 녹으면 그 하얀빛은 과연 어디로 가는 걸까? 16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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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도 번역된 <들뢰즈와 예술>의 저자이며 고등사범학교에서 예술철학을 가르치는 얀 소바냐르그의 강연을 듣게 되었다. 4일동안 강의했는데 둘째 날과 넷째 날 밖에 가지 못했다. 예술과 철학이라는 제목 하에 이루어진 강연은 주로 들뢰즈의 미학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고,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것이 많지만 몇 가지 기억나는 것들을 기록삼아 옮겨본다. 여기 적는 건 강연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불어였다면 거의 못 알아들었겠지만, 비록 느린 영어로 이루어졌어도 놓친 부분이 꽤 많았고, 그래서 밑의 내용은 꽤 오류를 포함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넷째 날 부분은 강연 관련 원고가 있으니 한번 번역을 해봐도 좋겠건만 당장은 힘들 것 같다.

둘째날 강연의 제목은 비평과 진단, 힘의 감응이었다. 초반에는 데카르트에서 칸트로 이어지는 주체의 이론을 개괄했고, 시몽동에 의한 주체 개념 비판을 다루었다. 강연에 따르면 들뢰즈에게 있어서 시몽동의 개체화 개념은 큰 중요성을 갖는다. 예컨대 선-개체적 독특성이나 비인칭적 개체화 같은 개념. 이후에 <주름>의 번역자이자 소바냐르그 밑에서 들뢰즈를 전공한다는 이찬웅 씨가 잠시 강연을 했다. 일의성(둔스 스코투스)이니 중립적 본질(아비첸나) 같은 중세철학에서 유래한 개념들을 들뢰즈가 어떻게 중요하게 쓰는지, 시몽동의 변조modulation 개념이 들뢰즈에서 매우 중요하다.. 뭐 이런 이야기를 했고, 다시 소바냐르그의 강연으로 돌아오면, 개체화라는 것은 주체를 구성하는 하나의 과정으로서, 시몽동, 조프루아 생튈레르, 스피노자 등이 개체화 이론을 위해 동원된다. 다소 낯설은 이름의 생튈레르는 뀌비에라는 사람과 논쟁했던 동물학자로서 후자가 동물들은 결국 서로 소통될 수 없는 네 가지 정적인 종으로 환원된다는 요지의 주장을 펼친 반면 전자는 오직 하나의 종이 있을 뿐이며 이것이 모든 동물들의 다양한 변이를 가져오는 하나의 도면이 된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시몽동의 개체화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의 전통 형이상학의 이분법 도식인 질료-형상 설을 비판한다. 시몽동은 오히려 재료-힘 이라는 새로운 비유기적 조직화 원리를 끌어들이는데, 그에 따르면 개체화 이전에 형이상학적으로 주어진 개체화의 원리란 존재하지 않으며 개체와 개체화의 원리는 개체화의 과정을 통해서만 동시적으로 구성된다. 가령 거푸집이 일방적으로 진흙을 주조하는 것이 아니라 질료 자체가 나름의 독특한 힘, 비균질적 에너지를 가진 것으로 보는 것이다. 질료는 무규정적인 것이 아니라 어떤 능동적인 속성을 지닌 것이 되고, 형상은 질료적 생명성의 metastable준안정적 상태로 변화할 수 있게 된다(준안정적 상태란 예컨대 과냉각 액체, 0도 이하에서도 계속 액체로 남아있는 물이 약간의 충격만으로 바로 얼어버리는 그런 상태이다. 선개체적 존재는 긴장상태에 있는 이질적인 힘들의 집합에 있고 이 힘들이 위상변화함으로써 다른 상태로 이행한다는 것). 이 질료에 내재한 잠재적 힘들과 이 힘의 지속적인 변이 과정에 대한 표현은 예술의 소관이다. 예술은 언제나 생성 중에 있는 이 잠재적인 힘들의 포획이고 삶에 대한 실험과 실천이다 등등.

넷째 날은 예술과 내재성이라는 제목의 강연이 있었다. 소제목으로는 유사성과 반대되는 생성, 생성과 열린 체계, 리좀, 동물 되기와 감응affect의 목록, 힘의 포착으로서 생성, 이미지의 개체화, 운동-이미지와 세 변이태, 운동-이미지에서 시간-이미지로의 이행 등이 거론되었다. 들뢰즈의 이미지 존재론은 본래 무엇보다 베르그손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하는데, 어쨌든 들뢰즈는 이를 영화의 존재론에 끌어들이기 때문에 무엇이 베르그손 고유의 것이고 아닌지 헷갈리는 점이 있다(비단 이건 베르그손 독해만의 경우만은 아니지만). 아무튼 들뢰즈의 영화론에 관해서 간략하게만 몇 자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주지하다시피 들뢰즈는 영화에 관한 두 권의 책, <시네마 1권; 운동-이미지>와 <시네마 2권; 시간-이미지>을 썼다. 그는 이미지(물질과 관념의 중간에 위치하는 어떤 것)를 운동과 등치시키고, 이미지들의 총체인 세계에는 중심도 없고 어떤 정박된 주체도 없다고 주장한다. 오직 이미지들만이 존재한다. 이미지는 복수적이고 미분적인 힘관계들의 배치agencement이며 유동하고 임시적인 개체화의 장의 탈중심화된 우주를 구성한다. 운동-이미지들의 무한한 집합은 다양한 변이를 가능하게 하는 어떤 내재성의 평면이다. 이미지들은 모두 작용과 반작용의 관계를 갖는데, 여기에 특이한 이미지인 신체가 개입한다. 이때 작용과 반작용 사이에 어떤 간격이 들어서게 되고, 이 간격은 특정한 면에서만 작용을 받아들이고 반작용을 실행한다. 간격을 통해 선별과 조직화, 변이가 가능해지고, 그래서 이 간격은 ‘비결정성의 중심’이라 불린다. 운동-이미지에서 세 변이가 일어나는데 비결정성의 중심은 이미지들의 총체에서 관심을 끄는 것을 취하는데 이때 중심과 결부된 운동-이미지가 바로 지각-이미지이고, 지각-이미지가 작용하거나 반작용하는 것이 행위-이미지이며, 지각과 행위 사이를 점하는 것이 바로 감응-이미지이다. 이제까지 서술된 내용이 현실적인 층위에서 다루어진 이미지론이고 시간의 도입과 더불어 잠재적인 것의 층위에서 다루는 이미지론이 나오게 된다. 영화의 탁월성은 영화가 정박이나 지평의 중심없는 탈중심화된 이미지의 세계, 순수 운동의 세계를 보여준다는 데에 있다. 영화의 역량은 현실적 이미지, 운동-이미지뿐만 아니라 시간-이미지도 준다는 점에 있는 것이다. 이때 시간-이미지는 운동-이미지의 감각-운동 도식을 파괴하는 순수 시지각적 ․ 음향적 이미지, 기억-이미지, 꿈-이미지, 결정체-이미지 등으로 분류된다. 시간-이미지를 통해 잠재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의 상호공존과 식별불가능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영화는 기존의 사유의 이미지를 깨뜨리고 새로운 지각을 가능하게 한다. 그것은 현상학적인 1인칭 주체의 관점을 비판하고 비인칭적, 선개체적인 잠재적 힘들의 차원을 개방할 것이다.

일단 예전에 들뢰즈를 드문드문 읽어보았을 때의 독서들은 주로 칸트나 니체, 베르그손, 스피노자에 관한 그의 책들과 <차이와 반복>이나 <의미의 논리> 같은 책들을, 그나마 제대로 이해도 못한 상태에서 읽었을 뿐이었다. 더군다나 주로 강연 대상이었던 <감각의 논리>나 <천개의 고원>, <시네마> 등은 아예 읽어보질 못해서 이해가 어려웠다;; 들뢰즈에 과문해서 잘 모르겠지만, 그냥 강연에서 주워들은 생각들을 바탕으로 말해보면 확실히 들뢰즈에게 중요한 것은 인간과 인간 아닌 것(물질, 동물, 괴물 등등) 사이의 경계를 흐트러뜨리는 것이 아닐까 싶다. 개체는 언제나 강도적인 종합, 힘의 합성의 산물이며 인간은 ‘국가 속의 국가’, 능동적 주체나 실체가 아니라 스피노자가 말하는 양태, 언제나 여러 우연적인 마주침의 과정에서 구성되는 결과물이 되는 것이다. 인간 개체의, 또는 인간 의식의 자율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선개체적 차원에 주목하기. 그래서 이 존재론은 어떤 강도적 존재론이지만, 전통 형이상학에서 말하는 단순한 일자는 아니고 뭔가 ‘이상한’ 일자로부터 다수적인 존재의 동등성을 보여주는 것이고, 인간은 언제나 미리 주어진 선개체적 개체화의 장 안에서 어떤 관개체적 존재이고 어떤 무엇에서 다른 무엇으로 이행하고 변화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그리고 물론 이 힘은 물리적, 화학적 차원의 힘이 아니다. 그 힘, 역량은 니체가 말한 Macht, 스피노자가 말한 puissance일 것인데, 이는 언제나 들뢰즈에게서는 무엇보다도 일종의 유희, 그러니까 예술적인 과정으로 나타나는 것 같다. 그의 잘 알려진 캐치프레이즈인 일의성, 다수성, 차이, 복수성, 내재성, 독특성, 생성, 창조, 기쁨! 철학의 조건들이 과학, 정치, 예술 등이 있다고 할 때, 들뢰즈에게는 가장 탁월한 조건이 바로 예술일 것이며 그의 철학을 이끄는 가장 주요한 충동도 니체적인 예술 충동(“이 모든 것은 오직 미학적으로만 정당화된다”)일 것이다. 그래서 들뢰즈의 철학, 그러니까 시종일관 하나의 미학일 어떤 철학을 어떤 사람들이 시도하는 것처럼 정치철학적으로 논의하려 할 때, 그게 누군가가 보기에는 커다란 가능성일 수도 있고 또 반대로 커다란 한계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정치에서는 창조와 차이만큼이나 습관과 안정, 균형과 지속의 문제가 중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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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10-01-24 1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소바냐르그의 강연이 있었군요! 전혀 모르고 있었네요.ㅠㅠ

바라 2010-01-24 20:28   좋아요 0 | URL
네ㅠ 람혼님이 오셔서 들었으면 좋으셨을텐데 아쉽네요ㅜ들어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저보다야.. 프랑스철학 전공하는 선생님들이 여기저기서 많이 오시고 미학과 학생들도 꽤 많았어요.

2010-01-24 23: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낸시 프레이저
세계화되는 현실에서의 정의, 새로운 틀구성.

케인즈주의-베스트팔렌적 틀 아래에서, 정의에 관한 논의는 근대 영토국가 안에서 이루어졌다. 이는 브레튼우즈 체제가 국가 차원에서 케인즈주의의 경제적 진두지휘를 촉진하고, 베스트팔렌 조약의 정치적 허상, 즉 국내와 국제를 철저히 나누는 영역 구분의 허상에 의존하고 있었다. 당시에 논증의 초점은 한 사회 내에서 사회적 관계들을 정의롭게 구성한다는 것의 의미를 묻는 것이었다. 이때의 논의가 정의의 ‘무엇’이 문제가 되지 논쟁자들이 ‘누구’인지에 관한 문제를 논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은 명백하다. 민족국가의 시민이 바로 이 ‘누구’라는 것은 너무나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틀은 변화하고 있다. 초국적 법인이나 국제 통화 투기자들, 대규모 제도적 투자자들의 행위에서 볼 수 있듯이 영토국가 내의 결정도 국가 밖 사람들의 삶에 자주 영향을 끼친다. 또한 오늘날 재분배 요구들은 점점 더 국민경제를 가정하기를 그치고 있다. 마찬가지로 인정을 목표로 싸우는 운동들 역시 영토국가 너머를 내다보고 있다. 오늘날 정의에 관한 논의들은 중첩된 모습을 보인다. 예전처럼 지금도 실질 내용과 관련된 일차적 층위의 물음들이 다루어지지만 오늘날 정의에 관한 논의들은 더 나아가 이차적 층위의 물음들, 메타적 수준의 물음까지를 제기한다. 정의의 실질 내용뿐 아니라 정의의 적절한 틀까지도 함께 쟁점이 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정의 이론은 인정의 문화적 차원과 분배의 경제적 차원, 이 두 차원에 더해서 대의/표현representation의 정치적 차원까지 함께 놓아야 한다고 본다. ‘무엇’과 ‘누구’에 더해서, ‘어떻게’라는 세 번째 유형의 물음이 필요하다. 사회적 정의 이론은 이제 탈베스트팔렌적 민주적 정의 이론이 되어야 한다.

정의의 가장 일반적인 의미는 참여의 동등성이다. 이때 부정의를 극복하는 것은 어떤 사람들을 다른 사람과 대등하게 참여하지 못하도록 하는 제도화된 장애를 제거하는 것이다. 제도화된 장애는 경제적 차원(분배적 부정의), 문화적 차원(지위의 불평등이나 불인정)으로 나뉘어지는데, 양자는 서로 인과적으로 영향을 줄 수는 있어도 어떤 자율성을 지니고 있다. 분배와 인정이라는 두 측면을 포괄하는 이차원적 모델이 요구되며, 이것이 최소한 내가 과거에 옹호해왔던 정의관이다. 그러나 이는 케인즈주의-베스트팔렌적 틀이 당연시되는 경우에 한해서 유효할 뿐인데, 틀의 문제가 쟁점으로 거론되면 세 번째 차원의 정의가 곧장 가시화된다. 정의의 세 번째 차원이 바로 정치적 차원이다. 이 ‘정치적인 것’은 분배와 인정에 관한 싸움들이 상연되는 무대를 제공한다. 우선 이 정치적 차원은 사회적 소속의 기준들을 만들고 그리하여 누구를 구성원으로 볼 것인지를 결정함으로써 다른 차원들의 범위를 지정해준다. 마찬가지로 정치적 차원은 결정 규칙들을 설립함으로써, 경제적 차원과 문화적 차원 안에서 논쟁들을 무대에 올리고 결정핮는 데 필요한 절차를 마련한다. 이처럼 소속 구성원과 절차라는 이슈가 중심에 놓이는 정의의 정치적 차원에서 주로 다뤄지는 것이 대의/표현representation의 문제이다. 정치적인 것의 한 측면이 경계선 설정과 관계된 수준에서, 문제는 사회 소속 여부의 문제이며, 쟁점은 포함이냐 배제이냐 이다. 정치적인 것의 다른 측면인 결정 규칙과 관련된 수준에서, 대의/표현의 문제는 쟁론의 공적 과정을 조직하는 절차와 관계된다. 정치적인 것이 개념적으로 구분되는 정의의 차원이며, 따라서 경제적인 것이나 문화적인 것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은 정치적인 것이 개념적으로 구분되는 특정 종류의 부정의를 야기할 수 있다는 뜻이다.

정치적 차원에서 부정의는 바로 대의부재/표현차단misrepresentation이다. 먼저 최소한 두 수준의 대의부재/표현차단이 구분될 수 있는데, 우선 결정규칙들이 이미 포함된 사람들 중 어떤 이들에게는 동등한 성원으로서 완전히 참여할 기회를 주지 않을 때, 이를 보통의 정치적 대의부재/표현차단이라고 부른다. 가령 대안적 선거 시스템들의 정치학적 논쟁들(소선거구제, 대선거구제 등등)을 생각해볼 수 있다. 두 번째 수준의 대의부재/표현차단은 덜 가시적인데, 이는 경계선 설정과 관련된다. 이는 잘못된 틀 구성misframing이라 불리는 것이다. 잘못된 틀구성은 일차적 층위의 정의 요구를 말할 수 있는 기회 자체를 아예 거부당하는 특수한 종류의 메타적 부정의이다. 이런 종류의 잘못된 틀 구성은 아렌트가 ‘권리를 가질 권리’라고 칭했던 것이 상실된 상태와 흡사하며, 일종의 정치적 죽음과도 같다. 이런 고통을 겪는 사람들은 인간 아닌 자들이 되고 만다. 최근 세계화로 인해 가시화되기 시작한 문제가 바로 잘못된 틀구성 형태를 띠는 대의부재/표현차단이다. 예전에 전후 복지국가의 전성기에는 정의에 관한 사유를 주도하던 원칙적 관심사가 분배였다. 이후 신사회운동들과 다문화주의의 출현에 따라 무게중심은 인정으로 옮겨갔다. 그런데 이 두 경우 근대의 영토국가는 당연시되었기 때문에, 정의의 정치적 차원은 주변적인 문제로 치부되었다. 오늘날 세계화는 틀의 문제를 정치적 의제로 올려놓았다. 강력한 약탈국가, 외국인 투자자나 채권자 등 초국적 사적 권력, 국제 통화투기자, 초국적 법인 등등의 경우를 보자.

재분배와 인정에 대한 모든 요구 안에는 항상 대의/표현이 이미 들어 있다. 정치적 차원은 정의 개념의 문법상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대의/표현 없이는 재분배도 인정도 없다. 이것은 토의 민주주의 이론에서 충분히 강조되지 않은 사실이다. 적절한 대의/표현의 정치라면 정치적 부정의의 세 번째 차원, 틀을 정하는 과정까지도 민주화하려고 애써야 한다. 누가 정의의 주체로 간주되는지, 무엇이 적절한 테두리인가 하는 이슈에 초점을 맞추는 이 틀구성framing 정치는 정치적 공간의 권위 있는 분할선을 만들고, 수정하려는 노력을 포함한다. 틀 구성 정치는 두 가지 다른 형태를 취할 수 있는데, 하나는 수긍적affirmative 틀구성 정치이다. 이 접근법은 틀 설정의 베스트팔렌적 문법은 받아들이되, 현존하는 틀의 경계선만을 문제삼는다. 그들은 국가영토적 원칙을 수용한다. 두 번째 판본의 틀 구성 정치는 전환적transformative 접근법이다. 여기에서는 국가영토성의 원칙이 더 이상 정의의 ‘누구’를 결정하는 모든 경우에 예외없이 적절한 토대를 제공할 수는 없다고 본다. 금융시장, 해외 공장, 투자체제, 세계경제의 통치 구조, 전 지구적 미디어의 정보 네트워크, 생명 정치 등과 같은 문제들과 관련해 부정의를 범하는 권력들은 장소의 공간이 아닌 흐름의 공간에 속한다.

이렇게 볼 때 전환적인 틀구성 정치는 세계화되는 현실 안에서 틀 설정의 심층적 문법을 바꾸려 한다. 이 접근법은 하나 또는 여럿의 탈베스트발렌적 원칙을 보완하려고 한다. 틀 설정의 탈베스트팔렌적 양태는 어떤 모습을 보일 수 있을까? 아직까지는 ‘모든 당사자 원칙’이 가장 유망한 후보이다. 어떤 사회 구조나 제도에 영향을 받는 모든 이들이 그 구조나 제도에 관련한 문제에서 정의주체로서의 도덕적 입지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의 공통된 구조적 혹은 제도적 얼개 안에서 함께 엮여있기 때문에 정의의 동료 주체가 된다. 오늘날 세계화 행동주의자들은 정치 공간의 국가영토적 분할법을 공략하기 위해서 모든 당사자 원칙에 직접 호소하고 있다.

그렇다면 전환적 틀 구성 정치는 여러 차원과 수준에서 동시에 진행된다. 사회운동들은 한 수준에서 부당분배, 불인정, 보통의 정치적 대의부재/표현차단이라는 일차적 층위의 부정의를 시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두 번째 수준에서는 정의의 ‘누구’를 재구성함으로써 잘못된 틀 구성의 부정의를 제거하고자 한다. 더 나아가 국가영토 원칙이 부정의를 면책하는 데 기여한다면 이 운동들은 그 원칙 대신 모든 당사자 원칙에 호소한다. 전환적 정치의 요구들은 훨씬 더 나아가는데, 이 운동들은 탈베스트팔렌적 틀 설정 과정에서의 발언권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정의의 얼개가 그려지고 수정되는 과정을 민주화하려고 한다. 정의의 ‘누구’를 구성하는 과정에 참여할 권리를 주장함으로써 동시에 ‘어떻게’를 전환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는 새로운 민주적 경연장을 창출할 것을 요구한다. 예컨대 세계사회포럼. 이런 식으로 그들은 탈베스트팔렌적 민주적 정의의 새 제도들이 성립될 수 있음을 선보이고 있다. 세 번째 층위의 정치적 부정의를 우리는 메타정치적 대의부재/표현차단이라고 부른다. 이 투쟁은 ‘누구’라는 문제에 관한 논쟁을 민주적으로 발의하고 결정할 수 있는 제도가 결여되어 있음을 드러내면서 ‘어떻게’의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세계화되는 오늘날 정의를 위해 싸우는 투쟁이라면, 메타정치적인 민주주의를 향한 투쟁들과 손잡지 않고서는 성공할 수 없다. 이 수준에서도 다시, 대의/표현 없이는 재분배도 인정도 없다. 오늘날 독백적인 사회정의론은 설득력을 잃고 있다. ‘누구’에 관한 결정은 점점 더 정치적인 문제로 간주된다. 이제부터 결정의 민주적 과정은 정의의 ‘무엇’뿐만 아니라 ‘누구’와 ‘어떻게’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이 모든 수준, 보통의 정치적 수준은 물론이고 메타정치적 수준에서도 대화적일 때 탈베스트팔렌적 민주적 정의 이론이 될 수 있다. 이런 설명이야 말로 우리가 세계화되는 현실에서 틀의 문제를 정의의 핵심 문제로 볼 수 있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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