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
발터 벤야민 지음, 김남시 옮김 / 그린비 / 2005년 3월
평점 :
절판


발터 벤야민. 이름만은 무척 익숙한 학자다. 그 익숙한 이름 탓에 오히려 낯설어하고 어려워한다는 점이 문제라면 문제겠지만. 그가 어떤 글을 쓰고 어떤 이론을 펼쳤는지 전혀 모른다. 의미를 짐작조차 할 수 없는 파사주니 파사젠베르크니 하는 말들을 들었을 따름이다.

 

<발터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라는 제목의 이 책을, 친구가 청하지 않았다면, 읽을 생각이나 했을까. 하긴, 어쩌면 저 예쁜 표지 덕에 구입했을지도 모를 일이긴 하다. 책의 표지 디자인에 특별히 신경을 쓰는 건 아닌데, 이 책은 마음에 꼭 든다. 표지 때문에 책상 위에 올려놓거나 손에 들고 다니고 싶을 정도다.

 

친구에게 건네주기 전에 한 번 읽어보기로 했다. 50여 페이지쯤 넘겼을 때 친구가 어떠냐는 질문을 했다. 내 대답, 이건 그냥 일기잖아. 제목조차 <일기>인데 도대체 뭘 생각한 걸까.

 

1926년 12월 6일부터 1927년 1월 31일까지 벤야민은 모스크바에 체류했다. 잡지에 모스크바에 관한 글을 써주기로 하고 경비를 마련했다지만, 실제 목적은 아샤 라시스를 만나기 위해서 였던가 보다. 아샤 라시스는 벤야민의 표현에 의하면 리가에서 온 라트비아 출신의 볼셰비키 여인으로 급진적 코뮤니즘의 현실성을 깊이 있게 통찰하고 있는, 지금까지 알게 된 여자들 중 가장 뛰어난 여인 중 하나. 벤야민은 그녀로부터 지적 영향을 많이 받았고, 맑스주의적 사유로 나아가는 데 그녀가 일정 정도의 자극이 되었을 거라고 한다. 책에 실린 사진을 통해서도 그녀의 명민함을 느낄 수 있다.

 

일기에는 아샤를 향한 그의 마음이 온전히 드러난다. 아샤를 쳐다보는데 지나치게 열중해 정작 그녀가 하는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는 고백이나 키스를 해 달라고 청했다가 거절당한 얘기, 그녀의 애인이었던 라이히와의 묘한 신경전, 그녀와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피로, 짜증, 불안을 보자니(정확히는 그가 쓴 대로 읽고 있자니), 한편 안쓰럽다. 제아무리 뛰어난 학자라도 사람 사이의 문제와 감정은 어쩌지 못한다는 걸 다시 확인한다.

 

하지만 이 글의 묘미는 거기에 있지 않다. 벤야민은 모스크바에 체류하는 동안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연극과 발레와 영화 등 각종 공연을 관람하고, 박물관과 미술관을 둘러 보고, 광장과 시장과 거리를 산책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감상과 거기서 파생된 러시아와 모스크바에 대한 생각을 자세히 기록한다. 사실 외국을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는 일이긴 하다. 차이가 있다면 얼만큼 정확하게 대상을 바라보고 그 의미를 파악하는지,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정도일 것이다. 벤야민의 일기는 예리하고 섬세하다. 혁명 후 방향을 잡지 못한 러시아의 혼란스럽고 모순된 상황을 날카롭게 인식하고, 민중들의 지난한 생활상과 그 와중에도 발견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성취에 관심을 기울이며, 건물과 거리에서 드러나는 인상을 꼼꼼히 짚어낸다. 그러한 기록은 책 말미에 실린 <모스크바>라는 글에 고스란히 옮겨진다.

 

<모스크바>는 1927년 초에 <피조물(Die Kreatur)>이라는 잡지에 실린 글이다. 일기의 이곳 저곳에 적혀 있는, 그가 보고 듣고 느낀 모스크바의 인상이, 표현을 바꾸거나 순서를 짜맞추거나 하는 식으로 재구성되어 있다. 일기와 <모스크바>를 비교하면 벤야민이 발표한 공식적인 글이 그 이면에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일기는 <모스크바>라는 DVD의 서플먼트인 셈이다.

 

<모스크바>를 마무리할 무렵 게르숌 숄렘에게 보낸 편지에 벤야민은 이렇게 썼다. 제 서술은 모든 이론들에서 거리를 취할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바라건대 창조적인 것이 스스로 드러나게 하는 게 가능할 테니까요. …… 저는 이 순간의 모스크바라는 도시에 대해서 서술하고자 합니다. 그곳은, 그 속에선 모든 사실들이 이미 이론이며 따라서 모든 연역적 추상, 모든 예측, 나아가 일정 한도 내에선 모든 판단들마저 보류하고 있는 곳입니다. 듣기로는 이것이 벤야민이 글을 쓰는 기본적인 태도였던가 보다. 그것이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다만 재미있는 일기와 기행문을 읽었다는 것으로, 그의 다른 글을 읽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는 것으로 만족한다. 다음은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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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04-23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리뷰 쓰셨군요.
모든 이론들에서 거리를 취하겠다는 그의 서술이 마음에 듭니다.
음, 일단 보관함에......
땡스투. ^^

마냐 2005-04-24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오랜만인듯. ^^
저 책, 정말 찜 해놓았다가 후배에게 선수를 빼앗기구 땅을 쳤던 책임다. 그리고 돌아서면서.."뭘, 내가 가졌어도 안 읽었을꺼야.."라고 달래긴 했는데..^^; 읽구싶네요. 꾸욱.

urblue 2005-04-24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좀 많이 게으르죠. 몇 달만에야 올리는 리뷰라니.
고맙습니다. 어쨌거나 일기니까 쉽게 읽히네요. ^^

2005-04-25 21:4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