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제일 잘 하는 스포츠는 단연 ‘핑퐁’이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건, 탁구가 내 평생 가장 오래 배운 운동이기 때문이다. 수영 및 에어로빅 5개월, 단전 호흡 5개월, 집에서 요가 2개월에 비하면, 2년은 얼마나 긴 시간인지.
아빠는 고등학교 탁구부 선수셨다. 소년체전인지 전국체전인지에 도 대표로 참가한 적도 있다는데, 선수로 뛰진 못했고 후보였단다. 초등학교 4학년, 학교에 탁구부가 생기자 아버지는 내게 가입을 종용하셨다. (뭐 확실한 기억은 아니다만, 그런 이유가 아니라면 내가 굳이 탁구를 배울 필요가 있었을까. 어쩌면 학교에서 아버지나 작은아버지한테 부탁을 했는지도 모른다. 코치가 작은아버지 친구였다. --^ )
탁구부는 야구부, 축구부 등과 마찬가지로 버젓한 학교 대표였고, 고작 대여섯 명의 ‘선수’들은 나름 혹독한 훈련을 해야 했다. 갓 열 살을 넘긴 조그만 여자아이들에게 눈 쌓인 운동장을 10바퀴씩 뛰는 건, 분명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어, 이제 생각해보니, 왜 여학생들뿐이었을까.) 아무튼, 그렇게 5학년 말까지 2년 동안 나는 체력 훈련을 했고, 탁구를 배웠고, 근처의 다른 학교 선수들과 시합을 했다.
화, 쇼트, 푸쉬, 커트, 스매쉬 등등 기술을 배우는 건 나름 재미있는 일이었다. 처음에 죽어라 팔 흔드는 연습만 했던 것에 비하면 말이다. (스포츠는 몸으로 익혀야 하는 거니까, 일정하게 팔을 흔드는 연습을 아주 오래 시킨다.) 손바닥만한 라켓으로 조그만 공을 맞추는 데에 그렇게나 많은 기술의 종류가 있다. 그냥 쳐 넘기고, 끊고, 회전을 주고, 기타 등등… 공이 원하는 방향으로 정확하게 날아가거나, 손목을 잠깐 꺾는 것만으로 스핀을 먹고 다른 방향으로 휘는 걸 하나하나 확인하는 건 자못 감격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내가 가장 좋아했던 것은 ‘랠리’였다. 랠리란 양쪽에서 공을 계속 주고받는 것이다. (간혹 유명 선수들의 경기를 보면 엄청나게 긴 랠리가 나올 때가 있다.) 그 조그만 공이 라켓에 맞고, 건너편 테이블에 튕기고, 상대방의 라켓을 거쳐 내 앞으로 날아들고, 그걸 다시 쳐내는 것, 그렇게 상대방과 번갈아 움직이고 리듬을 이어가는 것이 재미있고 신기했다고나 할까. (그러나 박민규의 <핑퐁>에 등장하는, 하루 넘게 이어지는 무시무시한 랠리라면 절대 사양이다.) 이러니 선수로서 잘 해낼 턱이 있나. 이기겠다는 투지는 부족하지, 기술은 시원찮지, 그나마 촌구석 초등학교 탁구니까 때로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는 평범한 선수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다시 라켓을 잡은 건 대학 때다. 우연한 기회에 동아리 사람들이 탁구를 좀 친다는 걸 알게 되어서 다 같이 우르르 탁구장으로 몰려갔다. (요즘 탁구장 찾기 정말 어렵다. 흑흑.) 처음의 어색함도 잠시, 그 옛날 열심히 팔을 휘둘렀던 보람일까, 금세 감각이 살아났다. 뭐 회전써브라든가 드라이브라든가 백스매쉬라든가 하는 걸 전혀 구사할 수 없었다는 사실은 그냥 묻어두기로 하자. 이후로 한동안 탁구는 동아리 내에서 인기 스포츠였다. 그런데 여기서 성격이 드러난다. 대개는 어느 정도 몸을 풀고 나면 시합을 하자고 달려든다. 당구처럼 내기를 하는 것도 아닌데 굳이 시합이어야 재미가 있다는 거다.
시합은 상대를 이기기 위해 한다. 스핀이 잔뜩 들어간 어려운 써브를 (넣을 수 있다면) 넣고, 강공을 먹이고, 상대가 움직일 수 없는 빈틈을 찌르고, 페이크 동작으로 속여서, 어떻게든 상대방이 공을 받아넘길 수 없게 만들어야 한다. 랠리는 물론 바람직하지 않다. 이런 경기가, 나는 싫었다. 다행히 선배 한 명과 죽이 맞았다. 그 선배도 시합을 무진장 싫어해서, 우리는 틈날 때마다 오로지 '탁구'를 즐겼다. 둘이 치면서도 회전써브도 넣어보고, 스매쉬도 날린다. 그러나 그것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그런 기술을 구사할 수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는 수준이지, 상대를 공격해서 포인트를 따기 위함은 아니다. 순수하게 몸의 움직임을 즐긴다고나 할까.
한 6~7년 쯤 전에 다시 잠깐 탁구를 즐긴 적이 있었으나 그 이후로는 탁구장도 같이 칠 사람도 찾을 수가 없어 라켓 한 번 잡아보지 못한 상태다. 이제는 동작을 기억하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몸이 제대로 움직여주지 않겠지. 탁구공을 뻔히 보고도 쫓아가지 못하지 않을까 싶다. 흑흑.
갑자기 나의 탁구가 생각난 것은, 최근 읽은 두 가지의 <핑퐁>(박민규와 마츠모토 타이요) 때문이다. 박민규 쪽은 너무 나갔다 싶고, 마츠모토 타이요는, 뭐랄까, (이렇게 말하면 상당히 웃기겠지만)주인공 스마일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낀달까. 스마일은 연습은 물론이거니와 경기에서도 전력으로 임하지 않는다. 상대방을 고려하다보니 의식/무의식적으로 져주는 타입이다. 그런 그에게 승부욕을 불어넣으려는 코치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 스포츠정신이라고 말한다. 탁구에 엄청난 재능이 있지만 단순한 운동 이상의 의미를 두지 않는 스마일에게 스포츠정신이 필요할까. 남들은 못가지는 재능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꼭 그걸 써먹어야할까.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선택이란 말이다. (내 경우엔 절대로 '선택'이 될 수는 없다는 거, 잘 안다. 그러니까 만화 속의 다른 사람들이 열받는 거겠지.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