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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의 거장들 - 인물로 읽는 인류학의 역사와 이론 ㅣ 호모사피엔스
제리 무어 지음, 김우영 옮김 / 한길사 / 200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요약하려는 자들은 지식과 사랑을 모두 망쳐놓는 놈들이다.' 보통 책보다 조금 작은 판형의 책 456페이지 분량에, '인류학의 거장들' 스물 한 명이 '차곡차곡' 채워져 있는 이 글을 읽다보면 다 빈치의 그 말이 기억나다 말다가 한다. 이 책의 미덕이라면, 번역자가 말하고 있듯이, 인류학의 역사와 이론을 초창기부터 인물 중심으로 서술하되 메리 더글라스, 빅터 터너, 제임스 페르난데스 등과 같이 아직 국내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현대의 인류학자들을 소개하고 있다는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저자인 제리 무어는 미국 인류학 내에서 고고학을 전공으로 하고 있긴 하지만, 거의 믿기 힘들 정도로 광범한 문헌을 섭렵하여 각각의 학자에 대해 해설하고 있다. 책 앞부분에는 주요 학자들의 사진도 실려있어, 책을 읽으면서 현장을 누비고 연구하는 인류학자들을 훨씬 더 구체적인 이미지를 동원해서 상상할 수 있게 해주는 것 같다.
그러나 그러한 거장들의 삶과 학문을 열 페이지 남짓한 분량에 요약하려다 보니 과히 단순화가 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는 인류학 초보자들을 위한 간략하고 균형잡힌 소개서를 쓴다는, 본래 지은이가 갖고 있었을 법한 의도에도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은이의 요약 자체는 훌륭한지 몰라도 그 요약된 글을 읽었을 때 책에서 언급되는 어느 학자의 이론체계도 쉽사리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지나친 요약이 풍부한 민족지적 자료에 기반하고 유장한 사유를 거쳐서 나온 학문체계를 도리어 무슨 암호같이 느껴지게 한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고, 타일러나 모건, 보아스, 뒤르껭, 사피어와 레비스트로스에 할당된 장들은 재미있게 읽을 만 하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직접인용이 너무 많아 저자 자신이 각각의 인류학자들에 대한 자신만의 완결된 스토리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번역은 딱히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번역인데, 원래 제리 무어의 문장이 그러한지 몰라도, 다소 조탁이 섬세하게 되어 있지 않고 이따금 투박하다는 느낌을 준다. 그리고 외국 인명을 표기함에 있어, '문교부 고시 외래어 표기법'에 기준하여 표기하였다고 했는데, '문교부'에서 교시판 표기법을 잘 읽어보진 못했지만, 기존에 계속적으로 표기되어 온 바 클리포드 기어츠, 루스 베네딕트, 멜빌 허스코비츠 등을 '거츠', '베니딕트', '헤스코비츠'로 각각 옮긴 것은 기존의 표기법에 익숙해진 나로서는 조금 의외였다. 이는 수고로운 번역에의 작은 흠이다.
한편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제리 무어가 타일러나 모건에 대해 언급하는 방식에 대해서, 엘리너 버크 리콕이 그러했던 것처럼 '천편일률적인 모건 비판에 대한 묘한 반발심'을 느낀다. 그는 이미 전통이 되어버린 레토릭으로, 모건과 타일러의 단선적인 진화론을 비판하고 있다. '타일러가 말하는 '물리적 법칙'이 서구 과학의 원리임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그 원리에서 벗어나는 인식론은 오류로 가득찬 전(前)과학적 미개함의 잔재일 뿐이다.' '편견에 물들지 않고서야 어떻게 사회를 등급화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수사법, 이러한 문장들은 인류학 교과서에 종종 등장하며, 일종의 정치적인 교정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들 초창기 진화론자들의 견해를 비판하는 엄밀한 '논리'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것 같다. 그러한 수사를 동원해 진화론을 비판하기는 너무나도 쉽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은 사회 혹은 문화의 진화론에 대한 학문의 진화론이 아닌가? 진화론에 대한 비판은 현대 사회과학에서 진화론에 거의 승리하다시피 했다. 진화론에 대한 비판은 결국 현재 학문적·정치적으로 '적자'이며 그 근거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우월한' 위치에서 구시대의 퇴락한 진화론을 내려다보며 비판하는 것은 아닌가. 그것은 그들이 비판하는 '진화론자'들의 논리와 다소 추상적인 수준에서 다를 것이 있는가. 거친 문제제기지만, 여하튼 반진화론 내지는 서구의 자기성찰이라는 레테르가 학문적 논쟁의 수준과는 또 다른 우열의 관계를 함축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