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그대 - 1983년 제7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서영은 외 / 문학사상사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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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그대>의 작가 서영은이 1983년 이상문학상을 받으면서 밝힌 수상 소감을, 나는 2년 쯤 전에 읽었는데, 도중에 어느 구절에 피식 웃고 말았다. 그는 소감문에서, 자기 작품에 대한 이 시대 독자들의 평가에 초연하여 세잔느 같이 사후에나 인정받는 작가가 되는 것을 더욱 큰 영예로 여기겠다고 했다.

거장 혹은 천재라는 찬사가 아깝지 않은 역사 속의 숱한 예술가들이 죽은 후에야 자신의 작품세계를 제대로 평가받았던 일들을 되새겨 볼 때, 그런 마음가짐이 과연 진정한 작가정신의 발로라고 여길 만도 하다. 그러나 그런 예술가들이 생전에 진정 당대의 세평에 초연했던가? 그들의 위대함은 세상과 그들 사이의 팽팽한 긴장 속에서, 자신의 내면과 자신의 작품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기 시대와의 처절한 투쟁 속에서 나온 것은 아닌가?

사후에나 인정받는 작가가 되고자 한다는 말은 시대와 맞설 의지가 없는 범용한 작가의 치기어린 망상을 표현한 데 지나지 않는다. '미래'의 삶을 향한 투쟁은 항상 '현재'에 투신하는 투쟁이며 그것은 동시에 '역사'를 위한 투쟁이기도 하다. 역사를 위한 투쟁은 다시 말하면 현재적 사실에 대한 해석을 둘러싼 투쟁이다.

현재적 사실에 대한 해석은 그 사실로부터 충분한 시간이 흐르면 보다 더 객관적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만, 그런 이유로 현재의 사실에 대한 해석을 둘러싼 투쟁을 억압할 수 없다. 위대함은 당대에 승리하건 패배하건, 바로 그 동시대와의 대결이라는 조건에서 나올 뿐이다. 나는 서영은의 문체에서 배어나오는 저 진한 고독감 앞에서는 어찌할 수 없으나, 그러한 견해는 선뜻 수긍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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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의 거장들 - 인물로 읽는 인류학의 역사와 이론 호모사피엔스
제리 무어 지음, 김우영 옮김 / 한길사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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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요약하려는 자들은 지식과 사랑을 모두 망쳐놓는 놈들이다.' 보통 책보다 조금 작은 판형의 책 456페이지 분량에, '인류학의 거장들' 스물 한 명이 '차곡차곡' 채워져 있는 이 글을 읽다보면 다 빈치의 그 말이 기억나다 말다가 한다. 이 책의 미덕이라면, 번역자가 말하고 있듯이, 인류학의 역사와 이론을 초창기부터 인물 중심으로 서술하되 메리 더글라스, 빅터 터너, 제임스 페르난데스 등과 같이 아직 국내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현대의 인류학자들을 소개하고 있다는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저자인 제리 무어는 미국 인류학 내에서 고고학을 전공으로 하고 있긴 하지만, 거의 믿기 힘들 정도로 광범한 문헌을 섭렵하여 각각의 학자에 대해 해설하고 있다. 책 앞부분에는 주요 학자들의 사진도 실려있어, 책을 읽으면서 현장을 누비고 연구하는 인류학자들을 훨씬 더 구체적인 이미지를 동원해서 상상할 수 있게 해주는 것 같다.

그러나 그러한 거장들의 삶과 학문을 열 페이지 남짓한 분량에 요약하려다 보니 과히 단순화가 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는 인류학 초보자들을 위한 간략하고 균형잡힌 소개서를 쓴다는, 본래 지은이가 갖고 있었을 법한 의도에도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은이의 요약 자체는 훌륭한지 몰라도 그 요약된 글을 읽었을 때 책에서 언급되는 어느 학자의 이론체계도 쉽사리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지나친 요약이 풍부한 민족지적 자료에 기반하고 유장한 사유를 거쳐서 나온 학문체계를 도리어 무슨 암호같이 느껴지게 한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고, 타일러나 모건, 보아스, 뒤르껭, 사피어와 레비스트로스에 할당된 장들은 재미있게 읽을 만 하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직접인용이 너무 많아 저자 자신이 각각의 인류학자들에 대한 자신만의 완결된 스토리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번역은 딱히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번역인데, 원래 제리 무어의 문장이 그러한지 몰라도, 다소 조탁이 섬세하게 되어 있지 않고 이따금 투박하다는 느낌을 준다. 그리고 외국 인명을 표기함에 있어, '문교부 고시 외래어 표기법'에 기준하여 표기하였다고 했는데, '문교부'에서 교시판 표기법을 잘 읽어보진 못했지만, 기존에 계속적으로 표기되어 온 바 클리포드 기어츠, 루스 베네딕트, 멜빌 허스코비츠 등을 '거츠', '베니딕트', '헤스코비츠'로 각각 옮긴 것은 기존의 표기법에 익숙해진 나로서는 조금 의외였다. 이는 수고로운 번역에의 작은 흠이다.

한편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제리 무어가 타일러나 모건에 대해 언급하는 방식에 대해서, 엘리너 버크 리콕이 그러했던 것처럼 '천편일률적인 모건 비판에 대한 묘한 반발심'을 느낀다. 그는 이미 전통이 되어버린 레토릭으로, 모건과 타일러의 단선적인 진화론을 비판하고 있다. '타일러가 말하는 '물리적 법칙'이 서구 과학의 원리임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그 원리에서 벗어나는 인식론은 오류로 가득찬 전(前)과학적 미개함의 잔재일 뿐이다.' '편견에 물들지 않고서야 어떻게 사회를 등급화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수사법, 이러한 문장들은 인류학 교과서에 종종 등장하며, 일종의 정치적인 교정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들 초창기 진화론자들의 견해를 비판하는 엄밀한 '논리'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것 같다. 그러한 수사를 동원해 진화론을 비판하기는 너무나도 쉽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은 사회 혹은 문화의 진화론에 대한 학문의 진화론이 아닌가? 진화론에 대한 비판은 현대 사회과학에서 진화론에 거의 승리하다시피 했다. 진화론에 대한 비판은 결국 현재 학문적·정치적으로 '적자'이며 그 근거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우월한' 위치에서 구시대의 퇴락한 진화론을 내려다보며 비판하는 것은 아닌가. 그것은 그들이 비판하는 '진화론자'들의 논리와 다소 추상적인 수준에서 다를 것이 있는가. 거친 문제제기지만, 여하튼 반진화론 내지는 서구의 자기성찰이라는 레테르가 학문적 논쟁의 수준과는 또 다른 우열의 관계를 함축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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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과 권력
시드니 민츠 지음, 김문호 옮김 / 지호 / 199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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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과 권력은 저자인 민츠가 설탕의 역사에 접근하는 데 있어 매우 인류학적인 관점을 도입하기 때문에 다소 어렵고 때로는 산만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그가 규명하고자 하는 것은 영국의 역사에 있어서 설탕과 연관되어있는 '의미'이며 그러한 물질의 '의미' 어떻게 권력에 의해 구성되는가이다. 유럽 세계에 있어 설탕이 처음으로 들어온 것은 중세 후기의 아랍을 통해서였으며 수세기 동안 상류계급의 전유물이었다.

설탕을 소비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부와 지위를 과시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한 과시적 소비는 때로는 설탕을 '섭취하는' 것에서 나아가 설탕을 몸에 '바르는'(때로 의약품으로서) 데에까지 갔다. 18, 19세기에 설탕의 수요는 점점 늘어갔고 그에 따라 설탕 소비도 늘어갔는데, 이는 곧 그에 맞추어 설탕의 공급이 늘어났다는 것을 뜻한다. 설탕은 영국의 식탁에 저렴한 단순탄수화물을 제공해 주었으며 그에 따라 부유한 사람들의 전유물로서의 상징성은 감퇴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그 '부유한' 사람들은 설탕 생산과 판매를 통해 엄청난 이윤을 축적했고 그것이 '가진 자'가 이끌어 온 근대 자본주의적 과정의 일부라는 것이다.

민츠는 이러한 과정을 당대의 문학과 연설을 통해 들여다보고 있다. 책 중간 부분의 문단들이 약간 응집성이 없고, 민츠의 문장 자체가 썩 빼어난 것은 아니지만, 인류학 혹은 식민주의, 영국 노동계급의 역사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읽을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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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노예와 노예상인 : 인류 최초의 인종차별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62
장 메이메 지음, 지현 옮김 / 시공사 / 199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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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책을 읽음으로써 시공디스커버리 총서를 처음 본 셈이다. 개인적으로 '총서' 내지는 '전집'류를 즐겨하는 편은 아니지만, 인종차별과 노예무역, 그리고 '유럽의 자기형성'과 같은 관련된 주제의 책을 읽다 보니 자연스레 이 책을 찾아 읽게 되었다. 물론 이 총서는 프랑스의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발행하고 있는 총서이긴 하지만, 여하튼 이렇게 매력적인 책을 번역하여 국내에 출간해 준 시공사에도 감사하다.

프랑스의 역사학자가 쓴 이 책은, 노예의 발생에서부터 노예무역, 노예의 착취와 노예의 반란, 그리고 해방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물론 비슷한 주제를 상세하게 다룬 책들이 많이 있겠지만, 이 책의 장점은 무엇보다 노예 무역이 성행하던 당시의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많은 그림과 판화들이 끼워져 있다는 것이다. 책을 주욱 넘기다 보면 일종의 그림책 같기도 하다. 덕분에 재밌게, 또 짧은 시간동안 읽을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한가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 것은, 책 후반부에 저자가 미국 16대 대통령인 에이브러햄 링컨을 위대한 노예해방론자로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대부분의 역사서들이 링컨을 노예제에 대한 타협주의자로 규정하고 있는데(그는 남북이 전쟁으로 치닫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며, 그 자신 노예 해방령을 내전이 발발하고 한참 지나서야 발표했다), 다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여하튼, 여러 모로 생각할 것이 많고 흥미로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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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역사의 이해
정옥자 / 일지사 / 199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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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후기에 유학자들이 주자성리학을 도입한후, 조선은 본격적으로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고 개창한 왕조인데, 조선 초기에는 주자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지 않았으며 건국 초기의 사정으로 인해 성리학을 주전공으로 한 계층들이 정국의 주도권을 잡지 못하였다. 이 단계의 사상을 주자성리학이라 할 것이다. 성리학을 주전공으로 하는 계층인 사림이 정계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범국가적으로 성리학적 규범이 관철되기에 이른 시기는 바로 인조반정(1623) 이후이다.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어 가는 가운데, 명나라는 청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다. 이에 조선지식인들은 명나라가 없는 그 상황에서 스스로를 주나라를 존숭하는 중화문화의 담지자로 인식하여 청에 대한 복수를 서두름과 동시에 자문화에 대한 자부심으로 찬란한 진경문화를 꽃피웠던 것이다. 이 단계의 사상이 곧 조선성리학이다.

이책에서는 조선성리학 이후에 '실학'이라는 단계를 설정하고 있지는 않으나, 영조와 정조의 시대에 이르면 강남문사들을 두루 등용해 문화적 역량을 과시했던 청나라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지면서, 조선의 지식인들은 북벌론과 존주론을 구시대의 과제로 정리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는 것을 지적한다. 조선사회가 농경사회에서 근대산업사회로의 변모를 감지한 지식인들은 새로운 사회에 맞는 새로운 사상이 필요함을 자각하고 청을 통해 서양의 발전된 기술문명을 받아들이려 했던 것이다. 이들을 북학파라 하는데, 집권층인 노론의 신진 재사들과 정조대 규장각 각신들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 외에 주변적이었던 남인 일파들에 의해 가학(家學)으로서 양명학이 연구되고 기독교가 수용되고, 이들에 의해 원시유학에 기반한 사회 개혁론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의 사상의 흐름을 내재적 발전론의 관점에서 파악하는 저자의 입장에 공감한다. 그래야만이 우리 사상사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고 서구나 일본의 역사발전단계 도식을 우리나라 역사에 기계적으로 도입하는 데서 생겨나는 오류들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 대해 몇 가지 아쉬운 점은 있다. 일단 조선 후기의 역사를 논함에 있어 너무 상층부에 편향되어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저자의 전공이 조선시대의 지성사이므로 스스로 자신있는 분야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이책을 보면 과히 중앙정치를 축으로, 또 정치사상의 변화를 축으로 조선의 역사가 결판난 것 같은 인상을 받기 십상이다. 물론 사상사가 정치사를 특징짓는 것이 조선 사회의 특수한 성격 중의 하나라는 저자의 문제의식에 공감하면서도, 후기조선의 사회경제적 조건의 변화라든가 지배층의 규범을 전유하는 민의 동향을 살펴본다면, 역사에 대한 좀 더 너른 이해가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저자가 조선 후기의 역사를 서술함에 있어 '충분히' 발전적인 입장을 취하는가에 대해서도 약간의 의문이 생겼다. 이 책은 갑신정변에 대한 평가까지 아우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전반의 60년 역사를 공백으로 처리하다시피 하고 있는 것이다. 영,정조가 왕조의 찬란한 르네상스의 시대였다면, 정조가 서거한 후 60여 년 동안 우리나라는 그저 세도정치와 삼정의 문란으로 쇠퇴일로에 있었다고 할 것인가? 이렇게 간단히 처리하기에는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왜냐하면 이 시기가 과연 조선에 있어서 사상적 변혁의 시기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이때는 청나라의 융성함을 충분히 경험하였고, 역시 청나라의 경험을 통해 서구 열강의 힘 또한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었다 할 수 있다. 또한 중요한 것은, 이때까지는 청나라나 서구의 신문물을 배우는 것이 아직 외적으로 강압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시대 사상가들이 감행했던 지적 모험들을 구체적으로 살펴야 할 것이다. 영·정조 시대가 전성기라면 그 이후 쇠퇴해 간 과정은 어떤 것이었는지, 그 쇠퇴 속에서 '새로운 시대'를 개창하려 했던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왜 그 시기에 『기학』이 성립하고 『東經大典』이 성립하였는지 충분히 밝혀져야만 역사의 연구가 역사 그 자체를 넘어서서 미래를 모색하는 초석이 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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