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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스토리로 옮기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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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에서 공백에 대한 집합적 불안은 파멸적인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파시즘에 근접해 가고 있다. 자신들이 무기력하다고 느끼면서도 동시에 국가의 무기력을 두려워하는 시민들은 국가에 대해 그들이 항상 “좋은 쪽”에 있고, 희생자, 전형적인 불쌍한 사람들 - 나는 “열등 인간”라는 말까지 쓰려 했었다 - 는 자신들이 아니라 다른 이들라는 점이 확실히 보장될 수 있도록 가시적인 안전 중심적 조치들을 취하고 아파르트헤이트와 같은 것 - 이것이 어떤 형태 아래 어떤 이름(국민우선은 그런 이름들 중 하나다)을 달고 나타나든 간에 - 을 제도화할 것을 요구한다. 그들은 암묵적으로 다음과 같은 종류의 질문을 제기한다. 국가는 누구를 우선시하는가? 곧 국가는 누구 편인가?그리고 국가의 결정들은 누가 내리고, 누가 국가로부터 정확히 우선이라는 답변을 얻을 수 있는가?누가 선택된 이들이고 누가 버려진 이들인가?

발리바르, <국민 우선에서 정치의 발명으로>, 146-7. 



어제는 일베가 광장에 나온, 기억할 만한 날이었다. 비단 일베만이 문제일까? 세월호 유가족들을 유귀족, 노숙자 등으로 부르며 경멸하는 이들도 어쩌면 이렇게 자신들이 국가로부터 선택받은 이이고 절대적으로 안전하다고 믿고 싶은 것이 아닐까? 운동으로서의 일베. 인종주의, 인종전쟁으로서 정치 개념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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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광의 인터뷰집 <다시 더 낫게 실패하라>를 읽었다. 

얇은 책인데다가 글씨와 여백이 커서 다 읽는데 몇 시간 걸리지는 않았다.

이런저런 철학자들의 생각을 빠르게 훑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의 장점을 찾을 수 있겠지만, 기대가 컸던 탓인지 미진한 구석도 눈에 많이 들어온다. 다른 독자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몇 자만 적어보기로 한다. 





가령 해제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이는 "철학자의 세계를 여행하기 위한 약도"라는 제목이 붙은 전반부의 20쪽을 보자.


"한국에서도 관심을 끌고 있는 자크 랑시에르, 클로드 르포르, 에르네스토 라클라우 등도 정치와 정치적인 것의 분리라는 전제에서 자신들의 논의를 출발시키고 있다. 하나로 묶을 수 없는 이들을 큰 범위에서 '탈정초주의post-foundationalism'라고 부르는 명명법이 주목받고 있는데, 이른바 미국에서 과잉 생산된 포스트담론에 대한 하나의 교정으로서 이 용어가 등장했다는 것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탈정초주의 (또는 포스트정초주의)라는 정의 또한 포스트구조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처럼 본인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특정 이론가들에게 모자를 씌우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전혀 주석이 없어서 누가 탈정초주의라는 명명법을 쓴다는 것인지, 또 누가 그것을 주목한다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다음 문장에서 이것이 포스트담론에 대한 하나의 교정이라고 설명하면서, 이택광은 또한 다음 문장에서 탈정초주의라는 정의 또한 특정 이론가들에게 모자를 씌우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말할 경우 탈정초주의라는 말을 애초에 왜 꺼냈는지 알기 어렵게 된다. 탈정초주의라는 명명법이 유익하다는 것인가 문제가 많다는 것인가? 이어지는 21쪽에서는 또 이런 말이 나온다. 


"포스트구조주의가 물질적 차원의 '토대'를 부정하는 것이라면(과연 그런가?) 탈정초주의는 이 토대를 긍정한다는 것이 중론인데, 탈정초주의라는 말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여기서 이들이 지칭하는 그 토대는 수미일관하거나 인과적인 성질을 갖고 있지 않다."


여기서 말하는 토대가 무엇인가? 토대가 무엇인지도 분명하지 않은데 탈정초주의라는 정체불명의 사조는 역시 정체불명의 토대를 긍정한다는 '중론'을 이택광은 설명한다. 토대가 "수미일관하거나 인과적인 성질을 갖고 있지 않"다는 말 역시 요령부득이지만, 계속 읽어보기로 하자. 같은 쪽에서는 다시 이런 말이 이어진다.


"오늘날 생각해보면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여하튼 분류하기 좋아하는 '전문가 담론'은 탈정초주의라는 용어법을 통해서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정치철학을 요청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포스트구조주의에서 중요했던 것이 '시'학이었다면 탈정초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정치다"


"여하튼" 문제는 이런 대담한 주장이 별다른 근거 없이 제시된다는 점이다. 다음 몇 문단을 요약하자면 포스트구조주의가 시학을 진리의 지표로 삼은 것은 하이데거 때문인데, 그렇다고 해서 탈정초주의가 하이데거주의를 벗어나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이를 급진적으로 변형한다는 이야기이다. 결국 그래서 탈정초주의가 기여하는 점이 무엇인가? 또 그 문제는 무엇인가? 이에 대한 상술 없이 이어지는 23쪽에서는 갑작스럽게 바디우에 대한 호감 표명이 등장한다. 


"탈정초주의의 문제점을 적절하게 인식하고 있는 까닭에 바디우는 정치철학에 반대하는 이론가로서 자신을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다. (...) 잘 알려져 있다시피 바디우는 정치뿐 아니라 예술, 과학, 사랑에서도 진리가 생산될 수 있고, 생산의 절차는 다르지만 이를 통해 만들어진 진리는 평등하다고 주장한다. 확실히 바디우의 이런 생각은 현명한 것이다." 


여전히 이택광은 탈정초주의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바디우가 어떤 점에서 "확실히" 현명한 것인지 설명하지 않는다. "약도"이기 때문에 이렇게 개략적인 설명만 나오는 것일까? 그런데 이런 식의 약도라면 누가 이런 알쏭달쏭한 철학자의 세계를 여행하고 싶을까? 


나머지 논의들도 상당히 혼잡하여 해제 읽기를 포기하고 어차피 원래 목적이었던 인터뷰를 읽었다. 특별한 선정 기준을 알기 힘든 9명의 철학자들의 인터뷰가 이어지는데, 일단 분량이 불균등하다. 피터 싱어에 할애된 인터뷰가 단 8쪽인 반면, 랑시에르의 경우는 41쪽이나 할애되어 있다. 분량도 그렇고 그나마 가독성이 좋았던 인터뷰가 랑시에르 편이었던 것 같은데, 알고보니 이 경우는 각각 최정우와 서용순이 불어에서 직접 번역한 것이었다. 해제 뿐 아니라 인터뷰의 몇몇 대목들은 역시 좀 알기 어려운 경우들이 있었다. 원문이 궁금한 대목들이 몇 가지가 있지만 전화나 이메일 등으로 이루어진 인터뷰이다 보니 원문을 구해서 살펴볼 수 없어 안타깝다. 그런 경우들을 다 나열할 수는 없고, 두 가지만 적어보기로 한다. 하나는 스피박 인터뷰가 나오는 167쪽의 경우다. 이택광의 "당신은 탈식민주의 이론가 또는 젠더 이론가라고 불리는데, 왜 이런 것에 관심을 가지는가?"라는 질문에 스피박은 이렇게 답한다. 


"나는 의식적으로 탈식민주의라는 주제를 정한 것이 아니다. 나에게 정치는 윤리적이라기보다 젠더적이다. 왜냐하면 젠더는 거기에 중요한 문제로 있기 때문이다. 젠더가 거기 있었기 때문에 내가 연구한 것이다. 모든 인간은 추상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 능력 덕분에 인간은 사회정의에 대한 추상화된 생각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젠더의 문제다. 다음 문제는 남아와 여아가 태어나서 상징적인 아버지를 가지고 어떤 것이 좋고 어떤 것이 나쁘다는 윤리를 획득하는 과정에서 젠더가 작동한다는 것이다. 물론 내가 젠더 문제에만 집착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경험을 읽는다는 차원에서 나에게 먼저 존재했던 것을 발견했을 뿐이다."


스피박의 이 이야기는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아마 나 말고도 많은 사람들도 궁금증을 가질 것 같다. 이는 우선 탈식민주의에 대한 이야기가 없을 뿐더라, 정치가 젠더적인 이유가 "거기에 중요한 문제로 있기 때문"이라는게 무슨 이야기인지, 추상화 능력이 왜 젠더의 문제인지 다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스피박이 원래 이렇게 난해하게 이야기한 것인지, 아니면 번역의 문제인지 누락이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크리칠리를 인터뷰한 188쪽에서는 이런 질문이 나온다. 


"<무한하게 요구하기>에서 흥미롭게도 데리다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정치적인 저작에서 데리다를 언급하지 않고 레비나스를 다룬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레비나스가 데리다보다 더 정치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인가?"


"나는 레비나스와 사랑에 빠졌다. 레비나스는 철학자의 진리를 보여준다. (...) 내가 데리다를 통해 시도하고자 했던 것은 도덕적인 개념과 정치적인 개념에 대한 분석이었다. 이를 통해 그 아래에 있는 토대를 해체하는 것이었다. 말년의 데리다는 나에게 그렇게 흥미를 끌지 못했다. 오히려 좀 실망스럽기도 했다. 아마도 이런 생각이 데리다보다도 레비나스로 나를 이끌었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의식적으로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다. 여하튼 내가 알아채지 못한 것을 질문해줘서 거기에 대해 좀 더 생각을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데리다의 어떤 점이 실망스러웠다는 것인가? 크리칠리는 데리다주의자였다가 레비나스주의로 전향한 것인가? 이 대목 역시도 상당히 의아한 까닭은, 크리칠리 자신이 이미 <무한하게 요구하기> (2007)보다 훨씬 이전에 씌어진 자신의 첫 번째 책이자 출세작인 <The Ethics of Deconstruction: Derrida and Levinas> (1992)에서 이미 데리다의 해체론은 정치적 궁지에 이를 수 밖에 없으며, 해체론은 레비나스의 윤리학을 통해 보충이 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한 바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을 감안하면 애초에 왜 데리다가 아니라 레비나스를 이야기하느냐는 질문은 크리칠리의 기존의 입장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상황에서 나온 것이며, 이에 대해 크리칠리가 '자신도 알아채지 못한 것을 질문해줘서 더 생각해보겠다'고 대답한 대목은 더욱 불가사의하게 여겨진다. 이 부분 역시 인터뷰 원문을 보고 싶은 대목이다. 어쩌면 앞으로 이 책이 제목으로 사용한 베케트의 말처럼 "다시 더 낫게 실패"할 기회를 가질 수 있을까? 기대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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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에 - 오늘 모든 사람은 자기의 희망과 가장 소중한 생각을 감히 그 자신에게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나 역시 내가 오늘 자신에게 원하는 것, 올해 나의 가슴에 떠오르는 최초의 생각 - 즉 어떤 사상이 앞으로의 나의 생에 토대가 되며, 보증이 되며, 달콤함이 될 것인가를 말하려고 한다. 나는 사물에 있어 필연적인 것을 아름답게 보는 법을 더욱더 배우고자 한다. 그래서 나는 사물을 아름답게 만드는 이들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운명애: 이것이 나의 사랑이 되게 하라. 나는 추한 것과 싸우고자 하지 않는다. 나는 비난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비난하는 자를 비난하는 것 조차 하지 않으련다. 눈길을 돌리는 것만이 나의 유일한 부정이 될 것이다. 대체로 언젠가 나는 예라고 말하는 자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니체, <즐거운 지식> 















"Zum neuen Jahr. — Heute erlaubt sich Jedermann seinen Wunsch und liebsten Gedanken auszusprechen: nun, so will auch ich sagen, was ich mir heute von mir selber wünschte und welcher Gedanke mir dieses Jahr zuerst über das Herz lief, — welcher Gedanke mir Grund, Bürgschaft und Süßigkeit alles weiteren Lebens sein soll! Ich will immer mehr lernen, das Notwendige an den Dingen als das Schöne sehen: — so werde ich Einer von Denen sein, welche die Dinge schön machen. Amor fati: das sei von nun an meine Liebe! Ich will keinen Krieg gegen das Hässliche führen. Ich will nicht anklagen, ich will nicht einmal die Ankläger anklagen. Wegsehen sei meine einzige Verneinung! Und, Alles in Allem und Großen: ich will irgendwann einmal nur noch ein Ja-sagender s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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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ire 2014-01-15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만에 들어온 서재에서 간만에 바라님 글을 읽고 왠지 반가워 몇 자 남깁니다.
우선, 새해에도 좋은 복 많이 받으세요.^^
저도 새해 초 어떤어떤 연유로 니체의 저작들의 몇 구절을 다시 읽었던지라 이 포스팅이 반갑네요. 니체를 읽노라면, 전 그가 영원히 풀 수 없는 숙제를 내주는 선생이자 숙제 검사는 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으로 여겨져 참 매력적이에요. 이번에 저는 '아침놀'을 비롯해 '즐거운 학문' 등의 몇몇 저작에 실린 아포리즘을 읽게 됐는데 구구절절 큰 감동을 받았다는...
암튼, 점점 더 깊어져가는 바라님의 공부가 올 한 해 동안에도 기쁨이 되시길...^^

바라 2014-01-18 01:55   좋아요 0 | URL
chair 님 반갑습니다 ㅎㅎ 인적 드문 이곳까지 찾아와주시고. 저도 니체의 숙제 검사는 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매력적인 것 같습니다. 숙제 검사에 엄격한 사람들은 이미 충분히 너무 많은 것 같으니까요. 군 생활할 때 처음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을 때 집었던 책 중 하나도 <아침놀>이었던 기억이 나네요. chaire님도 평안하시고 건강한 한 해 되시기 바랍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네이션=스테이트(국민국가)의 기원은 거기[절대주의 왕권]에 있다. 왜냐하면 네이션(국민)은 그때까지 봉건적 신분제하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한 사람의 절대적인 왕을 따름으로써 평등하게 되었을 때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네이션은 ethnic(민족)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언어나 종교의 공동성으로도 환원되지 않는다. 같은 에스닉이 다른 네이션에 속하고, 같은 언어나 종교를 가진 자가 다른 네이션에 속하는 일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부족이나 공동체나 언어의 차이를 넘어선 이런 균질성은 절대주의적 국가하에서 성립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신하 또는 '국가의 백성'인 동안은 네이션이 성립하지 않는다. 네이션=스테이트가 확립되는 것은 이런 절대적 왕권이 폐지되고, 그때까지 왕의 신하(subject)였던 사람들이 주체(subject)가 될 때이다. 즉 그 기원이 잊히고 마치 국민이 그 이전부터 존재했던 것처럼 표상될 때, 네이션이 확립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상과 같은 것은 견해는 네이션이 경제적인 구조에 의해 규정된 상부구조라는 견해를 근본적으로 넘어선 것이 아니다. (...)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네이션을 근대의 자본과 국가에 의해 만들어진 상상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존립하기 위해서는 불가결한 구조의 일환으로 보는 것이다. 네이션은 그저 상상(fancy)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국가와 시장사회를 매개하고 종합하는 상상력(imagination)인 것이다. (...) 네이션은 상품교환 경제에 의해 해체된 공동체의 '상상적' 회복이다. 그렇기 때문에 네이션은 근본적으로 국가나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와 대립하는 요소를 가지는 것이다." 


"프랑스혁명에서 주창된 자유, 평등, 우애라는 슬로건은 어떤 의미에서 세 가지 양식의 교환을 상징하고 있다. 즉 자유는 시장경제, 평등은 국가에 의한 재분배, 우애는 어소시에이션이다. 그런데 상퀼로트가 주창한 '우애'는 곧바로 '네이션'에 흡수되어 갔다. 다른 관점에서 말하자면, 혁명 초기 '시민'이었던 사람들은 이윽고 '프랑스 인'(민족)이 되었다. 혁명 당시의 조사에 따르면, 프랑스 어를 말하는 시민은 대략 40%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 후 국가에 의해 '국민교육'이 행해진 것이다. 프랑스 혁명에서 좌절한 어소시에이션이즘은 그 후 명확히 사회주의로서 나타났다. 이 경우 흥미로운 것은 초기사회주의가, 프루동도 예외는 아닌데, 대체로 원시기독교를 사회주의운동으로 간주하고 또 자신들의 운동을 그 재현으로 보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자의적인 공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유추(analogy)는 1848년의 혁명 이후 폐기되었다. 그것은 소위 '과학적 사회주의'가 생겨났기 때문이 아니다. 1848년의 혁명이 패배하고 이후 X 요소가 네이션=스테이트에 흡수되었기 때문이다."

"어느 국가의 경제도 자율적일 수 없다. 그것들은 아무리 저항해도 세계적 분업체제에 흡수될 수 밖에 없다. '국민경제'라기보다 국민국가 그 자체가 세계시장 안에서 형성된다. (...) 그런 의미에서 마르크스의 고찰은 영국의 자유주의적 '제국' 하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는 그런 진전 속에서 네이션이나 국가가 용해되고 글로벌하게 자본가와 프롤레타리아라는 양대 계급으로 분해되며, 그리고 후자가 승리를 할 것이라는 전망을 가졌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는 그 반대였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 만년에 영국의 노동자계급은 오히려 풍요롭게 되었고 계급투쟁에서 온건한 사회민주주의로 나아갔다. 그러나 세계자본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영국의 노동자계급이 풍요로워진 것은 자본이 아일랜드나 인도와 같은 식민지인들에게서 얻은 잉여가치의 배분을 받았기 떄문이다. 그것은 국내에서의 계급대립을 완화시켰다. 그러나 당연히 궁핍하게 된 식민지인들이 영국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국내의 계급투쟁은 경멸되었지만, 그것은 대외적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그것은 계급투쟁이라기보다도 오히려 내셔널리즘이라는 형태를 취하고 등장했던 것이다. (...) 네그리와 하트는 '제국'(세계자본주의)하에서 네이션=스테이트는 소멸하고 글로벌하게 '다중(multitude)'이 제국에 대항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 거기에는 네이션과 국가에 대한 고찰이 결여되어 있다. 세계자본주의하에서 네이션=스테이트가 희미해지고 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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