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바르, 「국민형태: 그 역사와 이데올로기」, 󰡔이론󰡕 1993년 가을호에 수록.

 

제1부 용어법

국가는 국민으로 되는 경향이 있지만, 국민은 항상 국가로 되지 않는다. 그런데 국가 없는 국민이나 국가 이전의 국민이라는 생각은 용어 모순이다. 국민국가들의 통합성은 이를 위협하는 내적 갈등(지역갈등과 계급갈등)에 의해 위협을 받지만, 국민국가는 일단 정치적으로 실존하게 되면 국민국가 이전에 민족적(ethnique) 또는 인민적 통일성이 존재했다고 투사한다.

마르크스주의 역사기술의 역설- 고전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은 부르주아적 역사기술을 재생산하며 기능주의적 논지와 역사주의적 논지 사이에서 진동. 국민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의 논쟁은 전부(현실적 심층) 아니면 전무(이데올로기나 환상)라는 논리적 궁지에 이른다. 마르크스주의는 국민국가의 종언을 국가 일반의 종언과 동일시.

 

사회구성체, 국민형태, 국가체계

출발점으로서 세 가지 개념. 마르크스의 사회구성체 개념은 정치적 제도들의 본성을 무시하고 이에 상부구조라는 파생적 지위를 부여하지만, 오히려 우리는 사회구성체를 그 통일성이 의심스런 채로 있는 한 구성물, 적대적인 계급들의 형세로 이해해야 한다. 사회구성체의 실존이 제기하는 문제는 그것의 기원이나 종말만의 문제가 아니라 재생산의 문제, 그것들의 갈등적 통일성의 유지 문제이다. 곧 프랑스, 독일 등의 이름은 정치적인 것으로 국가나 국민적 동일성을 물신화시켜서는 안 된다. 우선 모든 사회구성체가 국민적이지는 않으며, 역사적으로 수많은 정치형태들이 존재했다. 국민국가의 불균등한 발전, 국민형성을 둘러싼 모든 저항과 갈등에도 유의해야 한다. 두 번째 개념은 국민형태로서 이는 갑자기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등장한 것도 아니고 무한히 가소적인 것도 아니다. 세 번째 개념은 갈등적 균형의 불안정한 관계망으로, 국민국가들의 역사는 그 경계들의 불안정성과 부단한 재규정이라는 일반적 형태를 지닌다.

 

제2부: 역사

국민의 형성은 몇 세기에 걸친 역사로 나타나는데, 국민적 동일성에 대한 회고적 환상은 이중적인 것(투사와 운명)이다. 그러나 이를 비판하는 것이 국민의 기원이라는 신화의 힘을 은폐해서는 안 된다. 예컨대 부단히 모순적인 영유의 대상이 되는 프랑스 혁명을 보라. 국민의 기원이라는 신화는 효력을 갖는 이데올로기적 형태, 국민구성체의 상상적인 단일성이 일상적으로 구성되는 이데올로기적 형태이다.

 

前국민국가에서 국민국가로

국민형성의 기원은 국가어의 제도(군주권력의 자율화와 신성화)나 절대군주제의 전진적 형성(통화독점, 행정적 재정적 집중화),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 등 경계와 영토 제도의 혁명화 등 다수의 제도들을 갖는다. 국민형성은 오랜 전사의 결과이지만, 이는 단선적이지 않다. 이는 장기에 걸친 상이한 여러 사건들로 구성되고, 특정한 한 국민의 역사에 속하지 않으며, 제국과 같은 다른 경쟁적 형태에 속한다. 어떤 사건을 국민형태의 전사 속에 자리잡게 한 것은 하나의 필연적인 진화의 선이 아니라 일련의 정세적 관계들이다. 다시 말해 전혀 다른 목표를 갖는 비국민적 국가장치들이 점진적으로 국민국가의 요소를 생산했다.

한편 모든 인간사회에 전진적으로 확산된 국민형태가 근대 자본주의의 발전에 조응한다는 테제는 두 가지 정정을 필요로 한다. 1) 우선 자본주의 생산관계들로부터 국민형태를 연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구나 자본주의 세계시장은 모든 국민적 제한을 넘어서는 내적 경향이 있다. 그렇다면 과연 국민의 형성을 여전히 ‘부르주아적 기획’으로 부를 수 있는가? 오히려 이는 마르크스주의가 자유주의 역사철학으로부터 넘겨받은 정식으로 일종의 역사적 신화이다. 국민의 형성은 자본주의 시장의 역사적 형태로서 항상 중심부와 주변부로 불균등하게 위계화된 세계경제(브로델, 월러스틴)에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정정은 마르크스의 이념적 자본주의를 ‘역사적 자본주의’로 대체한다. 어떤 점에서 근대의 모든 국민은 ‘식민화’의 산물이다. 2) 자본주의 역사에서 국민국가 형태와는 다른 국가 형태들이 출현했으며 일정기간 국민국가와 경쟁하면서 존재했다(제국형태, 초국민적 정치-산업 복합체, 한자동맹 등). 부르주아 정치형태는 한 가지가 아니라 몇 가지가 존재했던 것으로, 갓 태어난 자본주의적 부르주아지는 헤게모니의 몇 개의 형태 사이에서 주저했던 것이다. 요컨대 각자의 역사를 지닌 국민국가들의 형성과 이에 조응하여 사회구성체들이 국민구성체들로 전화한 것을 설명해주는 것은 순수 경제논리가 아니라 계급투쟁의 구체적 형세이다.

 

사회의 국민화

국민형태의 특권적 지위는 그것이 국지적으로 이질적인 계급들의 투쟁이 통제될 수 있도록 해주었으며 자본가계급뿐만 아니라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헤게모니를 행사할 수 있고 이것의 산물이기도 한 국가 부르주아지가 출현할 수 있게 해주었다는 사실에 있다. 지배적 부르주아지와 부르주아 사회구성체는 국가를 국민형태로 재구성하고 다른 모든 계급들의 지위를 수정함으로써, ‘주체없는 과정’을 통해 구성된다. 이때 국민형태의 구성 및 진화 과정은 비규정적인 것으로서, 생산양식들뿐 아니라 정치적 형태들의 단선적 진화의 도식들은 기각되어야 한다.

국민형태는 오늘날 누구에게 너무 늦은 것인가? 이러한 질문은 신생국민들 편에서뿐 아니라 구국민들 편에서도 제기되는데, 가령 구 중심부의 경우 국민적 구조들이 해체되는 국면에 들어서기도 했다. 국민구성체들의 역사의 또 다른 특성으로서 ‘사회의 지체한 국민화’. 가령 프랑스의 경우 자본주의가 초래한 모순들과 계급투쟁을 조절할 수 있도록 해주고 국민형태가 완성되기 전에 이를 다시 만들기 시작하도록 해준 것은 국민적-사회적 국가라는 제도, 경제의 재생산 및 개인의 형성, 가족구조, 사생활의 모든 공간에 개입하는 국민사회국가라는 제도이다. 국민형태의 기원에서부터 현존했으나 19~20세기에 걸쳐 지배적이게 된 이 경향은 모든 계급 개인들의 생존을 전적으로 국민국가의 시민이라는 지위, 국민성원이라는 그들의 자격에 복속시킨다.

 

인민의 생산

한 사회구성체는 장치들의 망과 일상적 실천을 통해 국민적 인간(homo nationalis)으로 형성되는 정도만큼 재생산된다. 이때 제도들의 기능작용을 통해 재생산되는 모든 사회적 공동체는 상상적이다. 곧 공동체는 개인적 실존을 집합적 서사의 맥락 안에 투사하고 공통의 이름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과거의 흔적으로 체험되는 전통들에 기초를 둔다. 오직 상상적 공동체들만이 현실적이다. 국민구성체의 경우 실재적인 것의 자리를 차지하는 상상적인 것은 인민이다. 이는 국가적 제도 안에서 스스로를 인지하는 공동체, 그 국가를 다른 국가에 대하여 자기 국가로 인지하여 자신의 계급투쟁을 그 지평 안에 기입하는 공동체이다. 인민은 자연적으로 존재하거나 단번에 구성되어 영속하는 것이 아니다. 근대의 어떤 국민도 타고난 민족적 기초를 지니고 있지 않으며, 모든 근대 국민은 아무리 평등주의적이라 할지라도 계급 갈등의 소멸에 조응하지 않는다. 본질적 문제는 인민을 생산하는 것, 인민이 자신을 국민적 공동체로서 부단히 재생산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인민은 정치권력의 토대와 기원으로서 통일성 효과를 산출한다. 루소는 이 문제를 ‘인민을 인민으로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용어로 제기했으며, 이는 개인들이 어떻게 국민화되는가, 곧 국민적 소속이라는 지배적 형태로 사회화되는가 하는 질문이다. 모든 동일성은 개인적이지만 고립적 동일성이란 내재적으로 모순적인 관념이다. 개인적 동일성은 사회적 가치, 행위와 집합적 상징의 규범의 장에서 구성되는 집단적인 것이자 역사적인 것이다. 인민의 역사적 생산이라는 질문에서 인민의 통일성의 모델은 종별적인 이데올로기적 형태의 구성, 개인들을 주체로 호명하는 과정을 전제로 한다(피히테-외적 경계는 또한 내적 경계가 되어야 한다). 이 이데올로기적 형태는 애국주의 또는 국민주의이다.

 

의제적 민족체와 이상적 국민

국민국가에 의해 형성된 공동체는 의제적 민족체(ethnicité fictive)라는 용어를 통해 지칭될 수 있다. 의제라는 용어는 순수한 환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법률적 전통에서의 의인(persona ficta)에 유비함으로써 제도적 효과, 즉 제작(fabrication)의 의미로 사용된다. 어떤 국민도 자연적으로 민족적 기초를 갖지 않으며, 단지 마치 그들이 스스로 기원과 문화, 이해관계의 동일성을 지닌 자연적 공동체를 형성한 것처럼 표상하는 것이다. 의제적 민족체는 애국주의의 대상이 되는 이상적 국민에 불가결하다. 만약 그것이 없다면 국민은 다만 이념이나 자의적인 추상으로 나타나고 애국주의의 호소는 누구에게도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다.

민족체는 언어와 인종을 통해 산출된다. 양자 모두 국민의 성격이 인민에 내재한다는 관념을 표출하여 역사적 인구들을 자연이라는 사실에 뿌리박도록 하며, 이것들의 지속적 존재에 의미를 부여한다. 언어적 공동체는 최근에 와서야 정착되었는데, 국민어(langue nationale)는 일반화된 학교기능을 통해 주입된다. 이 때문에 국민형성과 인민적 제도로서 학교의 발전 사이에는 긴밀한 연관이 있다. 학교는 국민주의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장소이자 민족체를 언어적 공동체로 산출하는 일차적 제도이다. 모국어 또는 공통의 기원이라는 이상은 국민성원들이 서로 느끼는 애정의 은유가 된다. 그런데 언어적 공동체는 민족체의 생산에 불충분한 것으로, 이는 언어적 기표의 역설적 본성에 관련된다. 모든 호명은 언어의 수준에서 일어나고, 모든 개인은 언어라는 요소 속에서 호명된다. 동일성의 언어적 구성은 정의상 열려 있는 것으로 (누구도 모국어를 선택하거나 바꿀 수 없지만) 여러 언어를 영유하는 것이 항상 가능하다. 언어적 공동체는 가공할 정도로 제약적인 민족적 기억을 이끌어내지만 또한 동시에 이상한 가소성을 지닌다. 모국어는 반드시 실제 어머니의 언어는 아니다(이민 2세대의 예). 언어적 공동체는 이 공동체가 항상 존재했다는 감정을 주는 그러나 후속 세대들에게 숙명적으로 해당 언어를 사용하도록 강제하지는 않는 현재의 공동체이다. 이상적으로 그것은 누구라도 동화하지만 누구도 붙잡지 않는다. 따라서 특정 인민의 경계 안에 고착되기 위해서 언어적 공동체는 비상한 특수성 또는 폐쇄 내지 배제의 원리를 갖춰야 한다.

바로 이것이 인종공동체의 원리이다. 문제는 (언어적 공동체와 다르게) 정치적 단위를 구성하는 모든 개인들에게 공통적인 실천일 수 없다. 언어적 공동체가 언어적 실천의 사회적 불평등을 자연화함으로써만 개인들의 평등을 창출할 수 있는 반면, 인종공동체는 사회적 불평등을 더욱 양가적인 유사성 속으로 해소한다. 이는 사회적 차이에 진짜로 국민적인 것과 가짜로 국민적인 것 사이의 분할의 형태를 부여함으로써 사회적 차이를 민족화한다. 인종 관념의 상징적 핵심은 혈통의 도식, 즉 개인들의 친자관계는 세대에서 세대로 생물학적이고 정신적인 실체를 전달하고 그럼으로써 친족이라 불리는 시간적 공동체 속에 기입된다는 관념이다. 이 관념은 사적 족보들의 경향적 소멸과 상관적인 것으로, 인종공동체 관념은 친족의 경계가 상상적으로 국민의 문턱으로 이전될 때 출현한다. 즉 인종공동체는 자신을 하나의 거대가족 또는 가족관계로서 표상하는 경향이 있다.

 

학교와 가족

최근의 가족의 역사에 관한 논쟁들이 놓치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 결정적인 문제, 확대된 친족의 해소와 국민국가의 개입에 의한 가족관계의 침투 사이의 상관관계라는 문제이다. 오늘날 친척관계, 인척관계에 대한 기록을 구성하고 보관하는 것은 국가이다. 국가의 가족정책, 인구학적 기법들, 공중보건, 사회보장 등의 등장은 가족의 국민화, 곧 국민적 공동체를 상징적 친족으로 만드는 것이다. 부르주아 가족과 국민형태를 취하는 사회의 상호관계 속에 우생학이라는 관념이 잠재해 있는 것이나 국민주의가 성차별주의와 은밀한 근친성을 갖는 것, 또한 국민주의를 부족주의(traibalisme)로 표상하는 것이 기만적인 동시에 폭로적(revealing)인 것도 이 때문이다.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의 중심이 가족-교회 쌍에서 가족-학교 쌍으로 이전했다고 했을 때 옳았다. 이에 두 가지 교정이 필요하다: 특정의 한 제도가 자체로서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이라는 표현이 지시하는 것은 ‘몇몇’ 지배적 제도들의 결합된 기능수행이다. 또한 학교교육과 가족의 중요성은 단지 노동력 재생산에만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이 재생산을 의제적 민족체의 구성, 즉 인구정책(푸코가 생명권력이라고 부르는 것)에 함축된 언어적 공동체와 인종공동체의 절합에 복속시킨다는 점에 있다. 이 점에서 부르주아 사회에서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적 장치는 국민주의의 헤게모니를 갖는다.

소견: 언어와 인종 사이의 절합이나 상호보완성이 조화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언어적 민족체와 인종적 민족체는 어떤 의미에서 배타적인데, 언어적 공동체는 열려 있는 반면 인종적 공동체는 원리상 닫혀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럽건설은 의제적 민족체의 산출과 관련하여 공언어주의(colinguisme)의 확립을 지향할 것인가 아니면 유럽적인 인구학적 동일성을 이상화하는 방식을 지향할 것인가. 민족화의 국민적 과정의 산물인 모든 인민은 관국민적으로 교통이 이루어지는 세계 속에서 배타주의나 동일성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날 길을 찾도록 요구되고 있다. 모든 개인은 자기 인민이라는 상상이 변형되어가는 과정에서 다른 인민들에 속하는 개인들과 교통하기 위해 이 상상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단들을 찾도록 요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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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봉 선생님의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의 마지막 대목(382~4쪽)을 옮겨온다.   

 

 

 

 

 

 

 

"슬픔의 의미와 고통의 존재 이유를 묻는 것,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 그리고 가장 깊은 슬픔과 절망 속에 있는 사람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것, 그것이 오랫동안 내가 생각한 철학의 길이었습니다. 그것은 플라톤이 걸었던 것과는 정반대의 길입니다. 그는 빛을 찾아 어둠의 동굴을 빠져나와 위로 올라가려 했지만, 나는 도리어 슬픔의 어둠 속으로 내려가는 것이야말로 우리 시대 철학이 걸어야 할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진리가 오직 슬픔 속에서만 계시된다고 내가 믿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빌라도처럼 묻고 싶으시겠지요. 진리란 무엇이냐고. 진리는 만남입니다. 만남이야말로 모든 일치, 즉 모든 진리의 원형인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 나는 너를 온전히 만날 수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오직 우리가 서로의 슬픔에 참여할 때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진리는 슬픔 속에서만 우리에게 도래합니다. 그리고 철학이 진리를 갈망한다면, 철학은 먼저 슬픔의 해석학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 내가 그리스 비극을 이야기한 것은 그것을 사다리로 삼아 할 수 있는 한 깊은 슬픔의 심연 아래로 내려가길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편지를 다 쓰고 난 지금 나는 내가 얼마나 깊은 슬픔의 어둠에까지 내려간 것인지, 내가 깊은 슬픔 속에 있는 사람들의 탄식을 올바로 들은 것인지 그리고 과연 내가 들었던 그 많은 말들을 온전히 표현한 것인지, 아무것도 자신 있게 말할 수가 없습니다. 슬픔과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내 말은 아직 슬픔과 고통이 무엇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경박한 정신의 한가한 유희처럼 보이지나 않을지 나는 적이 두렵고 부끄러운 마음뿐입니다. 끝없는 슬픔의 바다에서 얼마나 더 싶은 심연으로 낮아져야 나는 당신의 슬픔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지요? 바닥을 가늠할 수 없는 슬픔의 깊이 앞에서 나는 내 모든 말이 참된 슬픔을 알지 못하는 자의 치기가 아닐까 하여 깊이 저어하고 또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그 부끄러움 때문에 내가 걷는 길을 멈추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는 더 낮아지고 낮아져 당신이 있는 가장 깊은 슬픔의 심연까지 내려가겠습니다. 어떻게 가장 깊은 슬픔 속에 참된 기쁨이 깃들이고, 어떻게 가장 깊은 절망 속에서 희망의 무지개가 떠오르는지 그 신비를 깨달을 때까지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고 또 내려갈 것입니다.  

이제 정말 작별할 시간입니다. 긴 편지 끝가지 읽어주신 것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다시 소식드릴 때까지, 사랑하는 그대, 부디 평안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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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24 01: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24 1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요먼 2011-11-10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슬픔의 의미와 고통의 존재 이유를 묻는 것,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 그리고 가장 깊은 슬픔과 절망 속에 있는 사람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것, 그것이 오랫동안 내가 생각한 철학의 길이었습니다.
- 이 구절 참으로 좋습니다 ^^ 가슴이 짠 하네요, 나도 그런 철학의 길을 가고싶네요.

바라 2011-11-11 01:46   좋아요 0 | URL
요먼, 나중에 이 책 빌려드릴게요ㅎㅎ 꼭 읽어봐요
 


 
John Sallis, "Nietzsche's platonism", Platonic legacy, New York: SUNY, 2004의 요약.

 

 


 

  니체의 플라톤주의. 니체와 플라톤 양자 사이에는 형이상학의 역사 전체가 놓여있다는 점에서 거대한 간격이 존재한다. 하이데거의 경우 니체를 최후의 형이상학자라고 해석한 바 있다. 문제는 이들 사이의 간격 자체가 아니라 이러한 간격을 가로지르는 운동의 다양한 형상들이다. 플라톤주의의 첫 번째 형상은 결정적으로 니체의 사유를 규정하는데, 니체 자신도 인정하듯이 그의 사유는 플라톤주의의 일종으로 생각될 수 있다. 두 번째 형상은 니체가 플라톤 이후에도 존속하는 플라톤주의라고 간주하는 것으로, 철학적 전통으로서 플라톤주의이다. 세 번째 형상은 이러한 간격을 가로지르는 니체 자신의 해석, 문헌학적 전통에 의해 매개된 것이 아닌 플라톤의 텍스트 자체로의 회귀이다. 네 번째 형상은 플라톤의 은폐된 역사로의 회귀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러한 네 가지 형상은 ‘니체의 플라톤주의’의 다양한 의미를 규정한다.

 

1.

  첫 번째 형상은 결정적으로 니체의 사유를 규정한 것으로 니체의 사유를 플라톤주의의 일종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는 니체가 그의 사유 초기부터 후기까지 인정하고 긍정했던 유대관계로서, 가령 <비극의 탄생>에서 니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의 철학은 전도된 플라톤주의이다. (...) 목표로서 가상Schein 속에서 살기.”(Ⅲ 3:207) 여기서 가상이라는 말은 플라톤주의가 ‘진정한 존재’로부터 구별하는 유사성 또는 현상/외관appearance를 명명하기 위한 것이다. 니체의 전략은 플라톤주의가 설정한 위계적 대립을 전도시키고, 가상을 보다 순수하고 더 아름다우며, 더 나은 것으로 간주하면서 플라톤주의가 ‘진정한 존재’라고 부르는 것을 더 열등한 것으로 강등시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니체가 <우상의 황혼>에서 또한 보여주는 것인데, 이는 역사의 형태, 오류의 역사라는 형태를 취하는 것이다. ‘어떻게 참된 세계가 마침내 우화가 되었는가?’라는 제목의 글에서 그는 플라톤주의가 전도되는 과정의 연속을 보여준다. 이 구절은 하이데거의 니체 해석에서 결정적인 것이며, 데리다 등의 해석에서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이다. 이 구절은 참된 세계가 점점 더 획득할 수 없는 것이 되는 단계를 추적하면서, 참된 세계의 제거로 끝맺는다. 니체는 플라톤주의의 가장 근본적인 전도의 순간이 “가장 짧은 그림자의 순간”이라고 말한다. 플라톤주의의 그림자가 물러나는 순간, 플라톤주의의 근본적 전도가 빛 속으로 나타나게 되는 순간이 바로 태양이 가장 높은 곳에 이르는 순간인 정오이다. 이는 여전히 전도된 플라톤주의로 남아있다.  

 

2.

  플라톤주의의 두 번째 형상은 니체가 플라톤 이후로도 서양의 사유와 실천의 역사 속에서 존속해왔다고 간주하는 플라톤주의이다. 이는 니체가 기독교를 “인민을 위한 플라톤주의”(Ⅵ 3: 74)라고 부를 때의 플라톤주의이다. 이는 참된 세계는 회개하는 죄인들에게 약속되어있다는 생각의 가장 오래된 형태이다. 니체는 <우상의 황혼>에서 플라톤을 ‘이미 존재했던preexistently 기독교인’(Ⅴ 3: 149)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플라톤의 이름을 기독교와 결합시키면서 니체는 만약 신이 오류, 맹목, 거짓말이라면 어찌하겠는가라고 묻는다.

 

3.

  니체의 플라톤 강의 텍스트 전체는 1995년 간행되었다(Ⅱ 4: 1~88). 이는 바질대학에서 고전문헌학을 가르쳤던 시기 니체의 강의를 담고 있다. 최초의 제목은 ‘플라톤 대화편 연구 입문’이었는데, 이는 다양한 제목으로 1873~4년 겨울 학기, 1876년 여름 학기, 1878~9년 겨울 학기의 강의에서 반복되었다. 이 강의는 바질 대학에서의 시기에서부터, <비극의 탄생>, 그리고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의 첫 번째 권이 출간될 때까지의 시기를 포괄한다. 이 강의는 최근의 플라톤 문헌과 플라톤의 생애를 다루고, 각 대화편의 요약 설명을 제공하며, 플라톤 사상의 주제를 제시한다. 입문적인 문단에서 니체는 전체 강의를 정향하는 일반적인 언급을 준다. 무엇보다도, 그는 플라톤이 항상 젊은이를 위한 진정한 철학적인 지도자 또는 가이드로 고려되어왔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이미 명백하듯이, 니체가 여기서 플라톤의 이름으로 지시하는 것은 나중에 그가 때때로 언급하는 ‘인민을 위한 플라톤주의’에서와는 완전히 다른 의미의 플라톤이다. 다른 한편, 니체는 플라톤적 사유와 칸트의 관념론과의 연관성을 지적한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칸트적 관념론에 대한 준비 과정이었던 것으로 말해지는데, 이데아론이 이미 사물 자체와 현상 사이의 대립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니체는 플라톤적 사유를 형이상학의 이후 역사와 연결시킨다.

  그러나 <비극의 탄생>의 맥락에서, 칸트와 쇼펜하우어가 정확히 진리에의 충동을 한계까지 밀어붙이고 예술의 재탄생을 준비한 인물임을 고려한다면, 플라톤적 사유와 칸트적 관념론 사이의 연관성은 마찬가지로 플라톤을 형이상학의 한계에 위치시키는 것, 니체적 전도에 가깝게 플라톤의 사유를 간주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니체는 플라톤의 산문 작가로서의 재능을 강조하며, 또한 플라톤이 위대한 극작의 재능을 지녔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니체는 플라톤에게 주요한 것은 작가 플라톤이 아니라 선생 플라톤이라고 주장한다. 작가는 단지 선생의 유령일 뿐이며, 그의 작품은 단지 아카데미에서 행해졌던 말의 상기rememberance일 뿐이다.

  니체는 당대의 플라톤 문헌에 의지한다. 다양한 학자들 가운데 니체의 플라톤 독해에 중요성을 갖는 학자는 두 명인데, 그 중 한 명은 텐느만Tennemann으로, 희랍 철학을 연구하는 칸트주의자이다. 니체는 특히 플라톤이 ‘이중의 철학’, 명백한 철학과 은밀한 철학을 가지고 있다는 텐느만의 관점에 대해 언급한다. 또 다른 학자는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프리드리히 슐라이마허로, 그가 강조한 것은 플라톤의 작품에서 형식과 내용은 분리불가능하다는 것, 철학자 플라톤 곁에는 또한 예술가 플라톤이 있다는 것이다. 니체는 플라톤의 예술적 재능을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화편에서 예술적 요소의 중요성에 관해서는 슐라이어마허와 의견을 달리 한다.

  니체는 예술작품으로서의 대화편과 예술가 플라톤에게 단지 이차적인 중요성을 돌릴 뿐이다. 니체는 “대화편은 어떤 극적인 것으로서가 아니라, 상기의 형태로, 변증술의 과정으로서 간주되도록 의도된 것이다”(Ⅱ 4:14)라고 말한다. 이후의 강의에서 니체는 “플라톤의 극이 가진 힘은 놀랍게도 과대평가되었다”(Ⅱ 4:161)면서 플라톤의 작품에서 극적인 요소의 중요성을 제한해야 한다고 더욱 강하게 주장하게 된다.

  니체는 플라톤의 편지를 비롯한 다양한 문헌을 가지고서 플라톤의 생애에 대해 확장된 논의를 펼친다. 특히 두 가지 점이 언급될 가치가 있는데, 먼저 플라톤의 교육 과정에 관한 것이다. 니체는 플라톤이 젊은 시절 주신찬가의 시들을 지었으나 나중에는 그 시들을 태워버렸다고 말하면서, 플라톤이 갖는 시적 경향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둘째로, 니체는 플라톤을 소크라테스의 죽음 이후에도 소크라테스적인 방식으로 존속했던 다른 소크라테스적 철학자들과 분리시키려고 한다. 한편으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이미지를 이상화했으나, 다른 한편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적 경향은 그가 가졌던 초기의 헤라클레토스주의에 의해 제한된다. 니체는 플라톤이 “애초에는 헤라클레이토스주의자였고 결코 순수하게 소크라테스적이지 않았다”(Ⅱ 4:45)고 말한다.

  니체가 개별적인 플라톤 대화편에 관해서 하는 설명은 대개 요약적이다. 그러나 어떤 설명은 최근의 학술적 기준에서 볼 때도 매우 예리한 점이 있다. 예컨대 <티마이오스>에서 세계-영혼의 혼합blending에 관한 문단에 대한 니체의 해석은 A. E Taylor나 Serge Margel의 것과 밀접히 상응하는 것이다. 니체는 이러한 혼합의 두 단계를 구분하고, 혼합의 첫 번째 단계에서 섞인 두 요소로부터 나오는 것이 두 번째 단계에서의 두 요소와 섞이는 세 번째 구성 요소가 됨을 인지한다.

  다른 한편 때때로 니체의 해석이, 텍스트가 말하는 것을 전통적인 공식으로 대체하면서, 플라톤 텍스트의 언어로부터 벗어나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예컨대, <티마이오스>에서 그릇receptacle과 코라를 언급하는 대목을 보자. 그러나 니체가 그릇과 가지적 존재 사이의 구분을 끌어올 때, 그는 전자를 이데아 곁에 있는 원초적 물질로, 이데아의 영원성을 분유하지 않는 비존재non-being로 간주한다. 그러나 <티마이오스>에서 그릇은 결코 질료라는 말로 지시되지 않으며, 니체의 설명과는 반대로 그릇은 그것이 매우 복잡한 방식일지언정 가지적인 것에 참여하는 것으로, 명시적으로 영속적인 것으로서 간주된다(<티마이오스>, 51a-b, 52a-b).

  니체가 그의 강의의 두 번째 부분에서 제공하는 플라톤 사상의 주제적 설명은 플라톤 텍스트에 대한 최소한의 언급과 함께 전개된다. 특기할 만한 것은 니체가 빙켈만, 괴테, 독일 헬레니즘의 전체 전통으로부터 계승된 그리스 문화에 대한 관점과 가장 급진적인 방식으로 단절하고 있을 바로 그 시기동안, 그의 플라톤 해석은 그처럼 좁은 경계에서 남아있었다는 사실이다.

  니체의 설명은 우선 플라톤의 이데아에 대한 설명에서 시작한다. 그는 개념 및 개념적 규정Begriffsbestimmung에서 시작하며, 무엇보다도 이데아를 개념적 규정의 대상과 동일시한다. 그는 또한 “일반적 개념적 규정의 대상은 감각적인 사물이 아니라, 존재자의 다른 종류eine andere Gattung des Seienden”라고 설명한다. “이데아를 감각적인 것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이유는 그가 감각적인 것을 영속적인 흐름과 변화 속에서 보았고 따라서 이를 지식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와 더불어 그는 윤리적인 것은 개념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Ⅱ 4: 149)

  니체는 우리의 개별적인 감각 지각이 개별 대상들에 상응하듯이, 우리의 일반적 개념은 개념들 자체와 마찬가지로 불변하는 대상에 상응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니체가 말하듯이 이데아론은 매우 놀라운 것이다. 그러나 가장 놀라운 것은 그러한 설명이 진리가 가상이라고 주장하는 ‘비도덕적 의미에서의 진리와 거짓말에 관하여’와 같은 텍스트가 쓰였던 바로 그 시기에 주어졌다는 것이다.

  니체는 반복해서 플라톤에게 윤리적인 것이 가졌던 우선성을 주장한다. 따라서 이데아를 정립함에 있어 플라톤의 출발점은 선, 미, 정의였고, 그의 목적은 이러한 윤리적 추상물들을 감각적인 것이 갖는 영속적인 흐름, 변화로부터 보호하는 것이었다. 니체는 플라톤이 가시적 세계에 대한 고려를 기초로 해서 이데아를 정립할 수도 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플라톤은 이러한 방식으로 나아가지 않았으며, 이데아론의 생성은 가시적 세계에 대한 고려 속에 있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론의 기원은 감성적/미학적aesthetic인 것이 아니다. 즉 이데아는 감성적 관조 또는 직관에 기초해서 정립되지 않았다.

  이에 니체는 이전에 주장했던 요점, 즉 플라톤의 예술적 충동은 이차적이며 또 다른 충동, 도덕적 충동에 의해 철저히 지배되었다는 것으로 돌아온다. 니체가 말하듯이 “그는 철저히 윤리학자이다.”(Ⅱ 4: 161) 이 지점으로부터 니체는 (신체는 영혼의 감옥이고, 철학의 과업은 감각적인 것으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결론, 플라톤 사상이 ‘인민을 위한 플라톤주의’ - 이후 니체의 계보학적 비판의 주요한 표적이 될 - 으로 변하게 되었다는 결론으로 나아간다.

               

 

4.

  니체의 플라톤주의의 네 번째 형상. 이는 니체의 바질 강의를 지배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다. 니체는 보기 드문 능력으로 가장 결정적인 모호성과 이 모호성 내에서 일어나는 사유의 끊임없는 순환을 식별한다. 바로 이러한 독해를 통해서 니체는 플라톤의 사유를 그 독특성을 개방하는 방식으로 마주한다. 헤라클레이토스주의자로서 플라톤은 단순히 소크라테스적인 것으로 변했다고 말해지지 않으며, 예술가 플라톤이 아무런 잔여도 없이 도덕주의자 소크라테스로 변형되어왔다고 일관적으로 제시될 수도 없는 것이다.

  물론, 니체는 그의 강의에서 플라톤의 예술적 충동이 소크라테스의 도덕적 충동에 의해 제한되었음을 강조한다. 또한 니체가 <비극의 탄생>에서 쓰듯이,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학생이 되었고, 그의 시를 태워버렸다. 그러나 플라톤이 그의 시를 태워버렸을지라도, 그는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으며, 소크라테스처럼 쓰지 않는 자가 되지 않았다. 물론 그가 소크라테스의 매력에 빠지지 않았다면, 그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썼을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매력 하에서도 플라톤은 글쓰기를 지속했고 예술가로서 남았다.

  ‘그리스 국가’라는 제목이 붙은 초기의 텍스트에서 니체는 남아있는 투쟁, 모호성에 대해서 강조한다. “그가 그의 국가에서 천재적 예술가를 배제했다는 것은 예술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평결의 엄밀한 결과였는데, 이는 플라톤이 그 자신과의 싸움에서 그 자신의 것으로 만든 것이었다.”(Ⅲ 2: 270f) 그러나 이 자신과의 싸움은 플라톤이 예술에 관한 소크라테스의 평결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을 때도 중지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때는 그 싸움이 가장 강렬해졌을 때이다. 스스로와 싸우는 플라톤의 이미지, 역동적이며 또한 활발한 모호성의 이미지와 더불어, 니체는 플라톤 사유가 갖는 독특성에 대해 언급한다.

   이외에도 플라톤이 그 자신과 영속적인 싸움, 자신과의 분열 속에 있는 인물, 모호성 내부에서 순환하는 인물로 그려지는 다른 문단들도 있다. <선악을 넘어서>에서 플라톤은 “어떤 철학자도 지금까지 그 마음대로 이용했던 가장 위대한 힘”(Ⅵ 2: 114)으로 선언된다. 또한 니체는 플라톤의 비밀, 그의 스핑크스적 본성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우리가 그의 임종의 베개 밑에서 발견한 것은 성서도, 이집트의 책도, 피타고라스의 책도, 플라톤의 책도 아닌, - 아리스토파네스의 책이다. 플라톤 또한 삶을 - 그가 부정햇던 그리스적인 삶을 - 아리스토파네스없이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까?”(Ⅵ 2: 43) 또한 니체는 소크라테스주의가 플라톤의 것이 아니고 단지 그의 철학에서만 발견되며, 이러한 소크라테스주의를 신봉하기에는 플라톤이 너무도 고귀하다고 말한다.

  <우상의 황혼>에서의 플라톤에 대한 가혹한 비판 외에도 니체는 또한 플라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쓴다. “그는 ‘그리스도교인’이 아니라 그리스인만이 지닐 수 있는 순진무구함을 가지고, 아테네에 그처럼 아름다운 청년이 없었다면 플라톤 철학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을 거라고 말한다: (...) 플라톤식의 철학은 차라리 에로틱한 경쟁이라고, 옛 체육 경기와 그 전제들을 연수하고 내면화한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으리라. 플라톤의 철학적 에로티시즘으로부터 마침내 무엇이 나왔는가? 그리스적 경쟁의 새로운 예술적 형식인 변증법”(Ⅵ 3: 120)

  <즐거운 지식>에서도 니체는 플라톤의 건강함과 강력한 감각에 대해서 쓴다. 마지막으로 1880년 중반에 쓰인 수고에서 니체는 플라톤에 의해 행해진 전도에 대해서 쓰는데, 플라톤은 여전히 예술가로 남아있다. “기본적으로, 그가 예술가였던 것처럼 플라톤은 현상보다 존재를 선호했다.”(Ⅷ 1: 261)

  특기할 만한 것은 어떻게 플라톤적 전도의 이미지가, 형이상학의 발생조차 소크라테스적 도덕주의자 플라톤보다도 예술가 플라톤의 손에 더 많은 것을 부여하는가 하는 것이다. 결국 극한에서, 이러한 니체의 플라톤주의의 형상은 첫 번째 형상 - 즉 존재보다 현상을 선호하는, 또는 최소한 존재와의 대립 하에서 규정되어 항상 현상이라고 불려왔던 것을 선호하는 - 니체 자신의 사유의 전도된 플라톤주의와 소통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최종적으로 니체가 그리스인으로 남은 이유, 또는 처음부터 그리스로 돌아오려고 시도했던 이유이다. “오 저 그리스인들! 그들은 어떻게 사는지 이해했다. (...) 저 그리스인들은 피상적이었다 - 심오함이 없었다.”(Ⅴ 2: 20, 또한 Ⅵ 3: 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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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프랑스철학: 근대성과 주체의 지속(캐롤라인 윌리엄스) 

 

1장 문제들과 역설들을 상속하기 - 주체성과 근대철학

 

주체 개념은 매우 다른 역사적 설명을 갖는 철학적 문제들을 제기한다(데카르트에서 후설 그리고 그 이후). 근대철학 내에서 주체 개념은 대개 subjectum으로, 인식의 객관화하는 토대로, 모든 가능한 존재들의 토대로 개념화되어왔다. 이때 주체는 우선 인식론적 기능을 하는 것으로, 대상의 재현이 사유, 지각, 주체적 의식의 앎의 결과가 되는 가지성intelligibility의 영역을 구획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주체는 이러한 동질성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주체 개념에서 존재론의 영역은 인식론만큼이나 중요하다. 실상 주체의 대문자 역사란 존재하지 않으며, 주체의 개념화는 철학적 스타일의 다수성만큼이나 매우 다양하게 존재한다. 주체에 대한 질문은 이러한 문제들의 역사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이 장의 목표는 데카르트, 스피노자, 헤겔에 의해 전개된 주체에 대한 세 가지 개념을 식별하고 정교화하는 것이다.

 

1. 데카르트와 근대적 코기토의 탄생

  미셸 푸코가 <말과 사물>에서 보였듯이 근대성과 인식의 합리주의적 정향의 탄생은 데카르트적인 사유 주체 그리고 이후의 칸트적인 초월론적 주체와 분리될 수 없다. 정신과 신체, res cogitans와 res extensa의 데카르트적 이원론은 이후 근대의 철학적, 정치적 사유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근대적이고 합리적인 주체성의 구성은 이러한 데카르트적인 문제틀에서부터 개시되었다고 할 수 있다.1)

  데카르트의 철학은 인식의 새로운 토대를 만들고, 사유하는 주체를 구성함으로써 근대를 특징짓는 새로운 과학적 방법을 검증할 수 있도록 한다. 데카르트적 형이상학은 인간 주체의 관점에서 실재의 확실성을 주장할 수 있는가에 대한 깊은 회의주의로부터 발원한다. 인식론적 불확실성은 주체의 실재에 대한 해석뿐만 아니라 진리의 기준들까지도 회의하도록 만든다(아렌트: ‘데카르트적 회의의 특징은 그 보편성’). 만약 우리의 지성intellect이 유한하다면 어떻게 인식은 보편적인 것이 될 수 있는가? 제1성찰에서 나타나듯이 환상, 상상, 부정확한 감각적 지각과 실재를 분간할 수 없다는 회의와 불안은, 이것들을 구별할 수 있는 진정한 코기토의 창조로서만 제거될 수 있는 것이다. 인식론적 안정성과 진리의 획득은 이와 같은 주체의 경험과 실재 사이의 간극을 제거할 수 있을 때에 가능하다. 또한 인식 능력의 토대를 형성하는 것은 코기토(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존재한다)이다. 사유 능력 및 참되고 판명한 관념을 그렇지 않은 것과 구별할 수 있는 마음의 능력은 명석 판명함의 척도로서 기능하는 기하학적 법칙과 관련된다. 사유는 환상, 정서affection, 즉각적 경험 등 신체에 의한 흔적들로부터 보호되어야 한다.

  데카르트 철학은 주체를 명석하거나 기만적인 사유의 저자author이자 의지하고 사유하는 주체, 진리를 형성하는 것에 책임을 지는 주체를 구성한다. 그러나 신의 권위로부터 주체의 책임으로의 이와 같은 이동은 신을 명석판명한 관념의 원인이자 보증자로 가짐으로써만 가능하다. 홉스의 경우를 보더라도 주체의 능력은 신이 부여한 것이며, 인간의 정신은 신처럼 만들어진 것이다. 데카르트적 주체는 인식의 저자이자 또한 이러한 신이 부여한 명석판명한 사유 능력의 오용에 책임을 지는 주체이다. 그런데 이러한 데카르트적 주체의 존재론적 내용은 무엇인가? 그는 주체의 존재론을 본격적으로 내놓지는 않지만, 적어도 데카르트적 주체는 시간 내에서 고정된 것이어야 한다. 그에게 주체성의 본질은 자아의 인식적 능력에 의해 부여되는 것으로, 세계나 타자와의 시공간적 관계를 필요로 하지 않고 지성의 능력에 대한 내적 반성에 의해서 발견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순수하고, 비시간적이고, 자기-폐쇄적이며, 반성적인 의식이다.

 이후의 철학은 데카르트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데, 인식론적 회의는 주체성의 모든 담론의 어떤 틈fissure이 된다. 회의나 불안의 억압이 곧 주체를 위한 새로운 토대주의적 이론을 만드는 것은 아닌데, 예컨대 정신분석 이론에서는 바로 이러한 억압이 바로 주체의 토대주의적 이론을 방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라캉이 주장하듯이 주체에 의한 대상의 재현에는 언제나 대가가 따르며, 의심은 진리를 보장하려는 시도들을 영원히 방해하게 된다. 코기토는 언어 내에서 그 자체로 경험될 수 없으며, 그 동일성은 영원히 분열된 채로 남는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데카르트적 주체는 또한 정신분석학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서구 철학의 담론, 특히 칸트 철학은 추상적이고 초월론적인 주체성과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주체성 사이의 이율배반을 화해시키려 시도한다. 흄의 회의주의가 주체의 동일성을 그 굳건한 토대가 결여된 연속적인 흐름flux으로 간주했다면, 칸트는 주체성을 주체와 객체의 구별 위에 정초함으로써 데카르트적 문제틀을 발본화했다. 인식 주체는 절대적이고 초월론적인 존재, ‘통각의 초월론적 통일’이며, 이러한 주체는 인식 가능성의 조건이다(‘경험 일반의 가능성의 조건이 동시에 경험 대상의 가능성이다’). 데카르트와 마찬가지로 칸트는 인간 경험의 한계를 인정했으며, 이 점에서 초월론적 주체성은 경험적, 실천적 의식과 일치할 수 없는 이상적 개념화이다. 오류, 환상, 혼동은 데카르트에서처럼 여전히 인식의 자기확실성에 대한 잠재적 방해요인으로 남는다.

  이상에서 논의된 바와 같이, 객체성보다 특권적인 주체성 개념은 서구의 정치적, 철학적 사유의 지배적 패러다임을 구성한다. 이러한 패러다임의 비판자인 하이데거에게 데카르트적 코기토는 철학을 인간학anthropology으로 변형시키고 세계를 주체에게 표상(Vor-stellen)되는 것으로 만든다(<세계상의 시대>). 흔들릴 수 없는 확실성의 토대로서 주체의 개념화는 근대적 사유 형태의 전형적인 패러다임으로 간주된다. 이것은 스피노자의 반-의인론anti-anthropomorphism이 데카르트에서 헤겔의 주체 개념 사이에서 이례적인 것anomaly으로 나타나게 한다.

 

2. 스피노자의 실체 철학: 주체의 분해와 재구성

  스피노자가 현대철학에 미친 영향력은 심대한데, 그는 데카르트적인 코기토의 우선성을 대체하는 주체성의 설명을 제공한다. 주체는 욕망, 의지, 자기이해 등이 실체의 체계적, 합리적 질서의 결과로 간주되는 상호연관된 복잡한 관계 도식 속에 위치한다. 이때 실체란 절대적인 신적 실체와 등치될 수 없으며, 범신론으로도 해석될 수 없다. 스피노자는 실체를 은유적인 의미와 실재적real(구체적) 의미로 사용한다. 이때 은유적인 까닭은 실체가 그것의 가능한 속성들의 무한성에서 파악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고, 실재적인 까닭은 그것이 단순히 추상적이거나 천상의 무엇이 아니라 자연적, 물질적인 것, 또한 생life에 관계되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데카르트적 이원론, 주체를 두 가지 모순적인 영역으로 분열시키는 이원론과 대립된다. 그에게 주체성의 형태 및 인식의 구조에 대한 이해는 오직 신체와 정신, 정념과 지성 사이의 상호연관성interconnectedness을 인지함으로써만 달성되는 것이다. 그는 주체와 인식 사이의 관계를 구현embody하려고 시도한다는 점에서는 헤겔과 같지만, 헤겔과 달리 스피노자의 실체 개념은 주체와 객체 사이의 최초의initial 분리 자체를 허용하지 않는다. 사실 헤겔에 의한 스피노자주의에 대한 주요 비판은 스피노자의 실체 일원론이 주체성을 역사적인 생성 하에서 파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2) 헤겔은 데카르트와 스피노자 모두 수학적 모델을 준수하면서 사유의 추상적 개념화를 추구했다고 보았다. 반면 피에르 마슈레는 스피노자의 실체 및 속성 이론이 존재와 인식의 무제한적 가능성을 가진 구체적인 체계라고 기술한다. 사실 스피노자의 경험주의 비판, 인식과 주체성의 상상적 토대에 대한 설명, (개체적이고 집단적인) 정신과 신체의 역량potentia을 구획하고, 규율하고, 포함하는 정념에 관한 성찰 등은 알튀세르와 라캉의 주체 이론을 중요한 점에서 예상하는 것이었다.

  스피노자의 목적은 주체와 객체 사이의 존재론적 이원론으로 서술되지 않는 인식 이론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는 (신이 모든 세계의 행위를 고정되고 미리 주어진 목적에 따라 이끈다는) 종교적 목적telos의 교설을 받아들이도록 인간들을 기만하는 신학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실재에 대한 목적론적이고 선험적인a priori 개념화는 자연과의 관계에 대한 그릇된 설명이며, 신에 대한 이해를 무지하도록 고정시키는 공상에 불과하다. 세계에 대한 잘못된 지각과 오해는, 의지에 대한 합리적 이해와 우리가 자연과 갖는 정념적 교환 사이의 원초적 간극chasm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러한 이율배반이 우리의 앎의 형태 속에 존재할 때, 스피노자는 오류의 원인을 보여주려고 한다.

  반성적 자기의식의 역할은 실체를 구성하는 힘과 변용affect의 구조에 의해 엄격히 제한된다. 의식은 이러한 구조 밖으로 연장될 수 없으며, 주체는 관념의 창조적 작인agency이나 인식 가능성 조건을 만드는 자율적인 경험의 주체가 아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의 본질은 신의 속성의 일정한 변양definite modification에 의해 구성된다’(<윤리학> 2부 명제 10 따름정리corollary). 유사하게, 정신 속에는 절대적인 자유의지란 없으며, 정신은 원인에 의한 이러저러한 의지에 의해 규정되며, 이 원인은 마찬가지로 다른 원인에 의해 규정되고 이렇게 무한히 계속된다(ad infinitum). 스피노자는 정신과 신체를 공통의 실체의 속성의 무한함 가운데서 두 가지 속성으로 파악한다. 그리고 사유와 연장은 이러한 일차적primary 실체의 변용으로 간주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유, 지성, 의지, 지각, 관념, 대상, 인식의 형태 등은 모두 이러한 실체와의 내재적이고 필연적인 관계로부터 나온다. 주체는 이러한 합리적 총체 내에 위치해야 하며, 실체의 존재 또는 변용의 양태mode로 이해되어야 한다.

 

관념들과 이미지들, 신체들과 정신들

  ‘관념의 질서와 연관은 실재들의 질서와 연관과 같은 것이다’(2부 48번 명제). 스피노자에게 정신은 그것이 신체의 특수한 관념이기 때문에 개별적 주체이다. 신체는 다수성multiplicity의 장소이자 경험에 의해 많은 방식으로 변용되는 것이다. 따라서 정신과 신체 속에서 관념의 질서는 적합하고, 명석 판명한 표상으로부터 파생되는 것이 아니라, 인식은 혼잡하고, 부분적인 것이 된다. 명석함과 곡해distortion 사이의 구별. 스피노자에서 정신은 사유 내에서 신체의 관념으로서, 신체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사유하는 신체이다. 이러한 신체와 정신 사이의 중요한 상호연관성, 관념의 물리적이고 물질적인material 장소로서 신체를 고려할 때, 스피노자는 어떻게 순수 인식의 이론을 전개할 수 있는가?

  그는 3종의 인식을 구별한다. 각각의 인식은 실체에 대한 각각의 관계 및 존재양태에 대응한다. 1종의 인식은 ‘개별 대상들이 우리에게 어떠한 지성적 질서도 없이 단편적이고 혼잡한 방식으로 감각을 통해 드러나는’(2부 명제 40 sch. 2) 인과적 경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부적합한 관념을 낳는데, 이는 오직 정념, 감정, 신체적 변용들bodily affects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1종의 인식은 신체적 경험의 다수성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취해진 이미지들, 상징symbol으로부터 파생되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어떠한 표상 대상도 필요로 하지 않는 스스로에게 적합한 관념과, 이미지나 기호sign에 결부된 관념을 구별한다. 상상imaginatio은 관념과 이미지의 관계를 혼동할 수 있고, 오류를 일으킬 수 있다. 인식의 상상적 형태에 관한 연구에서 스피노자는 언어의 문제에 대해 언급한다. 언어는 재현과 진리 사이의 간극을 메울 수 없으며, 기만, 왜곡, 환상 등에 종속되어 있다. 그에게 언어는 반동적인 것이며, 상상력에 결부되어 있고, 신체적 변용에 밀접히 결부된 부적합한 관념에 의해 조건지어진다. 니체와 마찬가지로 스피노자는 관념의 물질성 및 그 언어적 형태와의 구체적 연관성을 지적한다. 언어와 주체성은 밀접히 연관되어있다.

  2종의 인식은 ‘우리가 갖는 사물들의 특성의 적합한 관념과 공통통념common notions이라는 사실로부터'(2부 명제 40 sch. 2) 나온다. 2종의 인식은 1종과 3종의 인식 사이를 매개한다는 점에서 중요한데, 공통통념은 사유가 신체의 직접 경험에 근거하지 않은 일반성generalities을 드러낼 수 있다는 증거이다. 공통통념은 정신이 여러 신체들의 변용의 통일성unity을 추론하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으로부터 나온 상호연관성, 필연적 통합integration 등을 보여준다. <윤리학> 3부와 4부3)에서 스피노자는 신체적 변용을 표상하기 위한 정념의 복잡한 도식을 만드는데, 이는 상상력이 가상illusion, 부적합한 관념 및 상상적 동일화를 낳을 수 있는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4부에서 특히 그는 대중들multitude이 신학적이거나 정치적인 권위에 의해 묶일 수 있는 방식에 대해 토론한다. 그는 특히 사랑과 증오, 기쁨과 슬픔, 희망과 공포 사이의 정념의 동요와 인간 사이의 갈등과 불안정성의 항구적인 원천을 추적한다. <스피노자와 정치>에서 발리바르는 스피노자에게 다중은 상호적 인정mutual recognition 과정에 의해 형성될 수 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모방과 동일시는 주체를 대중의 한 부분으로 구성하고, 복종적이고 예속적인 사회적 유대를 창조한다. 정서적 모방(affectuum imitatio)에 대한 연구는 많은 부분에서 정신분석학과 이데올로기의 물질적 관행practice에 의한 신체의 규율(알튀세르) 등을 예상하는 것이다. ‘신체의 물리학’은 다른 정치적 형태에 따라 구성되고 재구성되는 정념의 취약함과 항구적 진동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독해는 스피노자의 3종의 인식 이론과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이성은 체화된 이성embodied reason의 한 종류로, 단지 매우 형식적인 의미에서만 변증법적이다.

  사유의 자율적 능력을 보여주는 오성understanding의 단계는 스피노자가 지성intellect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지성은 사유 속성의 한 양태로, 무시간적이고 무한하며 실체에 속하는 것이다. 실체의 속성들로서 유한한 신체와 정신은 모두 지성의 가능성을 포함한다. 지성은 본질과 실존이 하나의 것인 비판적이거나 순수한 사유의 형태이다. 이때 인식의 구성은 대상의 실존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스피노자에게 관념은 대상 이전에before 오는 것이다. 관념은 사유 속성의 효과로, 그것에 내재적인 것이며 관념의 대상ideatum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주체의 감각 지각에 의해 생산된 대상의 관념과, 유한한 신체 및 정신에 의해 동요되기 이전의 사유 내의in thought 대상의 관념은 구분되는 것이다.4) 의인론 및 의식의 주체 이론을 거부하면서, 스피노자의 3종의 인식은 의식을, 관념의 질서와 연관이 실재의 질서와 연관과 동일한 실체의 반성된 실체reflected substance로 정립한다. 3종의 인식은 내재성immanence에 근거하는 것이지 구체적-특수한 것의 초재성transcendence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두 가지 중요한 측면에서 내재적이다. 첫째로 스피노자의 인식 이론은 정신과 신체의 이원론에 근거하지 않으며, 양자는 모두 실체의 속성들이자 재귀적reflexive(내재적) 인식의 조건을 (양태적으로modally) 포함하고 있다. 둘째로 내재적 인식은 관념의 점증하는 적합성과 신체 및 정신의 관념들의 일반화 위에 기초한다. 이때 신체와 정신 사이에는 평행론, 즉 인식의 상호연관성 및 이성에서 지성으로의 이행이 변용된 사물로서 신체에 대한 자각과 평행됨 모두를 요구하는 평행론이 존재한다. 실체와 그 양태 사이에는 동일성이 존재하며, 이는 원본적인, 존재론적 차이나 헤겔적인 단절적인ruptural 부정성 같은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인식의 발전은 유한한 사유와 무한한 지성 내에서 내재적이지만, 이는 실체에 대한 선험적 개념화를 의미하거나 어떤 목적인final cause을 전제하는 것은 아니다.        

  스피노자는 코기토의 철학이나 절대적 주체성의 철학을 표상하지 않으며, 그에게서 우리는 ‘구조’에 관한 첫 번째 이론을 발견한다. 그는 존재 양태를 실존의 매우 다양한 평면plan 위로 분배한다. 타자로부터 분리되고, 자기-함량적인self-contained 동일성으로 주체를 재구성하는 것은 오직 부적합한, 인식의 상상적 형태일 뿐이다. 주체성이 결여된 스피노자의 구조화된 총체성structured totality 개념은 현대 비판 사상의 반인간주의적 입장과 중요한 관계를 가지며, 또한 알튀세르의 인식론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주체와 객체는 모두 실존의 실재적 평면에 대해 무지한 인식의 상상적 형태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다. 알튀세르에게 인식의 모든 상상적 형태는 이데올로기적이며 참된 인식의 지위를 가질 수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라캉에게도 상상적인 것은, 코기토가 항상 준거해야 하는 주체의 자아ego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3. 헤겔적 현상학: 역사의 주체를 구성하기

  헤겔로의 회귀는 프랑스철학에서 1930년대에 시작되었는데, 이는 데카르트적이거나 스피노자적인 합리주의 형태에 대한 심각한 도전을 제기했다. 헤겔에 관한 논쟁은 이폴리트, 코제브, 장 발, 메를로-퐁티, 사르트르, 루카치 등에 의해 다양한 방식으로 제기된다. 이는 또한 의식의 역사성historicity의 이론으로의 회귀였다. 헤겔적 의미에서 현상학은 의식의 역사적 경험과 관련된다. 그의 사변 철학은 사유와 경험의 여정을 의미와 진리 추구의 과정으로 본다. 헤겔에게 주체성은 보편성, 특수성(specificity or particularity), 개별성(singularity) 등을 통해 분석될 수 있다. 변증법이란 지양의 과정을 통해서 대립물, 모순 그리고 차이를 극복하고 통합할 수 있는 관계이다. 변증법의 논리는 인식과 역사 모두에서 대립되는 운동들을 종합할 수 있게 해준다.

  헤겔의 현상학은 철학적 주체의 역사에 관한 변증법적 분석으로, 정신Geist으로서 자기의식의 점진적인 전개로 간주될 수 있다. 그에게 진리, 합리성, 그리고 절대자 모두는 역사적이고 주체적인 생성 과정을 통한 성취achievement이자 결과로서 간주된다. 요컨대 운동과 자아의 시간성temporality없이 사유와 존재는 그 자신들을 정립하거나 넘어설 수 없다. 헤겔의 체계는 정적이지 않고 동적이며 변혁적이다. 운동, 생성 등에 대한 그의 관심은 주체를 운동 자체의 원리로 간주하도록 한다. 주체는 어떤 고정점에 포섭되거나 시공간 상에서 유예될 수 없다. 헤겔에게 철학의 업무는 규정적인 사유를 그 고정성으로부터 해방시키고 반정립의 운동을 보는 것이다. 데카르트적 이원론, 그리고 헤겔이 ‘단조로운monochromatic 형식주의’라 부르는 칸트 철학 등은 타자성과 모순을 배제하고, 변증법적 사유만이 종합할 수 있는 본질과 실존 사이의 근본적 관계를 간과하는 주체성의 한 예이다. 헤겔은 그의 실체와 주체 개념을 근원적 차이 또는 틈, 그가 부정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표시한다. 그 자기 운동이 주체를 존재로 만드는 힘이며, 그 본질에 존재를 부여하는 힘은 부정성이다. 실체와 주체 모두 그 자신의 부정을 포함한다. 자아와 주체(의식과 자기의식) 사이의 구별은 인정과 자기의식, 절대지에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한 고된 자기 외화의 과정을 하도록 이끈다. 의식은 절대자 안에서 그 자신의 완전한 의미를 달성하기 위해 스스로의 동일성을 거듭해서 상실하며 강제된 망명 속에서 살아야만 한다. 이러한 욕망하는 주체 개념은 이폴리트, 코제브, 라캉 등에 의해 보다 상세히 전개된다.

 이제 헤겔의 스피노자적인 형이상학적 일원론 비판의 토대가 명백해진다. 주체의 복잡한 구조를 실체의 단순한 변양modification으로 환원함으로써 스피노자의 논리는 주체적 생성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표현적 총체성expressive totality에 대한 헤겔의 변증법적 개념화는 부정성 개념과 더불어 주체의 작인, 의지, 행위라는 중요한 문제에 대한 응답이다. 헤겔이 보기에 표현적 총체성과 부정성은 차이와 특수성의 구체적 표현, 상호성과 인정, 역사 속에서 의식의 능동적 생성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스피노자의 추상적 실체에 대한 중요한 교정자corrective가 된다.

  헤겔의 프랑스에서의 수용에 대해 논의하기 이전에, 마르크스에 의한 헤겔적 주체 개념에 대한 변형을 먼저 다룰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관념론 대 유물론의 논변 외에도 마르크스와 헤겔 모두는 어떻게 실재와 주체성이 나타나고 형태를 갖게 되는가라는 현상학적phenomenological 질문에 흥미를 가졌다. 알튀세르에게 이는 무엇보다 이데올로기와 인식의 문제였고, 이에 그는 헤겔보다는 스피노자로 회귀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리 수고>에서 마르크스는 그 속에서 주체의 실존이 자연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매개되는 세계에 대한 사회적 존재론에 관심을 가졌다. 마르크스에게 동일성과 차이, 부정과 모순은 언제나 그 형태에 있어 명백히 사회적이다. 그에게 헤겔의 오류는 사유와 사회적 존재를 단지 의식의 영역 안에서 파악한 것이었다. 마르크스는 주체의 그 자신과 타인들로부터의 소외estrangement의 정치적 이유에 대해 논의했고, 이는 주체와 타자들 사이의 교류intercourse에 초점을 맞춤으로써만 규정될 수 있다. 헤겔처럼 순수 사유의 영역에서 주체의 실재적 실존 양태는 다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마르크스와 헤겔 모두는 주체의 대상화objectification라는 질문에 흥미를 가졌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헤겔이 소외의 사회경제적 문제를 사유의 대상화와 혼동한다고 주장한다. 소외alienation는 사유 내 대상으로부터의 소외가 아니라는 것이다. 대신 마르크스는 헤겔의 주-노 변증법을 취하고 노동을 통한 주체의 외화externalization를 강조한다.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자의 소외는 우선 노동 대상으로부터의 소외이며 또한 유적 존재로부터의 소외이다. 이러한 소외에는 중요한 실존적인 차원도 있는데, 대상적 존재로서 주체는 또한 고통받으며 조건지어진 제한된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의 임무는 주체의 현실에 대한 이러한 부정을 초극하는 것이다. 이때 변증법에 대한 마르크스의 의인화anthropomorphization는 명백하며, 그의 변증법적 기초를 이루는 것은 실체의 내적 부조화가 아니라 자연적 주체, 인간이다.

  마르크스는 사회적 주체의 문제를 자연의 감각적 주체와 관련시키는데, 이러한 감각적 주체는 사회적 삶의 토대이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헤겔의 관념론을 과대평가하고 자아와 세계 사이의 존재론적 관계를 과소평가한 것은 아닌가? <정신현상학>도 주체의 복잡한 여정을 기술하면서 이 주체의 유한성과 고통을, 의식과 세계 사이의 존재론적 불균형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도입부에서 이야기한 헤겔로의 회귀란 단지 사회적으로 매개된 것으로 간주된 소외로의 회귀일 뿐만 아니라 존재론적 관계로의 회귀이기도 하다. 불행한 의식과 주-노 변증법은 각각 이폴리트와 코제브에 의해 주체의 실존의 존재론을 전개시키는 데에 도입되었다. 문제는 소외의 실존 양태이다. 소외는 마르크스가 <파리 수고>에서 주장한 것처럼 사회적인 것 속에서 대상화되는 것인가 아니면 자아와 세계 사이의 내생적인 관계인가? 만약 전자라면 그 정치적 해결책은 무엇인가(코제브)? 그리고 후자라면 여전히 변증법적으로 개념화될 수 있는 실존의 구조가 존재하는가(이폴리트)? 이러한 새로운 질문방식은 헤겔의 철학을 종합이나 화해없는 반정립, 계속적으로 전복되고 분열하는 통일체 내에서 대립항들의 유희로 해석하도록 만들었다.

 

코제브와 이폴리트: 주체, 역사, 구조

  코제브의 중심 주장은 <정신현상학>의 자기의식의 운동과 주체성은 무엇보다도 인간학anthropology이라는 점이다. 역사와 인식은 오직 역사를 만드는 인간 행위에 의한 시간적 운동에 의해 주어진다. 청년 마르크스처럼, 코제브는 존재와 생성, 부정과 부정성을 인간  노동 행위의 역사적 장 내부에 위치시킨다. 자연 상태에서 존재는 단지 대자존재being-for-itself일 뿐으로 자연적 의식은 고립된, 개별적인 자기-확실성을 달성하며 대상에 대한 인식은 단순히 그것과 무매개적인 동일성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타자로부터의 인정을 욕망하는 주체는 동물적-존재를 넘어선다. 인간은 주어진 존재given-being5)를 변혁하는 부정 행위 자체이다. 주체는 곧 역사의 운동으로서, 자연적 존재의 수동적이고 관조적인 행위가 아니라 능동적이며 타자의 인정을 통해 자기인정을 추구하는 (부정성으로서) 주체의 인간화하는 욕망이다. 코제브는 욕망을 그의 인간주의적 문제틀의 중심에 놓는데, 후에 라캉은 이를 자신의 이론으로 취하기도 한다. 코제브는 특히 헤겔의 주-노 변증법을 활용한다. 이는 두 가지의 충돌하는 주체성들의 극적인 설명에다가 자아와 그 자신 사이의 내적 관계 및 자아와 타자 사이의 사회적 관계로서 이원성을 도입하는 것이다. 주인은 의식이 그 자신에 대해 존재하는 의식을 표상한다. 반면 노예의 실재는 그에게 우연과 상실(죽음의 유령)을 주는 주인의 위엄과 우월성의 인정, 그리고 부정적인 것으로 머무는 노동 행위에 의해 구성된다. 그러나 주인은 그의 대상 욕망을 목적 자체로 보는 순수한 부정성에 고정되어 있는 반면에, 노예는 부정적인 것의 초월과 변혁을 위해 준비되어있다. 욕망, 부정성은 자연적 세계를 변용시키며 이 과정에서 노예와의 관계 또한 변용된다. 작업work은 코제브에게 무엇보다도 시간인데, 이는 시간 내에서 존재하며 시간을 요구한다. 작업을 통해서 노예는 인간적 역사로서 인간적 시간성human temporality을 만들고, 자연적 진화를 멈추며 노예적 의식을 극복한다. 이러한 주체성과 욕망에 관한 해석은 자연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사이의 내적인 이원론에 근거한다. 코제브의 구분에 따르면 인식은 언제나 인간 행위 내에서 현시된다. 관념은 작업과 행위에 의해 매개된 대상 및 기투projects의 산물로 나타난다. 코제브의 인간학적 헤겔 독해는 두 가지 중요성을 가진다. 첫째, 이는 욕망이 인간화되고 주체라는 행위자에 결부되어 인간 주체가 역사의 변증법적 운동을 이끌도록 하는 것. 둘째, 진리와 절대지의 가능성의 조건을 언표의 주체enunciating subject에서 찾는 것. 코제브의 인간학적 헤겔 독해는 청년 마르크스의 인간학적 변증법 독해와 유사하다.

 코제브와 달리 이폴리트의 헤겔 주체 개념 독해는 인간 실존의 비극적 요소를 강조하며, 역사철학에는 인간적 요소나 역사적 행위자로서 주체에 대한 해석이 없다고 본다. 이폴리트는 인간 경험의 조건을 인정투쟁에서 읽어내며, 이러한 투쟁이 타자 및 타자의 인정에 대한 욕망에 관한 것으로 파악한다. 그러나 ‘절대자의 달성은 영원히 연기된다.’ 이폴리트가 주체의 실존적 곤경에 초점을 맞출 때, 이러한 존재론은 인간학적인 방식으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식의 가능성과 진리의 경험을 구조화하는 조건의 관점에서 파악된다. 생의 존재는 ‘자아의 불안disquiet’이고, 그 자신이기 위해서는 언제나 스스로에게 타자로 남는 주체의 고통과 소외이다. 이는 부적합성, 대상의 진리에 대한 무한한 비-상응의 경험으로, 주체는 언제나 그 자신과의 통일에 이르는 데 실패한다. 자기발견의 경계에서 동요하는 불행한 의식은 주체성의 토대이다. 이폴리트에게 부정성은 존재의 중심에 위치해있는데, 이는 모든 내용에 내재적이며 모든 주체의 가능성의 조건이다. 그 내적 모순으로 인해 개체는 주어진 상태에 머물지 않는 절대적 충동이 된다. 노동/작업의 행위에서 주체는 그 자신을 부정하고 대상을 새로이 형성한다. 즉 노동은 이성을 인간적 사건으로 정초한다. 이러한 주장은 마르크스나 코제브를 떠올리게 하지만, 이폴리트의 개념화는 이러한 철학적 관점과 구분된다. 이폴리트의 욕망 개념은 이원적 존재론에 의해 파악되지 않으며, 욕망의 인간화는 상상적 운동으로서 인정의 구조에 가깝다. 이폴리트는 다른 곳에서 주-노 변증법을 구조화하는 인정에 대한 욕망을 ‘거울 유희’로 파악한 바 있다. 더 나아가 이폴리트는 시간을 모든 여타의 범주들을 대체하는 것으로 정립한다. 시간은 모든 인간적 실재의 조건이자 주체의 창조적 가능성을 한계짓는 것이다. 이는 주체가 노동 대상과 갖는 마주침을 상실된missed 마주침으로 만든다. 마르크스나 코제브와 달리 자연에 대한 노동은 불행한 의식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으며, 유한성 내에서 욕망은 오직 대상에서 상상적 만족만을 찾을 뿐이다. 코제브에게 시간, 욕망, 인식은 모두 인간화된 것이지만, 이폴리트에서는 시간이 주체를 발생시키는 것이다. 시간은 생을 구조화하는 조건이고, 어떤 수단으로라도 주체에 의해 무화될 수 없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이폴리트가 계속해서 강조하는 것은 자아의 불안 또는 불행한 의식이다.

                 

   

             






1) 반면 발리바르는 ‘시민 주체’에서 데카르트는 사유하는 사물, 즉 코기토를 주체라고 명명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데카르트의 철학은 아직 실체론과 관련된 것이었고, 주체를 주권적 존재sovereign being로 공식화한 첫 번째 이는 오히려 칸트라는 것이다. 발리바르에 따르면 또한 이 지점이 정치적 주체, 시민이 등장한 순간이다.


2) 피에르 마슈레에게 이러한 헤겔의 비판은 스피노자의 속성 개념(1부에서 속성의 정의: 나는 지성이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으로 지각하는 것을 속성으로 파악한다)에 대한 그릇된 독해에서 기인한다. 속성에 대한 주관적 해석이 주장하듯이 속성 개념은 단지 지성에 의해 지각되는 것이 아니며, 스피노자는 사유를 실체 바깥에 있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 사유와 연장 속성 외에도 알려지지 않은 무한한 속성이 존재하며, 유일한 실체는 실체의 절대적 무한성, 절대적 역량의 결과이다. 속성은 사유가 실체의 변양modification으로서 실체에 대해 가질 관계를 표현한다. 자세한 사항은 <헤겔 또는 스피노자>의 3부 참조.


3) 네그리는 이 점에서 <윤리학>에서 <신학-정치학 논고>의 초안으로 알려진 저작의 개입을 무시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신학-정치학 논고>는 <윤리학>의 형이상학적 담론 내부로 도입되며, <윤리학>의 후반부에 명백한 정치적 토대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례적 별종> 5장 참조.


4) <지성개선론>에서 스피노자는 이 중요한 구별을 설명하기 위해 기하학적 유비를 사용한다. ‘참된 관념은 그 대상과는 다른 것이다. 원과 원의 관념은 다른 것이다.’


5) 주어진 존재given-being란 코제브가 쓰는 용어로, 동물적 삶 속에 잠겨있는 무매개적 만족의 단순한 세계 속에 있는 주체를 서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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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재습격 2011-04-23 0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라님 글 잘 읽었어요.^^ 일부 담아가요^^(혹시 안된다고 하시면 댓글주세요~)

바라 2011-04-23 22:08   좋아요 0 | URL
안 될리가요 ㅎㅎ 책 내용 요약인데 여러 모로 서툴러서 이해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네요(빈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코스가드 여사의 모습(1952~)   

 


일종의 윤리학사이기도 한 이 책은 규범성의 근원을 다룬다. 코스가드는 주의주의자(홉스, 푸펜도르프) 등 규범성의 근원을 입법자에게서 찾는 입장, 실재론자들처럼 어떤 도덕적 실재에서 찾는 입장, 흄 등 반성적 승인(reflective endorsement)론자처럼 특정한 인간적 본성에서 찾는 입장 등을 차례로 개괄, 반박하고 자율로서의 자유(칸트)에서 비로소 규범성의 근원이 나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책 후반부에는 버나드 윌리엄스나 레이몬드 게스 등 동료 학자들의 비판 및 코스가드의 답변 등이 실려있다. 현재 하버드에서 가르치고 있고 또 롤즈의 학생이기도 했던 그녀의 책은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같은 책보다 훨씬 유익하고 깊이가 있는 것 같다..

Christine Korsgaard, The Sources of Normativity,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6, pp. 145-166.   


가치의 기원과 삶의 가치

4.3.1 고통은 앞서 논의한 것들에 대한 반론이 된다. 첫째로 고통은 우리의 심적 삶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견해를 받아들이는 데에 장애물이 된다. 그가 사적이라고 부른 바로 그러한 의미의 고통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고통은 규범성에 관한 자연주의적 실재론의 어떤 형태에 대한 큰 유혹이다. 쾌락과 달리 고통은 규범적 사실의 한 종류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셋째로 고통은 칸트적 윤리학 또는 인간성의 가치를 모든 가치의 토대로 만드는 윤리학에 대한 반론이 되는데, 다른 동물들도 고통을 느끼기 때문이다.
4.3.2 처음 두 반론은 연관된다. 가령 비트겐슈타인의 사적 언어에 반한 논증은 규범적 자연주의- 결코 틀릴 수 없는 -에 대한 반대였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는 이들은 고통이 어떤 토대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공리주의자들은 쾌락과 고통이 가치이기도 한 사실이라고 주장하며 이것이 자연적 세계에서 윤리학이 토대를 찾을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이는 감각을 지식의 토대로 놓는 인식론적 주장과 유비적이다.
4.3.3 정말 그런가? ‘나는 빨간 감각을 갖는다’의 경우, 그것을 보는 것은 우리 마음 속의 작은 인간인가? 비트겐슈타인은 바로 모든 심적 행위를 감각과 관념의 관조로 환원시키는 것, 그리고 이러한 그림을 지지하는 ‘가짐’이라는 언어에 대해 공격한다. 그런데 누군가 고통스럽다고 말할 때 그는 그 조건을 바꿔야 할 이유에 대해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그 조건을 바꿔야 할 아주 강한 충동을 갖고 있다고 알리는 것이다.
4.3.4 고통은 단순히 특정한 감각이 아닌데, 고통의 고통스러움은 이러한 감각이 우리가 맞서 싸우도록 이끌리는 감각이라는 사실에 있다(고통의 생물학적 역할). 감정적 고통과 물리적 고통이 공유하는 것은, 그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감각이 아니라 세계에 대해 맞서 싸우도록 한다는 것이다. 고통은 조건을 바꿔야 할 이유 자체인 조건이 아니라, 당신이 당신의 조건을 바꿔야 할 이유를 갖는다는 지각perception이다.
4.3.5 공감sympathy은 단순히 다른 이의 고통에 대한 불편한 느낌이 아니라, 덜어질 수 있는 것으로서 그들의 곤란에 대한 고통스러운 자각이다(흄, 허치슨). 동정pity은 다른 이들의 고통에 대한 지각, 그의 조건을 바꿔야 할 이유가 있다는 지각이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이다.
4.3.6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살아있는 것은 자신을 유지하고 재생산하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생명에 있어서 이 자기-유지적인 형상은 자신의 정체성을 보존하는 것이다. 이 살아있는 것이 동물이고 의식적이라면, 정체성을 보존하는 방식은 감각, 고통을 통한 것이다. 동물은 자신의 물리적 실존을 위협하는 것을 지각하고 그것에 맞서 싸우려 한다.
4.3.7 비교: 인간과 실천적 정체성. 살아있는 것과 물리적 정체성. 의무는 당신의 실천적 정체성을 위협하는 것에 대한 반성적 거부이며 고통은 물리적 정체성을 위협하는 것에 대한 비반성적 거부이다. 고통은 이유의 지각이며 이는 규범적인 것으로 보인다.
4.3.8 의무와 고통 모두 부정적인 도덕 감정과 관련된다. 고통은 현재, 과거, 미래 모두에 적용되는 이유에 대한 지각이다. 마음의 권위는 부정적인 도덕 감정의 경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감정을 절대적으로 함축한다. 이때 자신의 이유를 지각할 수 없는 마음은 마음으로서 전혀 기능할 수 없을 것이다(칸트에서 도덕적 이유의 활동에 대한 자각으로서 존경respect).
4.3.9 인간이 자신의 목적을 갖는 것처럼, 동물도 감각적이며 자신의 고유한 목적을 갖고 자신에게 가치를 부여한다. 생명이 가치라고 말하는 것은 거의 동어반복이다. 살아있는 것은 그 정체성의 보존이 정언명령인 것으로, 생명은 도덕성의 한 형태이며 도덕성은 인간적 삶이 갖는 그 형태이다.
4.3.10 우리의 동물적 본성은 인간적, 도덕적 정체성이 의존하는 근본적 형태의 정체성이라는 것으로 보인다. 당신의 동물적 본성을 가치롭게 여기지 못하면, 당신은 아무 것도 가치롭게 여길 수 없다. 동물적 정체성이 만드는 이유와 의무는 단지 사적인 이유가 아니며, 다른 동물들에 대한 이유는 또한 당신에 대한 이유도 되는 것이다. 고통받는 동물을 당신이 동정하는 것은, 이유를 지각하기 때문이다. 즉 동물은 울부짖음으로써 고통을 표현하고, 이는 그 조건을 바꿔야 할 이유를 보여준다. 이 울부짖음은 단순한 소음이 아니며, 다른 동물들도 다른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당신에게 의무를 부여할 수 있다.
4.3.11 이전에 우리는 동물들은 반성적 의식, 즉 자기의식을 갖지 않는다고 했었다. 그럼에도 고통과 이유는 반성적 구조를 공유한다고 할 수 있다. 이유는 충동에 대한 승인이고 고통은 감각에 대한 거부이다. 이러한 이중 구조 또는 자기지시를 가진다는 점에서 고통은 재귀적인recursive 것이다. 고통 속에 있는 동물은 그 조건을 반대하는 것이지만 또한 반대하는 그 조건에 있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고통 속에 있는 것은 고통이다. 이것이 고통이 거의 언제나 나쁜 이유인데, 고통받는 피조물은 그 고통에 반대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 고통이 내생적으로 나쁜 감각이라는 것은 아닌데 어떤 맥락에서는 고통이 환영받기도 하기 때문이다(장례식에서의 애도). 이때 고통이 내생적으로 나쁜 감각이라 생각하도록 하는 충동은 가치가 단순히 의식과 관련된다는 근본적인 오류로부터 나온다. 고통은 단순히 의식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의식과 무관한 외부 세계에서 오는 정보에 대한 것도 아니다. 가령 스너프 무비 등을 우리가 편안하게 볼 수 없는 것은 단순히 그것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기 때문만은 아니고 우리의 고통이 지각하는 악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4.3.12 우리는 식물에게도 의무를 갖는가? 식물은 의식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것 같지 않다. 식물을 존중하지 않는 이는 모든 가치의 토대인 생명에 대한 숭배가 부족함을 보여줄 뿐이지 그가 잘못 되었다고 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
4.3.13 동물과 인간은 서로에게 의무를 갖는가? 개를 길들이는 경우 이는 의무가 아니라 지배 관계 아닌가? 이는 틀린 의견은 아니겠지만 외재적인 기술, 3인칭적 기술이다. 동물 또는 인간의 1인칭에서 압력과 지배는 어떤 규범성의 형태, 형상을 갖는다.
4.3.14 두 동물이 지배를 위해 싸울 때조차 이는 고도로 의례화되며, 의지의 싸움이 된다. 도덕성의 기원에 관해서, 니체와 프로이트는 도덕성과 특수한 인간적 의식성이 우리 종의 진화와 동시에 등장했다고 주장한다. 도덕성은 지배 충동(권력의지, 공격본능)이 출구를 박탈당하고 자아에로 돌아섰을 때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본능을 안으로 향하게 함으로써 그들은 자신을 지배하는 법을 배웠다. 고통, 처벌은 동물이 자신의 정체성에 반역하도록 강제하며 이것이 규범성의 근원이다. 도덕적으로 선한 인간은 자연적 충동을 가질 때조차 죄의식과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이는 자기증오와 허무주의로까지 나아간다. 물론 니체나 프로이트의 계보학적 탐구가 우리가 이전상태로 단순히 회귀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초인). 아마도 반성적 거리가 우리의 동물적 본성을 통제하도록 했던 것처럼, 아마 또한 자기통제에 대한 반성적 거리가 또한 이를 극복하게 해줄 수 있을 것이다.


회의주의와 자살

4.4.1 여기서 이야기한 의무에 대한 설명은 어떤 의미에서 자연주의적이다. 규범성은 어떤 자연적 - 심리학적이고 생물학적인 - 사실에 토대를 두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이는 자연주의적이지 않다. 자연주의적 관점은 규범적 진리를 사실적 진리와 동일화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반성적 승인이 행위를 올바르게 만드는 데에 충분하다는 것이 아닌데, 만약 그렇게 된다면 모든 행위는 올바른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규범적 자연주의의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결코 틀릴 수 없는 그런 류의 규범성이란 없다. 만약 우리가 쾌락, 고통, 반성적 승인 또는 거부를 의식 바깥에서, 3인칭으로 본다면 그것들은 단순히 가치의 사실들일 뿐이지 가치 자체를 인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가치의 사실은 가치 자체가 아니라 단지 사실일 뿐이다. 그러나 이는 삶의 사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가치를 갖도록 하는 자연적 조건이다.
4.4.2 만약 가치가 삶의 사실이라면, 모든 가치에 대한 거부는 삶의 거부의 형태를 갖는다. 따라서 실천적인 규범적 회의주의의 가장 직접적인 형태는 자살이 될 것이다. 물론 모든 자살이 그런 회의주의의 표현은 아니지만, 단지 자신들이 무가치하다고 생각해서, 삶이 아무 의미나 가치가 없다고 저지르는 자살은 문제가 된다. 이때 자살의 부도덕성immorality은 이러저러한 가치의 거부가 아니라 가치 자체에 대한 거부이다. 칸트는 자살하지 않을 의무가 가장 근본적이고 으뜸가는 의무라고 했고, 비트겐슈타인 역시 자살이 허용된다면 모든 것이 허용될 것이라고 쓴 바 있다. 이들은 살아있음이 하나의 가치가 아니라 모든 가치의 조건이라고 보았고, 자살이 특정 가치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가치 자체에 대한 거부라고 보았다. 이 강의에서 내가 주장한 것은 도덕적 의무와 도덕적 가치는 모든 의무와 가치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인간성의 거부는 가치에 대한 거부이며 이는 완전히 실천적인 규범적 회의주의이다. 가치는 오직 우리 삶이 살 가치가 있을 때 존재하며 우리가 하는 일에 의존적인 것이다.
가령 규범적 회의주의자는 자살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무언가를 할 이유를 갖지 않을 것이다. 그는 욕망과 충동을 갖지만, 어떤 것을 할 이유는 갖지 않으며 그가 하는 것은 단지 순간의 욕망을 따르는 것뿐이다. 그는 정언명법도 가언명법도 갖지 않는다. 그는 어떠한 목적도 갖지 않는데, 그의 욕망은 그에게 이유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욕망은 가언명법에 필요한 의미에서 추구해야 할 목적을 규정해주지 않는다. 만약 목적이 지배적인 욕망의 대상이라고 한다면, 당신이 하는 어떤 것도 목적을 추구하는 것이 될 것이며, 당신은 틀릴 수 없게 된다. 결국 실천적 규범적 회의주의는 합리적 행위 같은 것이 없다는 관점이 된다. 우리는 살아가는 한에서, 인간 존재로서 합리적 행위를 해야만 하며, 동물적 행위나 비반성적 행위는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가 아니다.

강의의 결론

1 홉스나 푸펜도르프 같은 주의주의자는 규범성이 입법자의 명령으로부터 규범성이 나온다고 주장한다. 이는 우리와 우리 자신에 대한 관계를 기술한 것일 때 참이다. 즉 사유하는 자아는 행위하는 자아에게 명령한다. 2 네이글 같은 실재론자들은 이유들이 내생적으로 규범적인 존재자라고 주장한다. 이는 사유하는 자아가 우리에게 현전하는 충동들을 평가하고 욕망이 이와 같은 규범적인 이유인지 보다 객관적으로 살펴보도록 하는 행위를 기술한 것일 때 참이다. 3 또한 사유하는 자아와 행위하는 자아의 관계는 입법적 권위의 관계이며, 우리가 자신에게 권위를 갖는만큼 우리는 우리의 법을 만들 수 있고, 이 법은 규범적이다. 이 점에서 칸트의 견해는 옳다. 자율성은 의무의 근원이다. 4 반성적 승인 이론은 다른 층위에서 또한 참이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본성을 승인하지 않고 우리 자신에게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한 아무 것도 규범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반성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우리 가치의 규범성이 우리가 어떤 종류의 동물, 즉 자율적인 도덕적 동물이라는 사실에서 기원한다는 것이다. 5 이는 실재론이 또 다른 층위에서 참이라는 것을 뜻한다. 실재론을 비판하는 존 맥키의 ‘기이함으로부터의 논증’을 상기해보라. 맥키에 따르면 세계가 객관적인 규정성objective prescription을 갖는 가치, 또는 내생적으로 규범적인 존재자를 포함한다는 것은 환상이다. 그러나 맥키는 틀렸고 실재론은 옳다. 그것을 앎으로써 행위에 대한 이유와 동기를 모두 제공하는 존재자는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매우 특이한 존재자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이러한 존재자가 존재하지 않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맥키는 도덕적 실재론을 비판하는 위와 같은 말을 썼을 때 과학적 세계관이라는 방에서 홀로 존재하고 있어야만 했을 것이다.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이 그렇게 하도록 만드는지에 대해 알려주는 존재자를 세계가 포함하고 있다는 것은 인간의 삶의 가장 익숙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람들이고 다른 동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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