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하다가 한 4~5년 묵은 듯한 종이에 적힌 메모를 발견해서 옮겨봄.

음... 나에게도 이랬던 시절이 있었구나 싶다.

 

 

 

"탐색, 중심으로의 길을 선택한 사람은 가족과 사회 안에서의 그의 위치, 즉 '둥지'를 포기하고 최고의 진리를 향한 '보행'에 전적으로 몸을 바쳐야 한다."

미르치아 엘리아데, <성과 속>, 이은봉 옮김, 한길사, 1998,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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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n van Hooft, Understanding Virtue Ethics, 2006, Acumen Publishing Limited, p.83~108의 요약문

 


스토아학파에서 레비나스까지 덕의 약사略史


개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서구의 도덕 사상의 역사는 의무 개념을 위한 덕 개념의 점차적인 축소로 특징지어진다. 사람들에게 덕은 단순히 자신의 의무를 다하기 위한 수단 정도로 여겨졌고, 이와 같은 현상은 플라톤에게서 유래한 두 가지 주된 관념의 영향 하에서 일어났다. 즉 우리는 초월적 실재의 지도 아래에 살아야 하며, 이성을 통해서 이러한 실재를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플라톤에게서 좋음이나 정의는 단순한 개념인 것이 아니라 실재이다. 우리가 세속적이고 오류가능하며 유한한 실존 속에 갇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사유는 신적인 이상의 영역에 도달할 수 있다. 이러한 세계관은 종교적 전통뿐 아니라 스토아학파로부터 시작되는 많은 철학자들의 저작을 통해 전해져 내려온다.

스토아학파는 인간은 자연의 영원한 질서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욕망과 감정을 억누르고 이성에 의해 지도되는 것, 평정을 받아들이고 정념을 지배하는 것이 바로 자연의 질서에 맞추어 살 수 있는 방법이다. 이어서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의 기독교 신학의 경우 초월적 실재라는 애매한 개념은 신이라는 보다 특정한 의미를 부여받는다. 신은 히브리 전통에서 도덕법의 새로운 규범성을 주는 것으로 가정된다. 우리의 의무는 신의 의지 또는 섭리로서의 우주적 질서에 따르는 것이다. 이러한 전통에서 인간의 탁월성은 그의 세속적 욕망을 억누르고 신 또는 자연이 부여한 법칙에 따르는 것이 되며, 이는 칸트에게서 절정에 달하게 된다.

만약 덕 윤리가 다시 부활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적한 두 가지를 다시 확립할 필요가 있다. 첫째로 우리는 어떤 초자연적인 정당화나 규범에 호소할 필요없이 이 세계 속에서 우리의 탁월성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 두 번째로 감정은 이성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서구 윤리학사에서 보다 중요하게 떠오르는 주제는 타인과의 관계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개인이 공동체에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했으며, 각자의 것을 각자에게 준다는 의미에서 정의라는 덕을 강조했다. 그의 우정에 대한 분석은 또한 이러한 사회성에 대한 강조를 보여준다. 다른 한편 덕스럽게 된다는 것의 요점은 개인의 행복을 달성하는 것에 있으며, 이는 푸코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기에의 배려’이다. 이하에서 우리는 덕 윤리를 흄, 니체, 레비나스의 사례를 통해 살펴볼 것이다.


데이비드 흄

아퀴나스의 종교적 세계관과는 달리 우상파괴적인 세속주의자로서의 흄은 우리의 지식은 직접적인 경험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우리가 직접적인 감각 경험을 가질 수 없는 신이나 영혼과 같은 형이상학적 요청들은 의문시되어야 한다. 만약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예컨대 인간 욕망과 경향에 대한 어떤 지식을 얻게 된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우리가 어떻게 행해야 하는가를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즉 흄이 주장하는 바는, 존재is에 대한 진술에서 당위ought에 대한 진술을 연역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흄은 또한 욕망과 감정을 지배하는 것으로 상정된 전통적 도덕 심리학도 의문에 부친다. 이성은 단순히 논리적으로 사유하는 능력에 불과하며 이성 자체로는 어떤 규범이나 당위적 진술을 정초할 수 없다. 흄의 기본적인 통찰은 이성은 정념이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 쓰이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도덕규범의 기초는 이성이 아니라 타인들에 대한 염려의 감정이 된다. 흄은 이를 동정, 애정, 인간적 감정 등으로 부른다. 덕스러운 사람은 바로 동정과 타인에 대한 염려의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다. 만약 도덕지식이 형이상학적 요청이 아닌 경험에 기반을 두어야한다면, 도덕성이란 객관적인 토대라기보다는 주관적인 토대, 우리의 도덕감을 토대로 갖는다. 그러나 악한 사람이 악한 행동에 대해 승인의 감정을 가질 수도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일반적인 행복이나 유용성을 가져오는 행동을 승인해야한다. 물론 이를 판단하는 것은 순수이성의 문제가 아니며, 이러한 승인은 우리의 타인에 대한 동정심, 돌봄의 감정으로부터 온다. 흄은 도덕지식을 설립하는 도덕감을 가장 주된 덕으로 보았고, 여러 덕 가운데에서도 특히 타인에 대한 동정심에 주목했다. 흄의 도덕성에 대한 주관주의적 설명은 감정을 우리 삶에 중요한 부분으로 복귀시켰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갖는다. 그는 대부분의 인간 존재가 본질적으로 서로에 대한 선의의 감정을 갖으며, 도덕성이란 이러한 감정의 체계적인 표현이라고 보았다. 이것은 철저히 세속적인 현상으로 덕과 도덕을 보는 관점으로, 선이나 신의 계율, 자연의 이성적 질서를 분별하기 위한 우리의 순수이성에 의거하는 관점과 구분된다. 덕은 도덕법칙에 복종하는 것보다는 우리의 인간적 감정과 조화를 이루며 사는 것에 존재한다.


프리드리히 니체

흄의 인간관이 낙관적인 것이었다면 니체의 인간관은 상대적으로 비관적이다. 그는 인간 존재를 움직이는 기본적인 동기는 ‘힘에의 의지’라고 주장한다. 이는 자기-주장self-assertion과 경쟁성에 대한 충동 또는 본능이다.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은 단순히 생존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그것을 뛰어넘기를, 지배하고 세계를 전유하고자한다. 노력과 극복과는 반대로 복종이나 겸손의 형태를 띤 어떤 것도 자연에 반하는 것일 뿐이다. 힘에의 의지는 타인들과 사물들을 지배하고자 하는 노력이며, 가장 깊고 근본적인 의지는 자신을 타인과는 분리된, 더 우월한 것으로 단언하는 것이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학파, 기독교의 거대 이론은 우리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고안된 (허구적) 이야기일 뿐이라고 니체는 말한다. 실제로 이 세계는 끔찍한 곳이고 이 모든 비참한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인간은 그러한 이야기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해석학적 개념을 선취하면서, 니체는 이와 같은 믿음은 그저 진리에 기반을 두지 않으며 증명될 수 없는 위안, 단지 우리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만큼만 가치를 갖는 것에 거짓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니체 이전의 많은 견해들이 우리의 세속적 삶에 대한 분노를 표현했고 이상화되고 완벽한 초자연적 영역을 위해 이 세계를 거부하라고 가르쳤다. 반면 니체는 많은 결점을 가진 것으로서 인간성 개념을 받아들이면서도 동시에 이 대지 위에 뿌리내린 우리의 실존을 긍정한다.

우리는 바로 우리 자신이 되어야 하고 우리의 잠재력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힘에의 의지로서 우리를 표현해야 한다. 그런데 경쟁적이고 공격적이며 자기-주장적인 이 표현이 도덕성과 잘 조화될 수 있는가? 니체는 도덕을 두 가지 양식, 주인 도덕과 노예 도덕으로 구분한다. 먼저 주인도덕은 고유한 힘에의 의지를 표현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전사, 지배자, 귀족과 같은 존재의 도덕이다. 그들은 자신의 힘과 탁월성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며, 고유한 자기조절과 자기형성을 행한다. 반면 노예 도덕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약하고 비참하며 자신을 방어할 능력이 없는 자들로서, 자신만만하고 강력한 자들을 증오한다. 그들은 강한 자들을 악한 것으로 부르면서 다수 속에서 안락을 찾으려한다. 이처럼 증오, 공포, 분노를 통해 무리 근성herd mentality이 만들어진다. 그런데 기독교에서 약함과 겸손을 축복하는 신이라는 관념은 너무나 성공적인 나머지 주인도덕을 가진 이들마저도 감화시키고 말았다. 그들은 이제 자신의 힘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게 되고, 종국에는 노예적 정신성이 서구 문화를 지배하게 되었다. 노예도덕은 겉으로는 겸손한 척 하면서 복종과 약함에 대한 찬양을 늘어놓지만, 실제로는 주인을 지배하는 부정직한 것이다. 의무와 복종을 강조하는 도덕의 개념도 부분적으로는 이처럼 부정직한 것이다.

또한 니체는 힘에의 의지와 더불어 ‘자유정신’을 옹호한다. 이는 근대 유럽인들의 정신적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것으로, ‘극복하는 인간’ 또는 초인übermensh의 유형이다. 이러한 귀족적 인물은 그들의 삶 자체를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만들기 위해 힘에의 의지를 발휘한다. 이어서 니체는 『즐거운 지식』에서 일종의 영원회귀의 윤리를 도입한다. 만약 당신의 삶이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채로 영원히 반복되어야 한다고 상상해보라. 이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당신의 세계 속에서의 실존과 그대로의 삶을 수용할 수 있다면, 다시 말해 운명애amor fati를 가질 수 있다면 당신은 바로 자유정신일 것이다. 이러한 윤리는 어떠한 사후의 초월적인 보상이나 낙관적 인간관과 형이상학이 주는 거짓 위로를 받아들이지 않는 정직성, 진정성authenticity, 운명애를 덕성으로 갖는다. 그런데 이러한 관점은 타인과의 덕스러운 관계와 어떻게 조화될 수 있을까?

이를 위해 우리는 성품의 개념을 검토해야 한다. 20세기의 많은 대륙 철학자들이 바로 존재의 근원적 양식primodial mode of being에 대해 말하면서 이것이 윤리학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지 검토해왔다. 가령 사물의 존재양식에서 가장 근본적인 특성은 그것이 시공간을 차지하며 사건의 인과연쇄에 속해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니체가 보기에 우리는 능동적이며 우리 자신을 표현하고자 하는 순수한 역동이고, 끊임없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만들어나가는 창조적인 자기-형성이다. 이와 같은 자기-투사에 대한 강조는 니체와 실존주의 전통에서도 중심적인 문제인데, 이는 타자와의 관계라는 문제를 미제로 남겨둔다. 나의 세계 속에서 타자의 현존은 그 자체로 문제로 나타나는데, 사르트르는 이 점을 특히 명료화시켰다. 예컨대 조용한 공원 구석에서 쉬고 있는 나는 타인이 이 공간에 침입함으로써 자신이 차지하고 있던 세계의 중심으로부터 떨어져 나오게 된다. 사르트르는 이처럼 세계의 점유, 사적인 공간의 보존을 두고 다투는 것이 타자와 관계하는 우리의 근원적 형식이라고 보았다. 사르트르는 또한 열쇠구멍을 통해서 누군가의 응시를 느끼는 경우를 분석하는데, 타인은 나의 진정성에 위협이 되기에 사르트르의 유명한 표현에 따르면 “타자는 지옥이다.” 이러한 사르트르의 관점은 타자와의 관계를 포용하는 윤리 이론의 정립을 매우 어렵게 한다. 니체적 전통과 사르트르를 비롯한 실존주의 전통은 자기-주장에 강조점을 둠으로써 타자와의 근원적 관계에 있어 실증적인 개념을 제공하지 못한다.


엠마뉴엘 레비나스

레비나스는 규정prescription의 집합체로서의 윤리학을 제공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성품에 있어서 근원적으로 윤리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인간 실존에 대한 철학적 이해를 제공한다. 레비나스가 보기에 사르트르의 윤리학은 타자의 얼굴에 대해서까지 확장되지 못했다. 예컨대 우리는 우리가 지각하고 인식하는 것에 대해 인지적인 방식으로 일종의 소유를 갖고 있다. 즉 우리는 이전에 알지 못했던 것을 자신에게 친숙한 부분으로 동화시키는 방식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인지의 과정은 개념과 범주를 낯선 세계에 부과함으로써 당신의 것으로 전유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저녁을 함께하는 당신의 친구의 경우, 당신은 그를 여타의 사물들처럼 동화할 수 없다.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 특히 타자의 눈앞에서 이러한 동화는 일어날 수 없다고 한다. 타자의 얼굴은 하나의 신비이고 인지적 범주로 포착될 수 없다는 의미에서 무한한 것이다. 이는 자아와 진정성에 대한 위협이 아니라 어떤 놀라운 것으로의 열림으로 나타난다. 타자라는 신비로의 열림, 그리고 이 타자의 현전은 당신의 존재 양식을 변환시키며, 이러한 타자에 대한 공경과 놀람이라는 행위나 자세는 자체로 윤리적인 성질을 갖는다. 가령 자동자판기에서 기차표를 사는 경우와 매표소에 앉아있는 어떤 사람에게 기차표를 사는 경우 이 둘은 질적인 차이를 갖는데, 매표인의 현존은 가령 인사말과 같은 예의바르고 기쁜 응답을 이끌어낸다. 레비나스의 요점은 우리의 근원적인 윤리적 존재양식이 이미 사회적 존재로서의 실존을 기초로 갖는다는 것이며, 때로 이것이 나쁜 교육으로 인해 왜곡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존재로서의 윤리적 존재양식은 우리의 실존에 있어서 가장 기초적이며 제거불가능한 측면이며 이는 대화의 상황에서 잘 드러난다. 우리는 정보를 교환하기 위해서도 대화하지만, 동시에 서로에게 아무런 실용적인 쓰임이나 이익이 없는 방식, 타인들과의 관계를 만들고 유지하고 심화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대화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대화는 말하는 자와 듣는 자라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자기-투사를 강조하는 니체-실존주의의 전통은 말하는 자만이 있을 뿐 듣는 자가 없다. 그러나 대화가 우리 삶에 근본적인 것이라면 우리의 존재양식은 타자에게 귀기울임으로써 존경과 열려있음을 포함하고 있다.

의무 윤리가 주장하는 이성적 사고가 전제하는 탈-개체화dis-individuate(보편화)에 대해 레비나스는 대화 속에서 우리는 결코 탈-개체화될 수 없다고 본다. 한편 니체-실존주의 전통이 개인 주체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 반면, 레비나스는 우리는 타자에 의해 윤리적으로 존재하도록 호출되는addressed 존재이며, 이는 나I 자신을 단언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에 의한 당신you이라는 부름에 응답하는 것이다. 나는 나이기 이전에 당신이다. 나는 나의 자아로서의 실존을 타인에게 빚지고 있다. 이러한 윤리는 어떤 명령이나 규칙에 복종하거나 내 성격의 표현을 행위 속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단지 타인의 부름에 응답하고 그것에 책임responsibility을 가짐으로써 구성된다. 나는 항상 이미 타자의 부름과 호소에 응답하는 존재로서, 이러한 응답/책임성은 의사소통하고 사회적인 자로서 인간이 지닌 가장 근본적인 존재양식 중 하나이다. 레비나스는 이처럼 감정이 단순히 인간들이 우연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존재의 가장 근본적인 구조를 이룬다고 주장함으로써 흄의 이론을 심화시킨다. 또한 니체의 주장이 바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라면, 레비나스는 이러한 과업은 바로 타자에 대한 책임을 함축한다고 말한다.


요약 및 결론

윤리는 초월적인 것이 아니라 이 세계의 문제이며 감정은 우리의 윤리적 삶에 있어서 이성보다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타자와의 관계는 도덕규범이나 원리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제까지 살펴본바 덕스럽게 됨은 두 가지 방향을 갖는다. 아리스토텔레스, 아퀴나스, 니체 등이 자기-투사와 자기 형성을 강조했다면, 흄이나 레비나스는 타자를 돌봄caring-about-others을 강조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덕스럽게 됨의 목표가 우리 자신의 행복eudaimoniã을 달성하기 위한 것뿐만 아니라 타인들을 염려하는 사회적이고 상호인격적인 존재가 되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 도덕성은 자기-투사와 타자에 대한 근원적인 염려라는 내재적인 형식을 갖는다. 덕은 단순히 타자에 의해 요구받는 성품의 집합만이 아니라, 우리가 타자의 부름에 응답하는 일을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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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베르그손,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에 관한 시론>, 최화 옮김, 아카넷

 질 들뢰즈, <베르그송주의>, 김재인 옮김, 문학과 지성사

 황수영, <베르그손-지속과 생명의 형이상학>, 이룸 


 들뢰즈는 철학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문제는 주어진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올바로 제기하는 일이라고 한다. <베르그송주의>에서 들뢰즈는 지속, 기억, 엘랑 비탈 세 가지 개념을 통해서 베르그손을 읽자고 제안한다. 먼저 들뢰즈는 방법으로서의 직관의 세 가지 규칙을 이야기한다. 첫째 문제의 제기와 창조, 둘째 진정한 본성 차와 실재의 마디를 발견하기, 셋째는 공간보다는 시간의 관점에서 문제를 제기하기와 관련된다. 들뢰즈가 보기에 문제를 제대로 제기하는 것은 발명이나 창조이다. 첫째 규칙과 관련하여 거짓문제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존재하지 않는 문제들과 잘못 제기된 문제들이 그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문제들은 더와 덜의 문제를 착각하고 부정적 관념들을 앞세우는 지성의 착각에서 유래한다. 또 잘못 제기된 문제들은 분석된 강도량 개념, 공간화된 시간(동질적 시간), 자유의 문제에 대한 오해이다. 이는 본성상의 차이를 갖는 것들을 혼동하고 뒤섞어 정도상의 차이를 갖는 것으로 파악하고 질적 차이를 양적 차이로 환원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경험 자체는 복합물이기 때문에 직관을 통해서 이것들을 본성상의 차이를 갖는 지속과 공간, 질과 양으로 나누어야 하는 것이다. 양적 다양체는 불연속적인 동질적 요소로 되어있으며 상호외재적인 정도상의 차이를 갖는다. 질적 다양체는 서로 연속적이면서 이질적이고 상호침투하는 유기적 전체로서 본성상의 차이를 갖는다. 특히 공간과는 달리 지속은 나누어지면서 본성을 변화하는 것이다.

이중에서 특히 공간화된 시간의 문제, 동질적 시간이라는 관념은 이러한 문제를 요약할 만한 커다란 중요성을 갖는다. 베르그손의 국가박사학위논문인 <의식에 직접 소여론>은 시간의 문제를 다루고 있고, 부논문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의 공간론에 관한 것만 상기해보더라도 그에게 있어 시간과 공간의 문제가 중요하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 없다. 말년의 베르그손은 자신의 철학을 한마디로 요약해달라는 부탁에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나는 시간이 있고, 그것은 공간과 같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는 <의식에 직접 소여론>(이하 <시론>) 2부를 중심으로 베르그손의 생각을 살펴보기로 하자.

 

수 개념과 공간 표상

베르그손은 <시론> 2부에서 우선 수 개념 분석을 통해 지성의 공간 표상을 밝힌다. 수 개념은 양화quantification 작업의 토대가 되는데, 양 50마리를 세는 경우를 살펴보자. 양을 세기 위해서는 첫째로 개체들의 구체적 성질이 무시되어야 하고 둘째로 각 개체들은 동질적이면서도 서로 구별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들은 모두 섞여버릴 것이고 50마리의 양들은 공간 속에서만 구분될 수 있다. 공간은 수의 형성을 가능케 하는 장이다. 왜냐하면 양들을 셀 때 우리는 매 순간 한 마리의 양들과 관계할 뿐이며 이렇게 순간 속에서 파악된 개체가 50마리로 인식되기 위해서는 그것들 전체를 단번에 직관할 수 있어야 하고 각 개체들의 이미지를 매순간 보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수의 형성은 동질적 단위unity를 이상적 공간 속의 한 점으로 표상하면서 그것들의 합을 전체로 직관할 때 가능해진다. 이 때 단위들을 무한히 분할할 수 있다는 것은 그것들이 연장된 것이라는 사실을 전제한다. 분할가능성은 수학적 공간을 전제로 하며 지성의 작용과 분할가능성, 수학적 공간은 이렇게 서로 맞물려 기능하는 개념이다. 한편 데카르트의 해석기하학이 잘 보여주는 것처럼 수와 공간은 서로 동근원적이며 이때 공간의 특징은 상호 외재성이다. 또한 연장 실체로서 물질의 고유한 본성으로 불가침투성을 상정하는 근대철학의 사고도 전형적인 공간적 사고의 사례로 볼 수 있다. 문제는 공간 표상을 시간 속에 투사하는 데서 발생한다. 실재적 시간은 구체적 변화 속에서 느껴지는 시간이며 질적 변화, 생성이다. 이 질적인 시간의식을 느끼기 위해서는 의식의 심층적인 단계로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외적인 자극과 행동의 실용적 요구에 몰두한 의식은 소통의 필요에 의해 인위적인 공통적인 것, 질의 추상화, 일반화에 이끌린다.

시간은 계기적successive이며 공간에서 나타나는 병렬적인 성격을 갖지 않는다. 요소들은 불가분적으로 상호침투하며 지속한다. 이것들은 이질적이면서도 하나의 유기적 전체로서 통합되어 연속적이다. 마치 음악의 선율에서처럼 과거, 현재, 미래가 적극적으로 통일되어 있는 것이다. 의식상태들은 비가역적이며 과거 기억의 전체가 축적된 채로 부단히 변화한다. 축적된 과거 기억이 현재 속에서 새로운 것과 함께 매 순간 질적으로 변화하고 창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성은 의식 상태들에 공간 표상을 투사함으로써 의식의 본성을 왜곡한다. 예컨대 시계바늘과 시계추의 운동으로 상징되는 시, 분, 초로 분할된 객관적, 과학적 시간을 다루는 것이다. 이 점에서 지성은 지속의 직관과 대립하는데 지성은 의식을 외재화하고 공간표상을 통해 파악하기 때문이다. 반면 내적 의식은 순간 밖에 없는 객관 세계에 연속성을 부여한다. 일종의 삼투압처럼 의식의 내재성과 지성의 공간적 사유가 타협해서 만든 것이 동질적 시간이다. 공간은 공존coexistence, 시간은 계기succession라는 형식에 의해 각각 동질성을 띠게 된다. 베르그손은 공간을 동질적인 것으로 정의하며 거꾸로 모든 동질적인 것은 공간이라고 말하는데, 질의 부재로서의 동질성은 일종의 가상이다. 공간은 우리 의식의 상호 침투하는 상태들을 분리하여 그것을 병렬시킴으로써 동질적 시간을 만들어낸다. 이처럼 동질적 공간의 기원에는 인간 지성의 노력이 있다. 가령 동물들에게 공간은 인간에게서처럼 동질적이지 않으며 고유한 질적 특성을 띠는 방향감각을 갖는다. 사실 인간에게서 조차 오른쪽과 왼쪽의 감각은 분석이나 정의가 불가능하다. 자연에 적응하고 그것을 지배하기 위해 생겨난 인간 지성에게 질적 차이는 부담스러운 것인데, 베르그손은 칸트와 마찬가지로 공간을 주관의 형식으로 간주하되, 그것을 넘어서 지성의 형식으로까지 간주한다. 지성은 이질성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동질적 공간을 형성하고 모든 질을 양화시킨다. 인식론에서 발생학으로의 전환. 동질적 공간의 범형은 유클리드 공간이며 피타고라스의 무리수 문제, 파르메니데스의 일자, 제논의 역설 등은 이러한 공간 표상의 극단에서 성립하는 산물이다. 요컨대 공간 표상은 실제적 삶과 행동의 필요성에서 유래하는데, 이는 실재적 지속의 직관과는 상반된다. 그러한 이유로 공간화된 시간은 들뢰즈가 말하듯이 불가피한 초월론적 가상(칸트)의 성격을 갖는다고 볼 수도 있다. 여하튼 직관하는 심층자아가 상호침투하는 흐름이고 본래적 자유라면 사회적 삶과 관계하는 표층자아는 소통의 필요에 의해 내적 상태를 양화하고 언어로 표현하는데, 언어 역시 유동적 실재를 고정하는 공간 표상의 산물이다. 이처럼 지성적 인식은 행동에서 유래하기 때문에 실재의 본 모습은 지성이 아닌 내적 직관, 지속 안에 위치하여 그것과 하나가 되는 행위에 의해 가능해진다. 

 그렇다면 이제 “지속과 공간이라는 두 항이 동시성으로 연결되며, 그것이 시간과 공간의 교차”된다는 말의 의미에 대해서 말할 차례이다. 베르그손에서 동시성은 지속과 공간의 교차로 정의된다. 권리적으로는 지속과 공간은 올바른 나눔division의 방법에 의해 엄밀히 구별되어야 하지만 사실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경험은 복합물이며 지속과 공간이라는 두 경향은 서로 삼투한다. 의식적 삶은 물론 이질적인 계기들이 불가분하게 상호침투하는 유동적 흐름이지만, 지속에 어떤 순간을 잘라낸다면 일종의 동시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예컨대 과학은 속도를 잰다고 할 때 운동의 시작점과 끝점, 두 동시성을 찍고 그 사이의 공간을 셈한다. 만약 우주의 모든 운동들이 두 배, 세 배 빨라질 때 의식은 어떤 질적인 느낌을 갖지만 과학이 다루는 물리적 공식은 수정될 필요가 없다. 시간과 공간의 교차점으로서 동시성은 그것을 접점으로 하여 지속하는 공간, 공간화된 지속을 드러내는 것이다. 자아 속에는 상호 외재성이 없는 계기만이 있으며 자아 밖에는 계기 없는 상호외재성만이 있다. 시간을 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양자 사이의 삼투현상에 의해 생긴 것이다. 지속과 외부 세계의 결합, 가령 종소리를 들을 때 그것이 주는 선율로서 질적인 인상을 받아들이는 것은 지속에 속한다면 종소리를 구별하여 하나하나 세는 것은 공간적 사유인 것이다. 순수한 이질성이 상호침투하고 내적이고 유기적으로 결합한 의식의 상태를 서로 병치시키고 계기를 연속적인 선으로 표상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지성의 작용이다. 이처럼 시간이 구별하고 세는 장소가 된다면 공간과 다를 바 없을 것이며, 베르그손은 동질적 시간은 공간의 제4차원이라고 부른다.  



 

제논의 역설

파르메니데스에서 비롯하는 엘레아 학파의 일자 문제는 오랫동안 주된 철학적 주제가 되어왔다. 특히 제논의 역설에 대해서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무한급수), 라이프니츠(미적분), 칸트 등의 철학자들이 그 대답을 내놓았지만 그 문제들을 진정으로 풀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베르그손이 보기에 이 역설은 동적인 실재와 우리의 지성에서 성립하는 공간 표상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즉 운동이 지나간 공간적 궤적trace과 운동 그 자체(운동의 운동성)을 혼동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속을 공간 중의 신체가 갖는 운동 표상이나 감관 지각이 주는 외적 대상의 표상과 섞어버린다. 이와 같은 지속과 공간의 삼투 효과가 공간화된 시간과 동질적 시간을 낳는 것이다. 공간은 시간의 계기성이나 방향성이 제거된 상호외재적인 동시성에서 성립하는 것이다. 다시 제논의 역설로 돌아와보면, 아킬레스의 걸음과 거북이의 걸음 각각은 불가분적인 하나의 행위act이며 공간처럼 분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중요하다. 베르그손은 공간은 무한히 나눌 수 있는 상호외재적인 것이지만 운동은 나누어질 수 없는 것 자체이며 지속으로서의 시간이다. 아킬레스나 거북의 각 걸음은 자신의 고유한 질적인 것으로 의식에 주어지며, 이러한 질적인 것을 나누는 것은 그 질을 본성적으로 변화시키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공간이 정지와 순간, 동시성과 동질성의 표상이라면 지속은 이질성을 계기로 갖는 운동 자체이다. 지속에서는 정지된 순간을 구분할 수 없으므로 공간 속에서 파악되는 것처럼 한 위치와 일치시킬 수 없다. 운동의 실재성은 우리의 살아있는 내적 의식 및 지속의 관련 하에서만 보아야 한다. “설탕이 녹기 위해서는 기다려야 한다”는 베르그손의 유명한 말도 시간과 지속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지성이 상정하는 부동적이고 동질적인 공간 표상에서는 결코 운동 자체를 파악할 수 없으며, 실재 자체는 우리의 직관을 통해서 인식 가능한 것이다. 베르그손에게 공간은 제작적 삶이나 행위에 관심을 둔 지성의 산물이고 모순율에 기초해서 동적 실재를 고정화시킨 표상이다.  




칸트와 베르그손의 공간론 

칸트는 감성적 인식에서 시간가 공간이라는 선험적 형식의 의미를 강조한다. 칸트가 보기에 공간은 버클리가 본 것처럼 감각들 간의 관계로서의 공간도 아니며 데카르트가 파악한 것처럼 외적 연장 실체도 아닌 주관의 형식이자 순수직관이다. 공간부분들로 이루어져있고 이것들을 서로 포함 관계를 갖는다. 이에 반해 개념은 특수한 대상들을 일반화하여 자기 아래에 포섭subsumption한다. 개념과 공간이 이러한 차이를 지니며 칸트는 공간이 감각적 현상에 관해서는 경험적 실재성을 갖고 물자체에 관해서는 초월적 관념성을 가짐을 주장한다. 문제는 칸트가 시간 역시 공간과 동일한 방식으로 규정한다는 사실이다. 시간은 내감의 형식이지만 공간과 마찬가지로 시간의 부분들이 단 하나의 시간에 귀속되는 것으로 파악된다. 공간의 직관적 성격을 보이기 위해 칸트가 들었던 ‘대칭적 대상의 역설’의 예는 시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공간과 시간 관념의 동형성은 연장적 크기와 강도적 크기의 분석에서 잘 드러나는데, 양과 질의 범주에 의해 성립하는 순수지성의 원칙은 각각 직관의 공리와 지각의 예취의 표제 하에 논의된다. 칸트는 경험적 의식에서 다양성의 통일은 곧 시공간적 직관의 통일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본다. 문제는 지각의 예취 원칙에서 감각내용을 양적 본성을 갖는 것으로 본다는 점이다. 도를 질의 범주의 초월적 도식으로 파악하는 것인데, 이때 강도적 크기는 시간의 내용을 채우는 감각의 강약의 정도를 의미한다. 즉 강도적 크기는 ‘질의 양’으로 파악된다. 베르그손에게 시간은 의식상태의 질적 존재방식과 관련되므로 칸트의 강도량 개념은 비판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베르그손은 칸트의 선험적 형식으로서 공간을 지성의 산물로 본다. 오히려 베르그손은 동질적 공간과 연장을 구분한다. 연장은 본능에 의해 파악되는 구체적 실재이며 수학적으로 파악된 추상적 동질적 공간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순수공간, 즉 동질적 공간은 모든 질의 부재로 이루어지는데, 칸트는 시간을 감각들이 그 안에서 순차적으로 전개되는 동질적 장소로 취급한다. 그러나 이처럼 이해된 시간은 베르그손이 보기에 순수의식의 영역에 공간 관념이 침입해서 생긴 사생아적 개념이다. 동질적 시간 파악의 비밀은 바로 공간 속에 있다. 공간에 비해 지속은 서로에 대해 내재적이며 상호침투한다. 칸트가 물자체와 현상계를 구분하면서 오로지 상대적 인식만이 가능하다고 보았다면 베르그손은 지속의 직관을 통한 절대적 인식이 가능하다고 본다. 베르그손이 지성의 근본적 토대로 제시하는 동질적 공간은 삶의 실용적 목적 외에 다른 기원을 갖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지성의 형식은 단지 행동의 필요성과 관련될 뿐이며 진화적 기원을 탐구함으로써 발생적으로 파악될 수 있다. 본능과 달리 무기적 도구를 제작하기 위한 실용적 필요를 갖는 지성은 지속에 무차별적이고 동질적인 공간을 투영함으로써 물질을 분해하고 재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여>의 구분에 따르자면 이러한 공간화된 시간은 사회적 의식언어생활과 관련된 표층의식과 관계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논변을 통해 베르그손은 플라톤의 독단론과 칸트의 불가지론을 극복하는 이중적 목표를 갖는다.   




과학적 인식과 직관

과학은 모든 것을 정태적으로 관찰, 분석, 물질 언어로 계량화해서 표시한다. 과학은 내재적 의식의 흐름으로서의 시간, 양화할 수 없는 삶의 시간, 의식의 상태마저도 그렇게 한다. 과학적 인식, 개념적 사고는 대상 사이에 공통되는 것을 추출하고 추상화, 일반화하는 분석이며, 이러한 실증과학은 절대적 인식은 될 수 있어도 전체적 인식은 결코 될 수 없는 부분적 인식일 따름이다. 질적 차이를 양적 차이로 환원하고 질적, 내적 강도를 강도량으로 환원하는 과학적 인식은 상대적이다. 과학적 인식을 지도하는 지성은 도구를 만들고(호모 파베르) 감각의 연장이자 행동의 수단으로 작용한다. 과학적 인식은 적어도 물질에 관한 한 절대에 접촉할 수 있지만 결코 전체를 파악할 수 없는 부분적인 것이다. 수를 세고 헤아린다는 것은 동질적 공간 안에서 상호 외재적인 것을 병치하는 것이다. 

 과학이 지성에 의존해서 물질을 다룬다면 철학은 정신을 자신의 고유대상으로 삼는다. 직관이 요구되는 까닭은 과학이 상정하는 바와는 달리 세계가 부단히 움직이는 흐름이기 때문이다. 주의할 점은 베르그송의 직관은 종래 철학자들이 말하던 지속의 밖에 위치한 지성적 직관이 아니라는 점이다. 베르그송에 의하면 직관은 구체적 실재 내부에 파고들어가 대상에 합일하는 공감이다. 대상에 일치하여 그 대상을 전체적으로 또 직접 파악하는 것이 직관이며, 이런 점에서 직관은 내적 지속으로 향하는 단순한 행위이다. 직관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은 지속 속에서 사고한다는 것이며 이러한 방식을 통해 형이상학은 궁극적으로 질적인 미분과 적분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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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pp 2011-12-12 0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글 읽고갑니다. 감사해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발제





 



1.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 신경증자로서의 주체

라플랑슈와 퐁탈리스가 쓴 『정신분석사전』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약술하고 있다. “어린아이가 부모에 대해 느끼는 사랑과 증오의 욕망의 조직 전체. 이른바 그 콤플렉스의 양성적 형태는 오이디푸스 왕의 이야기에서처럼, 경쟁자인 동성 부모의 죽음을 욕망하고 이성 부모에 대한 성적 욕망으로 나타난다.......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인격의 구조화와 인간의 욕망의 방향을 결정짓는 데 근본적인 역할을 한다.”1)라플랑슈. 장 베르트랑 퐁탈리스, 『정신분석 사전』, 임진수 옮김, 열린책들, 2005, p261.)

프로이트는 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정신분석학의 주춧돌”2)(홍준기, 「자끄 라깡, 프로이트로의 복귀-프로이트ㆍ라깡 정신분석학: 이론과 임상」, 김상환, 홍준기 엮음, 『라깡의 재탄생』, 창작과 비평사, 2002, p45. 이하에서 발표문의 바탕이 될 이 논문의 인용 시에는 별다른 표기없이 괄호 안의 쪽수를 써넣어서 표기하기로 한다. 인용 속의 강조는 원문의 것이다.)로 보았으며 거세콤플렉스는 유한한 인간에게는 완전히 제거될 수 없는 “구조적 암반”이라고 생각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야말로 정신분석의 가장 근본적인 개념 중 하나이며, 이 과정을 통해 인간이 비로소 성적 주체로 태어난다는 점에서 정신분석의 독특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곧 정신분석학이 하나의 학적 체계로서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지의 여부는 바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려 있”(46)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신분석에 대한 여러 가지 비판들은 대부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개념을 겨냥하고 있다.3) (실증주의적 과학관에 기초해서 정신분석의 사례들을 반증불가능한 사이비 과학으로 보는 포퍼의 비판과 모계 사회 연구 등을 기반으로 프로이트가 근친상간 금지의 문화적 성격을 간과했음을 비판하는 말리노프스키의 비판에 대해서는 홍준기, 『라캉과 현대철학』, 문학과 지성사, 1999, pp.236~246을 참조할 것.) 이들 통속적인 비판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우리의 상식적인 도덕의식에 맞지 않는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해, “인간을 과거에 고착되어 자유를 상실한 존재로 만든다는 비판”이 그 주종을 이뤘는데, 그 비판의 정당성을 따져보기 이전에 정신분석학의 내적 맥락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로, 성이 성적 결합이나 성행위 같은 좁은 의미가 아니라 부모와 아이 간의 “모든 양육행위, 관심과 애정의 표현”, 곧 “시선과 목소리의 교환”, “똥 누이기” 등도 정신분석학의 맥락에서는 넓은 의미에서의 성적활동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점, 둘째로 프로이트가 본능Instinkt과 충동Trieb을 구분한다는 점(46).

본능과 충동의 구분은 중요하므로 더 자세히 살펴보자. 먼저 “본능은 인간(동물)을 미리 정해진 특정한 행위”로 이끈다는 점에서 결정론적이다. 반면 충동은 본능에 기초를 두고 있되, “본능과는 달리 상징적 차원에서 작동”하므로 “예외일탈을 허용”(47)하기에 생물학적 재생산, 성감대의 만족과 완전히 일치하는 개념은 아니다. 프로이트가 말한 바처럼, 충동은 육체와 심리 사이의 ‘한계개념’이며, 이것은 “목적성을 갖지 않으므로 특정한 대상이 아니라 다양한 대상에서 같은 만족을 얻을 수 있으며, 심지어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충족에 도달 할 수 있다.”4) (홍준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남자의 성, 여자의 성-정신분석강의Ⅰ』, 아난케, 2005, p20. 충동은 그 자체로 성구분을 갖지 않는 무성적인 것이지만 오이디푸스콤플렉스와 거세콤플렉스를 경유하면서 주체는 타자의 영역 속에서 남성적 또는 여성적 위치를 받아들이게 된다. 이것은 생물학적으로 미리 결정된 과정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충동의 대상이 꼭 실제 대상일 필요는 없다. 정신분석은 생물학적 본능이 아니라 충동, 욕망, 향유jouissance 등의 개념을 그 대상으로 갖는다. 바나나와 사과의 예(47)에서 볼 수 있듯이 충동의 대상인 것은 현실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현실을 유지시키는 환상, 현실보다 더욱 현실적인 ‘심리적 현실’로서의 환상으로서 “사후적으로nachträglich”(불어의 전미래 시제를 생각해보자 : ‘거세는 실제로 발생한 것으로 되어 있을 것이다’) 구성될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거세 콤플렉스는 아버지가 실제적으로, 역사적으로 위협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 “아들환상 혹은 환상적 해석의 결과”(47)가 되는 것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갖는다는 것과 신경증자가 되는 것은 곧 같은 의미인데 이것은 이 두 항이 부동의 기계적, 직선적 인과관계를 갖는다는 것이 아니라, 결과로서의 증상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원인과 시간적으로 일치한다는 것이다. 이 때 신경증자가 아버지가 근친상간을 금지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완전한 만족을 주는 어머니라는 대상이 존재한다는 ‘잘못된 믿음’을 유지하기 위해서이다”(49). 자신의 실존적 공허를 견뎌내는 것보다 이러한 착각이 더욱 견딜만한 것이기 때문에, 신경증자는 오히려 근친상간 금지명령을 욕망한다는 것이다. “완전한 대상을 소유하고 있는 경쟁자가 존재한다고 착각하는 것이 자기의 팔루스적 약함을 견뎌야 하는 것보다 편하다.”5)(페터 비트머, 『욕망의 전복』, 홍준기 외 옮김, 한울, 1998. p148)           




2. 라캉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해석 - ‘아버지의 이름’을 중심으로

이제 라캉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해석에 대해 좀더 자세히 살펴볼 차례이다. 프로이트가 당대의 다윈의 진화론을 신봉하는 등 ‘과학주의적 오류’로 얼마간 편향된 측면이 있었다면, 라캉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개념은 “철저히 구조적”인 파악으로서, 말리노프스키 등의 프로이트 비판이 함축하는 “생물학적, 역사학적 혹은 신화적 이해방식”(50)과는 대립된다는 특징을 가진다. 레비스트로스와 소쉬르 등의 구조주의 운동과 궤를 같이하는 라캉의 이러한 구조적 해석은 프로이트가 『토템과 터부』에서 제시하는 ‘원초적 아버지’의 원시군거집단의 근친상간금지법 역시 문자적, 역사적, 발생학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구조적으로 해석할 것을 요구한다. 이 아버지는 “이름”으로 , “상징적 의미” 속에 존재하는, “은유 혹은 기표”(52)로서의 아버지이다. 이 아버지의 이름(nom)은 곧 아버지의 금지(non)이기도 한데, 라캉에게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가족관계뿐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 속에 존재하는 필연적인 ‘삼각관계’, 즉 구조적 사실”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라캉의 팔루스Phallus는 무엇인가? 라캉은 남녀의 ‘차이’ 자체를 상징하는 기표로서의 팔루스와 육체기관으로서의 페니스를 구분한다. 팔루스는 “결여 자체의 상징”으로서 양성의 이상적 합일(“성적 관계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이 불가능함을 암시한다(54). 주체는 궁극적으로 무無에 불과한 남근을 상상적 팔루스로 승격시킴으로써 결여를 메우려는 신경증자가 되며, 이 팔루스와 주체가 갖는 구조적, 논리적 위치 또는 향유의 방식에 따라 남녀를 구분한다.6)(홍준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남자의 성, 여자의 성-정신분석강의Ⅰ』, 아난케, 2005, p63. 성적 차이에 대한 라캉적 탐구의 보다 자세한 사항에 대해서는 슬라보예 지젝 외, 『성관계는 없다』, 김영찬 외 엮고 옮김, 도서출판 b, 2005를 참조할 것.) 라캉의 팔루스 개념은 그를 남성중심주의의 옹호자로 오해하도록 부추기기도 하는데, 하지만 라캉의 팔루스는 자신을 지탱할 궁극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음에 유의해야 한다. 남성을 지탱해주는 팔루스란 단지 결여의 상징이므로 페니스를 가진 남성의 우월의식은 단지 착각에 지나지 않게 된다. 곧 “주체에게 상상적인 만족감, 근거없는 충족감을 주는 모든 것, 자신의 결여를 채울 수 있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무’일 뿐인 이 모든 것이 팔루스라는 상징 속에 포함된다.”(56) 가령 어린아이는 어머니의 부재와 현존의 교대 속에서 그녀가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어머니는 왜 팔루스를 욕망하는가? 그것은 아이와 마찬가지로 그녀 또한 결여된 존재이기 때문이고, 이때 팔루스는 주체의 결여를 채워준다고 가정되는, 그러나 실정적인 대상으로서 무엇이 아니라 “결여 자체의 상징”(53)이 된다. 만약 아이가 어머니가 원하는 팔루스가 자신이 아니라 아버지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를 수용하면 어머니와의 상상적 이자관계에서 벗어나 상징계로 진입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아버지의 이름’을 수용하지 못하게 되면 상상적 이자관계- 곧 근친상간 관계-에 빠지게 된다. 아버지라는 제3자, 아버지의 이름(이 제3자를 라캉은 상징계, 대타자 등의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없이 어머니와 아이 간의 둘만으로 이루어진 폐쇄적 세계, “아버지의 이름의 배척(forclusion)”(56)이 바로 정신병의 세계이다.7)(브루스 핑크, 『라캉과 정신의학: 라캉이론과 임상분석』, 맹정현 옮김, 민음사, 2002, pp. 192~193  “아버지의 상징적인 기능을 전복시키는 것은 이로울 게 없다는 것, 그 결과는 아버지의 기능 자체보다도 더 나쁜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정신병의 발병률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라캉이 <~이냐, 더 나쁜 것이냐 ~ou pire>라는 제목으로 실행한 세미나 XIX에서 말하려고 했던 바이다. 물론 그 제목에서 생략된 단어는 바로 아버지란 뜻의 père이다.”) 신경증자는 적어도 아버지의 이름을 받아들이고 상징적 거세를 수용한, 곧 자신이 어머니의 팔루스가 될 수 있고 완벽한 만족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포기함으로써, 완결이 불가능한 애도작업Trauerarbeit을 수행함으로써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주체이다. “팔루스가 됨(être le phallus)”에서 “팔루스의 소유(avoir le phallus)”로의 이행(57)은 아버지의 이름을 받아들이고 아버지와의 상징적 동일화를 함으로써 가능해진다. 58쪽의 도식 중 왼쪽의 삼각형이 나타내는 것이 상상적 자아moi와 이상적(상상적) 어머니 또는 이상적 자아Ideal ich가 갖는 근거없는 충족감을 주는 상상적 팔루스(Ψ)적 관계라면, 오른쪽 삼각형은 아버지의 이름, 즉 상징적 팔루스(Φ)의 개입으로 자아의 이상(Ich ideal)로서의 어린아이와 상징화한 어머니가 3자관계를 맺는 상징적 관계이다.8)(딜런 에반스, 『라깡 정신분석 사전』, 김종주 외 옮김, 인간사랑, 1998, p327.   “자아이상은 상징적 내사introjection이고 이상적 자아는 상상적 투사projection의 원천이라고 주장한다. 자아이상은 내재화된 법률계획으로서, 이상으로서, 상징적 질서에서 주체의 위치를 좌우하는 길잡이로서 작동하는 능기이다.......반면에 이상적 자아는 거울단계의 거울상에서 기원한 것이다. 그것은 자아가 바라는 미래 통합에 대한 약속이며, 자아가 구축되는 통일성의 착각이다.”)  

 




동물적 인간에서 인간주체로 변하기 위해서 어린아이는 어머니가 원하는 팔루스는 자신이 아니라 아버지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여기에서 라캉은 “아버지 은유métaphore paternelle”를 이야기한다. 어머니의 욕망의 기표인 S'가 아버지의 이름, 기표 S에 의해 대체됨으로써 은유적 의미(s)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름, 명사, 금지로서의 아버지는 엄마를 지워버리며, 중화시키며, 대체한다. 간단히 말해, 아버지는 자신의 금지와 이름으로 엄마를 대체한다.”9)(60쪽 공식에서의 횡선은 기표의 대체와 억압을 보여준다) 아버지 기표가 개입하기 전에는 어머니의 욕망의 대상은 아이 자신이었지만, 아버지의 이름nom du père의 개입으로 인해 아이는 ‘문자적’ ‘육체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은유적 의미에서만 혹은 무의식적으로만 어머니의 욕망의 대상이 될 수 있다.10)(아버지의 이름이 생물학적인 것이 아니라 상징과 은유의 차원에서 작동하는 것이라는 점을 다시 강조할 필요가 있다. “다행스럽게도 언어가 우리에게 가르쳐주었듯이 ‘아버지임’의 진리는 다른 질서에 속한다. 우리가  ”나는 어떤 정자의 아들 또는 딸이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난센스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필리프 쥘리앵, 『노아의 외투: 아버지에 대한 라캉의 세 가지 견해』, 홍준기 옮김, 아난케, 2000, pp84~85.) 이러한 은유적 언어사용은 신경증자에게 가능한 것으로 정신병자는 이러한 은유나 간접적인 언어를 사용하지 못한다. 라캉은 “팔루스의 의미작용”이란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는 팔루스가 영원히 상실된, 도달할 수 없는 대상이기 때문에 “의미작용signification의 원천 혹은 의미작용 자체”(61)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라캉에게 아버지 은유는 인간은 유한하고 결여된 존재이며 그 욕망은 결코 완전히, 직접적으로는 충족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3. 라캉의 ‘프로이트로의 복귀’의 의미

요컨대 라캉이 ‘프로이트로의 복귀’를 주창했다는 것의 의미 역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한 비판과 정신분석학에 대한 거부를 극복하려는 노력에 그 핵심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라캉이 안나 프로이트, 하르트만 등의 자아심리학을 “직선적 인과론, 생물학적 환원주의, 생식기 중심주의, 사회순응주의에 근거하”(63)고 있다고 비판한 것은 바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정신분석의 ‘합리적 핵심’을 타협하거나 포기하지 않으려는 노력과 다른 것이 아니다. 이는 알튀세르가 마르크스 유물론에 대한 인간주의적 해석-청년 마르크스, 루카치, 프랑크푸르트 학파 등으로 이어지는-과 싸우면서 인식론적 단절, 과잉결정 등의 개념을 통해 일생동안 마르크스에 대한 재해석과 개조작업을 지속했던 것과 종종 비견되기도 한다.11)(마르크스에 대한 알튀세르의 쇄신 노력에 대해서는 루이 알튀세르, 『맑스를 위하여』, 이종영 옮김, 백의, 1997 및 루이 알튀세르 외, 『자본론을 읽는다』, 김진엽 옮김, 두레, 1991 등을 참조하고 알튀세르가 라깡의 ‘프로이트로의 회귀’의 의미를 평가한 문헌으로는 루이 알튀세르, 「프로이트와 라깡」,『아미엥에서의 주장』. 김동수 옮김, 도서출판 솔, 2000을 참조. 단 위 논문에서 호의적이었던 알튀세르의 라캉에 대한 평가는 이후 「프로이트 박사의 발견」이나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에 대하여」에서 비판적 관점으로 바뀌게 된다.) 라캉의 프로이트로의 복귀는 위에서 “아버지의 은유”를 살펴보면서 보았듯이,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지어져 있다’라는 명제로 요약된다. 소쉬르나 야콥슨의 언어학의 영향 하에서 작업했다는 점에서 물론 라캉은 구조주의 운동의 후예 중 한 사람이지만, 그러나 라캉이 단순히 구조 속에서 해체되는 주체를 말한 것은 아니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오히려 라캉은 무의식의 ‘주체’를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것은 어떠한 주체인가? RSI 도식이나 각종 수학소 등의 개념을 계속적으로 가공해나가면서 라캉은 자신의 체계를 끊임없이 쇄신했고 그의 사상은 그만큼 다면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 프로이트가 ‘무의식’이라는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 정신분석은 숱하게 많은 이론적 분파들을 낳게 되었지만 오늘날 프로이트를 말하기 위해서 라캉을 우회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 되어버렸다. 




3.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해 남는 의문 

지금까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프로이트에 대한 라캉의 해석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라캉의 언어학적, 구조적 해석은 프로이트가 이른바 ‘범성욕주의자’라는 비판을 방어하는데 어느 정도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순수하게 생물학적인 성적 요인만으로 규정되지도 않으며 마찬가지로 순수하게 문화적 요인만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곧 그것은 중층적 결정 과정이다.  그런데 모든 2자적 관계에 대해 라캉은 모든 인간관계 속에 존재하는 필연적 사실로서 3자적 관계를 말하고 있는데, 이는 어떤 ‘매개’로서 아버지 은유의 필연적 존재를 도입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결론을 도출하는데 있어서 가족 모델의 분석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12)(질 들뢰즈/클레르 파르네, 『디알로그』, 허희정, 전승화 옮김, 동문선, 2005, p184.   가령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신분석학은 줄기차게 부모와 가족의 통로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다른 분기를 택하지 않고 이 분기를 택했다고 정신분석을 비난할 수는 없지만, 그 분기로 막다른 골목을 만들었던 점, 어쨌거나 정신분석학이 야기한 새로운 발화체들을 사전에 분쇄하는 발화 행위의 여건들을 고안했다는 점에서 정신분석은 비난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관계에 있어서 3자 관계의 구조성을 말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가족과 사회 사이의 일정한 상동성을 전제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지만 가족 내의 가부장적 구조와 사회의 권위주의적 구조를 평행적으로 보는 식의 분석은 둘 사이의 존재하는 차이, 사회가 갖는 고유의 종별성, 복잡성을 사상시킬 우려가 있다. 두번째로 가족을 어떤 공시적인 구조적 모델로 삼는다고 할 때, 가족 자체 내에서, 또는 넓은 의미에서 사회적 관계가 가족을 관통하고 있는 모순과 변화의 역동적 과정을 살피기에는 난점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 다시 말해 가족이라는 것 자체의 ‘역사성’을 파악하기에 라캉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개념은 충분히 개방적인가?13)(예컨대 유럽에서 ‘아버지’ 개념의 변화를 아이에 대한 권리, 아이의 권리, 아이의 친권을 소유할 권리 등으로 나누어 분석한 것으로는 필립 쥘리앵, 위의 책, pp. 47~68을 참조할 수 있다.)




참고문헌




김상환, 홍준기 엮음, 『라깡의 재탄생』, 창작과 비평사, 2002 

홍준기, 『라캉과 현대철학』, 문학과 지성사, 1999

홍준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남자의 성, 여자의 성-정신분석강의Ⅰ』, 아난케, 2005

장 라플랑슈. 장 베르트랑 퐁탈리스, 『정신분석 사전』, 임진수 옮김, 열린책들, 2005

페터 비트머, 『욕망의 전복』, 홍준기 외 옮김, 한울, 1998

브루스 핑크, 『라캉과 정신의학: 라캉이론과 임상분석』, 맹정현 옮김, 민음사, 2002

딜런 에반스, 『라깡 정신분석 사전』, 김종주 외 옮김, 인간사랑, 1998

필리프 쥘리앵, 『노아의 외투: 아버지에 대한 라캉의 세 가지 견해』, 홍준기 옮김, 아난케, 2000

루이 알튀세르, 「프로이트와 라깡」,『아미엥에서의 주장』. 김동수 옮김, 도서출판 솔, 2000

질 들뢰즈/클레르 파르네, 『디알로그』, 허희정, 전승화 옮김, 동문선,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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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리클레스의 추도 연설 中, 투키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수록

 

각 개인은 자신의 개인적인 일 뿐만 아니라 국가의 일에도 관심을 가집니다. 대체로 자신의 사업에 몰두하고 있는 사람들조차 전반적인 정치문제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데 이점이 바로 우리의 특징입니다. 우리는 정치에 무관심한 사람을 자신의 일에만 몰두한다고 말하지 않고 우리와는 전혀 무관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호감의 문제에서 우리와 대다수의 다른 국민들 사이에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선행을 받으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선행을 함으로서 친구를 만듭니다. 이 점이 우리의 우정을 더욱더 신뢰 있게 만드는데 왜냐하면 계속적인 호의를 다른 사람들에게 보임으로써 우리의 호의를 받은 사람들의 감사가 계속 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우리에게 어떤 빚을 진 사람의 감정은 우리와 동일한 열정을 가질 수가 없는데 이는 그가 우리의 호의에 보답할 때에 어떤 것을 자발적으로 주려하기 보다는 빚을 갚으려는 의무감이 앞선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점에서 유일무이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 때에 어떤 이익이나 손해를 계산해서 행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우리의 자유로운 관대성에 입각해서 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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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시에예스, "제 3신분이란 무엇인가", 1788)

이 책의 목차는 대단히 단순하다. 우리는 세 가지 문제를 제시할 것이다.

1.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전부(Tout)이다.

2. 지금까지의 정치에서 제3신분은 무엇이었나? 아무것도 아니었다(Rien).

3. 그렇다면 무엇을 요구하는가? 무언가(Quelque chose)가 되기를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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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스피에르, 정치도덕의 원리에 관한 보고서 中, 1794년 2월 5일
(Ricahrd T. Bienvenu ed., The Ninth of Thermidor: The Fall of Robespierre, Oxford: Oxford Univ. Press, 1968에 수록) 

그러나 우리 안에 민주정의 기초를 닦기 위해서 그리고 그것을 강화하기 위해서, 헌법의 평화로운 지배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는 폭정에 대한 자유의 전쟁을 끝내야만 하고 혁명의 폭풍울 뚫고 나가야만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여러분이 세운 혁명체제의 목적입니다. 여러분은 현재 공화국이 처한 폭풍 같은 상황에 여러분의 행동을 기초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갖고 있는 행정적 계획은 혁명 정부의 정신의 귀결이어야 하며 그것은 민주정의 일반 원리와 결합되어야 합니다.

인민의 또는 민주정부의 근본 원리는 무엇입니까? 다시 말해 정부를 움직이게 하고 부양하는 본질적인 원인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미덕입니다. 나는 그리스와 로마의 경이로운 인물들이 연구했던, 그리고 공화국 프랑스에서 더욱 더 놀랄만한 결과를 야기한 공적인 미덕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미덕은 국민과 그 법에 대한 사랑,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공화국 또는 민주정의 본질은 평등이므로, 조국에 대한 사랑은 필연적으로 평등에 대한 사랑을 포함합니다.

(.........)평화시, 인민 정부의 동력이 미덕이라면, 혁명의 와중에 그것은 미덕이자 동시에 공포입니다. 미덕을 결여한 공포는 치명적이고, 공포를 결여한 미덕은 무기력합니다. 공포란 신속하고, 엄정하며 결코 굽히지 않는 정의에 다름 아닙니다. 그리하여 그것은 미덕의 소산입니다. 그것은 어떤 특별한 원리라기보다는 우리 조국이 가장 시급하게 필요로 하는 민주정의 일반 원리의 귀결입니다.

공포는 전제정부의 동력이라고들 말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정부가 전제정을 닮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자유의 영웅들의 손에 들려 빛나고 있는 검이 폭군의 추종자들이 무장하는 검과 닮았듯이 말입니다. 전제군주가 그의 잔인해진 신하들을 공포로 다스리도록 합시다. 그는 전제군주로서 그렇게 처신하는 게 정당합니다. 자유의 적들을 공포로 정복한다면 공화국의 창건자인 여러분은 정당합니다. 혁명정부는 폭군에 대한 자유의 전제정입니다. 오직 범죄를 보호하기 위해서만 힘이 사용됩니까? 그것은 벼락 맞을 거만한 자들의 머리에 일격을 가하는 것이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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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네스트 르낭(E. Renan)의 <민족이란 무엇인가>(Qu'est-ce qu'une nation?)(1882)

과거에는 함께 나누어야 할 영광과 미련의 유산이 있고, 미래에는 이루어야 할 공통의 계획이 있습니다. 함께 고통받았고, 함께 즐겼고, 함께 기대했다는 것, 바로 이것이 공통 관세나 전략적인 사고에 맞춘 국경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것입니다. 인종과 언어의 다양성을 넘어서 사람들이 이해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저는 조금 전에 ‘함께 고통받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함께 하는 고통은 기쁨보다 훨씬 더 사람들을 단결시킵니다. 실제로 국민적인 기억들 가운데 애도가 승리보다 낫습니다. 애도의 기억은 의무를 부과하며 공통의 노력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민족이란 이미 치른 희생과 여전히 치르고자 하는 희생에 대한 의식(意識)에 의해 구성된 위대한 결속입니다. 그것은 과거를 전제로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오늘날 하나의 명백한 사실, 즉 동의, 공동 생활을 영위하고자 하는 명확하게 표명된 욕구로 요약됩니다. 한 민족의 존재는 개인의 존재가 삶의 영속적인 확인인 것과 마찬가지로 매일매일의 국민투표(plébiscite)입니다(이런 은유를 사용하는 것을 용서하기 바랍니다).

 

(..........)인간은 자기 인종의 노예도, 자기 언어의 노예도, 자기 종교의 노예도, 강물의 흐름의 노예도, 산맥의 방향의 노예도 아닙니다. 건전한 정신과 뜨거운 심장으로 뭉친, 인간들의 대결집이야말로 국민이라 불리는 도덕적 양심을 만들어 냅니다. 이 도덕적 양심이 공동체를 위해 개인을 버리는 그 희생에 의해 자신의 힘을 증명하는 한, 그것은 정당하고 또 존재할 권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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