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울어진 저울 - 대법원 개혁과 좌절의 역사
이춘재.김남일 지음 / 한겨레출판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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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출간된 책을 2017년 초에 읽었다. 읽는 내내 저자들이 우려하던 일이 지금까지도 고스란히 사법부에서 진행되어 왔구나 싶다. 사법부의 개혁은 정말 불가능한 것일까.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몇몇 소수의 지식인들이 최고 권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지 새삼 실감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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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명절 전에 이 영화들을 봤다. 지난주엔 <어거스트: 가족의 초상>, 오늘은 <단지 세상의 끝>을 보고 말았다. 이번주 고향 내려가 가족들을 만나기 전에 예방주사를 맞는다 셈치고... <단지 세상의 끝>의 오프닝곡인 Camille<Home is where it hurts>의 가사 중에 집은 항구가 아니야. 마음을 다치는 곳이 제일 와 닿을 날이 곧 다가온다. 오랜만에 만나는 반가운 가족들을 생각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갔다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그 길 위에서는 자주 눈물을 쏟아내야 했던 과거의 명절들... 올해 명절은 또 어떠 하려나. 반갑게 인사를 하고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까지는 좋은데, 서로를 잘 알기에 덕담이라는 가면을 쓴 채 상처의 말들이 아무렇지 않게 오고가는 그 시간들.. 이제는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고 좀 그런 상처의 말들에 덤덤해질 만도 한데 그래도 내 보금자리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는 자주 울었던 것 같다. 상처와 그 위에 겹쳐지는 부모님의 걱정스러운 마음을 곱씹으며...

 

<로렌스 애니웨이>를 보고 반해서 자비에 돌란 감독의 영화를 모두 보아 왔는데 <로렌스 애니웨이>를 뛰어넘는 영화를 아직은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 신작에는 나름 좀 기대를 했었는데 소문 무성한 잔치에 먹을 거 없다더니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 수상이라는 타이틀과 프랑스 대배우들의 대거 출연이라는 홍보가 사기라고 느껴질 정도로 실망스러움을 감출 수 없다. 배우들의 섬세한 감정선을 보여주겠다는 의도가 다분히 보이는 부담스러운 클로즈업과 어느 소설에서 베껴온 듯한 그럴싸한 대사 몇 줄, 그리고 영화내용을 한 곡으로 압축시킨 듯한 강렬한 느낌의 오프닝곡과 엔딩곡. 본인의 특기인 감각적인 영상을 포기하는 대신 배우들의 자극적인 연기를 대체한 듯한데 이런 것들로 영화를 그럴싸하게 포장하기에는 이제는 관객들의 수준이나 기대치가 높아졌다는 걸 감독은 아직 모르는 걸까.

 

그렇다면 <어거스트: 가족의 초상>은 어떤가. 메릴 스트립, 줄리아 로버츠, 이완 맥그리거, 베네딕트 컴버배치라는 이름만 들어도 감이 오는 초호화 캐스팅이다. 캐스팅만으로 보면 <단지 세상의 끝>과도 견줄만하다. 그렇다면 영화는.... 이 영화도 역시나 대배우들의 출연에도 불구하고 뭔가 아쉬움이 남는다. 어쩌면 이 두 영화에서 보여주는 요란한 서양식의 가족 불화에 불편한 감정이 들어서 영화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 건지도 모르겠다.

 

가족의 민낯을 보여주는 데 있어서 이렇게나 법석하고 험악해야만 했을까. 두 영화 모두 서로를 잡아먹을 것만 같은 눈빛과 칼을 품은 말들로 서로를 향해 그어대는 모습이 사실 좀 많이 불편하기는 했다. 아니 불편하다기보다는 좀 어색했다. <동경가족>이나 <걸어도 걸어도>, <하나 그리고 둘>과 같은, 가족의 이야기를 하더라도 조용하고 담담하게 보여주는 동양식의 가족 영화에 익숙하고 더 감정이입이 잘 되는 내 취향때문에 이와는 대조적인 시끄럽고 험악한 가족이야기에 거부감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서양식의 극단적인 가족 분열의 상황을 내 정서로 이해하기에는 좀 힘들었던 게 사실이다.

 

두 영화 모두 시간적 배경이 더운 여름날이다. 그런가 하면 공간적 배경은 도시가 아닌 한적한 외곽의 집. 아무 걱정없이 즐거운 한때를 보냈던 여름날들이 찬란했을 그 곳이 어른이 된 지금은 마치 지옥처럼 느끼는 가족들의 모습이란... 정작 변한 건 집이 아니라 본인들인데 말이다. 자신들의 과거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그 곳을 그리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곳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어 하는 마음을 알 것 같기도 하다. 일상을 공유한다는 건 정말이지 아무리 섬세해도 그래서 서로를 배려한다고 해도 결국은 상처가 생겨날 수밖에 없는 그런 관계인지도 모르겠다. 가족이기에 서로 주고받을 수밖에 없는 필연적 상처들 말이다.

 

두 영화에서 가족들을 모이게 하는 건 죽음이다. <단지 세상의 끝>에서는 집을 나간 후 10년 넘게 집을 찾지 않던 둘째 아들이 시한부 선고를 받고 자신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 고향집을 찾는다. 그런가하면 <어거스트: 가족의 초상>에서는 실종되었던 아버지가 익사하면서 장례식을 위해 가족들이 모인다. <단지 세상의 끝>에서는 숨겨왔던 가족의 비밀이라던가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단지 집을 떠나 자유롭게 살았던 둘째와 그렇지 못한 첫째와 막내 간의 갈등, 각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려 하다가 끝내 실패하는 모습을 그려줄 뿐이다. 이에 비해 <어거스트: 가족의 초상>에서는 출생의 비밀부터 해서 아버지 죽음에 얽힌 진실 그리고 엄마와 장녀의 험악한 관계 등등 정말 미국판 막장 가족이라 할만한 내용이다.

 

두 영화 모두 식사 자리에서 갈등이 최고조에 이른다. 가족의 단란함을 대표하는 식사 자리는 어느새 가족들이 서로에게 비수를 꽂는 그런 자리가 되어버린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가족 모두가 함께 모일 자리가 별로 없는 요즘 같은 시대에 다 같이 모인다 한들 서로가 얼마나 다른지를 확인하는 자리가 되어버린 식사시간. 먹는 것은 넘쳐나 배는 부를지언정 마음은 더욱 허기지는 시간. 이게 이 시대 가족의 초상은 아닐지... 생활의 풍족함과는 대조적으로 핏줄이라는 유대감은 점점 메말라만 가는 시대.. <어거스트: 가족의 초상>의 둘째딸이 언니와 여동생에게 이런 말을 한다. 우리는 그저 어쩌다가 같은 유전자를 공유하게 된 남남일 뿐이라고... 이 대사에 어느 정도 공감을 하고 있는 나 스스로가 좀 서글플 뿐이다.

 

이번 명절에 나는 가족 들 중 누구의 가슴에 비수를 꽂을지 또 누구에게서 화살을 맞을지... 일 년에 많아봤자 5번 정도 보는 사이인데도 왜 보기만 하면 꼭 크든 작든 투닥거림을 겪어야 하는지... 저런 무지막지한 가족이야기를 두 편이나 봤으니 이번 명절은 좀 덤덤하게 잘 보내다가 올 수도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에효~~ 잘 모르겠다. 닥쳐보기 전에는.... 설날에 TV에서 우리나라 영화 <고령화 가족>이나 방영해줬음 좋겠다. 그 영화 보면서 우리 가족은 그래도 저 정도는 아니니 행복한 거라며... 라고 각자 스스로가 위로받을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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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 연대라는 단어를 자주 접하게 되고 또 생각해보게 되는 요즘이다. 아마도 최근의 촛불집회의 영향이 적지 않으리라. 2016년 대한민국 국민들에게는 절대적인 공공의 적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하기에 지금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자주, 더 보편적으로 연대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런데 과연 절대적인 공공의 적이 아닌 우리 각자의 일상에서도 2016년의 촛불집회 같은 끈끈한 연대가 가능할까. 이런 의문이 든 건 <내일을 위한 시간>이란 영화 때문이다.

 

산드라는 남편과 아이 둘을 두었다. 제조업 회사에서 일을 했던 그녀는 우울증 때문에 잠시 휴직을 하고 치료를 마친 후 복직을 하려고 한다. 하지만 회사의 사장은 현재 일하고 있는 직원들이 보너스를 포기해야만 산드라의 복직이 가능하다며 직원들에게 양자택일을 강요한다. 동료의 복직인가 자신이 받을 보너스인가. 이미 이 문제로 한 번 치러진 투표에서는 직원들이 보너스를 선택했다. 하지만 이 투표과정에서 작업반장의 직원들에 대한 외압이 있었음을 이유로 사장은 다시 한 번 월요일 오전에 재투표 할 것을 허락해준다. 그리고 산드라는 주말 동안 16명의 동료들을 찾아다니며 자신의 복직을 도와달라고 설득에 나서게 된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이것이 전부이다. 산드라가 이틀 동안 직장동료들을 만나는 여정.. 영화로서는 밋밋할 수밖에 없는 이 짧은 여정을 1시간 30분가량 보는 내내 나는 왜 그렇게도 울었던가.

 

산드라가 만난 직장 동료들의 반응은 저마다 다르다. 각자의 사정이 다르기 때문이다. 아내는 실직하고 생활비를 대줘야 하는 대학생을 둔 가장, 이혼하고 새로운 가정을 꾸려야하는 사람, 외국인이라 주말에는 몰래 아르바이트까지 하는 동료, 집수리로 인해 돈이 필요한 사람, 계약직이라 반장에게 잘 보이기 위해 보너스에 투표를 했던 청년, 자신이 일해서 받는 정당한 보너스를 왜 포기해야 하냐며 화를 내던 청년, 동료보다 보너스를 선택한 것에 내내 마음에 걸려 산드라의 방문에 울음을 터뜨리며 반가워하던 동료, 그런가하면 직장에서는 친했는데 정작 산드라가 찾아오자 아이를 시켜 만남을 회피하는 사람 등등 산드라는 이런 동료들을 만날 때에도 그 앞에서는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보너스를 선택한 동료도 이해한다며 돌아섰고 자신을 지지해준 동료에게도 과장된 고마움을 표시하지 않는다. 그저 담담하게 자신의 입장을 이야기하고 당신이 어떤 선택을 하든 이해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자신의 부탁이 거절당하거나 동료들의 차가운 시선을 받고 뒤돌아선 산드라는 울거나 우울증약을 과다복용하거나 남편에게 또다른 동료들을 만나는 것을 그만둘 거라며 힘들어한다. ‘나 너무 외로워라고 말하며 울먹이던 산드라의 그 표정을 잊을 수 없다.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혼자 무너지는 산드라의 모습은 뭐랄까 낯설지가 않다. 직장 상사에 치이고 관공서 사람들에서 무시당하고 녹초가 되어 귀가하여서는 불도 켜지 않고 울곤 하던 나 같기도 하고 이와 별반 다르지 않는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내 친구들 모습 같기도 하다.

 

상상해봤다. 만약 내가 산드라의 직장동료라면... 일을 하는 데 있어 굳이 한 명을 더 충원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 결코 적지 않은 보너스를 동료의 복직을 위해 기꺼이 포기할 수 있을까. 지금의 내 상황에 빗대 가정해 보자면, 혼자서는 좀 벅찬 업무량인 대신 월급을 1.5배 올려주던가, 아니면 새 직원을 한 명 더 뽑던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적지 않은 월급인상을 포기하는 대신 직장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일자리를 양보할 수 있는가. 돈 앞에서는 이렇게 마음이 갈대이다. 이미 받아왔던 월급만으로도 어떻게든 살아왔지만 더 받게 될 돈 앞에서는 동료의, 누군가의 절박함도 가슴에 와 닿지 않는다. 이렇듯 내게 이득이 생길지도 모르는 상황 앞에서는 는 너무나도 쉽게 갈린다. 한 때는 우리였던 그리고 더 넓은 의미에서는 끝까지 우리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건만 자본의, 권력의 이간질에는 참으로도 쉽게 갈라지고 무너진다.

 

연대: 1. 여럿이 함께 무슨 일을 하거나 함께 책임을 짐. 2. 한 덩어리로 서로 연결되어 있음.

 

연대의 사전적 의미는 저렇다. 최근에 자주 입에 올렸던 그리고 생각해보던 연대는 첫 번째 의미의 연대이다. 어마무시한 공공의 적을 만들어 놓은 것도 결국은 국민이니 우리가 함께 일어나서 이 적을 물리치고 이 사태에 대해 책임을 다하자는 의미에서 시작된 촛불집회. 이런 의미의 연대는 비교적 이루기 쉽다. 사람들과 연대를 한다고 해서 당장 내가 손해를 입을 일은 없으니까. 내 월급이 줄어들거나 실직을 하거나 그런 개인적인 불이익을 당하는 것이 아니니까.

 

하지만 <내일을 위한 시간>에서처럼 당장 내가 경제적인 불이익을 받게 된다면 나는 한 때 한 덩어리였던 동료와 자발적으로 끝까지 연결되어 있기를 선택할 수 있을까. 같은 회사의 직장 동료라는 친밀하고도 긴밀한 덩어리에서조차 돈 앞에서는 그 연결이 미약해지거나 끊어질진대, 과연 좀 더 느슨한 덩어리에서의 연결은 얼마나 쉽게 끊어질지... 최근 밀양 송전탑 반대 투쟁으로 인해 분열된 밀양의 마을공동체 기사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너무 아프다. 지금 밀양은 정부와 한전의 돈 이간질에 마을 사람들이 서로 원수 보듯 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진정한 연대란 뭘까. 스스로에게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결코 무너뜨릴 수 없을 것 같은 리바이어던에 대항한 연대. 물론 중요하다. 이런 괴물을 무너뜨리는 데야 말로 연대가 가장 핵심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연대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큰 저항감없이 공감하고 동참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희생을 요구하는 작은 공동체들 안에서의 연대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공감하고 동참하고 있는 걸까. ‘더불어 같이 살자라는 그 당연한 말에 우리는 얼마나 당당할 수 있을까. 결국 진정한 연대는 타인을 나와 같은 사람으로 바라보는 태도의 문제가 아닐까.

 

투표결과는 산드라 복직 8, 보너스 8표였다. 결국 산드라는 복직에 실패했다. 그녀는 자신에게 표를 준 동료들과 일일이 포옹을 했다. 짐을 싸서 나가려던 산드라에게 다시 한번 사장은 미끼를 던진다. 8:8이라는 결과도 그렇고 동료들의 팀워크를 위해서 산드라를 복직시키기로 결정했다고. 다만 대신에 현재 계약직으로 일하는 직원의 재계약을 하지 않는 조건으로... 이에 산드라는 동료의 희생으로 자신이 복직 할 수는 없다며 회사를 나온다. 그리고 밝은 얼굴로 남편에게 최선을 다했다고. 나 지금 행복해라고 말한다.

 

동료의 냉대와 환대에 따라 무너지고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하던 산드라. 그런 거다. 한 사람의 무릎을 꺾는 것도, 다시 일어서게 하는 것도 결국은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다. 무릎이 꺾일 수도, 주저앉은 동료를 일으켜 세울 수도 있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이고 당신이다. 영화의 제목처럼 내일을 위한 시간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지금 곁에 있는 사람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태도와 마음을 갖는 게 아닐까. 내일은 그 누구도 알 수 없으니 지금 자리에서 나를 대하듯 남을 대하는 것. 그게 내일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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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 :

하지만 우리가 공유하는 무언가가 있어.

마치 다른 생에서 만났거나 뭔가를 함께 한 기분이야.

그걸 알고는 있지만 분명 기억의 영역은 아냐. 매우 가깝기는 하지.

어쩌면 이번 생에서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었는지도 몰라.

좋아, 115일이야.

좋아, 하지만 연도는 달랐지.

우리는 그런 종류의 시간에서 벗어난 거야.

 

스윈튼 :

하지만 우리는 같은 역에서 내렸죠.

 

다큐멘터리 <존 버거의 사계> 중에서...

 

<너의 이름은.>을 보고나서 제일 처음 생각 난 건 다큐 <존 버거의 사계>에서 보여진 존 버거와 영화배우 틸다 스윈튼의 관계였다. 34년의 차이를 두고 생일이 같고, 아버지가 군인이었다는 공통점을 가진 그들은 소중한 만남을 이어오고 있었다.

 

만남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서로를 마주보는 것을 만남이라고 한다면 <너의 이름은.>의 타키와 미츠하의 만남은 서로의 존재를 알고는 있었으되 만남이라고 할 만한 마주침은(기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황혼 녘의 잠깐의 만남을 제외 하면) 몇 년이 지난 후에야 서로를 마주할 수 있었다. 그것도 어떤 기억을 가지고 서로를 알아보았다기보다는 어떤 특별한 감정만을 가지고 서로를 알아본 것이다. 경험 혹은 기억에 앞선 감정의 이끌림. 이런 게 운명 아닐까.

 

시간도 공간도 다른 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동갑내기 타키와 미츠하는 현실 같은 꿈속에서 아니 꿈같은 현실에서 서로의 몸을 바꾼 채로 서로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특별한 경험을 한다. 두 사람의 이러한 기적 같은 만남은 미츠하의 할머니 말씀에 따르면 무스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스비

 

땅의 수호신을 말이다, 옛말로 무스비라고 부른단다. 여기에는 몇 가지 깊은 뜻이 있지.

실을 잇는 것도 무스비’, 사람을 잇는 것도 무스비’, 시간이 흐르는 것도 무스비’, 전부 같은 말을 쓰지. 그 말은 신을 부르는 말이자 신의 힘이란다. 우리가 만드는 실매듭도 신의 솜씨,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지.

 

한데 모아서 모양을 만든 후에 꼬아서 휘감고, 때로는 되돌리고, 끊기고, 또 이어지고, 그것이 실매듭. 그것이 시간, 그것이 무스비

 

알고 있니? 물이든, 쌀이든, 술이든 무언가를 몸에 넣는 행위 또한 무스비라고 한단다. 사람 몸에 들어간 것은 영혼과 이어지는 법이지.

 

_ 신카이 마코토 소설, 너의 이름은.중에서..

 

사람 몸에 들어간 것은 영혼과 이어지는 법이라면 타키와 미츠하는 그야말로 100% 서로의 영혼으로 이어진 사이. 몸이 바뀐 상태에서는 서로의 이름은 물론 개인적인 생활까지 알고 있었지만 혜성이 떨어지던 날 한 순간의 사건으로 인해 서로에 대한 기억과 이름마저 잊어버린 채 감정만 남은 두 사람은 이후 계속해서 누군가를 찾고 있다. 찾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왜 찾고 있는지도 모른 채 그저 마음이 일으키는 자신의 감정에만 의해... 원인이 분명한 만남이 아니라 그저 마음이, 감정이 이끄는 만남.. 타키와 미츠하의 이어짐은 그런 것이다. 서로를 이어준다는 운명의 붉은 실 같은...

 

이름

 

세상에서 가장 짧은 마법의 주문은 바로 이름이라고 한다. 이름을 부름으로써 기적을 일으킬 수도, 소망을 이룰 수도 있다는 말이다. 서로의 이름을 잊지 않기 위해 애쓰던 두 사람은 어쩌면 서로의 이름을 잊게 되는 대신 기적적으로 미츠하가 사는 마을 사람들의 목숨을 구했는지도 모른다. 서로의 이름을 간절히 기억하고 부르고 싶었던 두 사람의 마음이 몇 백 명의 사람을 구하는 기적을 일으킨 것일지도.. 그래서 영화의 제목인 <너의 이름은.> 다음에 이어질 단어는 기적인지도... 마침표 다음에 이어질 세상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기적이지 않을까.

 

황혼 녘

 

저녁. 낮도 밤도 아닌 시간. 사람의 윤곽이 흐려져서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되는 시간. 사람이 아닌 것과 마주칠지도 모르는 시간. 마물이나 사자와 맞닥뜨리는 시간.

 

_ 신카이 마코토 소설, <너의 이름은> 중에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불분명하기에 내 눈을, 머리를 믿기 보다는 내 느낌을, 마음을, 감정을 더 믿게 되는 시간. 아니 믿어야 하는 시간. 나라는 분명한 존재가 아니라 나 외의 불분명한 존재에 더 관심을, 마음을 기울이게 되는 시간. 그렇게 나에게서 타인으로, 안에서 밖으로, 여기에서 저기로 나를 확장하게 되는 시간.

 

타키와 미츠하가 서로의 이름을 기억한 채 마주할 수 있었던 유일한 시간이 바로 황혼 녘이다. ‘아닌 를 더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마법 같은 시간에 두 사람은 기적처럼 만나게 된다. 이 기적 같은 만남 이전에 둘은 몸이 바뀌어 서로를 가장 잘 아는, 잘 알 수밖에 없는 친구였고 이 만남 이후에 둘은 서로의 이름조차 잊은 채 그저 누군가를 끊임없이 기다리고 그리워하는 알 수 없는 감정만을 지닌 남남이 되어 있다. 그날 황혼 녘에 일어난 또 다른 기적이라고 한다면 분명한 것보다는 불분명한 것이 오히려 운명의 상대를 찾아낼 수도 있다는 걸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아닐까.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은

무언가를 다른 이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계산할 수 없는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

그것과 동행하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

 

<존 버거의 사계> 중에서..

 

동행

 

타키는 미츠하와 몸이 바뀌어 미츠하의 삶을 사는 동안에 보았던 것을 그림으로 그렸다. 마을을 그리고 친구들을 그리고 자신의 눈에 보인 모든 것들을 그렸다. 그것들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그림이 아니었다. 기억하기 위한 그림이었다. 결국 타키는 그 그림에 의지한 채 미츠하를 만나러 떠나고 그 목적지에 도착해서는 생각지도 못한 참담한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타키는 미츠하를 살리고 싶다는 간절함으로 결국 혜성 충돌이라는 사건으로부터 마을 사람들을 살려낸다. 결과적으로 이토모리 마을을 그림으로써 타키는 미츠하와 이토모리 사람들과 같은 시대를 계속해서 함께 살아가는 동행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결국은 미츠하와 만날 수도 있었다.

 

어른이 된 타키가 하고자 하는 일은 지금 눈에 보이는 풍경을 잘 담아놓는 것. 언제 사라져버릴지도 모르는 일상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림을 그린다는 건, 풍경을 남긴다는 건 그런 게 아닐까. 각자 저마다의 최종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것들과 동행한다는 것. 연인과 가족, 친구와 이웃, 집과 학교, 카페와 지하철, 꽃과 나무, 강과 산. 이 모든 것들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하나의 풍경을 이루며 살아가는 평범한 동행이 결국 우리가 매일 만나는 기적은 아닐까. 그리하여 가 아닌 그 모든 의 이름은 기적이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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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모마일 2017-01-12 23: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영화를 보고 아리송했는데 리뷰를 읽으니 정리가 되는 것 같습니다. 존 버거의 사계를 찾아봐야겠네요. 어떻게 영화 메시지와 그리 연관이 잘 되는지...

설해목 2017-01-12 23:16   좋아요 0 | URL
존 버거의 다큐가 15일까지 무료로 볼 수 있다고 하네요. 한번 찾아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 ^^

캐모마일 2017-01-12 23: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 읽고 갑니다.
 
건너오다 - 다큐 피디 김현우의 출장 산문집
김현우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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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자발적 활동에서 개인은 세계를 자기 안으로 받아들인다. 그 과정에서 개인의 자아는 온전해지고 더 강해지며 더 탄탄해진다. 자아는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만큼 강하기 때문이다.” _ 에리히 프롬,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중에서..

 

내게 있어 자발적 활동의 최고라 말할 수 있는 건 역시 여행이다. 시골을 막 벗어나서 서울이란 도시에 적응하는 이십대에 가장 하고 싶었던 것 역시 여행이었다. 하지만 어쩌다보니 여행다운 여행 한번 못 해본 채 나는 사십대가 되어 있고, 여행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나 하는 전유물처럼 느껴지며 점점 내게서 멀어져 가는 중이었다. 그런 와중에 이 책 <건너오다>를 만났다.

 

며칠 전 존 버거 작가가 타계하셨다. 내게 존 버거란 작가를 각인시켜 준 건 10년 전쯤에 만난 이 두 책 <7의 인간><행운아>이다. 그리고 <행운아>의 번역자가 바로 이 산문집을 쓴 작가이기도 하다. 그리고 번역가이자 작가인 그의 본업은 다큐를 찍는 방송국 피디이다. 이렇게 멋진 일을 동시에 하고 있는 사람이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그런 순수한 호기심으로 아주 오랜만에(여행이 점점 멀게 느껴지면서 여행에세이와도 거리를 두던 상태였다) 여행산문집을 들었다.

 

때론 개울 하나를 건너는 것도 만만치 않을 때가 있다. 경계란 그런 것이다. _p.59

 

경계는 언제쯤 넓어지기를 멈추는 걸까? 나이가 들면서 알게 된 것이 있다면 새로운 세상이 늘 닥친다는 사실이었다. 경계는 그렇게 끊임없이 확장된다. _p.62

 

경계 너머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래서 두렵기도 하고 매우 자주 지치기도 하지만, 경계를 넘어가는 동안의 현기증을 견디는 수밖에 없다. 고맙게도 함께 건너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의 손을 꼭 쥔 채 그렇게…… _65~66

 

경계를 넘는 방법을 생각했다. 경계를 건너지 못하게 하는 것은 경계가 아니라 경계 앞에 선 나의 마음이다. 그것은 욕심이고, 욕심의 다른 이름인 미련 혹은 집착이고, 두려움이다. _p.236

 

2016년과 2017년의 경계를 함께 건너온 책이다. 끝자락은 아쉬웠고 또다른 시작은 두려웠다. 시간의 경계를 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명확하게 가슴에 새겨지는 연말연시에는 늘 불안했고 그래서 많은 모임에도 불구하고 자주 우울했다. 이런 현기증을 견디는 수밖에 없다고, 경계를 건너지 못하게 하는 그 마음을 들여다보라고 말하는 작가. 그의 이 말에 안도가 되는 건 그가 맞닥뜨린 경계를 건너온 흔적들을 책의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역시 자신이 마주친 모든 경계를 쉽지 않게 건너왔고 또 건너가고 있는 중이다. 작가의 이런 진솔한 고백이 누군가에겐 분명 위로가 된다.

 

낯선 공간은 머리나 마음이 아니라 몸으로, 감각으로 먼저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 _p.12

 

그 백야의 숙취는 비행시간의 시차만은 아닌 어떤 시간의 어긋남에 대한 경험이었다. 몸이 세상의 시간을 따라가지 못하는 불일치. _p.38

 

늘 몸은 그렇게 마음을 따라가지 못한다. 혹은, 환경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_p.58

 

관람차에서 내려 소핑몰을 둘러본 후 다시 역 앞으로 돌아올 때는 노면 전차를 타보기로 했다. 전차를 타면 공간뿐 아니라 시간까지 이동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자동차와도 다르고 기차와도 다른 울림에 반응하는 몸은, 그야말로 낯선 흔들림을 경험한다. 덕분에 여행을 와 있다는 것이 말 그대로 실감이 난다. _p.181

 

접촉, 몸을 통한 관계는 대답을 요구한다. 애정이 가득한 섹스든 지하철을 타고 내리다 부딪히는 상황이든, 타인의 몸이 나의 몸과 닿았을 때 우리는 무슨 반응이든 해야 한다. 그때 상대의 몸은 없는 셈 치는 것이 불가능한’, 어떤 절대적인 있음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몸은, 있음에 반응한다. 그런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하곤 한다. _p.203

 

마흔이라는 나이는, 나뿐 아니라 주변의 사람들을 보아도, 그런 결단을 내릴 수 있는 마지막 시기임을 실감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실감이란 몸으로 느낀다라는 의미이다. _p.211

 

나는 왜 여행을 하지 못 할까, 아니 두려워하는 걸까. TV에서 여행에 관한 방송을 보며 나도 모르게 울고 있다가 문득 스스로에게 묻는 물음이다. 돈의 문제인가, 시간의 문제인가. 마음의 문제인가. 기회의 문제인가. 이리저리 이유를 생각해봐도 확실한 대답을 얻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니 알겠다. 어쩌면 그건 몸의 문제라고... 낯선 곳에서 다칠지 모른다는 두려움, 말이 통하지 않을 때 겪어야 할 몸의 고단함, 그리고 몸으로 온전히 느끼는 낯섦에 대한 설렘의 부재. 몸의 닿음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

 

무엇이든 닿아봐야 어떤 반응이든 일어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제대로 닿아보지 못해 몸을 자꾸만 안으로 말고 있는 나다. 결국 나는 크게 한번은 깨져야 할 것이고 그렇게 닿은 몸을 통해 내 경계는 넓어질 것이며 나는 결단이라는 걸 진지하게 생각해볼 기회를 가질 것이다.

 

그런 시간, 그런 곳에선 멀리 두고 온 것만 같은 한국의 나에 대해 남 이야기하듯 술술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_p.126

 

어쩌면 그렇게 낯선 장소에서 낯선 사람들에게 속내를 털어놓으려고 우리는 여행을 떠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낯섦이 일상에게 해주는 대답을 찾으러…… _P.174

 

관계에서 벗어나 바라보는 세상은 그대로 좋아 보였고, 내가 그 안에 있고 없고 따위는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떨어져나온 나도 나쁘지 않았다. 각자 그렇게 서로에게 불만이 없는 세상과 나…… _P.188

 

밥을 먹을 곳을 찾아야 하고, 잠자리 고민을 먼저 해결해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나를 환영해준다는 말이 꽤나 반가웠던 건, 모든 것을 털어낸 다음에 남는 내가 어떤 모습일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모든 여행은 그 말, ‘너는 괜찮아라는 말을 듣기 위해 떠나는 것 아닐까. _P.191

 

모두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고, 다시 만날 일도 없지만, 그런 이들과의 기분좋은 마주침은, 인간은 기본적으로 다른 인간을 좋아하고 반가워한다라는 걸 확인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에, 의외로 힘이 세다. 어느 만큼은 그런 마주침이 다시 여행을 떠나게 하는 힘이기도 하다. _P.208

 

이런 게 여행이라면, 여행에서 이런 느낌을 받을 수만 있다면 나는 당장 떠나야 한다. 여행은 일상에서의 도피도 아니고, 남는 시간과 돈을 즐겁게 쓰는 오락거리도 아니다. 아니어야 한다. 내가 원하는 여행은 작가가 말한 바로 저런 것이다. 여행을 하게 된다면 바로 저 느낌을 마음 가득 담아가지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고 싶다.

 

이 여행산문집에는 다른 여행책들과는 다르게 생생한 컬러풀의 여행사진은 거의 없다. 몇 장의 사진이 드문드문 있지만 그것마저 흑백으로 눈길을 끌만한 사진들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다 읽고 나면 그 사진들이 얼마나 소중한 사진들인지 다시 한번 찬찬히 들여다보게 된다. 작가의 지난 추억들이, 어떤 감정의 흔적들이 박제된 소중한 사진이란 걸 이미 알아버렸기에...

 

의식하건 안 하건 자기 자신이 아닌 것보다 더 부끄러운 일은 없으며, 진짜 자기 것을 생각하고 느끼고 말하는 것보다 더 큰 자부심과 행복을 주는 것도 없다_ 에리히 프롬,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중에서..

    

2년에 걸쳐 일주일 동안 읽은 책은 여기저기 그은 밑줄투성이에 책 귀퉁이는 대부분 접혀서 정말이지 2년 동안 매일 읽은 책마냥 되어버렸다. 그만큼 좋은 글들이 많았고 생각해볼 만한 마음의 여백을 만들어주는 책이다. 에리히 프롬의 말처럼 진짜 자기 것을 생각하고 느끼고 말하는 것보다 더 큰 자부심과 행복을 주는 것도 없을 거라고 나 역시 생각한다. 그리고 다큐 피디이자 번역가이자 작가인 저자야말로 여행을 통해 진짜 자기 것을 충분히 경험하여 받아들이고 또 그것들을 이렇게 멋진 글로도 전할 수 있으니 그야말로 자부심과 행복을 충분히 느껴도 되는사람이지 싶다. 그런 작가의 좋은 글들을 마지막으로 몇 자 옮겨본다.

 

리베카 솔닛의 말처럼 버림은 어쩌면 무관심의 동의어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건 '(버림받는 대상에 대한 악의를 품고) 망가뜨리다'의 의미보다는, '적극적으로 지켜주거나 돌보지 않는다'의 의미에 가깝다.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버림받았다는 것은, 그 사람이 나에게 악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사람의 '적극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는 것뿐이다. 적극적인 관심 혹은 애정을 받지 못한 채 방치된 것들이 시간이 지나면 폐허가 된다. _195

 

오사카에 이민 온 한인들이 개간했다는 히라노가와의 직선이 그 안에 수많은 곡선을 숨기고 있듯이, 어떤 침묵은 그 안에 많은 말을 담고 있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가 보여주는 직선에서 곡선을 읽어내고 그의 침묵 안에서 차마 말해지지 않는 말들을 들어내는 것이다. 그건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고, 그 노력을 기꺼이 기울이는 마음이 사랑이다. _p.229

 

사랑은 내 안에서 내 멋대로 만든 그 사람의 이미지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몸을, 그 몸이 함께 가지고 오는 부담까지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어야 함을, 이제야 알 것 같다. 그것이 매우 어렵고, 각오를 필요로 하는 일이라는 것까지…… _p.204

 

사람은 기대가 없이도 다가올 날들을, 혹은 남은 날들을 그려볼 수밖에 없다. 그건 빛과 그림자가 함께 있음을, 그렇게 환하기도 했고 어둡기도 했던 자신과 비로소 화해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어떤 마음일 것이다. _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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