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불복종 - 저항과 자유의 길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35
오현철 지음 / 책세상 / 200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에리히 프롬, 헨리 데이비드 소로, 롤스, 코헨, 조지 카치아피카스, 위르겐 하버마스 등을 읽을 여유가 전혀 없는 사람에게 추천할 만한 책이다.

 

책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 1 민주주의와 시민불복종”, “ 2 시민불복종의 성격”, “ 3 세계사 속의 시민불복종”, “ 4 시민불복종의 정당화와 재정의”, “ 5 시민불복종의 정당성 비판에 대한 반론”, “ 6 미래의 시민불복종”. 1장부터 5 1 이론적 비판과 반론까지의 내용은 위에 언급한 사람들이 책을 요약했다고 있다. 시민불복종의 정의, 유형, 세계사 속에서 나타난 형태, 시민불복종을 정당화하는 논리 등을 이책 저책에서 뽑아내 이리저리 짜깁기해 놓았다. 무수히 달려있는 각주를 찾아 뒷장을 펼치면 이름들 뿐이다. (, 저자는 무정부주의자가 아니라는 내용주가 하나 기억나긴 한다.) 글쎄, 유명한 사람들이 자기 책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는 있어도, 책의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은 뭔지 도무지 수가 없다.

 

절반쯤 읽다가 그만 덮어버릴까 싶었지만 책이 얇은 관계로 참고 보자 했는데, 역시 그러길 잘했다. 저자가 책을 썼는지를 5 2부에 가서야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133쪽부터 139쪽까지의 5 2부는 경험적 비판과 반론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시민불복종이 민주주의를 훼손한다는 일부의 비판에 대해 현실에서의 경험을 통해 반론을 제기한다는 것인데, 우리나라의 2000 총선에서 등장한 낙천낙선운동 예로 들어 설명한다. 당시 선거법 위반이라 하여 이래저래 말이 많았던 시민단체들의 낙천낙선운동 민주주의 사회에서 반드시 필요한 시민불복종 형태이므로 정당하다는 주장이다. 그렇군, 말을 하고 싶은 거였군, 이라는 깨달음. 그래서 프롬과 소로와 롤스와 등등의 권위가 필요했던 것인가.

 

마지막 장에 이르면 저자는 시민사회단체의 중요성을 부각시킨다. 시민불복종의 자기제한을 조절하고 통제할 주체로서도 시민사회단체가 적합하며 현실적으로 이를 대신할 주체는 없다. […] 파편화된 개인을 대신하여 국가의 거대한 정치체계와 경제체계에 맞서기 위해서는, 사회적 역량을 시민사회단체에 꾸준히 모아야 것이다.”

 

2000 총선 당시에 나는 시민단체의 낙천낙선운동을 찬성했었다. 시민사회단체가 우리 사회에서 일정 정도의 역할을 한다는 것도 인정한다. 그렇지만, 그걸 학문적으로 정당화하겠다고 온갖 학자들의 이름을 들먹여가며 이렇게 방대한(!) 책을 써야 하는지 의문이 생기는 어쩔 없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udan 2005-04-30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전에, 읽고 있던 책이 재미 없다고 하시더니, 그게 이 책이군요.
요즘 소설은 안 읽으시나봐요. urblue님의 소설리뷰 꽤 좋아하는데.

마냐 2005-04-30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 정말 재밌슴다. (음, 왜 읽다보니 웃음만 나는지, 원...-,.-)

클리오 2005-04-30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읽은 책세상 문고 한권도 이와 비슷했다는.. 으으~ (책세상문고는 왠만하면 괜찮은데 말입니다. ^^)

urblue 2005-04-30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단님, 요즘 소설에 영 관심이 안 가네요. 불가꼬프 새 책이 도착하면 읽어볼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 리뷰 좋아한다고 말씀해주시니...민망+감사.

마냐님, 흠..좀 웃기죠. -_-;

클리오님, 지금 읽고 있는 다른 책은 제법 재미있습니다. 선택을 잘 해야겠어요.
 
사색기행 - 나는 이런 여행을 해 왔다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이규원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5년 4월
평점 :
절판


일본에서 이 책이 나온 게 작년(2004년)이다. 그는 이제 '책이 나오면 바로 번역에 들어가는' 급의 작가군에 속하게 된 모양이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책은 알라딘에만 총 11권(등재는 12권인데, 1991년에 번역된 <우주비행사, 그들의 이야기>는 2002년에 <우주로부터의 귀환>으로 다시 번역된 것 같다)이 올라있다. 한국에 소개된 것은 1991년부터. 하지만 다치바나 다카시란 이름이 널리 알려진 건 2001년에 번역된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일 것이다. 나 역시 그를 처음 접한 건 이 책에서였다.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에서의 다치바나 다카시의 이미지는 무엇보다 먼저 '뻔뻔하고 당당하다' 였다. 아, 이 사람은 마초다. 하지만 그냥 무시하기에는 뭔가 있는 게 아닐까. 듣기에 따라서는 상당히 뻔뻔한 얘기를 잘도 하고 있지만, 그대로 듣다 보면 또 그런대로 제법 그럴듯하다. 이를테면 마초이기는 한데, 만만치 않은, 밉지만은 않은 마초랄까. 아무튼 뻔뻔함도 이만하면 일가를 이뤘다.

 

<사색기행>은 이런 저자의 '여행기'다. 하지만 스스로 "판에 박힌" 기행문은 아니라고 한다. "여행에 얽힌 글이라고 해도 여행기나 기행문 같은 글은 아니다. […] 오히려 여행을 계기로 펼쳤던 다양한 생각을 기록한 글이라고 해야 옳을지 모른다. […] 그래서 '사색기행'인 것이다(10쪽)." 어디에 가서 무엇을 보았다가 아니다. 거기에서 무엇을 생각했다가 더 중요한 기행문이라는 말이겠다. 물론 그렇다고 사상서 풍의 묵직하고 현학적인 기행문은 아니다. 그의 여행이 대부분 언론 쪽의 의뢰와 관계된 취재 여행이었고 보면, 이 책은 실은 일종의 취재기와 취재 후일담, 르포르타쥬 등을 묶은 것이다. 그걸 6개의 부로 나누고, 주제에 따라 몇 편씩 모두 14편의 에세이를 실었다. 각각의 부는 다음과 같다 "1부 무인도의 사색", "2부 '가르강튀아 풍'의 폭음폭식 여행", "3부 기독교 예술 여행", "4부 유럽으로 반핵 무전여행을 떠나다", "5부 팔레스타인 보고", "6부 뉴욕연구". 그래서 분량도 586쪽으로 꽤 두툼하다.

 

하지만 책은 꽤 빨리 읽힌다. 호오, 그랬구나 감탄도 하고, 이건 너무 뻔뻔한 거 아냐 하며 키득거리고 읽다 보면 586쪽도 어느새 끝이다. 과연 저널리스트의 문체랄까. 상당한 속도로 읽을 수 있었다. 14편의 글은 각각, 대상에 대해 상세한 정보나 논리를 담고 있는 탄탄한 녀석들도 좀 있고, 그저 글을 쓰게 된 당시의 정황이나 심경을 쓴 엉성한 것들도 꽤 있다. 열 아홉살 때의 풋풋하고 귀여운 다카시군부터, 비교적 최근에 쓴 뻔뻔하고 기운 넘치는 다치바나 아저씨까지. 68혁명의 기운이 남아있는 유럽과 와인 및 치즈로 넘치는 유럽, AIDS 전의 뉴욕과 AIDS 이후의 뉴욕, 세계의 경계에 있는 몽골과 역사의 경계에 놓인 남미, 그리고 무엇보다 세계의 숨은 뇌관으로서의 팔레스타인. 이 책은 세계 곳곳에 대한 흥미로운 취재기인 동시에 다치바나 다카시는 어떻게 다치바나 다카시가 되었는가를 보여주는 보고서인 것이다.

 

<사색기행>은 부제가 "나는 이런 여행을 해왔다"다. 저자가 직접 붙인 부제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부제 덕분에 나는 <사색기행>을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의 짝패로 읽었다.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는 제목 그대로 저자의 독서 편력을 주제로 한 에세이다(알라딘의 책 소개를 보면 정확히는 "다치바나 다카시의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문예춘추, 1995)와 <내가 읽은 재미있는 책 · 재미없는 책 그리고 나의 대량독서술 · 경이의 속독술>(문예춘추, 2001) 두 권의 저술을 저자의 동의 아래 번역한 것"이라 한다). '책을 읽다'와 '여행을 한다'는 두 문장의 공통점이랄까. 책이라는 세계를 여행하기와 세계라는 책을 읽기. 그것은 타자를 만나는 것, 그럼으로써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를테면 다치바나 다카시는 타자로서의 책, 타자로서의 세계라는 자기의 바깥으로 자신을 이동시킴으로써 자신의 인식을 바꾸고 나아가 자신을 바꾸어 온 것. 이것이 자신의 삶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별 네 개. 좀 후한가? 확실히 사족이 많고 허술한 구석도 많아 좀 허풍 같은 책이지만, 책을 읽는 이틀 남짓 꽤 유쾌했으니 그 정도의 가치는 매겨주어도 좋으리라.

 

 

 


댓글(9)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람구두 2005-04-28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

urblue 2005-04-28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

마냐 2005-04-28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아깝네. 책이나 노려볼껄....이렇게 블루님을 즐겁게 한 책인줄 알았다면..추천.

urblue 2005-04-28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냐님도 감사. ^^

비연 2005-04-28 2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 읽고 싶어지는군요^^

로드무비 2005-04-29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제일 먼저 쓰려 했더니!
블루님의 리뷰 읽고나니 빨리 해치워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perky 2005-04-29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허풍같은 책.^^ 사실 저는 다치나바 다카시라는 이름만 들어도 왠지 어려울 것 같아 손이 잘 안가더라구요. ^^;

Phantomlady 2005-05-02 0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을까 말까 묵하 고민중인데.. 아, 더 읽고싶어졌어요!

urblue 2005-05-02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얼른들 읽어보세요. 이틀도 안 걸립니다. ^^
 
발터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
발터 벤야민 지음, 김남시 옮김 / 그린비 / 2005년 3월
평점 :
절판


발터 벤야민. 이름만은 무척 익숙한 학자다. 그 익숙한 이름 탓에 오히려 낯설어하고 어려워한다는 점이 문제라면 문제겠지만. 그가 어떤 글을 쓰고 어떤 이론을 펼쳤는지 전혀 모른다. 의미를 짐작조차 할 수 없는 파사주니 파사젠베르크니 하는 말들을 들었을 따름이다.

 

<발터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라는 제목의 이 책을, 친구가 청하지 않았다면, 읽을 생각이나 했을까. 하긴, 어쩌면 저 예쁜 표지 덕에 구입했을지도 모를 일이긴 하다. 책의 표지 디자인에 특별히 신경을 쓰는 건 아닌데, 이 책은 마음에 꼭 든다. 표지 때문에 책상 위에 올려놓거나 손에 들고 다니고 싶을 정도다.

 

친구에게 건네주기 전에 한 번 읽어보기로 했다. 50여 페이지쯤 넘겼을 때 친구가 어떠냐는 질문을 했다. 내 대답, 이건 그냥 일기잖아. 제목조차 <일기>인데 도대체 뭘 생각한 걸까.

 

1926년 12월 6일부터 1927년 1월 31일까지 벤야민은 모스크바에 체류했다. 잡지에 모스크바에 관한 글을 써주기로 하고 경비를 마련했다지만, 실제 목적은 아샤 라시스를 만나기 위해서 였던가 보다. 아샤 라시스는 벤야민의 표현에 의하면 리가에서 온 라트비아 출신의 볼셰비키 여인으로 급진적 코뮤니즘의 현실성을 깊이 있게 통찰하고 있는, 지금까지 알게 된 여자들 중 가장 뛰어난 여인 중 하나. 벤야민은 그녀로부터 지적 영향을 많이 받았고, 맑스주의적 사유로 나아가는 데 그녀가 일정 정도의 자극이 되었을 거라고 한다. 책에 실린 사진을 통해서도 그녀의 명민함을 느낄 수 있다.

 

일기에는 아샤를 향한 그의 마음이 온전히 드러난다. 아샤를 쳐다보는데 지나치게 열중해 정작 그녀가 하는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는 고백이나 키스를 해 달라고 청했다가 거절당한 얘기, 그녀의 애인이었던 라이히와의 묘한 신경전, 그녀와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피로, 짜증, 불안을 보자니(정확히는 그가 쓴 대로 읽고 있자니), 한편 안쓰럽다. 제아무리 뛰어난 학자라도 사람 사이의 문제와 감정은 어쩌지 못한다는 걸 다시 확인한다.

 

하지만 이 글의 묘미는 거기에 있지 않다. 벤야민은 모스크바에 체류하는 동안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연극과 발레와 영화 등 각종 공연을 관람하고, 박물관과 미술관을 둘러 보고, 광장과 시장과 거리를 산책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감상과 거기서 파생된 러시아와 모스크바에 대한 생각을 자세히 기록한다. 사실 외국을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는 일이긴 하다. 차이가 있다면 얼만큼 정확하게 대상을 바라보고 그 의미를 파악하는지,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정도일 것이다. 벤야민의 일기는 예리하고 섬세하다. 혁명 후 방향을 잡지 못한 러시아의 혼란스럽고 모순된 상황을 날카롭게 인식하고, 민중들의 지난한 생활상과 그 와중에도 발견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성취에 관심을 기울이며, 건물과 거리에서 드러나는 인상을 꼼꼼히 짚어낸다. 그러한 기록은 책 말미에 실린 <모스크바>라는 글에 고스란히 옮겨진다.

 

<모스크바>는 1927년 초에 <피조물(Die Kreatur)>이라는 잡지에 실린 글이다. 일기의 이곳 저곳에 적혀 있는, 그가 보고 듣고 느낀 모스크바의 인상이, 표현을 바꾸거나 순서를 짜맞추거나 하는 식으로 재구성되어 있다. 일기와 <모스크바>를 비교하면 벤야민이 발표한 공식적인 글이 그 이면에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일기는 <모스크바>라는 DVD의 서플먼트인 셈이다.

 

<모스크바>를 마무리할 무렵 게르숌 숄렘에게 보낸 편지에 벤야민은 이렇게 썼다. 제 서술은 모든 이론들에서 거리를 취할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바라건대 창조적인 것이 스스로 드러나게 하는 게 가능할 테니까요. …… 저는 이 순간의 모스크바라는 도시에 대해서 서술하고자 합니다. 그곳은, 그 속에선 모든 사실들이 이미 이론이며 따라서 모든 연역적 추상, 모든 예측, 나아가 일정 한도 내에선 모든 판단들마저 보류하고 있는 곳입니다. 듣기로는 이것이 벤야민이 글을 쓰는 기본적인 태도였던가 보다. 그것이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다만 재미있는 일기와 기행문을 읽었다는 것으로, 그의 다른 글을 읽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는 것으로 만족한다. 다음은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드무비 2005-04-23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리뷰 쓰셨군요.
모든 이론들에서 거리를 취하겠다는 그의 서술이 마음에 듭니다.
음, 일단 보관함에......
땡스투. ^^

마냐 2005-04-24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오랜만인듯. ^^
저 책, 정말 찜 해놓았다가 후배에게 선수를 빼앗기구 땅을 쳤던 책임다. 그리고 돌아서면서.."뭘, 내가 가졌어도 안 읽었을꺼야.."라고 달래긴 했는데..^^; 읽구싶네요. 꾸욱.

urblue 2005-04-24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좀 많이 게으르죠. 몇 달만에야 올리는 리뷰라니.
고맙습니다. 어쨌거나 일기니까 쉽게 읽히네요. ^^

2005-04-25 21: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
김산해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인간이 죽음의 공포를 알게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아담과 이브가 금단의 열매를 먹고 지혜를 가지게 되었을 ? 인간의 운명이 신들의 손아귀에서 장난처럼 이리저리 움직여지고 있었을 ? 여기, 인류 최초로, 죽음 앞에 내몰려 쓸쓸함과 비참함과 비애와 두려움으로 방황하던 인간이 있다. 이제껏 알려진 어떤 신화보다도 오래된, 최고(最古)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 주인공. 그가 살았던 때는 히브리 신화보다도 그리스 신화보다도 한참을 앞선, 지금으로부터 4800 전이다.

 

인간과 여신 사이에서 태어나 2/3 신이고 1/3 인간인 수메르의 영웅 길가메쉬. 그가 처음부터 죽음의 공포를 느꼈던 것은 아니다. 대체 하늘에 오를 있는 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신들은 샤마쉬와 함께 영생을 누리는 반면 인간의 수명은 이미 정해져 있거늘. … 그대마저 죽음이 두려운 것이지. … 내가 쓰러지면 나의 이름을 알릴 걸세. 그러면 사람들이 무시무시한 훔바바와 대결한 길가메쉬라고 말할 테니.” 호기롭게 죽음을 인정하고 죽기 전에 이름을 남기겠다는 야심과 의지로 신들의 세계를 침범한 길가메쉬는, 그러나, 마음을 나눈 친구 엔키두의 죽음 앞에서는 이상 호방한 모습을 보이지 못한다. 먼저 떠나간 친구의 시신 앞에서 애절하고 비통하게 탄식하던 그에게 찾아 것은 자신도 결국은 죽을 운명이라는 깨달음이다. 나는 죽을 것이다! 나도 엔키두와 다를 없겠지?! 너무나 슬픈 생각이 속을 파고드는구나! 죽음이 두렵다. 그래서 지금 대초원을 헤매고 있고……”

 

죽음은 인간에게 원초적으로 주어진 숙명이다. 신들은 인간을 창조하면서 인간에게는 필멸의 삶을 배정했고, 자신들은 불멸의 삶을 가져갔. 하여, 자고이래 죽음은 철학과 문학의 영원한 주제이다. 허나, 신화의 원형으로 여겨왔던 그리스 신화에서 죽음은 비애나 공포로 그려지지 않는다. 영웅의 죽음은 장렬하고, 죽은 이는 다른 세계로 건너 가거나 하늘의 별이 되어 영원히 남는다. 인간은 신들처럼, 죽음에 대한 두려움 없이 그저 강인한 영웅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최초의 영웅 길가메쉬는 죽음 앞에 고뇌한다. 반신반인으로 창조되어 신들의 보살핌으로 살아온 나날들도, 신들의 산지기 훔바바를 꺾고, 하늘의 황소를 죽이고, 여신 이쉬타르의 청혼을 가차없이 거절하여 쌓은 명성도 죽음 앞에서는 산산이 부서지고, 가슴에 사무친 비애와 공포를 어쩌지 못한다. 애초에 길가메쉬는 영웅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 용감하고, 고귀하고, 멋지고, 현명한, 감히 당해낼 없는 위대한 이었으나, 밤낮 포악하여 젊은 남자들을 괴롭히고, 초야권을 발동하여 모든 여자들을 유린한다. 그런 그가 영웅의 면모를 갖추게 것은 그와 대적할 상대로 신들에 의해 창조된 엔키두를 만난 이후이다. 그러나 훔바바를 꺾을 때도, 하늘의 황소를 죽일 때도, 길가메쉬는 두려움에 떨다가 엔키두의 결정적인 격려와 도움에 힘입어 비로소 업적을 이룬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없는 나약한 모습이다.

 

신화는 역사성과 설화성이 공존해 있는, 원형(原形) 변형(變形)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실제의 역사적 경험이 집단이 추구하는 이상향에 의해 가공되어 생겨난 것이 신화이다. 수메르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 통해 당시 수메르인들의 생각을 읽을 있다. 길가메쉬는 반신반인이라기보다는, 위대한 영웅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전형을 보여준다. 한없이 약하고, 때로 이기적이고 비겁하지만, 다른 사람들과의 믿음과 협력을 통해 뜻을 이루어가는, 우리들과 마찬가지인 인간. 명성을 꿈꾸고, 죽음을 두려워하고, 영생을 욕망하는 어리석은 인간. 길가메쉬가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영원한 잠으로 고통스러워하며 대초원을 방황할 , 우트나피쉬팀이 말한다. 너는 쉼없이 고생하면서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 고생 끝에 자신이 완전히 지쳐버리면, 너는 몸을 슬픔으로 가득 채우고 너의 인생 항로를 조급히 끝내는 일로 접어든다!” 임종을 앞둔 길가메쉬에게 인간을 창조한 엔키가 속삭인다. 너는 절망해서는 된다. 의기소침해서는 된다.” 다가올 죽음으로 번민하며 인생을 허비하지 말라는 충고이다. 인간이 있는 일이란 예정되어 있는 속에서 우정과 사랑과 즐거움과 행복을 찾는 뿐임을, 고대의 수메르인들은 진작부터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신화의 또다른 특징은 문학성에 있다고 한다. 신화 자체가 문학이고, 또한 문학의 소재가 되어 왔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길가메쉬 서사시> 최고(最古) 뿐만 아니라 최고(最高)라고 있을 것이다. 엔키두를 통해 야만의 인간이 문명화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요부 혹은 성녀의 이미지를 가진 샴하트가 등장하고, 길가메쉬와 엔키두의 만남이라는 인류의 협력을 이야기하고, 죽음 앞에서 한없이 초라해지는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고, 그럼에도 주어진 삶을 최선의 노력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교훈까지 준다. 기근, 굶주림, 대홍수라는, 신들의 분노에도 살아남은 인간의 생명력을 노래한다. <길가메쉬 서사시>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리라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꼼꼼한 주석을 통해 드러나는 수메르 신들의 세계와 그들만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신들의 제왕 , 적자 엔릴과 서자 엔키의 대립, 이기적이고 교활한 인안나, 태양의 우투, 인간과 결합하여 길가메쉬를 낳은 닌순 많은 수메르의 점토판이 해석되기를, 그리하여 다양한 수메르의 신화가 널리 알려지기를 바란다. 고대 그리스 신화와 히브리 신화에 영향을 주었듯이, 수메르 신화는 현대 문화에서도 영감의 원천이 있을 것이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깍두기 2005-02-28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님과 나는 오늘 비슷한 시간에 길가메쉬를 붙들고 끙끙거렸구려. 그동안 숙제 밀린 아이처럼 괜히 마음이 불안했다오^^

urblue 2005-02-28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밀린 숙제, 맞습니다.

바람구두 2005-02-28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래도 땡스투 해드려야 할 듯... 어떻게든 안 읽고 버티려 했거늘...

2005-02-28 13: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미완성 2005-02-28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리 멋진 리뷰를 남기시려고 여태까지 기다리게 하셨던 거군요! 흥흥. 아까아까 추천하구 이제야 코멘트 남깁니다 흐흐흐. :)

urblue 2005-02-28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구두님, 안 읽고 버티다니요, 님이야 워낙 속도가 빠르시니, 금방 읽으실 듯 한데요? 꽤 재미있다구요.

속삭이신 님, 감사합니다. ^^

사과님, 추천 감사합니다. 그치만 님 리뷰가 훨씬 재밌고 멋져요. 진심. ^^

아영엄마 2005-03-01 0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 님도 숙제 끝~~. 저도 추천할께요~.

urblue 2005-03-01 0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플레져 2005-03-01 1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루님, 정말 잘 읽었어요. 제가 쓴 리뷰가 부끄럽습니당...ㅠㅠ
추천합니다.

urblue 2005-03-01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그럴리가요. 님 리뷰 부러워하고 있는데. ^^ 감사.
 
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인간성 상실을 말하는 시대다. 자식이 부모에게 칼을 들이대고, 아비가 어린 딸을 폭행하고, 어미가 젖먹이를 목졸라 죽였다는 등의 뉴스가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세계의 한 쪽 끝에서는 강대국의 군인들이 경쾌한 음악에 맞춰 적이라고 주장되는 민간인들에게 총기를 난사하고, 그 옆에서는 무장세력이 역시 민간인을 잡아다 목을 벤다. 도처에서 많은 사람들이 굶고, 문명과는 거리가 먼, 그저 목숨을 연명하는 수준의 생활을 하고, 굶주림과 질병과 폭력으로 죽어간다.

 

자본이, 물질 문명이, 과학 기술이 인간을 소외시킨다고 말한다. 상당수의 범죄가 돈 때문에 일어난다. 물질 문명의 근간이 되는 석유는 전쟁을 일으킨다. 끝을 모르고 나아가는 과학 기술은 드디어는 인간의 체세포를 복제해낸다 하고, 조만간 당신과 똑같이 생긴 당신의 복제 인간이 등장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주제 사라마구는, 일반적인 경우에서처럼 물질 문명이나 고도의 과학기술, 혹은 전쟁과 같은, 인간성 상실을 부각할 만한 극한 상황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가 제시하는 가정은 단 하나, 전 세계의 모든 인류가 눈이 먼다는 것이다. 지금도 우리 곁에 눈먼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을 두고 인간성을 논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불편하고 힘들겠지만, 여전히 인간으로 살아간다. 우리와 똑같이 밥을 먹고, 옷을 입고, 비슷한 집에서 비슷한 삶을 영위한다. 그러나, 사라마구에 의하면, 이런 상황은 대다수의 사람이 눈멀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하다. 눈먼 사람은 대다수인 눈멀지 않은 사람들에 준하여 세상을 본다. 전에 우리가 볼 수 있었을 때도 눈이 먼 사람들이 있었잖아요. 지금과 비교하면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지, 일반적인 감정은 볼 수 있는 사람의 감정이었고, 따라서 눈먼 사람들의 감정이 아니라 성한 사람들의 감정을 가지고 있었어.

 

인간이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이유가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다. 호모 사피엔스 (Homo Sapiens) , 호모 에렉투스 (Homo Erectus), 호모 파베르 (Homo Faber), 호모 루덴스 (Homo Ludens), 호모 로퀜스 (Homo Loquens) 등 인간을 정의하는 말은 많지만 시력과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것은 알지 못한다. 시력은 그저 기본 바탕일 뿐이다. 그러나 실제로 인간 이외의 동물들은 시각보다 청각, 후각 등 다른 감각에 훨씬 더 많이 의지한다고 한다. 만일 인간이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시력이 좋지 않았다면 인간은 다른 방식으로 살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는 바로 이와 같은 상황을 상정하고 있다.

 

이것이 문명의 결점이다. 우리는 집 안에 들어오는 수도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급수 밸브를 열고 잠그는 사람들, 전기가 필요한 급수탑과 펌프, 부족분을 확인하고 여유분을 관리할 컴퓨터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잊곤 한다. 그리고 이런 모든 일을 하는 데는 사람의 눈이 필요하다는 것을.

 

어느 날 갑자기 인류를 찾아온 백색질병은 인간에게서 시력을 앗아간다. 처음 이 질병에 걸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격리되어 수용소에 갇힌다. 이제 우리는 수용소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예상할 수 있다. 수도가 있고 화장실이 있으되, 눈먼 사람들은 이용할 수 없다. 잠자는 시간 외의 모든 시간은 텅 비어 버린다. 이들이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게다가 식량이 부족하다. 당연한 수순처럼 속임수와 폭력이, 온갖 종류의 야만이 찾아온다. 마침내 온 세계가 백색 질병에 감염되어 이들이 자유의 몸이 되었을 때조차 달라질 것은 없다. 그나마 수용소에서는 눈멀지 않은 정부가 식량을 공급했으나 이제 그것조차 기대할 수 없다. 모두가 눈먼 도시에서, 알아서 먹을 것을 구해야 하고 잠자리를 찾아야 한다. 거리에는 온갖 쓰레기와 배설물과 시체가 가득하다. 이런 상태에서 인간답게 사는 것은 불가능할 뿐더러 그 의미조차 모호해진다.

 

문장 부호가 사용되지 않아 여백이 거의 없는 이 두툼한 소설은 차라리 거대한 아포리즘으로 읽힌다.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 건가.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본다는 것은 문명을 가능하게만 하는 것이 아니다. 내 이웃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세계 곳곳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관찰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다른 동물들로부터 구별되는 인간의 특징이 볼 수 있다는 점이라면,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계를, 눈감지 말고, 외면하지 말고, 똑바로 봐야 한다. 그 시선으로 인해 폭력과 야만이 세상에 자리잡지 못하도록, 그 시선에서 벗어난 인간이 소외되지 않도록.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드무비 2004-09-23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후아유를 봤는데 조승우에게 뿅 갔다우.
영화관에서 한번 더 봐도 괜찮겠다는 생각.
난 아직 젊구나, 하는 안도감.
왜 그리 가슴이 설레던지......

바람구두 2004-09-24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urblue님! 이 서평은 정말 좋군요. 주제 사라마구에 대해서... 이 정도 쓰기란 정말 어려울 겁니다. 추천하고 가요.

urblue 2004-09-24 1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__)

기다림으로 2004-09-25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에 이 책을 읽고, 마음 한 켠의 불편함을 안고 며칠을 살았었습니다.
음.. 그렇죠. 역시 제대로 볼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특징이고, 역시나 중요한 일이겠죠?
보고 싶고 봐야 할 것을 보고 살고 계시기를 희망합니다^^

깍두기 2004-09-26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이 책을 읽고, 바로 이런 리뷰를 쓰고 싶었습니다. 특히 마지막 문단.....
훌륭한 리뷰에 옛날 감동을 되살리고 갑니다.

urblue 2004-09-29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다림으로님, '보고 싶고 봐야할 것을 보고 살기'란 쉬운 일은 아니겠지요. 다만 그러려고 노력은 하겠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

깍두기님, 고맙습니다. 이 책 재미도 만만치 않더라구요. 이런 책이야말로 훌륭한 책이라고 할 수 있겠죠.

balmas 2004-10-27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참, 재미있네요.^^
서평을 보니까 이 소설을 읽고싶어졌습니다.
서양에서는 눈에 관해 예전부터 많은 이야기가 있었는데, 작가의 "시각"도 독특한 것
같군요.
추천 하나 하고 퍼 갑니다.^^

urblue 2004-10-27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balmas님이야말로 제대로 보려고 노력하시는 분 같습니다.

2004-11-22 16: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5-04-15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불편하게 읽은 책이었지요. 다시는 읽지 않겠다, 했는데 자주 생각나는 것으로 보니 아무래도 또 펼쳐봐야 할 것 같습니다.. 리뷰 잘 읽고 갑니다.^^

urblue 2005-04-15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갑습니다, 비숍님. ^^
불편하지만, 저한테는 평생 기억할만한 책 중 하나일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