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까지 희미하게
정미경 지음 / 창비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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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동생이 좀 아프다. 10년 동안 워킹맘으로 열심히 살아오던 동생이 자신과 관련된 모든 것에 대해 불안해한다. 심지어 자신조차도. 무엇이 동생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지난 주말 동생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알게 되었다. 동생을 이렇게 만든 원인을...

 

공은 무언가를 끊임없이 좇으며 살아왔다. 자잘한 가지를 다 쳐내고 보면 그 무언가는 명료했다. 인정과 안정. 그 단순한 것이 공에겐 쉽지 않았다.”_p.25 <>

 

인정과 안정, 동생 역시 이 둘에 절실히 목을 매며 살아왔고 공이 그랬듯 동생에게도 쉽지 않았나보다. 승진하면서 새롭게 맡게 된 일은 익숙지 않아 버거웠고 가족들과 떨어져 지내야 하는 상황까지 겹쳐 몸과 마음이 망신창이가 된 동생은 직장인으로서도 엄마로서도 아내로서도 며느리로서도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 같다고, 그동안 쌓아왔던 안정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 같다고...

 

공은 자신의 욕망에 전력으로 매달림으로써 불안을 유예하는 쪽이었다. 금희의 방식은 반대였다. 미리 내려놓음으로써 불안의 싹수를 자르는 식이었다.”_p.36 <>

 

공처럼 최선을 다해 욕망에 매달리지도 그렇다고 금희처럼 아예 모든 것을 내려놓지도 못한 채 희망과 절망 사이를 하루에도 몇 십 번씩 오가는 동생을 보는 건 안쓰러움을 넘어 괴롭다. 최선을 다해 살아왔으면서도 불안에 좀 먹히고 있는 동생이 끝내 인정과 안정을 찾지 못한 채 불안에 완전히 먹힐까봐 두렵다. 뭐 그리 대단하게 살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면서 삶의 작은 균열에 마치 세상이 멸망이라도 하는 듯 정신줄을 놓아버리려는 건지...

 

제 몸 안에는 불안이라는 장기가 하나 더 있어요. 평소엔 의식할 수 없어요. 근데, 오늘은 색채를 띠는 게 또렷이 느껴져요. 왜 과일도 익을수록 색깔이 진해지잖아요.”_p.61. <엄마, 나는 바보예요>

 

그래, 어쩌면 불안이라는 장기는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동생도 나도 공도 금희도 중산층으로 살아간다고 믿고 있는 정신과 의사 조 역시. 불안이 색채를 또렷하게 띠는 그 날이야 저마다 다르겠지만 불안 없이 사는 사람이 현대 사회에 존재하기나 할까. 불안을 조장해서 불안을 상품으로까지 만드는 시대에 불안이라는 장기가 하나쯤 더 달리는 건 현대인의 당연한 체질 변화일지도. 다만 누구는 체질 변화를 자연스레 받아들이고 그에 빨리 순응하는가 하면 또 누군가는 그렇지 못해 결국 몸과 마음이 병들기도 하고. 사는 게 다 그런 거다.

 

우리를 괴롭히는 대부분의 질병들은 알고 보면 우리가 만들어놓은 여러 가지 시스템에 우리 몸과 영혼이 미처 적응하지 못해서 생기는 부적응의 결과죠.”_p.62 <엄마, 나는 바보예요>

 

동생을 괴롭히는 질병은 쉬이 나을 것 같지 않다. 직장을 휴직함으로써 인정과 안정에서 튕겨져 나왔다고 믿고 있는 동생은 자신을 삶의 부적응자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아무리 괜찮다고 말을 하고 모든 게 불안하기만 한 나에 비하면 너에게 닥친 이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조목조목 따져 설명을 해도 자신이 믿는 인정과 안정에 속하지 못하면 안 되는가보다. 사는 게 뭐라고...

 

오줌 누고 미워하고 노래하고 사랑하는 것, 그것들을 빼면 삶에서 뭐가 남을까.”_p.188 <장마>

 

정말 사는 거 별거 없는데...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고, 울다가 웃기도 하고, 노래하고 춤 추며 사랑하다 미워하기도 하면서 그렇게 수많은 것들과 만나고 헤어지기를 수시로 반복하는 게 삶인데. 영원히 움켜잡을 수 있는 건 애초에 없다는 걸 깨닫는 것만으로도 한결 가볍게 살아질 텐데. 동생에게 그저 이 단순한 삶의 이치를 전하고 싶었는데 잘 전해지지 않은 것 같다. 어쩌면 나조차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는 별개로 불안해하며 살고 있기에 동생에게 제대로 된 확신을 주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그 확신을 심어줄 수 있는 사람은 결국 동생 곁에 늘 함께하는 남편과 가족들인데 그들의 동생에 대한 사랑이 극복이 아닌 인정이기를...

 

2.

 

사랑, 사랑하는 사이라면 다름이란 극복하는 게 아니라 인정해야 하는 게 아닌가.”_p.125 <목 놓아 우네>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에 민감해지는 게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처음에는 닮은 모습에 금세 친해졌다가도 조금씩 알게 되는 나와 다른 모습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게 인간관계의 본질인지도. 그 많은 인간관계에서도 최고로 치는 사랑, 그 사랑에서조차 다름을 인정이 아닌 극복해야할 대상으로 바라보는 남녀 사이를 사랑이 아니면 무어라 불러야 할까.

 

세상에는 사랑이라는 단어에 꼭 들어맞는 관계는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_p.126 <목 놓아 우네>

 

없을지도 모른다 정말로. 내가 맺어왔던 관계들을 돌아봐도 나는 그것들을 사랑이라 부르지 않는다. 매번 다른 모습으로 마주하게 되는 관계에서 무얼 사랑이라 부를 수 있는가 말이다. ‘당신은 사랑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나요?’ 어느 향수 광고에서 마주친 이 질문을 며칠 동안 붙들고 있다. 사랑이 뭔지 모르겠는데 도대체 무얼 할 수 있을까. 떠오르는 지난 날이 목 놓아 울고 싶을 정도로 그리우면 그게 사랑인 걸까. 지금의 관계가 흩어져 버릴까봐 불안해 잠 못 이루면 그게 사랑인 걸까. 정말 모르겠다. 무얼 사랑이라 하는지...

 

액정 속의 그는, 보고 싶은데 보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어떤 것인지 알게 해주었다. 잠들기 전 외로운 욕정을 혼자 해결하는 순간에도 이 느낌은 여전해서 가슴으로 느끼는 오르가슴이 어떤 것인지 알게 해주었다.”_p.153 <목 놓아 우네>

 

어떤 고통의 감각을 고스란히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심을 고통스럽게 했다. 한가지 사실만 빼곤 그에게 놀랍도록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냈다고 생각했으나 진짜 자신은 그에게 말했던 것들과 말하지 못했던 것들 사이에 있다는 생각을 내내 하고 지냈다. _p.158 <목 놓아 우네>

 

사랑은 잘 모르겠지만 심의 이 심정은 고스란히 내 것인 것만 같다. 자신을 놀랍도록 솔직하게 다 드러냈음에도 막상 현실의 나는 거기에 없다. 가짜를 내세우고 나서야 진짜를 보여줄 수밖에 없는 자신을 생각하면 목 놓아 울고 싶어진다. 어차피 보지 못할 관계라는 걸 알면서도 설레고 그립다가 끝이 올까봐 두렵다. 이런 관계를 일컫는 단어는 뭘까. 언젠가는 그 단어를 찾아낼 수 있을까.

 

누군가와 헤어지고 나서야, 전화를 끊고 나서야, 들어줄 사람이 없을 때에야 속에 갇혀 있던 말들이 터져나와 저를 아프게 찔러댔다.”_p.169 <장마>

 

왜 매번 한 템포씩 느려서 내가 나를 아프게 하는지... 관계 속에 있을 때는 상대만을 생각하느라 상대에 집중하느라 정작 나를 잊고 있다가 상대가 사라지고 나서야 나를 돌아보며 하게 되는 말들. 받아줄 사람 없어 결국 되돌아와 나를 아프게 찔러대는 메아리들.

 

지나온 삶에서 우연히 다가온 따뜻하고 빛나는 시간들은 언제나 너무 짧았고 그 뒤에 스미는 한기는 한층 견디기 어려웠다. 그랬다 해도, 지금 이 순간의 따뜻함을 하찮게 여기고 싶지 않다.”_p.189 <장마>

 

관계의 끝에 혼자 남아 자신이 퍼붓는 말에 스스로 상처입고 그 상처가 어쩌면 평생을 뒤따른다 해도 그래도 관계 속에 있는 그 순간은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 그 마음이 있는 한 사람들과의 관계는 계속 될 테고 쌓이는 경험으로 요령껏 자신을 잘 붙들며 살 테지. 그런 게 인생이지 싶다.

 

3.

 

그거야 시적 허용이죠. 옆에 있었다면 언제나처럼 또 멀고 뜬금없는 소리를 했겠지. 새벽까지 희미하게 떠 있던 달만큼이나.”_p.122 <새벽까지 희미하게>

 

내 인생에도 시적 허용이라 할 수 있는 그런 특별한 경험이 기다리고 있을까. 시적 허용이라 말할 수 있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꿈꿔본다. 문득 옆을 보았을 때 새벽까지 희미하게 떠 있는 달을 함께 바라보고 있는 그런 사람을 만나기를 기대해본다. 아직 닿지 못한 관계를 설레며 상상해보는 것. 그게 또 인생이지 싶다.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정미경 작가의 마지막인 문장들을 옮겨 적은 후 읽기를 반복하다가 지금 내게 의미 있는 것들을 문장들 사이사이에 밀어 넣었다. 삶을 꿰뚫는 통찰력 있는 정미경 작가의 문장에 기대어 지금의 내 마음을 다듬어보고 싶었는데 결국은 거칠고 서툰 마음만 드러낸 꼴이 되고 말았다. 그렇더라도 정미경 작가의 문장을 천천히 곱씹을 수 있어서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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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2-06 15: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프랑스식 세탁소>의 어느 단편에 등장한
자기 살(생선회)을 뼈에 얹고 있는 생선에 대한
부분을 다른 책에서 비슷하게 다룬 것을 보고
정말 깜짝 놀란 적이 있었습니다. 생각하는 게
참으로 비슷하구나 하고 말이죠.

이제 고인이 되신 지도 어느새 1년이나 되었다고
하네요...

설해목 2018-02-06 16:03   좋아요 0 | URL
네..... 시간 참 빠르다 싶어요. 벌써 1년이라니...
작가님 마지막 단편집이라 그런지 책장이 쉬이 안넘아가더라구요.
손가락에 밟히는 문장은 예외없이 마음에도 밟히구요.
아직 정미경 작가님 책을 다 읽지는 못했는데 한권씩 찬찬히 만나보려고 합니다. ^^

프레이야freyja-고마워영화 2018-03-09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당선 축하합니다. 여동생 어서 건강 좋아지길 바래요.
정미경 작가는 저도 무척 좋아한 작가입니다.
이 책과 ‘당신의 아주 먼 섬‘을 최근에 읽고 만감이 교차하더군요.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2018-03-09 17: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3-09 17: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3-09 17:48   URL
비밀 댓글입니다.