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어김없이 환절기 감기가 ㅠ 어서 육신을 벗고 혼을 순수하게 하는 활동을.. 

 

파이돈  

recollection argument(72e~77d)





 

 

 

 

 

 

 

1. 상기 논증의 도입(72e~73a)


 베스는 소크라테스가 자주 말해왔던 배움(learning/Lernen/instruction)이란 상기함(recollection/Wiedererinnerung/ressouvenir)이라는 주장을 환기시킨다. 이에 따르면 우리가 지금 상기하게 되는 것들을 이전에 어느 때인가 우리가 배웠던 것이다. 그런데 이는 만일 우리의 혼이 지금의 인간적인 모습으로 태어나기 이전에 어딘가에 있지 않았다면 불가능하다. 이런 면에서 혼은 죽지 않는 어떤 것이다. 케베스가 설명하길 사람들이 질문을 받을 때, 만약 누군가가 훌륭하게 질문을 할 경우, 모든 것을 진실 그대로 스스로 말한다. 그러나 이는, 이 사람들에게 앎(knowledge/Erkenntnis/science)과 바른 추론 능력(correct account/richtige Einsicht/jugement droit)이 이들 안에 없다면 불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상기의 과정은, 누군가가 그들을 도형이나 그런 유의 다른 어떤 것으로 인도할 때 명확하게 증명된다.1)





2. 소크라테스의 상기 논증 개시(73c1~74a8)


 케베스의 설명을 듣고 난 뒤에도, 시미아스는 배움이 왜 상기인지 의아스러워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논증을 시작한다.


2-1. 상기의 일반적 조건 제시(73c1~74a7)


명제 : 만일 y에 의해 x를 상기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네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1) 우리는 x를 사전에 알고 있어야만 한다(73c1~c3). 2) 우리는 감각적 지각(sense-perception/wahrnehmen/sensation)을 통해 y를 알아볼(recognize/erkennt/connaître) 뿐만 아니라 또한 x에 대해 생각하게(think of/vorstellt/a l'idée de) 된다(73c6~c8).2)3) x는 y와 같은 앎의 대상이 아니라 다른 앎의 대상이다(73c8~c9). 4) x가 y를 닮았을 때, 우리는 x에 대해 y가 부족하지 않은지 생각하게 되는 것이 필연적이다(74a5~a7).


2-2. 상기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예시(73d~73e) : 1) 리라를 보고 리라의 임자인 소년의 모습(form/Bild/image)을 떠올리는 경우 2) 누군가가 시미아스를 보고 케베스를 상기하는 경우  3) 그린 말들이나 그린 리라를 본 이가 어떤 사람을 상기하는 경우 4) 그린 시미아스를 본 이가 케베스를 상기할 경우 5) 그린 시미아스를 본 이가 시미아스 자신을 상기하게 될 경우


 


☞ 요컨대, 상기란 감각적 지각을 통해 알게 되는 개별자를 혼이 이전에 인식하고 기억하는 보편자인 형상에 비추어 평가하는 것이다. 그런데 2-1에서 4)의 조건, 즉 닮음에 의해 상기를 할 때, 상기함의 실마리가 된 것이 그 유사성에 있어서 어떤 점에서 부족한지 아닌지를 생각하게 되는 것은 과연 필연적인가? 가령 사람들이 그림을 부족한 것으로 판단하는 것은 그것이 단순히 이미지인 탓으로 그림의 원본이 되는 것이 갖는 특성들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어떤 초상화를 보고서 그것이 어떤 인물보다 부족하다고 늘 말하는가? 그것은 매번 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판단이 아니라 실제로는 당연시되고 무시되는 사실이 아닌가?


 그런데 2-2의 사례들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상기되는 것이 같은 앎의 대상이 아니라 다른 앎의 대상이라고 하는 문장을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것이다. 가령 리라에 대한 앎과 사람에 대한 앎이 다르다는 것은 리라의 개념과 사람의 개념이 다르다는 점에서 생각해볼 때 쉽게 이해된다. 그러나 시미아스와 케베스의 경우는 동일한 방식으로 간주될 수 없다. 케베스나 시미아스나 수적으로 구분되는 것이지 인간이라는 종적 개념에 의해서 구분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리라를 보고 그 주인을 상기하는 경우 양자는 원본과 복사본을 따질 필요가 없이 동등한 존재의 질서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림을 보고 그림에 그려진 원래의 대상을 상기하는 경우는 양자가 원본과 복사본의 관계인 경우이다. 따라서 위에서 제시된 사례들 중 형상과 감각적 개별자의 구분에 가장 적합한 것은 시미아스와 그림 시미아스의 경우일 것이다. 위 논변의 요점은 우리가 그림 시미아스를 시미아스와 연관시키는 것은, 시미아스에 대한 선지식이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위에서 제시한 모든 경우에 있어서, 상기함은 닮은 것들로 또는 닮지 않은 것들로 해서도 성립하는 것이지만(74a2~a3), 닮은 것으로부터의 상기와 닮지 않은 것으로부터의 상기는 대칭적이지 않다. 그림을 보고 시미아스를 떠올리는 사람은 그림이 시미아스를 닮았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그러나 리라를 보고 그 주인을 떠올리는 사람이 리라와 그 주인이 닮지 않아서 상기하는 것이 아니다(Gallop, 118).


 


3. 같음 자체의 도입과 본격적인 상기 논증


 3-1. 우리는 같음 자체가 무엇인지 안다(74a9~d3).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1) 우리는 같은 무엇인가, 같음 자체(the equal itself/das Gleiche selbst/l'Égal en soi-même)가 있다고 본다(74a9~b1). (2) 우리는 이것이 무엇인지도(what it is/was es ist/que c'est quelque chose) 알고 있다(74b2~3). (3) 우리는 주위에 있는 같은 사물들, 예컨대 나무토막이나 돌들 같은 사물을 보고서 이것들과는 다른 같음 자체를 생각하게 된다(74b4~b6). (4) 같은 나무토막들이나 돌들은 똑같은 것들이면서도, 때로 어떤 이에게는 같아 보이지만, 어떤 이에게는 같아 보이지 않는다. 같은 것들 자체(the equal themselves/die gleichen Dinge selbst/L'Égal en soi)는 때로는 같지 않은 것들로 보이는 것이 아니며 또는 같음(equality/Gleichheit/lÉgalité)이 같지 않음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같음 자체와 같은 것들은 다르다(74b7~c6). (5) 이들 같은 것들은 같음 자체와는 다른 것들인데도, 어쨌든 이것들로 해서 같음 자체를 생각할 수 있게 되고 같음 자체에 대한 앎을 얻는다(74c6~c10). 같음 자체는 같은 것들을 닮은 것이건 아니건 간에 상관없다. (6) 어떤 것을 보고서, 이 봄으로 인해 다른 것에 생각이 미치게 되는 한, 그것이 닮은 것이건 닮지 않은 것이건 간에, 이게 상기함이라는 것은 필연적이다(74c13~d3).





☞ 소크라테스는 같음 자체라는 것이 있다고 하면서, 우리가 같음 자체에 대한 어떤 인식을 지닌 상태에서 그것을 준거로 대상들의 같음을 판단한다고 본다. 이때 같은 사물들과 같음, 같음 자체가 구별된다. 같음 자체는 기준이고 같은 것들은 이 기준을 통해 평가된다. 그런데 같음은 두 개 이상의 대상들에 대해서 쓰는 술어, 관계 개념이다. 그렇다면 같음 자체는 무엇과 같은 것인가? 역설적으로 같음 자체는 결국 감각적 사례들 어떤 것과도 같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같음의 형상은 비관계적인 속성(non-relational attribute)으로 간주되기 때문에(Gallop, 128), ‘같음 자체는 항상 같다’는 문장은 자기-지시적인 것이 되는 것이다.3)같지 않음 자체(Inequality itself), 부정의 자체, 나쁨 자체라는 형상이 존재할 수 있는가, 라는 점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데, 이러한 형상이 범형(paradigm)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거부된다(Gallop, 125).


 『파이돈』에서 처음으로 형상 이론이 도입되는 위 대목과 이후의 논변을 보면, 소크라테스는 같음 자체를 단순히 같음의 ‘개념’이라기보다는 개별적인 같음과는 구별되는 객관적인 존재로 간주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그는 같음의 개념은 인식 능력의 일부라기보다는 인식 능력과 별개로 어디엔가, 예컨대 저승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는 것 같다. 그래야만 혼이 생시 이전에 이 앎을 가지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같음은 우리의 개념적 사유의 결과가 아니며 오히려 같음 덕분에 우리가 개념적인 사유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형상들은 개별자들과 전혀 다른 질서에 속하는 초월적인 것이고, 좋음 자체와 같은 형상은 추상으로부터 나온 단순한 논리적 보편자가 아니라 개별자들에게 모범이 되는 객관적 실재이다(Bluck, 175).


 명제 (3), (4)로부터 (5)가 추론되는데, 이에 따르면 상기는 일종의 매개적 인식이다. 그러나 (6)의 주장처럼 x를 보고 y를 떠올리는 것이 상기가 되기 위해서는, y가 x를 봄과 동시에 상상된 어떤 것이나 인식 능력에 의해 고안된 허구가 아니라는 조건이 추가되어야 한다(Gallop, 126). y에 대한 생각이 상기이기 위해서는 y가 기억 속에 있다가 망각된 것이어야 하며(그러나 이것은 증명되어야 하는 사실이다), 비록 소크라테스는 양자가 닮거나 닮지 않거나 상관없다고 하지만, y와 상기의 실마리가 된 x 사이에 단순히 자의적인 연상 작용을 넘어선 긴밀한 관계(예컨대 닮음)가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4)   





 3-2. 우리는 형상에 대해서 개별자들이 갖는 부족함을 안다(74d4~75a4).


  (7) 같은 것들(나무, 돌)은 같음과 같은 그런 것이 되기에는 못 미치는 것이다(74d4~d8). (8) 주위의 같은 사물을 보면서 이들이 같음 자체에 미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이것이 닮기는 했으나 훨씬 모자란다고 그가 대비하여 말하고 있는 그 대상을 먼저 알고 있었을 것임이 필연적이다(74d5~e5). (9) 우리는 실제로 주변의 같은 것들을 보면서 같음 자체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74e6~e8). (10) 우리는 같은 것들이 같음과 같은 것이 되려고 하지만 훨씬 모자란다고 생각을 하기 이전에 같음(the equal/das Gleiche/l'Égal)을 먼저 알고 있는 것이 필연적이다(74e9~75a4).





☞ 우선 (7)에서 같음 자체에 비해 같은 것들이 못 미친다는 표현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이는 a) 어느 사람에게는 같게 보이나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음을 의미할 수도 있고, b) 어느 때에는 같아 보이나 다른 때에는 그렇지 않을 수 있으며 c) 어떤 것과는 같으나 다른 것과는 같지 않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어떠한 경우로 보더라도 우리가 감각적으로 지각하는 같음은 완전한 형상으로서 같음 자체에는 못 미친다는 뜻일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내리는 판단의 배후에 형상이 있음을 환기시킨다. 즉 같음, 정의, 아름다움 등의 개념을 감각적 지각 자체에는 찾을 수 없지만, 우리는 일상적으로 어떤 사태에 대해 서술할 때 그러한 형상에 대한 관념을 갖고 있으며, 이를 잣대로 사용한다. 상기 논변의 주안점은 사물에 대한 경험적 인식을 위해서는 그에 앞서 반드시 일정한 보편적 앎을 동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기의 주체가 과연 누구인가 하는 점은 나중에 다시 문제로 등장하는데, 적어도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확실히 상기는 철학자뿐만 아니라 일상인 모두가 공통적으로 겪는 과정으로 여겨진다.


 (8)은 이후의 논증을 위한 중요한 전제로 도입되는데, 과연 이것이 필연적인 것인지가 문제가 된다. 우선 감각적 지각의 사물들이 갖는 속성이나 관계의 성격이 지닌 불완전성이 인지되기 위해서는 꼭 같음 자체라는 형상이 필요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실제 판단이 언제나 완전함의 형상을 구비한 후에 이루어지는가? 반드시 비감각적인 형상을 가정하지 않고서도, 서로 다른 여러 시점이나 관찰자에 따라 달라지는 경험들을 비교함으로써 특정한 같음이 불완전하다고 판단하는 것(Gallop, 127)은 불가능할까? 또한 같음 자체에 대한 앎이 판단에 있어서 필요함을 인정한다고 해도, 어떤 사물의 같음이 불완전하다는 판단 ‘이전부터’ 같음 자체에 대한 앎이 있어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즉 어떤 방식으로든 그 판단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 순간에’ 같음 자체에 대한 앎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조건만으로도 충분할 것이기 때문이다.





3-3. 만약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에, 즉 우리의 감각을 하기 이전에 형상을 이미 알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개별자들을 형상들과 비교할 수 없었을 것이다(75a4~75c6).


  (11) 우리가 같음 자체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거나 할 수 있는 것은 같은 사물을 보거나 느끼거나 다른 감각적 지각으로 인해서이다(75a5~a10). (12) 모든 감각 대상이 같음 자체에 이르고자 하지만 그것보다 모자라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감각함(sense-perception/Wahrnehmung/sensation)으로 인해서이다(75a10~b3). (13)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감각적 지각을 통해 접한 같은 것들을 같음 자체와 관련지을(refer/beziehen/rapporter) 수 있으려면, 감각적 지각을 할 수 있기 이전에 같음 자체에 대한 앎을 갖고 있어야만 한다(75b4~b9). (14) 우리는 태어나는 바로 그 순간부터(as soon as we were born/gleich von unserer Geburt/dès notre naissance), 즉 태어난 뒤에 감각적 지각을 하게 된다(75b10~b12). (15) 그러므로 우리가 같음에 대한 앎을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에 갖고 있었음이 필연적이다(75c1~c6).





☞ 실제로 감각적으로 지각되는 어떠한 두 사물도 같음은 아니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같음의 기준이나 개념, 의미를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감각적 지각은 같음 자체를 생각하도록 하는 실마리를 마련해준다.5)이때 (13)은 상기 논증의 핵심이라 할 수 있을텐데, “감각적 지각 이전”의 시점을 언제로 잡느냐가 논쟁거리이다. 감각 이전의 시점은 혼이 감각 지각 활동을 하기 이전일 수도 있고, 더 이전에 혼이 육체와 결합하기 이전일 수도 있다. 전자의 경우 같음의 개념은 선험적인 것이 될 것이고, 후자의 경우 초월적인 것이 될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태어난 후와 감각활동 이전의 짧은 순간에 같음의 개념을 얻게 되었다고 볼 수 있는 가능성은 없을까? 만약 이렇게 본다면, 같음의 형상은 생시 이전에 존재함으로서 상기되어야 할 대상이라기보다는, 인식의 선험적 형식으로서 범주 개념 같은 것이 될 것이다.  





3-4.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 형상들에 대한 앎을 망각하며 상기에 의해 형상에 대한 앎을 재획득한다(75c7~76d6).


 (16) 만일 우리가 같음 자체에 대한 앎을 망각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직도 그것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75c7~e1). 즉 만약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에 이 앎을 갖게 되어 이를 가진 채로 태어났다면, 같음이나 더 큼과 더 작음뿐만 아니라 아름다움 자체, 좋음 자체 등  ‘~인 것’이라는 표시를 하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만약 그 앎들을 갖게 되고서는 그때마다 잊는 일이 없다면, 우리는 언제나 알고 있는 상태로 태어나 일생을 통해 늘 알고 있을 것이 필연적이다. 알고 있다는 것은 어떤 것에 대한 앎을 갖게 되고서는 이를 잃지 않고 지니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앎의 잃어버림은 망각이다. (17) 만일 우리가 같음에 대한 앎을 망각했다면, 같음을 인식하기 위해 상기가 필요하다(75e2~e8). 이는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에 갖게 되었다가 태어나면서 잃어버렸지만, 나중에 이것들과 관련하여 감각적 지각들을 이용함으로써 언젠가 우리가 갖고 있던 그 앎들을 도로 갖게 된다면, 우리가 배우는 것이라 일컫는 것은 자신의 것인 앎을 되찾아 갖는 것(regaining/Wiederaufnehmen/ressaisir), 즉 상기이다. (18) 따라서 우리 인간 모두가 같음 자체에 대한 앎을 지니고 태어나 일생을 통해 알고 있거나, 또는 우리가 상기에 의해서 그 앎을 획득하거나 둘 중 하나이다(76a1~a8). (19) 모든 사람이 같음 자체에 대한 앎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76b1~c2). 알고 있는 사람은 자기가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다(give an account/Rechenschaft geben/rendre compte). 그러나 모두가 같음 자체 등등을 설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20) 이때 우리의 혼이 형상에 대한 앎을 획득하는 시점은 인간으로 태어나고 난 뒤는 아니다(76c6~c7). 혼들은 인간의 모습으로 있기에 앞서, 몸들과 떨어져 그 이전에 있었으며 지혜(wisdom/Einsicht/pensée)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21) 소크라테스는 그 앎을 가지고 태어난 것은 아니므로, 그 앎을 갖게 되는 순간에 잃어버린다고 한다(76d1~d4). (22) 결론 : 우리는 같음 자체를 상기한다(76c3~c4).





☞ (16)에서 같음의 형상과 더불어 언급되는 더 큼(the larger)과 더 작음(the smaller)이라는 형상(75c10)은 문제적이다. ‘더’라는 비교급은 크기의 형상 규정을 느슨하게 만드는데(Hackforth, 71), 더군다나 우리는 같음 자체와 같은 것들을 비교할 때와 같은 방식으로 ‘정확히 큰 것’과 큰 것들을 비교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더불어 (16)의 주장에서, 같음 개념에 대한 인식은 무의식 상태에서 잠재되어 있는 경우와 어떤 계기로 인해 그것을 사용하는 경우로 더 분석될 수 있을 것 같다6).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알고 있다는 것은 어떤 앎을 잃지 않고 지니고 있는 것이지만, 이는 알고 있다는 것의 규정이라기보다는 다만 망각하지 않음이라는 소극적 규정으로 보인다. 상기되는 앎과 망각된 앎이라는 양자택일 밖에 없다면, 무지(ignorance)의 상태를 제대로 규정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Burger, 79). 즉 같음 자체에 대한 앎을 완전히 망각해서 상기해야만 경우와 그것이 사용되지는 않더라도 잠재적으로 그 앎을 지니고 있는 경우를 구분할 수 있다. 만약 망각이 아니라 추론으로 극복되어야 할 무지라면, 생시 이전의 앎에 대한 상기가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물론 소크라테스라면 우리가 형상에 대한 앎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모를 수는 없을 것이라고 할 것이다.


 이어지는 대목에서 소크라테스는 앎을 망각하지 않았다면 그것을 지니고 있을 것이고(16), 앎을 망각했다면 상기가 필요하다(17)고 주장하면서 배중률(Law of Excluded Middle)을 적용한다(Gallop, 132). 그런데 시미아스는 태어남과 동시에(at the very moment of birth/bei der Geburt/à l'heure de la naissance) 형상에 대한 앎을 갖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기한다(76c14~c15). 소크라테스는 과연 태어날 때가 아니라면 언제 형상에 대한 앎을 ‘잃어버리게’ 되느냐고 반문하면서, 이 가능성을 물리친다. 그러나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눈이 보이지 않는 아이를 일컬어 그가 태어날 때 시각을 잃어버렸다고 표현하지 않는다. 애초에 시각을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에 잃는다는 표현은 무의미하며, 마찬가지로 나중에 그가 시각을 갖게 되더라도, 시각을 다시 얻었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이 대목에서 소크라테스가 잃어버린다는 표현을 쓴 것은 우리가 그 앎을 잃어버리기 전에 미리 알고 있으며, 혼이 생시 이전에 존재한다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미아스가 묻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가정이다(Gallop, 134).  


 위 대목에서 또한 문제가 될 만한 것은 (19)의 ‘모든 사람이 같음 자체에 대한 앎을 갖고 있지는 않다’라는 입장이 (2)에서 ‘우리는 같음 자체를 알고 있다’는 언명과 상충되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이를 검토하기 위해서는, ‘우리’와 ‘모든 사람’이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 같음이라는 개념을 일상적으로 쓸 줄 안다는 말인지 아니면 같음의 철학적 정의를 제시할 수 있다는 말인지를 따져봐야 한다. 우선 적절한 설명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정의를 내릴 수 있고, 근거를 대고 합리적으로 추론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소박한 앎이 아닌 철학적 앎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위의 비일관성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은 세 가지 정도로 제시될 수 있다. 먼저 (2)에서 모두가 알고 있는 같음을 수학적인 것으로 보고, (19)에서 모두가 알지는 못하는 형상을 도덕적인 것으로 간주해서 양자의 비일관성을 해소하는 방법이 있다(Hackforth, 76). 그러나 위의 언급 속에서 과연 소크라테스가 수학적인 형상과 도덕적인 형상을 명시적으로 구별하고 있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다음으로 (2)에서 ‘우리’를 철학자로 보고, (19)에서의 ‘우리’를 일반 그리스인들로 보면 위 명제들을 조화시킬 수 있겠지만(Gallop, 120) 이 제안 역시 문제가 있다. (2)의 논의는 상기 논증의 범위를 처음부터 철학자의 영혼에만 해당되는 것으로 제한시키게 되지만, 이어지는 표현에 따르면 상기는 형상에 대해 적절한 설명을 할 수 없는 사람에게도 역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76c4). 이렇게 되면 애초에 전제로 도입하는 명제가 이미 도출하려는 결론을 선취하는 모양이 되고 마는 것 같다. 아마 이러한 상충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2)에서의 모두가 아는 형상을 직관적인 형상 인식을 가리키는 것으로, (19)에서 모두가 알지는 못하는 형상을 추론적이고 논증적인 형상을 가리키는 것으로 간주할 수도 있지 않을까? 바로 그 대목에서 시미아스는 내일이 되어 소크라테스가 죽고 나면 적절한 설명을 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라며 걱정하고 있다(76b).  


4. 논증의 요약 및 결론(76d6~77d5)


 4-1. 논증의 요약과 형상과 혼의 관계 : 아름다운 것과 좋은 것, 이와 같은 모든 존재(Being/Wesen/réalité)가 있고, 즉 형상이 이미 있으며, 마찬가지로 우리의 혼 또한 있으며 그것도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에 있었을 것이 필연적이다. 형상들도 있고 혼 또한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있는 것이, 그리고 형상들이 있지 않으면 우리의 혼들 또한 있지 않다는 것이 필연적이다(76d5~e8). 형상과 혼 사이에는 놀랍도록 똑같은 필연성이 있고, 결국 논의는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에 혼과 존재도 마찬가지로 있는 것으로 귀착한다. 아름다움과 좋음 등의 것들은 모두 최대한의 의미에서(in the fullest possible way/in dem allerhöchsten Sinne/a la plus haute réalité possible) 있다(77a1~a5).





☞ 소크라테스는 형상들의 존재와 혼의 태어나기 전에 있었음이 똑같이 필연적이라고 한다. 아마도 그는 형상들의 존재를 인식하기 위해서, 상기 논변은 혼의 불멸성을 전제해야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즉 만약 혼이 불멸하는 것이 아니라면, 피안의 초감각적인 형상을 정립하는 것은 그것이 결코 알려질 수 없기 까닭에 불합리한 것이며, 또 만약 형상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혼이 태어나기 이전에 혼이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Bluck, 64). 그러나 혼과 형상의 관계가 필연적으로 연결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혼이 어떠한 방식으로 생명의 근원으로서 육신을 살아있게 하는 기능과 형상을 인식하는 기능을 동시에 지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4-2. circular argument와 recollection argument의 결합 : 시미아스와 케베스는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에 우리의 혼이 있었다는 점에서는 납득하겠지만, 죽은 뒤에도 혼이 여전히 있을 것인지는 아직 증명된 것이 아니라고 답한다(77a8~b2). 즉 혼이 사후에도 있을 것이라는 점이 추가로 증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77c1~c5). 이에 소크라테스는 윤회 논증과 상기 논증을 합친다면 이미 혼의 불멸성은 증명되었다고 대답한다. 즉 만약에 혼이 태어나기 전에도 있기도 하지만, 그것이 삶 속으로 들어와 태어나는 것이 죽음과 죽어있는 상태 외의 다른 어떤 것에서도 태어나는 것이 아님이 필연적이라면, 혼은 어쨌든 다시 태어나야만 하기 때에 죽은 뒤에도 혼이 있는 것은 필연적이라는 것이다(77d1~d4).  


  


☞ 앞에서 언급된 것에 따르면, 순환 논변이 육화되지 않은 혼의 존재 여부만을 다룬다면, 상기 논변은 혼이 갖고 있는 힘과 지혜(70b3~4)를 다룬다는 점에서 구별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서 시미아스와 케베스의 요구는 단지 사후에도 혼이 존재할 수 있는지 증명해달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말을 다시 풀어 말하면, 모든 산 것은 죽은 것으로부터 왔음을 주장하는 순환 논변이 “태어남 이전의 시간은 죽음 이후의 시간(the time before birth is the time after death)”임을 보장하기 때문에(Hackforth, 80), 태어나기 이전에 혼이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상기 논변과 순환 논변이 결합되면 혼의 사후 존재도 증명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Hackforth의 말은 다소 궤변처럼 들린다. 순환 논변은 죽음->삶->죽음의 순환을 보여주고, 상기 논변은 생시 이전에 형상을 인식하는 혼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양자의 결합에서 혼의 사후 불멸이 증명되려면 우선 두 논변의 가설이 옳아야 한다. 특히 상기 논변에서 문제되는 혼은 혼 일체가 아니라 어떤 형상에 대한 앎을 간직하는 개별적인 혼이기 때문에, 특정한 혼이 육신에서 떨어진 뒤에도 계속해서 어떤 앎을 간직한 채로 살아남으리라는 주장이 증명되지 않으면 안 된다(Gallop, 136).  


참고문헌


플라톤, 『에우티프론,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 박종현 역주, 서광사, 2003.   Plato, Phaedo, translated with notes by David Gallop, Oxford : Clarendon Press, 1988.  


Plato, Plato's Phaedo, a translation with introduction, notes and appendices by R. S. Bluck, London : Routledge, 2001.


Plato, Plato's Phaedo, translation with an introduction and commentary by R. Hackforth, London :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2.


Platon, Phaidon(Werke in acht Bänden : Bd. 3.), hrsg. von Gunther Eigler, Darmstadt : Wissenschaftliche Buchgesellschaft, 1990.


Platon, Phédon(Oeuvres complètes : Tome Ⅳ-première partie.), texte établi et traduit par Paul Vicaire, Paris : Société d'édition "Les Belles Lettres", 1983.  


Ronna Burger, The Phaedo : a Platonic labyrinth, New Haven : Yale Univ. Press, 1984.







1) 이는 특히 Meno에서의 상기에 관한 논의(81c~86c)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Phaedo에서 상기는 Meno에서처럼 기하학적 명제의 증명을 다루지 않으며, 감성적 인식의 획득을 논의한다는 차이를 가진다(Gallop, 115). 우리의 배움이란 상기라는 주장은 일견 매우 이상하게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배움이란 사실에 대한 경험적 인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 개념과 관련된 것이다(Gallop, 113).


2) 이 대목에서 감각적 지각을 통해서 알아본다recognize는 표현은 통상적인 의미에서 어떤 것을 안다는 의미로 쓰였다. 반면 안다는 것know은 엄밀한 의미에서 형상들에 대한 앎을 가리킬 때로 구별된다.


3) 플라톤이 형상을 가리킬 때 쓰는 어법은 당시 희랍어에서 질(quality)과 실체(substance)가 명확하게 분화하지 않은 탓으로, 우리가 흔히 속성으로 간주하는 것들은 어떤 의미에서 사물과 같은 것으로 나타난다. 예컨대 같음이라는 말은 오늘날 논리적 관계를 나타내는 개념으로 간주되지만, 플라톤의 형상은 그 자체로 실재성을 지니는 것이다. 형상이 갖는 보편자로서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같음 자체라는 형상은 일종의 추상화(abstraction)을 통해 얻어진 것으로 여길 수도 있지만 플라톤의 요점은 형상이 먼저 존재하고 그것을 가지고 우리가 판단을 한다는 것이다. Bluck(63~4) 참조.  


4) 그러나 상기가, 특히 메논에서 그랬던 것처럼, 추론과 논증을 통한 인식에 관한 이론인지, 직관적인 형상 인식에 대한 이론인지는 상기 논변 전체를 두고 평가해보아야 할 점으로 남는다. 다만 소크라테스가 상기 논변 내내 반복하는 ‘같음’이라는 형상에 대한 언급은 인식의 기초적인 모델로 수학을 암묵적으로 또 명시적으로 참조하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5) 형상에 대한 앎이 감각적 지각으로부터 온다는 말도 따져볼 만하다. 그는 여러 차례 감각이 주는 부정확성에 대해 비판하지만, 이러한 감각적 지각이 없다면, 상기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감각에 의거한 탐구는 나중에 형상에 대한 추구에서 방해물이 될 뿐인 것으로 로고스에 의거한 탐구와 구별된다(99d4~e6). 한편 칸트의 다음과 같은 말은 감각적 지각과 선험적 인식의 관계에서 플라톤의 상기설을 연상시킨다.  “우리의 모든 인식이 경험과 함께 시작된다는 것은 전혀 의심할 여지가 없다. (...) 시간상으로는 우리에게 어떠한 인식도 경험에 선행하는 것은 없고, 경험과 함께 모든 인식은 시작된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인식이 경험과 함께 시작된다 할지라도,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인식 모두가 바로 경험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I. Kant, 『순수이성비판』, 백종현 옮김, 아카넷, 2006, pp. 214~5(B1).


6) 다른 맥락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앎의 소유와 사용을 구분하는 경우처럼 말이다. Aristoteles, 『니코마코스 윤리학』, 강상진 외 옮김, 이제이북스, 2006, p. 241(1146b31 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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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e 2011-11-24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어렵내요
 

사람들과 함께 읽는 하버마스.. 생각보다 재미가 없다. 그래도 사회철학의 필수교양이라 하니 일단 읽는 수 밖에. 피아제는 예전에 박홍규 교수(다작의 박홍규 말고)가 종종 언급하고 그랬던 기억이 난다. 피아제가 이른바 유아론적 철학으로 일컬어지는 현상학에 대한 해독제가 될 수 있다면,  합리성의 진전에 따라 분화되는 세계상과 체계와 별도로 의사소통의 가능성을 보장하는 생활세계 사이에 양자를 변전시키는 수단으로서 의사소통적 합리성 개념이 들어서게 되는 것 같다. 아마도 현상학의 입장에서는  생활세계 개념이 그렇게 단순하게 처리되지는 않을 것 같지만..  

 

하버마스, 의사소통행위이론 서론


2. 신화적 세계이해와 근대적 세계이해의 몇 가지 특징


4) 세계상의 탈중심화(피아제). 생활세계 개념의 잠정적 도입(127~138)


 [앞서 다룬] 영국에서 진행된 합리성 논쟁의 결론은 이것이다. 근대적 세계이해의 바탕에 보편적 합리성 구조가 놓여있기는 하지만, 서구의 근대사회는 인지적-도구적 측면에 고착되어 왜곡된, 특수할 뿐인 합리성 이해를 촉진한다. 세계상의 구조는 내적으로 재구성될 수 있는 지식증가에로 소급될 수 있는 체계적 변화과정을 겪어 왔을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학습과정은 경험적 메커니즘을 통해 설명될 수 있으며, 동시에 일종의 문제해결로서 파악될 수 있다. 이때 학습과정은 내적 타당성 조건과 관련하여 체계적으로 평가 가능하다. 보편주의적 입장은 세계상의 합리화가 학습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최소한 기본 의도에서는 진화론적 가정을 불가피하게 한다. 가령 매킨타이어는 윈치에게 인지적 발달을 불연속적 형태도약으로 변형하여 해석해야 할 것이라고 이의를 제기한다. 다른 한편 보편주의적 입장도 증명부담을 져야 하는데, 근대사회의 학자는 종교적-형이상학적 세계상에서 근대적 세계이해로의 이행을 가능케 했던 학습과정을 재구성해야 한다.


 2장에서 베버의 종교사회학에 의지한 종교적 세계상의 발전은 학습과정으로 파악될 것이다. 이때 학습 개념은 피아제가 의식구조의 개체발생에 관련시켜 발전시킨 개념이다. 피아제는 인지발달의 단계들을 구별하는데, 각 단계는 새로운 내용을 통해서가 아니라, 구조적으로 기술될 수 있는 학습능력의 수준을 통해 규정된다(구조학습과 내용학습의 구분). 새로운 세계상의 출현도 마찬가지이다. 신화적, 종교적-형이상학적, 근대적 사고방식 사이의 휴지부는 기본 개념체계의 변화가 일어난 시기이다.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며 극복된 해석들은 내용적 측면과 무관하게 범주적으로 평가절하된다. 설득력을 잃은 것은 이러저러한 개별근거가 아니라 근거들의 종류이다. 이러한 평가절하의 진전은 새로운 학습수준의 이행과 관련된다. 좁은 의미의 인지적 발달은 어린아이가 외적 실재와 대결하면서 획득하는 사고 및 행위의 구조와 관련되나, 피아제는 인지적 발달을 외적 세계와 내적 세계의 형성과 관련짓는다. 성장하는 어린이는 외부세계와 내부세계에 대한 개념을 객체들 및 자신과의 실천적 교섭을 통해 형성한다(객체의 세계와 내적 세계의 경계설정). 도구적 행위를 통한 외적 자연과의 접촉은 지적 규범체계의 구성적 획득을 매개하며, 타인과의 상호 작용은 도덕적 규범체계를 습득하도록 한다. 학습메커니즘, 적응과 순응은 이 두 가지 행위양식을 통하여 특별한 방식으로 작용한다. 이렇게 하여 넓은 의미에서 인지발달 개념은, 외적 세계의 구성으로만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객관세계와 사회세계를 주관세계와 동시에 경계짓는 기준체계의 구성으로 이해된다. 인지적 발달은 자기중심적 경향의 세계이해가 탈중심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위 세 가지 세계 개념의 형식적 기준체계가 분화되는 정도에 맞추어 세계에 대한 성찰적 개념이 형성되고, 공동의 해석 노력을 매개로 세계에 접근하는 태도가 습득된다. 모든 상호이해 행위는 상호주관적으로 인정된 상황 규정을 목표로 하는 협동적 해석과정의 일부로 파악할 수 있다. 생활세계 개념은 상호이해 과정에 대한 상관개념으로 도입된다. 의사소통적으로 행위하는 주체들은 언제나 생활세계의 지평에서 서로를 이해한다. 생활세계는 윤곽이 불확실하고, 항상 문제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배후확신들로 구성되며, 상황규정의 원천 역할을 한다. 생활세계는 이전 세대들이 이미 행한 해석성과를 축적하고 있다. 이는 현재 상호 이해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불일치에 대응하는 보수적 평형추 역할을 한다. 생활세계 속에 축적된 해석성과들과 비판적 검토작업이 차지하는 비중의 관계는 세계상의 탈중심화와 함께 변화한다. 문화적 비축지식을 제공하는 세계상이 탈중심화될수록 비판에 대해 내성을 갖도록 해석된 생활세계를 통해 상호이해의 필요가 미리부터 충족되는 정도는 점점 약해진다. 즉 생활세계의 합리화는 규범적으로 구성된 동의 대 의사소통적으로 성취된 상호이해의 차원에서 특징지을 수 있다. 어떤 타당성 주장이 어떻게 받아들여져야 하는지가 문화적 전통에 의해 미리 결정될수록, 당사자들 자신이 잠재적 근거들을 명시적으로 만들고 검사할 가능성이 적어진다. 한 사회집단의 생활세계가 신화적 세계상에 의해 해석될수록, 개별 구성원들에게 해석의 부담은 경감되고 비판가능한 동의를 스스로 창출할 기회도 줄어든다.


 따라서 1) 문화적 전승은 객관세계, 사회세계, 주관세계에 대한 형식적 개념을 제공해야 한다. 분화된 타당성 주장들(명제적 진리, 규범적 정당성, 주관적 진실성)을 허용하고 그에 상응하는 기본태도들(객관화하는 태도, 규범준수적 태도, 표출적 태도)의 분화를 자극해야 한다. 2) 문화적 전승은 자신에 대한 성찰적 태도, 즉 전통에 의해 마련된 해석들을 근본적으로 의문에 부치고 비판적 수정을 가하는 것(제2차의 인지적 활동)이 허용되어야 한다. 3) 문화적 전승의 인지적 구성요소, 가치평가적 구성요소가 전문화된 논증들과 피드백을 이루어 해당 학습과정들이 사회적으로 제도화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하여 과학, 도덕과 법, 예술 등 문화의 하부체계가 생겨난다. 4) 문화적 전승은 성공지향적 행위가 상호이해의 명령으로부터 해방되고 이해지향적 행위로부터 부분적으로 분리될 수 있는 방식으로 생활세계를 해석해야 한다. 이를 통해 목적합리적 행위의 사회적 제도화, 예컨대 화폐와 권력을 통해 조절되는 하부체계가 형성된다. 막스 베버는 3), 4)에서 언급된 체계형성을 근대의 문화적, 사회적 합리화의 핵심을 나타내는 가치영역들의 분화로 파악한다.


 이렇게 피아제의 탈중심화 개념, 세계상의 구조, 생활세계, 합리적 삶 사이의 내적 연관을 해명하여 다시 의사소통적 합리성 개념에 이르게 된다. 이 개념은 탈중심화된 세계이해를 비판가능한 타당성 주장의 토의적 해결과 관련짓는다. 벨머에 따르면 토의적 합리성은 절차적 합리성이자 메타 차원에서 작용하는 합리성의 형식적 기준이다. 만약 자기중심주의의 개념을 넓게 이해하고 모든 단계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볼 경우, 탈중심화된 세계이해의 수준에서도 어떤 오류가 가능하다. 객관세계의 분화가 사회세계와 주관세계를 합리적 동기에 따른 상호이해의 영역으로부터 완전히 축출함을 의미한다는 환상 말이다. 이렇게 물화하는 사고의 환상에 짝을 이루는 근대의 착각이 유토피아주의이다. 이는 탈중심화된 세계 개념과 절차적 합리성으로부터 동시에 완전히 합리적으로 된 생활형식이란 이상이 획득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 생활형식의 총체성을 개별적 합리성 측면에서 평가하려고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상적 한계치에 근접하는 것이 아니라, 보완을 필요로 하는 계기들 사이의 균형이 필요하다. 절차적 합리성 개념으로부터 어떤 좋은 삶의 이념을 도출하도록 오도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실체화된 이성적 세계상을 포기한다면, 자본주의적으로 근대화된 사회의 생활형식에 이중적인 왜곡(전통의 실체를 평가절하하고 인지적-도구적인 것에 제한된 일면화된 합리성에 복속시킨 것)을 비판하는 일만 남는다. 이러한 비판에는 의사소통 합리성 개념이 기초가 될 수 있다. 세계이해의 탈중심화와 생활세계의 합리화가 해방된 사회를 위한 필요조건이라는 것이 입증된다면 말이다. 고도로 발달된 의사소통적 기반구조를 가진 생활세계를 추정하면서 이를 성공한 생활형식의 역사적 표현과 혼동하는 것이 유토피아주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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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10-04-07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라님 공부 열심히군요! ^^

바라 2010-04-08 01:06   좋아요 0 | URL
히인지 이인지 갑자기 헷갈리네요; 일단 이것저것 영양가없이 손대고 있는 중입니다ㅎ
 

 

자크 랑시에르, <정치, 동일시, 주체화>,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pp. 133~147. 

Jacuqes Ranciere, <Politique, identification, subjectivation>, Aux bords du politique, La fabrique édition, 1998, pp. 83~92

 


 정치적인 것le politique은 무엇인가? 정치적인 것은 이질발생적인 두 과정의 마주침이다. 첫째는 통치의 과정으로, 이는 사람들을 공동체로 결집하여 그들의 동의를 조직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며, 자리들과 직무fonction(국역 - 기능)를 위계적으로 배분하는 것에 바탕을 둔다. 이는 치안police이라 이름붙일 수 있는 것이다. 둘째는 평등의 과정으로, 이는 아무나n'importe qui와 아무나 사이의 평등이라는 전제와 그 전제를 입증하려는 고민을 따르는 실천들의 놀이로 이루어진다. 이 놀이는 해방emancipation이라고 불린다.


 (방)해tort를 다루기. 조제프 자코토에 의하면, 모든 치안이 평등을 부인하며, 치안 과정과 평등 과정은 공약불가능하다. 이는 개인들의 지적 해방만이 유일하게 가능하고, 정치 무대란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치안이 평등을 부인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치안은 평등을 (방)해한다faire tort고 말한다. 정치적인 것이란 평등의 입증이 그 위에서 (방)해를 다루는 형태를 취해야 하는 무대이다.1)


 이렇게 해서 세 항이 있다. 치안, 해방, 정치적인 것. 우리는 해방 과정에 정치la politique라는 이름을 부여할 수 있다. 정치적인 것은 (방)해를 다루는 가운데 정치와 치안이 마주치는 현장이다. 정치는 한 공동체의 원리나 법칙, 고유함propre의 현실화가 아니다. 정치는 아르케를 갖지 않는다. 정치는 아나키적이다. 민주주의라는 단어 자체가 그것을 지칭하는데, 플라톤이 지적하듯이 민주주의는 아르케도 척도도 없다. 데모스의 행위, kratein의 독특함은 원초적 무질서나 오산mécompte을 증언한다. 데모스는 공동체의 이름이자 그것의 분할의 이름이며, (방)해를 다루는 것에 대한 이름이다. 인민의 정치는 자리와 직무에 대한 치안적 분배를 (방)해한다. 인민은 언제나 그 자체보다 더 많거나 더 적기 때문이다. 이는 치안 질서를 혼란에 빠뜨리는 하나-더un-en-plus의 힘이다.


 현재의 난국은 정치를 한 공동체의 고유함의 현시와 동일시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공동체의 고유함의 현실화로서 스스로를 드러내고 통치 규칙을 사회의 자연스러운 법으로 전환하는 것은 바로 치안 원리이기 때문이다. 정치는 그러한 동일시에 바탕을 두지 않으며, 치안과 다르다. 역사적으로 노동자들의 자기-해방의 모습을 띠었던 해방의 관념은 또한 이기주의에 맞선 투쟁이었는데, 이는 도덕 문제가 아니라 논리 문제이다. 해방의 정치는 고유하지 않은 고유함un propre impropre의 정치이다. 해방의 논리는 타자론hétérologie이다.


 해방 과정은 아무 말하는 존재와 아무 말하는 다른 존재 사이의 평등을 입증하는 것이다. 예컨대 노동자, 여성, 흑인 등등. (방)해의 희생자와 희생자의 권리를 내세우는 범주의 이름은 언제나 익명anonymedml 이름이자 아무나의 이름이다. 정치적으로 유일한 보편이란 평등 뿐인데, 이는 인간성이나 이성의 본질에 각인된 가치가 아니다. 평등은 각각의 사례 속에서 전제되고 입증되며, 증명해야 하는 하나의 보편이다. 진리의 자리는 토대나 이상의 자리가 아니고, 하나의 topos논거/장소, 논증 절차에서 주체화가 이루어지는 장소이다. 진리의 언어는 언제나 방언적이다. 보편성은 그것들의 결과를 증명하는 논증 과정, 노동자도 하나의 시민이며 흑인도 인간이라는 등등 사실에서 연유하는 것을 말하는 논증 과정에 있다. 사회적 항의protestation 일반의 논리적 도식은 이러하다. 우리는 시민, 인간 등과 같은 범주에 속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예컨대 19세기 프랑스 노동자들은 이렇게 질문한다. 프랑스 노동자들은 헌법이 법 앞에 평등하다고 선언하는 프랑스인들의 집합에 속하는가 아닌가? 또는 최초의 프랑스 여성운동가들의 경우 : 프랑스 여자도 프랑스인인가? 일견 부조리해보이는 이러한 문장은 사회적 불평등의 책략을 폭로하는 논리적 균열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이러한 균열을 하나의 관계로 절합하고(국역 누락) 논리적 비-장소non-lieu를 논쟁적 증명의 장소로 변형시킨다.


 주체화 과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soi가 아니라, 자기 사이의 관계인 하나un를 형성하는 것이다. 1832년 오귀스트 블랑키의 소송에서 검사장은 그에게 직업을 묻고 블랑키는 ‘프롤레타리아’라고 대답한다. 검사장은 그것은 직업이 아니라고 반박하지만, 블랑키는 "프롤레타리아는 정치적 권리를 박탈당한 우리 인민 대다수의 직업"이라고 응수한다. 치안의 관점에서는 검사장이 옳았겠으나 정치의 관점에서 보면 블랑키가 옳았다. 프롤레타리아는 사회학적으로 지정할 수 있는 한 사회 집단의 이름이 아니라 셈-바깥hors-compte, 내쫓긴 자outcast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라틴어 proletarii는 번식하는 자들, 이름없이 살고 이름을 남기지도 않으며 도시국가의 상징적 구성 속에서 하나의 부분으로 셈해지지 않는 그저 살고 번식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는 아무나의 이름, 내쫓긴 자들의 이름으로서, 노동자들에게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프롤레타리아는 계급 질서에 속하지 않는 자들, 따라서 이 질서의 잠재적 소멸인 자들로 이해해야 한다. 주체화 과정은 이처럼 탈정체화/탈동일화désidentification 혹은 탈계급화 과정이다.2)


 주체는 사이에 있는 것un in-between, 둘-사이에 있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는 그들이 사이에 - 여러 이름, 지위, 정체성들 사이에, 인간성과 비인간성, 시민성과 그것의 부인 사이에, 도구로서의 인간의 지위와 말하고 사유하는 인간의 지위 사이에 - 있는 한에서 함께 있기도 한 사람들에게 고유한 이름이다. 정치적 주체화는 사이에 있는 한에서 함께 있기도 한 사람들이 평등을 현실태로 만드는 것, 혹은 (방)해를 다루는 것이다. 정치란 하나의 불가능한 동일시에 바탕을 둔다. 예컨대 ‘우리는 모두 독일의 유대인들이다’라는 1968년의 슬로건. 정치적 주체화의 논리는 또한 타자론, 타자성altérité에 대한 세 가지 규정에 따른 타자autre의 논리이기도 하다. 첫째, 정치적 주체화의 논리는 하나의 정체성에 대한 단순한 긍정이 아니라, 치안 논리에 따라서 고착된, 타자가 부과하는 정체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정치는 고유하지 않은 이름들, 잘못된 명칭들misnomers의 문제다. 둘째, 정치적 주체화의 논리는 하나의 증명인 바, 이 증명은 그것의 전달 대상인 하나의 타자를 전제한다. 이는 비록 하버마스 식의 대화 혹은 합의 추구의 장소가 아닐지라도, 하나의 공통 장소를 구성하는 것이다. 합의는 없으며, 손해 없는 소통이란 없고, (방)해의 해결도 없다. 셋째, 주체화의 논리는 언제나 불가능한 동일시를 내포한다.


 서사와 문화는 모두 논쟁의 줄거리를 하나의 목소리가 되게 하며, 이 목소리를 한 신체의 현시가 되게 한다. 서사와 문화라는 개념들은 주체화를 하나의 동일시가 되게 한다. 그러나 정치적 주체화의 삶은 목소리와 신체의 거리, 두 정체성들 사이의 틈새로 만들어진다. 평등의 과정은 차이의 과정이며, 이 차이는 다른 정체성의 현시나 두 정체성 심급들 사이의 갈등이 아니다. 차이가 현시되는 장소는 한 집단의 고유함이나 문화가 아니라, 논증의 topos이다. 토포스가 전시되는 장소는 틈새이며, 정치적 주체의 장소는 틈새 혹은 균열이다. 이름들, 정체성들 혹은 문화들 사이에 있음으로서 함께 있음.


 이는 확실히 불편한 입장인데, 이는 메타-정치적 담론의 발전에 자리를 내준다. 메타-정치3)는 치안의 관점에서 정치를 해석하는 것이다. 메타-정치적 해석의 패러다임은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해석인데, 그것은 인간과 시민의 차이를 속임수의 징표로 본다. 시민이라는 천상의 정체성 뒤에 인간, 소유자라는 지상의 정체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해방의 정치는 인간에 대한 동화와 시민에 대한 동화를 인정하지 않는다. 해방의 정치의 주장에 따르면, 권리 선언의 보편성은 선언이 가능케 하는 논증들의 보편성이다. 인간으로도 시민으로도 셈해지지 않는 그들 혹은 그녀들의 권리들을 포함하는, 권리에 대한 무수한 증명들의 연출을 통해 가능하다. 우리는 보편주의냐 정체성주의냐의 선택지에 갇혀 있지 않다. 선택지는 오히려 주체화와 동일시 사이에 있다.        





1) 랑시에르는 치안과 정치를 대립시킨다. 치안은 몫의 배분을 다루는 것으로서 지배가 수반되는 과정이고, 국가의 행정 전반이 해당된다. 반면 정치는 매우 드물게 일어나는 봉기적 순간이다. 랑시에르는 정치적 주체화를 탈동일화로 보면서 치안이나 AIE(알튀세르)를 의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어떤 동일성/정체성 또는 동일시/정체화가 없는 정치가 과연 가능한지, 또한 사회권을 비롯한 권리들의 문제는 치안에 속하는 문제가 아닌지 질문해볼 수 있을 것 같다.


2) “Politics is a matter of subjects or, rather, modes of subjectification [...] Descartes's ego sum, ego exisito is the prototype of such indissoluble subjects of a series of operations implying the production of a new field of experience. Any political subjectification holds to this formula. It is a nos sumus, nos existimus, [...] Any subjectification is a disidentification, removal from the naturalness of a place, the opening up of a subject space where anyone can be counted is made between having a part and having no part.” Rancière, J., Disagreement : Politics and Philosophy, translated by Julie Rose, Mineapolis : University of MinnesotaPress, 1999, pp. 36~37.


3) 랑시에르는 <<불화>> 4장 from archipolitics to metapolitics에서 정치를 archipolitics, parapolitics, metapolitics로 구분한다. metapolitics는 맑스로 대표되는 정치 전통인데, 경제가 정치의 진실이라는 도식으로 요약된다. 이때 맑스의 인권 비판은 가령 형식적 민주주의와 실질적 민주주의를 대립시키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맑스적 정치의 핵심은 정치의 거짓을 드러내고, 정치의 진실은 경제에 있음을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의 결과로 엥겔스는 󰡔반뒤링론󰡕에서 정치란 단지 사물의 관리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1) 프롤레타리아가 정치권력을 장악하여 생산수단을 국가재산으로 전화시킨다. 2) 인간에 대한 지배 대신 “사물에 대한 관리 및 생산과정에 대한 지도”가 등장하고, 계급 국가는 소멸한다. 3) 자본주의적 생산의 무정부성은 “의식적·계획적 조직”으로 대체된다. “하나의 거대한 계획”에 입각해서 사회적 생산력이 전국에 적절하게 배치된다. 프리드리히 엥겔스, 󰡔반듀링론󰡕, 새길, 1987, 300-303쪽과 3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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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이라는 학제 내에서도 이런 식의 논의가 가능할 수 있구나, 하고 다소 놀랐다. 저자는 석사 때 문학사회학 쪽을 공부했다고 하는데, 매우 많은 사상가들이 인용되지만 특히 벤야민의 비중이 크다. 재미있게 읽은 편이었는데,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한 큐에 묶으려는 의욕적인 시도가 다소 무리한 것이 아닌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대목들도 종종 보였다. 특히 저자 자신도 때때로 의식하고 있는 듯이 보임에도 불구하고 종종 그렇게 드러나는 진정성/속물성, 도덕/윤리라는 간단명료한 이분법에 만족해서는 안 되겠다. "진정성의 윤리를 넘어서서 사회적이고 공적인 관심과 책임과 실천의 역량을 가진 주체"는 어떻게 생산될 수 있는가?

 

 

 

마음의 사회학(김홍중) 1부

1장 진정성의 기원과 구조

“진정성眞正性authenticity은 본래 좋은 삶과 올바른 삶을 규정하는 가치의 체계이자 도덕적 이상으로서, 자신의 참된 자아를 실현하는 것을 가장 큰 삶의 미덕으로 삼는 태도를 가리킨다. (...) 진정성의 윤리는 루소와 헤르더 이후의 낭만주의에서 시작되어 키르케고르, 하이데거, 사르트르 등의 실존주의적 감성 속에 구현되어 있는 도덕적 기획으로서, 외부로부터 부과되는 사회적 역할과 자신의 고유한 욕망 사이에 형성된 간극을 적극적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근대적 주체의 자기 통치 기획의 한 양태이다(19).”


"이런 과정에서 한국사회는 소위 ‘포스트-진정성 체제’로 진입한 듯이 보인다. 진정성이 와해된 자리에 새롭게 들어서는 삶의 태도는, 도구화된 성찰성을 자원으로 성공과 치부를 반성 없이 추구하고 ‘부자 되세요’를 덕담하면서 재테크와 부동산투기와 자기계발에 몰두하는 신자유주의적 ‘스노비즘’과 ‘동물성’이다"(20).


Lionel Trilling의 Sincerity and Authencity의 논의. 신실성과 진정성의 차이. 신실성은 전근대의 도덕적 가치로서 자신에게 거짓되지 않은 동시에 타인에게도 진실되기를 바라는 태도. 따라서 신실성을 추구하는 자는 내면과 외면 사이의 상위나 모순을 느끼지 못하며 사회가 요구하는 규범적 의무와 자신의 욕망 사이의 단절이나 간극을 느끼지 못함. 이에 반해 진정성은 개인주의적 가치를 내면화한 근대적 인간이 공동체에서 부과하는 역할 모델과 자신의 진정한 욕망 사이의 괴리를 발견하고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새로운 이상, 즉 불행한 의식을 갖고 있는 주체성. 신실성과 진실성이 상이한 도덕적 이상으로 대립되는 역사적 전환을 보여주는 텍스트가 디드로의 라모의 조카. 또는 양자의 대립은 헤겔에서 고귀한 의식과 비천한 의식(불행한 의식)의 대립에 상응. 인간 정신의 자기 실현에 있어 국가나 부 같은 외적 권능과의 관계의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는 개체의 의식은 외부의 사회적 힘과 조화를 유지하며 이를 자신과 동일시하는데 이것이 자신의 외부를 부정하지 않는 고귀한 의식. 이 조화로운 관계가 파괴되면 정신의 본성인 자유를 추구하면서 외적이고 사회적인 힘과 대립하는 의식이 생성되며 이것이 비천한 의식. 이 의식은 권력과 스스로를 동일시할 때 가능한 긍정적 태도인 고결성, 정직성, 우아함과 달리 권력에 대한 경멸과 반항의식으로부터 나오는 비열하고 음흉하고 저열한 태도를 보여준다. 비천한 의식은 순진하지 않으며, 외저 강제력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그것과 대결하기 위해 이성의 간지를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의식이다. 고귀한 정신에서 비천한 정신으로의 전환은 타락이 아니라 진보. 비천한 정신은 세계와 불화하고 세계와 자신 사이의 간극을 절감하며 자신의 자유를 구속하는 세계의 실정성을 부정하는 한결 고양된 정신. 공동체의 규범과 자유로운 자아의 이상의 충돌 속에서 상처받은 영혼들의 절박한 자기 실현의 세계가 소외된 영혼의 세계이자 근대적 교양의 영역인 부르주아 시민사회. 신실성이 불가능한 시대에 개인은 교양 또는 문화의 영역을 통과하면서 상실된 자기 정체성을 새로이 찾아야 함. 그것이 소설의 이념이자, 모더니티의 중요한 축을 이루는 정신적 가치인 진정성의 이상. 문예사적으로 디드로, 헤겔, 루소, 제인 오스틴, 사르트르, 조지프 콘래드, 프로이트를 관통하는 이념(25~8).


1960년대 미국에서 진정성의 윤리의 부흥. 청년 세대의 등장, 소외에 대한 감수성, 다양한 정체성들의 인정투쟁의 가열. 실존주의의 유행 등. 1980년 대 한국의 386 세대. 도덕적 헤게모니를 바탕으로 이들 386세대를 정치적, 문화적, 도덕적 주체로 생산한 진정성의 레짐은 민주화 시대를 관통하는 규범적 우세종normative dominant(29~30).


진정성의 구조 : 찰스 테일러가 지적한 바와 같이, 진정성은 인간이 도덕관념을 천부적으로 부여받은 존재라고 생각했던 18세기의 사유에 뿌리내리고 있음. 샤프츠베리나 허치슨의 ‘내면의 목소리’, 루소의 존재감sentiment de l'existence, 헤르더의 자기 척도 등 내적 판단의 원리에 의해 자신의 삶을 설계하고 영위하는 존재. 자신의 자아를 다듬고, 개선시키는 자신과의 내밀한 관계를 통해 스스로를 자율적 주체로 정립하고자 하는 욕망, 자기 소유의 원칙에 입각하여 행동. 진정성의 주체는 무엇보다 내향적인 성찰의 주체이며 이 진정성의 주체가 어떤 삶이 옳은 것인가라고 묻는 참된 자아와의 사이에 건설하는 대화의 공간이 내면. 이 내면은 자폐적, 유아론적 공간이 아니며, 진정성의 주체는 공동체가 부과하는 도덕률을 성찰하고 사적 성찰에서 공공성으로 전향. 윤리적 성찰을 통해 구성되기 시작하는 진정성의 주체는 공저 의미 지평에의 앙가주망을 실행 혹은 기도함으로써 집합적으로 의미있는 행위의 실천 주체(학생, 노동열사, 시민군)로 성립되며, 이 행위가 다시 공동체 도덕적 지평에 하나의 모형으로 정립되어 다른 주체화의 대상들에게 일정한 도덕적 압력을 행사(32~5).


한계 : 1 진정성의 폭력 - 진정성의 개념은 예술품의 진위 여부를 가리는데 사용되었던 진품성의 개념에서 연원하며 여기에서 유일성의 신화가 발생. 내성적이고 사적인 ‘윤리’의 계기와 사회와의 관계에 기초한 공적인 ‘도덕’의 계기 사이의 간극이 존재하는데, 전자에서 후자로 나아간다는 진정성의 구조적 행위 패턴은 실상 매우 드물게 발생하는 것. 윤리적 진정성은 진정성에 이르는 모든 절차적 고뇌, 방황, 번민, 주저, 우유부단의 제스처 전체를 신성화하며, 윤리적 진정성의 순수한 형태는 행위나 실천이 아니라 행위나 실천의 극단적인 지연(망설임, 주저, 실천적 무능)에 깃든다. 90년대의 진정성은 내면의 공간, 자의식의 공간, 사소설적 공간으로 확충되어 감(36~8). 2 요절 - 열사. 죽음을 통해 진압되지 않는 정치적 생명, 즉 bios의 불멸성의 화신들, 비록 육신은 소멸되었으나 그 죽음이 망각됮 않고 공동체에 의해 의례적으로 기억됨. 또한 예술의 영역(유재하, 김현식, 김광석, 기형도, 김소진 등)에서 진정성의 신화. 진정성은 일종의 청춘의 형이상학으로서, 물질적 재생산, 사소한 욕망의 추구, 목숨의 비루하지만 절박한 호소 등 삶의 일상성은 저급한 것으로 타기됨. 진정성의 추구와 긴밀하게 결합된 정의의 이상은 속되고 개인적인 행복의 추구를 죄악시. 비극의 주인공이 너무나 진지하여 먹고 마시는 육신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으로 표상되듯이, 진정성의 주체 역시 고매한 정신과 도덕적 이상과 불굴의 투지의 소유자일 뿐 욕망의 덩어리인 육체의 자발성에는 맹목적이며, 진정성에는 비극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유머가 결여되어 있기에 진정성을 추구하는 자는 항상적인 급진성(죄와 고독 혹은 파멸 등)을 동반하게 되어 세속의 입장에서 보면 일종의 괴물일 수 밖에 없다. 이제 이러한 진정성의 주체 이후 요절자의 이미지를 대신하는 것은 97년 체제의 생존자의 이미지(경제적 생존, 입신출세주의 또는 노골적인 속물주의, 생물학적 생존 등 부유, 성공, 장수)이다. 생존주의라는 새로운 마음의 레짐 속에서 주체는 한편으로 나르시시즘, 자폐, 탈정치화 등을 통해 사적 세계를 성채화하는 모나드로 전락하거나, 다른 한편으로 성찰성의 도구화, 탈내면화, 사회적 과시, 대중추수주의 등을 통하여 타인의 취향, 가치, 의견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속물로 전락함(38~42)


이제 진정성은 오직 기억과 무용담 속에서 공허하게 빛나거나 표현주의적 라이프스타일로서 상업적으로 생산되어 상품으로 소비되어, 진정성의 소멸은 상업적 보편화와 결합된다.

“그러나 진정성의 물적 토대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시대에 진정성을 규범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스노비즘의 징후일 수 있다 (...) 진정할 수도 없고, 진정하지 않을 수도 없는 시대, 그것이 바로 포스트-진정성 시대의 아포리아이다. 우리는 이 아포리아를 당분간 매우 침착하고 조심스러운 방식으로 대면해야 한다. (...) 진정성의 해체가 결정적인 것이라면, 우리는 이제 진정성을 역사적으로 ‘지양’해야 한다. 진정성의 윤리를 넘어서서 사회적이고 공적인 관심과 책임과 실천의 역량을 가진 주체를 생산할 수 있는 어떤 새로운 ‘장치’들의 형성과 발명이 이 시대의 새로운 과제로 부각되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이다.(45)”



2장 삶의 동물/속물화와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진정성은 늘 자기 배반적인 것이다. ‘진정한 것’이 어떻게 쉽게, 한 차례에, 특정 행위 속에, 결정적으로 주어질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항상적 모색이어야 하며, 부단한 변신이어야 하며, 따라서 결국에는 진정성의 실현에 실패함이어야 한다. 진정으로 진정한 것은 진정성을 향한 향방 속에 있는 것이지 그것이 실현되어 실체로서 주어진 사물이나 사태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진정성의 윤리 속에는 무언가 병적으로 진지하고 순결하고 폭력적인 정언명령이 숨어 있다. 따라서 진정성이 삶에 의해서 그 순도를 상실하지 않기 위해서, 진정성은 자신의 최고의 순간에 이르렀을 때 그 운동을 멈춰야 하는 것이다.”(54~5)


한국 근대사 최초의 진정성의 속물은 김수영, 또한 고급 속물로서 미시마 유키오(56)


코제브의 논의 : 1938~9년의 헤겔에 대한 콘퍼런스에서 코제브는 역사와 인간의 종언을 행위의 종언(유혈적 전쟁과 혁명의 종언, 세계와 자기의 이해로서 사변적 철학의 사라짐)으로 설명. 소련과 중국은 덜 발전된 미국, 가난한 미국이며 이후 이들이 선택할 삶의 양식도 미국의 그것, 동물로 회귀한 삶. 또는 성찰적 내면이 결여된 타인지향적인 삶(리스먼, <고독한 군중>) 탈역사적 동물은 고통이나 불행의 변증법적 힘, 그러한 반대항을 경유해야만 행복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모른다. 아감벤의 용어로 la nuda vita일 이들의 궁극적 목표는 구원이나 불멸이 아닌 단순한 생존. 예컨대 미국에서 시작된 몸만들기physical fitness(스스로의 몸을 조형하고, 성형하고, 개조)로 대표되는 동물적 삶의 궁극적 텔로스는 젊음 혹은 생명을 가능한 한 연장하는 것. 그런데 코제브는 56년에 일본을 방문하고 미국과는 또다른 포스트 히스토리의 삶의 유형(속물)을 목격. 자연적이거나 동물적인 소여를 부정하는 규율을 만들어내는 일본인들 특유의 속물주의(노가쿠, 다도, 꽃꽂이 등)는 철저히 형식화된 가치에 기초하여, 역사적 의미에서 인간적 내용을 완벽히 박탈당한 가치에 기초하여 현재를 살아감. 속물은 동물과 마찬가지로 타인지향적 삶의 구조에 종속되어 자신의 모든 것을 전시, 과시, 유희의 대상으로 삼음. 변증법적 운동의 공간으로서 역사 속에서 인간은 그가 자신의 존재 조건으로서 억압하고 있는 동물성을 초월하거나 통제, 부정하는 한에서 인간일 수 있다.


원조 몸짱으로서 미시마 유키오 : 세계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난공불락의 국경선으로서의 육체. 인간은 육신의 모나드. 타자와의 근원적 단절. (64)


부정성 없는 동물/속물들은 원한 감정도 없지만 또한 주인도 아닌데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의 외부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 용도파기된 부정성(바타이유). 문학과 예술에서 엔터테인먼트로의 이행(가라타니). 최후의 인간들(니체)은 가련한 안락 외에 삶에서 아무런 야망도 소망도 없는데 이것이 귀여운 삶(68~9)


귀여움은 권력자가 갖는 감정, 살아남게 하는faire survivre 생명권력의 모성적 차원은 기르고 감싸고 귀여움의 대상으로 삼는 것. 80년대의 억압적 권력은 자신의 대상을 전투적이고 진지하고 진정한 존재로 구성하나 민주화 이후 일상공간을 관통하는 미세한 생명권력들은 어리고 칭얼대는 존재론적 유아들로 구성. 탈숭고, 탈내향, 탈사회, 탈정치, 탈정신적 문화변동의 핵심. 타협주의와 생존주의. ex 황지우의 ‘살찐 소파에 대한 일기’ (69~72)



3장 스노비즘과 윤리

자기계발서들의 홍수와 ‘스놉이 되어라’라는 지상명령. 세속적 성공 또는 공격적 생존에 적합한 스놉의 주체성 형성. 스놉은 더 이상 위선적이며 부도덕한 자가 아니라, 건설적이고 도전적이며 생산적인 주체의 프로젝트. 이중의 지배체제로서 스노보크라시(1. 스노비즘으로 무장한 도구적 성찰성의 주체들이 한국사회의 지배층으로 부상 2. 자아의 통치, 자기 배려의 테크닉과 관련)(81)


스노비즘의 반대편에 존재하는 하나의 대안적 가능성인 윤리적 삶. 그러나 윤리적 삶을 절대 준거로 하여 스노비즘을 비판하려는 경솔한 충동은 경계되어야 하는데, 이는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스노비즘, 역-스노비즘을 만들 수 있음(83)


고전적 스놉은 근대의 산물. 위계적 신분질서가 파괴되고 자유경쟁과 평등의 원리로 재구성되는 시민사회에서 인정투쟁을 왜곡된 방식으로 이해하고 실천하는 존재. 이들은 야심가이며 전술가이지만, 인정투쟁의 최종 목표로서 자기의식의 완성 내지 자립을 망각하는 허약한 실존이며 인간적 약자. (83~4)


지라르의 욕망의 삼각형과 스노비즘의 정신역동. 주체 -> 매개자 -> 대상(세르반테스, 스탕달, 플로베르, 프루스트, 도스토예프스키). 주인공의 죽음에서야 비로소 욕망의 삼각형을 이탈하며 회심conversion. 회심없는 아이히만과 악의 평범성/속물성(아렌트). 순전한 무사유와 도구적 성찰성의 전횡. 추와의 변증법적 관계를 상실한 허구적 아름다움으로서 키치(아도르노). “전적인 키치의 제국에서는 대답은 처음부터 주어져 있다. 그래서 그것은 모든 질문을 배제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전적인 키치의 본래적인 적은 질문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쿤데라,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스놉은 도덕적이나 비윤리적인 존재의 전형. 푸코에서 모럴과 윤리의 구별(<성의 역사> 2권). 모럴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공동체의 규칙, 명령들이며, 윤리는 모럴에 대한 자신 고유의 판단과 성찰 및 부정과 의문을 수반. 윤리의 목적은 자유이며 망설임, 주저, 행위의 중단 같은 수동성을 동반. 디오게네스, 사도 바울 등 좋은 삶의 형식은 현 상태 내부에 균열을 내는 것. 스노보크라시의 시대는 모럴 부재가 아니라 모랄 과잉의 시대이며 부재하는 것은 윤리(96~100).


4장 근대문학 종언론의 비판

“우리는 어떤 점에서, 문학의 죽음이 단지 문학-제도의 소멸이나 약화가 아니라 성찰적이고 참여적인 주체를 구성하는 장치로서의 진정성이 소멸되는 사회변동의 한 징후인지를 보여주고자 한다.”(108)


가라타니의 주요 테제 : 가라타니의 종언론은 시나 희곡이 아닌 소설의 소멸에 기초. 그가 특히 염두해두는 것은 사르트르. 사르트르는 <문학이란 무엇인가>의 3장 누구를 위하여 쓰는가? 에서 “문학은 본질적으로 영구혁명 중에 있는 사회의 주관성”이라는 테제를 제출. 사르트르를 계승하는 가라타니의 종언론이 죽음을 선고하는 문학은 제도라기보다는 사회적 변혁을 빚어내는 정신, 운동, 앙가주망을 의미함. 이전의 문학에서는 1. 근대문학(리얼리즘 소설)은 객관적 재현장치인 원근법, 언문일치, 묵독 등을 통해 세계와 내면 공간을 성찰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내면적 주체를 형성 2. 근대문학은 지적 능력과 감성적 능력을 매개하는 상상력을 활용하여 타자들과의 공감 능력을 훈련시켜 상상의 공동체로서 네이션의 형성에 기여. 가라타니가 말하는 문학의 죽음은 문학이 윤리적 주체형성의 기제와 상상된 공동체로서 nation의 형성에 기여하지 못한다는 것. 비록 문학은 죽었으나 문학 외부에서 새로운 사회를 향한 운동과 실천은 지속 가능. 엔터테인먼트로 전락한 근대문학 = 소설에게 희망을 품지 않고 떠나야 함(ex 김종철, 아룬다티 로이) (108~110)


근대문학의 부정성 : 헤겔은 사상과 반성이 예술을 능가하고 주관적 내면성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낭만주의 시대를 배경으로 예술의 종언을 선포. 보들레르에서 덧없고 일시적이고 우연한 것으로 나타나는 모더니티. 보들레르에 따르면 전일적인 상품 세계 속에서 시는 일종의 절대 상품, 자신 이외에 어떤 가치도 갖지 않는 유미주의 선언해야 함. 무용성-자율성. “넓은 의미의 모더니즘 문학과 예술은 이런 의미에서 예술의 죽음을 이미 자신의 탄생 조건으로 하여 발생한다. (...) 근대문예의 가장 중요한 테마는 자신의 몰락Untergang이다. 죽음은 근대문예의 끝을 규정하는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그 시작을 표시하는 구조적 필수요인인 것이다. 가라타니 종언론은 이처럼 ‘몰락으로서의 근대문학’이라는 관점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맹점을 노정한다.”(118). 블랑쇼에 따르면 근대문학은 이미 그 자체로 자신의 소멸에 대한 응시이며 자신의 불가능성에 대한 성찰임. <문학과 죽음에의 권리>에서 블랑쇼는 혁명이 개체의 삶을 죽이고 전체의 자유 속에서 그 죽음을 다시 살리듯이 언어는 사물을 죽이고 언어라는 상징 속에서 보존한다고 주장(헤겔 정신현상학에서 감각적 확실성 참조). “종언은 근대문학을 종결짓는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근대문학을 가능하게 하는 발생론적 구조이다. 가라타니의 착오는 종언의 구조적 성격을 엄폐하고 이를 단순한 사건적 차원으로 오인한 데에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가라타니의 종언론은 일종의 과잉진술이다. (...) 가라타니는 블랑쇼적인 문학의 존재를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사르트르적 문학의 불가능성 앞에서 근대문학 전체를 포기하는 몸짓을 취할 수 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문학을 포기하고 문학 외부에서 정치적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는 가라타니의 희망은, 문학과 정치가 감각적인 것의 차원에서 동일한 기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것으로서, 정치적 변혁의 가능성을 피상적인 수준에 축소시키는 결과를 초래”(122)

문학이라는 장치(푸코의 정의. 권력과 지식의 교차점에서 단순한 생명을 주체로 전환시키는 주체화의 기제). 가라타니에 따르면 근대문학이라는 장치는 반성적 주체와 nation의 구성원을 형성하는 힘을 가진다. 1. 기하학적 원근법, 묵독, 언문일치, 고백 등은 공동체와 분리된 고독한 내면의 주체, 반성하는 주체를 형성 2. 근대적 nation은 실제로 경험되고 접촉되는 인간 그룹이 아니라 특정한 기술적 수단과 커뮤니케이션의 메커니즘(신문, 소설)을 통해 상상되는 공동체(베네딕트 앤더슨). 가라타니는 근대인식론의 세 가지 능력인 지성, 감성, 상상력을 당대의 현실적 제도인 국가, 시민사회, nation과 등치시킴(<세계공화국으로>). 사회적 통합과 연대의 원리는 공감, 연민, 동정 등을 통해 가능하며, 미적인 것은 사회적인 것에 핵심에 자리잡게 됨. 그러나 사실 근대문학이 창출했던 집합의 형식이 반드시 nation일 필요는 없으며 공감의 공동체는 언제나 nation과 민족주의를 범람할 수 있음(123~8).


근대문학의 주체는 자신과의 관계에 있어서 내면을 매개로 한 성찰 능력을 갖고 있으며, 타인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공감력(상상력)을 매개로 공동체 구성능력을 지니고 있는 존재. 근대문학의 주체는 성찰과 참여, 내관과 실천, 이성과 정념, 고독과 연대와 같이 서로 대립되는 가치를 역동적으로 결합시키는 인간유형, 진정성을 추구하는 주체(129) 진정성의 주체는 사회적 관계, 공동체의 정치적 프로그램, 진정한 삶을 가능하게 해 줄 삶의 공공적 형태를 위한 운동에 관심. insurrection, revolt. “가라타니의 근대문학 종언론은 이런 점에서 보면 ‘진정성’이라는 시대정신의 종언을 소설의 종언으로 축소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과소진술이다. 죽은 것은 문학이 아니라 문학을 가능하게 하는 윤리적 장치(진정성이라는 마음의 레짐)인 동시에 그 장치가 형성하는 특수한 인간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가라타니의 논의는 문학의 운명에 대한 논의에서 사회의 운명에 대한 논의로 연계되었어야 했다.”(131)




“... 리스본 대지진은 칸트나 루소의 사유에도 그 흔적을 남긴다. 가령,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암묵적으로 거대재난 앞에서 생존하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사회구성이라는 방편으로서의 사회구성이라는 발상을 전제하고 있다. 리스본 대지진에 대해서 볼테르와 서한으로 논쟁을 벌이기도 했던 루소는 <언어기원에 관한 시론>(1781)에서 이렇게 쓴다. “인간 사회는 대부분 자연 재난의 작품이다. 대홍수, 해일, 화산 분출, 대지진, 번개로 인한 산불 등은 어떤 한 지역의 야만인들을 두렵게 하여 흩어지게 만들었는데, 훗날 그것들은 다시 공동의 손실을 공동의 힘으로 복원하려는 야만인들을 결집시켰다.”(언어기원에 관한 시론, 주경복/고봉만 옮김, 책세상, 2002, 77쪽) 재난은 사회를 파괴하지만, 근원적인 수준에서는 흩어진 개체들을 하나의 사회로 결집시키는 역설적 힘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 근저에는 루소가 인간에게 부여하는 동정심pitié의 권능이 존재한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고통받는 타인의 위치에 자신을 놓을 수 있는 상상력’에 다름 아닌 연민의 능력을 갖고 있다. 환언하면 재난의 상황 속에서 인간은 불운으로 그 재난의 희생자가 된 타자들을 연민한다. 연민의 한계가 사회의 경계이다(인간불평등기원론, 주경복/고봉만 옮김, 책세상, 2003, 80~84쪽). 그리하여 루소는 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최초의 말은 ‘나를 사랑해줘요’가 아니라 ‘나를 도와줘요’였다”(언어기원에 관한 시론, 주경복/고봉만 옮김, 책세상, 2002, 88쪽). 도처에서 ‘나를 도와줘요’라는 언어가 터져나오는 상황, 역설적으로 바로 그런 급박한 재난의 상황이 우리를 하나의 사회에 속한 공동의 운명체임을 체험하게 되는 순간이다. 이런 점에서 루소는 베네딕트 앤더슨을 선취하고 있다. 근대적 의미의 사회는 단순히 인간의 물리적 집합체가 아니라 (재난 속에서) 연민의 대상으로 구축되는 상상된 공동체인 것이다. 4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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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22 17: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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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23 23: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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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진짜 마르크스에 이르기 위해 아직 다른 철학자들이 필요했다. 「아미엥에서의 주장」에서 이미 밝힌 대로 우선 내가 그 당시 국가박사 논문에서 다루려고 계획했던 17~18세기 정치철학자들이다. 홉스에서 루소까지 나는 동일한 심오한 착상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갈등적 세계라는 착상으로 그런 세계에는 국가라는 유일한 절대적 권력만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홉스)을 종식시킴으로써 재산과 개인의 안전을 문제없이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계급투쟁과 국가의 구실에 대한 생각은 이미 예견된 것으로, 우리는 마르크스가 이런 생각을 자기가 발견한 것이 아니라 선임자들, 특히 조금도 ‘진보주의자들’이 아니었던 왕정복고 하의 프랑스 역사가들과 영국 경제학자들, 특히 리카도에게서 차용한 것이라고 말했음을 알고 있다. 내가 인용한 학자 말고도 마르크스는 더 멀리 ‘로마 법학자’들과 ‘게르만 연구가들’의 그 유명한 논쟁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계급투쟁이 수면을 방해하고 있는 그 유명한 라친저 추기경은 잠을 자는 대신 교양을 좀 쌓는 것이 좋을 것이다. ‘진보된’ 자연 상태에서도 동일한 사회적 갈등 상태를 본 루소는 또 다른 해결책을 제시했다. 즉 ‘결코 사멸되지 않는’ 보편적 의지를 표현하는 ‘계약’에 의한 직접 민주주의 안에서 국가 형태의 종식을 제시했던 것이다. 그것은 어느 날엔가 공산주의가 꿈꾸게 / 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루소에게 있어서 또한 나를 사로잡은 것은 「인간불평등기원론」, 그리고 가난한 자들의 정신을 굴복시키기 위해 부유한 자들의 사악한 상상력 속에서 나온 술책과 간교에 불과한 불평등계약론이었다. 여전히 이데올로기 이론이기는 하지만 그 이데올로기의 사회적 원인과 기능, 다시 말하자면 계급투쟁에서 하는 헤게모니적 기능에 관련된 것이었다. 나는 루소를 마키아벨리 이후 최초의 헤게모니 이론가로 생각한다. 그리고 또한 코르시카와 폴란드에 대한 개혁 계획에서 루소는 유토피아를 꿈꾸는 자와는 정반대로, 상황과 전통의 복합적인 모든 여건들을 참착할 줄 알고 시간의 리듬을 존중할 줄 아는 현실주의자로 나타난다. 에밀의 교육이론, 즉 개인의 자연스런 발전 단계를 절대 앞지르지 말고 존중해야 하며 어린아이의 성장에서 시간의 작용을 존중해야한다는(시간을 벌기 위해 시간을 잃을 줄 알아야 한다는) 그 놀라운 교육이론에 대해서도 루소는 마찬가지 아니었던가? 결국 나는 『고백록』에서 티끌만큼도 자기만족이 없는 일종의 ‘자아분석’의 유일한 예를 보았다. 그 책에서 루소는 자신의 어린 시절과 자기 삶에서 일어난 중요한 사건들에 대해, 그리고 무엇보다 문학사에서 처음으로 성性에 대해, 그리고 나중에 데리다가 거세의 상징으로 훌륭하게 설명한 성적 ‘대체supplément’의 그 놀라운 이론에 대해 글을 쓰고 숙고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있었다. 결국 내가 루소를 좋아한 것은 계몽주의자들의 합리주의적이며 종말론적인 이데올로기에 철저히 반대한다는 점이다. 그러한 이데올로기를 신봉하는 ‘철학자들’은 루소를 무척 증오했으며(적어도 이 영원히 박해받는 자, 루소는 그렇게 믿었다), 민중의 화합은 지적 개혁으로 개혁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모든 이데올로기가 현실에 대해 갖는 엄청난 착각이다! 그런데 이것에 반대한 루소의 태도를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의 엄격한 명철성 속에서 다시 보게 된다. 그리고 또 내가 좋아한 것은 부와 권력의 모든 유혹 앞에서 루소가 보여준 철저한 독립성, 그리고 독학 교육에 대한 열광이었다.  

루이 알튀세르,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권은미 옮김, 2008, 289~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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