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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의 한국영화에서 한 여자와 두 남자를 다룬 이야기는 많다. 별로 놀랍지도 않은 사실이긴 하지만 대개 남자들은 여자를 사이에 두고 다투고, 여자는 그 남자들만의 교환 경제에 편입될 뿐이다. 그리고 그 와중의 온갖 갈등 구조라든지 하는 것들은 남과 여의 일대일의 결합이라는 최종적인 목적을 이루는 서사적 장치에 지나지 않는다. 빈집의 포스터는, 그리고 빈집의 결말은 언뜻 보기에 일대이의 공존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말로 일대이인가?

줄거리는 간단하다. 영화에서는 오토바이를 타고 빈집을 돌아다니는 한 남자가 나온다. 그 남자는 빈집에서 생활하면서도 빨래를 하거나 청소를 할 뿐, 그 밖의 물건은 건드리지 않는다. 어느 날엔가 그 남자는 남편에게 매맞는 한 여자를 만난다. 그리고 그 둘은 같이 빈집을 돌아다닌다. 나중에 경찰의 신고로 남자는 감옥에 갇히고 여자는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진다. 감옥 속에서 남자는 "유령되기 연습"을 통해(어떻게 하는가하면, 자신의 손바닥에 눈동자를 그리는 것이다. 곧 시선으로부터 벗어나는 식이다. 그리고 이 과정은 교도소 간수의 혹독하고도 일방적인 공격을 경유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자신을 다른 이들의 눈에 보이지 않게 할 수 있게 된다. 출소 후 다시 그 집을 찾아간 남자는 여자와 함께, 그리고 그 남편과 함께 기묘한 동거를 시작한다. 남자와 여자의 포옹이 이루어지는 체중계 위의 눈금은 0을 가리키고 있다. 그리고 장자로부터의 인용이 마지막 자막으로 오른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가 없다"

남자는 실로 유령적인 무언가를 보여주는 듯 하다. 사람들은 그를 어떤 서늘한 기운으로 느끼긴 하지만 실제로 보지는 못한다. 이 남자를 가리켜 존재한다거나 존재하지 않는다고 딱 잘라 말할 수 있을까? 빈집을 들르는 이 남자는 자체로는 현전하지 않는, 그러나 동시에 그 빈집의 '소유주'들에게 있어서는 쉽사리 떼어낼 수 없는 처치곤란한 대상이다. 그렇다면 이 유령에게 우리가 해야 할 공정한 태도란 어떤 것일까. 여기서 어떤 평자는 데리다를 따라서 유령의 존재론에 이어 환대의 윤리학이라는 테마를 섣불리 끄집어 내는 것 같지만 이 영화의 교훈으로 '무조건적이고 유보없는' 환대라는 말을 '덧붙이기'는 약간 망설여진다. 그렇다고 이 영화를 어떤 '노마드적 삶'의 양식을 자본주의적 대안으로던져주고 있다고 보기도 좀 무리가 따른다. 
 


마지막 장면을 보면 그 남자라는 제3자의 개입으로 인해 매맞는 여자와 남편의 결혼생활은 다시금 어떤 질서와 안정을 되찾는 것 같다. 곧 남자는 이 둘 모두에게 있어서 현실을 견뎌낼 수 있게 만드는 하나의 환상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 때 그 남자라는 유령적 환영을 대하는 남편과 여자의 태도는 같지 않지만, 최소한 그것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공통적인데, 이들 모두 남자의 유령되기 연습처럼 손바닥에 그려진 눈을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또는 외면할 수 밖에 없는 손등의 위치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때 현실적 관계에 있어서의 어떤 맹점, 또는 상상적 착각의 필연성의 문제는 자연히 뒤따라 나오는 것이겠다. <말>지에 실린 정성일의 다음과 같은 평가는 영화를 보고나서 어렴풋하게 느끼고 있던 아쉬움을 거의 흡사하게 표현해주고 있는 것 같아서 인용해본다.

"그는 점점 더 세상을 하나의 수수께끼로 만들고 있으며,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각자의 구원을 위한 환상을 만들어내야 한다. 김기덕은 이제 그것을 구하기 위해서 자해를 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는 이제 무능력에서 무관심으로 옮겨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김기덕의 영화를 보고 그가 이제 순화되어 가고 있다고 말하는 견해에 반대하는 까닭이다. 그는 주관적 목적론의 그 어떤 전도된 세계 속으로 빠져들어가고 있다. 나는 그것이 슬프다. 김기덕은 그 싸움을 통해서 구체적이고, 실재적이며, 현실적인 좋은 세상의 환상을 향해, (이렇게 말하는 것이 허락된다면) 공동의 객관적 착각의 공존을 위해, 더 나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주관적 착각의 왕국에로 이끌렸다."
"공동의 객관적 착각", 이 말들에 방점을 찍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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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balmas > [퍼온글] 드디어 마침표를 찍었다 임필성 감독이 말하는 "남극일기"

 어제밤에 ocn에서 <남극일기>를 봤다.

무쟈게 무섭더라... 끄고 싶은 걸 결말이 넘 궁금해서 끝까지 봤다.

TV로 봤으니 중간중간 광고가 있어 다 볼 수 있었지 극장에서 봤으면 고문당하는 것 같았을 것 같다.

다보고 자려니 방에 불이 켜 있어도 불은 끈 것처럼 시야가 차단되는 느낌이 들었다. 꽤 무서웠다.

근데 앞에 각색인가 각본에 봉준호 감독이 있어 오늘 검색해보니 두 감독이 막역한 사이란다.

<괴물>에서 박해일의 선배로 출연하기도 했었단다.

영화는 무서웠는데, 인터뷰는 넘 웃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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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마침표를 찍었다 임필성 감독이 말하는 <남극일기>
[필름 2.0 2005-05-25 20:00]

무릇 모든 일엔 시작과 끝이 있다. 한국 최초의 남극 탐험 영화 <남극일기>는 시작도 힘들었지만 마치기는 더욱 힘들었던 영화다. 제대로 돌아올 수 없을 것만 같던 불귀(不歸)의 설원, <남극일기>에서 돌아온 임필성 감독을 만났다

인간의 본성을 그리는 게 주가 된 영화이긴 하지만, 볼거리도 만만치 않다.

내가 처음 제작사인 싸이더스픽쳐스의 차승재 대표를 설득했을 때, 구경거리로서도 아깝지 않은 영화가 될 거라고 말했다. 촬영지인 뉴질랜드의 스펙터클한 광경도 있고 스타 배우들의 좋은 연기, 그리고 몇 번의 공포 장면, 그런 기대를 충족시켜 준다면 영화라는 매체의 원초적인 매력인 구경거리로서도 114분이라는 상영 시간과 7천 원이 아깝지 않은 영화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 속에서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하는 거고.

어떤 관객들에겐 이야기보다 스펙터클이 더 강하게 다가올 수도 있겠다.

내가 담아내려는 어둡고 공포스러운 세계를 모두가 공감해 주길 바라진 않는다. 단편영화 때부터 그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있었다. 한쪽에선 예선 탈락한 영화가 다른 쪽에선 상을 받고, 부산은 떨어졌는데 베니스는 가고. 이런 영화를 찍어왔기 때문에 '모두가 좋아하는 영화는 할 수 없구나'라는 생각이 강했다. 그런 면에서 첫 장편 상업 영화인 <남극일기>는 내 개인적인 취향과 대중의 보편적인 취향이 교집합을 이룰 수 있다고 봤다. 지금 내 레벨이 대중 입맛에도 맞고 영양가도 높고 먹기도 편한 음식을 만들 수 있는 단계는 아니다. 스펙터클과 스타, 그런 조건조차 없었다면 만들어지기 어려운 영화였을 텐데, 그걸 최소한의 접점이라 생각하고 내가 의도한 나머지 부분을 좋아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굳이 억지로 설득하고 싶진 않다.

그런 생각 때문인가, 확실히 관객들에게 불친절한 부분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대사가 안 들린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여섯 명 대원들이 구분이 안 간다고도 하고.

단편영화와 비교해본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을 많이 했다. 노력을 안 한 거는 아닌데 내가 생겨 먹은 게 이러니까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조금만 더 능동적으로 보면 그런 배려를 느낄 수가 있는데 관객들에겐 떠서 먹여 주는 게 너무나 익숙한가 보구나, 어떤 절망감 같은 걸 느낀다. 자막도 추가로 넣어주고 대사도 ‘줄줄줄’ 설명적인 것까지 많이 살린 데다 다른 사운드를 말도 안 되는 수준까지 낮추면서 대사를 키웠는데 이해가 안 된다니, 내가 이해가 안 된다. 의상도 고민이 많았다. 탐험복이 우주복 같지 않아서 디자인이 한정적이다. 딱 나와 있는 디자인 내에서 그나마 색을 조절해야 구별이 간다. 내 취향대로라면 대원들 의상도 전부 모노 톤으로 가고 싶었는데 정정훈 촬영감독이 "그러면 관객들이 구별 못한다. 색깔로 구별해줘야 한다"고 해서 그나마 빨강, 노랑, 검정으로 갔다. 여섯 명을 여섯 색깔로 입혀 놓으면 무슨 독수리 오형제 같지 않나.(웃음) 지금도 세 가지 색깔 대원들을 잡은 장면을 보면 무슨 텔레토비 같은데 전부 다르게 입었다면 이런 영화에 얼마나 생뚱맞았을까.

탐험대장 도형(송강호)과 민재(유지태)에게 똑같이 빨간색 의상을 입힌 건 둘이 유사 부자관계라는 설정 때문이었나?

도형, 민재, 성훈(윤제문) 셋이 빨간색이다. 도형과 민재를 같은 색으로 표현한 건 명백히 그런 의도가 있었다. 성훈은 그 구도에서 어차피 멀리 있으니까 크게 지장 없을 거라고 봤고. 그런데 아뿔싸, 김선민 편집 기사도 도형과 성훈을 헷갈리는 거다.(웃음) 그런 반응을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지만 편집 기사가 헷갈리니 나도 당황했다.

그런데 왜 탐험대가 여섯인가? 다섯이나 일곱이면 안 되나?

처음 시나리오는 ‘독수리 오형제’에 입각해서 다섯 명으로 썼다. 근데 다섯 명으로 출발하면 클라이맥스에선 세 명밖에 안 남는데 그 긴 시간을 어떻게 끌고 가나 막막했다. 지금도 투 샷 다음에 스리 샷 나오고 다시 포 샷, 그리고 투 샷 이렇게 가는데 다섯이었으면 그 조합이 더 적을 테니까. 또, 일곱은 너무 많았다. 일곱으로 가면 도형과 민재가 갈등하는 장면에서 2대 1로 싸워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초반에 이해준 작가와 시나리오를 쓰면서 남극의 자연 현상 중 어떤 게 인격적인 게 될까 고민을 했다. 동상, 화이트아웃(온 세상이 아득한 빛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백시 현상), 블리자드(눈보라를 동반한 남극의 겨울 폭풍), 크레바스(‘악마의 틈새’라 불리는 빙하 표면의 균열) 등이 나오더라. 그것에 대입해 하나씩 사고를 당하는 게 어떨까, 애거사 크리스티의 <열 개의 인디언 인형>을 생각했다.

[[0]]그들은 모두 각자의 도달 불능점을 향해 탐험을 하는 것이기도 하다. 영화는 그것을 남성적인 욕망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섯 가지 유형의 남자가 필요했겠다.

동사무소 공무원 출신 대원 재경(최덕문)은 소시민적인 욕망이 가장 큰 인물이다. 가장으로서 가족에 집착하는 캐릭터였는데 그런 약한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최초의 희생자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분란을 일으키는 악역 성훈은 겉으론 의리를 내세우지만 사실 어떨 때 보면 마초의 가장 약한 모습을 드러낸다. 성훈은 재경을 구하러 가자고 하지만 그게 동료애 때문만이 아니라 한편으론 두렵기 때문에 도망가고 싶은 거다. 비겁한 남자 캐릭터다. 식사 담당 근찬(김경익)은 <장화, 홍련>에서 문근영이 연기한 수연 같은 순박한 희생자다. 순진하고 소박하지만 대장에게 반항하거나 상황을 뒤엎을 순 없다. 권위에 순응하는 남자 캐릭터였다. 부대장 영민(박희순)은 콤플렉스가 많은 남자다. 대장에 대한 2인자 콤플렉스와 신체적인 콤플렉스가 있다. 눈이 나쁘고 체력이 약해서 더 지지 않으려고 탐험가가 됐다. 도형과는 달리 탐험 그 자체보다는 탐험으로 얻어지는 크레딧이 필요한 사람이다. 그런데 편집 단계에서 이상 네 캐릭터에 대한 디테일을 생략해서 아쉬움이 남는다.

제일 중요한 캐릭터는 도형과 민재다. 그들의 도달 불능점은 뭔가?

민재는 도달 불능점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 진짜 막내, 아직 남자가 되지 않은 소년이다. <플래툰>의 찰리 신 캐릭터처럼 전쟁 자체는 모르고 전쟁의 추상적인 면만 아는 캐릭터다. 반면 도형은 전쟁 자체인 사람이다. 도달 불능점에 가야 한다는 목표가 강한 게 아니라 어쩌면 이 사람 자체가 ‘인간 도달 불능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이거는 <주먹이 운다>의 류승완 감독이 좋아한 설정인데, 도형이 애 죽고 이혼당하는 데 불치병까지 걸려서 죽으러 남극에 왔다, 이런 설정으로 갈까도 생각했다. 너무 심하다 싶어 다소 객관적으로 그린 거다. 도형은 다른 대원들과는 달리 도달 불능점에 간다고 해서 어떤 욕망을 채울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소시민적인 욕망도 명예도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어디에도 기댈 데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지점에 가야 한다. 그게 광기다. 광기라는 게 논리로 설명할 수 있다면 광기가 아니다. 도형이 거기 가면 기적이 일어난다는 둥 여기서 평생 살아왔다는 둥 말도 안 되는 논리로 다른 대원들을 설득하는데, 이런 게 광기다. 그 사람의 세계 속에선 옳지만 다른 사람들에겐 말도 안 되는 거.

도형은 왜 미쳐갈까? 남극 때문인가? 아들에 대한 기억 때문일까? 초반에 발견된 영국 탐험대의 일기가 미칠 것을 예상했으니까 미친 건가? 개연성이 부족한 거 아닌가?

일기는 설정상 드라마의 실체로 유도하는 ‘매거핀’이라 생각했다. 인간의 광기를 그린 원형적인 이야기라 관객에게 따라갈 수 있는 어떤 요소를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는 시작부터 미쳐 있는 사람이다. 처음에 도형은 크레바스의 조그만 구멍을 쳐다보다가 나중엔 빙벽 내부로 들어가서 큰 구멍을 쳐다본다. 남극이 인체 같은 느낌을 줬으면 좋겠다 생각했고, 도형이 자궁 속으로 들어간 듯한 의도로 연출했다. <모비딕>에서 노선장 에이허브가 모비딕과 함께 사라지는 것처럼, <폭풍 속으로>에서 파도타기 선수 패트릭 스웨이지가 파도 속으로 사라지는 것처럼 도형이 남극 속으로 사라져가는 느낌을 그렇게 표현하고 싶었다.

원형적인 주제는 어떤 스토리냐에 따라 본질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고 전형적인 상투성으로 비춰질 수도 있다. <남극일기>가 전형적이라는 생각은 안 하나?

전혀. 전형적이라면 투자가 빨리 됐겠지.(웃음) 전형적으로 안 가려고 온갖 몸부림을 한 것이 이 영화다. 난 이 영화를 여기까지 끌고 오면서 충무로가 상업적이라고 생각하는 전형성의 파시즘 같은 걸 느꼈다. 이런 전형적이지 않은 스토리텔링을 하느라 거의 인종차별주의에 가까운 핍박을 받았다. 그러면서 과연 무엇이 상업성을 보장해 준다는 거지? 그냥 관객의 무의식에 익숙하게 흘러가는 이야기를 찍는다면 뭐하러 작가와 감독이 필요하단 말인가? 그런 고민을 했다. 난 그런 전형성에 맞춰가는 감독이 되고 싶지 않았다. 어떤 리뷰는 영화가 미스터리라고 해놓고 촘촘하지 않다고 지적하던데, 나는 이 영화를 미스터리로 만들었다고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미스터리라는 것도 기본적인 틀이 있을 뿐이지 어떤 규칙을 꼭 따라야 하는 건 아니다. 난 관객들이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그리고 영화에 참여할 수 있도록 충분히 단초를 던져주면서 온 것 같다.

[[1]]단초를 던진 다음에 적절한 시점에서 결론을 내주고 보상을 줘야 하는데 이 영화는 그렇지 않다. 기존의 리듬을 의도적으로 타지 않은 건가?

솔직히 난 그 리듬을 잘 모른다. 물론 흉내낼 순 있겠지. 하지만 체화되지 않은 걸 사용하면 ‘구경하는 연출’이 된다. 신인감독 영화들에서 그걸 많이 보면서 난 안타를 일곱 개, 여덟 개 맞아도 승리 투수가 되자는 마음으로 찍었다. 엄청난 스펙터클도 중요하지만 난 표정의 스펙터클을 보여 주고 싶었다. 그래서 상업적으로 부담이 되는 규모의 영화가 됐지만, 이 시나리오를 조그만 고치면 연극으로도 올릴 있는 소극이라고 생각한다.

감독한테 따질 건 아니지만, 그럼 뭐 하러 70억 원을 들여 이런 영화를 만드나?

감독한테 따져도 된다.(웃음) 왜냐하면 그건 감독으로서 또 다른 욕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얘기를 몇 천 명의 관객에게 보여 주는 작은 연극으로 만들기보다는 관객에게 볼거리도 주면서 이런 주제에 대한 공감대를 키우고 싶은 야심이 있었다. 한국영화가 도전하지 않은 어떤 영역에 일천한 신인감독이 그걸 끝까지 해냈다는 거, 그게 나의 도달 불능점이었다. 이 영화에는 단 한 컷도 내가 동의하지 않은 컷이 없다. 차승재 대표나 송강호 선배가 뭐라 해도 내가 동의하지 않으면 바꾸지 않았다. 끝까지 지켜왔다는 거에 자부심을 느낀다.

<남극일기>는 이기심과 탐욕이 부른 과도한 집착을 경계하는 영화다. 그러면서 막상 당신은 과도한 집착을 보이며 이 영화를 완성한 건가? 뭔가 역설적이다.

재미있는 시각이다.(웃음) <남극일기>는 도달 불능점이 거대한 환상이라고 말하는 영화지만 <남극일기> 뿐 아니라 모든 야심적인 목표를 가진 영화들은 다 그런 거대한 환상을 좇았다. 범인을 잡지 못하는 형사 영화 <살인의 추억>도 그렇고. 그런 거대한 환상이 의미가 있다면 관객들이 반응을 해주면서 영화 자체가 생명력을 가질 때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남극일기>를 좋아할지 모르겠다. 그건 영화의 운명이다.

당신의 단편영화 <소년기>는 부자관계에 있어 ‘반역 모티프'를 공포 장르로 풀어냈는데 <남극일기>도 그런 면이 있다.

실제의 나는 닭살스러울 정도로 단란한 가정에서 컸다. 일찍 결혼해서 딸애가 있고 내 여동생도 일찍 결혼해서 애들 쑥쑥 낳고 잘산다.(웃음) 사람들이 <소년기>를 보고 자서전적인 얘기냐는 질문을 많이 했는데 주인공이 뚱뚱해서 그렇지 내가 할아버지 죽이고 그런 거 전혀 없다.(웃음) 다만 그런 얘기에 관심이 많은 거 같다. 나한테는 기존의 가치나 권위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이 있다. 중고등학교 때 반에서 거의 꼴찌하고 지진아 반에 들어가기도 했다. 난 우등생들이 쉽게 적응하는 규범들을 따라가는 게 너무 힘들었다. 군대 가서 줄 맞춰 총검술하는 게 너무 힘들어서 기절한 적도 있었다. 그게 영화에선 반역의 모티프로 드러나는 거 같다.

<남극일기>는 민재의 시선으로 시작해 민재의 시선으로 끝난다. 하지만 중간중간 민재의 시선뿐 아니라 탐험대를 지켜보는 관찰자의 시점, 남극을 인격화한 전지적인 시점이 혼재한다.

내 모든 단편영화의 시점은 1인칭이었다. 하지만 <남극일기>는 1인칭과 3인칭이 혼재한다. 그게 또 나한테는 도전이었다. 위에서 바라보는 명백히 전지적인 시점이 있는가 하면, 텐트 밖에서 창문을 통해 가까이 지켜보는 것 같은 3인칭 시점도 있다. 그런 시점들이 부딪힐 거라고 생각했지만, 시점이 일관성이 있어야 된다는 걸 누가 정한 건가, 라는 의문이 있었다. 남극이 무형의 존재이기 때문에 어디든 침투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시점을 섞어 썼다. 혼동된 시점을 통해 이상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싶었다. <멀홀랜드 드라이브>같은 영화를 보면 영화를 이해한다는 느낌보다 영화를 체험하게 된다. 영화를 볼 때는 혼동스럽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이상한 세계에 빠졌다 나온 듯한 쾌감이 있다. 관객에게 그런 체험을 주고 싶었다. 그래서 시점을 정리해 편하게 이해시키기보다는 다른 효과를 노리기 위해 시점을 섞었다.

중간중간 자연스런 편집 흐름에서 이탈한 기법들이 등장한다.

김선민 편집 기사가 <색즉시공>부터 <살인의 추억>까지 다양한 영화를 작업한 사람이다. 그중에서 <남극일기>가 가장 독특하다고 하더라. 처음 김선민 기사에게 보여 줬던 영화가 <인썸니아>와 <레퀴엠>이었다. 일견 정적으로 보이는 영화지만 점프 컷이나 강렬한 인터 컷이 섞여 있고 후반으로 갈수록 그게 더 과해진다. 난 <남극일기> 이야기가 원형적이고 클래식하다 하여 편집을 정공법으로 가기보다는 모던하게 해보고 싶었다. 초반에는 약간씩 점프 컷이 들어가다 나중엔 과격한 인터 컷이나 감각적인 장면 전환을 많이 썼다. 영화 후반, 민재가 영국 탐험대의 시체를 보다 영민한테 가는 장면에선 피 흘리는 장면이 인터 컷으로 짧게 들어간다. 그걸 편집실에서 보는데 스탭 중 한 명이 녹화가 잘못된 거라고 생각했다.(웃음) 편집 기사도 도형과 성훈을 구별 못하는데 오죽했겠나. 그래서 관객들이 이 영화를 어렵다고 하는 걸까? 잘 모르겠다. 다만 그런 편집이 관객의 무의식에 잔상을 남겨서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불쾌한 효과를 내길 바랐다. 그게 영화의 목표였고, 내가 원하는 리듬이었다.

[[2]]불쑥 끼어 드는 하얀 손이나 붉은 피 같은 인터 컷은 공포 분위기를 조장하기 위해서였나?

흰 눈에 피가 뿌려지면서 쫘악 스며드는 느낌, 그건 이 영화를 시작하게 된 최초의 이미지였다. 그래서 그 장면이 한 컷이라도 나와야 한다는 집착이 있었다. 그 컷에 대해 ‘저거 뭐야 도대체?’ ‘괜히 무섭게 하려고 피 뿌리는 거 아냐?’라는 반응도 있었지만 난 그 컷 하나가 80년 전 영국 탐험대가 서로 죽고 죽이면서 남극에 흘렸던 피, 그리고 지금의 탐험대가 앞으로 남극에 흘리게 될 피의 이미지를 ‘플래시백’과 ‘플래시 포워드’ 두 가지 기능 모두를 통해 읽힐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손은 일관된 거다. 남극이 도형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그게 악마의 손이라면 생뚱맞지만 도형한테는 아들의 손이고 남극의 손이다. 그래서 관객에게만 보이고 대원들한테는 안 보이는 거다.

그 손에 대해 관객들이 갖는 배신감이 있다. 예를 들어 <알포인트>에서는 희미한 귀신의 존재가 나중에 여자로 밝혀지는데, <남극일기>에선 결국 안 밝혀진다.

난 <알포인트>에서 그게 밝혀지는 장면이 제일 싫었다.(웃음)

정말 모든 컷을 원하는 대로 찍고 붙인 것 같다. 얼마나 만족하나?

배우 연기에 대해선 90%, 영화를 관객에게 체험시키고 싶었다는 면에선 60%.

나머지 40%는 뭔가?

더 영화적인 언어로 설득하고 싶었다. 남극을 캐릭터로 체험시키기 위해 여섯 단계로 구상했는데 그게 잘 안 됐다. 처음에는 평온한 설원의 모습으로 가다가 나중에 도달 불능점은 천국인지 지옥인지 모르는 그런 어마어마한 낭떠러지 같은 걸 보여 주고 싶었는데 제작 여건상 불가능했다. 그런 부분이 목표치까지 갔다면 심리 체험극 느낌을 더 줄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이왕 거대한 환상이라면 더 무시무시한 거대한 환상을 해볼 수 있는 건데 이 제작비와 여건에선 이 정도 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그래도 대단한 성과다. 특히 CG가 뛰어났다.

내 머릿속에 있는 비전을 시각 효과 회사 EON이 최선을 다해 백업해줬다. 도달 불능점 밤 장면은 모두 양수리에서 소금 뿌리고 찍었는데 그 정도로 나온 게 대단하다. 합성 장면 중엔 뉴질랜드, 한강 고수부지 스케이트장, 강원도 피닉스 파크, 양수리 세트에서 나눠 찍은 후 붙인 게 있다. 미친 짓이지.(웃음) 그런데 영화를 보면 표가 나지 않는다. EON에겐 그게 도달 불능점이었을 것이다. 어제 <반지의 제왕>을 했던 뉴질랜드 웨타 디지털의 관계자가 왔다. EON에게 몇 명이 했나고 물어봐서 8명이 했다고 하니까 기겁을 하더란다. 그러면서 웨타로 오라고 제의를 했단다. 정성진 팀장이 그런 제의받고도 안 가겠다고 했다. <남극일기>가 그런 예술가로서의 투지를 한국영화에서 도전해볼 수 있다는 기회를 마련해줬다는 점에서, 감독으로서 기쁘면서 고맙다.

어떤 면에서 <남극일기>는 모든 스탭들에게 도달 불능점이었을 것 같다.

4, 5년 전 35mm 단편영화 찍고 2년 전 DV 작업을 했던 나로선 실로 놀라운 경험이었다. 지금 한국영화 퀄리티의 상당 부분이 스탭들의 엄청난 노력과 장인 정신에서 나온 것 같다. 자부심을 가질 정도로 정말 뛰어나다. 난 그런 노력이 참 신성하다는 생각이 든다. 정정훈 촬영감독도 <친절한 금자씨> 촬영 일정 때문에 마지막 5% 정도를 못 찍고 떠났다. 감독으로서 서운함이 적지 않았지만 후반 작업하면서 보여 준 열정과 집요함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가 디지털 색보정에 신경을 많이 써서 이 영화가 주는 히스테리컬한 느낌이 잘살았다.

드디어 첫 장편영화를 완성했다. 영화감독이라는 직업에 대해 어떤 생각이 드나?

장편영화는 혼자 만드는 게 아니더라. 정말 외로웠던 순간도 있었지만 든든한 마음으로 작업한 기간이 길었다. 다 스탭들 덕이다. 앞으로도 나보다 뛰어난 스탭, 그게 확실히 ‘뜬’ 스탭이라기보다는 검증되지는 않았지만 EON이나 황인준 미술감독처럼 잠재력과 열정이 큰 스탭들과 함께 영화를 하고 싶다.

사진 김춘호 기자
한승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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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일기는 지독한 영화이다. 굳이 5년간의 제작 기간, 85억원이라는 제작 액수 등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말이다. 임필성은 첫 장편 데뷔를 찬사와 악평의 양극화된 관중들과 함께 맞게 되었고, 송강호는 여전히 건재를 과시했다. 그의 영화를 다 본 것은 아니지만, 내가 본 한에서는 가장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뿜어냈다. 유지태도 나름대로 잘 어울리는 배역을 맡긴 했지만, 송강호에 가려진 탓인지 또는 자신의 연기력이 덜 만개한 탓인지 어쩐지 한 끗이 부족한 느낌이었다. 

 

남극일기는 또한 숭고한 영화이다. 여기서의 숭고란 바로 ‘미’와 대비되는 칸트적 의미에서의 숭고라고 해보자. 그것은 물론 일단 롱기누스 이래로 이해된 바와 같이 엄청난 크기, 무제한적인 대상의 ‘양’적 형식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을 가리킨다. 광막한 빙하, 남극. 그리고 ‘도달불능점’으로의 무한한 탐험이 주는 막막함은 그 크기(자본뿐 아니라 스펙타클 자체가 갖는)에서부터 관객을 압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숭고는 단지 남극(실제로는 뉴질랜드이지만) 자체의 속성에서만 비롯하는 것은 아니다. 남극일기의 영상들이 숭고한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부적합성, 우리의 이성에 온전히 현시되지 않는 이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물론 쾌와 불쾌의 교차, 그리고 이러한 낯선 부정적 쾌를 안겨주는 영화가 그리 드문 것은 아니다. 만약 남극일기가 단지 수학적 숭고에 그친 것이었다면 아마 그저 그런 재난 영화의 범주에 넣는 것 정도로 지나갈 수 있는 영화라고만 하면 족할 것이다. 반지의 제왕에서도 크기의 숭고는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이러한 할리우드적 숭고와의 단절을 이루는 것은 바로 이 영화가 역학적 숭고-우리의 정신을 근본적으로 문제삼는-의 차원으로 옮아가는 지점에 있다.

 

“이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고 파스칼이 말했던가. 남극의 공간은 절대적으로 비어 있는 공간, 마치 무 자체인 것만 같은 공간이다. 6달은 낮만 계속되고, 6달은 밤만 계속되는 곳, 하늘은 마치 이전에, 어쩌면 태어나기 전부터 본 것만 같이 태연하고, 그 드넓은 공간을 걷고 또 걸어도 제자리로 돌아오는 곳, 모든 계측기와 통신 장치가 무력화되는 곳이 바로 남극이다. 도달불능점을 향하는 6명의 대원들은 이 ‘무’와 싸워야 한다. 마치 매트릭스에서 모든 가상을 걷어낸 이후 네오 앞에 펼쳐졌던 사막의 모습처럼, 남극은 모든 상징적 질서를 걷어낸 뒤에 존재하는 ‘실재’를 탁월하게 형상화한다. 아까 흘리고 간 사진과 그 옆에 난 자그마한 구멍, 한참을 헤매다가 다시 돌아오는 이 지점은 그리고 항상 그 자리에 있는, 또 제자리로 돌아오는 실재이다. 언제 어디서 크레바스를 숨기고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실질적으로 6명의 탐험대를 떠받치고 있기에 실재이다. 그 자체 도달불능점이면서 그 안에 도달불능‘점’을 가지고 있는 ‘물 자체’로서의 남극은 실재이다. 그리고 이 실재에 온갖 환상과 의미가 덧붙여지는데, 이는 영화 종반에 80년전 영국 탐험대가 남기고 간 일지에서 나오는 말이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다. “우리의 욕망이 이곳을 지옥으로 만들었다.” 무엇에 대한 욕망인가? 바로 정복과 성취와 만족을 위한 욕망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욕구demand와는 구별된다는 의미에서 정확히 욕망desire이라고 새겨져야 마땅하다. 세계최초라는 상징, 누구도 가보지 못한 곳에 가야한다는 상징에 의해 매개되어 있는 욕망 말이다.(물론 이 탐험대의 대장인 송강호, 그리고 그의 아들과도 같은 막내 유지태는 거기에 태극기 따위를 꽂으러 가는 것은 아니다.) 이들이 사로잡혀 있는 강박증은 이 영화가 안겨주는 충격과 공포가 단지 외적 대상이 아닌 탐험대의 내부, 더 정확히는 우리의 내부에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는 어설픈 타협을 거부하고 끝까지 간다. 이제까지의 단서에 그친다면, 남극일기는 식상한 공포 영화의 아류가 되거나, 대자연의 엄청난 위력 앞에서 인간 승리의 드라마를 그려내는 재난 영화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단연 송강호라는 캐릭터이다. 그는 대장으로서 탐험대원 6명을 이끄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이다. 그런데 이 ‘아버지’라는 지위가 상당히 독특하고 애매하다. 아버지는 아버지인데 자식이 없는 아버지이다. 그는 피를 나눈 가족이 없는 것으로 보이며 탐험대원들이 유일한 그의 가족-아들들-일뿐이다. 그의 아들은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아파트에서 떨어져 죽었다. 엄마는? 아이의 엄마는 영화를 통틀어서 어디에서도 암시되지 않는다. 다만 이 죽은 아들의 환상은 탐험하는 내내, 아니 송강호가 살아있는 내내(탐험 자체가 그의 삶, 생명과 동일시되어 있으므로) 계속 될 것이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추락하는 아들의 환상을 쫓아버리기 위해서, 아니면 그 환상 속으로 완전히 침잠하기 위해서 그는 탐험한다. (빗금쳐져 있지 않은)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도달불능점을 향해 가거나, 늘 텐트 밖에서 ‘가만히 있는’ 것뿐이다.(전진과 정지의 일치)

 

이 아버지 캐릭터는 갈수록 입체감이 증발되어 가며 그 일관된 잔혹함과 광기를 내보인다. 그는 자신의 유일한 가족인 아들을 한 명 한 명 죽여 간다. 물론 직접적으로 죽이는 것이 아니라, 도달불능점을 향한 ‘불가능한’ 탐험에 내버려 둠으로써 말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 강렬한 생명력의 “원초적 아버지”는 그의 친아들이 죽었던 방식을 계속해서 ‘상연’해갈 뿐인지도 모른다. 균도 없는 남극에서 감기에 걸린 듯이, 환상에 사로잡혀서, 아들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한번 죽임으로써. 나약한 아들들은 하나둘 죽어간다. 아버지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전진할 뿐이다. 남극이라는 무대 위에서 끝없이 반복되는 혹독한 방치의 드라마. 이것은 적어도 ‘외관상으로’ 모노드라마는 아니다. 막내아들 유지태가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다. 유지태 역시 친부모는 없다. 그저 송강호에게 매혹되어 탐험대에 합류했을 뿐이다. 이 ‘상상적’ 매혹은 기묘하게도 막내아들과 아버지의 동형성을 암시한다. 일례로, 처음 자신의 잘못으로 한 대원이 죽었을 때, 그리고 다른 대원들이 차례로 죽어 나갔을 때도 그는 구조를 요청하지 않고 탐험을 계속하는 쪽을 택한다. 대장으로부터 80년 전의 영국 탐험대원들이 남기고 간 일지를 건네받은 것도 유지태이다. 이처럼 거울의 양면처럼 자기를 비추고 재인지하는 아들과 아버지는 결국 끝까지 남는다(왜냐하면 처음부터 이렇게 되도록 연극 장치가 조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비틀려진 목적론).

 

이 와중에는 부대장으로 대표되는 아들들의 반란이 감초처럼 끼어든다. 어떤 주석가가 했듯이 후기 프로이트의 토픽을 비유하자면, 부대장의 반란은 자아붕괴의 은유가 되는 것은 억설일까? 이 반란에 아버지는 자아(자연의 빛을 한껏 받아 안는)의 안경을 부숴버리는 것으로 응수한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됐다. 자아는 알아서 자신의 손목을 그어버린다. 동시에 초자아는 인자하게 다른 아들의 발을 자른다. 광폭한 날씨의 씬과 더불어 정신 장치에 대한 탈중심화는 보다 급진적으로 진행된다. 막내아들(이드)과 아버지(초자아)의 동형성이 보다 선명하게 발휘되는 것은 이 지점에서부터이다. 이 둘이 사실 무의식의 상이한 두 측면이라는 점에서 사실 전적으로 다른 것이 아닌 것처럼, 남은 의식의 아들들의 무덤을 지어준 뒤 둘 다 도달불능점으로의 행보를 계속한다. 그리고 일몰의 마지막 순간, 이 둘은 도달불능점에서 조우한다. 라캉이 “칸트와 함께 사드를”이라고 외쳤을 때 또한 이 목적론적 마주침과 다른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자유로워져라”, 아들은 “즐겨라”를 외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들과 아버지의 항이 바뀌어도 별다른 상관은 없다.) 만신창이가 된 채로, 자신의 진리는 알지 못한 채로 아들은 묻는다. 이 도달불능점이 당신에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러나 애초에 질문은 핵심을 빗나가 있는 것이 아닐까. 환상을 걷어내고 ‘가만히’ 그것만을 지속하는 충동drive 또는 향락jouissance. 그것은 만족과 불만족의 변증법, 상징적 의미망을 비껴나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탐험은 아무 것도 없는 곳으로, 선험적 이성의 변증론이 가리키는 이념의 세계로 외출하는 과정 자체, 그곳으로 가야 하기에 갈 수 있는 의무 자체에서 그 윤리성을 획득한다. 분명히 해야 할 것은 그의 모티브는 아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 죄의식을 떨쳐버리고 싶은 심리에 있지 않다는 점이다. 유지태는 물론 그 과정을 알지 못한 채로, 그러나 그 숙명적 매혹을 느끼면서 그 윤리적 행위에 합류했다. 마지막 대화의 와중에 “너만은 나를 말려야 했다고”라는 말 속에서 이 두 두 남자의 동근원성은 통렬하게 드러난다. 이 ‘실재의 윤리’는 새로운 주체철학의 판본을 제시한다. 이 분열증. 아버지와 아들이 공유하는 이 분열증의 교훈은 결국 어디서 찾아야 할까.(결국 이 교훈을 찾으라는 것이 이 새로운 계몽철학의 유언이 될 것이다)아들은 구출받고 아버지는 계속 제 갈 길을 간다.

 

마지막으로 남는 물음. 남극이라는 실재 속에서 실재의 윤리는 제 나름의 정당성을 찾기는 한다. 그러나 실재의 윤리학에 대해 적절한 ‘대상’을 찾아 주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그 실재는 한갓 스크린 위에서, 이곳 남한이 아닌 저 멀리 뉴질랜드에서, 또는 안전한 거리를 두고 숭고를 감식하는 우리의 미감적 이념 속에서, 가상적으로만 남아있는 낭만주의적 잔재에 불과할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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