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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은 '대학생의 친구'인가 '욕망의 친구'인가?"

[삼성을 생각한다] "이 땅 젊은이에게 삼성은 무엇인가"


기사입력 2010-04-20 오후 12:12:38

삼성 반도체 노동자가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한참을 울었다. 20대인 그녀는, 내가 대학생이랍시고 게으르게 뒹굴대며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볼 때, 반도체를 검사하기 위해 끝없이 제품을 납에 넣었다 빼며 제 자신을 죽여야 했다. 처음 직장에 발을 내디뎠을 때 그녀가 가졌을 꿈을 생각하면, 한없이 부끄러워져 나도 모르게 흐느끼게 된다. 고된 노동에도 때로는 친구들을 만나 담소를 나누기도 했을 테지만, 다시 공장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될 때, 지나가버린 그 시간을 얼마나 안타깝게 그리워했을지.

대학을 아직 떠나지 못한 나는 다시 등교를 한다. 도서관 전산실에 들렀는데 내 앞에는 삼성 컴퓨터가 놓여 있다. 책을 들고 강의실에 들어서자 삼성 에어콘이 눈에 띈다. 어떤 학생은 삼성 MP3 플레이어를 귀에 꽃은 채 강의실로 들어오고, 어떤 학생은 삼성 애니콜에 전화가 와서 강의실을 나가며, 어떤 학생은 삼성 노트북 센스에 강의노트를 작성할 준비를 하고 있다. 삼성이 없는 곳이 없다. 새삼 느낀 것이지만, 나는 삼성에 둘러싸여 있었다. 거기에는 나와 같은 20대의 어느 노동자의 손에서 나온 반도체가 들어있을 테지만, 학교에서는 공공물품을 거의 삼성 제품으로 구매하고, 학생들은 서비스 좋다는 삼성을 아무 생각 없이 손에 들고 있었다.


▲ 교정 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는 대학생들. 이들은 극심한 취업 경쟁으로 지쳐 있다. 대기업 취업에 성공하면, 행복한 일상이 기다리고 있을까. 삼성 문제를 푸는 것은 삶의 대부분을 보내는 일터를 보다 낫게 바꾸는 일이기도 하다. ⓒ프레시안

삼성의 제품만이 우리 곁에 와 있는 것은 아니다. 여러 기업들이 학생들의 동아리모임 활동을 지원하곤 하는데, 너무나 프랜들리한 삼성은 그 지원에서 가장 앞서가며, 나아가 지원을 넘어 동아리를 대체하는 경지로 나아간다. 누추하게 잔디밭에 둘러 모여 기타치고 노래 부르기보다는 폼나게 해외 배낭여행을 떠나길 원하는 대학생들은 기업이 지원하는 모임을 선호할 수밖에 없는데, 삼성은 영삼성(youngsamsung)을 운영하여 대학 내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는 것이다. 자본은 언제나 욕망과 친구한다. 삼성은 대학생들의 친구이다.

그런데 이 친구는 누구라도 가리지 않고 친하게 지내는 모양이다. 자세한 뒷사정은 알지 못하나, 작년엔 학생회와 삼성이 손을 잡으려한 일이 있었는데, 서울 지역 '한대련'과 삼성의 합작사업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광고지면을 내주고 지원을 받는 정도의 일이 아니라, 삼성 올앳카드 회원을 학생회가 대신 모집해주고 카드 가맹점에서 할인을 받는 형태의 사업으로, 의결이 끝나고 집행을 기다리다가 몇몇 대학의 반대로 뒤집어졌다고 하는데, 그 후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아직 듣지는 못했다. 욕망을 가진 누구라도 친하게 지내는 삼성은 이정도로 대학생들의 친구이다.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는 말을 어릴 때부터 듣고 자라온 우리는 그래서 삼성을 멀리하지 못한다. 얼마나 좋은 친구인가. 세상과 이어주고 더위도 식혀주며 음악도 들려주고 여행도 시켜준다. 얼마나 고마운가. 삼성이 이렇게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다니.


▲ 영삼성 홈페이지.

그래서 그런지 대학생들에게 삼성은 선망의 대상이라고 한다. 나는 줄곧 '삼성맨'이라는 이름이 부정적인 뉘앙스를 담은 것인 줄 알고 있었는데 아니었나보다. 그러나 조금 서글퍼지지만 거기에 들어가기 전에 우선 조심해야 될 것이 있는데, 바로 삼성은 학벌을 중시한다는 것. 얼마 전에 언론에서 삼성 사장단의 학벌이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고 호들갑을 떨며 삼성 임원의 꿈을 심어주기도 했는데, 대개의 기업들이 서울대 인맥을 이용하려 하기 때문에 이는 특이해 보이기도 하지만 실상은 다른 곳에 있다.

김용철 변호사에 따르면, 삼성에서 임원이 되는 것은 로비/섭외 실력으로 이뤄진다. 그런데 로비/섭외는 서울대 인맥이 더 수월하지 않겠는가하면 그게 아니다. 뻔히 알고 있는 자기 동창에게 큰 돈을 쥐어주며 로비하는 것은 민망하기도 하고 불편할 수 있으며 나아가 일이 어긋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리어 아예 관계가 없는 사람이 큰 돈을 챙겨주는 것이 로비에서는 훨씬 더 편할 수 있는데, 그런 까닭에 계열사 임원 중에는 비서울대출신이 많을 수 있지만, 권력의 정점인 구조본은 모두 소위 명문대 출신으로 채워져 있는 것이다.

아무튼 높은 경쟁률을 뚫고 직원이 된다면 다행한 일일 수도 있겠으나, 역시 또한 주의해야 할 점이 몇 가지 있다. 누군가는 자랑스럽게 올렸을지도 모르나 그저 황당함과 경악만을 안겨주었던 동영상에서 본 매스게임을 실제로 하러 동료들과 집결해야 한다. 물론 멋진 콘도에서 삼성은 돈의 힘을 보여줄 것이고, 임원이 방문해서 삼성이라는 자부심과 함께 임원이 되고자 하는 욕망도 심어줄 것이다. 멋진 일 아닌가. 내가 삼성맨이라니. 그러나 거기에서 재미를 느끼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 재미가 계속되리라는 희망은 지속되기 힘들다. 이직률이 가장 높은 기업이라는 삼성에서의 재직 기간은 보통 7~8년이라고 하는데, 3~4년차 사원들이 이직률은 30%대나 된다고 한다.

삼성을 발판으로 더 나은 곳으로 가려는 것일 텐데, 삼성에 계속 충성하다간 너무 일찍 묘비를 세워야 되는 불상사가 일어날 수도 있다는 예감이 들었을지 모른다. 물론 잘 견뎌낼 수도 있다. 경쟁과 성과주의는 한국에서 익숙한 것이니까. 삼성 안에서 <한겨레>나 <경향신문>을 못 보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최근 삼성에 취직한 친구의 말로는 인터넷 포털 DAUM도 눈치가 보여 접속을 못한다고 하는데, 그것도 견딜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노예가 아닌 한, 무작정 견디는 것은 인간에게는 적합하지 않다. 인간은 의미를 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 막연히 긍정하며, 그 일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생각해보지 않으려 하지만, 우리는 거기에 멈춰서있어서는 안 된다. 함석헌은 사람의 사람된 점은 생각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즉 "사람은 할 뿐만 아니라 하는 줄을 아는 것이요, 알 뿐만 아니라 아는 줄을 아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의 의미를 알 수 있어야만 하며, 그러할 때 우리의 삶은 질적으로 도약한다.

사람들은 삼성의 세련된 사무실에서 잘나가는 현대인이 되고 싶을 것이다. 그렇게 당신은 이미 인천 송도하수처리 시설 사업권을 차지한 '삼성 베올리아 인천환경주식회사'에 취직해서 물 사유화 사업에 앞장설 수도 있다. 또는 삼성생명에 취직해서 삼성이 추진하고 있는 "정부 보험을 대체하는 포괄적 (민간 의료)보험", 즉 지금의 건강보험을 통째로 사적 의료보험으로 대체하려는 계획에 뛰어들 수도 있다.

또는 삼성캐피탈에 취직해서 부실 규모를 줄이기 위해 고객 도장을 몰래 만들어 불법 대환 대출을 할 수도 있다.(걱정 마시라. 금융감독원은 알고서도 처벌 하는 둥 마는 둥 했으니.)

혹은 운이 좋은 사람은, 분식 회계 장부가 법원에 넘어가면 서류를 빼돌린 다음 어두운 밤 해운대 백사장에서 불태워버리는 낭만을 즐길 수도 있고, 2005년 공정거래위원회가 삼성 토탈(주)에 대한 가격 담합 조사를 했을 때처럼 공정위 조사관이 확보한 자료를 가로채 도망가면서 찢어버리는 액션을 즐겨볼 수도 있으며, 더 운이 좋아 압수수색과 같은 긴급상황이 벌어지면 검찰이 주는 충분한 시간동안 내부자료와 파일을 파기하는 스릴을 맛보는 기회도 누릴 수도 있을 것이다.(너무 걱정 마시라. 저런 일들은 가벼운 과태료만 내면 끝날 테니.)

더 화끈한 일을 할 수도 있는데, 만일 사무직 노동자와는 다른 대우를 받는 생산직 노동자들이, 컨베이어 벨트의 조립라인 노동자나 반도체 노동자가 처해 있는 그런 열악한 환경과 고된 노동을 개선하려 노조라도 만들라치면, "너 하나 쥐도 새도 모르게 끌어 묻을 수 있다"는 영화 같은 대사를 내뱉고 집단 폭행을 가하는 활극을 연출할 수도 있다. 이런 일로 삼성 이미지가 나빠질까봐 걱정이 되면, 지뢰 제거 활동 홍보처럼 '글로벌 사회 공헌' 광고를 제작할 수도 있다.

물론 뒤에서는 삼성이 F15-K 전투기를 수출하고 공격형 아파치 헬기를 만들고 있겠지만, 어차피 이미지는 이미지니까. 아쉽게 이런 일을 몸소 하지는 못하더라도, 옆에서 구경할 기회는 얻을 수도 있으니, 이 또한 좋지 아니한가.(<한국사회, 삼성을 묻는다>에 나오는 일들이다. 더 많은 일들을 알기 원하시는 분은 이 책을 보시기를.)

이런 일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생각하는 것은 각자의 몫으로 두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이 더 나아가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삼성이 보여주는 기술의 눈부심이다. 영화 아바타에 세계가 열광한 것은 그것이 구현하고 있는 테크놀로지 때문이겠거니와, 삼성이 생산해내는 최첨단의 반도체와 LED TV, 휴대폰 등은 우리를 매혹시키고 거기에서 눈을 떼지 못하도록 한다.

그러나 잠시 시선을 거두어보자. 빛에 빼앗겨버린 시선을 조금만 돌려본다면, 그것이 어떤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그림자를 더 크게 만드는 일에 우리가 알게 모르게 참여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쓰는 애니콜, 컴퓨터나 노트북 센스에는 백혈병으로 숨져간 반도체 공장 노동자의 눈물이 스며있고, 손 닦는 수건도 없는 화장실에 그나마 맘대로 가지도 못하고 두 시간에 10분씩 쉬는 시간 외에는 꼼짝 없이 컨베이어 벨트에 묶여 있어야 하는(김용철, <삼성을 생각한다>, 122쪽) 생산직 노동자의 한숨이 녹아있다. 그리고 바로 그것으로 삼성이 우리 사회에서 갖는 유일무이한 권력이 지지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청년들이여, 만일 새로운 시대가 요청하는 교양을 원한다면, 제품의 월등함 때문도 노동자들 임금 때문도 아닌, 임원들 보너스 때문에 비싼 애니콜이나 센스는 더 이상 아니라고 말하자. 한국 사회의 문제가 집약된 그 곳은, 정의를 위한 발걸음에 우리가 참여할 수 있는 발판이기도 하고, 알게 모르게 우리를 옥죄어 노예로 만드는 권력에 저항하는 장소이기도 하며, 이 시대에 새롭게 노동자와 연대할 수 있는 창구이기도 하다.

얼마 전 한 친구가 삼성 센스 노트북을 샀다. 자본과 노동에 대한 거대담론을 자주 말하는 그는 이러한 불매와 같은 사소한 문제에는 큰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것이 사소한 문제인가? 아니다. 여기 사회의 모순이 있다. 여기 눈물이 있다. 여기 피맺힌 울음이 있고, 여기 한숨과 아우성이 있다. 자, 그러니 이제 여기를 떠나라. 그것이 교양이다.

 



/지훈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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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슬 vs 故 박지연 vs 천안함 희생자…공통점은?

[기고] 대학생 문제인가, 20대 문제인가


기사입력 2010-04-09 오전 10:00:49 
 

 

나는 현재 이른바 '20대 담론'이 한계에 다달았다고 생각한다. 그 위기는 대략 세 가지 정도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명목상으로는 '20대 문제'지만 전체적인 프레임은 '대학생'을 대상으로 삼고 있으며, 그 결과 대학생이 아닌 20대가 소외되고 있다. 둘째, 그 과정에서 아직 사회적으로 미성년자 취급을 받는 대학생이 20대를 위한 일종의 '시혜적' 정책을 요구하는 쪽으로 방향이 잡혀 가고 있다. 셋째, 앞서 말한 두 가지 문제가 종합되어, '20대 담론'이 사회 보편의 문제로 인정받고 자리 잡는 일이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한 가지 특징적인 사례 비교를 통해 이 지점을 살펴보도록 하자. 지난 3월 10일, 고려대학교 3학년 김예슬 씨가 학교 안 게시판에 대자보를 붙여 '자발적 퇴교'를 선언했다. 대학생이 뭔가 '젊은이'의 패기를 보여줘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사회적 수요와 맞물려 이 선언은 적잖은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경향신문>은 바로 다음날 1면의 일부를 할애하여 이 소식을 보도했고, 여러 사회적 명사가 지지와 격려의 뜻을 표했다. 서울대학교 08학번 채상원 씨는 김예슬 씨의 선언에 동참해 자신도 대학과 싸우겠다는 뜻을 표했다. 이 역시 <프레시안>을 비롯한 여타 언론을 통해 기사화되었다.

한편, 지난달 31일,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에서 반도체 검수 업무를 맡았다가 백혈병에 걸린 뒤 2년간 투병 중이었던 박지연 씨가 2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삼성의 눈치를 보는 대부분의 언론은 이 사건을 다루지 않고 넘어갔지만, <프레시안>을 비롯한 이른바 '비판 언론'은 사태의 추이를 비교적 면밀하게 추적·보도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필자가 살펴본 바로는, 박지연 씨의 문제를 '20대의 문제'로 바라보고 다룬 기사는 없는 듯하다. 박지연 씨의 투쟁과 사망을 다룰 때, 그가 23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는 엄연한 사실은 동정의 소재가 될 뿐이다. '꽃다운 나이에 스러진 비윤리적 기업의 희생자'로 묘사될 따름이었다.

그는 '노동하는 젊은이'가 아니라 '젊은 노동자'로 다루어지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20대에 대한 과도한 예찬과 기대와 비판에 사용되는 온갖 수사를 찾아보기란 쉽지 않았다. 대신 노동조합을 허용하지 않는 삼성에 대한 비판과, 자신의 책임을 부정하는 뻔뻔스러운 태도에 대한 보도 등이 주를 이루었을 따름이다.

언론이 고 박지연 씨의 죽음을 다루고 있을 때조차 그 '젊은 노동자'는 주인공이 아니었다. 거대한 악당 삼성이 주인공이고, 박지연 씨는 순결한 희생자일 뿐이다.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고 외친 김예슬 씨가 언론에서 다루어질 때와는 사뭇 다르다.

박지연 씨의 죽음에 대한 기사를 읽다보면 분명해진다. 우리 사회가, 우리 언론이 기대하는 '실천하는 20대', '사회의 부조리에 반항하는 젊은이'는 절대 노동자여서는 안 된다. 무조건 '대학생', 그것도 명문 대학교에 다니는 학생이어야 한다. 사실 박지연 씨는 단순한 '희생자'가 아니었다. 다른 산업 재해 피해자와 함께 법원에 자신의 질병을 산업 재해로 인정해달라고 소송을 걸고 있었다.

박지연 씨는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박지연 씨를 '투쟁하는 20대'로 보지 않는다. 김예슬 씨의 자발적 퇴교는 '대학'이 아닌 '20대'의 문제로 받아들여지지만, 박지연 씨의 싸움과 죽음은 '20대 문제'가 아니다. 심지어 그에게 우호적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조차, 그것을 오로지 '삼성'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가령 4월 5일자 <한겨레>의 '왜냐면'에 실린 한 독자 의견은 이렇게 마무리되고 있다.

"삼성 반도체 노동자 박지연 씨의 죽음은 삼성이 이 사회를 지배하는 방식과 노동자의 건강권의 문제와 그리고 우리 안에 자리잡은 '삼성'은 원래 그랬어, 그래서 어쩔 수 없다는 체념을 드러내고 반성하게 하는 중요한 사건이 되어야 한다."

4월 1일 발표된 민주노동당의 논평 역시 삼성에 대한 규탄이 주를 이루고 있다. 스물세 해를 살다 떠난 젊은이의 못다 핀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는, 아무리 검색해도, 찾아볼 수 없다.)

현재 우리 사회에 통용되는 '20대 담론'이 철저하게 대학생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이보다 더 잘 보여주는 사례가 과연 또 있을까? 명문대에 다니는 대학생은 자퇴만 해도 화제가 되고 저항하는 20대로 승격된다. 고등학교만 나오고 공장에서 일하다가 백혈병으로 죽은 젊은이는 죽어서도 투쟁의 주체가 아닌 산업 재해의 희생자가 될 뿐이다.

김예슬 씨의 용감한 결의를 폄하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다. 현재, 세상의 시선은 대단히 불공평하다. '세상을 바꾸자'고 떠드는 바로 우리들의 시선이 불공평하다.


▲ 고 박지연 씨는 '삼성의 희생자'로 받아들여질 뿐 '투쟁하는 20대'였다는 사실은 망각된다. ⓒ프레시안(이상엽)

이렇듯 현재 논의되고 통용되는 '20대 담론'은 사실상 '대학생 담론'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이른바 '20대 담론'의 의제가 '청년 실업 해소'와 '대학 등록금 인하'에 집중되어 있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 각각의 중요성을 부인할 수는 없고, 두 측면 모두 진지하게 다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20대의 삶과 인권이 피폐해지는 이유는 비싼 등록금과 대기업 사무직 취업난으로만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박지연 씨의 죽음에서 확인할 수 있는 20대의 수많은 문제를 과연 '20대 담론'이 포용할 수 있을까?

앞서 말한 박지연 씨의 죽음도 그렇거니와, 가령 이번에 침몰한 천안함 사건을 되짚어보자.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대부분의 남성들은 군대에 간다. 그 군대는 지금 우리가 확인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인권의 사각지대이며 누군가가 애꿎은 생명을 잃어도 속 시원한 해명 한마디 내주지 않는다.

도리어 생존한 장교들(그 중에는 다수의 20대 사관들이 속해 있다)에게 병원복을 입고 목발을 짚고 나오는 '쇼'를 강요한다. 20대 남성의 대부분이 저런 군대에서 2년간 청춘을 바치는 것이, 20대가 아파트가 없어서 모텔에 가야 하는 것보다 더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 아닐까?

그러나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20대 담론'은 저런 지점을 수용할 수 없다. 세대론의 덫에 갇혀버렸기 때문이다. '386 세대가 20대의 몫을 가져간다'는 식의 괴담이 횡횡한 가운데, 정작 20대와 모든 사람들을 위해 한국 사회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그 운동의 과정에서 '20대'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논의는 사실상 실종되어버렸다.

대신 20대'를 위해' 등록금도 내려야 하고 아파트도 지어줘야 하고 낮은 학점을 받아도 대기업과 안정된 사무직 직장취직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는 주장들이 떠돌아다닌다. 전체 사회와의 접점을 찾지 못한 세대론은 결국 정부 혹은 권력자들이 배푸는 '시혜적 정책'에 대한 요구로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그러한 형태의 20대 담론은 점점 범사회적인 공감대를 잃어가고, '너희만 힘드냐?'는 식의 비아냥거림을 불러온다. 심지어 20대, 혹은 대학생 사이에서도 그러한 상호 불신과 냉소가 그득하다. 세상을 바꾸고 세상 속에서 무언가를 달성하기 위한 운동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무언가를 '받아내기' 위한 운동으로 스스로를 위치 짓고 있는 한 그러한 상호 불신과 전망의 결여는 필연적이다.

가령 우석훈 박사는 20대 미디어 <이빨을 드러낸 20대>와의 대담에서 "교수를 비롯한 교직원의 급여가 너무 과다하다는 것과 제2캠퍼스나 건물 신축투자되는 비용이 절약 가능하다"는 것을 근거로 "연간 등록금 100만 원 이하 책정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과연 이런 주장을 통해 대학을 변화시키고 개혁할 수 있을까? 교수와 교직원의 월급을 깎아서 대학생의 등록금으로 달라는 주장을 하면서 대학 사회 내에서 폭 넓은 공감과 정치적 동의를 확보하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내 또래의 누군가는 아직 차디찬 서해 바다 속에 갇혀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어린 나이에 백혈병에 걸려 목숨을 잃었다. 그 속에서 청년 실업의 불안을 이야기하고 스펙 쌓기의 '무한경쟁'에 시달리는 고통을 토로하는 것을 전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20대 노동자가 죽어가고, 20대 군인이 학대당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20대 대학생이 '20대 문제'를 '등록금 인하'와 '청년 실업 해소'로 한정짓고 있다면, 부끄럽고 비도덕적인 일이다. 대학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듯, 대학생이 20대의 전부인 것도 아니지 않은가. 기존의 '20대 담론'은 사회적 효용을 다해가고 있다.

김예슬 씨와 고 박지연 씨 모두를 위해, 이제는 그 폭을 좀 더 넓히고, 더 많은 주제를 함께 다루며 싸워나갈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어야 할 때이다.

 



/노정태 전 <포린폴리시> 한국어판 편집장 메일보내기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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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0-04-10 2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노정태가 글을 잘 씁니다.우석훈이나 진중권은 논리 비약이 심하지요.시실 지금보다 대학생 수가 훨씬 적었던 80년대 이야기를 할 때도 마치 그 당시 20대는 대학생들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물론 이런 담론을 주도하는 이들이 대학물 먹은 이들이 많긴 하지만 철저히 자신들의 경험에 매몰된 이야기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지요.농민노동자와 함께 한다며 현장으로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한(그들의 후일담을 보면 그렇다는 얘기죠)이들이 이 모양입니다.
386이란 단어가 탄생된 순간부터 문제가 잘못되어 버린 겁니다.그리고 20대의 문제에 군인들의 인권문제도 포함하자는 주장도 경청해야 한다고 봅니다.대한민국 남자들의 군대담론은 너무 소모적이고 피해의식만 넘쳐나서...겉으로는 군대갔다 와서 남자가 되네 어쩌네 합니다만...

바라 2010-04-11 00:30   좋아요 0 | URL
386이라는 단어가 만들어진 순간부터 문제가 잘못되어버렸다.. 공감합니다. 군인 인권 이야기는 자칫 여성 공격 등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아야겠지요. 위의 글과 더불어 김진석 교수가 쓴 글도 읽어볼 만한 것 같습니다. "한국은 저질대졸자 주류 사회 - 맹목적인 대학 입학과 졸업 멈춰야"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347825)

노이에자이트 2010-04-11 15:46   좋아요 0 | URL
군대에서 주입되는 이데올로기의 포로가 된 남자들이 상당히 많습니다.군대에서 무슨 인권이냐...하는 식이죠.여자들도 어떤 이들은 남자들의 군대경험에 대해 함부로 폄하하는 발언을 하고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 둔다.

G세대로 '빛나거나' 88만원 세대로 '빚내거나',

그 양극화의 틈새에서 불안한 줄타기를 하는 20대.

그저 무언가 잘못된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는 불안과

좌절감에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20대.

그 20대의 한 가운데에서

다른 길은 이것밖에 없다는 마지막 남은 믿음으로.




이제 나의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이것은 나의 이야기이지만 나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나는 25년 동안 경주마처럼 길고 긴 트랙을 질주해왔다.

우수한 경주마로, 함께 트랙을 질주하는

무수한 친구들을 제치고 넘어뜨린 것을 기뻐하면서.

나를 앞질러 달려가는 친구들 때문에 불안해하면서.

그렇게 소위 '명문대 입학'이라는 첫 관문을 통과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더 거세게 나를 채찍질해봐도

다리 힘이 빠지고 심장이 뛰지 않는다.

 

지금 나는 멈춰 서서 이 경주 트랙을 바라보고 있다.

저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취업'이라는 두 번째 관문을 통과시켜 줄 자격증 꾸러미가 보인다.

너의 자격증 앞에 나의 자격증이 우월하고

또 다른 너의 자격증 앞에 나의 자격증이 무력하고,

그리하여 새로운 자격증을 향한 경쟁 질주가 다시 시작될 것이다.

이제서야 나는 알아차렸다.

내가 달리고 있는 곳이 끝이 없는 트랙임을.

앞서 간다 해도 영원히 초원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트랙임을.




이제 나의 적들의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이 또한 나의 적이지만 나만의 적은 아닐 것이다.

이름만 남은 '자격증 장사 브로커'가 된 대학,

그것이 이 시대 대학의 진실임을 마주하고 있다.

대학은 글로벌 자본과 대기업에 가장 효율적으로

'부품'을 공급하는 하청업체가 되어 내 이마에 바코드를 새긴다.

 

국가는 다시 대학의 하청업체가 되어,

의무교육이라는 이름으로 12년간 규격화된 인간제품을 만들어 올려 보낸다.

기업은 더 비싼 가격표를 가진 자만이 피라미드 위쪽에 접근할 수 있도록

온갖 새로운 자격증을 요구한다.

이 변화 빠른 시대에 10년을 채 써먹을 수 없어

낡아 버려지는 우리들은 또 대학원에, 유학에, 전문과정에 돌입한다.

고비용 저수익의 악순환은 영영 끝나지 않는다.

'세계를 무대로 너의 능력만큼 자유하리라'는

세계화, 민주화, 개인화의 넘치는 자유의 시대는 곧 자격증의 시대가 되어버렸다.

졸업장도 없는 인생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자격증도 없는 인생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학습된 두려움과 불안은 다시 우리를 그 앞에 무릎 꿇린다.




생각할 틈도, 돌아볼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이 또 다른 거짓 희망이 날아든다.

교육이 문제다, 대학이 문제다라고 말하는 생각 있는 이들조차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성공해서 세상을 바꾸는 '룰러'가 되어라,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해. 나는 너를 응원한다,

너희의 권리를 주장해. 짱돌이라도 들고 나서!

그리고 칼날처럼 덧붙여지는 한 줄, 그래도 대학은 나와야지.

그 결과가 무엇인지는 모두가 알고 있으면서도.

 

큰 배움도 큰 물음도 없는 '대학大學'없는 대학에서,

나는 누구인지, 왜 사는지, 무엇이 진리인지 물을 수 없었다.

우정도 낭만도 사제간의 믿음도 찾을 수 없었다.

가장 순수한 시절 불의에 대한 저항도 꿈꿀 수 없었다.

아니, 이런 건 잊은 지 오래여도 좋다.

그런데 이 모두를 포기하고 바쳐 돌아온 결과는 정말 무엇이었는가.

우리들 20대는 끝없는 투자 대비 수익이 나오지 않는

'적자세대'가 되어 부모 앞에 죄송하다.

 

젊은 놈이 제 손으로 자기 밥을 벌지 못해 무력하다.

스무 살이 되어서도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모르고 꿈을 찾는 게 꿈이어서 억울하다.

이대로 언제까지 쫓아가야 하는지 불안하기만 우리 젊음이 서글프다.




나는 대학과 기업과 국가, 그리고 대학에서 답을 찾으라는 그들의 큰 탓을 묻는다.

깊은 분노로. 그러나 동시에 그들의 유지자가 되었던 내 작은 탓을 묻는다.

깊은 슬픔으로. '공부만 잘하면' 모든 것을 용서받고,

경쟁에서 이기는 능력만을 키우며 나를 값비싼 상품으로 가공해온

내가 체제를 떠받치고 있었음을 고백할 수 밖에 없다.

이 시대에 가장 위악한 것 중에 하나가 졸업장 인생인 나, 나 자신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더 많이 쌓기만 하다가 내 삶이 한번 다 꽃피지도 못하고 시들어 버리기 전에.

쓸모 있는 상품으로 '간택'되지 않고 쓸모 없는 인간의 길을 '선택'하기 위해.

이제 나에게는 이것들을 가질 자유보다는 이것들로부터의 자유가 더 필요하다.

자유의 대가로 나는 길을 잃을 것이고 도전에 부딪힐 것이고 상처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삶이기에, 삶의 목적인 삶 그 자체를 지금 바로 살기 위해

나는 탈주하고 저항하련다.

생각한 대로 말하고, 말한 대로 행동하고, 행동한 대로 살아내겠다는 용기를 내련다.




학비 마련을 위해 고된 노동을 하고 계신 부모님이 눈 앞을 가린다.

'죄송합니다, 이 때를 잃어버리면 평생 나를 찾지 못하고 살 것만 같습니다.'

많은 말들을 눈물로 삼키며 봄이 오는 하늘을 향해 깊고 크게 숨을 쉰다.




이제 대학과 자본의 이 거대한 탑에서 내 몫의 돌멩이 하나가 빠진다.

탑은 끄덕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작지만 균열은 시작되었다.

동시에 대학을 버리고 진정한 大學生의 첫발을 내딛는 한 인간이 태어난다.

이제 내가 거부한 것들과의 다음 싸움을 앞에 두고 나는 말한다.

그래, “누가 더 강한지는 두고 볼 일이다”.






2010년 3월 10일 김예슬
고려대학교 경영학과를 자퇴하며  

 

 


김예슬씨의 선언, 당신도 보여주세요
무력한 구경꾼이 되고 싶지 않아 지지 대자보를 붙였습니다

10.03.12 19:47 ㅣ최종 업데이트 10.03.12 20:00 홍명교 (daresay)


고대생 자퇴, 대학사회, 거부선언, 김예슬, 자퇴



출처 : 김예슬씨의 선언, 당신도 보여주세요 - 오마이뉴스

11일 목요일 아침 출근하는 사람들로 빼곡한 만원 지하철이었습니다. 그것은 지극히 우연이었지요. 며칠째 우울한 기분이었고 매일매일이 버거웠습니다. 그날은 제대한 지 꼭 일주일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승강장에 서서 수서행 지하철이 오기를 기다리다가 가판대로 향했습니다. 온갖 무가지들, 보수언론들이 즐비한 곳이지요. 여느 때처럼 시큰둥하게 신문 헤드라인들을 훑어보았습니다. 그것이 제가 사회적인 문제들과 접촉하는 거의 유일한 통로거든요. 그런데 유독 한 신문의 머리기사가 거짓말처럼 눈에 팍하고 들어왔습니다.

 

제대 일주일, 지하철에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12일 오후 서울시 성북구 고려대학교 정경대학 후문에 자발적 퇴교를 앞둔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3학년 김예슬씨의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는 제목의 대자보가 누군가에 의해 계란 투척과 빨간색 마카로 훼손되어 있는 가운데 훼손된 대자보 옆에 김예슬 학생을 응원하며 지지하는 글들이 붙어 있다.
ⓒ 유성호
김예슬



 

고려대 경영학과 3학년 김예슬씨의 '자발적 퇴교' 선언과 대자보에 대한 기사(<경향신문> 3월 11일자)였습니다. 그 600원짜리 신문을 사서는 지하철에 올랐습니다. 그리곤 바보처럼 읽고 또 읽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사람들로 빼곡해서 옴싹달싹도 하기 힘든 만원 지하철에서 말이죠.

 

아르바이트 장소에 도착하자마자 저는 몰래 무언가를 마구 쓰기 시작했습니다. 김예슬씨의 선언에 대한 지지글이었습니다. 그걸 프린트하고 복사해서 고대생 친구에게 건네주었지요. 고려대학교에 부착된 김예슬씨의 대자보 옆에 그걸 붙였습니다.

 

별 힘이 되지 못하겠지만 울림을 받은 자의 책임이라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선언'된 하나의 '사건', 한국사회와 20대에겐 결정적이며 시초적일 수밖에 없는 '반전'의 계기 앞에서 무력한 구경꾼이 되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2003년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에 입학한 저는 학교에 다닌 3~4년 내내 수업 하나 제대로 들은 적 없는 못난 대학생이었습니다. 하나의 공포가 대학 시절 내내 저를 지배했는데 현대기업경영 첫 수업날, 교수님이 하시는 이야기를 듣고 겁에 질렸던 겁니다. 그는 "고대 경영대 정도 나왔으면 벤츠나 아우디 정도는 타줘야지"라는 농담을 던졌습니다.

 

"고대 나왔으면 벤츠 정도는"... 교수님 얘기에 섬뜩했습니다

 

모두들 웃었는데 왜 나는 웃지 못했는지요. 그 말이 너무 무서웠고 섬뜩했습니다. 나는 남보다 뻔지르르하게 살겠다고 수능 공부를 열심히한 게 아닌데, 고작해야 외제차 하나 타겠다고 살아온 게 아닌데 말입니다. 제대로 수업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외무고시를 봐라, CPA를 따라, 토익을 봐라 말도 많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학사경고도 여러 차례 맞았으며, F학점 받은 게 한둘이 아닙니다.

 

우리는 꿈 대신 수능점수에 따른 입학 가능 대학을 따져보고 대학에 왔을 뿐인 것입니다. 저 역시 그러했고, 멍청하게 학교 건물이 번지르르한 게 멋져보여서 그곳에 갔을 뿐이었습니다. 제게 대학시절은 그리 즐거운 기억이 아닙니다. 그곳이 숨 막힐 듯이 답답했으며 사람들의 우울한 표정이 싫었습니다. 제 주위에는 저와 같은 친구들이 한 둘이 아니었습니다.

 

2007년 저는 결국 고려대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다른 길을 위해 길을 나섰습니다. 좋은 영화를 만들겠다는 꿈을 가지고 말이죠. 제 주위에는 그런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어디에나 그런 사람들은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이런 결심은 대단한 용기가 뒤따르지요. 당신의 환상이 깨어질 수도 있습니다. 암담하고 막막한 미래가 답답하긴 매한가지일 것이며, 어딜가나 이윤중심의 풍조는 당신을 숨 막힐 정도로 괴롭힐 것입니다.

 

고려대에 다니던 시절 2학년 때부터 저는 과외를 할 수 없었습니다. 누군가는 저처럼 또 꿈 대신 점수만을 생각하며 대학에 들어오게 한다는 게 너무나 큰 죄악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외를 할 수밖에 없는 친구들의 처지도 이해가 갔습니다. 고려대학교의 턱없이 높은 등록금 때문에 수차례 휴학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니까요. 그건 마치 대학에 다니기 싫어도 대학에 계속 다니는 동 세대의 삶을 이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개인의 선택을 '사건화' 한 김예슬씨, 당신도 보여주세요

 







  
11일 오후 서울시 성북구 고려대학교 정경대학 후문에 자발적 퇴교를 앞둔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3학년 김예슬씨의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는 제목의 대자보가 붙어있자 지나가던 학생들이 발길을 멈추고 글을 읽고 있다.
ⓒ 유성호
김예슬



 

저는 냉면 배달, 피자 배달, 무대 철거, 사무보조 여러 가지 일을 해볼 수밖에 없습니다. 아마도 앞으로 예슬씨도 그렇겠지요. 언제는 일용직 전시회장 철거 알바를 하며 짐을 나르다가 까만 양복을 빼입은 대기업 사원 후배를 만나기도 했습니다. 아는 체도 하기 어렵더군요. 그러나 그때 왜 인사하지 못했을까 후회도 됩니다. 당당히 인사도 못할 삶을 사는 건 아닌데 말이죠. 어느새 저는 억눌린 채로 점점 자신감을 잃어왔던 겁니다.

 

훌륭한 영화감독이 될 수 있을까, 평생 가난하게 살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 거친 세상은 우리의 자신감과 꿈을 온전히 보존하기 어렵게 만드니까요. 그러나 우리는 도망간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저들이 정해놓은 각본을 '거부'한 것입니다. 당당하게 이야기하고 떠들어댑시다. 논평하길 좋아하는 자들에게는 침묵으로 대꾸해주고, 뒷말하길 좋아하는 자들에게는 미소로 답해줍시다. 진짜 행복을 아는 사람들은 그런 사소하고 신경증적인 아웅거림들에 신경쓰지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처럼 잘날 것 하나 없고 내세울 것 하나 없는 겁쟁이 20대입니다. 그런 제가 지하철에서 우연히 예슬씨의 선언을 접한 건 정말 큰 행운입니다. 학생운동과 멀어진 이래 아주 오랫동안 저는 소심한 개인의 삶을 살아왔거든요. 저는 이 행운이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는데 더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슬씨는 지극히 개인적인 삶의 선택, 행로를 바꾸는 용기의 감행을 '사건화'시킨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걸 두고도 왈가왈부 말이 많지만 저는 예슬씨가 학교를 그만둔 것보다도 익명의 무기력자들에게 그 선언을 밝혔다는 것에 더 의미를 두고 싶습니다. 그래서 저 역시 개인의 이름으로 소심한 대자보를 붙인 것입니다. 아침까지만 해도 삶 앞에 지쳐서 '하악하악'대던 저는, 예슬씨가 선언을 통해 감행한 그 '사건'으로 인해 다시 용기를 얻었으며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행동 양식입니다. 예슬씨는 이 슬프고 불쌍한 20대 개인들뿐에게만 아니라, 벅찬 저항의 과제들 앞에서 우왕좌왕하며 갈피를 못 잡던 소위 '운동권'에게도 하나의 새로운 양식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도 이제 우리들 개인 각자의 삶과 모종의 '금지된' 용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선언해나갑시다.

 

사도 바울은 예수의 부활 그 자체를 '선언'함으로써 무수한 뜬 소문들 중 하나에 불과했던 그것을 하나의 '진리', '사건'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김예슬씨는 자기 개인의 용기어린 선택을 '선언'함으로써 '사건'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이제 공은 당신에게 넘어갔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외롭지 않게 만들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지 '않은' 모든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

 

여러분에게 요청합니다. 그녀로부터 큰 울림을 받았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이 보여줄 수 있는 용기를 선언해주십시오. 그리고 그것들이 '사건'이 될 수 있도록 움직여주십시오. 오늘(3월 12일) 아침, 고려대학교 학교 당국은 예슬씨 대자보 옆에 붙어 있던 무수한 응원메모들, 소자보들을 모두 철거했다고 합니다. 저분들이 두렵기는 한가 봅니다. 이는 예슬씨를 고립시키려는 얄팍하고 치사한 수작입니다. 온전하고 멀쩡한 '대학사회'의 책임자라면 자유로운 의사 개진에 '철거'로 답하진 않습니다.

 

대학이 스스로 자신의 치졸함을 보여준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인터넷의 구경꾼들로 남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사건을 만들어야 합니다. 결코 다 같이 예슬씨처럼 자퇴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지 않은 모든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입니다. 이 모순덩어리 각본 앞에 계속 복종하겠습니까, 아니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길을 택하시겠습니까? 묻고 싶습니다.

 

우리 앞에 던져진 하나의 거대한 근본적 질문을 회피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결국 그 질문을 회피한 자들은 어느새 힘 센 분들 옆에 안착한 386세대처럼 '곱상하게' 늙을 것이며, 회피하지 않는 자들은 새로운 시대의 첫 번째 입장객이 될 것입니다.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이 이 대자보를 읽은 우리들의 의무이자, 예슬씨가 우리들에게 안겨준 과제입니다.

 

저 자신을 포함한 20대 모두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이제 무엇을 할 것입니까? 

출처 : 김예슬씨의 선언, 당신도 보여주세요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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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2년 전이군; 우연히 발견한 이광일 - 금민 논쟁(사회적 공화주의)과 사회당 게시판에서의 최원 - 금민 논쟁(루소) 

진보의 재구성, ‘사회적 공화주의’에 대한 짧은 생각(이광일)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46000 

손가락은 달을 가리키는데, 손가락을 보고 있다(금민)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46043 

금민 씨에 대한 답변 : ‘현자와 바보’(이광일)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46076  

사회적 공화주의, 달과 손가락(금민)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renewal_col&nid=46131   

금민 씨에게 : ‘죽은 논리학’과 ‘살아 있는 정치학’(이광일)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46146 

‘이행의 정치학’에 대한 비판(금민)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renewal_col&nid=46176 


 

 

  이광일-금민 논쟁 촌평 http://www.sp.or.kr/sp2007/bbs/board.php?bo_table=5_2&wr_id=718&page=2 

 
논쟁이 대충 끝난 것 같군요. 흥미있게 봤습니다. 두 분 다 수고하셨습니다. 나중에 가서는 약간 자극적인 말들을 교환하면서 조금 말싸움 비슷하게 된 면도 없지 않아 있는 것 같습니다만, 이는 그만큼 열심히 했고, 서로 논쟁이 가열되었다는 증거이므로 꼭 나쁘게 볼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나름대로 두 분 다 자기 소신에 맞게 주장을 펼쳤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함께 참여하고 싶습니다만, 너무 바빠서 촌평만 하나 덧붙일까 합니다.

저는 아직 사회당 전대표 금민 씨의 사회적 공화주의를 자세히 살펴볼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또 여기 몇편의 글만으로 그 실체를 제대로 알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함께 듭니다. 그러나 글에서 제시된 금민 씨의 사회적 공화주의에 대한 약간의 설명을 읽으면서 제가 떠올렸던 것은 다름아닌 근대 정치철학자 '루소'였습니다.

금민 씨의 주장은 대략 이런 것 같습니다. '허울좋은 민주공화국을 제대로 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사회적 공화국이 이루어져야 하며, 후자는 전자의 논리적 전제이다.' 사회적 공화국의 실현을 위한 자세한 정책내용까지는 제가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 핵심은 국민들에게 일정 수준의 경제생활을 보장함으로써, 일반 국민들이 배제됨 없이 민주공화국에서 능동적인 시민으로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사회적 공화국으로서의 국가가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의식은 민주주의와 공화국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도 매우 중심이 되는 것 같습니다. 금민씨에게 공화국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민주주의라는 '다수자 지배'와는 달리 공통의 것(res publica)을 만들어내는 데에 그 목적이 있고, 그것이 갖는 보편성이 따라서 매우 중요한 것 같습니다. 따라서 공화정은 전제이고, 이 전제 하에서 다수자로서의 데모스에 이니셔티브를 허락하는 민주적 편향 내지 경향성이 있는 것이 바로 민주공화정이겠지요(이런 식의 관점의 타당성 여부는 일단 논외로 하고 싶습니다).

어쨌든 사회적 공화주의를 주장할 때 금민씨에게 중요한 것은 '공통적인 것'을 만들어내는 일인 것 같습니다. 여기서 제가 루소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것은, 루소야말로 사회계약을 통해 '공통의 자아(moi commun)'를 창립하는 것을 목표로 했던 사상가이기 때문입니다. 이 공통의 자아는 물론 (단순한 산술적 의미에서의 '만인의 의지'와는 구별되는) '일반 의지'를 갖고 있는 존재로 '입법자'이자 '주권자'이기도 하지요. 금민 씨의 주장과 관련하여 더욱 더 흥미로운 것은 루소는 이러한 일반 의지를 생성시키기 위해서는 사회가 균열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일반 의지'의 기초를 마련해줄 일종의 '일반 이익'의 수립이 (논리적으로든 역사적으로든) 선행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을 팔 정도로 가난해서는 안되고 등등의 주장이 나오게 되지요. 제가 보기에 금민씨가 사회적 공화주의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도 정확히 이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공화국의 일반 의지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즉 민주공화국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공화국의 일반 이익을 논리적으로 먼저 만들어내야 한다(즉 사회적 공화국을 수립해야 한다).

그런데, 루소에게는 바로 이런 논리가 그의 이론의 곤란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일반 의지를 위해서는 (특수 이익들을 초월하는) 일반 이익이 수립되어야 하지만, 일반 이익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평등주의적 입법을 통해 그것을 해야하는데, 평등주의적 입법을 하기 위해서는 다시 주권적 일반 의지가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논리적 순환 또는 무한 퇴행이 발생하는 것이지요(발리바르, '인민이 인민이 되게 하는 것: 루소와 칸트', [대중들의 공포], b출판사 참조).

루소는 이러한 순환을 완전히 의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그의 이론에 (시민종교에 관련된) 일종의 이데올로기적인 봉합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런데 금민 씨는 이러한 논리적 순환을 자신이 의식하고 있는지가 불분명한 것 같습니다. 사실은 그래서 자꾸 논의가 헛도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광일 교수의 문제제기는 제가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바로 이 특수 이익들 사이의 갈등 또는 적대라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금민씨가 주장하는 사회적 공화주의가 실제로 실천되어야 하는 것은 특수 이익들 사이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전쟁터에서인데, 금민씨는 그것을 평등한 입법의 문제(이러저러한 국민복지 정책의 입법)로 해결할 수 있다고 단순히 믿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것이지요. 이광일씨가 '정치'를 자꾸 강조하는 것은 '정치'란 (적어도 제가 이해하기로는) 공통된 것 또는 합의라기 보다는 갈등과 적대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문제가 계급투쟁의 문제로 제기될 때, 우리는 루소의 정치철학에 대한 비판가로서의 맑스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루소의 정치적 이상을 단순하게 거부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보다는 그것의 물질적 조건들을 사고하고, 계급적대의 문제를 회피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단 전 이광일 교수의 문제제기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금민씨의 입장은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저는 이것이 논의의 시작이 되길 바래봅니다. 왜냐하면 맑스의 입장도 또한 곤란들을 내포하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지요. '이행'이라는 문제에 있어 어떻게 목적론적 사고를 그만둘 수 있는가라는 문제는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논쟁 자체는 여기서 일단락되더라도 논의와 고민이 많은 사람들에 의해 보다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길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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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o 최원

 http://www.sp.or.kr/sp2007/bbs/board.php?bo_table=5_2&wr_id=729&page=3 

“금민씨가 주장하는 사회적 공화주의가 실제로 실천되어야 하는 것은 특수 이익들 사이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전쟁터에서인데, 금민씨는 그것을 평등한 입법의 문제(이러저러한 국민복지 정책의 입법)로 해결할 수 있다고 단순히 믿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것이지요. 이광일씨가 '정치'를 자꾸 강조하는 것은 '정치'란 (적어도 제가 이해하기로는) 공통된 것 또는 합의라기보다는 갈등과 적대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최원)




‘특수 이익’과 ‘일반 이익’의 구별을 차용한다면, ‘사회적 공화국’은 특수 이익의 전쟁터에서 일반 이익을 형성하는 것이라는 대답을 드립니다. ‘사회적 공화국’을 단순히 ‘입법의 문제’에 불과하다고 보고 ‘정치’는 ‘입법’과 무관한 수준을 가진다고 말하는 것은 법허무주의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물론 ‘정치’는 ‘입법’만이 아니지만, ‘입법’의 수준으로 절충 또는 완성되고, 또한 ‘입법된 제도, 국가’ 속에서 재차 전개됩니다.




루소를 인용하면서 말씀을 전개했지만, 지적하신 문제는 매우 단순한 문제, 혹시 ‘사회적 공화주의’가 법물신주의, 제도물신주의, 국가물신주의에 지나지 않는가라는 문제라고 봅니다. 저는 거꾸로 그러한 혐의야말로 법허무주의, 제도허무주의, 국가허무주의에서 나온다고 봅니다. ‘사회적 공화국’은 제도적 목표이고, 그런 한에서 ‘정책’ ‘제도 대안’의 형태를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사회적 공화국’을 만들기 위한 운동은 ‘제도 대안’을 내놓은 것만을 의미할 수 없고 당연히 ‘제도’를 수립하기 위한 싸움을 요구합니다. 당연한 이야기 아닙니까?




루소를 인용하신 부분에 대해서는 아래의 메모를 덧붙입니다.




1. 주권(민주주의 국가)과 ‘주권의 전제조건’으로서의 공통성(공화정)




최원 씨가 파악하신 것처럼 저는 공화국을 민주주의적 주권국가와 동의어로 보지 않습니다. 공화국은 ‘공통의 것’(res publica)이며, 주권자들의 공통성은 민주주의적 주권의 가능조건이라고 봅니다. 저의 파악 방식에서, 공화국이냐 아니냐는 민주주의(주권국가)의 논리적 가능조건입니다. 공통성이 수립되어 있느냐 아니냐는 주권의 전제조건입니다.




공통성과 주권이라는 (국가에 대한 이와 같은) 이원적 이해 방식은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에게도 폴리테이아와 개별 정체의 이원성으로 등장합니다. 근대 자유주의 역시 공통성과 주권이라는 이원 구조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공통성은 불가침적 자유권을 누리는 주체들로서 만인의 공통성일 뿐이지 만인의 사회적 조건의 공통성이 아닙니다. 로크도 이와 같은 공통성을 주권의 전제조건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로크적 자유주의의 문맥에서 바로 그 공통성은 주권을 완성하는 방향이 아니라 제약하는 방향으로 발전합니다. 다수자에 의해 행사되는 주권이 자신의 전제조건을 파괴할 수 없다는 논리 구조 위에서 자유권의 주권제약적 성격이 규정됩니다. 그래서 자유권은 로크에게서 주권에 대한 방어권적인 이론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자유권이 방어권적 구조로 변모하는 이유 역시 자유권을 주권의 가능조건인 만인의 공통성으로 보았기 때문이라는 점이 중요할 것입니다. 저는 자유주의의 은폐된 심층 구조에서도 공통성과 주권의 이중구조가 발견된다고 봅니다.




고대 공화주의이든, 자유주의이든, 근대 공화주의이든, 또는 사회적 공화주의이든, 이러한 이중구조 위에서 전개되는 정치철학이라고 봅니다. 다만 공화주의적 전통은 자유주의적 전통과 달리 주권의 가능조건인 공통성을 주권의 한계를 규정하는 요소, 즉 제약 조건이 아니라 주권을 비로소 완성시키는 조건으로 적극적으로 사고한다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소극적 불침해가 전제 조건의 충족인가 아니면 적극적 형성이 전제 조건의 충족인가가 다르게 됩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차이는 주권의 전제 조건을 어디에서 구하는가의 차이에서 발생합니다. 루소와 칸트 등의 근대 공화주의는 자유권이 주권의 전제 조건임을 수용하지만 자유권의 지반으로서의 공통이익이나 일체된 정서(루소) 또는 자신의 준칙을 정언명법적으로 보편화할 수 있는 이성적 인간(칸트) 에 눈을 돌립니다. 이는 자유권적 주체와는 달리 ‘일반 의지’(루소) 또는 ‘만인의 결합된 의지’(칸트)를 형성할 수 있는 주체, 즉 주권형성적 주체로서 정치적 주체의 발견을 뜻합니다. 방어권적 주체, 저항권적 주체를 넘어서는 근대 정치적 주체가 탄생함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은 근대 정치적 주체에 대한 비판은 여러 각도에서 수행될 수 있습니다. ‘사회적 조건의 공통성’이 수립되어야 비로소 주권자의 주권이 실질적일 수 있다는 주장은 이와 같은 주체 비판의 매우 소박한 한 방식일 뿐일 것입니다. 여러 사람이 이 교묘하기 짝이 없는 근대 정치적 주체의 껍질 벗기기를 시도해 왔습니다. 저는 그 중에서 87년 이후 형성기에 있는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이라는 맥락 속에서 현실 정치로 전화시킬 수 있는 하나의 관점을 공화주의 담론의 틀에서 발전시켰을 따름입니다. 저는 그것이 복지 체계와 주권의 연관성을 확보하는 공세적인 담론이며, 80년대 식 사회국가의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는 사고방식일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현실 정치적 전화라는 관심을 벗어나서 말하자면, ‘사회적 조건의 공통성’에 입각한 주체 비판은 포괄적인 주체 비판의 한 요소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2. 공통성, 일반성, 동일성




지적하신 문제: “일반 의지를 위해서는 (특수 이익들을 초월하는 일반 이익이 수립되어야 하지만, 일반 이익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평등주의적 입법을 통해 그것을 해야하는데, 평등주의적 입법을 하기 위해서는 다시 주권적 일반 의지가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논리적 순환 또는 무한 퇴행이 발생하는 것이지요(발리바르, '인민이 인민이 되게 하는 것: 루소와 칸트', [대중들의 공포], b출판사 참조).




루소는 이러한 악무한을 잘못된 방식으로 해결합니다. 공통의 정서, 시민종교, 또는 자연 등의 장치가 그렇고, 그런 장치들은 루소와 집단주의, 파시즘의 연관까지도 후대의 비판자들이 추론하게 만듭니다. 참고삼아 칸트의 경우는 이와 같은 악순환이 사라집니다. 일반적 입법자로서의 인간 공통성이라는 칸트의 출발점은 만인의 주권자로서의 공통성이 만인의 실질적 주권의 전제조건이라는 동어반복 같은 구조, 즉 실질적 참정권의 가능조건은 형식적 참정권자로서의 공통성이라는 동어반복(또는 형식주의)에 빠지지만, 이는 주권의 전제조건 문제에 관한 언설로서는 근대 공화주의의 정점이라 할 수 있고 또한 근대 공화주의의 문제 지점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계약론의 논증구조의 탈역사화가 시작되는 기점이 칸트입니다. 이 이야기를 더 전개하지는 않겠습니다.




대신에 공통성, 일반성, 동일성에 대한 다음의 설명을 첨부하겠습니다.




<근대 민주주의 국가의 구성논리>

1) ‘공통성의 원리’로서의 참정권(선거권/피선거권): 형식적 주권자로서의 모든 국민의 공통성

2) ‘일반성(상징)의 원리’로서 ‘대표의 원리 I’: 형식적 주권자 중의 일부는 피선거권의 실현을 통해 일반적 주권자로 등장한다. 즉 국민(A,B,C... 등의 주권)=국회의원(Z의 입법권)

3) ‘가상적 동일성의 원리’로서 ‘대표의 원리 II’: 치자와 피치자의 동일성, 즉 국회의원Z=국민A,B,C...등

 

'사회적 공화주의'는 1)에 대한 확장이고, 2)와 3)의 관계에 대해서 부분적 수정임(사회복지 체계의 관리에서 당사자 자치 원칙의 도입)

 

<상품세계의 구성논리>

1) 상품형식은 공통성의 원리: 상품A, 상품B, 상품C... 등의 사회에서 존재자의 공통성은 A, B, C...등이 모두 구체적 유용성과 관계없이 상품이라는 형식을 취한다는 사실.

2) ‘일반성(상징)의 원리’로서 화폐의 수립: x량의 상품A, y량의 상품B, c량의 상품C... 등=10,000원

3) ‘가상적 동일성의 원리’로서 화폐상품: 10,000원=x량의 상품A, y량의 상품B, c량의 상품C... 등

 

현재까지 이루어진 수정은 모두 금지 조항임(인간의 장기나 성서비스 등은 상품일 수 없다.) 상품사회에의 진입을 허락하지 않는 방식으로 상품세계 내의 내적 구성논리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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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민씨에게


http://www.sp.or.kr/sp2007/bbs/board.php?bo_table=5_2&wr_id=730&page=3 

 

답변 감사드립니다. 말씀드렸듯이 논쟁에 참여하고 싶은데, 개인적으로 바쁜 처지라서 그렇게 하질 못하고, 촌평만을 남겨놨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사정은 마찬가지인데, 몇 가지 오해를 하시는 부분이 있는 듯하여 그것만 간단히 말씀드리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하겠습니다.

먼저 저의 입장을 "법허무주의, 제도허무주의, 국가허무주의"라고 보셨는데, 그건 저를 잘 모르시기 때문에 하신 오해인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짤막한 글에서 저의 전반적인 입장을 알아채기가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잘 모르는 사람의 짤막한 글이었기 때문에 상대방의 입장을 상대방의 말들에 입각해서 좀 더 신중하게 판단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촌평에서 저는 제도란 무용한 것이라는 식의 주장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법허무주의, 제도허무주의, 국가허무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을 한눈에 보기 위해서는, 예를 들어, 제가 회원으로 있는 사회진보연대의 '민주노동당 관련 토론회'에 얼마전에 제출했던 저의 의견안을 보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래 링크를 쫓아가시면 됩니다.

http://pssp.org/bbs/view.php?board=board&id=13096&page=2


제가 촌평에서 법허무주의, 제도허무주의, 국가허무주의를 주장한 것은 아니지만, '대중들의 봉기적 실천'으로서의 '정치'는 '제도적인 것'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제도적인 것은 그러한 정치의 잠정적 결과나 수단을 이룰 뿐이라는 관점 하에서, 제도적인 것에 대한 정치의 '우위'를 우리가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렇게 읽을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제도적으로) 구성된 시민권'에 대한 '봉기적 시민권'의 우위를 주장할 필요가 있는데, 이는 당연한 말이지만 단순히 형성된 어떤 제도적 정치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권리로 환원될 수 없습니다. '참여'를 부정한다는 것이 아니라, 봉기적 시민권은 그것을 훨씬 초과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정확히 저의 주된 논점은 아니었지요.

사실 저는 루소 자신도 제도물신론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기는 커녕 반대로 루소는 (사회계약의 언어로 표현되는) 혁명정치, 해방의 정치를 꿈꿨던 사람이었고, 이후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에서 그 역사적 사례를 찾게되는 '부르주아적 공산주의'의 대표적인 이론가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자유가 곧 평등이며 평등이 곧 자유임을 명확히 주장한 최초의 이론가였지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앞의 촌평에서 그의 제도물신주의를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평등주의적 입법'에만 의존하려는 시도를 비판했던 관점은 '공통성'인가 '적대'인가라는 질문을 통해서였지, 제도인가 제도의 무용성인가라는 질문을 통해서가 아니었다는 점을 잘 보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정확히 그렇기 때문에, 저는 루소의 이론이 여전히 하나의 모호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주장하고 싶습니다. 그의 이론은 정확히 기존의 권력을 공격하는 데에 사용될 수도 있지만(이 주권권력은 국민의 일반의지에서 이탈한 권력이고 따라서 폐지되어야 한다!), 반대로 기존의 주권적 권력을 옹호하는 데에 사용될 수도 있는 것이었죠(이 주권권력은 국민의 일반의지에 기초해있으며 따라서 정당하다!).

이러한 모호성은 물론 하나의 곤란임이 분명하지만, 단순한 이론적 결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진정한 이론적 질문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나온 많은 이론가들은 이러한 그의 질문에 다양한 방식의 대답을 주려고 시도합니다. 칸트도 이 가운데 하나이고, 맑스도 이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 있지요.

맑스는 정치가 (시민이 자신의 '일반의지'를 실현하는) 자율적인 것이 아니라, 타율적인 것이라고 보면서 정치의 타자를 경제 또는 계급관계에서 찾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정치를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정치를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고 그것의 물질적 조건들을 분석하려는 것이었지요.

이러한 분석을 통해, 아시다시피, 맑스는 정치의 핵심이 사실 '적대'에 있다는 점을 밝혀냈습니다. 사회란 인간의 공통된 본질(그것이 무엇이든 간에)에 기초해 있지 않고, 반대로 적대와 적대의 조절에 기초해 있음을 보인것이지요. 하지만 정치의 물질적 조건으로서의 계급적대를 분석함으로써 맑스는 루소가 꿈꾼 '평등한 자유'를 부정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필연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조건을 사고하려고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루소적 '모호성'의 극복을 시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자유의 필연적(!) 생성'이란 어떻게 가능한가?


제가 금민씨의 사회적 공화주의의 주장을 루소에게 연결시킨 것은 금민씨의 입장이 맑스의 변혁의 정치의 입장에 입각해 있는 것이 아니라 루소의 해방의 정치의 입장에 입각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반면 이광일 교수의 입장은 보다 맑스의 입장에서 문제제기를하려는 시도라는 점을 보여주려고 했고요.

그렇기 때문에, 사실 '사람중심 탈배제경제'라는 구호가 정확히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금민씨는 그 구호가 창조한국당의 '사람중심 진짜경제'와 가치지향이 오버래핑하는 것이라고 파악하셨고 오버래핑이 문제는 아니며 구체적 정책의 차별성을 '비교'함으로써 말하자면 그 가치를 실현할 진정성을 누가 가지고 있는가를 드러내는 선거전략을 구사하는 것이 문제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런데 이광일 교수의 입장에서 보면 그 가치지향의 오버래핑 자체가 왜 일어나는지를 질문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사람중심 탈배제경제'라는 구호를 봅시다. 도대체 그 구호의 저 '사람'이란 누구를 말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지 않습니까? 적어도 우리는 계급적대를 분석하는 맑스의 입장에서는 저렇게 '사람'을 중심에 놓는 '인간주의'가 문제적으로 보일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포이에르바흐에 대한 맑스의 비판의 핵심중의 하나가 인간주의에 대한 비판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좌파정당인 사회당의 가치지향이 문국현 자본당과 오버래핑하는 것은 단순한 선거 전술의 운용문제로 해소될 수 없는 문제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종류의 인간주의를 거부하자는 것이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실천적 구호로서의 인간주의를 정세 속에서 활용할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열려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그렇게 정세 속에서 활용하기 위해서는 정세 자체를 분석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정세를 구조짓고 있는 적대들의 양상들을 분석해야만 합니다. 이를테면,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에 대한 분석을 해야만 합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이러저러한 다른 종류의 적대들과 차이들을 분석해야 합니다. 계급적대 뿐만 아니라, 성적 적대, 지적적대, 인종적대 등을 물질적으로 분석해야 하는 것이지요.

이 모든 이질적인 물질적 적대들을 단순히 '탈배제'라는 말 한마디로 해결할 도리는 없습니다. 각각의 적대들은 종별적으로 다른 해결방식들을 요구하고, 또 그것들의 복잡한 얽힘들은 다시 문제의 복잡한 해결들을 요구합니다.

다시 말해서 복지정책 하나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복지 내지 재분배 정책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말입니다.

그런데 사회당의 강령을 보면, 모든 문제를 단순한 배제의 문제로 정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현재의 자본주의의 여러 관계들의 분석에 입각한 싸움의 전략 등은 전혀 없습니다. 물론 이론적 분석을 강령에서 구구절절히 하고 있으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은 강령을 넘어서는 것이지요. 하지만 현재의 사회당 강령은 그런 분석 없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고, 그런 면에서 정확히 문제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칸트에 이르는 정치철학에서 공통성과 주권이라는 두 가지 원리가 작동한다는 말씀에 대해서는 여기서 제가 구구절절히 답변을 하기 힘들지만(정치철학 일반에 대한 논의로 번질 수 있기 때문에), 저는 다르게 생각한다는 정도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특히 로크의 자유권이 주권에 대한 방어권으로 논의되는 것은 프랑스 혁명 이전에는 사실상 주권이란 왕이나 지배계급의 '특권'이었지 인민의 '권리'가 아니었고, 따라서 인민주권이라는 개념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프랑스 혁명에 의한 주권개념의 이러한 전도는 따라서 반대편에서 subject 개념의 전도를 동반합니다. 신민에서 주체로.
 
(루소는 사실은 공화주의자가 아니라 직접민주주의자였고, 칸트야말로 공화주의자였지만, 그것의 핵심은 '법치'이고 그의 사고는 또한 능동적 시민과 수동적 시민의 구분--유산자, 백인, 남성만이 능동적 시민일 수 있다--을 재도입하는 것이었습니다. 칸트가 프랑스혁명의 열렬한 지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테르미도르적이며, 칸트보다는 루소가 프랑스 혁명을 진정으로 대변하는 것은 이 때문이지요. 프랑스혁명은 민주정을 포함한 모든 정체에 대한 진리로서의 민주주의를 수립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때문에 전에 쓴 촌평에서 공화주의에 대한 해석에 대한 이론이 있을 수 있음을 암시했던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서는 저도 할말이 많은데, 다음 기회로 미뤄야 겠군요.

어쨌든 저의 주장의 요점은 맑스가 문제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맑스가 문제가 있다고 루소로 후퇴하는 것은 좀 청산주의적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는 사회당이 과거의 대선 실패에 대응해서 이번에 들고나왔던 방식이 너무 청산주의적으로 보인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오히려 루소와 맑스를 모두 넘어설 수 있는 길을 추구해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 저의 주장인 것이지요. 그래서 더 광범위한 논의를 하면 좋겠다고 말했던 것이고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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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o 최원 

http://www.sp.or.kr/sp2007/bbs/board.php?bo_table=5_2&wr_id=742&page=3 

 

복잡한 문맥의 지적 토론을 확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단지 나는 루소로 후퇴했다고 생각한 적이 없으며, 루소의 사상에 대해서도 나는 루소의 주의주의, 정서의 공통성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인 평가를 합니다. 공통성 중에서 가장 고약한 공통성이 정서의 공통성입니다.

칸트의 능동시민/수동시민의 이중시민론, 제한선거권론의 문제는 그 사상 전체의 반동성으로 볼 것이 아니라 - 보통시민권이 실현된 경우조차 작동하고 있는 - 근대 시민의 구성조건 문제를 드러내는 근대 공화주의의 전범적인 한계로 보아야만 그 의의와 한께가 함께 드러날 것입니다.

문제가 맑스의 문제라면 차라리 나는 루소고 당신은 맑스다고 허황된 대립을 만들지 말고, 당신과 나의 맑스의 문제로 좁혔으면 합니다. 나는 맑스에게서도 적대조차 공통성을 전제한다고 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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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 네트워크
http://cafe.daum.net/basicincome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100129115332&section=03 

 

 "불안한 노후? 부동산 투기로는 해결 못 한다"

[인터뷰] '기본소득' 주장하는 곽노완 교수


기사입력 2010-01-31 오후 5:29:13 
 

범죄자와 성인군자가 같은 자격으로 공동체의 의사결정에 참가한다. 간신히 글자만 깨친 사람도 노벨상 수상자와 똑같이 한 표를 던진다. 누구나 알고 있는 보통선거의 원리다.

보통선거권이 민주주의의 핵심 원리라는 점은 이제 상식이어서, 이를 부정하는 사람이 오히려 이상하게 보인다. 그러나 이런 상식이 뿌리내린 지는, 채 100년도 되지 않는다. 이른바 선진국이라는 스위스조차 1971년에야 여성 참정권이 도입됐다. 100년 전에는 모든 사람이 똑같이 정치적 의사결정에 참가해야 한다는 주장이, 황당한 생각으로 받아들여지는 일이 흔했다.

"누구나 투표권 갖듯, 누구에게나 기본소득 보장돼야"

20세기가 보통선거권 확립의 역사였다면, 21세기는 기본소득 도입의 역사가 될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지난 27일부터 29일까지 서강대에서 열린 기본소득 국제학술대회에 참가한 이들이다. 판 빠레이스 벨기에 루뱅대 교수, 수플리시 브라질 노동자당 상원의원, 블라슈케 독일 좌파당 연구위원 등 기본소득 관련 논의를 주도한 이들이 대거 참가한 행사다.

기본소득(Basic income)이란,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조건 없이 일정한 소득을 보장해주는 제도다. 판단력이 부족한 사람이라 해서, 투표권을 제한하지 않는 것처럼 기본소득 역시 노동 여부와 관계가 없다. 부(富)를 창조하는 일에 전혀 가담하지 않았더라도, 평생 도박에 미쳐 지냈던 이라도 매달 일정한 소득을 보장받는다. 거꾸로, 넘치는 돈을 주체하지 못하는 갑부들에게도 매달 똑같은 돈이 지급된다.

얼핏 들으면, 황당하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에게 최저 생계비 이상의 소득이 무조건 보장돼야 하다는 주장은 이미 오래 전부터 나왔었다. 능력껏 일하고, 필요한 만큼 가져간다는 맑스주의자들의 주장과도 통하는 면이 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예수의 주장과도 통한다. 예수는 아침부터 일한 사람, 저녁 늦게야 일을 시작한 사람에게 똑같이 1데나리온씩 나눠준 포도원 주인에 대해 말했었다. 생산에 덜 기여한 사람도, 기본적인 소득은 누릴 수 있어야한다는 뜻으로도 풀이되는 내용이다.


▲ 한국에서도 진보진영 일각에서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관심이 크지 않은 편이다. 지난 27일부터 사흘간 진행된 기본소득 국제학술대회는 기본소득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대학생사람연대


'모든' 사람이 기본소득을 받아야 하는 이유

'가난한 이들에게 최저 생계비를 줘야 한다는 주장은 이해가 된다. 그런데 굳이 돈이 필요 없는 부자들에게도 왜 똑같은 돈을 정부가 지급하지. 그 돈을 모아서 가난한 이들에게 더 많이 주는 게 낫지 않나'라는 의문도 생길 수 있다.

기본소득 지지자들은 크게 세 가지 대답을 내놓는다. 하나는 '누가 가난한 사람인지'를 판정하는 일이 만만치 않다는 점이다. 판정 과정에 들어가는 비용이 오히려 낭비 요소라는 것. 판정 과정에서 각종 비리가 생길 가능성도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모든' 사람에게 기본소득을 보장하는 게 오히려 경제적이다.

두 번째는 기본소득을 받는 사람을 사회 구성원 전체가 아닌 일부로 한정하는 순간 생겨날 반발이다. 기본소득을 받지 않는 부자들 입장에서는 기본소득이 높아지는 게 못마땅할 수밖에 없다. 자신들에게는 아무런 혜택이 없는 일에 자신들의 세금이 쓰이는 셈이니 말이다. 그래서 부자들은 기본소득 수급자 수를 계속 줄이도록 압력을 넣게 된다. 이런 압력이 작동하면, 기본소득이 오랫동안 유지되기 힘들다.

보편주의 복지를 택한 북유럽 국가에서 운영하는 공공병원을 예로 들면, 이해가 쉽다. 이들 국가에선 부자든, 가난한 이든 똑같은 병원을 가게 된다. 부자들이 병원 서비스에 불만을 느낀다면, 이들은 공공의료 전체를 강화하는 쪽으로 압력을 넣게 된다. 정부가 세금을 더 거둬들이는 것에 대해서도 불만을 제기하기 어렵다. 자신들만 이용하는 병원을 따로 세우는 게 불가능한 상황에서 취한 선택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부자들만 이용할 수 있는 병원이 생겨난다면, 부자들은 공공의료 확충에 관심을 끊게 된다. 세금을 더 낼 의향도 사라진다. 결국 공공의료는 점점 축소되고, 질도 나빠진다. 기본소득 역시 사회 구성원 전체를 대상으로 하지 않으면, 같은 결과로 이어지리라는 것이다.

세 번째는 인권 차원의 접근이다. 모든 사람이 기본적인 생계를 보장받아야 한다는 것은 보편적 당위의 문제라는 논리다. 마치 선거권을 차별하지 않는 것처럼, 인간이라면 누구나 누려야 하는 권리라는 것. 따라서 어떤 식으로건 기본소득 수급자의 조건을 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논리다.

우파도 도입 주장하는 기본소득


▲ 브라질 상원에서 시민기본소득법을 발의했던 수플리시 의원이 방한해 강연을 했다. ⓒ기본소득 국제학술대회 주최팀
하지만, 아직 한국에서 기본소득이라는 말은 낯선 게 사실이다. 이번 학술대회가 주목을 끈 것은 그래서다. 비정규직의 급격한 확대, 심각한 청년 실업, 그리고 누구나 느끼는 실업에 대한 공포 등에 대한 해법을 찾는 일에 힌트를 줄 수 있으리라는 것.

실제로 브라질에서는 '시민기본소득법'이 지난 2002년 상원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된 뒤 하원을 거쳐 2004년 룰라 대통령의 승인을 받아 법적 효력을 갖게 됐다. 올해부터 점진적으로 시행될 예정인 이 법에 따르면, 브라질 국적자 외에도 5년 이상 거주한 외국인까지 모두 일정금액을 받게된다. 당시 법안을 발의했던 수플리시 상원의원은 이번 학술대회에 참가해서 "시민기본소득 제도 도입은 모든 사회 구성원이 자유롭고 존엄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가장 손쉬운 길"이라고 말했다.

'극단적인 신자유주의의 나라'로만 알려져 있는 미국에서도 기본소득이 도입된 주가 있다. 알래스카에서는 석유 매각대금의 일정액을 적립한 알래스카영구기금에서 나오는 수익을 모든 주민에게 일정하게 나눠준다.

독일에서도 기본소득 도입 논의가 활발하다. 우파 성향을 띤 독일 기업인인 괴츠 베르너 지난 2006년부터 "소득세 등 모든 직접세를 폐지하고, 소비세를 인상하여 기본소득 재원으로 삼자"는 주장을 해 왔다. 기본소득 도입 주장이 반드시 노동자와 좌파 사이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다.

이는 기본소득 도입을 주장하는 이들 사이에서도 다양한 입장 차이가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또 기본소득을 둘러싼 이론적 논의가 아직 충분히 성숙하지 않았다는 점도 보여준다. 실제로 일부 여성운동가들은 기본소득 도입이 성별에 따른 분업을 더 고착화 시킬 수 있다고 지적한다. 노동시장에서 여성이 겪는 차별를 없애려는 노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진행되는 기본소득 도입 논의는, 자칫 가사와 육아를 여성이 전담하는 구조를 고착화시키는 효과를 낳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이번 학술대회를 준비한 곽노완 서울시립대 도시인문학 연구소 교수를 만났다. 경제철학은 전공한 그는 강남훈 한신대 경제학과 교수, 장석준 진보신당 상상연구소 연구기획실장, 안현호 대구대 일반사회교육과 교수 등과 함께 국내에 기본소득 관련 논의를 소개하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해 왔다.

"무상의료와 기본소득, 어느 쪽이 더 실현 가능성 클까"


▲ 기본소득 국제학술대회가 열린 서강대 다산관에서 만난 곽노완 교수. ⓒ프레시안(성현석)
프레시안 : 브라질 등에서 도입된 사례가 있지만, 기본소득은 아직 우리에게 낯선 게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실현가능성을 의심하는 이들이 종종 있다.

곽노완 : 민주노총,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에서 기본소득에 관심을 둔 이들이 많다. 사회당 역시 적극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보수 진영은 물론이고 진보진영에서도 실현가능성을 의심하는 이들이 있다. 그런데 잠깐 생각을 돌려보자. 과거 대선에서 진보진영은 "무상교육, 무상의료"라는 공약을 내걸었다. 이런 공약과 기본소득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손쉽게 도입할 수 있을까. 당연히 기본소득이다. 모든 사람이 혜택을 누리므로, 적극적인 반발은 덜 할 수밖에 없다. 기본소득 도입을 전제로 시뮬레이션을 해보면, 전체 국민의 90% 가까이가 이익을 본다. 압도적 다수가 명백한 이익을 누리는 제도를 왜 도입하기 힘들다고 보는가.

프레시안 : 모든 국민에게 현금으로 일정액을 나눠주는 제도가 실효성이 있으려면, 물가가 안정돼야 한다. 예컨대 서민에게 매달 100만 원을 나눠준다고 해도, 주거비나 대학등록금, 의료비 등이 덩달아 뛰어오른다면 별 효과를 거두기 힘들다. 만약 정부가 국민에게 지급된 기본소득 총액만큼 통화량이 늘리는 경우에도, 물가상승은 피하기 어렵다.

곽노완 : 기본소득 논의는 다양한 형태로 이뤄진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돈을 조건 없이 정기적으로 나눠준다는 핵심 내용에 동의하는 이들끼리도 구체적인 실행방식에 대해서는 생각이 다를 수 있다.

내 입장은 기본소득이 현금과 현물로 이뤄져야 한다는 쪽이다. 현물이 포함돼 있으므로 물가 인상에 따른 부담을 줄일 수 있다. 주거, 교육, 의료 등 삶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영역에 대해 공공성을 높여서 누구나 이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 역시 기본소득 논의 안에 포함될 수 있다. 실제로 일부 학자들은 국가 안보, 공교육 등을 모두 기본소득 범주 안에서 파악하기도 한다.

또 기본소득이 현금으로만 지급되는 경우에도 지급액을 물가와 연동해서 부작용을 줄일 수 있다. 통화량 증가 가능성에 대해 물었는데, 이 경우에도 꼭 효과가 없다고 보기는 힘들다. 정부가 국민에게 직접 돈을 지급하는 경우에 대해 시뮬레이션해보면, 국민들의 구매력이 늘어난 것으로 나온다.

흔히들 걱정하는 게 부동산 문제다. 부동산 가격 인상으로 주거비가 폭등하면, 기본소득을 도입해 봤자 별 소용이 없는 것 아니냐는 걱정이다. 그러나 기본소득 논의를 조금만 뜯어보면, 이런 걱정은 사라진다. 기본소득을 위한 재원을 어디서 확보하겠나. 대표적인 게 부동산 투기로 인한 소득이다. 투기 소득을 세금으로 전액 거둬들이는 것은 기본소득 도입의 전제 조건이다. 기본소득 도입과 부동산 가격 안정은 서로 맞물려 있는 문제다.


▲ 부분적으로 기본소득 제도를 도입해 시행 중인 브라질은 2010년부터 전 국민에게 이 제도를 도입한다. ⓒ프레시안

"기본소득, 경제 활성화의 새로운 계기 될 수 있다"

프레시안 : 기본소득이 도입되면, 기업가 정신도 활기를 띨 듯하다. 창업이나 발명 등 새로운 시도를 하려는 이들이 망설이게 되는 이유가 실패에 따른 부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도 기본적인 생계가 유지된다면, 많은 이들이 혁신을 쫓는 도전에 뛰어들 듯하다.

곽노완 : 물론이다.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다양한 형태의 기업이 나올 수 있다. 그래서 경제가 활성화되는 결과도 나올 수 있다. 구매력 증대로 인한 내수 활성화, 창업 증가로 인한 고용 증대, 도전 정신 고취로 인한 기술 혁신과 문화 생산 증가 등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다양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이번 학술대회에서 쟁점이 된 것 가운데 하나가 외국인에게 기본소득을 주는 문제다. 원칙상으로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기본적인 생계를 보장받아야 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제한이 불가피하다. 특정 국가에서만 거주자 전체에게 기본소득을 주다면, 몰려드는 외국인을 감당하기 어렵다. 브라질 등에서 5년 이상 거주한 외국인이라는 제한을 둔 것도 그래서다.

그런데 여기서도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얼핏 생각하면, 몰려드는 외국인에게 기본소득을 나눠주면 국가 재정 부담을 감당하기 어려울 듯하다. 그런데 제도를 면밀하게 다듬으면, 반대 결과가 나올 수 있다.

지금 선진국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문제가 저출산으로 인한 인구 부족이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정부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에서 외국인들에게도 기본소득을 개방하는 것은 인구 부족에 대한 한 해법이 될 수 있다. 또 잘만 활용하면, 국가의 위상을 높이는 데 활용할 수도 있다. 실제로 한국이 일정 기간 이상 거주한 외국인에게 기본소득을 보장한다면, 한국어와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을 크게 높일 수 있다. 이렇게 되면, 한국어 교육 등으로 인해 생겨나는 경제적 이익도 커진다. 이런 이익 가운데 일부를 다시 기본소득으로 돌리는 선순환 구조가 생길 수 있다.

"노후 불안감 사라지면, 부동산에 집착할 이유 없다"

프레시안 : 문제는 재원 확보일 게다. 기본소득 도입 과정에서 반대 여론이 인다면, 결국 이 대목일 듯하다.

곽노완 : 부동산과 주식 등에서 생겨난 투기 및 불로소득을 거둬서 기본소득으로 나눠주는 게 핵심이다. 물론 이런 주장에 대해 소수 자산가 집단이 강력히 반대할 게다. 그러나 다수가 혜택을 누리는 제도를 소수가 반대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본다.

또 어떤 이들은 노후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부동산에 지나치게 집착한다. 늙고 병들어서 노동 수입이 사라진 뒤에는 불로소득이 있어야만 생활이 가능하다는 게다. 이런 이들에게 기본소득 도입은 새로운 환경을 열어준다. 늙어 죽을 때까지 기본적인 생활비가 보장되는 상황에서는 불로소득에 지나치게 집착할 이유가 없다.

 



/성현석 기자 메일보내기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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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뮤지션 2010-02-11 1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곽노완 : 부동산과 주식 등에서 생겨난 투기 및 불로소득을 거둬서 기본소득으로 나눠주는 게 핵심이다. 물론 이런 주장에 대해 소수 자산가 집단이 강력히 반대할 게다. 그러나 다수가 혜택을 누리는 제도를 소수가 반대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본다.

-> 난 이 대목에서 오히려 곽노완 교수가 주장하는 기본소득제의 비현실성을 보는데.. 우선 '소수 자산가 집단'은 '부동산과 주식 등에서 생겨난' '소득'을 절대 '투기 및 불로소득'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게 문제겠지... 이는 어디까지나 그들의 자산관리 혹은 투자행위에 의해서 얻어지는 정당한 소득이니깐.. 현행 민법/상법 상에서도 이들을 보장해줘야만 한다고 여길 뿐더러... 그게 아니었다면 부동산 관련 법규를 이토록 자주 바꿨을까? 그토록 많이 개정하고도 나중에는 유야무야 되는 사례가 얼마나 많았는데... 이를 다 아는 사람들이 이런 주장을 한다는 게 의아할 따름..

바라 2010-02-11 22:59   좋아요 0 | URL
그러게.. 인터뷰라서 자세한 얘기는 못했을지도 모르겠지만, "다수가 혜택을 누리는 제도를 소수가 반대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얘기는 너무 낙관적인 단순화인 거 같다. 안 그래도 사람들 다 재테크 재테크하는 마당인데... http://www.movements.or.kr/bbs/view.php?board=journal&id=2033 에 나왔던 말에 공감하는 데, "특히 기본소득의 경우 ‘노동하지 않아도 생존할 권리’를 요구한다. 한국에서는 사회당과 연기금 사회주의 연구자 등이 구체적인 재정 계획을 세우고 선전활동을 벌이고 있지만 주체형성과 실행방안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는 ‘대안사회에 대한 논의 촉발’, ‘사회주의를 거치지 않고 공산주의로 이행하는 경로’ 등의 ‘이념형’ 제시에 그칠 수밖에 없다. 현행 소득보장 정책에서도 복지의존에 대한 비난과 증세에 대한 대중적 반발을 극복하는 공감대 형성이 쉽지 않고 사회보장 확대를 위한 운동이 미미한 조건에서 사회정책의 근간을 전환하자는 주장은 그 실행방안이 제시되지 않고 있다. 대중 이데올로기의 전환을 위한 주체형성과 이행의 구체적 경로에 대한 논의 없이 재정계산으로 실현 가능성을 주장하는 것은 무망한 일이다."

바라 2010-02-23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채만수, 과학에서 몽상으로 사회주의의 발전. 발전. 발전(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556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