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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잠자는 동안에 깨어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사물을 보고 듣는 정신 현상.

2. 실현하고 싶은 희망이나 이상.

3. 실현될 가능성이 아주 적거나 전혀 없는 헛된 기대나 생각.

 

에 관한 사전적 의미는 이렇게 3가지 정도다(네이버사전). 이 영화 제목인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에서 은 위 세 가지 의미를 다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도축장에서 관리직으로 일하는 엔드레와 도축된 고기의 등급을 매기는 검사원으로 일하게 된 신입 마리어의 첫 만남은 그리 인상적일 게 없다. 어느날 도축장에서 교미가루가 분실되는 사건이 발생하여 범인을 알아내기 위해 전직원을 상대로 상담이 이루어지면서 엔드레와 마리어는 자신들이 같은 꿈을 꾼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다. 영화의 시작 장면에서 나오던 눈 덮인 숲속에서 수사슴과 암사슴이 바로 엔드레와 마리어였던 것. 두 사람은 같은 꿈을 꾼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부터 서로에 대해 궁금해지고 좀 더 가까워지고 싶어 한다.

 

가까워지고 싶어 하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마리어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사람들과의 소통을 어려워하는 여자이고 엔드레는 자신의 한쪽 팔을 쓰지 못하는 것처럼 심장 일부가 굳어버린 듯한 남자다. 그런 두 사람이 단지 같은 꿈을 꾼다는 이유로 서로에게 호감을 갖지만 가까워지기엔 현실적인 한계가 있다. 마리어는 엔드레의 감정을 읽지 못할 뿐 아니라 그와의 스킨십마저 두려워한다. 엔드레는 이런 마리어에게 더 다가가기를 포기한다. 엔드레의 변해버린 태도로 인해 그에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던 마리어는 남자와의 만남 그리고 사랑이 자신에게는 실현될 가능성이 아주 적거나 전혀 없는 헛된 기대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결국 마리어는 자살을 시도한다. 하지만 엔드레에게서 온 전화와 그의 고백으로 인해 자살은 해프닝으로 마무리 되었고 두 사람은 꿈뿐만 아니라 몸을 공유하는 사이가 된다.

 

삶보다는 죽음을 더 가깝게 마주하는 일터에서 생기있기란 얼마나 힘이 드는 일인가. 살아 숨 쉬던 소가 한순간에 죽음을 맞아 식품으로 변해버리는, 피비린내가 늘 진동하는 도축장이란 삭막한 곳에서 일하는 엔드레와 마리어에게 매일매일은 그저 주어지기에 살아야할 시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않았을까. 그런 일상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런 일상이었기에 실현하고 싶은 희망 혹은 이상이 바로 꿈으로 나타났던 것일지도... 붉은 피가 아닌 하얀 눈으로 덮인 숲에서 수사슴과 암사슴이 되어 다정하게 서로를 바라보고 함께 숲을 거니는 꿈으로... 그리고 두 사람의 몸이 하나가 된 밤에 그들은 꿈을 꾸지 않았다. 결국 그렇게 꿈은 현실이 되었다.

 

처음 이 영화의 제목만 봤을 때는 같은 꿈을 꾼다는 것을 같은 곳을, 같은 미래를 바라본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지레짐작으로 생각과 가치관 및 바라는 미래상이 비슷한 남녀의 사랑이야기 정도이겠거니 했다. 하지만 영화는 진짜로 똑같은 꿈을 꾸는 남녀의 이야기였고 곰곰 생각해보니 감독은 같은 꿈을 꾼다는 설정으로 정신적으로 완벽한 교감을 나누는 남녀를 이야기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더 나아가 마음의 교류만으로는 부족하여 몸까지 하나가 되었을 때에야 더 이상 꿈을 꾸지 않게 된 두 사람을 통해 영화의 원제에서 알 수 있듯이(원제: on body and soul) ‘진정한 사랑은 몸과 마음 모두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진부하다 못해 고리타분한 사랑의 속성을 진지하게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영화에 나온 노래이다. Laura Marling<What He Wrote>

 

Forgive me, Hera, I cannot stay.
He cut out my tongue,
there is nothing to say.

Love me, oh Lord,
he threw me away.
He laughed at my sins,
in his arms I must stay.

He wrote,
I am broke,
please send for me.
But I am broken too,
and spoken for,
do not tempt me.

Her skin is white,
and I'm light as the sun,
so holy light shines on the things you have done.
So I asked him how he became this man,
how did he learn to hold fruit in his hands,
and where is the lamb that gave you your name,
he had to leave though I begged him to stay

Left me alone when I needed the light,
fell to my knees and I wept for my life.
If he had of stayed you might understand,
If he had of stayed you never would have taken my hand.

He wrote,
oh love, please send for me,
but I am broken too,
and spoken for,
do not tempt me.
And where is the lamb that gave you your name,
He had to leave though I begged him to stay.

Begged him to stay in my cold wooden grip,
begged him to stay by the light of this ship.
Me fighting him, fighting like fighting dawn,
and the waves came and stole him and took him to war.

He wrote,
I'm broke,
please send for me.
But I'm broken too,
and spoken for,
do not tempt me.

Forgive me here, I cannot stay,
cut out my tongue,
there is nothing to save.
Love me, oh Lord, he threw me away,
he laughed at my sins,
in his arms I must say.

We write,
that's alright,
I miss his smell.
We speak when spoken to,
and that suits us well

That suits us well.
That suits me 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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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아침 패터슨과 아내 로라가 잠들어 있는 침대 장면에서 영화는 시작되고 끝이 난다. 알람도 없이 눈을 뜬 패터슨은 침대옆 탁자에 있는 손목시계의 시간을 확인한다. 6시 10분이던가.. 그는 손목시계를 차고 간단하게 아침을 먹은 후 일터인 버스 차고지로 향한다. 패터슨의 직업은 미국 뉴저지 주의 소도시 '패터슨'의 버스 기사이다. 그는 버스 출발 전 운전석에 앉아 떠오르는 것을 노트에 적으며 하루의 일을 시작한다. 점심시간에는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먹으며 폭포를 바라보고 앉아 역시나 머릿속을 맴돌고 있는 것들을 노트에 옮긴다. 퇴근 후 아내와의 저녁식사 후 애완견 마빈을 데리고 산책을 가다가 단골가게인 바에 들러 맥주한잔을 하며 가게 주인과 담소를 나눈 후 집에 돌아와 다시 아내와 잠자리에 든다. 이렇듯 패터슨의 하루는 규칙적이다. 일어나서 일터에 나가고 시간 날 때마다 떠오르는 심상을 노트에 적고 퇴근해서 애완견을 산책시키고 단골바에 들러 맥주한잔을 하고 잠자리에 드는 것.  그런가하면 그의 아내 로라의 하루는 어떤가. 남편의 모닝키스를 받으며 좀더 잠을 자다가 일어나 자신의 취향인 흑백으로 집을 꾸미는 것으로 대부분을 시간을 보내다가 남편이 돌아오면 저녁을 함께 먹고 잠자리에 든다. 로라 역시 특별할 것 없는 하루하루를 보낸다.

물론 멀리서 보면 패터슨의 규칙적인 일주일에는 특별한 변화가 없어 보이지만 그 하루하루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늘 작은 변화들이 있기 마련이다. 패터슨이 운전하는 버스의 승객들은 매일 다른 사람들이다. 패터슨이 저녁에 들르는 바에서 마주치는 사람과 상황도 매번 다르다. 매일 먹는 점심(도시락 통에 붙은 아내의 사진도 매일 바뀐다)과 저녁 메뉴가 다르고, 끊임없이 흑백으로 집안을 새롭게 꾸미는 로라 덕분에 집 역시 매일 조금씩 달라져 있다. 어느 날에는 버스가 고장나서 난감한 상황이 생기는가 하면 자신의 비밀노트에 시를 쓰는 소녀를 만나 그녀의 자작시를 듣기도 한다. 아내가 온라인 주문한 할리퀸 기타로 인해 기타를 치며 노래부르는 아내의 모습을 감상하기도 하고, 토요장터에서 아내의 컵케이크가 대박나서 둘이서 외식을 하고 영화를 보는 데이트를 즐기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패터슨이 노트에 적고 있는 시가 매일 조금씩 달라진다.

주말 저녁 패터슨과 로라가 외출을 하고 돌아와보니 늘 지하에 두던 걸 실수로 소파에 두고 갔던 노트가 갈기갈기 찢어져있다. 범인은 마빈. 혼자 보기 아까우니 늘 복사본을 만들어 놓으라고 말하던 로라의 말을 실행에 옮기기 전에 이미 노트는 복구 불가능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 이 상황에 대해 화를 내거나 속상해 하거나 하는 패터슨의 큰 감정변화를 읽을 수는 없지만 그를 위로하는 로라의 태도를 보면 패터슨이 얼마나 상심했는지를 알 수 있다. 다음날 패터슨은 혼자 '패터슨'을 산책하다가 우연히 일본 시인을 만난다. 일본 시인은 패터슨에게 당신은 시인입니까? 라고 묻지만 페터슨은 아니라고 자신은 버스 기사라고 답한다. 일본 시인은 자신이 좋아하는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 시인이 나고 자라고 평생을 산 패터슨이란 곳이 궁금해서 이곳에 왔다고 말하며 패터슨에게 빈 노트를 한 권 선물한다. 그리고 하는 말. "때론 텅 빈 페이지가 가장 많은 가능성을 선사하죠."


다시 월요일을 시작한 패터슨은 평소처럼 빈 노트에 시를 적으며 하루의 일과를 시작할 것이다. 그렇게 시로 가득해진 비밀 노트는 복사본을 만들어 둘 테고 언젠가는 시집을 출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패터슨'시의 버스 기사일 테고 로라와 살며 어쩌면 쌍둥이를 낳아 기르는 아빠가 되어 있을 수도 있다. 삶의 큰 틀은 쉽게 바뀌지 않을 테지만 매일매일은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늘 새로울 것이다. 찰리 채플린은 '삶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라고 했다. 영화 <패터슨>을 보고나니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삶은 멀리서 보면 지루하지만 가까이서 보면 늘 새롭다.' 라고...


영화는 평범하고 지루하다 느껴지는 일상을 새롭고 아름답게 만드는 비법을 알려준다. 패터슨이 시를 쓰며 자신을 둘러싼 일상을 새롭게 발견하듯, 로라가 자신의 취향을 매번 새로운 발상과 방법으로 일상에 접목하듯, 매순간을 의식하며 살 것! 내가 이 영화에서 얻는 비법은 바로 이것이다.  의식하는 방법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시를 쓸 수도 있고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을 수도 있다. 무언가를 만들 수도 있으며 악기로 연주할 수도 있다. 그 방법이 무엇이든 순간순간을 의식하게 된다면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는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낸다면 삶은 더이상 지루한 전쟁터가 아니라 즐거운 놀이터일 것이다.


4년을 함께 산 동생이 이번주에 다시 고향인 삼척으로 가게 되었다. 패터슨 시보다도 더 작고 조용한 소도시인 삼척에서의 지루한 일상이 싫어서 끝끝내 가기를 꺼려했던 동생이었건만... 척박하고 냉정한 서울 생활에 학을 떼고 선택한 고향에서의 제2의 삶.. 과연 동생은 그 삶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동생에게 이 영화를 한번 보라고 말하고 싶지만 아직은 그에게 이 영화가 와닿기에는 조금 무리일 듯싶다.  부디 동생이 되도록 빨리 자신이 있는 그 곳에서 삶을 즐길 수 있기를 바랄뿐이다.

영화의 감독인 짐 자무쉬는 '이 영화의 영감을 얻는 것이 25년 전 도시 '패터슨'을 여행하면서 였다 '라고 말한다. 그리고 영화에서도 등장하는 시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에 대해  책 <가지 않은 길 - 미국 대표 시선>(창비, 2014)에서는 '일상 언어와 대중문화, 평범한 미국인의 삶을 중시 했으며, 말기작 '패터슨'은 미국 소도시와 보통 사람들을 다루고 있는 대표적인 미국적 서사시이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영화에서 패터슨은 '시를 번역하는 것은 우비를 입고 샤워를 하는 것과 같다.' 라고 말하지만 어쩌랴. 영시를 원문 그대로 즐길 수 없는 나로서는 이 영화때문에 알게 된 시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번역된 시라도 읽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싶은 것을... <가지 않은 길>에 실린 시 중에서 한 편을 옮겨적는다.

<봄과 모든 것>

 

- 윌리엄 카롤스 윌리엄스

 

전염병동으로 가는 길가

북동쪽에서 밀려온 파랗고

얼룩덜룩한 구름의 일렁임

아래 - 차가운 바람. 그 너머

서 있거나 쓰러진 마른 잡초로 누르스름한

넓고 황량한 진흙투성이 들판

 

군데군데 물웅덩이

드문드문 키 큰 나무

 

길을 따라 쭈욱 불그스름한

자줏빛, 갈라지고, 꼿꼿한,

잔가지 뒤엉킨 덤불과 조막만한 나무들

그 밑에 시든 갈색 이파리들

잎이 다 떨어진 덩굴들 -

 

생기 없어 보이지만, 느릿느릿

멍한 봄 다가온다 -

 

모든 것은 새로운 세계로 들어선다

발가벗고, 차갑게, 들어선다는 것 외엔

아무것도 확실치 않은 채. 주위엔 온통

차갑지만 친근한 바람 -

 

오늘은 풀, 내일은

빳빳이 곱은 야생 당근 이파리

 

하나하나 뚜렷해진다 -

생기 돋는다. 명료함, 이파리의 윤곽

 

이제 삭막하지만 위엄 있는

등장 - 조용히, 깊숙한 변화가

시작되었다. 뿌리내려, 그들은

움켜잡고 깨어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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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는 빠짐없이 봤다. TV용으로 제작된 드라마까지 찾아볼 수 있는 건 모두.. 그러니 당연히 이번 신작도 망설임없이 봤다. 기존에 만들어오던 가족을 테마로 한 영화와는 거리가 있지만 "<세 번째 살인>은 보고 나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은 작품입니다. 좋은 의미로 관객에게 멋진 배신감을 주고 싶었습니다."라는 고레에다 감독의 말처럼 적어도 내게 이 작품은 멋진 배신감을 확실히 심어주었다.


살인범 미스미는 자신이 일하던 공장 주인을 천변에서 패스너로 쳐서 죽이고 불을 질러 사체를 훼손하여 강도살인죄로 기소된 상태다. 그는 이미 경찰과 검찰에서 자신의 죄를 모두 자백한 상태에서 변호사 시게모리를 만나게 된다. 시게모리는 미스미가 자백은 했지만 어떻게든 자신의 의뢰인에게 유리하게 공판을 이끌어가보려 한다. 하지만 시게모리가 미스미를 접견할 때마다 그의 진술은 번복이 되고 그리고 피해자의 가족인 부인과 딸마저 뭔가를 숨기는 것만 같다.


미스미는 처음 그러니까 경찰과 검찰 수사에서는 자신의 살인을 인정한다며 자백했다. 왜냐하면 자백을 하면 사형만은 면하게 해주겠다고 피의자를 설득했기에..그리고 처음 만난 변호사와 접견을 했을 때조차도 같은 이유로 자신의 범행을 자백했다. 하지만 시게모리 변호사와 접견이 거듭되면서 그의 진술은 조금씩 번복이 되더니  결국은 자신은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주장을 한다. 그리고 피해자의 딸인 사키에 역시 미스미의 살해 동기는 강도살인이 아닌 전혀 다른 이유라고 진술을 하고 있다. 이로써 범인의 자백에 의해 단순하게 결론이 날 것같았던 살인 사건은 복잡해졌다.


자백이 범행의 유일한 증거이던 사건에서 범인이 자백한 것을 철회하고 살인을 부인한다면 처음부터 다시 사건을 조사하는 게 법을 모르는 사람이 봐도 상식적인 절차일 텐데도 결국 미스미의 살인 사건은 자백을 부인했음에도 공판이 그대로 진행되어 그에게 사형을 선고하면서 어떠한 공방도 없이 심판이 내려진다. 판사와 검사 그리고 변호사가 모여서 소송경제를 운운하며 몇 번의 눈짓을 주고받고서 내린 결론이란, 바로 한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사형'이었다.


영화는 끝까지 이 살인사건의 살해 동기와 그리고 진범이 누구인지를 밝히지 않았다. 공장주인을 죽인 진짜 살인범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미스미를 '죽이려는' 범인은 누구인지 알 수 있다. 사건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해야 할 검사도, 의뢰인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해야 하는 변호사도, 한 사람에게 내려지는 심판의 무게를 제대로 느끼고 가늠해야할 판사도 미스미 사건에서는 모두 직무유기였다. 불리는 이름만 다를 뿐 '법조계'란 한 배를 탄 그들에게 한 사람의 목숨은 그렇게 하찮은 거였다. 이 판결대로 미스미에게 사형이 집행된다면 그의 진범 여부와 상관없이 그는 세 번 살해당한 것이다. 검사, 변호사 그리고 판사라는 법조계에 의해!! 

살인자와 같은 범죄자는 태어날 때부터 정해지는 것인지, 변호사란 승소를 위해서라면 의뢰인에 대한 이해와 공감 그리고 믿음같은 건 가질 필요가 없는 건지, 심판도 사람이 하는 이상 오판이란 가능성을 염두에 둔다면 사형제도는 없어져야 하는지, 썩은 물과 다름없는 지금 법조계의 사람들에 의해 사람들의 목숨과 삶이 좌지우지되는 게 과연 옳은 건지...고레에다 감독의 말처럼 이 작품은 많은 이야기거리를 던져 주고 있다.

법정에서 사키에는 시게모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 곳에서는 아무도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고...  법정에서조차 진실을 말하지 않고 진실이 통하지 않는 시대에 과연 법을, 법조인을 믿어야 하는 걸까. 사형이 내려질 것을 알면서도 미스미는 왜 처음과는 다르게 살인을 부인한 걸까. 미스미의 진술 번복이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를 곰곰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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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8. 12. 영화 <프란츠>를 봤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독일의 한 마을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프란츠. 이십대 초반의 독일청년. 의사 아버지와 어머니의 외동아들. 안나라는 약혼녀가 있다. 전장에서 프랑스군의 총에 맞아 전사했고, 더 이상 그가 없는 집에서 약혼녀 안나는 그의 부모와 함께 살고 있다. 어느날 그들에게 프란츠가 프랑스에 있을 때 사귄 친구라며 프랑스 청년 아드리앵이 찾아온다. 아들의 빈자리로 찾아든 아들의 친구에게 프란츠 부모는 물론 안나까지 얼었던 마음을 풀게 된다. 하지만 아드리앵은 죄책감에 시달리다 안나에게 자신이 전장에서 마주친 프란츠를 죽은 군인이었다고 고백하고 그의 가족들에게 용서를 빌러 왔다고 솔직하게 말하지만 안나는 부모님에게는 자신이 말해겠다며 아드리앵을 프랑스로 돌려보낸다. 안나는 프란츠의 부모님에게 아드리앵의 진실을 감추고 무거운 비밀을 간직한 채 회색빛 일상을 보내다가 자살까지 시도하게 된다. 자신이 아드리앵을 좋아한다는 걸 깨달은 안나는 아드리앵을 마음에 들어하는 프란츠 부모님의 응원 하에 아드리앵을 만나러 프랑스로 가게 되고 우여곡절 끝에 아드리앵의 고향집까지 가게 되어 아드리앵과 만난다. 하지만 그의 곁에는 어릴 때부터 같이 자라고 곧 결혼을 할 약혼자가 함께 살고 있다. 프란츠와 안나와 같은 연인이... 결국 안나는 아드리앵을 포기하고 돌아간다. 영화는 루브르 박물관에 걸린 마네의 <자살>이라는 그림 앞에 앉아 있는 안나의 모습으로 끝이 난다.

 

 

에두아르 마네, <자살> 혹은 <자살한 남자>

   

이 영화를 보면서 떠올랐던 영화가 있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도 같고 전장에 나간 약혼자로 인해 특별한 여정을 하는 여자가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떠올랐던 영화 <인게이지먼트>. 프랑스의 작은 마을에 사는 마띨드는 어릴적에 앓은 소아마비로 인해 한쪽 다리가 불편하다. 그런 그녀에게 먼저 말을 걸어준 소꿉친구이자 약혼자인 마네끄가 전장으로 끌려간 후 군형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군법재판소에 넘겨서 사형을 선고받고 비무장 지대에 버려지다시피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된다. 하지만 마띨드는 자신의 예감을 믿으며 그가 아직 살아있다고 확신하고 그를 찾아 나선다. 탐정을 고용하고 그 당시 약혼자와 함께 했던 군인들을 찾아다니며 마네끄의 생사를 쫓던 그녀는 결국 그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마띨드가 기억을 상실한 채 다른 사람의 신분으로 살아가고 있는 약혼자를 만나는 장면에서 영화는 끝난다.

 

 

두 영화는 전쟁의 끝에 희망을 찾는 여자들의 모습으로 끝이 난다. <프란츠>의 안나는 루브르 박물관에 걸린 마네의 <자살>이란 그림 앞에서 독백한다. 이 그림이 삶의 의지를 갖게 해준다고.. 사랑하는 약혼자를 잃고, 그 약혼자로 인해 알게 된 또 다른 남자 아드리앵과도 맺어지지 못한 안나가 다시 느끼게 된 삶의 의지란 무엇일까. 프란츠를 잃고 아드리앵 마저 떠나버리고 더 이상 슬픔을 견딜 수 없다면서 강물로 걸어 들어갔던 안나는 폐허가 된 곳에서도 삶은 이어져야 한다는 걸 두 번의 사랑으로 깨닫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약혼자를 잃고 그를 죽인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지만 그 남자와도 맺어질 수 없었음에도 또 다른 사랑은 찾아올 거라는 희망. 안나는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랑해서는 안 되는 아드리앵을 사랑함으로써 사랑에 대한 가능성을 본 것인지도 모른다. 삶이 계속되는 한 사랑은 어디에나 있다는 가능성 말이다.

 

<인게이지먼트>의 마띨드는 결국 기억을 잃고 신분마저 바뀌어버린 약혼자를 찾아낸다. 영화 내내 약혼자의 생존에 대해서 희망을 놓지 않던 마띨드의 모습은 사랑하는 사람을 보고싶다는 간절함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를 찾기 위해서 했던 적극적인 행동들은 혼란한 시대에는 여자가 오히려 더 강인할 수도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이런 모습은 자신의 애인을 죽게 만든 관련자들을 찾아다니며 죽음으로 복수를 하는 여자(마리옹 꼬디아르 분)에서도 잘 나타난다.]. 마네끄는 약혼자 마띨드를 살아서 다시 만나기 위해 적극적으로 살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신줄을 놓음으로써 그저 자신 안으로 대피했을 뿐. 그런 그를 찾아낸 건 결국 마띨드의 강한 의지였다. 전쟁 후의 폐허 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고 강한 의지로 삶을 이어가는 건 결국 여자들의 몫이었는지도 모른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들을 대신해서...

 

두 영화 모두 주인공인 두 여자의 연기가 강한 인상을 남긴다. 특히 <프란츠>의 안나는 마음이 조금씩 변해가는 것을 눈빛과 작은 행동만으로도 잘 표현했다. <인게이지먼트>의 마띨드는 특유의 발랄함으로 영화에 생동감을 더해주었다. 전쟁과 사랑이라는 같은 소재 심지어 같은 시대를 배경으로 이야기 하고 있으면서도 두 영화(혹은 두 여인)이 관객에게 주는 느낌은 사뭇 다르다. 그러면서도 전해지는 감동의 무게는 비슷하다 랄까. 이런 게 영화의 힘은 아닌지 새삼 그런 생각을 해본다.

 

두 영화가 인상 깊게 남는 또 다른 이유는 영화의 색감 때문이다. <프란츠>는 흑백톤으로 흐르다가 잠깐씩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칼러 장면으로 바뀐다. 그런가하면 <인게이지먼트>는 전체적으로 따뜻한 느낌을 주는 세피아톤의 색감을 사용하여 참혹한 전쟁 장면이 많았음에도 큰 거부감 없이 볼 수 있었다. 흑백과 세파아. 둘 다 과거라는 시간에 어울리는 색감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둘 다 과거의 색이되 두 여주인공의 모습과 심경을 대변하는 것으로 각 영화가 선택한 색감은 적절한 선택이 아니었나 싶다

 

두 영화는 전장에 사랑하는 사람을 보낸 젊은 여자가 주인공인 사랑이야기지만 1차세계대전이 배경인 만큼 전쟁에 대한 민낯을 보여주기도 한다. 프란츠의 아버지는 자신 또래들이 모인 한 모임에서 말한다. 우리의 자식은 프랑스인이 죽인 게 아니라 우리 아버지들이 죽인 거라고. 그들의 손에 무기를 쥐어주고 전장으로 내보낸 건 우리 아버지들이라고. 우리 아들들이 죽으면 저쪽 아버지들이 축배를 들고 저쪽 아들들이 죽으면 우리가 축배들 들었다고. 결국 우리 모두는 아들들의 죽음에 축배를 드는 그런 아버지일 뿐이라고... 그런가 하면 <인게이지먼트>에서 징집당한 한 남자는 동료 군인들에게 이런 말로 설득을 하려고 하지만 실패한다. 자신 같은 하층민들이 서로를 죽일 대포를 만들면 부자들이 그걸 팔아 돈을 번다고... 두 영화는 말한다. 전쟁은 그 어떤 편도 이득일 수 없다고, 결국 부자 같은 몇몇 사람들의 배만 불리는 악 중의 악이라고. 전쟁의 잔혹함을 대놓고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관객들에게 제법 강한 인상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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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17-08-13 18: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프란츠가 그런 내용이었구나....

희선 2017-08-24 02: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화 시대배경은 같아도 하나는 독일이고 하나는 프랑스네요 독일 사람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걱정이 앞서는... 그렇다 해도 살아가겠죠 전쟁이 일어나면 좋은 곳은 하나도 없겠습니다 그걸 알면서도 할 때도 있지 않나 싶어요 전쟁이 일어나면 가장 밑에 사람이 힘들겠습니다 하지 않으면 안 될 테니... 그럴 때라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어려울지도 모르겠네요


희선
 

일본영화와 일본드라마를 좋아한다. 파고가 심한 바다보다는 조용히 흐르는 강을 닮은 잔잔한 이야기의 흐름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특히나 수많은 인간관계에 대한 이야기 중에서도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섬세하면서도 요란하지 않게 보여주는 데는 개인적으로 일본영화나 일본드라마만한 것이 없는 것 같다. 지난 주말에 본 영화 <행복 목욕탕>은 사실 아무런 기대 없이 갔다가 연속으로 봤던 다른 영화보다도 더 큰 감동을 받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는 모두 보았다. 전작을 할 수밖에 없는 그런 매력을 가진 감독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행복 목욕탕>의 감독인 나카노 료타가 차세대 고레에다 히로카즈로 불린다고 한다. 영화를 보고나니 그렇게 불릴 만 하구나 싶다. 사실 최근에 본 고레에다 감독의 <바닷마을 다이어리><태풍이 지나가고>보다 내게는 이 영화가 더 오래 기억에 남을 가족영화이자 일본영화가 될 것 같다.

 

영화와 동명의 시나리오 소설도 국내에 출간이 되었다. 그 소설의 책소개에 소개된 이 영화에 대한 소개글을 옮겨본다.

 

나카노 료타 감독이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한 상업영화 데뷔작인 동명 영화 <행복 목욕탕><종이달>로 국내에도 알려진 미야자와 리에가 긍정적 사고의 대인배 엄마 역할을, 오다기리 죠가 사고뭉치에 서툰 아빠 역할을 맡아 화제가 됐다. 사춘기를 앞둔 자녀가 겪게 되는 부모와의 갈등과 평범하지 않은 모녀의 따뜻한 사랑으로 많은 평단의 공감을 얻으며 제40회 일본 아카데미 영화상 최우수 여우주연상과 최우수 여우조연상을 수상했고, 엄마와 딸 역할을 맡은 두 여배우가 연기상 수상 15관왕을 기록, 화제를 모았다. 이외에도 2016년 일본 개봉 이후 유서 깊은 각종 일본 영화제에서 연기상과 작품상을 휩쓸어 각종 부문 29관왕을 기록했다.

국내에서는 지난 106일 개막한 제21회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영화의 창섹션에 공식 초청되어 관객들에게 큰 감동과 여운을 남기고, 오는 2017323일 정식 개봉을 앞두고 최고 기대작으로 주목을 모으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정식개봉이 지난주에 되었는데 서울에서는 이수 아트나인 한 곳에서만 상영을 한다. 이렇게 좋은 영화가 상영관이 하나밖에 없다는 것에 사실 좀 충격을 받았다. 영화 수입업자들의 영화 선택 기준이란 과연 무엇일까. 영화를 좀 본 사람이라면 고레에다 감독의 가족영화들에 버금가는 영화라는 걸 한눈에 알아볼 텐데 왜 상영관이 이렇게나 적은지... 직접 영화를 본 관객으로서 더욱 이런 현실이 안타깝다.

 

<행복 목욕탕>은 따뜻한 가족영화이다. 가족의 테두리를 어디까지 두어야 하는지를 스스로에게 묻게 되는 영화이다. 버림이 있고 죽음이 있어 슬프지만 한편에는 성장이 있고 용서가 있으며 받아들임 있어 마음 따뜻해지는 영화이다. 무엇보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인 행복 목욕탕안주인이자 아이들 엄마의 장례식을 쉽게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장례식은 죽은자의 몫이 아니라 산자의 몫이라지만 오직 죽은자를 위해, 죽은자에게 가장 어울리는 장례식을 행했던 가족들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져 울면서도 미소 지으며 극장을 나왔었다.

 

며칠 전 아버지와 긴 통화를 했다. 마흔이 넘은 딸이 시집갈 생각은 없고 집과 직장을 오가는 추처럼 보내는 것이 안쓰러우셨는지 아니면 한심해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급기야 내게 이런 말씀까지 하셨다. “지금이야 병들고 곁에 아무도 없으면 그냥 죽어버리면 되겠다 싶겠지. 그런데 막상 병에 걸리고 나면 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할 거다. 내 친구들을 보니 다 그래. 나도 그렇고..”

 

이 얘기를 듣는 순간 뭔가 은밀한 비밀을 들켜버린 것처럼 전화기 앞인데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빠는 아시는구나. 눈치 채고 계신 거였구나. 내가 쉽게 내 목숨을 내놓고 싶어 한다는 걸... <행복 목욕탕> 엄마 역시 더 이상 가망이 없는 병임을 확인하고 남은 몇 개월을 연명치료 하는데 쓰는 대신 가족들을 위해 알차게 힘차게 보낸다. 하지만 끝내 병이 악화되어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해서는 울면서 살고 싶다고 말한다. 그 간절함이 고스란히 전달되었던 그 때의 느낌이 아빠와의 통화에서 갑자기 되살아났다. 그래 어쩌면 나도 살고 싶다고 간절하게 바라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죽음이 코앞에 닥쳐보지 않았으니까 나조차 나를 모를 일이다.

 

비오는 금요일이다. 약속 없는 금요일에는 동네 목욕탕에 가는 게 일상이 되어버렸다. 금요일 저녁 목욕탕에는 사람이 거의 없다. 9시를 넘기면 나 혼자 있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럴 때면 탕 속에 들어앉아 천장에 맺힌 물방울을 세곤 한다. 목까지 따뜻한 물에 잠긴 채 차가운 물방울이 이마에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기도 한다. 그야말로 금요일 저녁 내가 머무르는 곳은 조용한 행복이 느껴지는 목욕탕이다.

 

남녀노소 누구나 할 것 없이 목욕탕에서는 알몸이다. 알몸으로 같은 탕에 들어가고 같은 대야와 의자를 사용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무슨 거짓이 있고 어떤 위험이 있으랴. 그저 뭐하나 걸치지 않은 갓 태어났을 때의 나를 상상해보며 인간으로서 나는 혼자가 아님을 잠시나마 느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우리가 목욕탕에 가야할 이유로는..... <행복 목욕탕> 리뷰를 쓴다는 것이 어쩌다 목욕탕 예찬이 되어버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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