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번역의 정치성'이 문제로 부상한다. 언어상에 위계가 존재하기에 번역도 비대칭적이다. 피지배 문화는 헤게모니 문화의 저작을 번역해 수입한다. 역방향의 번역은 좀처럼 이뤄지지 않는다. 미국과 유럽의 저작물은 가치 있는 원본으로 여겨지며, 보편적이라는 외양을 두른다. (...) 

그리하여 '번역의 정치성'에 관한 사고는 번역 논의에 머무르지 않는다. 인간에 관한 문명적 관점에 기댄 인종주의적, 식민주의적 문제를 파헤쳐야 한다. 알파벳으로 된 언어에는 '인간'을 지시하는 용어에 두 가지 계열이 있다. 한 가지는 영어라면 휴먼(human)이나 휴머니티(humanity)의 어원을 이루는 라틴어 후마니타스(humanitas) 계열이고, 다른 하나는 인류학(anthropologie)이라는 학문의 이름에 사용되는 그리스어 안트로포스(anthropos)의 계열이다. 이 두 계열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비대칭적 위계관계가 가로놓여 있으며, 그 비대칭성은 원본과 번역문 그리고 언어 간의 위계와 결합해 근대 지식체계의 골조를 이룬다. 

먼저 인간에 관한 연구는 인류학이라 불리지만, 인간을 총칭하는 경우에는 후마니타스 계열의 용어가 사용된다. 후마니타스는 그 말 자체가 인간을 가리키는 동시에 인간이 지닌 지식을 가리킨다. 인문학(후마니타스)은 인간(후마니타스)을 연구한다. 이때 대상이 되는 인간(후마니타스)은 종족적, 신체적 인간이 아니라 생각하는 인간이다. 즉 인문학(후마니타스)이란 인간(후마니타스) 주체의 자기인식이다. 또 다른 인간 연구인 인류학은 안트로포스를 다룬다. 그런데 서양의 인간은 인류학의 대상으로 포함되는 일이 드물다. 대신 후마니타스(서양인)는 안트로포스(비서양인)을 인식하는 주체가 된다. 인식주체인 생각하는 인간은 후마니타스며, 인식대상인 종족적, 육체적 인간은 안트로포스다.

이런 인간의 위계 도식은 근대지식 체계에 깊이 새겨져 있다. 서양인은 후마니타스로서 보편적 앎의 기준을 소유한다. 유럽과 미국의 지식은 표준으로서 통용된다. 그러나 비서양인은 스스로 앎을 생산하지 못한다. 비서양인의 경험은 서양산 지식의 인증절차를 거쳐야 하며, 비서양의 상황은 서양 이론의 빛으로 조명되어야 비로소 그 의미가 드러난다. 이렇듯 자료 제공과 이론 생산의 역할 분담은 특수자와 보편자의 대립으로 소급된다. 특수자는 경험의 직접성에 매여 있으나, 보편자는 논증적 지식, 추상적 개념을 매개해 자신의 직접성을 초월한다.

인간의 위계 도식은 근대지식 체계의 근간을 형성하지만, 그 이전에 근대성 자체의 동학이기도 하다. 서양의 근대는 근대에 선행하는 전근대를 극복하는 과정이었겠으나, 지정학적으로는 비근대, 더 명확하게는 비서양을 지배해가는 과정이었다. 자주 거론되는 전근대, 근대, 탈근대라는 계열은 연대기적 순서를 가리키는 듯 보이지만, 이 순서는 언제나 지정학적 틀에서 배분되어왔다. 그리하여 공간상의 차이가 시간상의 낙차로 전위되고, 비서양에서 발생한 사건은 서양을 중심으로 하는 인식론적 구도에 의해 그 의미와 위치가 정해진다. 지정학적 차이가 바로 역사적 위치로 번역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번역의 정치성'이라는 각도에서 번역이 수행하는 위계 구도의 재생산을 번역에 관한 문제의식 속으로 들여야 하는 것이다."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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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암사 2014-05-21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바라님 안녕하세요.
다음주 화요일 현암사와 알라딘이 마련한 윤여일 선생님의 강연이있습니다.
시간 되시면 참석해주시기 바랍니다. :)

http://www.aladin.co.kr/events/wevent_book.aspx?pn=20140502_inmunstudy36_2
 


유물론 철학자의 초상


이 사람의 나이는 문제가 아니다. 그는 아주 늙었을 수도 있고 아주 젊었을 수도 있다.

핵심적인 것은 그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는 것, 그리고 어디론가 가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언제나 그는 미국 서부영화에서 그런 것처럼 달리는 기차를 탄다. 자기가 어디서 와서(기원), 어디로 가는지도(목적) 모르면서. 그는 도중에 아주 조그만 어느 역 부근 오지에 내린다.

선술집에 들르고, 맥주, 위스키.

“어디서 온 친구야?”

“멀리서”

“어디로 가나?”

“몰라!”

“아마 일거리가 있을 게야.”

“오케이”

그리고 우리 친구 니코스는 일을 시작한다. 그는 그리스 태생으로,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미국에 이민 온 사람이다. 가진 것 한 푼도 없이.

그는 힘들게 일하고 한 해 뒤엔 그 고장에서 가장 예쁜 처녀와 결혼한다. 돈을 약간 모아 가축을 얼마 산다.

총명한데다가 어린 가축(말, 소)을 고르는 감각(직관, Einsicht)까지 지니고 있어 그는 10년의 각고 끝에 곳곳에 가장 훌륭한 일군의 가축떼를 갖게 된다.

가장 훌륭한 일군의 가축 = 가장 훌륭한 일군의 범주들 및 개념들.

다른 목장주들과의 경쟁, 그러나 평화로운 경쟁. 누구든 그를 가장 훌륭한 목장주로, 그의 범주들과 개념들(그의 가축떼)을 가장 훌륭한 것들로 알아준다.

그의 명성은 서부에, 그리고 온 나라에 퍼진다.

이따금 그는 사람들이 수다떠는 것을 보고 듣기 위해 달리는 기차에 오른다 - 모스크바 길거리에서 고르바초프가 그러듯이 - 하기야 사람들은 현지에서 기차를 탈 수 있다.

다른 누구보다도 인기가 있는 그는 무소속으로 백악관의 주인으로 선출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는 여행을 하며 길거리에 내리는 것을 좋아한다. 우리는 진짜 철학을 바로 이런 식으로 이해한다. 사람들이 머리 속에 지니고 있는, 그리고 항상 갈등적인 이 철학을 말이다.

물론 그는 또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갈등들을 가라앉힐 수도 있다. 단 자기 감정을 잘 제어한다는 것을 절대적인 전제로 해서.

그리고 그는 인도사람들을, 중국사람들을(神), 마키아벨리, 스피노자, 칸트, 헤겔, 키에르케고르, 카바예스, 캉키엠, 뷔유맹, 데리다, 들뢰즈 등을 읽는다.

이렇게 하여 그는 스스로 원한 바 없으나 준 전문적인 유물론 철학자가 된다 - 변증법적 유물론, 곧 이 끔찍한 철학의 철학자가 아니라, 우발성의 유물론의 철학자가.

그리고는 그는 고전적 지혜에. 스피노자의 제3종의 “인식”에, 니체의 초인에, 영원회귀의 지성에 도달한다. : 모든 것이 반복되며 상이한 반복 속에만 존재할 뿐임을 아는 ...... 에

그리하여 그는 위대한 관념론자들과 토론할 수 있게 된다. 그는 그들을 이해할 뿐 아니라 그들 자신에게 그들의 테제들의 논거들을 설명해 준다! 그 밖의 다른 이들[다른 관념론자들]은 때때로 그의 고뇌 속에 들어간다. 뭐라구?

나는 플라톤을 사랑하지만, 그러나 진리를 더 사랑한다! (amicus Palto, magis amica Veritas!) 

  루이 알튀세르, '유물론 철학자의 초상', <철학과 맑스주의 : 우발성의 유물론을 위하여>, 새길,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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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bbb87@gmail.co 2018-10-17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번역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만 한군데 눈에 띠는 틀린 번역이 있어서 이렇게 댓글을 답니다. ˝그리고 그는 인도사람들을, 중국사람들을(神), 마키아벨리, 스피노자, 칸트, 헤겔, 키에르케고르, 카바예스, 캉키엠, 뷔유맹, 데리다, 들뢰즈 등을 읽는다.˝ 이 문장에서 Hindus, Chineses(Zen) 부분을 ‘인도사람들을, 중국사람들을(神)‘이라고 번역하셨는데, 맥락상 ‘인도철학, 중국철학(禪)‘이라고 해야 맞습니다. 우리가 서양철학, 동양철학 이렇게 부르듯이 ‘인도철학, 중국철학‘ 이렇게 언급한 것이기 때문이죠. 또한 ‘(Zen)‘은 신(神)이 아니라 ‘선(禪)‘입니다. ‘명상을 위해 가부좌를 틀고 참선하다.‘ 라고 말할 때의 바로 그 ‘선‘입니다. 영어권에서는 ‘Zen‘이라고 부르더군요. 이상입니다. 다시 한 번 번역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27절

  “자유로운 정신(21절)의 절대적 규정/사명(Bestimmung), 또는 원한다면, 절대적인 충동은, 정신의 자유가 정신에게 대상이 되는 것, 즉 자유가 정신 자체의 이성적 체계가 될 것이라는 의미에서뿐 아니라 이러한 체계가 무매개적인 현실성의 세계(26절)가 되리라는 의미에서 자유를 객관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자유를 그 대상으로 만듦으로써 정신의 목적은 의지가 즉자적으로 있는 것을 이념과 같이 대자적인 것으로 되는 것이다. 의지 이념의 추상적 개념은 자유로운 의지 일반으로, 이는 자유로운 의지를 의지하는 것이다.”

 


  헤겔이 생각하는 정신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유로서 그것의 대상을 다름 아닌 자신에게서 찾는 것이다. 이러한 구체적인 과정은 이어지는 28절에서 그려지며, 정신은 세계와 화해하고 그 자신의 잠재성들을 완전히 발달시킴으로써 이념, 주관과 객관의 통일로서 존재하게 된다. 여기서 자유로운 정신의 사명은 자유를 객관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는 두 가지 의미인데 하나는 자유가 정신의 이성적 체계로 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러한 정신의 이성적 체계가 또한 정신에 의해 매개되지 않은(무매개적인, 직접적인) 현실성의 세계로 또한 체현되는 것이다.  

  해당 대목에 대한 녹스의 역주에 따르면, 여기서 “자유로운 의지가 자유로운 의지를 의지한다”는 의지의 추상적 개념은 칸트의 규정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는 단지 추상적인 동일성일 뿐이며 그에 해당하는 진정한 내용을 결여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헤겔이 보기에 칸트의 윤리학은 이러한 추상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헤겔이 말하는 구체적인 것은 추상적 동일성이 아니라 ‘대립물의 통일’이다. 다시 말해 구체적인 자유는 의지가 단순히 자신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지성을 구현하는 법과 일치하게 되는 것이다. 헤겔이 생각하는 의지의 이념은 주관적인 의지와 이러한 의지에 내용을 부여하는 객관적 제도들의 체계를 종합하는 것이다(Hegel, G. W. F. Hegel's Philosophy of Right, T. M. Know (trans.), 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1967, 317-8쪽).  

 

28절

  “의지의 활동은 주관성과 객관성의 모순을 극복하고 전자의 규정으로부터 후자로 그 목적을 옮겨놓으며 동시에 객관성 속에서도 자기 곁에(bei sich) 머무르는 것이다. 이것은 그 안에서 객관성이 단지 무매개적인 현실성으로 있는 의식의 형식적 방식(8절)을 넘어서는 것으로, 이러한 활동은 이념의 실질적 내용(21절)의 본질적 발달이다. 이 발달에서 개념은 처음에는 자체로 추상적인 이념을 그 체계의 총체성으로 규정한다. 이러한 총체성은 실질적인 것으로, 한갓 주관적인 목적과 그것의 실현이라는 대립과 무관하며 두 가지 형식 모두에서 동일한 것이다.”

 


  헤겔이 보기에 주관성과 객관성의 대립에만 머물러 있으면서 의지를 어느 한쪽으로만 정의하는 것(자의로서의 자유, 본능으로서 또는 직접적인 자유)은 일면적인 것이다. 참된 자유는 오성의 단계에 있어서는 확고부동하게 구별된 채로 머물러 있는 주관성과 객관성의 대립을 변증법적인 방식으로 극복하는 것이다. 의지는 우선 미리 주어진 어떤 내용 없이 자유롭다는 점(자의)에서 볼 때는 주관적인 것이지만 여기에 그칠 경우 그저 일체의 내용을 도외시하는 공허한 주관성에 그칠 뿐이기 때문에, 이러한 주관적인 의지는 객관성 속에서 그 내용을 획득하고 관철해야만 한다. 이를 헤겔은 객관성 속에서도 ‘자기 곁에 머무름’이라고 표현한다.(다른 곳에서 헤겔은 다소 다른 표현을 사용하여 이를 정신 및 자유와 연관시킨다. 그에 따르면 정신은 그의 타자에서 자기 자신과의 동등성을 보존하는, 곧 자기 자신 곁에 있는(das Bei-sich-selbst-Sein)(『정신현상학』 552쪽) 것이다. 타자에서 ‘자기에게 있는’ 것은 인간적인 ‘자기의식’의 참된 존재방식인 자유를 가리킨다. 가토 히사타케 외 엮음, 『헤겔 사전』, 이신철 옮김, 도서출판 b, 2008, 433쪽. Enzyklopädie 199절도 자유를 비슷한 표현으로 정의한다. "In Andern bei sich selbst sein") 여기서 객관성이란 주관성과 완전히 분리되고 주관성에 의해서 전혀 매개되지 않은, 무매개적인 현실성으로서 객관성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헤겔은 주장한다. 무매개적인 직접성이란 타자와 연관되지 않는 단순한 것에 머무르는 탓에 이는 그저 의식의 ‘형식적인’ 방식일 뿐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의지의 활동이 보여주는 이념의 ‘실질적’ 내용의 발달은 처음에는 그저 추상적이던 이념을 ‘체계의 총체성’으로 이끎으로써 그저 주관적이기만 한 목적과 그것의 실현이라는 이항대립을 넘어서는 것이다. 여기서 대립을 극복한다는 것은 주관적 목적(의지의 주관성)과 그 실현(의지의 객관성)을 분리하여 의지를 일면적으로 파악하는 견해를 극복한다는 뜻으로 보인다.  

 

 

29절

  “자유로운 의지의 현존재 일반인 것이 법/권리이다. 이것은 따라서 이념으로서 자유이다.”

 

주해: 칸트의 규정(『윤리형이상학』 서론 1부)이자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규정에서의 요점은 ‘나의 자유 또는 자의를 보편적인 법에 따라서 각자의 자의와 함께 존립할 수 있도록 제한’하는 것이다.(헤겔에게 철학의 대상인 이념이나 절대자는 체계적인 총체성 속에 있다. “자유롭고 참된 사상은 내적으로 구체적이며 따라서 이념이고, 그것의 완전한 보편성에서 보면 이념 자체, 즉 절대자이다. 이에 대한 학문은 본질상 체계를 이룬다. 왜냐하면 참된 것은 구체적인 만큼, 오직 자신 속에서 스스로를 펼쳐가고 한데 통일되어 결합되어 있는 것, 즉 총체성이기 때문”(『철학백과』 서론 14절). 헤겔, 『논리학 서론/철학백과 서론』, 김소영 옮김, 책세상, 2002, 76쪽. ) 이는 한편으로 제한이라는 점에서 부정적인 규정을 포함하며 다른 한편으로 긍정적인 규정인 보편적인 법 또는 소위 ‘이성의 법’은 형식적 동일성과 모순율로 귀착된다. 이러한 정의는 루소 이래로 유명해진 견해를 포함하는데, 이에 따르면 즉자대자적으로 존재하며 이성적이고 참된 정신으로서의 의지가 아니라, 특수한 개인으로서, 자신의 고유한 자의 속에 있는 개별자의 의지가 실질적인 기초를 이루게 된다. 이러한 원리가 채택되면 이성적인 것은 단지 이러한 자유에 대해 제한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며 또한 내재적으로 이성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외적으로, 형식적으로 보편적인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거기에는 사변적인 사상은 전혀 없으며 철학적 개념에 의해 거부당하게 된다. 이 현상은 머리 속에서 그리고 현실 속에서 그것이 기반하는 사상의 천박함에 비견될만 한 끔찍한 현상들을 만들어냈다.    

 


  여기서 헤겔은 즉자대자적인 자유가 현실에 구현된 것을 법/권리라고 부른다. 이는 자유의지가 순전히 현실과 무관한 어떤 개념에 그쳐서는 안 되며 개념과 그것의 실현(현존재)이라는 법의 이념을 철학적 법학의 과제로 삼아야 한다는 1절에서의 요구의 결실이 일단 드러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자유의 이념은 앞서 언급된 주관성과 객관성의 대립을 극복하고 양자가 통일된 것으로서 이념이다. 헤겔은 주해에서 자유에 관한 칸트의 규정에서는 참다운 자유가 아니라 여전히 추상적인 동일성에 머물러 있는 자유, 변덕스럽고 자의적인 자의만이 나타난다고 비판한다.( 앞선 15절에서의 헤겔은 자의가 단지 대자적인 자유, 임의로 이러저러한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 우연적인 의지라고 말한다. “다만 자연적 충동에 의해 규정된 것으로서의 의지와 즉자대자적으로 자유로운 의지 사이의 반성이라는 중간”) 이는 법을 단지 자유를 제한하는 부정적인 것으로 표상할 뿐만 아니라 칸트의 자유 규정이 제시하는 긍정적인 요소인 보편적인 법 또는 ‘이성의 법’은 형식적인 동일성이나 모순율 이상의 것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칸트와 달리 헤겔에게 법은 단순히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자유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또한 칸트가 말하듯 어떤 개인의 자의가 모든 이들의 자의와 공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보편적인’ 규정은 그 구체적인 내용을 제공할 수 없는 공허한 형식주의라는 것이 헤겔의 되풀이되는 요지이다.

  아울러 이러한 칸트의 규정은 실상 루소에게서 온 것이라는 것이 헤겔의 비판인데(녹스는 『사회계약론』 1부 6장(“구성원 각자의 신체와 재산을, 공동의 힘을 다해 지킬 수 있는 결합 형식을 발견하는 것, 그리고 그것으로 저마다 모든 사람과 결합을 맺으며 자기 자신 이외에는 복종하지 않고 전과 다름 없이 자유로울 것”을 가리키는 듯 하다 - 발제자)을 그 전거로 제시한다. Hegel, G. W. F. Hegel's Philosophy of Right, T. M. Know (trans.), 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1967, 318쪽.), 이는 특수한 개인, 사사로운 자의의 의지만을 말할 뿐이지 즉자대자적이거나 이성적이거나 참된 정신의 의지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헤겔은 『법철학』 258절에서 국가의 원리로 ‘의지’를 내세운 것은 루소의 고유한 공적이라고 칭찬하지만, 루소가 의지를 개별의지에서 파악함으로써 보편의지를 의지의 즉자대자적으로 이성적인 것으로 파악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루소 역시 일반의지와 전체의지를 구별했음을 상기해볼 때 이러한 헤겔의 평가는 재고의 여지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루소가 일반의지의 산출을 투표와 다수결에서 이야기했다는 점에서 일반의지를 개별의지들 사이에서 단순히 공통적인 것을 가리킨다고 의심한 것 같다.) 헤겔이 보기에 루소가 말하는 일반의지(그리고 이를 계승하는 칸트의 계약주의적 법 이론)는 특수한 사적 개인들의 자의의 모음일 뿐이므로 우연적이고, 내재적으로 이성적인 것이 아닌 그저 외적이고 형식적인 보편성일 뿐이다. 이는 주관과 객관의 통일을 사유하는 사변적인 사상(칸트에게 사변이 경험에서 획득할 수 없는 것을 대상으로 삼는 것이라면, 헤겔의 사변은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 경험적(직접적) 인식과 오성적 인식 등의 대립되고 구별되는 것들을 통일하여 개별적인 것을 고립시키지 않고 전체와의 연결 속에서 사유하는 것이다. 꼬우즈마 타다시 외, 『헤겔 법철학 입문』, 임혜림 외 옮김, 중원문화, 2008, 48-9쪽. )에 미달하는 것으로, 현실의 권위를 파괴하는 오성의 자유이자 부정적인 자유, 공허한 자유(5절)인 루소적/칸트적인 자유는 현실 속에서 온갖 끔찍한 현상들, 프랑스 혁명기 당시의 공포정치 같은 것을 야기했다.(『정신현상학』에서 헤겔은 프랑스혁명을 ‘절대적 자유와 공포’라는 제목 하에서 논한다. 순수하게 자기 자신과 동등한 일반의지인 절대적 자유, 추상적 자유를 실현하려는 혁명은 부정적인 광란이자 죽음의 공포를 야기했다. “그 죽음은 가장 차갑고 가장 평범한 죽음이며, 양배추의 머리를 잘라낸다든지 물을 한 모금 마신다든지 하는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정신현상학』 436쪽) 가토 히사타케 외 엮음, 『헤겔 사전』, 4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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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하게 설명하면 다비드, 엔소르, 자르는 존재하는 모든 정치체계의 중심부에 있는 배제를 폭로한다. 사회가 정치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그것의 구성원 중 일부가 제명되어야 한다. 대개, 배제된 사람들 사이에는 다수가 포함되어 있다. (...) 좋든 나쁘든 간에 예술에 의해 발견된 가능성들은 정치적 가능성들의 범위를 넘어선 곳에 위치한다. 그러나 내가 암시하고 있는 것은 그들의 미학적 재현들이 사회사상과 정치이론에 의해 심각하게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점인데 (...) 그것들은 민주주의의 영속적인 실패를, 그것이 불가피하게 스스로의 기초적인 원칙들을 타락시키는 방식들을 보여 준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실패는 또한 그것의 끊임없는 쇄신을 위한 자극이다. 우리가 다비드, 엔소르, 자르에게서 배우는 것은 민주주의가 그것의 유토피아 없이는 해낼 수가 없다는 점이다. 바로 모두에 의한, 그리고 모두의 이익을 위한 지배라는 발상이다. 권력이 위로부터가 아닌 아래로부터 행사되는 사회이다. 이 급진적인 민주주의 개념이 과거의 혁명들에 영감을 주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계속해서 오늘날에도 반란의 움직임들을 이끌고 인민주권의 원칙에 새로운 의미와 새로운 추진력을 불어 넣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사회의 중심에서는 드물지만 사회의 어떤 구석이나 주변부에서도 나타날 것이다. 언제 어디서 그것이 출현하든 그것은 자유민주주의의 어휘로는 해석되기 어려운 언어와 요구들로 나타난다. 민주주의가 완전히 사라지거나 더 압제적인 정부 형태에 의해 뿌리 뽑힌 것으로 보일 정도로 민주주의가 정치권력을 건드리지 못하는 긴 시기도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살아남는다고 장담할 수 있다. 지하의 형태로, 맑은 날에 대한 시인의 꿈속에서, 또는 몰래 주먹을 꼭 쥐고 저항의 예술을 수행하는 인민의 머릿속에서 말이다." 

스테판 욘손, <대중의 역사 - 세 번의 혁명 1789, 1889, 1989>, 영어판 후기

















스테판 욘손, 『대중의 역사』 3부 1989 그들은 너무도 사랑했다, 혁명을

 

 

22. 가장 사랑한 것.

  알프레드 자르의 설치미술품 「그들은 너무도 사랑했다, 혁명을」. 혁명은 생방송이 아니고 우리는 그것이 혁명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우리가 그것이 혁명이었는지 아닌지 알게 될 때 우리는 그것을 더 이상 목격할 수 없다. 성공하지 못한 혁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성공하지 못한 혁명은 결코 혁명이 아니며 위반이기 때문.

 

23. 국가의 이면

  조르주 자크 당통: 혁명은 그것의 산물을 집어삼킨다. 혁명의 동력은 대중들이 그들보다 삶에서 더 나은 지위를 가진 모든 이들을 향해 품은 억눌린 격노에서 생겨난다. 혁명은 통제 불가능. 프랑스 혁명 외의 더 많은 경우는 반대로 혁명의 산물이 혁명을 집어삼킨다. 1968년의 민주화 노력은 전 세계적으로 진압되었으나 다양한 분야에서 전통과 관습을 변화시킴. 문화적 민주화나 일부에서는 권력의 이동. 마르쿠제는 정치 참여는 금지하면서 문화적 활동에 있어서는 무제한의 자유를 허용하는 모순적 체계를 억압적 관용이라고 부름.

  자르의 작품은 1968년의 재구성으로, 여기에는 어떤 전체적인 관점도 없으며 무한한 수의 대안적 해석과 조합을 제공한다. 멀리서 볼 때 이 설치미술품은 자연발생적인 것으로 보이나 가까이 다가가 보면 질서 정연한 무질서임. 모든 정치적 대표제는 경직되고 구속되는 경향이 있기에 반란은 계속 될 것. 영구혁명(트로츠키).

 

24. 비어 있는 왕위

  동유럽의 1989년 혁명들은 1871년의 파리코뮌과 마찬가지로 정확한 시각적 재현물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코뮌은 우상 파괴라는 아이콘만을 가지며, 인민에 속했기에 천박한 것으로 여겨졌다(유인원 같은 야만인으로 묘사한 캐리커쳐들). 1871년 혁명은 틀에 넣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1989년의 혁명들은 초상에 더 저항적이었으며 사람들은 다중으로서 행동했다. 이는 스스로를 인민의 얼굴과 목소리로 묘사해왔던 공산국가 특권의 박탈을 암시. Wir sind das Volk. 복수의 주권은 단수를 물리침. 차우셰스쿠에 맞선 한 봉기에서 나타난 구멍이 난 깃발. 국가에서 당을 뿌리 뽑으려는 이 구멍은 통치자의 자리가 비어있을 뿐 아니라 인민에게 새로운 기회가 생겼음을 의미.

  민주주의는 상징들 없이 해나가야 한다(존 애덤스). 그림 같은 상징적 표상은 제한된 수의 인물이나 상류층을 강조해야 하는데 이는 대다수를 틀 밖으로 배제함을 의미하기 때문. 전체주의 국가에서 인민의 지도자는 국민의 무대인 후경에 대해 전경으로 나타난다. 그들 사이에는 어떤 갈등도, 차이도 존재하지 않고 다수는 하나가 된다. 홉스의 리바이어던의 삽화가 드러내는 전제주의적 대표제. 민주주의의 틀을 만드는 것은 정치적 공동체의 한계를 규정하는 것이자 인류를 나누고 분할하는 것.      

 

25. 정치적 폭력

  아렌트: 정치는 말이나 논쟁에서 기원할까? 폭력과 권력을 위한 투쟁에서 기원할까?(『혁명론』). 정치는 공통 관심사에 대해 결정하기 위해 모임이나 협회에 모이는 순간 시작된다. 본질적 문제는 인간의 자연 상태에서 사회적 정치적 질서로의 불가사의한 이행. 정치적인 것은 사회 자체의 최초의 발전에 대한 언급이며 역사상 중대한 국면들, 즉 국가가 만들어지거나 붕괴하는 혁명적 순간들에 관련. 대개 사회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유럽에서 나타난 사회 형태를 의미했으나 사회과학자들은 1989년 이후 민족국가의 해체를 이야기함.

  세계화에 대한 관심과 지정학, 대중심리학 담론과 공명. 지정학의 경우 세계사와 세계체제의 거시적 역학 파악 위한 노력, 오래된 사회공동체, 국가를 해산시키는 경제적이고 문화적인 과정들에 관심. 반면 대중심리학은 17,8세기 철학자들처럼 사람들을 통합하는 정념에 관심(들뢰즈/가타리, 누스바움, 공동체주의자들). ‘정념이 우리 개개인에게서 생길 때 우리 안에서부터 사회가 솟아난다’(세르주 모스코비치). 사회의 기반은 정념과 욕구들. 19세기 대중심리학자들은 정념이 파국을 초래하지 않게 이를 가공, 보강, 정제할 강력한 지도자를 요구. ‘지도자: 대중 = 화가: 페인트’(괴벨스). 대중심리학의 강적은 결국 민주주의이며 대중에 대한 르봉의 관점의 결론은 다수 사람들이 정치 과정 바깥에 남겨져야 한다는 것. 1989년 벨벳혁명 이후 민주주의의 심각한 불확실성과 더불어 제기된 이론적 논의들의 세 쟁점 1) 주권은 어디에 속하는가 2) 어떤 대중운동과 제도를 통해 인민이 사회를 지배하는 권력을 되찾을까 3) 인민, 데모스는 무엇인가. 자르의 작품에서 경찰과 군대는 시위자들과 투쟁한다. 이는 아렌트의 불편한 문제, 즉 폭력과 이를 통해 경계를 수립하고 민주주의를 달성할 수 있느냐라는 질문을 상기시킨다.

 

26. 도금된 못들로

 1990년대 중반 자르의 르완다 학살 관련 프로젝트(그림 참조): 르완다 인민의 ‘인공적’ 익명성. 「그들은 너무도 사랑했다, 혁명을」의 영화적 구조(스틸 사진을 영화 시퀀스로 편집). 틀이 유발하는 현실 효과. 자르의 목표는 현실에 대한 우리의 지각이 현실이 어떻게 시각적으로 묘사되는가에 달려있다는 점, 예술에 대한 우리의 지각이 현실의 어떤 부분이 시각적 재현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가에 달려 있다는 점을 보이려 함. 결정적인 요인은 틀로서, 형상과 틀 사이의 관계는 포함의 관계가 아니라 배제의 관계이다. 형상은 틀 바깥에 넣어진다. 자르의 예술에서 우리는 틀 안에 넣어진 모티프가 아닌 모티프 안에 넣어진 틀을 본다. 세상을 부분들로 나누는 틀은 때로 시야를 완전히 차단하거나 이미지 전체를 가린다. 사회의 틀들을 초월하려는 욕망, 관객을 틀들 자체로 향하게 하기. 사실에 대한 욕망이자 정치적 욕망, 민주주의를 향한 욕망.

  데리다 『회화에서의 진리』: 틀은 그 자체로는 무의미하며 틀의 유일한 기능은 의미를 안정시키고 현상들과 지각들을 의미가 주어진 것과 주어지지 않은 것으로 나누는 것. 틀은 의미 있는 것과 의미 없는 것 사이의 경계를 세운다. 정치적인 문제와 미학적 문제의 공통점 – 우리는 어떻게 인간을 재현할까? 틀은 세계가 시각적으로 재현되는 방식들뿐 아니라 인간이 정치적으로 대표되는 방식들의 한계를 규정. 틀의 바깥에 있는 것은 대표되지 못하는 것이고 우리에게 무의미하게 나타난다.

 

27. 인간과 짐승의

  1989년 이후 우리 시대 모든 주요한 문제들은 경계들을 중심으로 전개(영토, 문명, 종교, 문화적, 민족적, 성적 경계들). 경계들은 도처에 존재하며 이는 결국 정체성이 존재하기에 생겨난다(발리바르 『대중들의 공포』). 인간과 짐승 사이의 단순한 구별. 경계는 폭력의 현장이며 경멸과 잔인함을 유발. 시민이 되거나 국적이 없을 수 있으나 경계가 되는 것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다(앙드레 그린). 우리 시대 최악의 충돌 중 다수가 경계에 있는 사람들의 수가 증가하는 것에서 유발된다. 발리바르의 질문은 알튀세르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개인들을 사회로 묶어주는 것은 이데올로기. 이데올로기는 정체성을 부여하며 개인은 이를 제약으로서가 아니라 그/녀의 존재의 본질의 실현으로서 이해. 동일시의 과정과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적 장치들. 현실에 대해 미디어는 ‘우리’와 ‘그들’의 경계를 공식화하는 경향이 있고, 미디어의 이미지를 한정하는 틀은 정치공동체가 자신의 틀을 만드는 방식을 강화하는 경향이 있다. 예술과 미디어의 제도들이 정치적 경제적 체제와 밀접히 일치한다는 사실.

 

28. 무법자들

  19세기 프랑스 부르주아지가 대중들에 대해 말했을 때 훗날 사회학자들이 네 개의 범주로 분류할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1) 범죄적이고 위험한 하층계급 2) 거주 증명서가 없는 부랑자와 노숙인 3) 가난한 사람들과 문맹들 4) 조직화된 공장 노동자와 장인들(정치적 투사). 인구 중에 이런 부류들을 배제하지 않았던 사회가 여태껏 존재한 적이 있는가? 이 네 범주는 4인조, 즉 노상강도, 낯선 사람, 거지, 폭도에 해당하는데 이들을 폴리스의 구성원으로 간주하고 싶어 할 사회를 상상하기 어려움. 그러나 보편적 민주주의의 가능성이란 그런 사회의 가능성 아닌가? 이 네 집단들이 배제되는 한 민주주의는 기껏해야 가능성으로, 최악의 경우에는 거짓말로 남을 것. 자르의 작품은 이 야만적인 네 집단을 다룬다. 틀 내부에 위치한 제재가 아니라 제재 내부에 위치한 틀. 「네 번의 응우옌」

 

29. 자기 면역

  난민을 우리 사회의 지표로 택하자(조르주 아감벤). 민주주의와 전체주의는 정반대의 것이 아니며 양자 모두 국가 권력을 중앙집권화된 것으로, 원론적으로 절대적인 것으로 이해, 즉 주권의 본질에 대한 동일한 관념 공유. 통치자에게 최후의 수단이 되는 특별한 도구로서 비상사태는 통치자에게 법의 바깥에서 행동할 수 있는 법적 권리 부여. 왜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를 말살하고 시민들에게서 그 권리를 빼앗을 수 있는 권위의 형태 없이 견뎌낼 수 없었을까? 이는 아감벤의 가장 중요한 질문으로서 아렌트, 푸코 등에게 부분적으로 물려받은 것. 조에/비오스의 구분에서부터, 곧 처음부터 정치의 영역은 여성, 하인, 생식, 노동의 영역과 구별되었음. 민주주의의 출현으로 다수는 권력에 접근할 수 있었으나 대표자들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삶정치. 정치의 목적은 인민의 몸의 관리와 훈육, 착취. 인구는 등급이 매겨지고 고정된 배역을 맡게 되는 정치적 계획 과정에 종속되며 나머지는 병자, 범죄자, 외국인 등으로 거부됨. 통치권과 자연의 무기력한 삶 사이의 양극화가 재발. 인민의 두 개념. 대문자로서 인민(구성권력이고 주권자이며 민주주의적 이상인)과 소문자로서 인민(빈자, 노동계급, 여성, 아이들, 농민, 실업자 등). 인민 개념의 모호함이 정치학의 기원들에 뿌리두고 있으며 서양 정치사를 가로지르는 충돌을 압축(비오스/조에, 정치적 삶/자연적 삶). 민주주의는 항상 그 자체와 충돌. 민주주의는 틀에 넣어져야 하고 포함되어야 한다.

  민주주의는 자기면역적(데리다). ex) 1992년 알제리의 선거 사례. 민주주의는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를 위반. 모든 민주주의 사회는 경계를 필요로 함. 오늘날에도 여전히 외국인들, 발전도상국의 대부분의 인구, 18세 이하의 사람들이 경계 바깥에 있음. 데리다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 동물, 식물도 포함. 민주주의 경계들은 자의적으로 어떤 이론도 특정 존재가 다른 이를 대신하여 결정내리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임을 입증할 수 없음. 왜 민주주의는 스스로를 이렇게 제한하는가? 자유와 평등이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보이는 반면 박애는 지금까지 민주주의가 오직 형제들과 동등한 사람들 사이에, 동일한 성별과 가족, 국가 정체성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존재해 왔다는 사실을 증명. 대중들의 힘은 우리가 외국인을 만나는 즉시 경계들에서 멈춘다. 대중들의 힘은 사회의 더 나쁜, 일탈적인 집단이 권리를 박탈당한다는 조건으로만 나타난다. 사회가 민족국가에 더 이상 일치하지 않는 오늘날의 세계화된 사회에서 경계의 정당화는 불가능하며 유일하게 진정한 민주주의는 경계가 없는 민주주의뿐이다.            

 

30. 성인들

  『호모 사케르』. 대부분의 초기 법률체계는 호모 사케르에 상응하는 법외 추방자를 두고 있다. 더 이상 법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범죄자는 늑대로 간주되고 숲 속의 늑대의 삶으로 추방되어야 한다고 규정한 고대 스칸디나비아어 법률과 호모사케르의 관련성. 근대국가들과 나치당 독일 사이의 차이는 오직 정도의 문제이며 강제수용소는 근대국가의 삶정치의 정수. 인권의 실행만큼 민주주의의 실패가 명백한 곳은 없다. 인권은 오직 시민인 사람들에게만 적용된다. 민주주의는 인민이 권력을 대표자들에게 위임한 후 위로부터 권력을 행사하는 과정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나오는 권력을 촉발시키는 것으로 삶의 과정, 자연적 삶과 동일. ‘잠재력’과 도래하는 공동체. 그들은 스스로 권력을 쥐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파괴하고 스스로 권력을 행사. 1989년 텐안먼 광장의 사례. 당시 시위자들의 요구는 매우 모호. 목적 없이, 공동의 목표나 미래상 없이 공동체를 설립하고 사회질서를 공격함이 아니라 소극적으로 무시하고 공동체의 경계들을 넘어섬으로써 사회와 단절. 그러한 시도들은 보통 동일한 방식으로 끝난다. 탱크와 경찰이 들어오면 인민은 굴복한다.

 

31. 불만들

  1789년 프랑스 혁명 당시 제출한 4만 개 이상의 불만 목록. 프랑스 혁명에 대한 가장 간단한 해석은 절대군주제가 이러한 불평으로 대변되는 고통과 분노에 의해 붕괴되었다는 것. 오늘날의 세계는 이와 얼마나 다른가? 하트, 네그리의 『다중』. 누가 다수를 대변하는가? 대의 민주주의는 최적의 모델이 아니며 근대는 민주주의의 계속 진행되는 이야기의 짧은 장에 불과함. 민주주의는 사회운동의 원동력을 통해 발전하며 결코 완성품이 아닌 진행 중인 작업. ‘민주주의는 역사가 없으며, 역사 그 자체이다’(로장발롱). 현재 민주주의 이론의 많은 근본 개념이 모호해짐. 하트, 네그리는 인민이 고리타분한 개념이라고 하면서 다중은 열려 있고, 가지각색이며, 무한하며 무리이고 네트워크라고 주장한다. 현재 위험에 빠진 것은 공통적인 것(의사소통, 경험, 상상력, 생활양식, 관계, 돌봄 등)이며 경제적 생산은 사회적 생산으로 변형된다. 공통적인 것을 방어하는 정치적 주체와 인민의 봉기, 중앙집권화된 권력이 없는 상호 연결된 집단들의 수평적 네트워크로 존속되는 새로운 유형의 민주주의적 실험.

  그러나 다중도 포착이 어려움. 아감벤, 데리다, 발리바르, 로장발롱, 하트/네그리가 촉진시키는 발상은 현실의 남녀가 일정상황 하에서 인민 또는 다중으로 결합하고 융합할 수 있다는 것, 이러한 주체가 정치적 원칙과 민주주의를 구현한다는 것, 이것이 혁명이라 불리는 한정된 역사적 사건들로 나타난다. 보수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은 이를 거부하지만, 근대 사회과학 및 역사는 대중의 권력의 갑작스러운 등장을 이해하기 위한 목적에서 처음 생겨났다. 개인들의 의지의 집합은 아무리 상세히 열거해도 왜 보통 사람들이 수천 명을 이루어 거리로 나오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32. 야만인들의 앙금

  68년 파리 낭테르 대학을 점거했던 142명 중 하나였던 다니엘 콩 방디가 그 이후 동지들을 인터뷰한 결과물인 티비 시리즈이자 책인 『우리는 너무도 사랑했다. 혁명을』. 1968년에 대한 완전히 모순된 그림들과 당시 사람들이 가졌던 환상적이고 유토피아적인 이상주의를 부활시키려는 것이 알프레도 자르의 설치미술품. 68년 당시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붕괴시키려는 혁명적 노력은 실패했지만 이는 민주주의의 성공적인 확장으로 이어짐. 민주주의는 더 이상 모든 정치를 위한 미리 주어진 토대나 헌법의 틀이 아니라 도달불가능한 것이긴 하지만 정치의 필수적인 목표로 보인다. 민주주의는 끊임없는 충돌의 역사를 가지며 혁명은 예측할 수 없는 것.

 

33. 출발

  랑시에르의 여행기 『인민의 땅으로의 짧은 여행』. 모든 근대 정치이론은 인민이 실재하는 무언가이고 사회의 토대라고 간주하지만 이는 규정이 어려운 불가사의한 것. 우리는 결코 인민 자체에 대해서는 어떤 것도 알 수 없다. 인민의 이름으로 말하는, 인민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또 하나의 대표제를 만들어낼 뿐(알튀세르와의 결별). 혁명과 반란이라는 대조를 분리시키기. 반란이라 할지라도 혁명이 항상 자발성의 요소를 갖듯이 엄격한 논리를 따른다. 『논리적 반란』. 반란은 옳다, 조반유리의 삼단논법: 모든 사람들은 정의를 가치 있게 생각한다. 사회는 불공평하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사회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다.

  『프롤레타리아의 밤-노동자의 꿈들의 기록』이 보여주는 1830년 파리 노동자들의 생활은 사회주의 사상의 계급의식, 세계관 등에 맞지 않는다. 이 노동자들의 특징은 평등에 대한 요구. 부르주아적 삶에서 좋은 것들에 대한 욕망, 요컨대 그들은 노동자인 상태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 그들을 봉기하게끔 하는 것은 자신을 억압된 노동계급으로 바라보는 그들의 의식이 아니라 그들이 접근하는 것이 차단된 또 다른, 더 나은 세계, 즉 부르주아지 세계와의 매일의 조우. 가장 순수한 형태의 민주주의는 모순과 부정으로서만, 인민을 대표하는 사람들에 저항하는 인민의 능력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엄밀히 말해 인민의 목소리는 존재하지 않으며 인민은 항상 그들의 대변인의 방언과 겨룬다. 더 이상 대리인들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인민의 땅이 발견된다. 진정한 평등은 순식간에 모습을 드러내며 이는 인정된 계급과 정체성을 파괴한다는 점에서 불미스럽고 위험. 『역사의 이름들』과 질 미슐레: 인민은 정의의 게임에서 항상 비장의 카드를 가진 어릿광대나 영웅의 방식으로 나타나며 가장 예측할 수 없는 세력. 사회의 가장 깊은 토대 즉 인민의 본능적인 정의감, 대중들의 영감, 순진한 양심의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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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를 인식하는 <성숙의 시기jam maturis annis>(󰡔철학원리󰡕 1부 72항)는 정신이 과거로부터 꾸준히 탈출하는 성장의 시대 뒤에 온다. 그러나 성장은 아무렇게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정신은 자신에 걸맞은 방식으로 스스로를 계도하고 훈련시켜야 한다. 이 계도와 훈련은 방법의 규칙들을 따라야 한다. 방법론은 성장하고 있는 정신이 따라야 하는 진리 인식의 길이다. 여기서 데카르트의 방법론은 정신의 존재론적 조건에 대한 반성과 이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데카르트는 보편수리학을 제안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나는 나의 부족함을 뼈저리게 깨달아서at ego, tenuitas meae conscius 진리의 탐구에서 꾸준히 어떤 순서를 따르기로 결심했다.> 그 순서를 따를 때, 정신은 <항상 제일 단순하고 제일 쉬운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AT Ⅹ, 378-9).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데카르트는 󰡔성찰󰡕에서 사물의 순서를 따르지 않고 사유의 순서를 따랐다. 그리고 이 사유의 순서는 <쉬운 것에서 어려운 것으로a facilioribus ad difficiliora>라는 간단한 말로 설명되기도 한다. 이는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적 탐구가 방법론적 격률을 따르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쉬운 것에서 어려운 것으로>라는 이 격률은 위의 인용문이 말하고 있듯이 정신의 취약성에 대한 반성에서 연유한다.

인간이 <신적인 구석>을 가지고 있는 한에서 학문은 진리의 자연스러운 가지틀기이고 열매맺음이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인 한에서, 또는 원죄의 무게를 아직 감당하고 있는 한에서, 학문은 인간 나름의 순서에 따라, 정신의 방법적 수고에 의하여 하나하나 그려가야 할 점묘화이다.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한 번의 붓질로 그림을 완성할 수 없다.” 김상환, 「스으라의 점묘화: 김수영 시에서 데카르트의 백색 존재론으로」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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