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세 살의 여름
이윤희 지음 / 창비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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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998년 해원이는 국민학교 6학년에 재학중이다. 아버지가 일하고 계신 지방의 한 바닷가로 여름휴가를 갔다가 우연히 그곳에서 같은반 친구 유산호를 만난다. 바람에 날려간 해원의 모자를 산호가 주워주며 두 사람은 여름 방학의 한때를 같은 장소에서 보낸 추억을 갖게 된다. 한편 해원에게는 교환일기를 쓰고 바꿔 읽는 단짝친구 권진아가 있다. 휴가지에서 산호를 만났다는 말에 진아는 4학년때 같은 반이었던 산호를 안다며 그때 산호가 자기를 좋아했다고 말한다. 그 말이 해원의 가슴에 어떤 파문을 일으킨다. 개학날 짝을 정하라는 담임의 말에 따라 남학생들이 먼저 앉고 싶은 짝을 정하게 되고 백우진은 해원이를 짝으로 선택한다. 해원이는 산호가 신경이 쓰이고 우진이를 짝사랑하던 친구와 그 패거리들은 해원이에게 안좋은 감정을 드러낸다. 귀신이 나온다는 폐가를 찾았다가 우연히 해원은 산호를 만나고 산호의 과거를 알게 된다. 우진은 해원이 산호를 좋아한다는 걸 눈치 챈다. 해원에게 전하는 러브레터를 해원의 책상 서랍에 넣어두지만 끝내 해원에게 닿지 못한다. 대신에 해원은 같이 폐가에 있는 길고양이를 보러가자는 산호의 쪽지를 보게 된다. 학교에서 이런 일들은 겪는 중에 해원의 집에도 변화가 찾아온다. 아버지가 실직을 하고 어머니가 일을 나가게 되었다. 좋아서 다니던 피아노 학원도 연말 연주회를 마치고 그만 두기로 한다. 국민학교와 영원히 작별해야 하는 해원과 산호는 열세 살을 어떻게 마무리 짓게 될까.

 

왜 열세 살의 여름일까를 생각해봤다. 국민학교 6년의 생활을 마무리 하고 중학교라는 전혀 다른 세계로 넘어가게 되는 그 나이가 인생에서 좀 특별한 변화의 시기이기 때문에 저자는 열세 살이란 나이를 선택한 건 아닐까. 그나마 공부에 대한 압박감을 좀 덜 느끼며 친구들과 마음껏 놀 수 있던 시기의 마지막이자 경쟁보다는 어울림이 자연스럽고 사랑과 우정이라는 감정에 눈을 뜨게 되는 나이 열세 살. 그런 나이에 해원은 여름날의 소중한 추억을 갖게 되었다. 산호와의 만남이 계속해서 이어질 거라는 순진한 희망을 하지는 않겠다. 그보다는 영화 <초속 5센티미터>처럼 현실적인 결과를 맞을 확률이 크다. 그럼에도 첫사랑에 대한 추억을 간직한 채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게 된다면 마음의 흔들림이 좀 덜하지 않을까 싶다.

 

이 만화를 보면서 문득문득 삼십 년 전의 나를 떠올려보곤 했다. 시골에서 국민학교 6학년에 다니던 나는 활달하고 장난기도 많았던 것 같다. 해원과는 다르게 싫어하는 친구들과는 싸우기도 하고 남자아이들의 괴롭힘에도 끝까지 맞섰다. 그때 좋아하던 남자아이가 있었던가? 지금은 전혀 떠오르는 이름이 없다. 시내가 아닌 변두리에 살며 가난했던 나는 남자아이들에게 인기가 없었고 나 역시 그 사실을 알기에 굳이 누구를 좋아해서 상처받는 걸 두려워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런 비겁한 마음이 삼십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하다. 사람의 기질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되었다고나 할까.

 

국민학교를 배경으로 한 글이라서 일까 읽다가 추억에 빠져들기도 했다. 예를 들면 왁스를 발라 나무마루 바닥을 마른 걸레로 열심히 박박 닦던 추억같은. 토요일만 되면 집에서 헌 수건으로 만들어온 걸레를 들고 일렬로 무릎 꿇고 엎드려 왁스가 발라진 복도 마루바닥을 닦던 기억이 아주 선명하게 떠올랐다. 왁스 대신 양초를 사용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 당시 청소당번 때문에 아이들 사이에서 문제가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선생의 편애를 알 수 있는 계기이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런가하면 집이 좀 넉넉해서 피아노학원을 다니던 친구들이 있었는데 나는 그 애들을 정말 많이 부러워했었다. 속으로는 부러워했으나 겉으로는 그 친구들과 어울리는 걸 일부러 멀리했었다. 국민학교 때는 피아노 학원을 다니는 아이들과 그러지 못하는 아이들로 자연스레 패거리나 나뉘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것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닌데... 그 당시에는 왜 그런 것들이 나를 주눅 들고 날 서게 했던지... 지금에 와 되돌아보니 아마도 그 당시 나는 그런 식으로 사춘기를 지나가고 있었던 것 같다.

 

이 만화가 나와 같은 시대의 추억을 공유하고 있어서도 재밌었지만 정겨운 그림체 때문에 더 빨려들어가 읽었다. 화려하기 보다는 단순한 그림체가 뭐랄까 꼭 해원과 산호 같다고나 할까. 수줍고 호기심 많고 쉽게 감정에 흔들리면서도 그런 감정을 잘 드러내지 못하는 순진한 열세 살을 마음을 나타나기에 안성맞춤인 그런 그림체이다. 보고 있으면 복잡하게 엉켰던 머릿속이 선 몇 가닥으로 풀어지는 그런 느낌이랄까. 요즘이 아닌 90년대를 표현하기에 참 알맞은 그림체란 생각이 든다.

 

곧 여름휴가를 맞아 바다가 있는 고향으로 내려간다. 지금까지 휴가지는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다. 내가 어렸을 때는 한 번은 친가쪽 친척들과 모여 바다에서 놀았고 한 번은 외가쪽 친척들과 모여 물놀이를 했다. 어른이 되어서는 우리 가족끼리 휴가를 보냈고 여동생이 결혼을 하고 조카들이 생기면서는 동생네 가족과 함께 여름휴가를 보냈다. 이제 11살이 된 조카 은 역시 평생 아니 은이는 엄마 뱃속에 있을 때조차 여름휴가지는 늘 외갓집이었다. 사춘기가 시작된 조카 은에게 이번 여름방학은 물론 앞으로의 여름방학에 좋은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은데 내가 무얼 해줄 수 있을까. 엄마 다음으로 가까운 사이가 이모라는데 서먹해져만 가는 나와 은의 사이를 좁혀보고 싶은데 답을 모르겠다.

 

조카에게도 해원과 같은 첫사랑이 찾아올 테고 그런 비밀스런 감정들을 나눌 진아 같은 친구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아무것도 모른 채 내가 겪어야 했던 미묘한 감정의 소용돌이들을 조카도 겪어야 할 테지만 그래도 좀 더 수월하게 힘들지 않게 상처받는 일 없이 그 시기를 지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엄마가 없으니 분명 어쩔 수 없는 결핍감을 느끼며 사춘기를 보내게 될 조카가 그저 무탈하게 덜 아프게 그 시기를 지나가길 바랄 뿐이다.

 

P.S. 이 리뷰를 한글문서에서 작성하였는데 국민학교라고 치면 자꾸만 초등학교로 자동 전환이 된다. 어느새 국민학교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린 느낌을 한글문서가 깨우쳐주는 느낌적 느낌이랄까. 뭔가 내가 아주 오래 된 사람 같기도 하고...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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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7-29 13: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초등학교...
저도 한글로 작성하니 바로 국.민.학.교.
에서 바뀌네요 그것 참. 달라진 세상 풍경
의 하나인가 봅니다.

어른이는 나이가 들어도 어린 시절에 쌓인
경험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설해목 2019-07-29 15:13   좋아요 0 | URL
자꾸만 자동변환되는 국민학교를 보면서 정말 세상 참 많이 바뀌었구나 싶었네요. ㅋㅋ
그래서 어린 시절의 경험이 중요하다 싶기도 하네요.
몸만 자랐지 마음도 정신도 잘 자라지 못한 어린이네요. --;;

hnine 2019-07-29 16: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설해목님은 어디서 이렇게 숨은 보물같은 책들을 찾아다 보여주시는지.
창비에서 만화책도 나오는군요.
저 국민학교 6학년 기억속에는 키가 큰 애들과 작은 애들로 나뉘었던 것 같아요. 큰 애들은 주로 큰 애들끼리 다니고, 작은 애들은 작은 애들끼리. 저는 물론 작은 애 그룹이라서 큰 애들을 보면 괜히 주눅들고 그랬지요.

저 이 책도 봐야겠어요.

설해목 2019-07-29 17:54   좋아요 0 | URL
사춘기 시작한 조카한테 줄 책 고르다가 이 책을 찜했고 마침 출판사에서 서평단을 하기에 신청했더니 운좋게도 당첨이 되어서 읽게 되었네요. ^^
정말 국민학교때는 참 여러 이유로 끼리끼리 몰려다녔던 것 같아요.
창비에서 의외로 좋은 만화책들이 나오더라구요. 저는 최규석씨 만화를 통해 창비 만화책을 알게 되었네요.
 
어제는 봄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2
최은미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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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지 않은 이 소설을 읽는 동안 많은 책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글을 쓰고 있는, 글을 쓰고자 하는 많은 여성 작가들이 떠올랐다. 오랜 역사 동안 남성에 비해 억압과 차별을 더 많이 받아온 여성은 분명 하고 싶은 말이, 바라는 욕망이, 변화시키고자 하는 의지가 남성보다 더 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남성 위주의 시스템에 맞춰 살아야 하는 여성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걸 이 소설을 읽으며 새삼 깨닫게 되었다.

 

#글을 쓰는 여자

 

, 정수진은 직장을 다니면서 틈틈이 습작을 하고 철마다 응모를 하여서 10년 전에 등단을 하였다. 등단할 당시 예정에도 없던 임신으로 수진은 이미 만삭이었고 수순에 따라 결혼을 하고 터전을 잡고 아이를 낳아 기르며 살림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10년 동안 꾸준히 글을 쓰고 있지만 어떤 결과물도 내놓지 못한 상태다. 스물세 살에 정한 글쓰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한번도 버린 적 없지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살림을 하면서 그 정체성은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스스로를 자책하게 만들고 그래서 자주 흔들린다.

 

나는 10년째 병에 걸려 있었다. 청탁을 받지 못하는 등단 작가라는 저주에,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는 울분에, 장편소설만 당선되면 이 모든 게 한 방에 해결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 고문에, 그리고 양주에. _ p.18~19

 

앞 동에는 공부방이 있고, 나는 일주일에 두 번 거기서 중학생 아이들의 논술을 봐준다. 나머지 시간엔 노트북을 메고 소설을 쓰러 간다. 아무도 읽지 않는 소설을 쓰러 간다. 봄에는 나머지 시간'을 확보하는 게 특별히 어렵기 때문에 틈만 나면 무서운 집중력으로 쓴다. 아무도 읽지 않지만 언젠간 읽힐 수도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쓴다. 고문당하며 쓴다. _ p.27.~28.

 

하지만 나는 안다. 나를 가위눌리게 하는 진짜가 따로 있다는 걸, 나는 일하는 다른 엄마들처럼 경제활동을 하면서 이러고 사는 게 아니다. 다른 작가들처럼 원고료를 받고 책을 내고 사는 것도 아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_p.34

 

쉬면 죄책감이 들어 쉬지 않았다. 쉬지 않고 소설을 썼다. 나는 직장맘도 아닌데 돌 갓 지난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겼으니까. 아이의 평생 인성이 결정된다는 생후 3년이 지나기도 전에 아이를 떨어뜨려놓았으니까. 아이와 둘이 있는 게 힘들어서가 아니라, 그런 게 절대 아니라, 소설을 쓰려고 그런 거니까, 소설을 썼다. 기껏해야 소설을. 청탁받지 않은 소설을. 아무도 원하지 않는 소설을._p.63

 

글을 쓰면서 살겠다고 생각한 스물세 살 이후로 내 정체성은 언제나 글 쓰는 사람이었다. 그것 말고 다른 사람이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 다른 사람이었던 적이 없었다. _p.136

 

수진은 경제적인 활동을 하지 않으면서도 아이와 살림에 전적으로 올인하지 못하는 자신 스스로에게 인색하다. 차라리 돈이라도 버는 직업을 가졌다면 아이와 살림에 소홀해도 가족에게도 사람들에게도 좀 더 떳떳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돈은 벌리지 않고 결과물은 내놓지 못한 채 생산적이지 않은 것 같은 글쓰기를 10년째 해오면서 주위 사람은 둘째 치고 수진 스스로가 자신감을 잃고 때로는 스스로를 자책하고 자신에게 분노한다. 이런 수진을 보고 있자니 자연스레 떠오르는 작가들이 있다.

 

즉 여성이 픽션을 쓰고자 한다면 돈과 자신만의 방을 가져야 한다는 말을 전하는 것뿐입니다. _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펭귄클래식) 중에서..

 

그보다 내게 더 큰 고통으로 남아 있는 것은 그 시절이 내게 심어놓은 공포와 쓰라림이라는 독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원하지 않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 꼭 필요한 것은 아닐 수도 있지만 필요한 것으로 보였던, 걸려 있는 돈이 워낙 중하기에 위험을 무릅쓸 수는 없는 그런 일을 마음에 없는 말을 해가가 비위를 맞추면서 노예처럼 일한다는 것, 그리고 별것 아니지만 소유자에게는 중요하고 세상에 드러내지 않으면 죽는 거나 마찬가지인 재능이 소멸하고 있다는 것, 나 자신, 나의 영혼과 더불어 소멸하고 있다는 생각, 이 모든 것들이 꽃피는 봄날을 갉아먹고 나무속을 파먹는 녹이 되어 갔습니다. _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펭귄클래식) 중에서..

 

책을 쓰는 사람은 언제나 주변 사람들과 분리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고독해야 한다. 저자의 고독, 글의 고독. 자신을 둘러싼 침묵이 무엇인지 자문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집 안에서 한 걸음 옮길 때마다, 하루가 흘러가는 매시간, 밖에서 들어오는 빛이든 켜 놓은 전등 불빛이든 어느 빛에서나, 정말로 그래야 한다. 몸이 처한 그러한 실제의 고독, 그것은 침범할 수 없는 글의 고독이 된다. _ 마르그리트 뒤라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글 중에서..

 

절망을 버티며 쓰기. 아니, 절망을 품고 쓰기. 그 절망의 이름은 모르겠다. _ 마르그리트 뒤라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글 중에서..

 

수진이 등단을 했을 때, 뜻하지 않은 임신 대신 예정에 없던 결혼 대신 좀 더 글쓰기에 매진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면 10년 후의 수진은 스스로 작가라 자부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수진은 남편과 엄마에게서 벗어날 수만 있으면 무슨 짓이라도 할 거라고 말한다. 그만큼 가족이란 존재가 수진의 글쓰기에는 든든한 지원군이 아닌 방해꾼이다. 아이 역시 사랑스럽고 귀한 존재지만 때때로 글을 쓰는 수진을 힘들게 하는 존재이기는 마찬가지다. 아이가 자람에 따라 수진의 역할은 점점 늘어가고 그럴수록 글쓰는 데 써야할 시간과 열정과 집중이 줄어든다. 수진은 그런 상태로 10년째 글쓰기에 매달려 온 거다. 수진의 소설이 10년째 마무리 되지 못하는 건 어쩌면 이런 환경에서는 당연한 것일 수도... 그래서 지금이 중요하다. 자신의 정체성인 글쓰는 사람을 바꿔야 할지도 모르는 결정의 시간. 소설에서도 인생에서도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하는 시간. 더는 이렇게 수동적으로 살아갈 수 없는 최후의 시간. 수진은 자신의 삶에 터닝포인트가 될 그런 봄을 맞고 있다.

 

#무엇을 쓰려고 하는지

 

 

나는 양주 이야기를 10년째 쓰고 있었다. 한 이야기를 10년 동안 붙들고 있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지겹고 힘든 일이었다. 스스로의 능력이 의심스러워지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선우 경사의 답변 속에서 어떤 단어들을 볼 때, 나는 그 단어 하나만 갖고도 양주 이야기를 바로 끝장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른 소설도 얼마든지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_p.17~18

 

아빠는 그 길을 택했구나. 그 길로 간 것이구나. 그러면서 예감했다. 이제부터의 내 인생은 아빠가 한 선택과 아빠가 하지 않았을 수도 있는 선택, 그 둘 사이의 줄타기가 될 거라는 걸. 하루의 대부분을 자살하지 않기 위해 애써야 살 수 있을 거라는 것을. _p.91~92

 

수진은 등단을 한 이후로 10년째 한 가지 주제인 양주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있다. 양주는 수진이 태어나 자란 곳, 수진이 빨리 벗어나고 싶어 안달하게 만들던 곳. 지금 사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고 친정 엄마가 여전히 사는 곳, 수진이 다니던 여고 뒷산에서 아버지가 자살을 한 곳. 엄마의 친한 지인이 사라진 곳. 스물세 살 때 일어났던 일을, 그 당시의 수진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곳. 수진은 그런 양주에 대한 이야기를 10년째 쓰고 있다.

 

글쓰기는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모두에게 하는 행위이다. 혹은 지금은 아무에게도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훗날 독자가 될 수도 있는 누군가에게 하는 행위이다. 너무 민감하고 개인적이고 흐릿해서 평소에는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말하는 것조차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를. 가끔은 큰소리로 말해 보려 노력해 보기도 하지만, 입안에서만 우물거리던 그것을, 다른 이의 귀에 닿지 못했던 그 말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적어서 보여 줄 수 있음을 알게 된다. _ 리베카 솔닛, 멀고도 가까운 중에서

 

존재에 대한 결핍감이야말로 욕망의 원천이다. 결핍이 클수록 욕망도 커진다. 결핍에 대한 감각이 예민한 사람일수록 욕망에 대해서도 예민해진다. 내가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다. 객관적인 정황과 상관없이 나는 늘 무언가 결여되어 있다는 인식에 붙들려서 지냈다. _ 이승우, 소설을 살다 중에서..

 

자살한 아버지를 완벽하게 빼닮은 유일한 사람인 수진은 아버지의 선택을 이해하려 10년째 양주 이야기를 붙들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버지를 닮았으니 자신도 언제 어떤 상황에서 그런 선택을 하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 그래서 자신이 겪은 결핍과 공포를 자신의 딸이 겪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그 불안감을 떨쳐내기 위해서라도 수진은 이번에야말로 꼭 이야기를 마무리짓고 싶은 건지도...

 

하지만 그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털어놓을 수 있는 그런 달달한 이야기가 아니다. 범죄에 대한 이야기이자 삐뚤어진 가족의 초상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픽션의 형태를 갖추고 있지만 수진 자신에게는 결코 완벽한 픽션일 수 없는 경험의 이야기이다. 그렇기에 더욱 수진은 10년 전 양주의 사건을 완벽한 픽션으로 둔갑시켜 모든 이들에게 털어놓고 새출발을 하고 싶은 욕망에 시달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사건을 모를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소설로 읽힘으로써 수진은 그제야 자신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던 과거에서 놓이게 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테니까. 그럴 여지라고 생길 테니까.

 

#새로운 만남

 

나도 모르게 웃었다. 그러면 까맣고 예쁜 내 딸 윤소은이 다가와 엄마 웃어?’라고 물었다. 내가 웃었기 때문에 아이는 안도하는 표정으로 저녁 내내 잘 놀았다. 우리의 저녁은 즐거웠다. 남편이 회식이나 야근을 하면 나는 저녁 시간이 힘들었지만 이젠 덜 힘들었다. 이선우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남편도 모르고 친정 엄마도 모르고 하늘도 땅도 모르는 사이에, 이선우는 그렇게 18층 우리 집으로 들어와 내 아이를 웃게 하고 있었다. _p.80

 

수진은 양주 이야기를 마무리 짓기 위해 집근처 경찰서의 경찰을 만나게 된다. 이름은 이선우. 10년째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고여 있던 수진의 삶에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자신에게 꼬박꼬박 작가라고 말해주는 사람. 자신이 물어보면 성심껏 대답해 주는 사람. 그렇게 선우는 수진의 마음을 봄비처럼 촉촉하게 적시고 수진은 어느새 선우로 흠뻑 젖어버린 마음을 알아챈다.

 

이제껏 함께한 적이 없었던 두 사람을 함께하게 해보라. 때로는 세상이 변할 때도 있지만, 그러지 않을 때도 있다. 그들은 추락해 불에 타오를지도 모른다. 혹은 타올라서 추락하거나. 그러나 때로, 새로운 일이 벌어지면서 세상이 변하기도 한다. 나란히 함께 그 최초의 환희에 잠겨 몸이 떠오르는 그 최초의 가공할 감각을 만끽할 때, 그들은 각각의 개체였을 때보다 더 위대하다. 함께할 때 그들은 더 멀리, 그리고 더 선명하게 본다. _ 줄리언 반스,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중에서..

 

서른아홉 수진의 봄에 한 남자가 걸어 들어왔다. ‘그래도 아직은자신을 여자로 생각할 수 있을 때, 자존감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지는 않은 그때 선우를 만났다. 선우를 통해 글쓰는 사람이라는 정체성도 여자라는 정체성도 더욱 또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선우를 향한 마음이 커갈수록, 선우의 마음을 알아갈수록 또 다른 고민 역시 생겨났다. 수진은 선우와의 만남을 어떻게 마무리 지을까. 소설에서는 명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건, 새로운 사람과 함께한 그 봄날의 만남이 마흔살을 맞은 수진을 다른 사람으로 바꿔놓았다는 사실이다.

 

#최은미작가의 결

 

흙이 사람이 되기 위해 신의 숨결이 필요했던 것처럼 일상이나 현실이 소설이 되기 위해서도 작가의 숨결이 필요하다. 일상이나 현실에 당신의 숨결을 불어넣어야 한다. 말하자면 당신만의 시각, 당신만의 욕망이나 해석. 그런 것들에 의해 너무나 익숙하고 낯익어서 구질구질하기까지 한 우리들의 일상은 돌연 낯설게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낯익은 일상을 낯설게 만들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당신은 소설이라는 걸 썼다고 할 수 있다. _ 이승우, 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중에서..

 

이 소설을 포함해 올해 최은미의 소설들을 모두 읽었다. 단편집 2권과 장편소설 그리고 이 소설까지. 스릴마저 느껴지는 탄탄한 서사의 장편소설에 감탄해서 읽은 작가의 단편소설들은 내가 읽은 요즘 작가들과는 확실히 결이 달랐다. 단편임에도 서사가 풍부하고 그야말로 이야기다운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번에 읽은 중편 분량의 소설에서는 또 다른 작가의 결을 느낄 수 있었다.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나 일상 너머를 집요하게 파고들어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끝내 밀어붙이는 힘. 예를 들면 이런 문장들이 최은미만의 결을 생각하게 했다.

 

젊은 할머니, 내 친정 엄마처럼 젊은 할머니로 보인다. 나는 저 여자가 업고 있는 아이의 엄마일 다른 여자에게 잠시 부러움을 느낀다. 손주를 봐줄 수 있다는 건 생계를 위해 직접 뛰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고 그건 아직 남편과 살고 있다는 얘기라고, 저 나이가 되도록 큰 탈 없이 가정을 유지했다는 얘기라고, 저 여자의 딸일 아이 엄마는 온전한 가정에서 자랐으며 때문에 아이도 잘 키울 거라고, 나는 혼이 나간 젊은 할머니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한다. _ p.37~38

 

나는 아이를 보며 내 엄마 아빠의 결혼 생활을 보았고 엄마가 나에게 했던 분풀이와 탄식을 다시 들었다. 아이는 때때로 내 지난 시간을 들추기 위해 보내진 심판관처럼 느껴졌다. 나는 내 안에서 들끓는 욕들을 아이가 알아챌까봐 겁이 났고 내가 묻어둔 기억들이 아이에게 이식될까봐 두려웠다. 나라는 인간을 형성해온 것들을 완전히 떼어두고 아이를 대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깨달을 때마다 벌을 받는 것 같았다. _p.56~57

 

이 소설은 열린 결말이다. 아직 한 권의 책도 내지 못한 아이를 둔 마흔의 기혼 여성이 어떻게 자신의 글쓰기를 이어갈지 그에 대한 결론은 독자의 몫이다. 그리고 이 소설이 또 재미난 건 추리적인 요소에 있다. 작가가 흘려주는 힌트들을 꿰맞추다 보면 양주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수 있다. 이 소설은 최은미가 쓴 소설이자 나, 정수진이 쓴 소설이기도 하다. 그 이중적인 의미를 염두에 두고 읽는다면 더 많은 의미들이 독자를 생각에 잠기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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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9-05-12 23: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설해목님의 글 한 편으로 몇 권을 읽은 기분이 되었네요.

이 주제에 관해서 저도 몇 권을 읽었지만 제가 할 자격이 있는 말 같은 건 별로 없더라구요.

설해목님의 감상을 읽는 게 적지 않은 도움이 됩니다.

설해목 2019-05-13 09:32   좋아요 1 | URL
소설을 읽고 여러 책들이 떠오르더라구요.
이 주제에 대한 책들 좀더 읽어보고 싶기도 하구,
한편으로는 이 한편의 소설로도 글을 쓰는 여자에 대해서 알아야할 건 다 알게 된 것 같기도 하구요.
이 소설 덕분에 주말 이런 저런 책들 다시 뒤적거리며 보냈네요. ^^

hnine 2019-05-13 05: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최은미 작가 좋아하시는군요. 저도 이 작가에 대해 관심을 가져보는 이유가 될 것 같네요. ^^
청탁받지 못하는 등단작가보다 차라리 등단에 계속 실패하는 예비작가가 나을지. 막상막하일지.
등단 못하고 있던 시절에도 자기는 글 쓰는 걸 멈춘 적이 없었고, 등단 여부에 상관없이 글을 쓰는 사람은 모두 작가라고 생각한다던 구병모 작가 인터뷰도 생각나요.

설해목 2019-05-13 09:37   좋아요 0 | URL
네.. 최근에 읽은 우리나라 젊은작가 중 가장 저랑 잘 맞는 작가입니다. 최은미 작가는..^^
그런 말도 등단해서 책이 그래도 팔리는 작가의 여유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글을 쓰는 이유도 결국 누군가에게 읽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이야기를 하고 싶은 마음만큼이나 클 텐데
오랫동안 결과물을 내지 못하는 건 정말 힘든 일일 것 같아요.
그래서 오랜 기다림 끝에 등단한 작가들 보면 정말 인간승리란 생각이..ㅎㅎㅎ

2019-05-15 1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15 16: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디어 라이프 (반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3
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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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앨리스 먼로의 단편에 빠져들었다. 단정하고 소복한 문체로 빚어내는 삶에 대한 객관적인 시각이 묵직하다. 단편소설에서 이런 큰울림을 받기도 쉽지 않은데 역시 앨리스 먼로구나 싶다. 이어 읽을 단편집들도 기대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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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북소녀 2019-06-03 18: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최근에 <거지 소녀> 읽고나서 다른 작품들도 읽어볼까 기웃거리고 있는데, 다음에는 이 책으로 읽어야겠네요.^^

설해목 2019-06-04 09:20   좋아요 0 | URL
나는 이 책 읽고 <거지 소녀>도 궁금해져서 읽어봐야지 했어. 앨리스 먼로 단편들이 평균 이상으로 다 좋아. ^^
 
다녀올게 : 바닷마을 다이어리 9 - 완결 바닷마을 다이어리 9
요시다 아키미 지음, 이정원 옮김 / 애니북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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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완결!! 9권과 함께 이참에 장바구니에 담아두었던 호즈미 만화 몇 권 더 사서 박스도 득템할테닷!
낱개로 있던 8권의 ‘바닷마을 다이어리‘ 아가들 집장만 해줄 수 있어서 느므 좋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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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북소녀 2019-04-28 13: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완결이라니! 저도 사러 가야겠어요.ㅋ

설해목 2019-04-28 13:09   좋아요 0 | URL
이런 만화는 무조건 소장각! ^^

뒷북소녀 2019-04-28 13: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박! 수납박스를 주다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도 완결되면 이런 이벤트 해줬으면 좋겠어요.ㅋ

설해목 2019-04-29 10:06   좋아요 0 | URL
해주겠지 아마도.. 그래서 나는 아예 안 읽고 안 사고 기다리고 있어... 박스 완전체를 갖기 위해서?! ㅋㅋ
 
원본 초한지 1~3 세트 (전3권 + 가이드북) 원본 초한지
견위 지음, 김영문 옮김 / 교유서가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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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에 실린 옮긴이의말과 해제만 읽어도 <서한연의>를 완역한 <원본 초한지>의 의의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것 같다. 고전 소설을 어떠한 손질도 없이 원전 그대로를 읽을 수 있다는 건 독자에게는 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다. 책 중간중간 삽입되어 있는 한문시와 삽화도 독서의 재미에 한몫한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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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2-23 00: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헉!!!~

설해목 2019-02-23 01:13   좋아요 1 | URL
ㅎ ㅎ 뽀대가 장난 아닙니다!

붕붕툐툐 2019-02-23 08: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흥미가 확 생기네요~ 읽고 싶은 책에 담을게요^^

설해목 2019-02-23 13:47   좋아요 0 | URL
붕붕툐툐님에게도 흥미로운 책으로 남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
즐겁고 행복한 주말 보내셔요. 붕붕툐툐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