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의 짧은 동거 - 장모씨 이야기
장경섭 지음 / 길찾기 / 2005년 12월
평점 :
절판


내 얘기를 좀 해 보자. 나는 감정적인 사람이 아니다. 인간인 이상 희로애락을 모를 리 있을까마는, 감정의 진폭이 크지 않다고 해야 할까. 자외선과 적외선의 영역을 배제한, 가시광선 정도의 감정의 파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기쁨과 슬픔과 행복과 고독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볼 수 없을 정도로 한계를 넘어본 일이 없다. 그래서일 것이다, 스무 살부터 10년 가까운 세월을 혼자 사는 동안 도가 지나친 외로움을 단 한 번도 맛 본 적이 없는 것은.

 

혼자인 것이 자연스럽지만, 반면 타인과 함께 생활하는 것도 내게는 별다른 결심이나 준비를 필요로 하지 않는 일이다. 어느 눈발 흩날리는 저녁 남동생이 가방 두 개를 들고 올라왔을 때도, 올케 될 사람에게 사정이 생겨 몇 달 간 같이 지내야겠다고 동생이 느닷없이 통보했을 때도, 사촌들, 친구들, 동생 친구들이 며칠씩 묵어간다 할 때도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그러라고 했다. 동생과 같이 살던 3~4년 동안 다툼 한 번 없었고, 올케가 집에 머물 때에도 불편함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한때는 문학 소녀를 꿈꾸었으나 감수성/창의성 없음을 일찌감치 깨닫자마자 미련 없이 포기했고, 공부를 해볼까 하던 생각은 호기심 제로에 지구력 꽝인 성질이므로 바로 접었으며, 직장에서는 성공해 보리라 다짐했으되 투지나 의욕보다는 게으름이 앞서는 인간인지라 다시 포기. 지금은 그저 잘 먹고 잘 놀면서 최대한 즐겁게 사는 것이 목표이며, 그래도 가급적 (정치적/경제적/생태적 등등으로) 올바른 삶을 살아야겠다고 (느슨하게나마) 생각하고 있다.

 

스스로를 정의하자면 강철 신경의 소유자라고 할까. 혼자면 혼자인대로 누군가와 같이라면 또 그대로,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지 않으면서/못하면서 상처 받는 일도 없고 아쉬울 것도 없이 지금껏 살아온 것이다. 방바닥에 치약이 밟힐 일도, 외로움을 이기기 위한 방법으로 바퀴벌레와의 공존을 덜컥 인정할 일도, 가능성이 전혀 없는 삶이다.

 

이 사람 장모씨는, 어느 날 외로움의 정도가 지나쳐서, 방바닥에서 밟힌 치약을 보며 서러워져서 바퀴벌레라는 이질적인 존재와의 동거를 시작했다고 한다. 예민하고 지치기 쉬운 자아는 틀에 박힌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만나는 계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혼자 밥 먹고, 혼자 거리를 걷고, 혼자 쇼핑하고, 혼자 잠드는 게, 뭐 어때서? 맘이 내키면 하고 안 내키면 마는 거지, 그만한 일로 지치고 고민하고, 도와줄 누군가/무언가를 필요로 한단 말이야? 하기야, 나처럼 무딘 감수성과 무(쇠)신경으로 무장한 채 의외성이라고는 전혀 없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만 세상에 우글거린다면 문학이든 그림이든 예술 자체가 존재할 수 없었을 터다.

 

장모씨는 바퀴벌레와의 생활을 제법 즐긴다. 그(것)는 일상을 나누고 대화를 들어주는 상대니까. 그(것으)로 인해 더 이상 외롭지 않으니까. 그러나 주변 사람들의 시선과 염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에게 바퀴벌레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와는 별개로 바퀴벌레는 인간의 영역에 속하지 않은, 다른 존재인 것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경계를 나누어 스스로를 안쪽에 가둔다. 처음엔 야생으로부터 떨어져 나왔고, 다음엔 농촌으로부터 도시를 분리했으며, 그리고는 같은 인간 안에서도 온갖 구분을 만들어냈다. 다른 존재를 배제함으로써 자신을 규정하려는 부단한 노력의 끝자리에 지금 우리들이 서 있다. 장모씨가 공존을 인정한 바퀴벌레는, 그렇게 수없이 구분된 다양한 존재로 읽힌다. 바퀴벌레를 포함한 생태계 내의 다른 생명체 / 여성 / 외국인 노동자 / 장모씨의 또 다른 자아 등등. 그래서 처음 읽었을 때 작가가 과욕을 부린 것이 아닌가 의아했다. 지나치게 많은 얘기들, 넘쳐 흐르는 의미들. 

 

다시 읽으면서, 여러 가지 얘기들을 결국 두 가지로 집약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온갖 경계’에 대한 문제 제기와 끝끝내 장모씨의 머리 속에서 떨쳐지지 않은 난 잘못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 장모씨의 여자친구는 그가 경계를 구분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한다. 주변 사람들은 장모씨가 그렇게 구분 없이 다른 영역을 넘나드는 것을, 그리하여 그 쪽 영역의 어둠이 자기들에게 전해질 것을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장모씨는 자신의 삶의 방법이 딱히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내가 뭐 어쨌다고 그래.라고 소리쳐 보기도 하지만, 역시 한편으로는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사는 것에 일말의 불안함을 지울 수 없고, 그래서 끊임없이 난 잘못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이것은 심지어 나처럼 둔하고 속 편한 사람에게조차 낯설지 않은 상황이다. 이 지점에서 비로소 장모씨와 나의 공통분모를 알아본다. 장모씨가 던지는 그 많은 얘기들은 실은 내 생활 속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문제들이다. 비록 강철 신경을 가진데다 잘 먹고 잘 노는 게 목표라지만 내 주위에도 엄연히 여러 가지 경계가 존재하고, 그 안/밖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고민할 수 밖에 없다.

 

동면에 빠져든 장모씨에게 여자친구는 봄이 다가온다고, 봄은 전투의 계절이라고 얘기한다. 무엇을 위한, 어떤 전투일까. 잊지 않기. 함께 살았던 바퀴벌레를 기억하기, 그로 인해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을 기억하기, 해답을 찾기 위한 고민을 기억하기. 나에게도 올 봄은 전투의 계절이 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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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 2006-01-19 1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한 글인걸요. 추천을 강요하는 블.루.님.
감정의 폭이 유난히 심하지만 또한 가끔은 무쇠신경같은 저와는 참 다르군요..

happyant 2006-01-19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개 끄덕이며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문득 블루님에게 '전투'는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일런지 궁금해지네요. 물론 묻지는 않겠습니다.ㅋ

urblue 2006-01-19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디님, 음음...왜요? 뭐가 너무한가요? 흑흑..(소심 모드..)

개미님, 그런 거 물으셔도 대답 잘 못합니다. 그러니 물론 묻지 마셔야죠. ㅎㅎ

반딧불,, 2006-01-19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칭찬이예요. 너무 잘 쓰셔셔..지금 질투하는중.

blowup 2006-01-19 1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타인의 존재에 지나치게 예민한 저로서는 그 강철 신경이 부럽습니다. 문학적 의미를 읽어내시는 데에는 그토록 예민한 분이 생활에서는 무디다는 건데... (정치적/경제적/생태적 등등으로)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는 훌륭한 자질이라고 여겨집니다.
전 어째서 반대인 거냐구요?

urblue 2006-01-19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구두님, "가급적 (정치적/경제적/생태적 등등으로) 올바른 삶을 살아야겠다고 (느슨하게나마) 생각하고 있다" 라고 했지, 언제 "그저 잘 먹고 잘 놀면서 최대한 즐겁고 게으르게 사는 것이 정치적/경제적/생태적 등등으로 건강한 삶이다" 라고 했습니까? 그런 식으로 비약하면, 요즘은 황우석스럽다는 말 듣습니다. 흥. ;b

나무님, 음, 그걸 부러워하실 필요가... ^^;

반디님, 아우, 그리 말씀하시면 제가 너무 고맙지요. 헤헤

로드무비 2006-01-19 1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루님에게도 올 봄은 전투의 계절이 될 듯하다니 흥미진진합니다.
전 6개월여 쌩판 타인이랑 좁은 자췻집에 함께 기거해 본 적 있는데
그때 마음의 움직임이 가관이 아니더라고요.
아무튼 웬 감수성, 웬 변덕 들에 하도 치여서
블루님의 자칭 강철신경이 아조 유쾌해 보입니다그려.ㅎㅎㅎ

바람돌이 2006-01-19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루님과 저와의 공통점이 엄청나군요. 저 한때는 문학소녀를 부터 무딘 강철신경의 소유까지 말입니다.... 저에게 다행인건 그나마 경쟁이 주가 아닌 직장에 다니게 되었다는 거겟죠(이 바닥이라고 왜 경쟁이 없겠습니까만 그래도 출세에 딱 신경꺼버리면 남과의 경쟁같은건 하나도 안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니까요?) 안그러면 밥먹고 살기도 힘들었을 거라구요. ^^

merced 2006-01-19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 근데 잘 먹고 잘 놀면서 최대한 즐겁고 게으르게 사는 것이 대략 정치적/경제적/생태적 등등으로 건강한 삶... 이지 않아요? 앞뒤 바꾸면 말이 되는데... 정치적/경제적/생태적 등등으로 건강한 삶은 잘 먹고 (무엇을 어떻게 먹을지 고민하고) 잘 놀면서 최대한 즐겁고 게으르게 사는 것 (직장에서는 성공하겠노라는 투지나 의욕 없고 = 신자유주의가 노동자에게 바라는 거에 게기고, 또 놀이가 일상으로 구현된 완결된 삶을 지향한다) 이다. ㅎㅎ

urblue 2006-01-19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erced, 내가 생각한게 그거라구!, 라고 말하기는 좀... ㅋㅋ 뒤집으면 말 되지. 어쨌거나 앞으로도 쭉 투지/의욕 없이 살거니까.

바람돌이님, 오~ 반가워요. ^^ 저도 지금 직장 같은 곳에 다니는게 얼마나 다행인지. 경쟁없고 널럴하고 칼퇴근할 수 있고. 돈에만 욕심 안 부리면 만사 오케이랍니다.

로드무비님, 실은 슬슬 전투 준비를 해야 하는데, 몸도 마음도 말을 잘 안 듣네요. 날이 좀 풀리면 기운을 낼 수 있겠죠. ^^ 쌩판 남이랑 6개월을 살다니, 님의 경험은 참 알수록 흥미진진합니다. 언제 그 얘기도 좀 들려주세요.

바람구두님, 하하, 황우석스럽다에 그런 뜻이 있었군요. 본인은 어느 쪽에 해당한다고 보시는지? 설마, 삐쳤을까...흥

따우님, 감사. ^^

비로그인 2006-01-20 0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입이 안다물어지는 글이예요
그래도 손은 움직일 수 있으니 추천..^^

urblue 2006-01-20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야님, 오마나~ 손이라도 움직일 수 있어서 다행이어요. =3=3
(다시 돌아와서, 고맙습니다~ ^^)

sudan 2006-01-20 0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만화, 리뷰 쓸까 했지만 어렵더라구요. - 2006-01-11 13:02]
로드무비님 리뷰에 댓글로 붙은 얼블루님의 저 말을 기억해두고 있었는데.(이렇게 잘 쓰실 거면서!)
얼블루님 리뷰는 다른분들 리뷰와는 다르게 분석적인 경향이 있어요.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분만이 쓸 수 있는 리뷰라고나 할까. 이 점이 좋아요.

그리고 전 새벽에 나타난 바퀴벌레 한 마리 때문에 그날 당장 세스코에 가입했는데요, 저 장모씨는 외로움이 얼마나 사무쳤으면 바퀴벌레와 동거하나 싶어 괜히 좀 울컥하네요. -_-

urblue 2006-01-20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세스코에 가입까지 하셨단 말이에요? 전 어쩌다 바퀴벌레가 출몰해도 조용히 잡아서 버리고 잊어버리는 정도. 글쎄, 얼마나 외로우면 바퀴벌레와 동거할 수 있을지 저로서는 감도 안 잡히네요. -_-
그니까, 원체 감정이 메말랐다구요, 제가. ㅎㅎ

urblue 2006-01-21 0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련을 하시옵소서. 수련이 끝나면, 잘 생긴 바퀴벌레 하나 들여 같이 살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3=3

이쁜하루 2006-01-25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에 감동먹었습니다. 책 사기전에 꼭 땡스투도 누를께요...잊지 않는다면..
제 머릿속에 지우개가 엄청 큰게 있어서리..^^;; 정말 멋진글 잘 읽었습니다. 아차! 추천은 이미 꾸욱~~ 눌렀습니다.

urblue 2006-01-25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쁜하루님, 감동이라니, 님의 그 말씀에 제가 감동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고슴도치 아이 그림이 있는 책방 1
카타지나 코토프스카 지음, 최성은 옮김 / 보림 / 200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최근 유명 연예인 부부가 아이를 입양하여 뉴스가 되었다. 그들 부부가 그간 보여온 반듯하고 행복한 이미지에 더하여 입양 사실은 미담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공개 입양이 미담이 되는 것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일 뿐더러 그들이 유명 연예인이기에 나올 수 있는 반응일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 입양은 대부분 은밀하게 이루어진다. 입양아는 물론이거니와 주위 모든 사람들을 속이기도 한다. 그래서 주로 갓난아기의 입양으로 한정되고, 심한 경우 임신을 가장하였다가 아이를 낳은 것처럼 데려오기도 한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불임 가정에서 아이를 갖기 위한 온갖 노력이 실패로 돌아갔을 때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방법이 입양인 경우가 많고, 설사 양부모에게 그럴 의도가 전혀 없다 하더라도 주변의 편견과 냉대가 상당히 심각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드라마에서 그렇게나 많은 출생의 비밀이 등장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최근 들어 공개 입양이 늘어나고 있다고 하지만, 그때 문제가 되는 것은 주변의 손가락질과 따돌림이라고 한다. 데려다 키운 아이, 근본 없는 아이라고 백안시하며 자신의 아이들에게 입양아와 어울리지 말라고 주저 없이 가르치는 이 땅의 이웃들 때문에 공개 입양 가정이 도망치듯이 이사를 하는 일도 많단다. 어렵게 입양을 결심했을 양부모나 한번 버림받았다가 가정을 찾은 아이 모두에게 상처가 아닐 수 없다.

 

몇 년 전 나는 인생의 한가지 계획을 세웠다. 몇 년에 거쳐 몇 단계로 이루어질 그 계획의 마지막은 입양이다. 가급적 공개 입양을 생각한다. 결혼을 하든 하지 않든, 아이를 낳든 낳지 않든 관계없이 꼭 이루고 싶은 인생 계획이다. 우리 나라에서 비혼 여성의 입양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거나 공개 입양 가정이 주변의 몰이해와 냉대로 고통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 이후의 일이다. 사실을 고백하자면 아이를 키우는 것, 엄마가 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내 계획을 이루기 위한 과정에서 어떤 난관에 부딪치게 될지도 알지 못한다. 내 노력이란 것도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상태이기도 하다. 그러나 결코 잊지는 않고 있다.

 

책 소개를 보자마자 꼭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실제 아이를 입양한 엄마가 그 아이에게 들려주기 위해 만들었다는 이 동화책은 일종의 준비 과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입양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였는지, 아이에게 입양 사실을 숨기지 않고 어떻게 설명했는지, 아이를 자기 자식으로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이에게 어떤 걸 기대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많이 생각하고 많이 고민했을 엄마의 모습이 느껴진다. 종이를 오려 붙여 그림을 만들면서 자신의 아이를 떠올렸을, 세상의 수많은 엄마 중 한 사람의 모습이다.  

 

혈연에 대한 집착이 강한 사회, 근본을 따지고 드는 사회에서 입양은 여전히 어려운 문제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고 한다. 단지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이 아니라 가족을 만들어 가는 것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있다고 한다. 영화 <바람난 가족>에서 호정(문소리)은 아이에게 다른 엄마들은 배 아파 아이를 낳았지만 엄마는 가슴 아파 널 낳았으니까, 넌 틀림없는 내 아들이라고 말한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충 저런 얘기였다.) 배가 아프든 가슴이 아프든 서로를 가족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사회도 그대로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작은 그림책이지만 그런 변화에 보탬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부모와 아이가 함께 읽으면서 입양아와 입양 가정에 대한 몰이해와 편견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또한 서로를 배려하고 다른 사람의 인권을 존중하는 한 방법이 아니겠는가.

 

내게는 내 인생의 계획을 다시금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제자리만 뱅뱅 돌며 다음 단계로 쉬이 발을 내딛지 못하고 있던 나를 슬쩍 밀어주는 부드럽고 따뜻한 바람이다.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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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바람 2005-12-27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호, 호늘 같은 책에 두번 추천하네요. 님에게도 추천^^

책속에 책 2005-12-27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까지 따뜻해지는 리뷰였어요~

urblue 2005-12-27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꿈꾸는 님, 마음까지 따뜻해진다 하시니 감사할 따름. ^^

돌바람님, 사라진님 리뷰 보니까, 아이를 키우지 않는 입장에서는 말을 아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주저리 늘어놓고 말았습니다. 고맙습니다.

Phantomlady 2005-12-27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태어나는 아이도 소중하지만 특별히 선택해서 데려오는 아이도 얼마나
소중한 걸까요.. 저도 추천합니다.. 그 계획 꼭 이루셔요.. ^^

2005-12-27 16: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5-12-27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다면, 혼자 키우지는 마세요. 가급적 뜻맞는 사람들과 함께 역할나눔해서 키우시길.

urblue 2005-12-27 2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노드랍님, 아이는 다 소중하겠지요. 네, 꼭 이루렵니다. ^^

사라진님, 말씀하시는 의미, 제가 제대로 받아들인 건지 확신할 수 없지만, 알 것 같습니다. 충분히 생각하고 주위 사람들과도 의논하고 하겠습니다. (뭐 당장 할 것처럼 말하는군요. 몇 년 후의 일일텐데요. ^^;;)

숨은 님, 네, 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일일겁니다. 고맙습니다. ^^

실비 2005-12-27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대단하세요^^ 마음이 따뜻해지네요..

비로그인 2005-12-27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제 말씀은 아빠역할을 하는 사람도 아주 중요하다는 겁니다. 아빠-남성이 필요하다기보다는 그 역할이 중요하다는 거죠. 아이키우면서 혼자서 키운다면 혼자서 중심잡기가 어려울 때가 많아요. 이를테면 애를 야단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화를 조절하지 못해서 선을 넘을 때가 있는데, 이럴 때 아빠와 적당히 역할 분담이 되면, 둘 중에 하나는 야단을 치고, 말리고, 한편으로는 야단치며 어르고 달래는 적당한 균형감각이 생기게 되요. 그래서 아이를 입양해서 키운다면 아빠역할, 엄마역할을 나눌 수 있고, 기왕이면 다양한 가족구성원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면, 굳이 혈연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도 남의 아이를 내 아이처럼 키우기가 보다 수월할 듯 싶다는 거죠. 그냥 제 생각에서 그렇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린다고,제가 엄마 혼자서, 혹은 아빠 혼자서 키우는 아이나 그 가족을 비난하는 건 아니라는 건 알아주시겠죠.

urblue 2005-12-28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라진님, 아이를 키우는 제 모습을 상상하는 건 사실 꽤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렇지만 의외로 잘 할지도 모른다, 라고 생각하기도 해요. 천천히 준비하렵니다.
혹시 그때까지 서재를 하고 있다면, 여기 엄마들에게 징징거릴지도 모르죠. 이럴 땐 어째요, 저럴 땐 어째요, 하면서요. ^^;

실비님, ^^ (그저 웃음으로 인사 대신입니다.)

로드무비 2005-12-28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블루님이 그런 생각을 갖고 계셨군요.
의외인 것 같기도 하고, 잘 매치가 되기도 하고 오락가락.^^
아무튼 파이팅!!

urblue 2005-12-28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친구들이 때때로 제게 '의외'라는 말을 하지요. 저도 가끔 그렇게 생각될 때가 있어요. ㅎㅎ

숨은아이 2005-12-28 1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비혼 가정도 입양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원하겠습니다. 그만큼 서로 신뢰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가능하겠지요...

urblue 2005-12-29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그런 날이 어서 와야지요.

내가없는 이 안 2005-12-29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루님 쓰시는 리뷰가 왠지 기다려지던데, 이런 글 보려고 그랬나 봅니다. 살면서 많이 비겁해진다는 걸, 입양에 대한 생각의 변화에서도 느껴요. 블루님의 리뷰, 많이 생각하게 하는군요. 아무튼, 으쌰! ^^

urblue 2005-12-29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면서 비겁해지는 것, 혹은 많은 걸 포기하게 되는 것은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마찬가지겠지요. 저도 예외가 아니구요. 그래도,
아무튼, 으쌰! ^^
 
WOMAN - 최민식 사진집
최민식 사진, 천양희.오정희.이경자.조은.신현림.하성란.천운영 글 / 샘터사 / 2005년 9월
평점 :
절판


최민식의 사진은 밝다.

60년대와 70년대, 전쟁 이후의 궁핍한 생활과 고단한 삶을 여과 없이 드러낸 인물들을 사실적으로 포착한 사진들 앞에서, 고작 밝다 라고 뭉뚱그려 말하다니, 나는 다른 표현을 찾아야 할 것 같다. 씻지 못해 꼬질꼬질한 얼굴과 몸, 그런 몸을 가리지도 못한 채 그저 매달려 있는 다 해진 옷, 근심 많은 세월이 켜켜이 쌓여 만든 듯한 골 깊은 주름, 땅바닥에 되는대로 주저앉거나 엎드린 품새…… 이런 모습들을 앞에 놓고, 밝다고 말하는 게 가당키나 한 소리일까 

 

다른 표현을 찾고 싶지만, 그의 사진들은, 여전히 내게는 밝다. 그러한 인상은 사진 속에서 숨쉬고 있는 인물들의 건강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생선 좌판 뒤에, 틀림없이 비린내가 물씬 풍길 낡은 옷을 입고 앉아 커다랗게 벌린 입에 국수 가락을 막 물고 있는 중년의 여인이나, 성치 못한 몸으로 밥벌이를 위해 옆구리에 신문을 끼고 뛰는 청년, 시커먼 얼굴에 함박 웃음을 지으며 카메라를 응시하는 아이를 보면서 느끼는 감정은, 그들에 대한 동정이나 예전엔 저랬대 식의 회상이 아니다.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열심히 사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었고, 형편이 넉넉치 않은 그들에게도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생의 한복판에 서 있는 사람들, 그들이 보여주는 삶의 한 순간, 그들에게서 풍기는 생활의 냄새. 최민식의 시선은, 그래서 밝게 느껴진다.

 

[WOMAN]은 최민식의 사진들 중에서도 여자들을 찍은 것만 모아 놓은 사진집이다. 다른 사진집에서 이미 본 것도 있고, 새로운 것도 있다. 1950년대부터 2005년 현재에 이르기까지, 부산, 김해 등 우리 나라에서 중국, 네팔을 거쳐 그리스, 독일까지, 최민식의 시선에 포착된 수많은 여인들이 그 안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페이지를 하나하나 넘기면서 그들과 만난다. 때로 놀라서 시선을 고정시킨다. 어쩌면 저렇게 웃을 수 있을까 싶게 환한, 활짝 핀 얼굴들을 만날 때가 그러하다. 어떻게 그 순간을 잡아냈을까, 나도 저렇게 웃을 때가 있을까, 저렇게 예쁘게 보일까.

 

머리말에서 최민식은 여성의 아름다움이 가장 소중하고 가치있는 것이라 믿는다고 고백한다. 사진을 보면 그의 고백을 믿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것이, 여자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애정이라고 생각한다. 실은 그의 다른 사진들을 보면서 항상 느끼는 감정을 고스란히 맛보게 된다. 사진 속의 여인들에게서는 삶/생활의 냄새가 난다. 

 

책의 말미에는 7명의 여성 문인들이 각각 여자의 사춘기 / 사랑 / 노동 / 결혼 / 임신, 육아 / 이혼, 독립 / 독신이라는 테마로 쓴 글이 실려 있다. 이 사진집의 기획 의도를 알 것도 같다. 그러나 그것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하다. 7편의 글 가운데에는 함량 미달인 것들도 있다. 여성으로서의 삶을 보여주기는커녕 사진이 포착해낸 다양한 모습들을 앞에 두고, 진부한데다 진정성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 글을 잘도 써서 붙였다 싶다. 사진을 보면서 차곡차곡 쌓였던 감정들이 오히려 글로 망가진다. 별 하나는, 그래서 뺀다. 

 


부산, 1965


부산, 1999

* 위 사진들은 [WOMAN]에는 실려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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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 2005-12-13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쓴이들이 더 탐이 나는 것이^^;;;;
사진 좋군요. 화면으로만 보아도 탐이 납니다.

2005-12-13 1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5-12-13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좋습니다. 샤프하고요.^^
 
하리하라의 과학블로그 - 현대과학의 양면성, 그 뜨거운 10가지 이슈 살림 블로그 시리즈 4
이은희 지음, 류기정 그림 / 살림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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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블로그는 일반인들이 자신의 관심사에 따라 다양한 형식으로 다양한 종류의 글을 올리는 일종의 일지(日誌)로서의 성격을 가진다. 웹상의 온갖 종류의 블로그에는 온갖 재미있는 얘기들, 유익한 정보들이 넘쳐난다. 그러나 『웹로그 핸드북』의 저자인 레베카 블러드가 설명했듯이 "웹로그란 커피숍에서의 대화를 글로 옮기고, 필요한 참고 자료를 곁들이는 것"인 만큼 어떤 주제에 대한 전문적이고 심도 있는 글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또한 커피숍에서 들은 얘기, 즉 ‘퍼온글’의 형태로 남들이 했던 얘기를 반복하고 있기도 하다.

 

『하리하라의 과학블로그』, 제목은 책의 성격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 책은 블로그에 올린 글을 그대로 출판한 것처럼 보인다. 애초에 기획 의도가 블로그처럼 쉽게 과학 이야기를 진행하자는 것인 만큼 이는 이 책의 장점이랄 수 있겠지만 또한 단점이 될 수밖에 없다.

 

우선, 책은 무척 쉽다. ‘과학’이라면 일단 멈칫거리고 볼, ‘과학’과 전혀 안 친한 사람들도 아무런 거리감이나 두려움 없이 술술 읽을 수 있다. 전문적인 용어는 거의 등장하지 않고, 간혹 나온다 해도 알아듣기 쉽게,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이런 건 몰라도 괜찮아요, 하는 식으로 넘어가기도 한다. 다루고 있는 주제도 항생제 논란, 환경호르몬의 공격, 원자력 에너지의 효용과 위험, 유전자 조작 식품의 발명, 장기이식, 비만과 백색식품의 문제 등’ 생활 속에서 가깝게 느낄 수 있는 문제들이다. 각각의 문제들이 어쩔 수 없이 가지게 되는 이로운 점과 해로운 점을 나란히 비교해 생각할 거리를 만들어주려고 애쓴다.

 

그러나 쉽다는 건 어느 한계 이상 나가지 못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지나치게 ‘쉽게’ 쓰려는 노력 때문인지 저자는 이미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 이상의 얘기를 하지 못한다/않는다. 비슷한 종류의 책을 한 권이라도 봤거나 평소에 신문 기사만이라도 꼼꼼히 읽은 사람이라면 이 책에서 다루는 내용이 전혀 새롭지 않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파악할 것이다. 여기저기서 ‘퍼온글’을 말끔하게 짜깁기해 놓은 것 같다고나 할까.

 

알라딘 책 소개에서 말하는 대로 논술을 준비하는 청소년들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다른 과학 관련 책을 읽은 사람에게는 별 도움이 되지 않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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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dan 2005-11-15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동안 얼블루님 리뷰로 대리만족하면서 재미있는 책 읽으셨다고 혼자 뿌듯해했는데, 이 책은 실망이에요. 이런 책은 시간 낭비! (자기가 읽은 것도 아니면서)

urblue 2005-11-15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서운 수단님. ㅋㅋ
지난번에 읽은 과학기사 어쩌구 하는 책 때문인지 다 들어본 얘기더라구요. 그래도 뭐 고등학생이나 이쪽으로 처음 접하는 분들한테는 도움이 될 것도 같고.
다른 분들 리뷰 보니까 평이 나쁘지 않던걸요.

제 리뷰로 대리만족한다고 하시니, 리뷰를 좀 더 열심히 써야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음...


야클 2005-11-15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합니다. ^^

딸기 2005-11-16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벌써 훌륭한 리뷰를 올리셨자나요 -_-

딸기 2005-11-17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낼 (금욜) 밤에 같이 놀 수 있어요, 정말?

urblue 2005-11-17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일은 별 일 없습니다.

딸기 2005-11-18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흑 바람구두가 바쁜가바여
 
나이트 워치 - 상 밀리언셀러 클럽 26
세르게이 루키야넨코 지음, 이수연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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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를 무대로 마법사와 변신술사 등 초인적인 능력을 지닌 '다른 존재'들이 빛과 어둠으로 나뉘어 대결을 벌인다.(알라딘 책 소개)" 모스크바를 무대로 한 '오컬트 스릴러'라. 현대 러시아 대중소설만 해도 자주 만나기 어렵다. 게다가 러시아 판타지라니. 제법 구미가 당긴다. 지난 세기의 런던이나 비엔나, 아니면 현대의 뉴욕을 빼놓고 나면 이 겨울 초입에 모스크바만큼 도시괴담에 어울릴만한 도시가 또 있겠는가? 사실 지금까지 이 도시를 배경으로 한 판타지가 별로 없었다는게 신기할 정도다 (물론 내가 모르는 것 뿐일 수도 있다).

 

『나이트 워치』는 영하 20도의 겨울 저녁 무렵 바람이 스산한 지하철역 입구에서 시작된다. 에스컬레이터와 CD플레이어 같은 소품이 시대배경을 알려주는가 싶더니(한국산 컵라면과 전화기, 그리고 처용탈 같은 소품도 나온다), 몇 장 넘기지 않아 흡혈귀가 등장한다. 골목 하나 잘못 접어드는 순간 현실의 이면이 눈 앞에 드러난다. 일상의 바로 한 발짝 곁에, 아니 자기 자신의 그림자 저편에 맞닿아있는 이면의 차원인 어스름의 세계. 바로 이 어스름의 세계를 통해 신흥 졸부와 마피아의 도시인 현실의 모스크바는 마법사와 마녀, 흡혈귀와 변신자 등 '다른 존재'들이 공존하는 도시인 소설 속의 모스크바로 펼쳐지는 것이다.

 

어스름의 세계란 무엇인가? 『나이트 워치』의 설명에 따르면 그것은 인간세계에서 나온 또 다른 세계이다. 기원은 이렇다. 선사시대 어느 때였을 것이다. 모닥불을 둘러싸고 앉은 두 샤먼이, 어쩌면 환각제의 도움의 받았을지도 모를 트랜스 상태에서, 자신의 그림자가 동굴 천장까지 길어지는 것을 본 순간, 자신의 그림자 저편으로 한 걸음 내밀면서 처음 인간은 어스름의 세계를 발견했다. 어스름의 세계는 인간을 더 이상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로 변화시켰고, 이들은 각각 빛의 존재와 어둠의 존재로 갈라져서 투쟁해왔다는 것이다.

 

빛과 어둠의 세력은 오래 전 인간 세계와 '다른 존재'의 세계가 공멸하는 것을 막기 위해 휴전협정을 맺었으며, 각기 상대를 감시하기 위해 야간경비대(나이트 워치)와 주간경비대(데이 워치)를 만들었다. 여기서 빛과 어둠은 단순한 선과 악이 아니라 일종의 자연력이다. 신과 악마 혹은 구원과 타락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세계로부터 분화되어 나온 이면세계인 어스름에서 살아가야 하는 두 종족이 각자의 본성과 가치, 이해관계에 기반하여 인간 세계에 개입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다른 존재'는 빛이 될 수도 어둠이 될 수도 있다. 선택은 환경의 영향을 받지만 어느 정도는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꽤 흥미로운 설정이다. 우선 이 소설은 판타지 장르 문학에 속하지만, 잘 쓴 대중소설이 대개 그렇듯이 현대 모스크바에 대한 이야기이다. 주요한 단서는 "불특정 세대". "60년대를 겪은 부모세대가 길러낸" 이 아이들은, 사회주의 소비에트 연방에서 태어나 소년기를 보냈으나, 성년이 되고 보니 자본주의 러시아에서 살게 된 세대이다. 부모들과 같은 신념의 기억도, 다음 세대와 같은 자유의 가벼움도 아닌 일종의 끼인 세대의 혼란이랄까. 어스름의 세계는 그런 혼란에 대한 판타지적인 알레고리가 아닐까? 그렇다면 빛과 어둠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혹은 유토피아주의와 반유토피아주의에 대한 알레고리일지도 모른다.

 

다음으로 흥미로운 건 어스름의 세계라는 설정 자체다. 그 옛날 인간이 추위와 배고픔과 맹수의 습격으로부터 몸을 숨긴 동굴에서 모닥불에 비친 그림자에서 생겨난 세계. 인간을 인간이 아닌 존재로 고양시키지만, 그 결과는 빛일 수도 어둠일 수도 있는 세계. 인간 세계에서 비롯되었고, 인간 세계에 기생하는 세계. 낮 꿈인 동시에 밤의 악몽인 어스름은 인간의 바람이자 원망이며, 최초에 소망한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무의식의 세계인지도 모른다. 현실의 바로 이면에 맞닿아있어서, 불 꺼진 방 침대 밑 어두침침한 구석이나, 그믐달밤 골목길 가로등 뒤편의 어둠이 바로 그 곳일 수도 있는 세계 말이다.

 

『나이트 워치』는 기본적으로 잘 쓴 장르소설이다. 700 여쪽 가량의 두툼한 분량이 단숨에 읽힌다. 인물과 설정도 흥미롭고 탄탄한 편이다. 아직은 늦가을이지만, 올 겨울 밤이 다 지나가기 전에 『데이 워치』, 『더스크 워치』로 이어지는 '워치 3부작'의 나머지 번역을 만나 볼 수 있다면 꽤 즐거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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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11-14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트 워치 저도 읽고 써야 하는데......
부러워요.
그런데 '먼저 맞는 매' 정도의 리뷰가 아닌데요?ㅎㅎ
훌륭하십니다.^^

urblue 2005-11-14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리뷰 시한이 오늘인데, '먼저 맞는 매'라뇨?
빨랑 쓰셔야죠? ㅎㅎ

플레져 2005-11-14 0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로드무비님의 뒤를 계속 따라 댕기는 중입니다 ^^
블루님, 훈늉한 리뷰 잘 읽었습니다.
어스름의 세계, 제 취향일 듯 싶습니다. 캬캬~

로드무비 2005-11-14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 먼저 읽고 썼다고 뻐기시기는!=3=3

플레져님 이 책 읽고 싶으시면 말씀하세요.
낭중에 보내드릴게요.^^

바람돌이 2005-11-14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재밌을 것 같아요. 저도 빨리 보던 책 마저보고 소설책 보고 싶어요. 잉잉~~

urblue 2005-11-14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님처럼 어여쁜 분이랑 어스름의 세계는 안 어울릴 듯 한데요. ^^

로드무비님, 뭐 뻐기는게 아니라...( ..) 얼른 쓰시라구요. ^^;

바람돌이님, 책은 역시 소설이죠. ㅎㅎ 전 소설이 젤루 재밌어요. 어서 재밌는 소설책 보시기를.

하늘바람 2005-11-14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재미있을 것같은 책이었는데 역시 그렇군요. 부럽습니다

urblue 2005-11-14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늘바람님, 네, 꽤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부럽다니요? 제가 이 책 공짜로 얻은 거 알고 계셨나요? ^^a

sudan 2005-11-14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책은 역시 소설이죠. (반가움)
현대 러시아 대중소설이라면 알렉산드라 마리니나라는 추리소설 작가를 마지막으로-라기보다는 아마도 유일하게-읽어봤는데, 이 [나이트 워치] 재미있어 보여요.
이제 퇴근이에요. 전 요즘 좋아하는 소설도 못 읽고 얼블루님 리뷰 보면서 대리만족 하고 있다죠. -_-

jandol 2005-11-17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들 동화에 "파란시간을 아세요"라는 책이 있어요. 낮에서 밤으로 가는 시간, 밤에서 낮으로 오는 시간이라 합니다. 아이들과 그 책을 읽으면서 작가의 상상력에 박수를 보냈죠. urblue님의 글 잘 보았고, 글 참 잘 쓰십니다. 작품의 줄거리 소개는 간략하지만 전반적인 평에서 작품의 느낌이랄까 분위기를 물씬 받을 수 있었습니다.

urblue 2005-11-17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갑습니다, jandol님.
그러네요, <파란시간을 아세요>는 저도 보고 좋아했던 그림책인데, 미처 여기에 연결지어 떠올리지는 못했어요. 파란시간이라는 것도 어스름의 시간이기도 하군요.
글 잘 쓰는지는 모르겠지만, 칭찬해주시니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