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굴뚝청소부
이진경 지음 / 그린비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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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 쯤 전에, 어느 신문에선가 이 책의 저자인 이진경씨가 나온 대담이 실렸었다. 그 중의 한 구절이 이러하다. 이진경씨는 80년대 대학생들에게는 '사사방'(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으로, 90년대 대학생들에게는 '철굴'(철학과 굴뚝청소부)로 통한다고.

이 말은 2000년대에 대학에 입학한 내게 묘한 느낌을 갖게 한다. 나에게 이진경씨는 사사방으로도, 철굴로도 '통하지' 않는데, 그렇다면 나는 80년대의 세례도, 90년대의 세례도 받지 못한 세대인가? 2000년과 19XX년. 숫자가 지독하게 역사를 구획해 버린다. 비록 입학하고 나서 독서욕에 불타 넘겨 본 여러 새내기 추천도서 목록에 이 책은 빠지지 않고 나왔던 것 같지만, 학회라는 전통이 사라진 그 시기에 나에게 이 책을 '읽어주는' 사람은 없었고 나는 따라서 이 책을 '읽게 되지' 않았다. 그래서 새내기 시절, 이 책과 나와의 만남은 유예되었고, 결국 '철굴'은 대학 3학년을 마치고 나서 이제야 읽게 된 - 여기저기에 밑줄을 긋고 나의 생각을 행간에 채워 넣으며 열심히 읽기는 했지만 - '평범한 책' 축에 끼게 되었다. 내 책상에는 지금, 대학 도서관에서 빌려 온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이 함께 놓여 있는데, 이걸 보면 정말이지 '철굴'과 나의 만남은 '시대적'인 만남이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어쩌면 그것이 탈시대적이라는 점에서 시대적인 만남일 수도 있다. 나와 같은 세대에게 있어, '철굴'과 '사사방'은 그들 자신의 시대를 이탈하여 독자와 만나고, 이따금 하나의 책상에서 저렇게 섞이는 것이다. 나는 같은 시점에 별다른 의식상의 모순을 겪지 않으며 두 권의 책을 읽고, 또 기실 고등학교 때부터 ('다현사'나 '태백산맥'과 함께) 이진경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았던 것이다.

여하튼, 이 책을 읽기 전에는 그냥 서양 근대철학 개설서 쯤으로 알고 있었는데, 읽고 나니 그만큼 '단순한(평면적인?)' 책은 아니었다. 이 책은 1993년에 이진경씨가 민예총 문예아카데미에서 한 철학 강연을 채록한 것인데, 10년이 지난 지금 이진경씨의 전위적(?)인 사유와 실천의 연장이 되는 철학사 정리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철학사를 쓰는 것 뿐만 아니라 철학 자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언제나 그 이야기하는 자가 철학이라는 것에 대해 갖고있는 주된 관심의 표명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최근에 이진경씨가 <노마디즘>을 펴내며 이 책을 들뢰즈/가타리와의 우정의 기록이라고 하였다면, 이 책은 '들뢰즈/가타리로 가는 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며, 다소 경박한 수사가 허용된다면 '들뢰즈/가타리를 위해 새로 쓴 철학사'라 해도 좋을 것이다.

이 책은 서양근대철학에 대해 쓰고 있지만 그 시작에서부터 (특히 맑스의 입장에서, 들뢰즈/가타리의 사유를 도입하는 방식으로, 혹은 그 반대?) 근대철학을 넘어서려는 기획으로 충만해 있다. 그만큼 이 책은 - 가치중립적 의미에서 - 편향된 책이며, 그래서 또한 재미있게 읽힌다. 그러니까, 이 책은 단순한 교양강연의 원고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문제의식의 소산이며 따라서 강의인 동시에 공부이다. 그의 문제의식 하에서 칸트가 너무 '죽은 개' 취급을 받는다거나, 레비스트로스의 연구결과들이 지나치게 요약되는 느낌이 없지 않으나, 그의 공부의 궤적은 좇아가보지 않으면 안될 것만 같은 열정과 진지함의 흔적을 도처에 남겨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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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은 다른 곳에 - 교양선집 16
밀란 쿤데라 지음, 안정효 옮김 / 까치 / 198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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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 시작한 날은 2002년 1월 17일이고 다 읽은 날은 2월 6일이다. 그럼 이 책을 다 읽는 데 무려 20일이나 걸렸단 말인가. 아니다, 실제로 내가 이 책을 붙들고 있었던 날은 다 합쳐봐야 나흘 정도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20일이나 지나서야 이 책을 덮을 수 있었던 이유는 처음 사흘 동안 200여 페이지를 읽고 나서 나머지 130여 페이지를 남겨둔 채 한동안 이 책을 들여다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 특별히 바쁜 일이 있어서도 아니고 책이 지루해서도 아니다. 오히려 책이 너무 재미있어서 나는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십 수일을 쉬어야 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쉴 새 없이 터져나오는 위트, 메스로 파고드는 듯한 풍자―소설 읽기의 쾌락이 도를 지나쳐 나를 피로하게 했다.

피로하다는 것, 이 소설이 좀처럼 포근한 휴식을 주지 않는다는 것.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농담』을 읽고 쿤데라의 소설을 짐작하는 나로서는 이 책이 여전히 낯설다. 이 책은 1969년에 쓰여졌고, 쿤데라는 체코의 1968년과, 정확히 말하면 68년의 사건으로 하나의 매듭을 지은 48년 이후의 정치적 사건들과 충분한 심리적 거리를 두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1965년에 쓰인 『농담』이나 1982년에 쓰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와 같은 패러독스와 풍자 속의 따뜻한 감성, 담담한 관조가 이 책에서는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서정적인 세계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어머니는 어떤 신비한 역할을 담당하는가? 그리고 만일 젊음이 무경험의 시대라면, 절대성에 대한 열망과 무경험의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존재하는가? 또는 절대성에 대한 열망과 혁명적인 열정 사이에는? 쿤데라는 이러한 질문들에 걸맞는 배경으로서 1940년부터 1968년까지의 체코를 '택한다.' 그가 만들어 낸 시인인 야로밀은 스무 해라는 짧은 삶 속에 랭보, 앙드레 브레똥, 이르체 볼커, 푸쉬킨, 빅토르 위고, 미하일 레르몬토프의 인생을 구현한다. 그리고 40년대의 혁명을, 아울러 68년의 혁명까지 구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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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조류의 중국 - 현대중국, 그 저항과 모색의 역사
마크 블레처 지음, 전병곤 외 옮김 / 돌베개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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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건 KBS1 TV에서 목요일마다 하는 ''TV책을 말하다''라는 프로그램을 보면서였다. 그때 조너던 스펜스의 <현대중국을 찾아서>가 소개되었는데, 기타 중국에 대한 책으로 몇가지 더 소개된 책 중에 같은 저자의 <천안문>과 <반조류의 중국>이 기억에 남는다.그리고 다른 것에 신경쓰느라 한참 잊어버리고 있다가, 학교에서 중국 관련 수업을 듣게되었다. 수업의 주교재가 로이드 이스트만의 <중국의 지속과 변화>와 바로 이 <반조류의 중국>이었다.그런데 이 책을 두 번이나 읽었지만, 무엇보다 이 책은 너무 '재미'가 없다. 물론 학술서가 항상 재밌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책이 재미있다는 것은, 글쓴이가 자신의 글을 많이 팔아먹기 위해 책에 첨가한 양념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연구 대상에 대해 글쓴이가 어느정도로 애착을 가지고 있느냐 - 어느정도 자신의연구에 몰입해있느냐 - 얼마나 스스로 재미있어하고 있느냐를 반영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나는 이 책이 20세기 중국사회를 체계적으로, 그것도 중국의 역사, 정치, 경제, 국가제도, 사회 등등의 굵직한 항목을 세워놓고 매우 체계적으로 서술해 놓은 것은 높이 사지만 그 ''체계성''에도 불구하고 왠지 말끔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저자는 ''반조류'', 즉 중국이 20세기 들어 스스로가 만들어 낸 조류에(1차 5개년 계획에서 대약진운동으로, 문화대혁명으로, 개혁개방으로), 세기 공산주의 국가의 반적인 경향에, 혹은 자본주의화의 길을 걸었던 동아시아 국가들이 방향에, 모두 역행하는 노선을 택했다고 이야기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것은 책 속에서 20세기 중국을 보는 패러다임으로 구축되어 있다기보다는 (상당부분 그 반조류라는 것이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상황상황에 따라 이용하는 레토릭에 불과하다.

이 책은 사회과학 방법론과 연구시각의 여러가지 새로운 점을 의욕적으로 제시하는데, 과연 이 책이 나온 1997년의 시점에 제시된 것들이 사회과학의 연구방법에 있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또 책 전체에 걸쳐 어떻게 적용되었는지도 명쾌하게 들어오지 않는 것이 단점이다.그리고 눈에 띄는 것으로, 중국 전통사회에 대한 지나친 단순화, 고대사에 대한 무지 내지는 무관심, 지배(국가)의 측면에서 주로 서술한 점 등도 문제로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몇몇 부분은 중국사회 전체의 메커니즘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도와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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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 정신 홍신사상신서 20
몽테스키외 지음, 이명성 옮김 / 홍신문화사 / 199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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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스키외는 지방 귀족으로서, 보르도 고등법원장이었다. 1728년부터 1731년까지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네덜란드, 영국을 여행하며 견문을 넓혔고, 고대 그리스와 로마, 당대의 터키 지역의 정치제도에 대한 상당한 식견을 쌓았다. 그는 '가장 넓은 의미에서 법이란 사물의 본성에서 유래하는 필연적인 관계'라고 하며, '자연법에 대한 관념을 인간의 자연권이라는 관념과는 다른 흐름인 사회체제의 자연법칙이라는 관념으로 전환'시켰다. '이념적이고 추상적인 원리(존재?)로부터 법이나 정체(당위?)의 구조가 연역'되는 것이 아니라, '당위와 존재가 방법적으로 엄격히 구별된 상태에서, 인간이 그 생활 속에서 맺는 자연과 인간에 대한 제관계(사회체제의 자연법칙?)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몽테스키외가 경험적, 실증적으로 - 몽테스키외에게서는 인간의 '자연상태' 와 같은 말이 보이지 않는다. - 분류한 정체는 공화정, 군주정, 전제정의 세 가지이다. 각각의 정체는 '본성'과 '원리'를 가진다. 본성이란 정체 특유의 기본 구조로서 주권의 소재, 주권행사의 양태를 말하는 것이며, 원리는 정체를 완전하게 기능하도록 하는 인간의 정념이다. 공화정은 민주정과 귀족정을 포함하는데, 전자의 본성은 '국민의 집단이 주권을 갖는' 것이고 후자의 본성은 '국민의 일부가 주권을 갖는' 것이다. 그리고 공화정의 원리는 '덕'이다. 군주정은 단 한 사람이 통치하되 제정된 법에 따르는 정치체이고 그 원리는 '명예'이다. 전제정은 단 한 사람이 규범도 없이 자기 의지와 기분에 따라 만사를 처리하는 정체이고 그 원리는 '공포'이다.

몽테스키외가 집요하게 캐묻는 것은, '어떤 정체하에서 정치적 자유가 보장되는가'이다. 그것은 곧 절대왕정하에서 새로이 만들어야 할 정체의 모델을 제시하는 일이기도 하다. 여기에 대한 몽씨의 답은 '군주정'이다. 그는 '민주 정체와 귀족 정체는 그 본성으로 볼 때 결코 자유스러운 국가는 아니'며, '정치적 자유는 제한 정체(gouvernement mod r s = 군주정)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군주정에서도 자유가 항상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남용되지 않는 경우에만 존재한다. 그래서 권력이 권력을 저지토록 해야 한다는 '권력 분립'의 원리가 도출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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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1 - 일상생활의구조 -상 까치글방 97
페르낭 브로델 지음 / 까치 / 199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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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일본의 야쿠자는 에도(江戶) 시대의 소방조직이었으며 부분적으로 치안을 담당했던 집단이었다.' 라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을 듣고 나서 피식 웃었다가 이내 곰곰 생각에 잠겼다. 일본 사회를 공부하면서 저 '소방대'라는 게 왜 저렇게 자주 등장하는가, 보다 더 정확히 말해서 소방이라는 것이 왜 저렇게 사람들의 일상에 가까운 일처럼 느껴지는가가 궁금했다 ― 그런데 야쿠자마저 소방조직이라니…

사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있어 '화재'라는 것은 가끔 텔레비전에서나 보는 일이지 일상적인 사건이 아니며, 그 화재의 위험은 상재하고 있지만 쉽사리(?) 경험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반면 일본은, 과거 촌락의 무라(村) 조직이나 현대 도시 생활집단인 조나이(町內) 등에서는 '소방'이라는 일이 우리나라 농번기의 품앗이 마냥 일상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일본이란 나라가 조산대를 따라 위치해 있다는 사실이, 그래서 화산폭발과 지진이 예기치 않게 일어나고 그것은 곧 크고작은 화재를 일으킨다는 사실이 얼마나 오랫동안 집요하게 일본사회를 구속하고 제약하는 조건으로 작용하였는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시간이란 인간이 변화를 인식하는 수단으로서의 단위이고, 초·분 혹은 년·세기와 같은 물리학적 시간의 단위는 그러한 단위 중에서 객관성을 지닌 '하나의' 시간이다. 그러므로 시간의 층위는 여러 개일 수 있다. 어느 기간동안 변화가 거의 없었다면 그런 영역에서는 매우 느린 시간이 흐른 것이고 같은 기간동안 다른 영역에서 급박하게 변화가 일어났다면 그것은 시간이 빠르게 흐른 것이다. 이러한 '시간지속에 따라 역사 서술의 수준을 달리하는 것'은 '역사학과 다른 학문의 연계'와 함께 브로델의 역사 연구 방법의 큰 특징이다. 브로델은 시간지속을 세 개의 층위로 나누었는데 그것은 개별적인 사건에 초점을 맞춘 급박한 역사인 '사건사', 20, 30년 혹은 그 이상의 주기적 운동에 의해 물결치는 인간의 삶을 기술하는 '꽁종크뛰르의 역사', 그리고 여러 세기동안 거의 변하지 않는 상태로 지속되는 '장기지속의 역사(구조사)' 이다. 하지만 이러한 구분이 완전한 것은 아니다. 시간지속의 각 층위는 나름대로의 특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경계는 모호하다.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또한 「일상생활의 구조」, 「교환의 세계」, 「세계의 시간」,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지만, 이들이 각각 장기지속의 역사, 꽁종크뛰르의 역사, 사건사에 대응되는 것은 아니다.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의 구획은 또 다른 기준에 의해 구획된다. 애초에 이 책은 시간적으로는 전산업화 시기, 다시 말해 15세기부터 18세기까지를 범위로 잡고 그 기간의 유럽 경제사를 기존의 경제사 연구를 정리하는 수준에서 쓰여질 것이었다. 하지만 브로델은 요제프 쿨리셔나 베르너 좀바르트의 고전적인 경제사 연구가 제시하는 이론이 자신이 관찰한 현실에 부합되지 않음을 알고 기존의 경제학의 관점을 넘어서는 새로운 책을 쓰게 된다. 그가 새로운 관점에서 역사를 다시 쓰려 하는 까닭에 이 책에서 그는 기존 경제학의 관점이나 이론들을 종종 비판해 나간다. 브로델에게 있어 기존 경제학의 문제점은 '탈맥락주의와 단선적인 진화주의(시장에 있어서는 '자체조절적인 시장'이라는 관념: 누구에 의해서도 조정되지 않는 시장이 경제 전체의 모터 역할을 하는 장치이다)'에 있다.

경제학자들의 경우 경제를 하나의 동질적인 실체로 보기 때문에 주변 배경으로부터 경제만을 추출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며, 또 수로 표현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으므로, 그렇게 추출해낸 경제현상을 측정할 수 있고 또 측정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들이 사용하는 도식들 역시 구체적 현실들과 맞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들의 연구에 의하면, 전산업화 시기의 유럽(유럽 이외의 세계는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배제하는 것도 문제이지만)의 발전이란 인류 역사를 둘로 갈라놓는 산업혁명이 도래하기 전까지의 점진적으로 시장, 기업, 자본주의적 투자라는 합리성으로 들어가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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