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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
김산해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인간이 죽음의 공포를 알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아담과 이브가 금단의 열매를 먹고 지혜를 가지게 되었을 때? 인간의 운명이 신들의 손아귀에서 장난처럼 이리저리 움직여지고 있었을 때? 여기, 인류 최초로, 죽음 앞에 내몰려 쓸쓸함과 비참함과 비애와 두려움으로 방황하던 인간이 있다. 이제껏 알려진 그 어떤 신화보다도 오래된, 최고(最古)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의 주인공. 그가 살았던 때는 히브리 신화보다도 그리스 신화보다도 한참을 앞선, 지금으로부터 4800여 년 전이다.
인간과 여신 사이에서 태어나 2/3는 신이고 1/3은 인간인 수메르의 영웅 길가메쉬. 그가 처음부터 죽음의 공포를 느꼈던 것은 아니다. “대체 하늘에 오를 수 있는 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신들은 샤마쉬와 함께 영생을 누리는 반면 인간의 수명은 이미 정해져 있거늘. … 그대마저 죽음이 두려운 것이지. … 내가 쓰러지면 난 나의 이름을 알릴 걸세. 그러면 사람들이 ‘무시무시한 훔바바와 대결한 길가메쉬’라고 말할 테니.” 호기롭게 죽음을 인정하고 죽기 전에 이름을 남기겠다는 야심과 의지로 신들의 세계를 침범한 길가메쉬는, 그러나, 마음을 나눈 친구 엔키두의 죽음 앞에서는 더 이상 호방한 모습을 보이지 못한다. 먼저 떠나간 친구의 시신 앞에서 애절하고 비통하게 탄식하던 그에게 찾아 든 것은 자신도 결국은 죽을 운명이라는 깨달음이다. “나는 죽을 것이다! 나도 엔키두와 다를 바 없겠지?! 너무나 슬픈 생각이 내 몸 속을 파고드는구나! 죽음이 두렵다. 그래서 지금 대초원을 헤매고 있고……”
죽음은 인간에게 원초적으로 주어진 숙명이다. 신들은 인간을 창조하면서 인간에게는 필멸의 삶을 배정했고, 자신들은 불멸의 삶을 가져갔다. 하여, 자고이래 죽음은 철학과 문학의 영원한 주제이다. 허나, 신화의 원형으로 여겨왔던 그리스 신화에서 죽음은 비애나 공포로 그려지지 않는다. 영웅의 죽음은 장렬하고, 죽은 이는 다른 세계로 건너 가거나 하늘의 별이 되어 영원히 남는다. 인간은 신들처럼, 죽음에 대한 두려움 없이 그저 강인한 ‘영웅’의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최초의 영웅 길가메쉬는 죽음 앞에 고뇌한다. 반신반인으로 창조되어 신들의 보살핌으로 살아온 나날들도, 신들의 산지기 훔바바를 꺾고, 하늘의 황소를 죽이고, 여신 이쉬타르의 청혼을 가차없이 거절하여 쌓은 명성도 죽음 앞에서는 산산이 부서지고, 가슴에 사무친 비애와 공포를 어쩌지 못한다. 애초에 길가메쉬는 영웅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 용감하고, 고귀하고, 멋지고, 현명한, 감히 당해낼 자 없는 위대한 왕이었으나, 밤낮 포악하여 젊은 남자들을 괴롭히고, 초야권을 발동하여 모든 여자들을 유린한다. 그런 그가 영웅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은 그와 대적할 상대로 신들에 의해 창조된 엔키두를 만난 이후이다. 그러나 훔바바를 꺾을 때도, 하늘의 황소를 죽일 때도, 길가메쉬는 두려움에 떨다가 엔키두의 결정적인 격려와 도움에 힘입어 비로소 업적을 이룬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모습이다.
신화는 역사성과 설화성이 공존해 있는, 원형(原形)과 변형(變形)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즉 실제의 역사적 경험이 한 집단이 추구하는 이상향에 의해 가공되어 생겨난 것이 신화이다. 수메르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를 통해 당시 수메르인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길가메쉬는 반신반인이라기보다는, 위대한 영웅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전형을 보여준다. 한없이 약하고, 때로 이기적이고 비겁하지만, 다른 사람들과의 믿음과 협력을 통해 뜻을 이루어가는, 우리들과 마찬가지인 인간. 명성을 꿈꾸고, 죽음을 두려워하고, 영생을 욕망하는 어리석은 인간. 길가메쉬가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영원한 잠으로 고통스러워하며 대초원을 방황할 때, 우트나피쉬팀이 말한다. “너는 쉼없이 고생하면서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 고생 끝에 네 자신이 완전히 지쳐버리면, 너는 네 몸을 슬픔으로 가득 채우고 너의 긴 인생 항로를 조급히 끝내는 일로 접어든다!” 임종을 앞둔 길가메쉬에게 인간을 창조한 신 엔키가 속삭인다. “너는 절망해서는 안 된다. 의기소침해서는 안 된다.” 다가올 죽음으로 번민하며 인생을 허비하지 말라는 충고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예정되어 있는 삶 속에서 우정과 사랑과 즐거움과 행복을 찾는 것 뿐임을, 고대의 수메르인들은 진작부터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신화의 또다른 특징은 문학성에 있다고 한다. 신화 자체가 문학이고, 또한 문학의 소재가 되어 왔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길가메쉬 서사시>는 최고(最古)일 뿐만 아니라 최고(最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엔키두를 통해 야만의 인간이 문명화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요부 혹은 성녀의 이미지를 가진 샴하트가 등장하고, 길가메쉬와 엔키두의 만남이라는 인류의 협력을 이야기하고, 죽음 앞에서 한없이 초라해지는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고, 그럼에도 주어진 삶을 최선의 노력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교훈까지 준다. 기근, 굶주림, 대홍수라는, 신들의 분노에도 살아남은 인간의 생명력을 노래한다. <길가메쉬 서사시>가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리라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꼼꼼한 주석을 통해 드러나는 수메르 신들의 세계와 그들만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신들의 제왕 안, 적자 엔릴과 서자 엔키의 대립, 이기적이고 교활한 인안나, 태양의 신 우투, 인간과 결합하여 길가메쉬를 낳은 닌순… 좀 더 많은 수메르의 점토판이 해석되기를, 그리하여 다양한 수메르의 신화가 널리 알려지기를 바란다. 고대 그리스 신화와 히브리 신화에 영향을 주었듯이, 수메르 신화는 현대 문화에서도 영감의 원천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